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정말 쉽게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신중하구나.”
마법사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으로 손을 들어 턱과 입을 감쌌다.

뭐부터 말하고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할지 고민이란다. 하지만 그 전에 선택하렴. 넌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니,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니?”

갑자기 들이밀어진 선택지에 퍼블리는 당황해서 마법사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모자에 가려져 눈이 안 보이는 마법사는 그 말을 꺼낸 후론 입을 딱 닫아버렸다. 퍼블리는 눈을 꼭 감고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를 기억하고 아니카도, 선생님도, 마녀 왕국도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아빠가 아닌, 숨기기 바쁘면서도 먼저 말도 걸었던 적이 있고 함께 축제를 즐기고 저랑 계속 같이 살았던 제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퍼블리의 대답을 들은 마법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퍼블리가 무언가 더 자세히 말했어야 했나 고민하던 중 머리에 손이 올려지는 걸 느껴 깜짝 놀랐다.

신중하게 대답했구나.”
묘하게 기특한 느낌을 담아 쓰다듬는 손은 조금 차가웠다. 퍼블리는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어쩐지 굉장히 어색했다. 이렇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건 아니카를 제외하면 별로 없어서 그런 건가 생각해도 어색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아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손이 물러났다.

어차피 보다보면 네가 궁금했던 건 알게 될 거란다.”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쓰다듬었던 그 손을 바로 옆의 안개 속으로 뻗더니 그대로 옆으로 치우듯 움직이자 안개들이 손길에 따라 걷히더니 기억이 나타났다.

기억은 역시 임의로 보여주신 거였나요?”

지금부터 볼 기억은 그렇지만 그 전에 네가 봐왔던 기억은 내 말대로 흩뿌려져 있었던 거란다.”
마법사는 딱히 뭔가를 꾸민 적은 없다며 덧붙였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말하지 않고 피한다는 건 퍼블리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기억을 봐야하나 조금 고민했지만 어차피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계속 물어봐도 지금처럼 직접적인 대답은 피할 뿐이니 그냥 더 묻지 않고 기억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보다보면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아빠는 멀쩡하셔요?”

무슨 뜻이니?”

저는 기억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고 잠도 안 잤는데 일단은 멀쩡하잖아요, 아까는 피곤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은 또 괜찮아요. 그런데 아빠가 저처럼 괜찮을지는 모르잖아요?”

“...네 아버지는 어디다 던져놔도 정말 잘 살 거란다. 병에 걸려도 그 병을 죽일 자고 목에 바로 칼이 들어와도 그 칼에 목 한 번 베여주고 칼을 들이민 자를 없앤 후에 태연하게 목을 치료할 마법사야. 내 모든 기억을 걸고 장담해.”
굉장히 섬뜩한 비유에 퍼블리는 마법사를 한 번 보다가 다시 제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억 속의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패치는 아무것도 모르고 묵묵히 훈련을 받으면서도 컨티뉴와 이번에 만들어낸 저주막이를 이루고 있는 마법 이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 바빴다. 저렇게만 보면 마법 공부와 연구에 열의가 가득한 마법사처럼 보이는데 곰곰이 생각해보고 자세히 살펴보면 열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새삼 퍼블리는 아빠가 뭘 하고 싶었던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오?”
열 띈 토론이 한창이던 중 익숙한 마법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바로 아난타였다. 퍼블리는 원래부터 안경을 안 쓰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난타의 뒤에 있는 자들을 살펴봤다. 아마 그들이 아난타의 동료인 전장과 분노에 속한 이들 같았는데 모두 마법사인 건 아니었다. 마녀들도 속해있었지만 마법사측이라고 책에 적히고 그렇게 소개된 이유가 아마 상대적으로 마법사가 더 많아서인 것 같았다. 격투가라는 말에 걸맞게 그들의 팔다리 근육은 평범한 마녀와 마법사보다 더 뚜렷하고 튼튼해보였다. 컨티뉴와 패치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격투가로 유명하신 전장과 분노군요.”

컨티뉴가 먼저 그들을 안다면서 운을 뗐고 패치는 가만히 있었다. 아난타는 숲으로 같이 가게 될 마녀와 마법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얼굴을 익히러 온 거였지만 뒤의 동료들은 소문으로 듣던 하늘의 현자를 보게 되어 굉장히 영광스럽고 기쁜 기색이 만연했다. 패치는 익숙하단 얼굴로 펼쳐놓은 이론 종이들을 모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직 식지 않은 기세를 보아하니 지나가던 마녀나 마법사 하나 붙잡고 의견을 나누거나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라도 이론을 파헤치는 걸 넘어서 아예 머릿속에 새길 기세였다. 그런 패치를 잡은 건 아난타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던 건지 여쭤도 될까요?”
그렇게 해서 아난타까지 합류했다. 물론 뒤에 있던 동료들도 대표인 아난타가 합류했으니 자신들도 합류해서 이론을 살펴보고 의견을 내거나 모르겠는 걸 물어보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됐지만 현자가 괜히 현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의견을 내기는커녕 의견들을 듣는 데 바빴다. 내고 있는 건 지금까지 그래왔던 컨티뉴와 패치, 관심을 보이며 합류한 아난타 이 셋뿐이었다.

새삼 생각난 건데요.”
뭔데?”
아난타 선생님도 임시지만 괜히 선생님을 했던 게 아니란 거요.”
아난타는 이제 자신의 동료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씩 짚어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마 가르치는 능력만 따지자면 여기 앉아있는 마녀와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꽤 기억에 오래 남는 아난타의 수업을 떠올린 퍼블리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아난타가 설명하고 있어도 아직 학교에서만 마법을 배우던 어린 마녀가 이해하기엔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해있었다.

그림자가 조금 길어질 때쯤 아난타는 이제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하러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료들도 따라 일어났다. 패치도 컨티뉴와 아난타랑 의견을 나누는데 푹 빠지느라 용사를 깜빡한 걸 떠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하늘을 나는 마법을 쓰며 비둘기와 놀고 있는 용사에게로 달려갔다.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던 아난타가 그런 패치를 보고 깜빡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분의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다시 다가가 이름을 물어보기엔 용사를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패치는 바빠 보였고 아난타는 아쉽다는 눈으로 보다가 어차피 같이 숲에 가는 상황이란 걸 떠올리곤 나중으로 기회를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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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공주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전서구가 부리에다 물고 오는 바다 소식은 변함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가을 끝자락쯤에 흑기사단이 기습적으로 신성지대로 들이닥쳤다는 소식이 아니카에게 왕국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날아왔다. 바다를 계속 경계했는데도 신성측이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배를 댈 수 있는 땅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 땅이 어딘지는 흑기사단과 메르시를 제외하면 갈매기와 전서구만 알고 있었고 아니카도 굳이 어딘지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바다가 아닌 바로 땅을 통해 기습해 들어왔고 메르시가 진실을 외치며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기를 열 번 정도 계속 반복했고 아니카가 여기 머무른지 닷새 째 되는 날 그만두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고 한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문스럽지만 더 의문인 건 그동안 기습할 때마다 기습목표인 신성측에 상처 하나 없이 제압만 하고 돌아갔다는 얘기였다.
내가 높은 데 날아다닌다 해도 자리에 앉아있는 마녀나 마법사 생각은 나도 모른다.”

전서구는 그렇게 대답하며 따뜻해진 날개를 거두고 반대쪽 날개를 난로 가까이에 댔다. 따뜻한 불을 쬐며 전서구는 마지막으로 그 날의 일을 외치고 배에 오르던 메르시와 흑기사단에게 무슨 일인가 묻기 위해 다가갔던 일을 떠올려봤다. 그저 웃던 메르시와 나중에 만나자라고 당당하게 외친 흑기사.

꼭 어디 멀리 갈 것처럼 그러더라.”

 

용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울고 있던 퍼블리는 용사가 사라지고 난 후에 바로 발밑을 내려다봤다. 흙은 그대로 볼록 튀어나와있었다. 저기서 장미가 자라 피어났구나, 그것도 파란장미가. 제 품속의 유리병을 꼭 쥔 퍼블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무 뒤에서 용사를 기다리고 있던 패치가 기억이 나타나기 전처럼 서 있었다. 퍼블리는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그 아픔이 오히려 머릿속을 선명하게 만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지금 안개에 둘러싸인 이 숲보다 퍼블리의 머릿속이 더 깨끗해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아빠.”

패치는 부르는 목소리에도 여전히 그림처럼 서 있기만 했다.

혹시 저 알아요?”
아니.”

“GM할아버지는요?”
알고 있네.”
아니카는요?”
아니.”

아난타 선생님은요?”
전장과 분노의 대표를 말하는 거라면 알고 있네.”
퍼블리의 눈동자는 어떤 마법사와 색이 같았지만 빛은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눈물에 젖어있던 눈동자가 순간 거울 같은 호수처럼 반짝였다.

왜 용사를 따라다니면서 챙겨줬는지 그 이유가 기억나요?”
아니.”
퍼블리는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뒤돌아 안개 가득한 숲으로 달려갔다. 패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안개들이 퍼블리를 막는 것처럼 퍼블리의 시야를 가렸지만 다리를 막을 순 없었다. 그나마 보였던 나무들도 안 보일 정도로 주변엔 안개만 남았다. 나무에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퍼블리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그동안 지나올 때는 아프지 않던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느껴지지 않던 피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가쁠 일 없던 숨이 가쁘기 시작해도 퍼블리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왜 그러니?”
목소리가 들려오자 퍼블리는 바로 멈췄다. 처음 이 숲에서 만났을 때처럼 주위에는 안개가 가득했고 마법사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중간에 헤어졌던 마법사는 그 이후로 이 자리에 서 있었는지 아니면 달려오는 퍼블리를 마주 보러 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둘은 다시 만났다. 퍼블리는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마법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퍼블리의 숨소리가 다시 고르게 될 때 입을 열었다.

왜 여기로 뛰어온 거니?”

, 후우...아빠를 찾으려고요.”
찾았잖니?”

아니요. 못 찾았어요.”

너를 기억하지 못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아빠는 대답만 하지 않아요.”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아까 호수에 두고 온 패치를 떠올렸다. 아빠라고 불러도 반응을 안 하고 묻는 것만 대답하던 패치. 안아 봐도 되냐고 요청했을 때 아무 말도 안 했었다. 거기 있던 패치는 질문에는 답했지만 요청에는 답하지 않았다. 거기 있던 패치는 GM과 용사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퍼블리와 아니카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거기 있던 패치는 왜 용사를 챙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 있던 그동안 퍼블리가 계속 봐왔던 기억속의 패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아무도 섣불리 제 옆에 두지 않고 쉽게 누구 곁에 있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숨기는 것도 많고 그나마 말 나누는 GM할아버지한테도, 그 유명한 하늘의 현자한테도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빠예요.”

퍼블리는 마법사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속내도, 말도, 모습도 전부 숨기는 제 아빠를 그렇게 잘 안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퍼블리는 왕국으로 들어와 산 이후로 제 아빠가 학교 입학에 대해 나왔을 때와 작년의 축제 때를 제외하곤 만나고 대화했던 건 같이 사는 퍼블리 자신 외엔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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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사방이 하얄 정도로 눈이 가득 쌓였다. 왕국에선 길이 미끄러울까봐 소금과 흙을 뿌려두거나 가끔 심각할 땐 선생들이 미끄럼방지 마법과 눈을 금방 녹이는 열 마법을 썼었다. 하지만 여기엔 그런 선생들은 당연히 없었고 식량과 함께 소금도 챙겨 왔지만 눈을 녹이기엔 부족했고 흙은 파서 따로 놓기 전에 이미 지금도 잔뜩 내리는 눈으로 덮여 모습을 감춘지 오래였다. 임시로 지은 집 지붕은 땅처럼 눈이 가득 쌓여있었지만 생각보다 튼튼해서 꽤 버티고 있었다. 아마 겨울동안은 버틸 것 같았다. 만약 봄에도 눈이 내린다면 그 때엔 무너질 게 뻔했다. 튼튼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로 지은 거에 비해선 튼튼한 거였으니.

멀리서 봤을 때 웬 눈덩이가 날아오나 싶었어요~”
호호 웃는 소리와 함께 거침없는 말이 전서구에게 날아왔지만 이제 전서구도 익숙한지 아니면 추웠는지 부리도 꾹 닫은 채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로 만든 집은 꽤 작아 전서구가 들어가면 마녀 하나 누울 정도의 공간만 남았다.

그래서 숲은 아직도 신기루 상태고?”
, 아직도 그러네요. 그래도 저번보단 더 선명해졌어요. 바다 쪽은요?”
땅은 진즉에 밟은지 오랜데 이상하게 발을 땅에 오래 붙여놓질 않아.”
이제는 겨울이 되어버렸지만 아니카는 축제가 한창 시작됐을 둘째 날, 퍼블리와 난데없이 헤어진 그 여름날에 멈춰있었다. 메르시를 찾아가 피리에 대해들은 아니카는 왜 그런 저주 가득한 위험한 데로 퍼블리를 보낼 생각을 했냐고 따져 묻는 대신 그 위치가 어딘지 부터 물었다. 듣자마자 갑판에 드러누운 전서구에게 달려가 어서 가자고 재촉한 후 바로 이곳으로 온 게 시작이었다. 전서구는 그 날의 일을 후에 말하길 그냥 웃는 얼굴도 어딘가 무서웠는데 그렇게 정색한 표정으로 재촉을 하니 순간 겨울이 된 줄 알고 오한이 들었고 지금도 상상하면 날개가 오들오들 떨린다고 했다. 그렇게 긴장한 건 패치가 용사에게 언성을 높이며 숲에 가는 걸 말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처음 숲이 있어야할 곳으로 왔을 땐 숲은커녕 나무도 안 보이는 허허벌판이라 전서구가 정말 여기가 맞냐 계속 물었었다. 그 때 아니카의 표정은 재촉할 때처럼 굳어있었지만 그나마 전서구 등에 타고 있는 터라 못 봐서 그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지 만약 얼굴을 봤으면 얌전히 날갯짓을 했을 터였다. 아니카는 허허벌판을 내려다보면서 여기로 오기 전에 아직 배에 있을 때 벌떡 일어난 전서구의 등 위로 올라타는 순간 들려온 메르시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무사할 거예요, 저주는 퍼블리에게 통할 수 없어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머리 좋은 아니카는 그 말을 단순히 안심시키기 위해 던진 말로 덮어 누르지 않고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눈으로 보게 됐다.

그보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나무는 물론이고 풀이나 조금 있던 허허벌판 위로 저렇게 숲이 생기다니.”

그 여름날에 왔던 허허벌판과 지금 창문 너머로 눈으로는 보이는데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숲이 같은 장소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직접 본 아니카와 전서구도 놀라워서 숲을 계속 눈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숲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처음엔 허공에 웬 나뭇잎 하나가 둥둥 떠 있었는데 다음날 다시 보니 나뭇잎 여러 장 붙은 나뭇가지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 다시 보니 나무 하나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 다시 보니 나무 열 그루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들을 반복하니 어느새 숲이 나타났다.

정화된 순백의 날 이후 저주로 가득 찬 숲은 모습을 감췄고 숲이 있던 장소에는 아직 저주가 남아있으니 위험하다며 다녀온 마녀와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책으로밖에 숲을 알 수 없는 어린 마녀들에게는 숲이 있는 장소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나마 알고 있던 그 때 당시 어른들은 애들보다 저주 무서운 줄 모르고 약새풀 찾으러 갔다가 허탕치고 왔다. 전서구와 비둘기들은 제 목숨이 귀한 줄 당연히 알고 있으니 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십년간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던 숲이었다. 그런데 그런 숲이 이제야 갑자기 나타난다는 건 무언가 다시 숲의 모습을 드러내게 할 요소가 있었다는 거고 아니카는 그게 뭔지 눈치 챘다. 바로 피리 불고 숲으로 들어간 퍼블리임이 틀림없었다.

저 신기루 안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렇게 드러나는 모습이 넓어지고 있을까.”
아니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숲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전서구는 난로 옆에 제 날개를 가까이 대며 지난 몇 달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봤다. 누가 그 붉은 머리 마법사의 아이 아니랄까봐 퍼블리는 무모하게 돌격하기 바빴고 누가 그 무모한 아이의 친구 아니랄까봐 아니카는 좋은 머리를 굴려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바빴다. 전서구는 그 여름날, 허허벌판으로 내려올 때 설마 아니카가 무턱대고 숲을 찾으려고 땅을 파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다행히 아니카는 그러지 않았고 땅 한 번 밟은 후 다시 전서구의 등 위로 올라타 왕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전서구는 기쁨을 느끼기 전에 의외와 의아함을 먼저 느끼고 눈을 굴려 제 위에 타고 있는 아니카를 보려고 했지만 아니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무슨 개인 이동수단이여?!”
소식을 전하고 보여주는 비둘기 우체부 대표지요~”
아니카는 학교가 끝날 때마다 매일 그 허허벌판으로 태워다주고 바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냐고 했다. 요컨대 일단 자신의 수업일수는 채워야한다는 거였다. 제 현실도 챙기고 원하는 일도 챙기는 바였다.

따지자면 나도 할 일이 있다고!! 내 원래 직업은 비둘기 우체부인데 직업도 아닌 공짜 이동수단 한 게 대체 몇 번인...”

물론 아니카는 머리가 좋았다. 공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니카가 전서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고 전서구는 흥분해서 치뜬 눈과 벌린 부리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이이이이이이이이거....”
이제 값 치르면 되죠?”
아니카가 내민 건 약새풀이었다. 일단 저주를 먹은 풀이라고 불리지만 지금의 마녀와 마법사의 인식은 그래도 그 가치는 매우 뛰어난데다 귀하기까지 해서 굉장히 비싼 풀이었다. 그건 비둘기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밸러니의 숲이 사라진 이후론 이제 한자리에 고정되어 자라지도 않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자라는 풀이었다. 줄기 하나만 발견해도 주먹만 한 금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는 바로 그 풀이었다.

전서구는 아까 전엔 흥분해서 외쳤던 거고 지금도 충분히 흥분한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한 풀을 그것도 아직 어린 마녀에게서 받아낸다는 건 좀 미안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 빨리 두 날개가 사뿐히 날듯이 모여 그 귀한 풀을 고이 받쳤다. 물론 그 풀은 퍼블리네 집 뒷마당에서 하나 뜯어온 거였고 당연하게도 아니카의 손해는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전서구는 겨울 방학이 오기 전까지 아니카를 극진히 모시다시피 하며 점점 숲이 드러나고 있는 벌판과 왕국을 왕복했다.

그리고 겨울이 됐을 때 아니카는 더 이상 왔다갔다 하지 않고 왕국 밖으로 여행 나가는 마녀들이 자주 쓰는 휴대용 임시 집을 사서 아예 숲 옆에 눌러앉았다. 그 후 아니카는 전서구가 없는 동안 벌판을 가득 메운 숲을 살펴보기 위해 다가가 봤지만 손을 뻗으면 나무의 꺼끌하고 딱딱한 감촉은 손에 닿지 않았고 오히려 나무가 안개처럼 흐려지기 바빴다. 손을 떼니 나무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마침 날아오고 있던 전서구가 저주 받으려고 작정했냐며 잔소리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숲의 상태는 신기루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아냈다. 전서구는 아니카가 여기 눌러앉은 이후로 식량과 생필품과 바다 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데에 쓰이는 돈은 퍼블리네 뒷마당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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