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돌릴 새도 없이 눈이 아플 정도로 주위가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급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뻗어보려고 했지만 어딘가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퍼블리의 팔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눈꺼풀 너머로도 화려하게 온 사방을 꿰뚫는 무지개 너머 지금 상황과는 달리 점점 흐려지고 있을 마법사를 떠올린 퍼블리가 외쳤다.

아빩!! 어붋?!”

현실과 무지개는 냉정하게 퍼블리를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무지개가 터뜨린 빛 때문에 아직 시야가 되돌아오지 않은 퍼블리는 더듬거리면서 땅을 짚었다. 흙과 함께 풀이나 잎사귀 같은 것들이 퍼블리의 손가락 사이를 쓸어대며 삐져나왔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쯤 되면 다시 돌아올 법한 시야가 여전히 하얀색만 비추고 있으니 의아해하다가 잠깐 가만히 있었다. 알고 보니 시야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지금 퍼블리가 있는 곳은 익히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약새풀...”
한여름의 햇빛마저도 막아주는 익숙한 냉기들이 이제 알았냐며 투정부리듯 뒤늦게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퍼블리가 장소를 파악하자마자 냉기가 느껴지는 걸 알아챈 퍼블리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고 있나 고민했다.

퍼블리는 다시 천천히 기억을 더듬고 상황파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아빠를 만나고 같이 도망치다가 맞으면 단순히 아야하고 울상 지을 정도가 아닌 마법들이 난무하는 그 광경에서 아난타 선생님과 치트를 발견했고 알고 보니 아빠는 선생님이었고 선생님이 아빠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는 천천히 제 손을 피고 내려다봤다. 무지개 구슬이 완전히 깨져 일어날 때 쥔 흙과 뜯긴 약새풀이랑 섞여있었다.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 모든 게 일렁이며 색이 뿌옇게 흩어졌다.

답답해.”
흐느낌 없이 눈물만 툭툭 떨어뜨리던 퍼블리는 한마디 툭 뱉었다. 눈물 외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비가 내리는 게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우습게도 퍼블리의 눈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내리는 건 햇빛이었다.

답답하고 힘들어요 아빠.”

이쯤에서 퍼블리의 머릿속에 몰려오는 생각들은 그 때 아난타의 모습으로 자신을 봤을 때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머릿속이 고장난 녹음 인형처럼 같은 문장만 뱅뱅 돌면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퍼블리는 지금 답답했다. 힘들고 답답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무지개 구슬 조각을 들고 있던 퍼블리는 손을 뒤집어 털었다. 무지개가 없어지니 얼음꽃무늬가 보였다. 아빠처럼, 마법사처럼, 약새풀처럼 차가워 보이는 얼음꽃무늬가. 얼마간 그걸 계속해서 보고 있던 퍼블리는 엎드렸다.

꿈처럼 저 뒤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가면 호수가 나올까 아니면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뜨면 꿈이었으니 깰까 궁금해 하며 퍼블리는 여전히 눈물이 나오고 있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떨겅! 속이 빈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란 퍼블리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려고 했지만 품속이 방금과는 달리 묘하게 가벼워 바로 내려다봤다. 품속 주머니에 넣어뒀던 피리가 떨어져있었다.

찾다가 지치면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요. 어쩌면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르거든요.”

마지막으로 만났던 메르시의 말이 맴돌았다. 손 때 묻은 피리는 얼른 주워서 나를 불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줍는 손길에 더 이상 망설임이 담겨있지 않았다. 퍼블리는 마지막 기력을 짜서 속에 잔뜩 쌓인 설움과 속상함을 담아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가 뒷마당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다.

 

보이냐? 저게 바다다!”
하루종일 사라진 퍼블리 생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아니카는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바다의 광경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퍼블리의 묘사를 듣기 전에도 영상구로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나 거대하고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런 아니카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서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저 넓은 바다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퍼블리의 무모함을 다시 떠올리고는 구시렁거리기 바빴다.

그나마 배에서 건져서 망정이었지 대체 뭔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가끔가다가 보면 그 머리통 한 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야, 누가 그 마법사에 그 자식 아니랄까봐 무슨 일 닥치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도 배웠어!! 덕분에 내 눈이 튀어나오다 못해 이리저리 통통 튈 정도로 배 찾아다녔는데 아무리 배가 커도 그렇지 이 넓은 바다 한복판에서
, 혹시 저거?”
그래! 저거...?”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 일이 많은 배가 웬일로 땅 가까이 있었다. 물론 신성지대와는 꽤 떨어져 있지만 해안선을 쭉 따라가다 보면 결국 발견하게 될 위치였다. 용케 발견 안 됐다며 호들갑 떨던 전서구는 구시렁거리던 것도 잊고 배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그쪽에서도 전서구와 아니카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가니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어~ 뭐 두고 갔어? 다시 돌아오다니.”
두고 간 거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날갯짓을 천천히 줄여가던 전서구가 불평을 담아 외치고는 배의 난간에 내려앉았다. 아니카가 고개를 들고 몸을 쭉 빼서 흑기사단을 살펴보려고 모습을 보이자 새로운 친구가 왔다며 외치기 시작했다. 분명 듣긴 들었지만 직접 그들의 상태를 보게 된 아니카가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무해한 얼굴로 반가워하는 그들에 바로 긴장을 풀었다. 아직까진 딴 데 보다가 다시 돌아볼 때 또 놀랄 것 같지만 그들의 태도나 표정을 보면 금방 익숙해질 법한 느낌에 묘한 눈으로 보고 있던 아니카는 전서구의 등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퍼블리 친구 아니카랍니다~ 여기로 오신 공주님을 다시 뵈러왔어요~”
? 퍼블리?”
메르시한테 우리 얘기 해줬던 저번의 그 친구!”
그 친구 친구래!”
메르시 보러왔대!”
그들은 웃으면서 퍼블리를 반기기 시작했고 몇몇은 공주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메르시를 부르러 달려갔다. 배에서 계속 생활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찼지만 그만큼 꽤 요란스러웠는지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온 마법사는 흑기사였다.

무슨 일이야?”
그 뒤에 브레이니와 메르시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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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마법사가 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오히려 익숙한 모습이었다. 검고 짧게 머리를 동그랗게 올려 묶은 곱슬머리와 안경 없는 검은 눈. 제 기억 속에 잘 자리 잡고 있는 아난타의 모습이었다. 퍼블리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먼지 구름에서 다른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마법이 또 튀어나오면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이번에 모습을 보인 건 치트였다.

이 정신 없는 상황에 이게 당황한 퍼블리가 뒤에서도 날아오는 마법들이 방어마법을 퉁퉁거리며 두들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방어마법을 펼쳤다. 앞으로 날아오는 파편과 먼지구름을 막아내긴 했지만 저 살벌한 마법들이 바로 날아온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눈에는 보이지만 아직 거리가 멀어 앞에서 벌어지는 마법들이 여기까지 닿진 않았다.

계속 이 자리에서 버티기엔 뒤에선 모드가 다가오고 있었고 앞에선 살벌하게 마법을 날려대는 치트와 마법사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퍼블리가 자신이 만든 방어마법에 최대한 마력을 쏟아 붓고 있는 순간 저 앞에서 치트가 먼저 여길 발견했다.

패치?”
하지만 한눈을 판 대가는 매우 철저했고 보는 마녀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온갖 마법들이 치트를 덮쳤고 그 결과 치트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마법을 날려댄 마법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날려 보낸 후로도 마법을 더 날리다가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퍼블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봤다. 순하고 동글동글한 눈을 마주친 퍼블리는 어쩐지 심장이 따끔했다.

아빠...”

퍼블리는 조금 앓는 소리로 제 아빠를 불렀다.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과 함께 저 앞에서 마법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긴장이 풀린 퍼블리가 결국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풀며 주저앉았다. 다가오던 마법사가 깜짝 놀라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고 뒤에서 걱정스러운 손길이 제 어깨를 건드리는 것도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앞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깜짝 놀란 퍼블리가 숨 쉬는 것도 까먹고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조금 후에 시야가 회복되고 앞이 다시 보였다. 다행히 오고 있던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방어마법을 펼쳤는지 크게 다치진 않아보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를 향해 마법들이 들이닥쳤다. 날아오는 방향은 아까처럼 앞이 아니라 바로 퍼블리의 뒤였다. 퍼블리가 뒤를 돌아보니 모드가 이번엔 마법사를 향해 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퍼블리의 어깨에 얹은 손이 다시 모드에게 마법을 날리자 모드도 마법사를 향해 마법을 날리던 걸 그만두고 다시 피하거나 막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잠시 비틀거리며 시야를 되찾고 있을 때 언제 왔는지 그의 뒤에서 나타난 치트가 마법을 날려댔고 마법사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법을 써서 막아냈다. 정신없는 상황에 누구를 도와야하나 혼란스러워하던 퍼블리는 그냥 얌전히 방어마법에 신경 썼다. 여기서 제 힘을 더 해서 도와준다 해도 들바람 뒤의 휘파람이었다.

이어진 대치 상황은 그다지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갇혀있는 거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거기다가 저 앞의 마법사들도 뒤에도 점점 지쳐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결국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모드의 마법을 막아내던 방어마법이 풀렸다. 치트를 견제하면서도 이쪽을 틈틈이 보고 있던 마법사가 재빨리 마법을 날려 모드를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지쳐버려서 자신까지 챙길 여유가 사라져버린 마법사는 그대로 치트의 마법을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끝까지...애를 먹이네요.”

지친기색으로 쓰러진 마법사를 보던 치트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퍼블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모드도 마법을 날리던 걸 멈췄다.

패치.”
치트가 마법사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웃지 않는 얼굴은 굉장히 낯설고 다른 마법사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손을 따라 뻗으며 갈 일은 없었고 그 전에 쓰러졌던 마법사가 일어나 다시 그에게 공격마법을 날렸다.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모드가 맞서 마법을 날려 공격을 무효화 시켰다. 치트는 다시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강하고 엄청 방해되네요. 하지만 여기서 험한 꼴 보이면 점수도 깎이고 미움도 받겠죠?”
애타게 찾던 마법사를 다시 찾아서 그런지 치트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손을 뻗었다. 그에 마법사가 반격할 준비를 했지만 치트는 마법을 안 날리고 바로 손을 물렸다. 경계를 풀지 않고 기다리던 마법사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특별히 가고 싶어하실 곳으로 보내드림다~ 하지만 안경도 없는데 저주 가득한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마법사의 몸이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치트는 이제 다시 웃음을 머금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파악이 안 되는 퍼블리는 그저 멍하니 다가오는 치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래라면 상당히 멀리 가야하는 일을 줘서 아난타를 멀리 보냈어야 했었지만 우리도 예측 못한 일 때문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고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퍼블리는 고개를 돌렸다. 예측 못한 일이라면 아마 퍼블리가 하루 일찍 왕국을 나온 일이었다.

원래라면 아난타는 멀리 나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패치는 여기 남아서 미끼 역할을 자처해야했는데 당신의 눈치가 좋았던 게 화근이었고
아빠?”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불러보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들켜버려서 급한 대로 이렇게 뛰어왔는데 이렇게 일이 꼬여버릴 줄은...그래도 미끼로 남아서 이렇게 만나는 게 목표였으니 어찌됐든 계획은 반쯤은 성공했죠?”
그렇게 말한 그는 퍼블리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쥐어줬다. 그의 손이 물러나고 뭘 준 건지 조심스레 내려다본 퍼블리의 눈에 익숙하고 화려한 빛이 들어왔다.

무지개 구슬? 이걸 왜...”

다시 고개를 든 퍼블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주본 푸른 게 검게 변했다. 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블리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자네가 나한테 했던 걸 그대로 따라 해 보고 한 번 꼬았을 뿐인데 눈치를 못 채다니, 비밀을 가장 잘 찾는다는 예리한 눈썰미는 어디로 갔나? 이거 참 실망이 크네.”
그 말에 치트도 뒤를 돌아봤다. 아까보다 더 흐릿했지만 아직 형체는 제대로 보였다. 검고 짧은 머리가 점점 붉고 길게 변해가고 있었다. 검은 게 푸르게 변했다.

패치?”
파삭 깨지는 소리와 함께 퍼블리의 손에서 무지개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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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마법사는 아까처럼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갔겠죠?”
순간 귀 끝이 베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훙 하고 마법사의 옆을 잔뜩 쓸어갔다. 요란하게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바로 앞에 있는 어깨를 쓸었다.

다시 묻죠. 패치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 시간에 마저 더 뛰어다니시는 게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같이 작전을 세웠을 자를 먼저 발견했다면 그 자에게서 정보를 털어내는 게 헛걸음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니까 이렇게 묻고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말해드릴게요.”
아난타는 대답하기 전 지었던 웃음보다 더 환하게 웃어보였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게 당연하니 이렇게 대답하고 있잖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났다. 굉음과 함께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방에 얌전히 계십쇼.”
그렇게 말한 모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모습과 말에 퍼블리는 조금씩 긴장을 풀었지만 퍼블리를 뒤로 물린 그는 절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퍼블리는 설득을 해볼까 고민했지만 상관, 즉 치트의 명령이 우선인 듯 하고 저 말을 들어보면 이 방 안에 얌전히 있게 두라는 명령을 받아서 온 것 같아 애초에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모드는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방 안에 걸어뒀던 감지 마법으로 퍼블리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수정구를 통해서 치트에게 누가 나오든 간에 잡아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단 퍼블리는 방 안에 있으니 그대로 있으면 잡아둘 이유는 없었다. 그럼 치트의 명령에서 가장 먼저 의미하는 자는 아난타였다. 모드는 아난타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감지 마법이 퍼블리가 문을 열었다고 알리자 곧바로 들어가라고 말하러 가야할까 싶었지만 바로 문이 닫히고 퍼블리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아난타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모드는 아난타를 발견했지만 근처에 치트가 가까이 다가가는 걸 보고 뒤쫓는 걸 멈췄다. 그래서 퍼블리가 아까 자신을 불렀으니 지금이라도 부름에 응답하고자 했고 늦었으니 이동 마법을 쓰자는 생각에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방 안에 있었다.

하필이면...”
모드도 그가 누군지는 알았다.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붉은 머리에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푸른 눈. 치트는 그를 직접 보여준 적은 없었지만 늘 그의 특징을 머릿속에 거의 새길 정도로 알려주면서 찾아내라고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못 알아볼래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치트가 보여줬던 집착이 엄청났었다.

저항할 생각은 없지만 밖으로 보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모드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이 틀렸고 처음 짰던 계획과 상당히 어긋났던 터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마법사나 마녀라면 몰라도 상대는 모드였다. 설득이나 협상이 통하기 이전에 애초에 치트의 명령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명령 외의 것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마녀였다. 부하들에게 내렸던 치트의 명령이 의외의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완전히 안 나가도 이 방 밖으로 나가는 건...”
누가 나오든 간에 잡아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누가 머리 굴리면서 비밀 캐고 사는 마법사 아니랄까봐 명령 내리는 것도 굉장히 잘 굴리는 치트였다. 혼자였다면 상관없겠지만 뒤에는 퍼블리가 있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모드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잡아두라고 했으니 방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진 않고 나가려는 시도만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방 안에만 있으면 세웠던 계획도 이렇게 퍼블리를 찾아온 의미도 없었다. 어찌해야하나 머리를 굴리다가 뒤에서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퍼블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에 안심하라는 의미인지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숙인다. 쓰다듬을 받고 있는 퍼블리는 순간 어색함을 느꼈다. 그 때였다.

와악?!”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깜짝 놀란 퍼블리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퍼블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떨어지더니 방 안이 크게 번쩍이며 굉음이 눈앞에서 울렸다. 뒤늦게라도 귀를 막을 새도 없이 퍼블리는 저를 잡아끄는 손길에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달려!”
퍼블리를 잡아끌던 그는 이젠 퍼블리를 앞세워 뒤에서 등을 밀며 달리기 시작했다. 굉음은 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부수는지 요란하게 무너지는 소리들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고 그 소리들을 타고 뒤에서 먼지구름과 파편이 잔뜩 어깨와 뺨을 쓸기 시작했다. 뒤에서 전기 공격이라도 하는지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빛이 번쩍거리는 게 순간 앞의 시야를 다 가릴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퍼블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뒤에서 자신을 잡아주는 손 덕분에 간신히 중심을 잡아 계속 달릴 수 있었다.

뒤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싶어서 궁금했던 퍼블리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몸을 반쯤 뒤로 돌린 채 자신을 잡아주는 손 말고 남은 손으로 뒤에다 계속해서 마법을 써대는 아빠와 그 마법들을 피하고 못 피하는 건 쳐내거나 막아대는 것도 모자라 반격으로 마법을 날리는 모드, 그 뒤에 피하고 쳐낸 마법들이 복도 벽에 부딪혀 벽돌들이 전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재난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런 광경에도 모드는 미간도 찌푸리지 않은 채 쫓아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저 무표정이 꿈에서도 나올까 두려울 정도였다.

굉장한 실력의 마녀와 마법사가 공격을 주고받고 피하고 쳐내다보니 꽤나 가까이에 있는 벽들이 무너지느라 굉음이 뒤에서는 물론이고 앞에서도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다시 앞을 돌아본 퍼블리가 기겁해서 외쳤다.

아빠!! 잠깐! 멈춰요, 멈춰!!”
퍼블리의 외침에 그가 견제용으로 날리는 마법들을 멈추고 급하게 방어마법을 펼쳐 앞을 보니 저 앞에서도 마법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벽을 부수고 있었다. 퍼블리는 뒷 상황이 재난이라고 하는 걸 취소했다. 진짜 재난은 바로 앞이었다. 여기보다 더 하다면 더 하다고 할 광경이었다. 여기는 제압이 목적이라면 저 앞은 정말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앞에서 벌어지는 뿌연 먼지구름에서 그림자가 아른거리더니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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