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이 로메루와 밸러니를 쓴 사람이구나...게다가 둘의 친우였다니 대단한 분인데?”
“이 시와 글만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해. 시가 적힌 종이에 그려져 있는 무늬가 바로 우리가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라고 부르는 그 장식무늬야.”
퍼블리는 집에 있는 옷장 안에 잔뜩 있을 옷들 위의 무늬들을 떠올렸다.
장미무늬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장식무늬인 모글리제의 산들바람. 하지만 대부분 모글리제라고 부르기에 산들바람에 대해 말한다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녀나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마법사라면 의아하다는 기색이 만연하다. 비오는 날의 호수처럼 차오르는 상념들을 담아 책에 적힌 글자들을 쓸어보자 손을 많이 안 탄 종이 특유의 빳빳함이 현실과 상념을 눈앞에서 섞기 시작했다. 그러다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흐려져 가던 현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어..어? 왜?”
“쉬는시간이야. 아직도 졸렸으면 그냥 엎드려서 자면 되지 왜 눈뜬 채로 자고 있었어?”
“아, 그냥 멍하니 있었던 거야.”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아니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펜을 집어들었다.
책의 오른쪽 윗모서리에서부터 아래로 사각이며 내려오는 상념의 첫 시작은 숲이었다. 이어 펜이 선을 그리며 내려가고 쓰는 건 마법사였다. 그 둘에서 멈춰 톡톡 점을 찍어대던 펜은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꽤나 빠르게 움직이는데 이윽고 드러난 단어는 마을이었다. 꽤나 흥분했는지 마을이라는 단어에다가 계속해서 동그라미를 치던 퍼블리는 아니카가 교실로 들어오자 굉장히 빠르게 아니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퍼블리의 행동에 아니카는 당황한 목소리로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쉬는시간 얼마 안 남았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퍼블리에게는 그 종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깨달음을 대신해주는 것만 같았다. 곧이어 앞문으로 선생이 들어오자 여전히 잡고 있는 아니카의 손을 끌어 자리로 돌아가고는 다시 펜을 들고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맨 처음 만나고 늘 같이 놀았던 그 마을! 혹시 어디였는지 기억 나?’
‘당연히 기억나지. 마지막으로 갔던 게 아마 1년 정도?’
‘그럼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GM할아버지알지? 그 할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근데 문제는 그 할아버지 어딘가로 여행 갔는데?’
그 대답에 쩡하니 굳은 퍼블리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움직였다.
‘어디로?’
‘나도 몰라. 엄청 긴 여행이 될 거라는데? 못 돌아올지도 모른대.’
그 말에 눈에 띄게 좌절한 퍼블리는 그대로 책에 얼굴을 묻었다. 곧이어 자는 녀석 깨우라는 선생의 외침이 있었지만 아니카는 그저 퍼블리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정과는 별개로 수업은 야속하게도 계속 됐다.
“GM할아버지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았는데...”
“같은 게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면 다 알고 있을 걸. 근데 그 할아버지 은근 다 알려주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안 알려주는 거도 있는 그런 느낌이어서 물어봐도 많이는 얘기 안 해줄 것 같은데?”
특히 너희 아빠 얘기라면 더더욱.
뒷말을 삼킨 아니카는 울적해진 퍼블리에 맞춰 느리게 걸었다. 늘 그렇듯 나오는 갈림길에 인사하려던 퍼블리는 곧이어 나온 아니카의 인사 아닌 다른 말에 그대로 멈췄다.
“오랜만에 놀러갈래?”
“어디로?”
“어디든.”
그렇게 대답한 아니카는 퍼블리의 손을 잡으며 번화가로 발을 옮겼고 퍼블리 또한 아무 말 없이 아니카가 가는대로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나온 번화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축제 준비로 한참 복잡한 때였다. 운동기구를 판매하는 가판을 바라보는 퍼블리와 딱히 집중해서 보는 것 없이 퍼블리를 따라 구경하던 아니카는 그렇게 30분 동안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번화가 골목을 돌기 전에 발길이 조금 뜸해졌을 때 나오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잠시 돌아다니는 걸 멈춘 둘은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다가 충분히 쓰다듬을 받은 고양이가 떠났을 때 다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너희 집 비밀상자가 열쇠는 물론 자물쇠랑 여는 데도 없는데다가 너무 꽉 다물고 아무것도 너한테 알려주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솔직히 무용담이나 학창시절의 교육제도 같은 건 말하지 않을까 싶은데 너무 돌같이 있으니 네가 뭐라도 알고 싶어하는 건 이해해. 그런데 넌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사실 그것들도 좀 궁금하고 들어보고 싶은데 네 말대로 그런 것들보다 알고 싶은 게 있어.”
퍼블리는 쭈그려 않던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고양이도 마녀들도 지나다니지 않고 들려오는 거라곤 벌레가 찌르릉 울어대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니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아빠는 마법사야.”
발끝을 세워 땅에 툭툭 두드리면서 덧붙인다.
“나는 마녀고.”
아니카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도 호응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예전에 아빠보고 싶다고 울었을 때 GM할아버지가 나한테 가르쳐줬어. 마녀는 장미꽃에서 태어나고 마법사는 호수에서 태어난다고. 호수는 옮길 수 없고 설령 옮기려고 물길을 틀어버리면 물이 오염돼서 나중에 호수에서 태어날 아기한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지. 하지만 장미꽃은 호수에 비해 옮기긴 쉬웠다고 했어. 물론 세심한 주의와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했고 난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 그냥 그 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할아버지가 재밌고 신기한 얘기를 하는구나 싶었지. 나는 그 때 내가 아빠처럼 마법사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마녀래.
잠시 숨을 돌리며 말을 멈추다가도 바로 이어간다.
“여기 와서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신 것보다 더 자세하게 배웠는데 야생 장미꽃들은 이 왕국 어딘가에 있을 장미정원으로 옮겼대. 하나도, 남김없이. 게다가 그 정원의 위치는 왕궁의 마녀들만 알고 있어.”
그런데 아빠는 대체 어떻게, 어디서 나를, 장미를 찾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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