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방에 혼자 있게 된 퍼블리는 체할 것 같은 얼굴로 그릇을 내려다봤다. 마녀나 마법사나 엄청난 얘기들을 꺼내고 간다. 마녀는 퍼블리가 물어보니 대답한 거였지만 마법사는 갑자기 들어와서는 자장가 대신 옛날얘기 들려준다는 듯이 말하고는 휙 가버렸다. 퍼블리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먹고 체해서 한동안 일어나지 말라고 심술부리고 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빠...아빠한테 구애하는 마법사가 너무...”
퍼블리는 제 옆에 없는 아빠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퍼블리의 머릿속에서 마법사는 그런 엄청난 자가 구애를 해도 제 시간 방해 말라며 귀찮다는 얼굴로 거침없이 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렇게 상상을 마친 퍼블리는 안심하며 그릇을 내려다봤다. 포크를 들어 고기를 찍고 먹기 시작했다. 빵과 야채도 먹으면서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사레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하지만 어투는 전혀 아니었다. 학교에서 책 읽는 것보다 더 감정 없고 딱딱했다. 퍼블리는 콜록 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번 들린 사레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지켜보고 있던 모드는 손수건을 건넸다. 퍼블리는 평소에 들고 다니지도 않아서 별로 쥐어본 적도 없는 손수건을 오늘에서야 받으면서 쓰게 됐다. 그것도 두 번이나.

...언제 들어오신 거예요?”
겨우 진정한 퍼블리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물어봤다.

빵을 드시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그게 언젠지는 퍼블리도 몰랐다. 할 말을 잃은 퍼블리는 빵 하나를 들고 건네봤다.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정중한 거절에 퍼블리는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모드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부담스러워져서 더 먹는 걸 그만뒀다. 대놓고 말할까 고민했지만 알았다며 시선만 다른 데로 옮기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어색한 상황은 여전할 것 같아 퍼블리는 어찌해야하나 고민했다. 아까처럼 또 질문만 하기엔 너무 그런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질문해서 듣게 됐더라도 들은 비밀들이 꽤나 커서 과연 계속 물어봐도 될까 싶은 마음이 망설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티 많이 났나요?”
모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제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속으로만 생각해도 표정으로는 전부 다 나타났었나보다.

고민...이라기보단 모드씨도 저한테 궁금한 게 있나요? 저만 계속 물어보다보니 좀 미안해서요.”
궁금한 건 없습니다. 질문하는 거에 대해선 이미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부담이 바로 사라지진 않았다. 있는 대로 혹은 모르는 대로 궁금한 걸 물어보려고 다짐했었지만 막상 알고 보니 굉장한 부담감이 퍼블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그래도 궁금한 게 없으세요?”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매우 단호했다. 결국 물러난 건 퍼블리였다. 이번엔 질문 말고 알고 있는 재밌는 얘기라도 꺼내서 대화를 이어나갈까 고민하던 중 또 까먹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은 데에는 그냥 잠깐 불쑥 튀어나온 심술이 아니더라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고민을 더 키우고 있었다.

아까 봤던 그, 주황머리 마법사씨는 이름이 뭐예요?”
호기심은 눈앞의 불길도 달려갈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 있었다. 퍼블리는 계속 마법사씨 혹은 주황머리씨라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 이름을 듣기로 결심했다. 절대 호기심이 먼저가 아니라고 연신 생각하며.

아난타입니다.”
대답을 들은 직후 퍼블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드는 없었다.

 

요란스럽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온 사방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리의 원인은 발걸음이었는데 꼭 방망이로 이불 먼지를 털어내듯 힘차게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걸음 속에 있는 건 힘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한 불만이 가득했다. 불만 가득하고 요란한 발걸음이 멈춘 건 목적지 앞에서였다. 깊게 들이쉬는 숨소리와 함께 문을 벌컥 열었다.

X발 썩은 배추머리 새끼야 나랑 갈등을 제대로 빚어보자 이거냐? 오늘 헛걸음을 여러 번 시키는 걸 보면 넌 내가 왼발 오른발 땅 밟은 숫자 다 합한 만큼 처 맞고 싶다 이거지?”

가만히 말을 듣던 치트는 싱긋 웃었다.

피차 욕 하는 것도 듣는 것도 힘들 텐데 그만 두시죠?”
난 안 힘들거든? 네놈새끼가 힘든 거지.”
연기를 그만두라는 얘기였습니다.”
마법사는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안 그래도 험악함을 가득 담은 눈을 더 흉흉하게 치켜떴다. 만약 지금 논점 벗어난 헛소리를 하는 거라면 사지를 다 으깨놓는 거로는 끝나지 않겠다는 기색이었다. 그 흉흉한 기색에도 치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 진지합니다. 아까 손님 앞에서는 욕을 하나도 안 썼잖아요?”
그럼 애 앞에서 욕을 찍찍 뱉으라고? 그것도 네가 그렇게 딸기딸기 노래를 부르면서 싸돌고 다니는 마법사 애 앞에서?”
당신이 언제부터 애 앞에서 욕 쓰는 걸 신경이나 썼습니까? 게다가 답지 않게 제 기분을 배려해주시다니 이것 참 오랫동안 같이 일한 보람이 있다고 입 바른 말이라도 해야함까?”
네 놈 기분 배려한 게 아니라 애를 배려한 거다 애를! 그리고 내가 애 앞에서 쌍욕을 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 쓰는지 네놈새끼가 어떻게 알아?!”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그 순간 미끼를 문 사냥감을 건져 올린 환희가 잠깐 요동쳤다.

저는 그 손님이 패치의 아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노란 빛이 순식간에 가늘어져 마치 날카롭게 꿰뚫는 촉으로 변했다.

당신은 분명 안경 쓸 때를 기억하지 못 했잖습니까?”
그 안경은 저주를 약화시켜주는 역할을 했으니까.

마법사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찌푸린 표정도 흉흉함을 담던 눈빛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마법사가 눈을 감았다 뜨니 머리와 눈이 검게 변했다. 안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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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 깬 이후 멍하니 눈만 뜨고 있던 퍼블리는 천천히 일어났다. 손이 살짝 저렸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피리를 쥐고 있던 손이었다. 자는 내내 꽉 쥐었는지 손을 펴보니 빨간 자국들이 길게 남아있었다. 퍼블리는 자신이 얼마나 잤는지 궁금했지만 곤란해졌다.

창문 없는 방 안은 밝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았다. 잠을 자는데 빛에 예민하지 않다면 바로 잠들 수 있고 책등에 써진 책제목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문제는 지금 밖에 햇빛이 떠있는지 아님 져버렸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시계도 없어서 더 곤란했다.

퍼블리는 또 밖으로 나가볼까하다가 아까처럼 또 길을 잃으면 어떡하나 싶어 고민했다. 마법사가 말해주고 아까 했던 대로 모드를 부를까 싶었지만 가봐야 한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 엄청난 비밀들을 모으는 걸 보면 하는 일이 굉장히 바쁘고 힘들 텐데 괜히 부르는 게 아닌가 싶어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일어났던 퍼블리는 결국 다시 침대 위로 앉았다.

그보다 대체 무슨 꿈이야?”
무지개가 나오는 꿈을 꾸면 그 날 운이 좋거나 간절한 만남이 생긴다는 말을 들어봤는데 꿈이 정말 난데없었다. 무지개는 무난했지만 바닥이 무너지고 호수에 빠지는 건 꿈이어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특히 호수에 빠질 땐 바로 앞에 마법사를 두고 빠져버렸으니 더 안 좋았다.

퍼블리는 천천히 꿈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얀 공간과 까만 바닥은 전혀 모르겠으니 무지개를 따라갔던 부분부터 생각해봤다. 퍼블리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 위로 손을 올렸다가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둥근 감촉에 움찔 놀라 손을 거뒀다. 작년 축제 이후로 계속 서랍 안에 넣어놓다가 이번에 집을 나오면서 차기 시작한 팔찌였다. 돌조각 장식에 새겨진 얼음꽃무늬가 처음 얻었을 때처럼 새하얗게 눈길을 끌었다. 그 얼음꽃무늬와 뒷마당의 냉기 뿌리던 약새풀이 묘하게 겹쳐보였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고 호수에 빠지고...”
호수 밑바닥이 제일 의문이었다. 처음 듣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익숙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주 들은 적 없는 목소리였다. 퍼블리는 모습도 모르고 목소리도 익숙하지 않은 그 자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퍼블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퍼블리의 이름을 불렀다. 더군다나 메르시도 알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
누군지 전혀 몰라 답답한 마음에 기지개를 켜며 다시 일어나던 퍼블리는 그대로 굳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 바로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퍼블리를 보고 있던 자가 있었다. 아까 헤어졌던 마법사였다.

멋대로 들어온 건 미안한데 문을 다섯 번 두드려도 반응이 없길래 일단 들어왔다.”

심드렁하게 대답한 마법사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퍼블리에게 내밀었다. 그 위엔 빵과 우유, 고기와 야채들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다.

좀 늦긴 했지만 저녁이다. 여기 갑자기 끌려온 이후론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 아냐.”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머리 위로 쭉 뻗었던 팔을 쟁반을 그릇을 받아들며 내린 퍼블리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지개 켰던 게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누워서 중얼거리는 걸 누군가가 본다면, 그것도 처음 보는 자가 본다면 누구라도 어색해질 거라고 생각한 퍼블리는 우유부터 마셨다.

보라머리한테 어느 걸 어디까지 들었냐?”
?”
다행히 마시던 우유를 다 넘긴 터라 사레가 들리진 않았지만 병을 들고 있던 손이 흠칫 놀라 우유를 조금 흘렸다. 그걸 보고 있던 마법사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퍼블리는 병을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하얀 장미? 그리고 그...탐험대들이 발견했다고...”
퍼블리는 본인도 모르게 마법사 앞에서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네가 들어도 그거 단순히 옆자리 친구한테 너만 알고 있어 하면서 귓속말로 해주는 비밀 수준이 아닌 거 알고 있지?”
퍼블리는 속으로 뜨끔했다. 비밀이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들었을 때 아니카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지? 그 보라머리는 정말 묻는 것만 답한다고. 그 탐험대가 가서 훔쳐온 건 하얀 장미뿐만이 아니야.”
하얀 장미로도 충격적인데 뭘 더 훔쳐온 걸까. 퍼블리는 아연한 얼굴로 마법사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라는 시 알아? 그 시가 적혀있는 수첩을 훔쳐왔어. 수첩 주인은 당연히 모글리제였지. 그 수첩 안에 로메루와 밸러니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있었어.”

셋이 아주 징글맞게 붙어 다녔는지 엄청 세세하게 써져있다고 말하며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법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옛날 얘기 꺼내주듯 말을 이어갔다.

걔네들이 수첩이랑 하얀 장미 들고 나온 후로 자기네 탐험대 이름을 지었는데 모글리제라고 지었어. 도둑질한 수첩 주인 이름을 무슨 생각으로 붙인 건지 난 모르겠다. 그 수첩처럼 세상에 숨겨져 있는 엄청난 비밀들을 다 얻어놓기 위해서라면 진짜 웃긴데 말이야.”

빈정거리는 말과 함께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사악해보이기도 하는 그 비웃음이 마법사에겐 굉장히 잘 맞았다.

그렇게 잘~가다가 어쩌다 자기네들끼리 분열이 났는지 수첩 중에서 그 시가 적힌 부분이랑 그 외 다른 부분이 찢어져서 사라졌고 하얀 장미도 사라졌고 마법사 몇은 어디론가 잠적타고 마녀 몇도 잠적타는가 싶더니 왕궁 마녀가 되어있었더라. 걔네들이 엄청난 엿을 먹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주 대단해. 하얀 장미랑 그 찢은 종이들 가지고 가서 장미는 색깔 다양하게 만들어보려고 하고 종이는 모글리제라는 친구 까발리고 시도 까발리고~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라는 요상한 무늬 만들어서 옷에 찍어가지고 팔고~ 남은 녀석들은 당연히 우왕좌왕해댔지. 근데 일단 어디 갈 데도 없으니까 대책 없이 계속 뭉쳐있었고.”
비웃는 걸 멈춘 마법사가 천장을 향하던 고개를 내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표정으로 퍼블리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녀석들 비밀들도 다 알고 있고 마력도 마법실력도 엄청난 녀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나타나서 녀석들을 휘어잡고 대장자리에 앉았지. 그게 썩은 배추야.”
그렇게 긴 얘기를 끝낸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해라.”

마지막으로 툭 내뱉은 마법사는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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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하얗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까맸다. 피곤했는지 바로 꿈을 꿨지만 꽤나 생생한 게 깊이 잠들지는 못한 것 같았다. 퍼블리는 까만 바닥을 발로 조심스럽게 두들기다가 딱딱하게 닿는 느낌에 안심하고 바로 걷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한 발짝 내딛으니 바로 바닥이 부서지고 무너졌다.

퍼블리는 떨어지면서 비명을 지르기보단 멍하니 제가 있었던 위를 쳐다봤다.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 잉크가 날카롭게 흩뿌려지는 광경이었다. 위를 보느라 아래를 못 봤는데 다행히 밑에서 푹신한 무언가가 퍼블리를 받아줬다. 다만 꽤나 둥글어서 퍼블리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그대로 굴렀다. 그러자 눈앞에서 파란 천들이 아른거리고 푹신한 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멍하니 누워있자 무언가가 뺨을 간질였다. 이번엔 뭔가 싶어 퍼블리는 바로 일어났다.

여긴 어디야?”
바닥을 짚자 느껴지는 건 녹색 가득한 풀과 까끌한 흙이었다.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본 퍼블리의 눈에 들어온 건 빽빽하게 올라있는 나무들이었다. 다시 위를 올려다보니 검고 하얀 건 없고 맑고 파란 하늘만 있었다. 구름도 한 점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무지개가 나타났다. 보통 무지개와는 달리 어느 한군데 생기더니 어딘가를 향해 쭉 길어지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길어지는 쪽으로 무지개를 따라가려고 했다. 발을 내딛으니 이번엔 둥근 무언가가 퍼블리의 발목을 잡았다. 넘어진 퍼블리는 땅을 더듬어 자신을 넘어뜨린 물건을 잡았다. 피리였다.

아까 떨어질 때 떨어뜨렸나보네.”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다리와 손을 살펴봤다. 신기하게도 까진 데는 없었다. 피리를 손에 쥔 퍼블리는 무지개가 길어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무지개가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졌는데 퍼블리는 당황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하얀색이 가득했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보더니 하얀 밭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왕국에 있는 집 뒷마당이었다. 앞으로 가봤자 나오는 건 집이었다. 퍼블리는 집으로 돌아갈까 아님 여기를 더 돌아다녀볼까 고민하다가 뒤를 돌아 더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집에 가봤자 여전히 아빠는 없고 아니카도 없을 테니까.

마땅히 길도 없어서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지나던 퍼블리는 어쩐지 점점 앞을 보기 힘들어진 것 같아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맨 처음 바닥만큼은 아니었지만 하늘이 까맸다. 어느새 밤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바로 옆의 나무에 기대려고 했던 퍼블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처음 봤을 땐 까맣고 커다란 구멍인가 싶어서 다가가보니 나뭇잎이 그 위로 떨어지자 잔잔하게 물결이 일어났다. 밤하늘을 비춘 호수였다.

퍼블리는 호수에 다가가 쭈그려 앉아 손을 뻗어 물을 떴다. 꽤나 맑았고 시원했다. 물을 털어내고 호수를 바라보니 저 멀리 호수 위로 까만 밤하늘 맑고 다른 색이 아른거렸다. 장미보다 더 환한 붉은색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호수 건너편에 누군가가 있었고 퍼블리는 벌떡 일어났다.

아빠!”

마법사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퍼블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앞에 호수가 있는 것도 잊고 뛰어가다가 미끄러져 호수에 빠졌다. 재빨리 올라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계속 가라앉았다. 밤하늘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퍼블리는 아빠를 외쳤다. 아른거리는 거에 마법사는 없었다.

계속해서 가라앉던 퍼블리는 계속해서 아빠를 부르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숨이 자유롭게 쉬어졌다. 그와 동시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맨 처음 봤던 까만 바닥이었다. 다른 점이라곤 하늘은 하얗지 않고 아른거리는 밤하늘이었다.

친구야, 친구야 나랑 같이 가자.”

여기 퍼블리말고도 누가 있었는지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퍼블리가 바로 뒤돌았다. 누군가가 바닥을 토닥이며 말하고 있었다.

친구는 언제 나오는 거야?”
어두워서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퍼블리는 살금살금 그 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웅~ 메르시가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었는데...”
메르시라는 말에 퍼블리는 그대로 멈췄다. 그와 동시에 쭈그려 앉은 채로 바닥만 보고 있던 그가 일어나 퍼블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퍼블리 셔.”
어두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환하게 보이는 눈과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온통 녹색으로 가득차고 환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사그라졌다.

퍼블리는 꿈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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