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옆이었네요?”
하하 웃던 퍼블리는 눈물을 삼켰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거에 대한 눈물이었을까, 바로 옆으로 올 때쯤에 겨우 모드를 부르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에 허무함이었을까. 비틀거리는 퍼블리에 어디 아픈가 싶어 뒤에서 치유마법과 회복마법을 복합적으로 쓰는 모드와 그걸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둘을 번갈아보는 마법사. 여기서 먼저 자리를 뜬 건 마법사였다. 모드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퍼블리는 들어가면서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방 밖에서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모드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었고 모드는 말 없이 퍼블리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퍼블리는 바로 후회했다.

모드씨라고 불러도 되나요?”

.”

...보라색 장미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모드는 정말 대답만 했다. 먼저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말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방에서 들어온 이후론 문을 등 뒤에 두고 서서 계속해서 퍼블리만 보고 있었다. 퍼블리가 자신이 앉을 의자 말고도 다른 의자를 끌고 와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고개와 눈동자만 돌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니 앉았지만 퍼블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돌리지 않았다. 짙어지는 어색함에 결국 퍼블리가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궁금한 걸 물어보기 위해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그게 지금 상황이었다.

혹시 다른 색 장미들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그걸 만든 이유나 짐작은 가지만 왕궁에서 왜 비밀로 했었는지.”

퍼블리가 궁금해 하는 걸 들은 모드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가 한 번 눈을 깜빡이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질문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까 맨 처음 방에 있을 때 책상에 있는 걸 읽어버려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모드는 담담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왕궁에서 다른 색 장미를 만든 이유부터 설명 드리자면 표면상의 이유는 자연 발생하는 장미를 모을 수 없으니 안정적이게 장미를 모으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이유는 밸러니의 숲에서 얻게 된 하얀 장미를 분해하고 숲의 마력 파악 및 기존의 장미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을 하다가 색이 바뀌는 걸 보고 본격적인 실험을 하고자 입니다.”

물론 내용은 담담하지가 않았다. 왕궁에 있었던 마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숲에서 받게 된 저주를 풀기 위해 하얀 장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였다면 이해가 갔지만 그걸 장미에다가 갖다 대는 경우는 대체 뭔가 싶어 퍼블리는 분노보다 황당함을 먼저 느꼈다.

감춘 이유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들이 발표를 하기 전에 파란 장미 씨앗과 함께 계획을 써놓은 종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퍼블리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건 메르시의 방 서랍에 있었던 종이뭉치였다.

그러면 왕궁에서 숲의 마력을 파악하려고 한 이유는 정화의 날 때 숲에 있었던 자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인가요?”

아닙니다. 하얀 장미를 발견한 건 정화의 날이 일어나기 훨씬 전입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 그들은 왕궁의 마녀라기 보단 마법사와 함께 탐험을 위해 단체적으로 모인 집단이었습니다. 제법 실력이 있었던 자들이라 왕궁에서도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보를 예전에 찾았습니다.”

이쯤 되면 퍼블리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읽었던 역사책은 진실을 얇게 올려놓은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일단 약새풀이 자라는 데가 점점 넓어지는 걸 발견하고 정화하기로 마녀와 마법사들이 정했다고 했다. 하얀 장미는 정화의 날이 일어나기 전보다 훨씬 앞섰다고 했으니

그럼 약새풀이 자라는 데가 넓어지게 된 게 그 하얀 장미를 가져온 이후인 건가요?”

.”
만약 여기 아니카가 옆에서 같이 듣고 있었다면 웃으면서 정말 미쳐 돌아가고 있네라며 독설을 날렸을 거다. 당장 축제 한복판에 가서 외쳐도 마녀들이 쉽게 믿지 않을 엄청난 진실들에 머리가 멍해진 퍼블리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었지만 곧이어 또 잊고 있었던 거에 대해서 외쳤다.

맞다, 아니카랑 전서구!”
그 둘은 지금 바다로 가고 있습니다.”

착실하게 대답한 모드의 말에 퍼블리가 바로 떠오른 건 배 위에서 생활하던 흑기사단이었다. 흑기사단에 대해선 역사책과 퍼블리의 얘기로만 들었던 아니카였으니 그 둘이 거기로 가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퍼블리는 브레이니의 책을 끌어안으면서 울던 메르시가 떠올랐다.

모드씨가 저를 데려오기 전에 갑자기 공격을 당했었는데 혹시 누가 공격했었는지 보셨나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눈을 감은 모드는 퍼블리가 세 번 눈을 깜빡였을 때쯤 다시 눈을 떴다.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대답하자마자 오른쪽에서 빛이 번쩍였는데 모드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꺼내드니 빛이 꽤 눈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수정구가 나왔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고개를 숙인 모드는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퍼블리는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침대 바로 옆에 집에서 챙겨왔던 짐 가방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걸 들어 올려 가방을 열어보고 짐들 사이를 뒤적이던 퍼블리는 메르시가 준 피리를 꺼냈다.

아니카가 거기로 간 이유는 아마 이거 때문이겠지?”
피리를 꺼내 든 퍼블리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지금 불어볼까 말까. 비밀의 열쇠가 될 거라고 메르시가 말했고 불고 나선 어떻게 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불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치트가 마법사의 행방을 같이 찾겠다고 했고 아까부터 계속 묘하고 익숙한 느낌이 드는 마법사가 신경 쓰여 아직은 여기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큰 퍼블리는 언제든 불 수 있게 피리를 계속 들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 맞다. 모드씨한테 그 분 이름 물어볼걸.”
사실 당사자가 알려주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는 걸 억지로 묻거나 알아낼 생각은 평소라면 들지 않았겠지만 그러기엔 퍼블리의 감이 이상하게 그 마법사가 누군지 기억해 내야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색도 눈 색도 그렇고 동글동글한 얼굴과 분위기를 보면 예전에 만났어도 바로 떠오를 텐데 이정도로 안 떠오른다면 처음 보는 거나 다름없고 그런데도 익숙한 게 너무나도 이상했다.

대체 누굴까? 이름을 꼭 듣고 싶은데.”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던 퍼블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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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도 처음 보는 마법사니 퍼블리는 공손하게 인사부터 했다. 그러자 마법사의 표정이 아까 봤을 때보다 더 이상해졌다. 퍼블리는 아까 처음 봤을 때 인사를 안 하고 두 번째에도 안 해서 화가 났나 싶었지만 바로 나온 말을 보면 인사 때문이 아닌 걸 깨달았다.

아직 어른도 안 된 마녀 같은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퍼블리는 그저 하하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마법사도 굳이 알아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지 혀를 차며 이걸 어찌해야하나 하는 눈으로 퍼블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이름 물어봐도 되나요?”

아니. 내 이름 비싼 이름이다.”

혹시나 만났는데도 한 번 만나서 기억을 못하는가 싶어 물어봤는데 단호하게 이름 밝히는 걸 거부한 마법사에 당황한 건 퍼블리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어, 네 하고 자리를 뜨려던 퍼블리를 잡은 건 뒤를 이은 마법사의 말이었다.

그 썩은 배추머리 녀석이 가장 많이 불리는 별명이 비밀 상인이다.”
?”

그만큼 모르는 게 없고 허투루 정보를 안 준다 이 말이지.”
퍼블리가 기댔던 벽에 이번엔 마법사가 기대면서 팔짱을 꼈다. 미심쩍다는 듯 반쯤 뜬 눈으로 퍼블리를 바라보던 마법사가 덧붙였다.

그런데 그 새...녀석이 나랑 그 보라머리한테 명령하길 네가 궁금해 하는 건 아는 만큼 알려달라는 거였지.”

마법사가 말하는 바가 무언지 눈치 챈 듯이 눈을 깜빡이며 바로 물었다.

이름 가르쳐주세요!”

그거 말고! 의심을 하라고!”

퍼블리는 또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의심을 하기엔 워낙 아빠한테 달라붙었던 치트가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이 상황은 아빠도 찾을 겸 자신한테 점수따기인가 짐작한 퍼블리는 깜빡하고 잊고 있던 걸 떠올려냈다.

아 그럼, 다른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마법사는 퍼블리가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퍼블리는 애써 무시하며 여기에 왔을 때 책상에서 보게 된 종이 내용을 말했다.

왕국이 다른 색 장미를 만들어냈고 보라색 장미가 성공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아아, 그거? 그 보라머리가 보라색 장미에서 태어난 마녀라서 그래.”

퍼블리의 말을 들은 마법사가 바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펜을 책상위로 툭 던지듯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놓았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은 퍼블리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 이번엔 마법사가 물었다.

그보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잔뜩 쌓여있길래 복도 한가운데서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냐?”

그냥...개인적인 거예요.”
티가 많이 났구나 싶어 민망해진 퍼블리는 고개를 숙였다. 마법사는 이번엔 다른 표정을 지었지만 퍼블리는 볼 수 없었고 마법사도 퍼블리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크게 한숨을 쉰 마법사에 퍼블리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째선지 고개를 다시 들 때를 놓친 것 같았다.

나에 대해선 말해줄 수 없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 솔직히 그 보라머리 정말 물어본 것만 대답해서 답답할 거다.”
. 그럼...”

퍼블리는 그대로 뒤돌아서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시선이 아직 느껴졌지만 돌아보기엔 이상하게 껄끄러웠다.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돌아보니 텅 빈 복도가 눈에 들어왔고 퍼블리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내가 아까 어떤 방에서 나왔지?”
방들은 방문에 써져있는 번호들을 제외하면 다 똑같이 생겼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문을 열 때 세게 문고리를 세게 돌렸는지 조금 내려가 있거나 아님 별로 많이 열었던 문이 아니었는지 아직까진 반질반질한 문고리였거나. 퍼블리는 난감한 얼굴로 아까 나왔던 방의 번호를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자신을 안내했던 모드의 등만 보거나 방을 나올 때 돌아서서 방 번호를 확인한 기억은 없었다. 결국 퍼블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방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너 뭐하냐?”
283이 써져있는 문을 54번째로 두드렸을 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고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역시 아까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던 이름 모를 마법사였다.

그게, 제가 나온 방이 어떤 방인지 모르겠어서...”
이번에 마법사가 지은 표정은 퍼블리도 제대로 봤다. 그리고 아까처럼 묘해서 못 알아볼 표정도 아니었다. 황당함을 가득 담긴 눈빛이 설마 계속 문을 두드려왔냐고 묻고 있었고 퍼블리는 또 민망함에 하하 웃었다.

무식하게 그러고 있었어?”

하지만 복도를 지나다니는 분들이 없었는걸요.”

분명 치트가 있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엔 마녀는 물론이고 마법사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복도를 꽉 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열 걸음 지나다니다보면 세 명은 만날 정도로 있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눈앞의 마법사를 제외하면.

그거 말고, 썩은 배추가 너한테 보라머리 붙여놨잖아.”
아까부터 마법사가 치트를 썩은 배추라고 하니 퍼블리는 자기도 모르게 치트를 만날 때 자신도 마법사처럼 썩은 배추라고 부르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하면서 웃음을 꾹 참았다.

, 보라머리! 나와 봐, 얘 방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잖아!”

마법사가 그렇게 외쳤지만 마녀는 물론이고 보라색 머리끝도 보이지 않았다. 와락 얼굴을 찌푸린 마법사가 퍼블리에게 불러보라고 시켰다. 퍼블리는 아무도 없는 복도인데다가 혼자 두고 왔는데 과연 지금 자신이 부른다고 나타날까 싶어 조심스럽게 모드의 이름을 불렀다.

모드씨?”
부르셨습니까.”
바로 퍼블리의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퍼블리가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드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퍼블리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퍼블리는 크게 뜬 눈을 꾹 감은 채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모드에게 물었다.

제가 있었던 방이 어디 방인지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다시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들은 모드는 바로 제 옆의 284가 써져 있는 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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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오셨슴다?”
그럼 늦게 오길 바랐냐?”
까칠하게 대꾸한 그 마법사는 어쩐지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는다는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툭 책상 위로 던졌다.

다 찾아왔다. 이딴 걸로 부려먹지 마.”

다음에도 부탁함다~”
몸을 돌리며 나가려고 했던 마법사가 손을 들다가 퍼블리와 눈이 마주치고 멈췄다. 한숨과 함께 썩은 배추라고 중얼거리곤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묘한 느낌에 닫힌 문을 계속 보고 있던 퍼블리는 끊어졌던 얘기의 뒷부분을 마저 이어서 말하는 치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퍼블리님을 데려오라고 모드양한테 부탁했죠.”

그렇게 말한 치트는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퍼블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패치는 잘 지냈나요?”
그에 퍼블리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지금 마법사가 잘 지내고 있는지 가장 궁금한 건 바로 퍼블리였다. 그런 퍼블리의 생각을 모르는지 치트는 이젠 기대가 가득한 걸 넘어서 아련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르겠어요. 사실 저도 아빠를 찾으려고 나오다가...”
마녀 왕국으로 오게 된 이후론 밖으로 잘 나가지 않던 마법사.

작년 축제 때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왜 사라지셨는지 잘 모르고 일단 무작정 찾고 있고...”

여름에도 늘 한겨울보다 두껍게 입고 다녔던 마법사.

마지막 옷차림은 어...엄청 두껍게 입으셨고 모자를 썼었고 그리고, 그리고...”
약새풀의 냉기는 분명 강하지만 한여름에도 시원한 정도였는데 늘 두껍게 입고 다녔던 마법사, 그리고 그 약새풀을 비밀로 하던 마법사, 모든 비밀을 다 묻어버리고 말해주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 마법사.

“...?”
몇 번을 다짐해도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 때마다 퍼블리는 발밑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맞잡은 손이 서로 차갑게 느껴진다고 생각했을 때 그 위로 빳빳한 감촉이 느껴졌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검은 손이 올라와 차가워진 퍼블리의 손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덮은 손도 그리 따뜻하진 않았다.

?”
그동안 계속 패치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제가 도와드리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지 않겠슴까?”
아니, .......”
그러니 여기 며칠 머물러계십쇼. 얘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일이 너무 많아서 나중으로 미뤄야할 것 같네요. 그러니 여기 머무르면서 기다려주시면 되겠슴다. 모드양~?”
이제 이름을 알게 된 왕궁 마녀가 치트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왔다.

퍼블리님이 머물 방으로 안내해주십쇼. 그리고 무언가 필요하다면 모드양한테 말하시면 됩니다~”

퍼블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다른 방이었고 혼자였다. 갑작스럽고 빠른 진행상황에 당황한 퍼블리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니카랑 전서구와 함께 왕국을 빠져나오던 도중 공격을 받아서 떨어지고 이중으로 일하는 왕궁 마녀한테 납치 아닌 납치를 당했고 그걸 시킨 상관이 여기 와서 만난 게 예전에 아빠한테 구애하던 마법사였는데 어쩌다보니 아빠가 사라진 거에 대해서 얘기까지 했고 자신도 돕겠다며 여기 며칠 있으라고 왕궁 마녀를 시켜 방까지 데려다줬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건 아니고 어찌 보면 우연과 인연이 마주쳐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퍼블리는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상황보다는

왜 이렇게 그 아...치트씨가 어...색하지?”
아저씨라고 할 뻔 하다가 치트씨라고 하며 몸서리치던 퍼블리는 마법사에게 반했을 때에 대해서 얘기하고 묻고 마지막엔 도와주겠다고 한 치트를 떠올리고 아주 옛날 마법사한테 시도 때도 없이 다가가려고 했던 치트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 기억 속의 둘은 마법사 앞에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지금의 모습은 무척 어색했다. 중간에 마법사가 없고 단 둘이 있었던 적은 아까 전을 제외하면 마법사가 아파서 누웠을 때 치트가 마법사 대신 어렸던 저를 재웠을 때였다. 그래도 그 땐 마법사가 아파서 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때라 그랬었는지 제대로 인식도 못했었다.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가? 내가 엄청 자라기도 했고...”
아직 궁금한 게 남았고 여기 머무르는 동안 도와준다고 했었으니 여러 번 보러 가게 될 건데 만날 때마다 어색해할 순 없으니 계속해서 괴리감을 없애려고 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없어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퍼블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상상 속에 마법사를 끼워 넣었다.

마법사에게 엉겨 붙는 치트와 그걸 밀어내는 마법사. 여기까지는 쉽게 상상이 갔다. 그리고 그 옆에 퍼블리가 멀뚱히 서 있었다. 다시 옛날의 기억으로 상상을 덧칠하니 어린 퍼블리가 둘 사이로 뛰어들어 마법사한테 딱 달라붙고 치트는 입술을 삐죽이며 마법사를 끌어안으려고 하지만 어린 퍼블리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한숨인지 픽 흘러나오는 웃음인지 모를 걸 흘리던 마법사가 어린 퍼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시점에서 다시 지금의 퍼블리를 덧칠했다.

내가 많이 자라버렸구나.”

지금의 퍼블리는 어린 퍼블리처럼 둘 사이로 뛰어들지도 않았고 마법사한테 딱 달라붙지도 않았다. 그저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둘을 보고만 있었다. 우선 예전의 흉내라도 내고자해서 다가가니 치트가 퍼블리를 발견하고 마법사 좀 빌려가겠다며 능글맞게 웃고는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예전이랑 달랐다. 다시 흉내를 내서 안 된다고 외칠까 싶었지만 상상 속의 퍼블리는 멈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안 돼?

“...모르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퍼블리는 그대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식혀야하는 게 우선이라 무작정 방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왕궁 마녀, 모드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하고 묻자 퍼블리는 멍한 눈으로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바람 하나 불지 않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무작정 걷고 있던 퍼블리는 얼마 안 가 멈춰서 벽에 기댔다. 그냥 모든 게 멍했다.

.”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르자 화들짝 놀란 퍼블리가 돌아보니 머리색처럼 쨍하게 빨간 눈과 마주쳤다. 아까 봤던 묘한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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