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옅어진 것과 기억들이 관련이 있었는지 기억들은 이제까지 봐온 기억들에 비해 꽤 길었다. 물론 중간에 사라지기도 하지만 걷지도 않았는데 다시 나타나기도 했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가보니 끝난 기억 뒤에 바로 뒷내용이 담긴 기억이 연속으로 나타나는 일이 많아졌다. 기억의 내용은 저번처럼 용사와 패치의 일상이었지만 이번엔 컨티뉴도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자네는 용사가 가고 싶다고 하면 따라갈 걸 잘 알아. 하지만 그래도 자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 몇 번이고 물은 거야.”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제 의사입니다.”
이제 패치와 컨티뉴는 제법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컨티뉴는 패치에게 말을 놓았고 패치는 말을 놓진 않았지만 조금 세우고 있던 긴장도 풀었고 어투도 딱딱하진 않았다. 매일 하는 권유는 마치 같이 산책 나가지 않겠냐는 가벼운 권유 같았고 계속되는 패치의 거절에도 그다지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처음엔 아무런 감흥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듯이 거절했던 패치도 이젠 궁금했는지 의아하단 얼굴로 돌아봤다.

저 말고 당신을 따를 이는 물론이고 가고 싶어 할 이들은 많을 텐데 어째서 제게 계속 권유하십니까?”

이미 다른 이들에게 물어봤고 가고 싶다고 한 이들도 있어. 물론 그들과 함께 갈 거야. 거기에 자네도 같이 가자고 계속 권유한 거지. 용사에게도 물어본지 오래였어.”
용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컨티뉴는 해맑은 얼굴로 들개들과 뛰어노는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중에 새 친구와 함께 가고 싶다더군.”
새 친구라는 말에 패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컨티뉴는 그런 패치의 모습에 어깨를 떨었다.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아.”

걱정을 할 수밖에 없으니 많아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웃을 거면 그냥 웃으세요. GM한테 익숙합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어깨는 계속 떨려도 웃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참는 게 익숙하거나 괜찮다고 해도 참아보는 것 같았다. 패치는 비록 나중이지만 용사가 가긴 가겠다고 했으니 저도 따라 가야하나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웃음을 멈춘 컨티뉴는 패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깊게 고민해 봐도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패치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컨티뉴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책임을 지는 것도 좋지만 자네가 거기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았으면 싶어. 책임질 기회를 잡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다른 기회들도 버리는 건 아쉽지 않나?”

책임질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하지만 자네는 버리는 게 많아. 이제 그만 놓으라는 소리가 아니야, 그저 자네 자신도 신경 쓰라는 얘기지.”
저는 충분히 제 자신도 챙기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패치는 더 말하길 거부하듯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함에 물러설 법도 한데 컨티뉴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마저 말했다.

비록 시작은 죄책감으로 묶여버렸지만 그 관계의 과정과 끝은 애정으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끝이 안 좋을 거라는 건 자네도 알잖아.”
애정 말입니까?”
그렇게 대답한 패치는 픽 입꼬리가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굉장히 자조적이었다.

만약 제가 용사에게 애정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상 자체가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패치는 이제 들개들이 던지는 막대기를 주우러 뛰어가는 용사를 눈에 담았다.

제가 다른 기회들을 버리는 게 다른 자들 눈엔 아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잘못에 대해 책임질 기회마저도 잡았는데 용사는 기회는 물론이고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게 애정이 생긴다고 해서 용사가 잃은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옵니까?”

컨티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패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둘 사이를 메우고 있었고 저 멀리 용사가 막대기를 잡는 걸로 기억이 끝났다. 그리고 보고 있던 퍼블리는 당연히 당황했다. 그게 대체 무슨 대화였던 걸까.

그으러니까아.....아빠가 용사한테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가...?”
패치의 용사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했다. 패치는 용사에게 애정이 없는데 그거와 관련되어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계속 뒤에서 용사를 돌봐주고 있었던 거고 애정은 지금도 없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퍼블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려고 했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친구 사이에도 어느 정도 애정이 있기 마련인데 저렇게 계속 용사 곁에 있다 못해 돌보기까지 하는데도 애정이 없다니 과연 그게 가능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퍼블리는 컨티뉴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컨티뉴의 말대로 작은 애정도 없이 이어져 가는 그 관계 끝은 여러모로 위험했고 전혀 좋지 않을 게 훤했다. 그렇게 계속 생각을 이어가던 도중 문득 마법사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너와 용사의 시작을 붙든 감정과 이유는 비슷하겠지만 결과는 달라졌단다. 모순되게도 용사는 모든 걸 잃어서야 네 아버지가 곁에 있게 됐지만 네 아버지는 용사에게 정을 붙였을지언정 사랑하진 않았으니.”

 

그럼 그 말뜻은...”

무언가의 윤곽의 끝자락이 손끝에 스쳐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퍼블리는 조금 더 나아가 잡으려고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조금만 더 닿았으면 싶은 마음에 손을 더 뻗어보았지만 역시 부족했다.

시작과 끝, 비슷한 시작, 결과는 달라졌다, 그리고...

하늘의 현자님을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 뒤로 몇발짝 물러났다. 언제 나타났는지 기억이 다시 퍼블리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패치와 컨티뉴는 집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뭔가가 잔뜩 써져있는 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간 컨티뉴가 문을 열었고 밖엔 비둘기를 어깨에 얹은 처음 보는 마녀가 서 있었다. 컨티뉴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묻기도 전에 마녀는 비둘기 다리에 묶여있는 편지를 풀어 건넸다.

에키테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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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퍼블리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패치를 발견한 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들개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쪼그려 앉아있던 용사가 벌떡 일어나 패치에게 다가갔다.

새로운 친구야!”
용사가 패치에게 손을 내밀고 패치가 그 위의 무언가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기억이 갑자기 멈추더니 흐려지고 일그러지기 시작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퍼블리가 방금 전까지 용사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기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분명 이 기억 전까지는 기억들이 끝에 다다를 무렵엔 안개처럼 훅 사라졌었는데 이 기억은 이상하게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갑자기 끊긴 모양새였다.

..갑자기 왜 사라진 거예요?”
퍼블리의 심장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고 어서 그 기억의 뒷부분을 마저 봐야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기억은 어딘가 익숙했으면서도 보는 건 처음 보는 게 분명했는데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퍼블리의 심장을 꽉 쥐고 놔주질 않았다. 이상하게 안개는 일렁이며 퍼블리의 시야를 더 방해했고 물기까지 머금어 앞을 더 보기 힘들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런 퍼블리의 어깨를 잡아 손수건을 건넸다. 눈물이 툭툭 떨어짐과 동시에 퍼블리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가 일렁거리는 걸 반복했다.

저 왜 울고 있어요?”
그건 네가 알 거란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진정이 됐는지 퍼블리의 눈물은 바로 멈췄다. 애초에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울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니 금방 그칠 수 있었다. 퍼블리의 심장을 쥐고 있던 이상한 느낌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심장 옆에 한구석을 차지한 의아함뿐이었다.

예상은 가지만 확실한지는 모르겠단다.”

...예상하신 걸 말해주시면 안될까요?”
확실하지 않은 걸 섣불리 말해봤자 네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그렇단다. 어차피 네 아버지를 찾는다면 다 해결될 일이야.”

퍼블리는 그 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제 아빠한테 달려있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했던 제 생각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까지 아빠가 비밀을 다 드러내지 않았고 이젠 아빠한테 물어볼 거라고 먼저 말 해온 건 퍼블리 본인이 아니었나. 이렇게 기억을 보는 건 아니라며 아빠한테 물어보겠다고 한 건 퍼블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퍼블리는 다음 기억을 찾으러 앞으로 걸어가기 전에 마법사한테 물었다.

저기, 아빠랑 안 친하다고 했었는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정말 표현하기 어려웠는지 마법사는 생각보다 오래 고민했다. 퍼블리는 괜히 물은 건가 걱정이 들기 시작했고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마법사가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너무 많고 복잡해서 곤란하니 어떤 사이냐고 말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 이걸로 대답할 게, 서로 증오하는 사이란다.”
벌집 쑤신 줄 알았더니 지뢰를 밟은 격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퍼블리가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을 때 마법사가 태연하게 마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네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건 그리 기분 나쁘진 않단다. 애초에 네 아버지도 똑같이 나를 증오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니 엄청 걱정되는데요?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꾹 깨물며 막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기억들이 나타나 이 어색한 상황을 흘려보냈으면 싶었지만 이상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함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싶었는데 열 걸음을 걷고 스무 걸음을 걷고 거기에 더 열 걸음을 걸었는데도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퍼블리의 어깨는 이미 풀린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빠르다고는 했지만...이건 너무 빠른데?”
마법사는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고 퍼블리는 뭐가 빠른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기억이 나타나는 주기라면 아까 빨라지긴 했지만 지금은 아무리 걸어도 기억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가 빠른 거예요?”
기억이 모이는 게.”
갑자기 온 세상을 쓸어가는 거대한 무언가에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제 팔을 쓸었다. 오돌토돌 소름이 일어났다. 만약 주변의 모든 공기가 말을 할 수 있고 술렁거리며 달려간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다시 뒤를 돌아본 퍼블리는 깜짝 놀랐다. 안개가 조금 걷히고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잔뜩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제 주위 전부 안개가 나무에 살짝 걸쳐있는 것처럼 연해졌다. 드디어 숲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혼자갈 수 있겠니?”
?”
같이 가자고 한다면 갈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더 가고 싶지 않단다.”

애매했다. 못 가는 건 아니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거지만 굳이 가고 싶지 않은 마법사를 끌고 가기엔 마법사가 처음 만난 사이치곤, 곤란한 어린 마녀를 도와준다는 것치곤 필요 이상으로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래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기억들이 단순히 책의 이야기를 읽듯이 간단하게 보는 게 아닌 실제 시간과 같이 기억들이 흐르고 있는데다 보게 된 기억들도 자잘하게 많았으니 마법사랑 같이 있었던 시간은 다시 돌아보면 놀랄 정도로 꽤 길었다.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정말...고마웠어요. 또 만날 수 있나요?”
네가 만나길 원한다면.”

아직 떠나기를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결심했는지 마법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마법사의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퍼블리는 모자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고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몸을 크게 숙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건넨 퍼블리에 마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하늘을 예쁘게 머금은 것 같은 동그란 머리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었지만 움찔 손이 떨리며 바로 내려갔다. 얼굴이 땅을 향한 채 눈을 꾹 감고 있느라 그걸 모르는 퍼블리는 천천히 일어나 마법사를 한 번 더 보고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엔 살짝 고개만 숙이며 뒤돌아 안개 걷힌 숲으로 나아갔다.

퍼블리는 다시 혼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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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는 굉장히 지쳐보였지만 그만큼 능숙해보였고 그나마 쉴 수 있는 때는 용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지쳐 잠들었을 때나 여행하면서 환상마법을 연습할 겸 환상연극을 보여주는 극단 무리가 마침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환상연극을 보고 있는 용사는 눈을 빛내며 가까이 오는 환상들과 놀고 있으니 사고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흥미로운 존재들도 등장했다.

이쪽이다냐!!”
빠른통과!”
전서구와 비슷한 존재들이었는데 말할 수 있는 들개들이었다.

막대기 쓰는 건 반칙이다냐!”
빠른퇴장!”

우웅?”
들개들은 총 세 마리였고 각각 검은색, 진한 갈색, 연한 갈색 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갈색 들개들이 용사와 공을 차며 놀고 있었는데 용사는 막대기로 열심히 공을 치고 있었다. 물론 차면서 노는 놀이였으니 용사는 당연히 반칙이었다. 다만 놀고 있는 건 그 셋밖에 없었으니 용사가 퇴장해도 둘만 노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용사와 놀기 위해 시작한 공놀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냐!”

초기화!”
흙바닥에 점수로 보이는 숫자들을 지운 들개들은 다시 공을 차기 시작했다. 나머지 들개 하나는 패치와 함께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함께 있는 둘은 서로 사이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정확히는 검은 들개는 패치를 경계하고 있었고 패치는 검은 들개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안 그래도 눈빛과 송곳니 때문에 험악해 보이는데 경계를 하며 눈가를 찌푸리고 있으니 굉장히 화난 것처럼 보였다. 저러다 싸우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해 하던 퍼블리는 공을 신나게 막대기로 후려쳐서 폭죽처럼 저 하늘 위로 쏘아 올리는 용사를 보고 진짜 걱정해야할 건 용사라는 걸 깨달았다.

검은 들개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발동한 막대를 물어 막고 패치가 하늘에 있는 공에 흘러들어간 마법을 풀어내는 걸로 기억이 사라졌다.

들개들에서 대해선 못 들어봤어요.”
저들은 용사의 인연이란다. 용사의 기억에 더 많이 남아있을 자들이지.”

용사랑은 친한데...아빠랑은 별로 안 친해보였어요.”

저들은 용사를 많이 아껴. 하지만 경계심이 많지.”

하지만 아빠는 용사를 엄청 챙기지 위협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왜...”

다행히 그에 대한 이유가 담긴 기억은 멀지 않단다. 행운인지 바로 옆으로 떨어졌었네.”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억이 나타났다. 방금 전 끝났던 기억과 이어지는지 용사는 공과 막대기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고 용사와 놀고 있던 들개들은 용사를 지켜보면서 졸고 있었다.

이봐.”
검은 들개가 부르는 소리에 패치는 그저 눈만 움직여 그를 봤다.

“GM이야 재밌으면 장땡이라는 양반이니 그렇다 쳐도 너는 절대 누군가의 뒤를 처 돌봐줄 녀석은 아니야.”
요컨대 이유가 있을 거고 그게 뭔지 말하라는 건가? 자네들은 용사와 친하니까?”
속내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녀석이 친구 곁에 처 붙어있으면 경계하기 마땅하지.”
그렇게 따지자면 자네들과 나는 친하지도 않은데 이유를 말해야할 이유가 없지 않나?”
둘의 만만치 않은 기 싸움을 질린 얼굴로 보고 있던 퍼블리는 만약 나설 수 있다면 제 아빠를 감싸고 싶으면서도 검은 들개처럼 그 이유가 궁금해 가만히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래 말할 이유가 없다라, 그렇다면 이것만 알아둬라. 네놈이 무슨 짓을 처 하던 간에 용사 녀석에게 위협이 간다면 그 날이 바로 네 숨통이 처 끊기는 날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니 숨통 끊는 자리는 다른데 알아보게.”

검은 들개의 찌푸린 눈두덩이 한차례 꿈틀거렸고 퍼블리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봤지만 다행히 둘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고 기억도 거기서 끝났다. 퍼블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법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저렇게 아빠를 경계하는 거예요?”
네 아버지 성질머리는 예전에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단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빠는 누군가를 위험하게 할 마법사는 아니에요!”
어떤 의미론 웃는 낯을 한 채 뒤에서 몰래 흉계를 꾸미고 있는 자보단 대놓고 성격은 안 숨기고 이유는 숨기면서 원래대로라면 전혀 안 할 일을 제 할 일처럼 하는 자가 더 무섭단다. 위험하진 않겠지만.”
퍼블리는 그게 왜 무서울까 고민하다가 어쩐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 납득했다.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건 확실히 무서웠다. 뭘 안 할 건지는 확실히 알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면 상대방은 답답하거나 불안할 게 뻔했다. 퍼블리처럼.

기억이 나타나는 주기는 어차피 조금 걸으면 나타날 정도로 짧았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짧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스무 걸음을 걸으면 기억이 한 번 나타나던 게 아까였고 다섯 걸음 걸으면 나타나는 게 지금이었다. 이번 기억엔 반가운 이가 있었다.

저도 제 할 일 있다고요!! 용사도 그렇고 댁도 그렇고 어째 둘이 저 바쁠 때만 이렇게 태풍처럼 찾아 오냐고요?!”
그렇게 따지자면 자네는 늘 바쁘잖나.”
잘 알고 있구만?! 비둘기 우체부 대표가 어디 노는 자린 줄 알아요!?”
전서구는 패치를 태운 채 어디론가 급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전서구가 예전에 투덜댔던 상황이 떠올랐다. 제 아빠가 아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타는 바람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어디쯤에 내려줬나?”
용사가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렇게 뒷바라지하면서 살 거예요?”
패치는 그 말에 마치 사실을 읊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가만히 냅두면 호수가 무지개로 뒤덮이는 건 물론이고 작은 숲의 나무들에 꽃을 피워 나무 모양의 꽃밭이 생겨있겠지.”

그 말에 전서구는 반박도 더 말도 안 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며 날갯짓을 했다. 다행히 용사는 금방 찾았는데 어느 호수 바로 옆에 있었다. 정말 호수가 무지개로 뒤덮이는 건가싶어 보고 있던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고 전서구가 용사가 있는 데로 천천히 내려가니 다행히 용사 외에 들개들도 있었다. 다만 들개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전서구의 등에서 내린 패치는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한숨을 쉬었다.

또 사고 쳤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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