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라는 말에 주변의 모든 마녀들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곧이어 마녀들은 진짜 공주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 섞인 행사인가 추측하며 의견이 분분해졌다. 퍼블리와 아니카는 아무 말도 못했는데 그 목소리가 진짜 메르시라는 걸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진실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의아해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진 않았다. 다만 메르시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예상보다 그림이 너무 컸다는 게 문제였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렇게 목소리를 전달할까 정말 공주가 맞을까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거기다가 하늘까지 깨져있으니 이제 무슨 일인가 많이 혼란스럽죠?]

그 말에 모든 마녀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마녀들이 지금 가장 궁금해 하고 있을 것들을 톡톡 짚은 메르시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전하지 않다가 다시금 소란스러워질 때쯤 말을 전달했다.

[...뭐부터 말을 할지 좀 고민해봤어요. 모든 게 워낙 긴 얘기가 될 것 같고 시간이 얼마 없어서요. 우선 제가 왜 그동안 모습도 안 보이고 이렇게 목소리도 안 냈는지에 대해 얘기할게요. 저는 밸러니를 쓰러뜨릴 때 그러니까...지금은 그 날을 정화의 날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아무튼 그 날에 저주를 받고 얼마 전 하늘이 깨질 때까지 잠들어있었어요.]

그 말에 마녀들은 이번엔 다른 이유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퍼블리와 아니카는 궁금한 점을 짚어서 전달했을 때부터 메르시가 진실을 알리려는 걸 눈치 채고 마녀들 사이를 빠져나오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때 밸러니의 숲으로 들어갔던 마녀와 마법사들은 전부 저주에 걸렸어요. 그런 저주들 사이에 오히려 제 저주는 약한 편이었어요.]

약한 편이었다는 저주에 순간 퍼블리가 멈췄다. 제 옆이 텅 비어있어 돌아본 아니카가 왜 그러냐는 말을 꺼내기 전에 신발에 돌이 들어갔다고 한 퍼블리가 발을 한 차례 탁탁 구르며 다시 옆으로 갔다.

“...약한 편이었다고?”
퍼블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최근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게 약한 저주였다고 메르시가 말했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건 천진난만하게 놀고 슬픈 기색 없이 배 위에서 살아가던 흑기사단이었다. 확실히 산 채로 몸이 썩어가던 그들에 비해선 저주가 약해보인다고 할 수 있었지만 보기엔 메르시보다 더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멀리 볼 것 없이 신성지대에서 봤던 이들이 그랬다.

[일어나보니 왕국이 이렇게 커져있는 게 정말 놀라웠어요. 물론 제가 그동안 잠들어있었으니 왕궁에 있는 마녀 분들께서 해낸 일이죠. 지금 하늘이 깨져있는 건...저주와 조금 관련이 있는데 제 마력이 저주를 받은 이후론 변형이 많이 되고 상당히 증폭됐어요. 그 마력으로 만든 게 바로 저 하늘이 깨진 것처럼 보일정도로 투명한 결계인데 제가 깨어나고 마력이 다시 저한테로 돌아와서 저렇게 된 거예요. 지금 이렇게 모두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엄청난 말을 책에 있는 내용 말하는 듯이 담담하게 말하는 어투에 듣고 있던 마녀들은 자기들이 과연 뭘 들었나 싶은 표정이었다. 퍼블리는 어쩐지 하하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겨우 막고 고개를 푹 숙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 웃음 속에 담길 건 여러 가지가 가득 담긴 허탈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진짜 공주인지 모두들 모르는데다가 섣불리 믿지 못할 거예요.]

그 말과 함께 모든 게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녀들이 불안해 하며 옆에 있는 일행의 손과 팔을 잡거나 주변 건물 벽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메르시의 말과 함께 흔들림은 멈췄다.

[하지만 그동안에 이뤄진 건 제가 이룬 것도 아닌데다가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이뤄진 거니 사실 이제 공주는 있을 필요가 없어요.]

한차례 말을 멈춘 메르시가 다시 전한다.

[저희의 세대와 이야기는 이미 예전에 모두 끝났고 전 이제 제가 가야할 곳으로 가요.]

메르시의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와 동시에 금 갔던 하늘이 완전히 깨지고 소리 없는 충격이 그 아래에 있던 모든 마녀들에게 퍼졌다.

순간 어지러움에 휘청거리는 퍼블리를 아니카가 잡아줬지만 아니카도 어지러운 건 마찬가지였으니 결국 둘 다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어우..따거...”
바로 집이 코앞이었는데!”

바로 집 앞에서 넘어진 걸 통탄한 둘은 쓸리고 흙이 묻은 무릎과 손을 탁탁 털어내며 일어섰다. 하지만 들어가기도 전에 둘의 머리위에서 푸드덕 날갯짓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가볍게 퍼블리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어우 날개아파! 드디어 찾았네!”

퍼블리가 위를 바라보니 머리 위에 닿았던 게 떨어지고 짙은 파란색과 보라색이 섞여 시야를 가렸다. 부들부들한 감촉에 손을 들어 치워보니 커다란 비둘기 깃털이 눈가를 간질이고 치운 게 무색하게 바로 보이는 건 마찬가지로 짙은 파란색과 보라색이 눈앞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난 우체부지 탑승용 비둘기가 아니라고! 그 성격 더러운 마법사도 그렇고, 할배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공주도 그렇고!”
다다닥 쏘아붙이는 익숙한 말투에 퍼블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바로 이젠 웃기까지 한다며 세상 서러워서 살기 슬프다는 푸념이 바로 튀어나온다. 커다란 덩치와 날개를 이리저리 파닥이며 오두방정을 떠는 비둘기는 어제 하루 종일 하늘을 날아다닌 전서구였다. 퍼블리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희번덕거리는 전서구와 겨우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럼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공주님이 너도 모시고 왕국 나오란다! 네가 가고 싶은 데로 데려다주란다!!”

그리고는 탈거면 빨리 올라타라고 몸을 웅크리듯 숙인다. 그에 퍼블리가 반사적으로 올라타려고 하자 아니카가 잡아 세웠다.

맨몸으로 나가게?”
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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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괜찮아?”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니카를 반기는 건 팔에서부터 시작된 근육통이었다. 하루 종일 들고 다닌 것도 모자라 비록 나눴다고는 하지만 바구니를 꽤 채울 정도의 빵들을 집까지 들고 오느라 평소보다 팔을 많이 쓰는 바람에 팔 근육이 무리를 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아니카의 팔을 주물러주기까지 하는 퍼블리는 굉장히 쌩쌩해 보였다. 매일 근육이라며 놀리듯이 불렀지만 정말 제 친구는 온 몸이 근육인 게 아닌가 싶어 묘한 눈으로 바라보니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챘는지 퍼블리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어머 우리 근육이 눈치가 정말 많~이 늘었네?”
눈치고 뭐고 간에 방금 전처럼 매일 근육이라고 부르면서.”

투덜거리던 퍼블리는 그렇게 말하곤 근육통이 난 팔을 주물러주는 걸 멈추고 부엌으로 갔다. 아니카는 다시 그대로 누우면서 방문을 넘는 퍼블리를 향해 외쳤다.

얼음 동동 띄워서!”
눈을 감은 아니카의 귀에 곧이어 물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꽤 길어지는 소리에 퍼블리가 얼음을 가득 담아오려나 싶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물소리는 진즉에 끊겼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번엔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깜짝 놀란 아니카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니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물건들이 흔들리는 걸 보게 됐다. 으악!하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퍼블리가 넘어지고 컵이 깨진 듯 했다. 아니카는 저러다가 다치겠구나 싶어 얼른 일어나 가보고 싶었지만 흔들림이 꽤나 심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애써 다칠 각오를 무릅쓰고 일어났건만 제대로 다 일어서기도 전에 흔들림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틈에 아니카는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갔다.

퍼블리! 괜찮아? 안 찔렸어?”
난 멀쩡해!”

퍼블리는 다친 데가 없어보였지만 바닥은 멀쩡하지 않았다. 컵이 깨져있는 건 당연했고 물통도 함께 쏟아졌는지 바닥이 온통 물바다였다. 크게 흔들린 거에 비해선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들이 퍼블리가 들고 있던 컵과 물통뿐이었고 그 외의 물건들은 전부 멀쩡했다. 아니카는 안도와 심란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고 깨진 파편들을 줍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물을 닦기 위해 햇빛 드는 창가에다 널어놓은 빨래들로 다가가 걸레를 집어들고 부엌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창밖을 보기 전까진.

..아니카!! 하늘이 깨졌어!!”
으음? 또 깨졌어? 왕궁 쪽에서도 한 번 깨지니 관리하기 힘들었나보네? 아님 축제라서 놀다가 방심했나? 조만간 또 수리하겠네~”

아니 그게 깨진 게 저번처럼 깨진 게 아니고 하늘이 완전히 부서질 기세야! 하늘이 온통 쩍쩍 금이 갔다고!”

퍼블리의 호들갑에 얼추 다 주운 파편들을 쓰레기통에 넣은 아니카는 곧바로 퍼블리 옆으로 가서 창밖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런 미친.”
퍼블리는 호들갑을 떤 게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고 사실만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지금 하늘의 상태는 꽤나 심각했다. 용케 구멍은 안 뚫렸지만 쩍쩍 갈라진 금이 온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의 매끈한 부분이란 거의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겨우 남아있었다. 저것들이 완전히 깨져서 구멍이 뚫리면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푸른색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아슬아슬했다. 저 상황을 목격한 건 둘 뿐만이 아니었는지 집 안에 있었던 마녀들이 밖으로 나와 직접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고 있었다.

뭔 일이야?!”
미친! 하늘이 깨졌어!!”

종말이야? 종말인 거야?!”

안 돼애애애애!!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많다고오오오!!!”
상대적으로 더 날뛰는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퍼블리와 아니카는 금방 진정했다. 우선 집에 그대로 있을 건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자세히 살펴볼지 고민하다가 가위바위보로 퍼블리가 이기면 밖으로 나가고 아니카가 이기면 그대로 집에 있기로 결정했다. 이긴 건 퍼블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어.”

복잡한 건 물론이고 오늘은 원래 축제 둘째 날이었다. 첫날보다 더 돌아다니는 마녀들이 많고 행사가 다양한 날이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지니 온 거리가 혼란스러운 건 당연했으니 길거리가 복잡한 걸 넘어서 단체적인 난동수준인 건 예상한 바였다. 결국 둘은 마녀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런 곳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둘이 있었던 집 안 외에는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늘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고 마녀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계속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순간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마녀들이 그대로 굳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귀로 들린 게 아닌 머릿속에서 울렸고 혹시 자신한테만 들렸나 싶어 힐끔거리며 옆에 있는 마녀를 보는 마녀들부터 너도 들었냐며 같은 일행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마녀들까지 조금씩 나타나고 움직이며 곧이어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이로써 한 마녀만이 아닌, 적어도 밖으로 나온 모든 마녀들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목소리 전달 마법을 한 마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목소리를 들은 마녀들은 모두 놀라워하거나 감탄했다.

[아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오랜만에 써보거든요. 혹시 들리나요?]

그 말에 마녀들은 마법을 쓴 당사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어찌해야하나 눈만 굴리고 있거나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계속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확인하던 목소리는 난감한지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들려요!”
그러다가 한 마녀가 소리쳤고 그 마녀를 시작으로 하나둘 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마녀들이 소리치게 됐고 열 번쯤 반복했을까 드디어 닿았는지 이번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머금은 어린 마녀의 목소리에 몇몇 마녀들은 미소를 지었지만 다른 마녀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게 단순한 마법이라도 이렇게 다수에게 거는 건 어른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목소리의 주인이 궁금증을 풀어주듯 바로 말을 전달한다.

[그럼 이제 제 소개를 할게요. 제 이름은 메르시, 이 왕국의 공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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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마녀들이 퍼블리 앞을 지나가면서 시야를 가린 덕에 그대로 잘못 본 거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녀들 사이 틈을 비집고 다가가보니 메르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똑바로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 바로 다가선 퍼블리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메르시를 보고 있었을 뿐이고 메르시는 그저 웃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쪽은 태평하고 한쪽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시선교환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니카는 결국 가까이 다가와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리 근육이 새로운 친구 있었구나? 그래서 누구야? 얼른 새 친구 소개시켜줘.”
하지만 질문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카에게 공주에 대해 얘기는 했었지만 그 공주가 어떻게 생겼느냐 공주의 이름이 무엇이냐 세세하게 말하진 않았었다. 지금 아니카가 공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자기들보다 더 어리고 계속 잠들어있어서 더 자라지 않은 어린 마녀라는 거 외엔 없었다. 그렇다고 길 한복판에서 공주라고 속삭이면 되지 않을까 해도 당사자인 메르시가 섣불리 다른 마녀에게 제 정체를 밝혀도 된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어쩌다 알게 됐다고 얼버무리기엔 어쩐지 미안했고 눈치 빠른 아니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퍼블리보다 메르시가 한 발 더 빨랐다.

저는 메르시예요. 저번에 퍼블리 언니가 저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왔어요.”
아니카는 그렇구나 하고 얌전히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여기 다른 마녀가 있었다면 둘이 얘기 나누라고 물러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퍼블리는 깨달았다. 돌아보자 바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니카와 짧은 시선교환을 나눴다.

눈치 챘구나.

눈치 챘어.

다시 메르시를 본 퍼블리는 무릎을 살짝 굽혀 메르시와 눈을 마주했다. 메르시는 바로 퍼블리에게 다가가 새어나가 누군가가 들을까 바로 손을 모아 작게 속삭였다.

찾다가 지치면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요. 어쩌면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르거든요.”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메르시는 바로 뒤돌아 마녀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릎을 다시 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보고 있던 퍼블리의 정신을 되돌린 건 어깨를 툭툭 두드린 아니카였다.

그래서 뭐래?”
피리가 비밀상자 열쇠래.”
다시금 몰려오는 마녀들의 물결에 퍼블리와 아니카는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 빵을 만든 마녀들이 바구니채로 나눠주는 빵들을 받아들었다. 빵을 하나 꺼내 먹던 아니카는 저기 마녀들이 빵을 받고 있네라는 어투로 말을 꺼낸다.

공주님이 큰 그림 그리고 있었던 걸로 다시 잠들었나 아님 탈출했나 궁금했던 건 해결됐네.”

물론 그 큰 그림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퍼블리는 대답 대신 빵에 입을 넣었다. 아니카도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퍼블리가 다섯 번째 내밀어지는 빵바구니를 거절할 때쯤 머리 위에서 크게 푸드덕 날갯짓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까 하늘에서 봤던 전서구가 이번엔 반대편으로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퍼블리는 새삼 저렇게 바쁜 비둘기를 붙잡아서 태워달라고 했구나 싶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편지길래 축제 때에도 저렇게 바쁠까?”
축제라서 더 바쁜 거 아닐까?”

축제는 작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기묘한 묘기를 선보이는 마녀들과 날아드는 비둘기들. 저 한구석에선 색깔열매를 이용해서 구운 빵들이 눈길을 끌고 있었는데 저마다 화려한 색을 자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지개 빵이었다. 화사하고 화려해서 그 길을 지나가던 많은 마녀들이 무지개 빵을 집어 들었지만 퍼블리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다.

자꾸 얘기 꺼내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그래서 왜 추억이 빵인지 혹시 이유 알아냈어?”
때마침 빵을 넘기던 퍼블리는 그대로 사레가 들릴 뻔 했다. 함께 빵파티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 흑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장소가 장미정원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카가 주는 사과주스로 겨우겨우 진정한 퍼블리는 그대로 말해줬다.

근데 오히려 반대일 것 같은데?”
반대?”

원래 집 앞마당이었는데 가져오는 장미들 둘 데가 없어서 장미정원이 거기까지 넓어진 거 아냐?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장미를 모았다고 선언한 게 50년이 안 지났어.”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공주는 물론이고 다른 얘기들도 꺼내지 않았다. 여전히 바쁘게 날아다니는 전서구가 그림자로 제 존재감을 여러 번 드러냈지만 둘은 그 때마다 올려다보고 동시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대회에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기로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그랬듯이

비둘기판이네.”
깃털 떨어진다~!”

대회용으로 나온 빵들에 날아드는 비둘기무리와 그런 비둘기들을 손을 흔들어대며 내쫓는 만든 마녀들, 그리고 역시나 하면서 웃음 반 진부함 반에 뒤를 도는 관객들. 진행자는 이제 포기했는지 비둘기들도 이렇게 날뛰는 빵들이라며 빵의 위험성이라는 농담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 광경들을 옥수수 튀긴 것 대신 빵을 씹으며 구경하고 있던 퍼블리와 아니카는 폭신하고 매끈한 감촉이 아닌 까끌까끌한 감촉에 손을 바라봤다. 어느새 바구니는 텅 비어있었다.

더 받으러 갈까?”
아니카는 여전히 바구니째 나눠주는 마녀들을 가리키며 물었고 퍼블리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견과류나 옥수수가 박혀있는 빵들을 받아온 아니카는 마실 것도 찾으러 가자며 앞장섰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술을 내놓는 곳은 없었고 음료수는 꽤나 다양했다.

새삼 생각했는데 그 많은 추억 중에 빵파티가 뽑힌 건 역시 첫째 날은 잔뜩 먹어서 남은 축제를 버티라는 거 아닐까?”
가장 설득력 높네.”
그렇게 해가 지기 전까지 둘은 돌아다니면서 먹고 구경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 둘은 남은 빵을 나눠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퍼블리는 오늘 축제가 재밌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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