퍼블리는 지금 아무도 없는 방에서 고개를 숙인 채 겹쳐 잡은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국 밖으로 전서구를 타고 나가다가 떨어진 퍼블리가 어쩌다 이곳에 있게 됐는지는 다음과도 같았다.

하늘에서 어린 마녀와 커다란 비둘기가 떨어지고 있길래 일단 급한 대로 마녀부터 구했는데...”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색하게 웃음을 머금은 퍼블리는 그저 눈을 옆으로 굴렸고 마녀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는

일터.”
그렇게 이곳으로 오게 됐다. 퍼블리를 데려온 마녀는 퍼블리에게 잠시 여기 있으라고 하고는 문을 열어 나갔고 퍼블리는 여기가 방금 나간 마녀의 개인 사무실 즉 왕궁 안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망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마녀가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이미 감옥에 있었을 때 만났으니 들켰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도 바쁜 왕궁 마녀가 자신을 찾아다닐 거라는 생각은 안 했고 실제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닥친 일들 때문에 까먹고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지만 퍼블리는 애써 자신을 평범한 학생이라고 꽁꽁 싸맬 변명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몰래 나가면...안 되는구나.”
슬쩍 문고리를 돌려보니 덜걱거리는 소리만 나고 열리진 않았다. 보통 방 안쪽에 있어야할 잠금장치가 없는 걸 보니 나갈 때 잠금 마법을 걸고 나간 모양이었다. 원망과 간절함을 담은 채 노려봐도 잠금 마법이 풀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아니카랑 전서구는 무사할까?”
떨어지던 순간을 떠올린 퍼블리는 그렇게나 다급했던 아니카의 표정은 처음이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아니카가 이런 생각을 봤다면 죽을 뻔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드냐며 한소리 할 테고 과연 그 때 표정은 평소처럼 웃으면서 싸늘할지 아니면 드물게 화난 표정일지 새삼 궁금해진 퍼블리는 거기서 멈췄다. 제가 생각해도 실 하나 빠진 듯한 생각이었다. 하도 겪은 일이 많아 여러 가지 압박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생각들이 이리저리 튀어나가는 것 같았다.

계속 앉아서 기다리기엔 심심했는지 퍼블리는 다시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책들이 잔뜩 꽂혀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에 써진 제목들을 읽어봤지만 전문서적이었는지 제목으로 써진 단어들도 읽기 난해하고 어려운 단어들이 가득했다. 곧장 흥미를 잃은 퍼블리가 살펴볼 만한 데는 종이가 가득한 책상밖에 남지 않았지만 꽤나 중요한 내용이 가득한 종이일 게 뻔하니 일부러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창문도 없고 일만 잔뜩 쌓아놓은 듯한 방 안에 볼 건 너무나 없었고 결국 이성보단 심심함과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잠깐만 훑어보려고 했던 퍼블리는 아예 종이를 집어 들어 집중해서 읽었다.

, 이건...”

종이에 써져 있는 내용은 장미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바로 붉은색이 아닌 다른 색의 장미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장미 개발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밸러니의 숲에서 찾아낸 하양을 바탕으로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검정. 이렇게 여섯가지 색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고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 있는 내용은 결과를 보고 관찰하는 일지 같았다. 주황과 노랑은 얼마 안 가 시들어버렸고 초록과 보라는 아직까지 변화가 없고 파랑은 아기가 태어나지 않고 씨앗을 남겼다는 내용으로 끝이 났는데 종이의 여백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퍼블리는 급하게 바로 아래 있던 종이도 집어들었는데 앞서 읽었던 종이와는 다른 글씨체로 각각의 색들 옆에 간결하게 한 단어와 한 문장씩 적혀있었다.

주황: 폐기처분 되어 찾을 수 없음.

노랑: 실패

초록: 실패

파랑: 행방을 알 수 없음.

보라: 성공

검정: 실패

하양: 파랑과 마찬가지.

파랑 부분을 읽은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제 품에 있는 유리병 위로 손을 얹었다.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아낸 느낌이었다. 나머지 종이들을 전부 살펴봤지만 어울리지 않는 단어와 처음 보는 단어가 마구 섞여있는 걸 보니 다른 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게 꼬아놓은 모양새라 더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었다.

장미 개발 계획이 이거였구나.”
어느 정도 제 예상이 맞아들은 퍼블리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멀쩡한 장미들을 파헤쳤을 왕궁 마녀들에 대한 느낌인 건가 싶었지만 조금 달랐다. 종이들을 내려놓은 퍼블리는 의자에 앉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혀있었던 실패란 건 아기가 태어나지 않고 그대로 시들어버린 장미들을 의미하는 게 분명했고 실패라고 적히지 않은 건 파랑, 보라, 하양이었다. 파랑은 퍼블리 본인이었고 성공이라고 적힌 보라는 마녀 왕국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듯 했다. 하양은 만든 거라기 보단 밸러니의 숲에서 찾아낸 최초의 다른 색 장미이니 아기가 태어날지 아닐지 알 수가 없어 과감히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보라색 장미에서 태어난 게 누굴까?”
그리고 본인은 다른 색 장미에서 태어난 걸 알고 있을까? 누구인지 알아내도 본인이 모른다면 어찌하나? 저와 같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마녀를 바로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온 왕국의 마녀들을 일일이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 전에 여기서 몰래 빠져나지도 못하는 게 현재 퍼블리의 처지였다.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던 퍼블리는 손가락 사이로 눈을 빛냈다. 역시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건 자신이랑 잘 안 맞았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아니카가 옆에 있었다면 너답다며 웃었을 거고 전서구가 있었다면 그건 아니지 하고 말렸을 퍼블리다운 답이었다. 굳이 왕국 어딘가에 있을 보라색 장미 마녀를 찾을 필요도 없이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방주인한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저 종이들 주인도 여기 방주인이 아닌가. 물론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입막음을 하려 들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은 부딪혀볼 생각이었다. 애초에 다 보이게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으니 자신이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는 순간 아까 느꼈던 꺼림칙함의 정체가 바로 눈앞으로 튀어나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볼 새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제 상관께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늘이던 마녀가 굉장히 딱딱한 얼굴을 한 채 또박또박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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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후 태어난 자가 있었다.

그 모든 걸 지켜본 이는 그를 아이로 받아들여 키웠다.

어느 정도 주변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자랐을 때 그는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를 지켜보고 키우던 이는 다 자랐을 무렵에 죄책감 가득한 비밀을 속삭이고는 스스로 눈을 감는 걸 선택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는 자신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것에 흥미가 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시작한 일은 제게 남겨진 비밀의 조각들을 모으는 거였다.

비밀을 찾고 비밀을 캐고 비밀을 간직하다보니 다른 비밀들마저 함께 그의 손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그는 각자의 비밀을 가진 자들을 알아냈고 그들을 끌어 모을 수 있게 됐으며 그들을 이용하면서 편리함을 느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흥미가 없던 그는 따분함을 없앨 의무적인 일과 동시에 편해지기 위해 그들을 이용해 비밀을 모으기 시작했고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쥐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과 비슷한 자를 만났고 한순간 위화감에서 해방됐다.

그 이후로 그는 의무감을 버리고 비밀을 취하는 걸 즐거워하며 온갖 비밀들을 긁어모았다.

그렇게 온 세상의 비밀들은 그의 앞에선 비밀이 아니게 됐다.

만족감이 조금 들어차며 비밀을 모으기 전보다 삶이 즐거워졌지만 따분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비밀 외에 흥미가 도는 건 없었다.

 

한 마법사를 만나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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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는 전서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아니카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전서구는 궁시렁거리다가 뒷마당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표정을 풀며 지붕 위로 날아올라가 앉았다. 제법 쨍쨍하지만 냉기 덕분에 덥게 느껴지지 않는 햇빛을 받으며 조금 졸고 있던 전서구는 문 열리는 소리에 퍼뜩 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퍼블리의 머리와 짐을 조금 챙겼는지 저번보단 조금 가벼워 보이는 짐가방이 전서구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짐을 들고 있는 게 퍼블리 뿐만이 아니었다.

“...넌 왜 메고 있냐?”

나도 갈 거니까.”
어디를?”
바깥을.”

“...누구랑 어떻게?”

퍼블리랑 당신을 타고.”
그 말 뒤로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아니카의 말에 전서구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등에 태우는데 한 번에 태우는 게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무슨 상관인가 애써 자기 자신을 위한 위로를 빙자한 포기를 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햇빛은 정말 쨍쨍했다.

자자 얼른 수그리세요.”
한숨과 함께 몸을 숙인 전서구의 위로 올라탄 아니카는 생각보다 부드럽다는 평을 남기며 자세를 잡았다. 퍼블리도 그 옆에 올라타며 미안하고 고맙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퍼블리까지 제대로 자세를 잡자 전서구가 날개를 퍼덕이며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광경 진짜 끝내주네~”

하늘에서 마녀왕국을 내려다본 아니카의 감상이었다. 집들이 엄지손톱보다 작게 보이고 집들보다 작은 마녀들은 안 보일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길거리로 나온 마녀들이 굉장히 많아 집들 사이로 다양한 색상들이 옹기종기 뭉쳐서 신비롭고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퍼블리는 이미 한 번 본 광경이었지만 역시 두 번 봐도 눈을 떼기 힘들었는지 아니카와 함께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데?”
...아직 안 정했는데...”
뭐여?!”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불만과 잔소리가 곧장 튀어나왔다. 퍼블리는 미안해하며 어디로 갈지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는 머리를 쥐어짜내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니카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아래의 광경을 눈에 담아두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이씨! 일단 왕국이나 벗어나야겠다! 등이랑 날개 아파서 죽겠네!!”

그렇게 투덜거린 전서구는 왕국과 바깥을 나누는 벽 너머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아래를 계속 내려다보던 아니카의 눈에 들어오는 건 이제 녹색 가득한 세상이었다. 퍼블리도 새삼 신기해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것도 잠시, 저 아래에서 무언가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날카로운 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웜머?”
아직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전서구의 의문 섞인 감탄을 시작으로 곧이어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잔뜩 쏘아져 올라오고 있었다.

웜매나?! 이게 뭣이여?! 뭣이냐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맞으면 단순히 아야하는 수준이 아닐 거라고 경고하듯 위협적이게 번쩍이며 저 아래에서부터 잔뜩 날아올라오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비행하는 전서구는 스치면서 제 깃털들을 뽑아대는 가시들에 비명과 함께 알 수 없는 말들을 섞어 꺼내며 혼란에 빠졌다. 정체불명의 가시 공격들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급하게 멈추고 돌고 위로 솟고 아래로 바로 내려가는 걸 반복하다보니 전서구의 등에 있던 퍼블리와 아니카는 타고 있는 게 아닌 매달려서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아니카!! 저거 뭔지 알고 있어?!”
제대로는 몰라도 딱 보면 원거리계 최상위 마법 중 하나인 것 같아!!”
저거 어떻게 막는 방법 없어!?”
방어막 마법 쓸 테니까 마력 쏟아 부어!!!”
전서구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순간적으로 안정적으로 있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을 때 그 틈을 타 아니카가 마법을 사용했고 퍼블리가 마력을 쏟아 부었다. 급하게 만들었지만 제법 튼튼한 방어막이 완성됐고 날아오는 가시들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두 마녀와 비둘기는 안심했다.

뭐야? 누가 공격하는 거야?!”

누구 원한 삼을 만한 일 한 마녀와 비둘기~?”
있을 리가!!”

하지만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일까, 순간 모든 세상이 빛나듯 눈앞이 번쩍이며 방어막이 깨졌다. 그 반동으로 흔들린 전서구 위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한 아니카가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자세를 낮춰서 손에 닿는 깃털들을 꽉 쥐었다. 하지만 퍼블리는 아니었다.

퍼블리!!!”
갑자기 가벼워진 제 등에 기겁한 전서구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퍼블리가 아직 눈이 부신지 눈을 감은 채 떨어지고 있었다. 전서구가 급강하를 하며 퍼블리를 향했고 다시 시야를 회복한 아니카가 바람을 잔뜩 맞으며 몸을 일으켰다.

얼른 잡아, 얼른!!”
퍼블리는 등을 마구 때리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전서구와 아니카가 굉장히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향해 내려오고 아니카가 손을 뻗는 게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느껴졌다. 마주 손을 뻗는데 제 손도 마찬가지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손들이 서로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엇갈리고 있던 그 순간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이며 시야를 빼앗았다.

다가올 아픔에 전서구와 아니카는 눈을 꽉 감았지만 그들을 때리는 건 아래로 급격히 내려가면서 맞게 되는 바람 외엔 없었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풀밭이었다. 전서구가 당황하며 급하게 멈추자 아니카는 저마저도 튕겨져 나가려는 걸 간신히 버텨냈고 다행히 전서구는 부딪히기 전에 멈췄다.

퍼블리는?!”
정신을 차린 아니카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퍼블리는 보이지 않았다. 잡지 못했으니 분명 풀밭으로 떨어졌을 텐데 보이는 건 온통 녹색 가득한 풀뿐이었다. 공중에서 피하고 급하게 내려오고, 멈추고를 반복해서 지쳐버린 전서구는 그대로 풀밭 위로 쓰러지듯 내려왔다.

퍼블리...? 퍼블리!!”

전서구의 등에서 내린 아니카는 큰 목소리로 퍼블리를 부르며 찾기 시작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가올 아픔에 대비해 눈을 꼭 감았건만 아픔은커녕 이상하게 방금전까지 잔뜩 맞고 있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아 의아해진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보이는 건 하늘이었고 고개를 눈을 옆으로 돌렸더니 풀밭이었다. 하지만 땅을 딛는 감각은 없었다.

괜찮으세요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어딘가 본 듯한 보라색 머리 마녀가 걱정스럽게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곰곰이 생각하던 퍼블리는 그 마녀가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신성지대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퍼블리를 도우러 왔던 왕궁 마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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