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질 다 끝났습니다.”

문을 열자 쉼터의 주인이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 안엔 퍼블리가 잡아왔던 토끼가 육포로 손질되어 담겨 있었다. 감사하다며 받아든 퍼블리는 아직 저를 보고 있는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실례했다며 다시 손님을 마주하는 자리로 물러나는 모습에 퍼블리는 그저 약간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지금까지 마을들을 거치면서 비슷한 반응을 많이 받아왔는데 저 정도는 매우 괜찮은 축에 속한 편이었다. 가끔가다 지나가던 마법사들이 퍼블리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런 반응들을 접하게 된 퍼블리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라는 생각을 하며 쉼터의 방마다 있는 거울이나 꽝꽝 언 물웅덩이 위로 얼굴을 비추고 더듬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유를 알게 됐는데 어느 날은 지나가던 마법사 하나가 대놓고 퍼블리를 쳐다보는 걸 넘어서 가까이 다가와 신기하네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그에 퍼블리가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다가온 마법사가 먼저 물었다.

당신은 마법사예요, 마녀예요?”
마녀라고 대답하자 물어봤으면서도 놀라면서 당황스러워서 굳어있던 퍼블리도 실례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리저리 훑어보고 간 이상한 마법사 이후로 지나가던 마법사들이나 쉼터의 주인들이 마법사인지 마녀인지 물었고 퍼블리는 계속 마녀라고 대답하다가 어느 순간 마법사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 마법사라고 대답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면 그제야 궁금증이 풀린 얼굴로 실례했다며 물러가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쉼터의 주인들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지만 한차례 이미 실례를 저질렀고 남에 대해 캐묻는 건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물러났다. 그 반응들은 퍼블리가 천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주로 여행하는 마녀들이 계산하는 방식이었기에 나온 반응이었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그렇게 계산하는 자들이 있으니 사실은 마녀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는 건 본인들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이상한 생각이었다. 설령 사실은 마녀라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나를 마법사로 보고 있다는 건데...”

사실 마녀와 마법사는 딱 봐도 구분이 가능했다. 비유를 하자면 눈앞에 있는 게 흰 고양이냐 검은 강아지냐 구분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게 마녀와 마법사인데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는 마법사들이 저를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구분을 못하니 당연히 당사자인 퍼블리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마법사인 제 아빠와 마녀왕국 밖에서 살았던 기억이었으니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버렸다. 일단 지금 퍼블리의 목표는 신성지대로 돌아간 아난타를 찾아가는 거였기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라오는 궁금한 것들은 아빠인 마법사를 찾았을 때의 몫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잘라낸 퍼블리는 육포가 담긴 주머니를 제 짐 속에 넣어놓고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혼자 남아버렸어.

나를 두고 어디로 가버린 거니?

나는 계속 여기에서 기다렸어.

너를 기다렸어.

하지만 너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까지 남아있었지.

 

마법사가 눈을 뜬 건 이틀하고도 여섯 시간이 지나서였다. 오래 누워있던 터라 멍한 기분이 한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놔주지 않았다. 고개만 돌려 주위를 돌아보자 방 안엔 누워있는 저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마법사는 발을 조심스럽게 방바닥으로 내려놨지만 힘을 주기엔 또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일어서자 몸이 휘청거리며 몇 번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았지만 계속해서 일어서려고 시도한 덕분에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을 짚은 손이 점점 벽에서 물러나자 그에 맞춰 마법사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방문을 여는 순간 얄미운 얼굴과 말투가 눈앞에서 잠깐 반짝이듯 떠오르며 사라졌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곁에 없는 그는 마법사도 익히 잘 아는 자였다. 밤이었을지 달이었을지 아님 호수였을지 모를 것에 취해 달이 환하게 뜬 밤, 호수 앞에서 제 이름과 그의 이름을 서로에게 건넸던 상대. 치트. 그게 바로 저를 납치해온 그의 정체였다. 물론 납치당할 때 가만히 있었던 마법사가 아니었다. 다만 정말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게 마법사는 비록 본인 의지로 행한 상황이었지만 마력이 상당히 줄어 있는 상태였고 바로 그 때 치트가 납치하러 들이닥치는 바람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최대한의 저항 결과 집에 들이닥친 납치범의 오른팔을 부러뜨리고 왼팔을 탈골상태로 만들어놨지만 결국 정신을 잃은 건 본인이었다. 하지만 양 팔을 쉽게 쓸 수 없게 된 터라 기절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데려갈 순 없었던 치트는 곧바로 지원을 불렀고 안경을 벗고 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빨갛게 변하면서 욕을 머금게 된 아난타가 한동안 치트를 놀려댔었다. 물론 이건 마법사가 모르는 뒷이야기였다.

겨우겨우 방에서 나온 마법사는 부엌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기분 나쁘다는 게 여실한 눈빛으로 쭉 주변을 훑어봤지만 머리만 아파왔는지 꾹꾹 눈썹 위를 문질렀다. 이 집은 비슷하다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아예 태우기 전 그대로 남겨둔 건가 생각할 정도로 마녀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지냈던 집과 똑같았다. 단순히 집 구조가 아닌 물건들도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았는데 등받이에 자주 기대느라 조금 휘어진, 지금 앉은 의자가 바로 그 예다. 그렇게 쓰러지고 처음 이 꺼림칙하고 싫은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마법사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곁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그 얼굴은 울면서도 웃고 있었고 슬프면서도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뺨을 쓰다듬던 손은 마치 손끝에 있는 게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하려고 더듬는 눈먼 자의 손짓 같았다. 곧이어 잠겨있으면서도 희열에 차 들뜬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었다.

왜 저를 떠난 겁니까? 아니, 이젠 이유 따윈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찾아냈고 이렇게 제 눈에 보이고 제 손에 닿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왔으니까 물을 필요도 없겠죠. 당신은 이제 절대 여기를, 나를 떠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제 얼굴 위로 고개를 숙이는 치트를 향해 박치기를 한 마법사는 그대로 목을 눌러 제압하려고 했지만 팔을 붙잡아 그대로 침대 위로 내리 누르는 그의 힘은 강한 걸 넘어서 절대 놓지 않겠다는 엄청난 집착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질 정도였다. 눈을 마주했을 때도 뚝뚝 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넘쳐흐르는 그 감정은 마법사가 질려서 순간 움직인다는 걸 잊어버릴 만큼 농도 짙고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 마법사는 안 보이면 마음도 식어버릴 거라고 생각한 제가 안일한 건지, 저렇게까지 마음을 붙들다 못해 집착을 덕지덕지 붙인 그가 비정상인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결론은 둘 다였다. 기억속의 시간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더듬던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해봤자 이 상황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고 지금 혼자 남아있을 퍼블리가 걱정이었다. 이렇게 저 혼자 있을 때 탈출시도를 한 때가 꽤 있었지만 문고리를 잡자마자 정신을 잃는 상황이라 아예 마법을 날려보려 했지만 몸에서 나온 마력이 일그러지며 흩어지기 일쑤였고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 주위의 마력과 제가 마녀왕국에서 걸어놓은 마법들을 탐지해봤지만 탐지만 가능했지 느껴지는 방향은 매번 탐지할 때마다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모든 탈출시도를 막아놓은 것처럼 철저하게 지어진 이 집은 마녀왕국이나 신성지대의 감옥보다 더 견고하고 철저할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는 것이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뜰 때마다 찌뿌둥한 수준이 아니라 한동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는 점에서 자고 있을 때 시간이 흐르는 건 단순히 하루 수준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마법사가 그동안 정신을 잃은 횟수가 꽤 됐다. 그에 마법사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건 왕국 내의 집에서 걸어뒀던 마법을 천천히 풀어 남은 마력량을 탐지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아내는 거였다. 우선 첫 번째는 방 안에 잠가뒀던 서랍이었다.

“....결국 뒷마당에 걸어둔 마법까지 풀어버리게 됐군.”
식품에 걸어둔 보존 마법을 제외하면 마법사가 집에 걸어놨던 거의 대부분의 마법을 풀어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 뒷마당의 마법은 풀어놓을 생각이 없었지만 풀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 들어 컵에 물을 따라 조금 마셨다. 아직 물이 남은 컵을 탁자 위에 툭툭 두 번 두드려보고는 찰랑거리는 물들을 빤히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계의 짧은 바늘이 두 번 정도 돌았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셨슴까?”

눈을 뜨자 문이 열린 소리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제 옆에 와서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에 혀를 차며 다시 눈을 감아버리자 들려오는 말이

그대로 키스해달라고 눈 감으신 검까?”

마법사는 조용히 물이 든 컵을 들어올렸다. 물을 뿌리려나 싶어서 당신이 마시던 물이라서 달다고 놀려줄 말을 준비했던 치트는 컵 째로 던지려는 손동작에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잽싸게 마법사의 손목을 잡았다.

아무리 저라도 그걸 맞으면 아픔다?”
아프라고 던지지 안 아프라고 던지나? 아니 그래, 자네 말대로 아프지 않게 바로 죽길 바라며 던지면 되겠군.”
에헤이~ 그건 더 안 됩니다~”
컵 내려놓게 좀 놓으라는 말에 놓기는커녕 팔목과 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기어이 다른 손까지 들어 올리게 만들자 그제야 놓는 모습이 얄미워 발로 잽싸게 정강이를 걷어차자 과장스럽게 맞은 데를 부여잡고 아파하며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앉는다.

그나저나 의외입니다?”
뭐가 말인가.”

지금까지 퍼블리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셨잖슴까?”

그 말에 눈을 살짝 찌푸린 마법사는 덤덤하게 말을 꺼낸다.

자네가 퍼블리한테 손도 대지 않은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런 쪽으로 저를 믿어주시는 검까? 감동임다~”

만약 퍼블리를 붙잡아 인질로 썼다면 내가 여기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퍼블리를 언급했겠지.”

그 말에 치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 후에 잡아왔을지 어떻게 알고요?”
그렇다면 잡아온 그 때 자네는 운을 뗐겠지. 이번에 나를 잡아온 자네의 방식을 봤을 때 자네는 매우 철저하니 섣불리 퍼블리에게 손을 댈 수도 없고 손을 대서도 안 되는데다가 자네는 지금 손 댈 생각도 없잖나. 손을 댈 수 없고 안 되는 이유는 퍼블리가 마녀왕국 내의 학생이니 학기 중에 사라지면 상당히 곤란해지지. 학교 측에서 퍼블리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거고 왕궁에서 실종된 학생을 찾는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조사대를 파견하면 퍼블리가 왕국 내에서 사라진 걸 알게 될 테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마녀는 보호자의 동의나 같이 동행하지 않는 이상 왕국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보호자도 같이 없는 상황이니 함께 손잡고 왕국 밖으로 나갔을 거라 추측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을까요?”
마녀들은 왕국 밖으로 나갈 때 검문소를 방문해서 밖으로 나간다는 임시 확인서를 작성하고 나가는 게 법이잖나. 게다가 대체 어느 마녀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제 아이를, 그것도 학기 중에 밖으로 데리고 나간단 말인가?”

그에 치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받았다.

, 확실히 그렇게 되면 조사대가 더 넓게 움직이긴 하겠지만 그건 그들만이 피곤하고 저는 별 문제 없슴다? 우리 패치도 방금 말했다시피 전 매우 철저하다고요? 그럴 능력도 되는 걸 넘어서 뛰어나고 마녀 왕국 내에서도 그랬듯이 넓게 행사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슴다.”

물론 그건 자네 얘기고 난 아직 내 얘기 중이었네만?”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는 눈빛을 받고서도 마법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물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간다.

자네가 자네 능력 자부하듯이 나도 내 능력 좋다고 말할 수 있네. 자네가 찾아오던 그 집을 태우고 떠난 그 날부터 자네가 나를 납치해오던 날까지 마녀 왕국에서 마법사인 걸 들키지 않고 살아왔잖나. 거기다가 퍼블리를 다른 마녀들처럼 학교에 보낼 정도로 자연스럽게 살아왔지.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왕국 내의 탄생 기록은 손댈 수 없었네. 그 탄생기록은 장미정원에서 태어난 마녀들뿐만 아니라 결혼한 마녀들, 심지어 마법사와 결혼해 왕국을 떠난 마녀들의 아이가 마녀일 경우 기록하게 하는 대단한 기록일세. 내가 현 거주자들의 기록을 겨우 꼬고 가려서 이름을 등록해 살아온 처지니 말 다한 거나 다름없지. 가려진 걸 치우고 정리만 해놓는다면 왕궁은 내가 그 어디에도 속한 마녀가 아니란 걸 알아낼 테고.”
마법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치트를 바라봤다.

굳이 뒷말도 길게 덧붙여야하나?”
아뇨~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돼도 딱히 제가 걱정할 일은 아님다. 전 우리 패치가 저를 떠나는 게 걱정될 뿐.”

그럼 역시 손댈 생각이 없는 쪽이군. 비록 길게 말하긴 했지만 떠본 걸세. 자네 반응을 보아하니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을뿐더러 날 잡는데 혈안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퍼블리를 건드려봤자 자네에게 이득은 없으니까. 건드려봤자 나한테 더 반감을 사겠고 그에 맞춰 나는 내 몸도 신경 안 쓰고 날뛸 테니까 말일세.”

그에 치트는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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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서구가 어떻게 찾냐면서 툴툴대긴 했어도 편지를 전달하러 온 이유는 퍼블리의 발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지대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 게 바로 전서구였고 전서구는 그 길을 따라 퍼블리를 찾으러 온 거였다. 다만 어디 길을 밟는지 안다고 해도 받는 자가 움직이는 데 그에 맞춰 찾아야하는 수고를 들이는 건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 퍼블리는 전서구에게 신성지대로 데려다달라고 했지만 전서구는 편지를 배달하는 작은 비둘기들이라면 모를까, 비둘기 우체부 대표라는 입장 때문에 다짜고짜 아무런 연락 없이 신성지대 땅을 밟는 건 예의가 아닌데다가 마녀왕국 측에 아무 말도 않고 신성지대로 가게 되면 꽤나 일이 복잡해진다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 둘의정치때문이었고 퍼블리는 실감은 못하지만 막연히 알고 있었기에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타협한 끝에 신성지대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걸로 마무리 됐다. 나름대로 안전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가르쳐준 전서구가 바랐던 방향은 어른이 되기 전까진 왕국에서 나가는 걸 포기하거나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해 나가는 거였지만

아이고 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 보게!!”
어느 날 편지를 들고 찾아온 아니카에게 정황을 듣고 처음으로 퍼블리에게 편지배달을 하게 된 전서구가 알려준 길을 따라 가는 퍼블리를 찾아낸 후 부리로 머리를 마구 쪼아대며 외친 말이었다.

그 때 전서구가 예상치 못한 건 마법사가 은둔하다시피 지낸 덕에 일어난, 협소하다 못해 아예 없다시피 한 왕국내의 인맥과 퍼블리의 행동력 및 체력이었다.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학교까지 다니고 있던 어린 마녀가 혼자 나갈리 없다는 건 왕국내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물론 몇몇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보호자인 어른들과 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왕국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나고 일주일 후 왕국 마녀에 의해 보호자의 동의나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왕국을 나갈 수 없는 마법에 걸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왕국 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퍼블리는 그 마법이 걸려있지 않았고 퍼블리가 사라졌다고 외치고 다닐 보호자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일하게 퍼블리의 행방에 의문을 품을 학교는 모든 수업이 끝나있어서 방학상태였고 이렇게 전서구가 또 편지를 배달하게 된 지금에서야 다시 수업들이 시작됐다. 본인이 알려준 길이지만 꽤 시간이 걸리는 터라 왕국 내에서만 지내던 어린 마녀는 가던 도중 지칠 법도 했지만 퍼블리의 체력은 마법사는 물론 주위의 선생이나 학생들이 인정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비록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도 지나 한창 꽃가루가 눈과 코를 간지럽힐 때가 됐지만 퍼블리는 그 긴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기운 넘쳐 보인다면서 신기해하던 전서구의 증언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전서구의 얼굴을 떠올리던 퍼블리는 조금 웃고는 계속 발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졌을 즈음에 쉬어갈 마을을 발견했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은 마녀왕국과 많이 다른 점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퍼블리는 하루 묵을 쉼터를 찾아 들어갔다.

하루랑 손질이요. 남은 건 신성지대 돈으로 주세요.”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오는 길에 잡은 토끼와 두툼한 천들을 건넸다. 쉼터의 주인은 힐끗 보더니 열쇠 하나와 꽤나 정교한 세공을 한 흰 동전 두 개와 금칠을 한 동전 다섯 개를 꺼내 건넸다. 받아든 퍼블리는 열쇠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새겨져있는 방문을 찾아 열쇠를 꽂아 돌리고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보이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진 퍼블리는 신성지대의 화폐들을 손에 올려놓고 살펴봤다. 다른 손으론 가지고 있던 마녀왕국 화폐들을 꺼내 서로 비교해봤다. 마녀왕국의 화폐엔 누구나 다 아는 장미 모양으로 세공이 되어있었고 신성지대 화폐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작대기 두 개를 교차해서 놓은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은 신성지대와 달리 대부분 소규모인 터라 거래는 주로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화폐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맨 처음 들리게 된 마을에서 퍼블리가 어찌해야할지 몰라 쩔쩔매자 가만히 보고 있던 마을의 대표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마녀왕국과 가까운 마을들은 마녀왕국 화폐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아서 마녀왕국 화폐로 거래가 가능하지만 신성지대와 가까운 마을들은 신성지대 화폐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다고 했고 그 중간에 있는 마을들은 대부분 물물교환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엔 여행 나온 마녀들이 마녀왕국 화폐를 많이 쓰고 개서 짐 속에 넣기 쉬운 천들로 바꾼다고 설명해줬다. 작은 마을에선 은근히 천을 만들기가 번거롭고 힘든 덕에 물물교환 할 때 가장 반기는 물건이라고 덧붙이는 말에 퍼블리는 가지고 있던 돈 일부를 제외하고 천으로 바꿨다. 그렇게 여행하면서 천의 가치가 더 높아 곤란할 땐 다른 물건들을 더 받거나 중간에 잡아온 동물이나 먹을 수 있는 열매, 풀들을 건네 육포나 건조과일로 손질해주거나 요리하는 값으로 때우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신성지대니 가지고 있던 천들을 전부 신성지대 화폐로 바꿨다. 화폐들을 전부 주머니에 넣은 퍼블리는 목에 걸려있는 줄을 잡아 당겨 올리고는 그에 옷 속에서 딸려 나온 줄에 달린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 든 파란장미꽃잎이 잡아당기는 손길에 맞춰 흔들렸다. 유리병엔 매우 강한 보호마법이 걸려있었다. 맨 처음 유리병에 묶어 놓은 줄이 끊어져버려 돌 위로 떨어질 때 깨진 건 유리병이 아니라 돌이었으니 그 효과는 자연스럽게 입증해버렸고 또다시 보게 된 마법사의 엄청난 마법에 할 말을 잃었다. 더 튼튼한 줄을 사서 유리병을 줄에 묶은 이후 퍼블리는 유리병을 이름 그대로인 유리병처럼 대하진 않았다. 깨질까봐 조심조심 다니던 걸 그만둔 이후론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동안 유리병을 살살 흔들어 그에 맞춰 흔들리는 장미꽃잎을 지켜보던 퍼블리가 유리병을 꼭 쥐고 제 품으로 끌어안은 후 눈을 감았다. 마법사와 결혼한 마녀는 없었고 마법사는 아빠인 동시에 엄마이기도 하면서 하나뿐인 보호자였다. 사실 퍼블리는 마법사가 사라지고 사흘이 지났을 때 그동안 제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마법사에게 무언가 묻기 전부터 상상해오던 이 두려움의 정체는 마법사가 저를 두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일이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를 이 두려움의 원인을 알게 된 건 마법사에게 옛날에 마법사에게 구애하던 자에 대해 떠올렸을 때였다.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행동은 흐리지만 얼굴에 비해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마법사에게 달라붙었던 자. 막연한 얄미움이 기억으로도 느껴졌었지만 되짚어서 생각해보면 곁에 있던 저도 기억에 남을 만큼 열심히 들이댔던 자였다는 거였고 그만큼 끈질기게 마법사에게 달라붙어 인연을 이룬 대단한 자였다. 하지만

끝냈어.”
그 집을 떠난 그 날. 내가 끝냈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퍼블리는 눈을 뜨며 쥐고 있던 유리병을 다시 제 옷 안으로 집어넣고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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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른 보람이 있었다. 결국엔 퍼블리를 찾아내서 땅 아래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날개에 쥐날 것 같다며 투덜거리는 전서구를 뒤로하고 다리에 묶여있는 편지를 풀어 소중히 쥐면서 읽었다.

 

우리 근육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지?

그래도 너무 열심히 뛰진 마. 그러다가 어디 부딪히거나 힘 빠져서 나중엔 뛰고 싶어도 못 뛰게 될지 모르니까 말야. 그리고 넌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이나 적고 못됐다고 입이나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겠지, 이 언니가 다 알고 있단다? 마음 같아선 좀 더 놀려주고 싶고 소소한 안부 묻기나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급한 것 같아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난 네가 떠난 날 이후로 계속 너희 집에 찾아가고 있어, 물론 열쇠는 네가 갖고 있으니까 들어갈 순 없지만 혹시 누가 찾아왔을지도 몰라서 늘 찾아가고 있어. 네가 뿌린 전단을 보고 찾았다거나 본 적이 있다고 하는 마녀가 있을 수도 있고 비둘기 우체부가 찾아왔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는 나 외엔 누가 찾아온 흔적도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너희 집 자체야. 처음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희 집에서 냉기가 감돌고 있어. 그동안은 겨울이라서 잘 못 느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이제 봄이고 따뜻해진지 오래지, 겨울이 봄에 피는 꽃을 시기해 다시 손을 뻗는 날도 지나갔어. 그런데도 너희 집은 냉기가 돌고 있고 이건 겨울 냉기라고 하기엔 애매해. 냉기는 냉긴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냉기라고 해야 하나? 이상했지만 들어갈 순 없으니 그냥 너희 집을 빙 둘러보다가 이상한 데를 발견했어. 분명 너희 집 바로 뒤는 바위로 막혀있어서 공간이 없었는데 바위가 사라져있었어. 거기로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고. 그 공간이 나를 밀어내는 느낌이야. 그래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서 지금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 너희 아빠가 숨겨놓은 뒷마당 같은데 여기에 뭔가 단서가 있을 것 같아. 언제 한 번 마녀왕국 다시 들르러 올 때 너도 확인해봐. 물론 그 전에 내 얼굴 보러오는 건 까먹지 말고. 안 그럼 다음 편지엔 무슨 말이 적힐지 나도 몰라~?

 

편지를 다 읽은 퍼블리는 귓가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내용에 살짝 웃다가 본론으로 들어간 내용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냉기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그동안 마법사가 꽁꽁 싸매듯이 입던 옷차림이 떠올랐지만 다음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바로 상상을 덮어두고 마저 읽었다. 숨겨놓은 뒷마당이라는 말에 당장 돌아가서 확인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돌아갈 순 없었다.

저 혹시 아빠 말이야...”
아 글쎄 그 양반에 대한 건 저번에 말한 그게 전부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예전에 봤을 때도 옷을 거의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입었어? 한여름에도 한겨울처럼.”
아니 그냥 평범했는데? 여름에는 망토도 벗고 팔다리 내놓고 다녔지.”
일 때문에 만나는 고객도 아니고 지인의 자식인데다가 지인의 지인에게 존댓말을 듣는 건 어색하다며 편하게 말하라는 나름대로의 배려에 퍼블리는 전서구에게 크게 격식을 차리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GM에게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뛰어넘어 고집을 부리던 퍼블리는 여행 중인 GM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찾을 수 없단 말에 2시간은 더 매달린 후에야 포기했다. 물론 GM을 찾아간 걸 포기한 거였고 마법사에 대해서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양반이 아무 말도 안 했어? 뭐 그 양반 성격에 말 안하는 건 당연하고 그걸 뛰어넘어 오히려 묻는 상대 붙잡고 정보 털어갈 위인이긴 하지만...”

뒷말은 그렇게 흐려놨지만 굳이 뒷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우울하게 가라앉는 퍼블리의 모습에 전서구는 땀을 삐질 흘리며 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는 걸 전부 다 털어놓았다. 그렇게 퍼블리는 전서구의 시각으로 본 마법사의 과거 일부를 알게 되었는데 한 마디로 줄이면

용사 뒷바라지 하던 요정님이었지.”

GM 외엔 알 수 없었던 마법사의 지인 중에 용사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네 아빠는 인맥 만들거나 관리하는 건 그다지 관심 없어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으니 네가 GM 밖에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 솔직히 나는 그 양반이 용사양반 뒷바라지 하러 다닌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전서구가 말하는 용사라는 마법사는 폭풍 그 자체였다. 굉장히 천진난만한 성격에다가 호기심이 많고 그런 만큼 사고를 몰고 왔다고 한다. 마법사의 뒷바라지는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막거나 아니면 사고를 해결하거나였는데 완전히 나서서 해결하는 게 아닌 뒤에서 도와 결국엔 용사 스스로가 끝낼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식이었다. 물론 악의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기에 끝이 좋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결국 사고는 사고였다며 투덜거리는 전서구에 퍼블리가 의아해하니

그 용사양반 사고치는 거 빠르게 수습한답시고 내 등 위에 올라탄 게 너희 아빠다.”

전서구를 올라타게 된 이유에 대해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전서구의 푸념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다가 용사가 사건사고를 해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특유의 천진난만함에 친해진 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마녀왕국의 공주님과 흑기사단, 아난타가 속했었다는 전장과 분노였다. 하지만 아난타는 축제가 끝나고 일주일 후에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제가 있던 곳으로 다시 떠났다. 물론 떠나기 전에 찾아가봤지만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전서구 덕분에 꽤나 중요한 연결고리를 알게 된 퍼블리는 용사의 인맥이었던 자들을 찾아갈 생각으로 왕국에서 나왔다. 비록 간접적인 인맥이지만 늘 용사 곁에 붙어있었으니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퍼블리를 상념에서 끌어올린 건 아프지 않게 머리를 쪼는 전서구의 부리였다.

고 박치기로 상대할 육체파 머리로 뭘 그리 삥삥 생각하고 있냐? 얼릉 답장이나 써. 이래봬도 바쁘신 몸이야!”

그에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나 종이와 펜을 꺼낸 퍼블리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평평한 바위를 발견하고 그 위에 종이를 댔다. 뒤에서 느이 아빠 머릿속은 GM이랑 정 반대긴 하지만 두뇌파들도 아이고 이게 뭣이다냐하고 기겁하며 던지려던 도전장 집어삼키게 해서 쫓아낼 양반이라며 은근히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흘러 건네는 말은 못들은 체 하고는 간단한 안부인사와 언제 한 번 왕국에 들릴 테니 너야말로 까먹지 말고 얼굴 볼 준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내려갔다.

혹시 신성지대로 갈 일 없어?”
갈 일 없어! 거 은근슬쩍 물어보면서 내 소중한 등짝에 몸 올릴 생각하지 마라! 가는 길 가르쳐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

전서구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에 편지를 매달고 왕국으로 돌아갔다. 퍼블리는 그런 전서구가 작아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옷에 묻은 풀들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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