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돼서 들어온 사람을 이렇게 냉정하게 내쫓을 거냐는 말도 꺼낼 법한데 치트는 아무 말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검은 건 그림자뿐이었고 더 이상 노란 건 방 안에 없었다. 햇빛만이 창문을 통해 환하고 뜨겁게 자극했다. 패치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거울이 있지만 멀리 있었고 볼 생각이 없었다. 손을 들어 천천히 입을 가리듯이 눌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화난 것처럼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꾹 다물어져 있었다. 검사를 마친 패치는 일어났다.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났나?”

아니요! 저도 방금 나왔어요!”

푹 잤엉?”

패치를 제외한 모두가 1층에 내려와 있었다. 평소보다 체력 소모도 더 하고 심적 소모까지 했다지만 갑자기 잠들어버리고 이렇게 늦게 일어났다는 게 이상하다고 느낀 패치는 아까부터 조용한 치트를 쳐다봤다. 언제나 그림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림 아래에 뭐가 있을 지는 가려졌으니 보이지 않았지만.

출발하지.”

가기 전에 사야할 게 있느냐 물으면서 완성한 목록을 들고 패치가 앞장섰다. 퍼블리는 아무래도 패치 혼자서 주문할 것 같은 느낌에 사고 있는 동안 마을을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고 패치는 어제의 장난 같은 걱정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워도 말을 한 걸 보면 꽤 오래 붙잡을 것 같으니.

용사는...이미 갔군.”

부디 먼저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나가더라도 입구 근처에 있길 바라며 패치는 치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치트가 모를 리 없었다.

혼자 들려면 무겁잖슴까.”

자네 신전에서 들어본 무거운 게 뭔가?”

신전의 책은 두껍답니다?”

신전의 책들을 가방에 넣고 들고 다녔나? 한 권씩, 아니면 손수레를 이용했겠지.”

. 그러고 보니 손수레 어떻습니까? 힘들게 들거나 메고 다닐 필요 없이 손수레에다 담아서 끌면 편하지 않겠슴까?”

울퉁불퉁한 흙길에서 뒤집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네.”

결국 가게엔 둘이 들어가게 됐지만 패치는 옆에 있는 걸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그거에다가 이 끈까지 함께 사면 딱! 떨어지고 좋아요.”

생각 없네.”

싸게 얹어드릴 게요.”

됐네.”

빈틈을 공략하려는 창과 창으론 어림없을 돌 벽의 전투에 치트는 얌전히 아무 말 않고 기다렸다. 다른 건 하나도 사지 않고 적어놓은 목록 물건들만 전부 구매했을 때 퍼블리가 용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니 용사와 만난 듯 싶었다.

적당한 때에 돌아왔군. 무게는 비슷하게 나눴으니 각자 들게.”

나눠놓은 짐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는 용사의 팔을 잡아 제대로 메게 한 퍼블리는 미리 와서 도와주지 못한 거에 대한 미안함을 건넸다.

어차피 사는 것과 나누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네.”

어이구 용사님 급하시네~ 우리도 얼른 뒤따라가죠?”

가방을 제대로 메자마자 뛰어나가는 용사를 따라 치트가 따라 나갔다. 퍼블리는 바로 따라가지 않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패치에게 물었다.

...괜찮으셨어요?”

물건 사느라 바빠 별 일 없었네.”

패치는 그렇게만 말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가게 주인에게 꾸벅 인사한 퍼블리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앞서가는 뒷모습을 봤다.

일어나고 방 밖으로 나왔을 때 보였던 건 마침 나오고 있던 치트였고 일어나셨냐며 인사하려고 했지만 그 방이 패치가 있던 방이었다는 걸 깨닫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패치는 치트에게 단순히 싫어한다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적대감과 경계를 보였고 치트는 웃으면서 그런 패치를 계속 자극했다. 그리고 나오면서 치트가 지었던 표정은...

퍼블리는 정말 별 일 없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묻어놓은 건데 자극하는 걸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정말 말한 대로 별 일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묻는 것 자체가 자극이 될 수 있었다.

목적은 따로 있긴 하지만 일단 여행을 하겠다고 한만큼 처음과 같은 싸움은 가급적 일어나지 않게 할 테니 눈치 볼 필요 없네.”

...”

퍼블리는 아침에 용사가 나오기 전, 치트와 단 둘이 있었을 때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그 때 치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주 큰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패치는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죠. 더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 정도만 말할 수 있슴다.”

퍼블리는 그 다음엔 기운차게 뛰어나오는 용사에게 5년 전에 무슨 큰 일이 있었는지 들어본 적 있냐며 물어봤다. 용사는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신나게 날아다녀봤다고 얘기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 때 사제 하나가 마법사에게 무슨 일을 저질러서 마법계가 떠들썩해졌다는 식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기술의 도시엔 마법사도 많나요?”

거기 사는 사람들 전부가 마법사 아니면 공학자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네. 마을 내에서의 개인제작이 아닌 이상 지금 쓰는 모든 마법도구와 기계 전부 거기에서 제작되다시피 하고 있지.”

사실 본격적으로 뭉쳐서 기술의 도시라고 불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종교가 태도를 바꾸기 전에는 마법과 기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기술의 도시가 된 땅의 터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땅 위로 자라는 게 없어 땅을 갈아엎고 교통지로 쓰기 적당했다. 다만 적당하다는 게 바퀴가 덜컹거리거나 빠질 일이 없다는 거였지 그 넓이가 작다는 게 아니었다.

도시를 이룰 정도로 큰 땅이었으니 거리가 꽤 되어 중간에 거리를 줄이기 위해 한 마법사가 가게 겸 작은 개인 연구소를 차린 걸 계기로 연구자와 장인, 그것들을 파는 상인들이 늘어나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경쟁판매 전략 또한 세워져 마법과 기계가 뒤섞였고 더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기 위해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래서 기술의 도시라고 정식으로 불리기 전엔 손님이었던 다른 마을 사람들은 임시적으로 상업도시라 불렀었다.

갈등의 골이 깊었던 만큼 이 도시는 갈등이 대놓고 일어났었다. 그러다가 종교라는 공공의 적이 등장했고 마침 도시는 신전과 제법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를 견제하기 알맞았지만 계기가 없어서 여전히 붙어만 있는 상태였었다. 그리고 5년 전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벌어졌고 한 공학자가 기술이 넘치는 이 땅은 단순히 상업도시라고 불리기는 아깝다는 말을 꺼내 이 땅은 기술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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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마저 가볼까요?”

용사는 본인이 납득한 대로인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주변에 흥미가 없어서인지 잘 따라오고 있었다. 대신 묻는 게 많아졌다.

요기 나비는 왜 색깔이 달라?”

나비도 사는 데마다 색이 달라요.”

사는 데마다 왜 달라~?”

일행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용사는 말투는 물론이고 행동과 호기심 모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서 퍼블리는 용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자칫하다간 진짜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대해버릴 것 같아서 주의 깊게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사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색이 다르다네.”

패치가 대신 대답하자 용사의 시선이 패치에게로 돌려졌다.

숲 안쪽에 꽃밭이 있었나?”

!”

그럼 그 꽃잎과 비슷한 색을 지녔거나 숲에 사니 나뭇잎처럼 보이게 색을 가졌겠지. 숲엔 나무가 많은 만큼 새 둥지도 많으니.”

녹색 풀이 가득한 가운데 조금씩 머리를 들고 있는 꽃들 위에 화려한 색의 나비들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나무가 적지.”

용사는 이해를 했는지 더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비들을 둘러봤다. 그 이후부턴 자연스럽게 둘로 나뉘어 앞서가는 건 치트와 퍼블리였고 뒤따라가는 건 패치와 용사였다. 용사는 계속해서 물었고 패치는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부분까지 대답했다. 간혹 가다가 나오는 어려운 단어에 용사는 그 단어가 무엇인지도 물었고 처음에 뭘 묻고 있었는지 까먹기 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패치는 용사의 곁에서 쉽게 떠날 수 없었고 떠날 생각도 없어보였다. 퍼블리는 옆에 같이 걷고 있는 치트를 힐끔 쳐다봤다. 혹시 마법사님은 일부러 이렇게 움직이게 되는 상황을 의도한 걸까.

드디어 마을이 보이네요.”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 마을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마을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찾은 건 여관이었다.

“1인실 넷으로.”

“2인실 하나에 1인실 둘도 좋습니다.”

헛소리 말고 가서 짐들이나 나눠서 정리하게. 자네가 2인실 쓸 건가?”

당연히 제가 쓰려고 물은 겁니다. 그러니까 저랑 같은 방 쓰는 게 어떻습니까?”

자네는 기억을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능력이라도 가졌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같이 방을 쓰자고?”

싸우지마아아앙~”

다시 터져 나오는 살벌한 기세를 진정시킨 건 용사였다. 덕분에 대화 흐름이 끊겨 진정한 패치는 다시 1인실 네 개를 말한 후 바로 돈을 내고는 열쇠를 챙겨들어 던졌다. 열쇠를 받아든 치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짐을 챙겨들어 2층으로 올라갔다. 패치는 퍼블리와 용사에게 열쇠를 건네고 자신의 짐을 챙겨들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내일 날이 밝으면 둘러보지. 혹시 당장 필요한 물건 있으면 찾아오게.”

!”

퍼블리는 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용사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패치는 그 자리에 남아 여행 물품을 파는 가게가 어디쯤에 있는지 물었고 두 건물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나온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해가 져서 문을 닫았을 거예요.”

해가 져도 아직은 저녁인데 빨리 닫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요즘 여행객은 물론이고 마을 들리는 사람도 적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 가게 주인이 오랜만에 오는 손님을 붙잡아 많이 팔아치우려고 할 게 분명하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며 걱정 아닌 걱정이 들려왔지만 패치에겐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이제껏 걸어왔기 때문에 마을을 돌아다니고픈 마음도 없어 패치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방은 계단과 꽤 가까운 방이었다.

씻는 곳이 방마다 딸려있는지 물이 나오는 기계와 함께 세숫대야가 구석의 칸막이 안쪽에 있었다. 아쉽게도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았지만 겨울도 아니었으니 못 씻을 정도는 아니었다. 손을 씻고 얼굴을 씻던 패치는 문득 더운 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어야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떠올렸다. 어디서 들었는지, 누가 말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 얘기가 떠오른 이유는 고운 옷과 따뜻한 물로 씻으면서 살아왔을 게 뻔한 사제가 과연 이 찬물로 씻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피곤하긴 정말 피곤한가보군.”

걱정은 아니었지만 이런 의문이 든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패치는 거친 손으로 물기를 닦았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치트를 신경 쓰고 있는 스스로에게 못마땅했다. 그 아래에 깔린 게 의심과 경계라 해도, 지금처럼 곁에 없는 순간에도 생각과 감정을 소모하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패치는 가지고 있는 짐들을 살펴보며 내일 사야할 게 뭔지 짚어보았다. 작은 종이에다가 목록들을 적어놓고 퍼블리에게도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일어나던 순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제는 문에서 들린 게 아닌 창문에서 들린 소리였다. 돌아보니 창문 너머엔

용사?!”

대체 어떻게 서 있는 건지 용사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당황한 패치가 창문을 열었고 용사는 놀리듯이 멀어졌다. 패치가 용사를 노려보며 마법도구나 기계가 있는지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비행마법을 쓸 줄 알았나?”

칭구가 해줬엉!”

그 친구가 대체 누구냐며 물으려고 하니 갑자기 창문과 벽이 사라졌다. 이것도 그 용사의 친구가 한 짓인가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가 따지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문을 잠그지 않았나 싶어 돌아보니 옷자락을 잡고 있는 건 그림자였다. 손만 올라와 잡고 있던 그림자가 바닥에서 서서히 떨어져 똑바로 섰고 그림자 때문에 보이는 건 온통 검은 색 뿐이었다. 한 번 눈을 깜빡이니 그림자 안에서 노란 빛이 반짝이며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일어났습니까?”

패치는 어느새 누워있었고 바로 앞에 저를 내려다보는 치트를 눈을 뜨면서 제일 처음 봤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니 목록을 적다가 잠들었는지 쓰다만 종이가 손에 쥐여져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치트와 눈을 마주한 패치는 치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딱 한 단어만 말했다.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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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발을 뗀 여행에서 걱정되는 건 치트와 패치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로 용사 때문이었다.

오와아아아앙!! 나무들이 없어!!”

여기는 숲 밖이라서 나무들이 없다기 보단 적은...저기 용사님? 잠깐만요!”

숲 밖으로 나온 용사는 갖은 기행을 벌였다. 하늘을 보면서 뛰다가 넘어지고 그 김에 풀밭을 구르다가 일어나면 손에 뱀이나 달팽이가 쥐여져있는 건 기본이었다. 잠시 눈을 떼면 머리가 하늘과 겹쳐 보일 정도로 멀리 가 빨간 망토 색으로 용사를 찾아야했다. 숲에서 나온 이후로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역할들이 주어졌다.

용사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 지켜보는 담당이 패치, 잠깐 놓친 순간에 용사를 찾아내는 담당이 치트, 바로 달려가서 용사를 데려오는 담당이 퍼블리였다. 치트는 관찰력이 좋아 대상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고 용사의 힘과 체력은 만만치 않아 용사를 따라잡고 데려올 수 있는 게 일행 중에선 퍼블리밖에 없었다.

아예 빛을 뿌려놔야겠군. 이러다간 하루만 노숙할 거리가 사흘로 연장될 걸세.”

얼마 전까진 지망생이었던 퍼블리는 지도 제작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지도제작자는 아니지만 꼼꼼하고 실용주의를 선호하는 패치에게 어떻게 표시하면 더 직관적이고 알아보기 쉬울까 의견을 나누면서 조언을 받고 있었다. 몸이 두 개는 아닌 패치는 퍼블리에게 조언하는 동안엔 자연스럽게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게 됐고 용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치트를 불러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반짝반짝!”

빛가루를 뿌리며 이동하니 용사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혹시 질려서 다른 데로 눈 돌릴까 싶어 중간에 변칙적으로 흩날리거나 폭죽처럼 터지도록 뿌리며 순순히 뒤를 따라오게 했다.

편하네요~”

언제 또 한 눈 팔지 모르니 아예 자네가 보고 있게.”

주변을 둘러 볼 사람은 필요하잖슴까?”

이 넓은 풀밭에 위험한 건 용사가 잡아왔던 뱀 외에 더 있나?”

제대로 가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긴 봐야죠.”

가면서 지도 만드는 중인데 무슨.”

패치가 바빠서 그런지 말투에 날이 서 있진 않았다. 비록 정신없긴 하지만 한결 풀린 분위기에 퍼블리 또한 안심했는지 표정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 또한 얼마 가지 않았다.

가까이 붙지 말고 떨어지게.”

여행 동료인데 사이가 돈독해져야죠~”

돈독이고 뭐고 간에 자네와 내 사이가 좋아질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노력은 해야지 않겠슴까?”

다시 시작되는 살얼음판에 퍼블리는 종이를 들고 슬며시 멀어져 용사 곁으로 갔다. 용사는 정신없이 뛰어다녀도 불편하진 않았으니 숨 쉬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도 마음 편히 용사 옆에서 흩날리는 빛가루들을 구경했다. 뒤돌아볼 때 더 이상 숲이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질 때 쯤, 앞선 둘의 살벌한 대화도 멈춰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행이지만 목적지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급하다보니 여행에 대해서만 말했군요? 목적지라기 보단 거쳐야할 곳들이 있습니다.”

거쳐야할 곳들은 총 네 군데였다. 기술의 도시, 각진 나무의 무덤, 하얀 들판, 사막. 가장 가까운 곳이 기술의 도시였고 먼 곳이 사막이었다. 이 둘 간의 거리는 꽤 멀었지만 거쳐야할 곳들 사이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사막 너머를 제외하면 상세지도까진 아니었지만 가는 길이 간략하게나마 있어 여행하기 적절한 곳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목표는 기술의 도시지요. 가장 가까우니까요.”

기술의 도시는 처음 가 봐요!”

기대 가득한 퍼블리의 말에 패치는 용사를 흘끗 돌아보고는 말했다.

기술의 도시까진 지금 여기에서 작은 마을을 두 번 정도 거쳐 가야하네. 빠르게 가면 나흘은 걸리겠지만.”

퍼블리도 용사를 돌아봤다. 패치가 빛가루를 뿌리는 걸 멈추니 용사는 바로 주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주 잘 아는 퍼블리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빛가루로 따라오도록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퍼블리는 결심한 눈으로 용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용사님 저희는 기술의 도시까지 가야해요.”

기수르 도시?”

기술의 도시오. 그런데 용사님이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면 저희가 용사님을 찾느라 도착하는 게 늦어질 거예요.”

그르면 가기 전에 다 둘러보장~!”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려요.”

그 말에 용사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여행은 천~천히 다 둘러보면서 해도 되는 거 아니양?”

맞는 말에 퍼블리는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거쳐 가야하는 곳이 있다곤 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행 자체가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고 둘러보는 것이니 용사의 말이 여행에 가장 부합하는 말이었다. 용사의 말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퍼블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패치가 나섰다.

갑작스럽게 모인 감이 없잖아 있어서 마땅한 준비를 못 했네. 평소에 돌아다니는 편이라 식량과 침낭을 챙겨뒀지만 지금은 네 명이고 여행하면서 굶거나 맨 바닥에서 잘 순 없는 노릇이잖나.”

그럼 푹신푹신한 풀들 찾고 오께!”

그렇게 말하며 달려가려는 용사를 붙잡아 말리는 퍼블리와 기절시켜서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는 패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치트가 결국 나섰다.

기술의 도시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렇슴다. 꽤 기대하던 곳이거든요.”

퍼블리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니 본인이 기대하다기 보단 퍼블리의 기대를 읽어서 하는 말이었다. 퍼블리는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 민망해하며 과연 그게 용사가 납득할 수 있는 말일까 의아해했다. 퍼블리에게 잡힌 채로 달려가려던 용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멈춰서더니

우웅 그렇구나~ 그릏담 빨리 가장!”

바로 납득하는 모습에 진작 그렇게 말할 걸 그랬다는 속을 누르고 용사의 팔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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