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얼음

 

하나는 냉기

 

둘이 되는 봄으로

 

손을 맞잡아

 

여름을 부르는 숲 위에

 

모든 걸 지켜보는 햇빛 아래에

 

숲을 밟는 둘의 발은

 

어느새 산들바람이 되어

 

 

 

 

 

 

 

 

 

                                                                                                   -모글리제-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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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엉?”
속상...해서요.”
왜 속상행?”
서럽고...아는 것도 정말...없었다는 게 너무 슬..프고, 서럽고, 과거보단 그냥...그냥 아빠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 알...고 싶었고 그리고....”
눈물이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퍼블리는 손을 들어 닦지도 않았고 참지도 않았다. 호수에 빠지지도 않았는데 물속에 가라앉아 숨이 틀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꿨던 꿈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꿈에서는 호수에 빠졌어도 바로 앞에 있을 제 아빠를 만나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지금은 제 아빠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힘이 쭉 빠졌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꿈속에서 호수에 뛰어들었을 때도, 각오하면서 정말 위험하게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렇게 숨 막히진 않았다.

왜 그랭?”

저도...”
모르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퍼블리는 이제야 이상한 걸 눈치 챘다. 다른 이유로 이상하게도 지금은 퍼블리가 먼저 묻지 않으면 질문은 물론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게 패치였다. 그런데 누군가 퍼블리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자 왜 우냐고 물었다. 여기 있는 건 퍼블리와 패치 외엔 아무도 없었는데 패치가 물어본 거라기엔 목소리도 말투도 패치가 아니었다. 기억들을 함께 보면서 오다가 중간에 헤어진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처음 들어본 목소리는 또 아니었다. 퍼블리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그대로 가만히 인형처럼 서 있는 패치가 있었다. 아니 이제는 너무 가만히 있어 밤하늘과 나무들과 호수를 배경삼은 그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퍼블리는 천천히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쳤당~!”
분명 기억 속에서만 움직이고, 기억 속에서만 말을 하던 용사가 호수 위에 서 있었다.

용사...?”
아빠의 동료 이름을 그냥 부르다가 한 박자 늦게 존칭을 붙였다.

안녕!”
제 이름이 불린 용사는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기억처럼 첫 만남인 한 번 빼고는 한결같이 해맑은 마법사였다. 용사는 패치보다 조금 더 키가 커서 그런지 패치는 바로 앞에 있고 용사는 호수 위에 서 있어 조금 더 떨어져 있는데도 이렇게 얼핏 보면 둘의 키가 같아보였다.

이제 안 속상해~?”
...그 저기...속상하기 이전에 용사님...?”
!”

...아빠랑 같이 다니던 용사님 맞으시죠...?”

!”

정말 이 상황에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해맑은 용사였다. 퍼블리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얼굴 위에 표정으로 띄웠다. 용사는 퍼블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웃고만 있었다.

...왜 여기 계세요?”
~속 여기 있어썽!”
언제부터요?”
요기 숲에 처음 왔을 때부터!”
숲에 처음 왔을 때가 퍼블리가 숲에 처음 왔을 때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용사가 이 숲에 처음 왔을 때부터인지 헷갈렸다. 만약 후자라면 숲으로 들어간 정화의 날 이후로 절대 안 나갔다는 얘기였다. 일단 전자든 후자든 적어도 퍼블리가 피리를 통해 이 숲에 막 왔을 때 숲에 있었던 건 패치와 중간에 헤어졌던 마법사뿐만 아니라 용사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숲 밖으로 안 나갔어요?”
기다리느라!”
누구를요?”
그 말에 분명히 계속 웃고 있었는데도 마치 그보다 더 위에 웃음이 또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용사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주위까지 환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맑고 환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었다.

, 하늘이 밝아졌어?!”

분명 방금 전까지 하늘은 별이 가득했던 밤하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푸른 하늘로 바뀌어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퍼블리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용사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호수 위에 있었던 용사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깜짝 놀란 퍼블리가 재빨리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패치도 사라져있었다. 다시 아빠를 부르며 찾으려던 순간 뒤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또 사고 쳤나보군.”

순간 퍼블리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패치가 전서구를 뒤로하고 호수 옆에 쪼그려 앉아 들개들과 함께 있는 용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다가오는 패치를 발견한 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새로운 친구야!”

봤던 기억이자 다른 기억들과 다르게 중간에 사라졌던 기억들이었다. 퍼블리는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눈앞의 모든 것에 눈을 떼지 않았다. 패치가 용사의 손에 담긴 걸 보고 당황한 얼굴이 됐다. 여기에서 갑자기 기억이 흐려지고 사라졌었다. 다시 나타난 지금은 그 때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퍼블리는 이 모든 걸 눈으로 본적은 없었다. 다만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모든 걸 느끼고 있었고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너무 오래전이라 제대로 생각이라는 게 있기도 전이라 떠오르지 못했을 뿐.

새 칭구야!”
패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패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용사를 찾으러 메르시를 찾아갔었고 메르시를 만났을 땐 이미 용사가 여기로 와버렸으니까. 다시 쪼그려 앉은 용사는 곧 흙을 파내더니 손에 쥐고 있었던 걸 그 안에 넣고 다시 흙을 덮었다. 그리고 용사가 일어나는 동시에 눈앞이 일렁이더니 하늘이 다시 밤하늘로 변했다.

친구야, 친구야 나랑 같이 가자.”

흙을 덮은 날 바로 밤에 용사가 다시 여기로 온 건지 덮은 부분은 낮이었던 방금 전처럼 그대로 볼록했다. 용사는 거길 토닥이며 재촉 아닌 재촉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언제 나오는 거야?”
오늘 바로 심은 게 올라올 리가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 나무 뒤에서 패치가 용사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웅~ 메르시가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었는데...”
용사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대로 일어나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앞에 퍼블리가 있었던 터라 기억 속인데도 퍼블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퍼블리 셔.”

고요한 숲, 그 한가운데에 있는 맑고 깨끗한 호수, 바로 그 옆에 심은 장미씨앗.

얼른 나와서 나랑 같이 가자 퍼블리.”
어느새 퍼블리는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번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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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아아아아아!!!”

퍼블리가 달려가는 동안 다행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그렇다고 퍼블리의 외침에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잠시 주춤했지만 조심스레 패치의 옆으로 다가갔다. 퍼블리가 바로 옆으로 다가갔는데도 패치는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계속 호수만 보고 있었다. 퍼블리가 조심스레 아빠라고 불러도 전혀 안 들리는 것처럼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손을 뻗어 패치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패치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아빠?”

퍼블리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시 제 아빠를 다시 불러봤지만 패치는 아까처럼 또 아무 말도 안하고 호수를 보듯 퍼블리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느낀 퍼블리는 자기도 모르게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찾으러 왔어요.”

누구를?”
누구긴요, 아빠요!”
패치는 또 입을 다물었다. 이건 무언가 이상한 게 아니라 확실히 이상했다. 퍼블리는 조심스레 옷자락을 놓았고 패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하다못해 퍼블리에게 왜 이 위험한 숲으로 왔느냐고 소리치는 게 정상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정말 고개 돌리기 전까지 계속 보고 있던 호수를 보듯이 퍼블리를 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패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요? 제가 왜 여기로 왔는지 안 궁금해요?”

자네가 여기로 오기로 결심했으니 자네는 여기 있는 거지. 내가 궁금해 할 이유가 없네.”

그 말을 들은 퍼블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패치가 이상한 게 맞았다. 퍼블리는 뭐라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지만 모두 엉키고 뭉쳐서 잘 나오지 않아 입만 달싹였다. 패치는 여전히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복잡한 눈으로 패치를 보고 있던 퍼블리는 잠시 패치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아빠를 찾으러 여기 왔어요.”

패치는 역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만약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면 인형인 줄 알았을 정도로 정말 모든 게 잔잔했다.

아빠한테 묻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고 천천히 대화도 하고 싶었어요, 아빠랑 같이 있으면서도 아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아빠가 정말 저를 사랑하는 걸까, 언젠가 나를 툭 두고 떠나버리지 않을까 막연히 불안하기만 했고 그렇다고 물어보면 정말 떠날까봐 묻기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그대로 있으면 더 답이 없다는 걸 겨우 깨달아서요.”
퍼블리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엇을 물어봐야할까, 무엇을 먼저 말해야할까.

일단 아빠 과거가 궁금했어요. 다른 애들이 다 엄마에 대한 걸 말했을 때 전 딱히 뭐라 말할 게 없었어요. 다들 예전에 엄마가 어디 학교를 다녔었다, 무슨 일을 했었다, 지금도 무슨 일을 한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전 하나도 몰랐죠. 아빠가 항상 집에 있고 간혹 가다 제 숙제와 공부를 도와주고 예전 집에 대해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다는 거 외엔 아무것도 몰랐어요.”
늘 옆에 앉는 아니카가 아니라 앞에 앉았던 같은 반 친구가 언젠가 말했었다. 엄마가 사과를 정말 좋아하셔서 언제나 아침에 사과를 먹는다고 말했었고 또 오르골을 좋아해서 생일날 때 오르골을 선물해드렸는데 정말 좋아해서 안아줬다며 자랑스럽고 행복한 얼굴로 말했었다. 퍼블리는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너는 어땠냐며 물었을 땐 비밀이라고 얼버무렸다. 자기도 말해줬으니 너도 말해달라고 졸라도 그냥 웃었다. 퍼블리는 아빠가 어떤 과일을 좋아하는지, 생일이 언젠지도 몰랐다. 무슨 물건을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포옹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퍼블리는 그런 거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어볼 때 그냥 웃었다. 울고 싶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딱히 크게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네.”

어떤 물건을 좋아하세요? 오르골?”
책을 선호하지, 오르골은 있으면 나쁘진 않지만 굳이 갖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진 않네.”
생일은 언제예요?”
“831일일세.”
그럼 포옹은 좋아하세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크게 좋아할 것 같진 않군.”

사과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네만.”
퍼블리는 잠시 묻는 걸 멈췄다. 또 뭘 물어봐야할까 고민했다. 패치는 퍼블리가 물어도 무시하거나 그냥 그렇다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면서 넘어가지 않았다. 퍼블리가 빤히 바라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면서 대답했고 대답도 크게 막히는 게 없었다. 정말 딱히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거 외엔 잘 대답했다.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크지 않다고 대답했고 오르골보단 책이 더 좋았고 생일은 831일이며 포옹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지만 그리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혹시나 싶어 콕 집어본 사과도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매일 먹을 정도로 좋다고 하지도 않았다.

딸기는요?”
자라는 것도 드물고 먹기도 좀 힘든 거라 잘 모르겠군.”

책은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웬만한 마법서적은 다 좋아하네.”
하늘의 현자가 속했던 마법사들 중 하나였던 게 진짜예요?”
그와 같은 조를 이루긴 했지.”
그럼, 그럼....”
퍼블리는 지금 떠오르는 대로 묻고 있었다. 어쩌면 굉장히 자잘하면서도 티가 나지 않으면 모를만한 것들과 본인이 알아낸, 우리 아빠는 이런 마법사였다! 라고 자랑할 만한 엄청난 과거를 확인 차 묻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물어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퍼블리는 물으면서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퍼블리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꺼냈다.

안아...봐도 돼요?”
패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퍼블리는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퍼블리는 울고 있었다. 입술을 꾹 문 채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퍼블리 자신도 몰랐다. 그냥 울고 싶었다. 퍼블리는 계속 울었다. 고개를 숙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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