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얘기해주지도 못하고 가버려서 미안해요.”

“아..아니에요. 수업 때문에 바쁘신데 붙잡아서 죄송했어요.”

아니카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의 시작은 사과 주고 받기였다. 아니카는 친절함이 모이면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그만큼 모였구나 싶다는 말을 삼킨 채 퍼블리 앞의 아난타를 바라봤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쉬는시간 때의 퍼블리의 질문도 들었고 방금 전까지 나눈 대화도 들었다면 자신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게 분명하다. 하물며 선생이란 위치를 넘어서 정화라는 이름의 전쟁까지 치룬 마법사인데 말이다.

“이런, 이번엔 제가 붙잡아두고 있네요. 아까 놀라게 하고 다치게 할 뻔했으니 그에 대한 미안함이에요.”

그렇게 말하던 아난타는 들고 있던 걸 건네줬다. 얼떨결에 받아든 퍼블리는 놀라면서 다시 돌려주려고 했지만 어느새 아난타는 다섯 걸음 멀어져 있었다.

“놀란 데에 진정하고 차분하게 하는데 좋은 차예요. 집중력도 높여주니 친구랑 같이 마시세요~”

그렇게 덧붙인 아난타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다시 돌려주기 위해 달리려던 퍼블리를 붙잡은 아니카는 퍼블리가 쥐고 있는 방금 받은 찻잎 통의 뚜껑을 잡아 열었다. 당황하는 퍼블리가 말릴 새도 없이 손을 넣고는 무언가를 꺼냈고 찻잎 통을 멀리 두려던 퍼블리도 그대로 멈춰 아니카의 손에 든 걸 바라봤다. 네모 모양으로 두 번 접힌 쪽지였는데 펼쳐보니 낱글자와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어머~”

“이게 뭐야?”

“도서번호.”

눈치가 빠른 걸 넘어서 길잡이 역할까지 한다는 말을 덧붙인 아니카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아난타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다가 퍼블리에게 말했다.

“일단 도서실을 찾아가봐야겠네.”

“도서실?”

“이렇게 친절하게 길까지 가르쳐 줬는데 안 가면 섭하겠지~ 내일 점심시간에 도서실 가서 이 책 찾아보자.”

쪽지를 다시 곱게 접어 돌려주는 아니카를 보고 의아하다는 투로 말을 꺼낸다.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쪽지를 숨겨서 주는 걸까?”

“우리가 숨기니까 그쪽도 숨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거겠지. 일단 우리한테 필요할 책일 거야. 아니면 오지랖 좀 더 부려서 추천하고 싶은 책을 적어서 넣어놓은 거겠지. 이를테면 왜 다칠 뻔하고 놀랐는지 모를 퍼블리의 심장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라던가?”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 퍼블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점심시간에 나 혼자 교실로 돌아갈 때 앞에서 벽이 무너졌었는데 그게 아난타 선생님이 부순 거래.”

“보기랑은 다르게 꽤 과격하시네~?”

“아무래도 정화 때 직접 숲으로 들어가셨던 분들 중 한 분이니까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 본인 말로도 격투가라고 했고.”

찻잎 통의 뚜껑을 다시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둘은 갈림길까지 가는 동안 아난타와 책, 찻잎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이내 방향이 갈라지고 대화 또한 자연스럽게 갈라져 끝마치고는 그대로 풀리지 않은 채 각자의 머릿속에 빙빙 돌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서기 전에 퍼블리는 잠시 집주변을 둘러봤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길, 섣불리 발을 들이기 힘든데다가 흙이 많은 터라 구태여 이곳에 발을 들이는 마녀는 없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느 다른 집들과 이 울퉁불퉁한 땅 위에 덩그러니 세워져있었지만 다른 집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여기에 집이 있는 건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큰 길을 지나다니는 마녀들은 다 지나치면서 한 번쯤은 돌처럼 봤을 게 뻔했다. 하지만 정작 이 집을 찾아오는 건 편지를 물고 오는 비둘기들 뿐. 퍼블리는 새삼 제 보호자가 세심하고 철저하단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에서도 늘 온 몸을 싸매다시피 입는 마법사는 겨울이라면 모를까 겨울이 지난지 한참이고 봄도 열기에 물러나며 함께했던 꽃들을 거두고 간지 오래인데도 늘 저렇게 입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엄청난 무더위가 쏟아져 찾아올 텐데도 마법사는 저 혼자 겨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시원한 바람이 통한다는 천을 입어도 안에 더 받쳐 입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더군다나 저 천들은 바람이 잘 통하는 천도 아니었다. 어린 날 호기심에 제 아빠이자 엄마랑 똑같이 옷을 입어보고 싶다며 몰래 옷장에서 꺼낸 윗도리를 그 작은 몸에 싸매다시피 입고 햇빛이 쨍하니 내리쬐는 여름하늘 아래로 나가자마자 쓰러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제 거의 매년마다 묻는 것 같은데 안 더우세요?”

“거의 매년마다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은데 안 더우니 멍하니 서서 회상에 잠기는 건 그만하고 들어와라.”

퍼블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으러 가려다가 아직까지도 들고 있던 찻잎 통을 발견하곤 새로운 대화 주제를 찾았는지 다시 말을 꺼냈다.

“아난타 선생님이 이거 주셨어요.”

그리고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벽이 날아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 때 어쩌면 다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 그에 대한 미안함이 담긴 선물이라는 얘기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듣고 있던 패치는 찻잎 통에 시선을 주다가 수업시간으로 이어지는 얘기에 집중했다.

“어제 아..엄마가 가르쳐주신 대로 마법사측 팀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본인이 전장과 분노에 속했던 마법사이자 격투가라고 했어요.”

“겸손하군. 단순히 속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 팀을 이끌던 대표자였다.”

퍼블리는 벽 날릴 때부터 범상치 않았더니 역시 엄청난 마법사였다는 감탄을 간신히 삼켰다.

“저주 때문에 한동안 잠든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었는데 지금 신성지대로 들어간 이유가 자신과 함께했던 팀원 분들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별 대답이나 호응 없이 그저 눈을 감았다. 뭐라도 반응이 나올까 기대했던 퍼블리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지 않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사과 외에 따로 얘기한 건 없었나?”

“네, 없었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방문을 닫은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 위로 손을 올리며 그 안에 쪽지가 든 부분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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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오...많이 놀랐나보네요.”

벽을 부술 정도로 마법을 쓴 제 잘못이라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지만 퍼블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난감한 얼굴로 먼지를 털어내던 아난타는 구멍 난 벽 너머에서 부르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미안하단 말을 덧붙인 후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앞의 파편들이 둥실 떠오르더니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고 이내 벽은 금 간곳 하나 없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에 굳어있던 퍼블리는 다시 교실로 가는 발을 뗐다.


“여러분 점심시간에 많이 놀라셨죠? 방음 마법 실험을 하는 김에 방어 마법 실험도 겸하고 있는 터라 소란이 일어났지요. 그러니 지진이 아니니까 학교는 일찍 안 끝난답니다, 그러니 창문으로 뛰어나가지 마시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쉬움 섞인 탄식들이 늘어진 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날처럼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은 아난타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책이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역사 시간은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몇몇 학생들이 이번엔 자습을 기대하는 건지 다른 책을 꺼내기도 했다. 물론 공부용이 아닌 베개용이었다.

“왜 제가 역사책을 들고 오지 않았을까 궁금해 하는 것 같네요. 사실 오늘 제가 가르치는 부분은 아무래도 제가 경험자라고 할 수 있으니 책은 필요 없을 거란 생각에 두고 왔답니다.”

경험담이라는 말에 눈치 빠른 학생들은 나른하게 늘어지던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오늘 수업 부분의 경험자라고 하면 과연 누구겠는가.

“저희 마법사측에서 직접 숲으로 들어간 팀은 네 팀입니다. 하늘의 현자 컨티뉴가 속한 소수정예 다섯 명중 세 명의 팀, 이 왕국의 공주님과 교류했던 흑기사단, 지금의 신성지대를 세운 책사 홀리와 철퇴로 유명한 프라이드가 이끌던 군단, 마법과 무술의 결합을 수행한 아홉 명의 격투가들이 모인 팀 전장과 분노.”

잠시 숨을 삼킨 아난타는 한탄과 같은 말을 꺼냈다.

“저는 바로 전장과 분노에 속했던 마법사이자 격투가랍니다.”


비록 점심시간 바로 뒤의 수업이었지만 자는 건 물론 조는 학생은 없었다. 수업은 책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 딱딱한 설명이 아닌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나게 얘기하는 데에 큰 흥미를 느꼈고 실제로 내용은 긴장감이 돌 정도로 머릿속에 잘 들어왔다. 누구든 설명보단 이야기를 더 쉽게 받아들이기 마련이었고 그 증거가 바로 학생들의 수업태도였다.

집중해서 얘기를 듣던 퍼블리는 눈을 크게 뜨고 아난타를 바라보다가 이마를 책에다 아프지 않게 내려찍었다. 다행히 이쪽을 보고 있진 않았는지 목소리는 끊기거나 걱정스레 다가오지 않고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런 퍼블리의 행동에 아니카가 퍼블리의 머리카락이 닿지 않은 책의 윗 모서리 부분에 무슨 일이냐고 적었다. 퍼블리는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고 손만 움직여 바로 그 아래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나 정말 바보 같아서.’

아니카는 우리 근육이가 또 왜 이럴까라고 적으려다가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있던 퍼블리를 떠올리고는 손을 멈췄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퍼블리가 답을 찾은 것 같아 수업이 끝난 후에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물어보기도 전에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자마자 퍼블리가 자리에서 뛰쳐나가다시피 일어서 문 밖으로 나가버려 본인도 거의 뛰어가다시피 따라가느라 바빴다. 교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발견한 퍼블리는 방금 전까지 수업 아닌 수업을 하던 아난타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아난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반쯤 뒤돌아 있는 상태였다가 자신을 불러 세운 상대를 보자 난감한 기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니카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때에 퍼블리가 급한 기색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용건이자 질문을 내놓았다.

“혹시 패치라는 마법사를 아시나요?”

다가오던 아니카도 멈춰 섰다.

순간 시간이 늘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긴장감이 둘을 감쌌지만 그런 게 무색하게 아난타는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바로 다음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난타가 사라지고 조용했던 주위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목소리와 발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다시 우두커니 서있는 퍼블리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너희 집에서 햇빛 쬐고 물 마시는 풀이...밸러니의 숲 정화 때 고개든 풀 같다?’

‘아까 아난타 선생님의 수업 들으면서 느꼈어. 어제 아빠의 수업이 수업 같지 않았던 건 역시 경험담이었기 때문이야!’

쓰고 지우는 소리가 제법 빨랐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필기가 많은 수업이라 이런 필담이 들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일 순 있겠지만 그만큼 필기해야할 걸 놓치고 있단 점에서 불행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난타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하셨어. 경험담인 게 분명할 텐데 왜 모른다고 하신 걸까?’

‘모르는 게 더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 생각 많은 근육이?’

‘하지만 밸러니의 숲에 직접 들어간 건 네 팀이잖아?’

‘너 혹시 흑기사단이나 마법사 군단들이 많아봤자 10명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 아래에 대답은 적어지지 않았다.


퍼블리는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쉬는시간에도 아니카의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밸러니의 숲의 크기에 대해서 지도까지 펼쳐들며 놀려대는 아니카를 피하는 동안 시계바늘이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알아봐야 할 건 흑이냐 백이냐 아님 삼총사냐 이 셋인데.”

“삼총사는 아닐 것 같아. 엄청 눈에 띌 텐데 모른다고 했으니까.”

“내 생각엔 아마 흑일 거야. 지금의 신성한 게 백에서 바뀐 거니까.”

마지막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자마자 발소리와 목소리가 뒤이어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란을 거들며 교실 밖으로 나선 둘은 이젠 필담이 아닌 목소리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둘의 목소리는 소란을 거들면서도 묻혀서 흘러가기 바빴다. 한 바퀴 돌려 말하는 대화가 학교를 완전히 벗어나 운동장에 발을 딛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서 갈라졌다.

“저기..퍼블리 학생?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지만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뒤를 돌아보니 아난타가 미안한 기색으로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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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교실에 도착할 때쯤에 얘기를 마쳤고 교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교시를 담당한 선생이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됐다. 떠드는 소리가 잠잠해지는 건 칠판을 두 번 두들길 때쯤이었다. 곧이어 교실을 채우는 건 수업 내용을 담은 말과 사각거리며 종이가 빽빽해지는 소리였지만 퍼블리의 머릿속은 아직까지도 무거운 안개로 채워져 있었다.

“자 그래서 오늘 배울 약새풀이란, 음...이걸 설명하기 전에 너희들 역사 어디까지 배웠지? 이거 이해하려면 밸러니의 숲 정화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맨 앞줄에 앉아있던 학생이 전반적인 건 배웠다며 답했고 익숙한 단어에 퍼블리는 초점을 다시 현실에 맞췄다.

“그래 그럼 알겠네. 밸러니의 숲을 정화하게 된 이유는 숲 자체가, 즉 저주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지? 약새풀도 이 저주의 산물이다. 가장 오래됐지.”

손을 한 번 슥 움직이자 금빛 가루가 따라가듯이 반짝이더니 곧이어 온통 새하얗고 빽빽해 보이는 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약새풀이다. 진짜는 너무 귀해서 가져올 순 없고 이렇게나마 환영영상 마법으로 담아 와서 보는 게 최선이다. 나중에 재료 쪽으로 가는 애들은 진절머리 나게 듣고 보게 될 풀이지만. 이 풀은 밸러니의 숲에서만 자라고 채집할 수 있는 풀이고 재배가 불가능한 풀이지. 그리고 이것도 가르쳐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바로 이 풀이 저주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증거가 돼서 정화 작전이 세울 수 있게 만든 고마운 풀이지.”

분명 밸러니의 숲에서만 볼 수 있었던 풀은 숲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들판에서 발견된 덕분에 저주가 숲에서만 그치지 않고 점점 숲 바깥으로 나온다는 증거가 됐다. 선생의 말을 빌려 고맙다고도 할 수 있는 풀은 저주가 정화됨과 동시에 더 이상 자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밸러니의 저주가 섞인 마력을 양분삼아 자라기 때문에 저주가 정화되어 사라졌으니 당연하게도 이 풀은 정화에 성공한 순백의 날 이후로 그 어디에서도 자라지 않게 됐고 남아있는 약새풀들은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지. 원래도 저주가 가득한 숲에서 자란 터라 채집하기 힘들어서 비쌌는데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런데 저주를 먹고 자라는 풀이 왜 그렇게 비싸냐, 그건 이 풀은 태우면 냉기를 뿜어대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흔히 앞뒤 안 맞는 말을 지적할 때 약새풀 태우는 소리한다고들 하지. 바로 약새풀의 이런 특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손과 함께 마법을 거둔 선생은 칠판에 방금 전까지 설명한 약새풀의 특성과 용도 및 가지고 있는 의의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방금 전까지 봤던 약새풀을 잊을 새라 그리기 시작했고 아니카는 눈을 반쯤 감으며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판을 반쯤 채운 선생은 뒤돌아 학생들을 쭉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하는 건 무조건 시험문제 낼 거니까 깨어있는 기특한 녀석들은 자는 녀석들 깨우지 말고 들어. 이 풀은 저주를 양분삼아 자랐다는 거에 걸맞게 매우 무서운 풀이다. 이 풀을 먹게 되면 체내의 마력이 얼어붙게 되고 내버려두면 점점 속도가 빨라져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마력이 전부 얼게 된다면 그건 이미 얼음덩어리나 다름없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전부 다 얼어버리기 전에 얼어붙은 부분을 떼어내 부수는 거야. 마력은 마법을 쓰면서 소모되는 게 당연하고 또 그만큼 휴식을 취하면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임의로 떼어내 부순 마력은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

덧붙인 말과 그 내용의 심각성에 비해 설명하는 목소리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먼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가벼웠다.


점심시간이었지만 퍼블리는 또다시 생각에 잠겨있느라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웬일로 아니카 또한 그랬는데 평소와는 달리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밥을 먹을 생각은 않고 그저 눈을 반쯤 감은 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점은 흐리지 않았고 오히려 뚫을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아니카는 옆에 앉아있는 퍼블리를 흘끗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는 밥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반쯤 흘러갔을 때 선도부 한 명이 찾아왔다.

“아침에 압수물품 관리하는 애가 깜빡 존 덕분에 이렇게 황금 같은 시간에 다른 애들 찾아오는구나~”

그렇게 아니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선도부 학생을 따라갔고 퍼블리는 먼저 교실에 가 있기로 했다. 원래라면 운동장 두 바퀴는 돌았을 테지만 지금 필요한 건 역시나 답답한 안개를 몰아낼 시간이다.

마녀로 변장한 마법사는 퍼블리의 엄마이자 아빠였고 많은 걸 가르쳐줬지만 정작 본인에 대한 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어린 날엔 물어볼 생각도 들기 전에 마을로 놀러가는 일이 잦았고 마녀왕국으로 온 이후엔 직설적이고 말동무가 되어줬던 아니카와 익살스럽고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놀아주던 GM이 보고 싶어서 울고 떼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그 때쯤에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마녀왕국에 왔냐고. 다만 그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왜 못 보게 하느냐는 원망이 섞인 외침이었을 거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니카와 다시 만나게 됐고 혹시나 잘못 본 걸까봐 두려운 마음에 눈을 맞춘 순간부터 있는 힘껏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바빴다. 그 때의 아니카는 매우 보기 드물게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당황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은 어쩌면 어느 날부턴가 만날 수 없었던 마법사 친구가 사실은 자신과 똑같은 마녀였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하는 모습에 진정하라며 토닥이던 손길은 이제 더 이상 멀리가지 않는다며 늘 등굣길에서 인사와 함께 흔들며 안심시켜주고 있었다.

아니카는 퍼블리를 다시 만난 이후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퍼블리 또한 다시 만난 이후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만약 사정을 정확히 알게 되면 마법사가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헤어짐을 반복할까봐.


“으악!?”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과 흔들림이 상념을 깨부쉈다.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는지 복도에 있던 학생들은 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명을 지르며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책상 아래에 몸을 숨기거나 가방을 챙겨 창문을 통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은 지진으로 학교가 일찍 끝나야한다며 외치고는 뛰쳐나간 이들을 따라갔다. 물론 그런 학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들과 선도부에 의해서 다시 학교 안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복도를 걷던 퍼블리는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는데 열 걸음 정도 앞에서 벽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먼지 연기 사이에서 언뜻 무언가 빨간색이 보였지만 연기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건 단정히 묶었던 곱슬머리가 산발이 된 채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는 마법사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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