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는 말 그대로 끝이었다. 천장과 제 머리를 이어 숨을 멈춘 마녀는 하루가 지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음과 그 이후를 처음 보는 나는 처음엔 마녀가 다시 움직여 어디론가 가버린 줄 알았다. 훗날 알게 된 상식으로 죽음 이후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마녀와 마법사는 죽게 되면 바람, 물, 꽃잎, 풀 이 중 하나만 남기고 사라진다. 다음 날에 아무것도 없었던 걸 보면 그 마녀가 남긴 건 바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깔끔한 뒤처리였다.
아픈 것과 귀찮은 것, 그 때까지만 해도 이 두 가지는 내게 있어서 대표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이 두 가지보다 혹은 그 만큼 싫은 건 딱히 없다고 생각했었고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보다 더 참을 수 없고 싫어진 게 나타났다. 정확히는 나타났다고 하기 보단 자각을 하게 됐다는 게 더 적절했다.
“...이 책도 다 외웠어.”
그동안 느낄 새도 없었으니 자각하지 못했던 건 당연했다. 한 번은 물론이고 열 번, 스무 번, 백 번도 넘게 본 책은 어느 한쪽에 써져있는 내용들을 읊으라면 전부 읊는 걸 넘어 똑같은 책을 만들어낼 정도로 읽었다. 책등과 날개가 닳은 책, 보존마법이 걸려 있는 식량의 양, 가끔 비가 내리는 하늘. 이것들 외엔 주위에서 변하는 게 없었다. 천장에 걸려있는 밧줄마저도 그대로였다.
“진짜 지겹네.”
폭력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던 나는 평온을 맞이한 후엔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프고 귀찮은 건 여전히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바로 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지루함이었다. 지루함을 자각하자마자 집에 있는 모든 책들을 꺼내 읽고 쓰고 외우는데 집중했다. 뜻 모를 문장과 처음 보는 단어가 있어도 무작정 읽고 쓰고 외웠다. 나는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루함을 몰아내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책들도 결국 끝을 보이고 말았다.
단순히 책장에 꽂힌 책들뿐만 아니라 집 곳곳에 숨겨진 책들과 종이뭉치들을 전부 모아 모두 읽고 외웠는데 결국 남은 건 너덜너덜한 책과 종이들, 마녀의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낡고 잠긴 상자 그리고 아직 꽤 남은 식량들. 변한 게 없었다. 집 안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은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책으로 배운 마법을 어설프게 써서 즉시 탈진해서 쓰러지거나 제대로 성공한 마법들을 조합해 발 빠른 토끼, 혹은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 주변에 있는 풀과 열매를 먹이며 상태를 살펴보기도 했고 반응이 괜찮은 것들은 챙겨서 보존마법이 걸린 식량들과 함께 놓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주변의 풀숲들을 전부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밤늦게까지 밖에 있었을 때 먹었던 열매.
“꼬마야 보호자는 어디 있니? 왜 혼자 있어?”
주변에 말을 하는 자는 마녀와 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굳혔지만 어깨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게 있었다.
“놀러왔어요! 열매 따고나서 이따가 만나기로 했어요!”
“좋은 곳으로 놀러왔구나? 여긴 위험한 생물들도 없으니 안전하지.”
어린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하니 바로 의심을 접고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본 마법사였고 얼굴자체를 기억할 수 없는 마법사였다. 평평하고 색을 넣은 유리가 눈과 그 주변을 가리고 입은 하얀 천으로 싸여있어 빈틈이 아무데도 없었다. 머리에는 당시 내 표현력을 빌리자면 하얀 비누거품 같은 걸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딸기가 아주 달게 익었을 시기구나.”
“딸기요?”
“음? 딸기 따러 온 거 아니었니?”
“까만 점들이 가득 박힌 열매예요.”
“그게 바로 딸기란다.”
그 열매의 이름을 알게 된 나는 연신 입 안에서 그 이름을 굴려댔다. 딸기가 많이 열린 데를 봤다는 그 마법사의 말에 답지 않게 경계고 뭐고 옷자락을 잡으면서 데려다달라고 외쳤다. 그 때 마법사가 무슨 얼굴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을 흘리면서 옷자락을 내 손을 잡고 훨씬 작은 내 발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달빛에 겨우 형체만 알아보고 먹은 열매는 자세히 보게 되니 굉장히 빨간색이었다. 분명 희끄무레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도 못한 색이어서 얼떨떨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주위에서 그만큼 빨간 건 딱 하나 뿐이었다. 긁힌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
“왜 그러니?”
“...빨개요.”
“딸기는 익으면 이렇게 빨갛게 된단다.”
같은 빨강이었지만 여러모로 달랐다. 홀린 눈으로 새빨갛게 익은 딸기를 하나 따서 입 안에 넣었다. 가장 먼저 터져 나와 입 안 가득 자리 잡은 건 설탕과는 다른 달콤함과 그 뒤에 바로 붙은 상큼함이었다. 단 거라고는 설탕뿌린 빵 외엔 먹어본 적 없고 시큼함은 느꼈어도 상큼함은 처음 느낀 나에게 있어서 이 딸기는 충격과 새로움 그 자체였다. 제대로 익지도 않았을 땐 배를 채우기 위해 급하게 넘겼지만 지금 먹은 딸기는 넘기는 것마저도 아까워 천천히 씹으면서 굴렸다.
“맛있나보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손이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는 걸 느끼며 딸기를 하나 더 땄다. 혹시나 떨어뜨릴까봐 아니면 생채기라도 낼까봐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딴 후 그 모양 그대로 어느새 비어버린 입 속에 채워 넣었다. 동시에 가슴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만큼 아직 부족함을 느꼈다. 뭐든 간에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설익은 딸기는 시큼하지만 잘 익은 딸기는 달고 상큼하지, 거기서 더 익으면 물렁해지고 단 맛만 강하게 남는데 그만큼 익는 시간이 빨라 잘 익은 때가 금방 지나가버리는 까다로운 녀석이야.”
이번에도 딸기를 아껴 씹으면서 그가 하는 말들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이렇게 그냥 먹는 것 말고도 다양하게 가공해서 먹는 방법들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하거나 딸기와 비슷한 종류의 과일들의 이름들을 말해줬다. 얘기를 듣던 중 흥미로운 부분이 딸기에 쏠린 신경을 붙잡았다.
“마녀왕국이요?”
“마녀들이 먼저 모여서 이룬 왕국이라 그렇게 불리지. 지금은 에키테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마법사들도 살 수 있게 하고 있어서 지금 들어가려고 하는 마법사들도 많단다.”
집 안 곳곳에 마녀가 숨겨놓았던 공책과 종이뭉치에 자주 적혀 있던 단어였다. 마녀왕국, 왕궁 마녀, 장미꽃에서 태어난다는 마녀들 그리고...
“마녀왕국에 관심이 있니?”
“네. 그런데 마녀왕국이 적힌 책이 없어요.”
“흠...이 숲은 마을들이랑 꽤 먼데...”
그 마법사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반듯하게 접힌 지도였다. 집에 지도가 있긴 있었지만 그가 건넨 지도에 비해선 굉장히 낡은 지도라 정보의 차이가 컸고 무엇보다 이 숲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어 지도가 있으나마나였다. 그는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지도를 읽는 방법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여기가 지금 위치고 가장 가까운 마을은 바로 여기지.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가면 나오는 마을이야.”
방향과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당시 내 눈높이에 맞춰 친절하게 설명한 마법사는 선물이라며 지도를 나에게 줬다. 호의라는 걸 처음 접한 터라 약간의 얼떨떨함과 경계를 담아 올려다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지는 걸 보더니
“그래 바로 저쪽이 서쪽이야. 하지만 지금 가면 늦고 이제 해도 지고 있으니 얼른 집에 돌아가렴.”
그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는 나더러 집에 돌아가라고 했고 나는 집이 근처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보통 이럴 땐 어서 보호자와 만나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어렸던 나는 새로 얻게 된 지도를 보기 바빠 잘 가라고 짧게 인사만 하고 바로 관심을 끊어버려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마법사는 처음 만난 그 날 이후로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하늘의 현자라고 불리던 대단한 마법사였고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왕국 왕의 사망 및 공주가 모은 밸러니의 숲 조사대에 현자가 참여했다는 소식지가 곳곳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 일의 뒷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명확한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 무작위로 소식지를 뿌리는 비둘기들 덕분에 비둘기 우체부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소식지를 신청해 매일 기다렸다. 큰 사건이 없는 이상 어디에 무슨 꽃이 피었다 수준의 평화로운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조금이나마 지루함을 덜어줬기 때문이었다.
“매워서 못 먹겠는데 잘 먹네요.”
“구룩! 굵!”
소식지 같은 건 돈 대신 바로 먹을 수 있는 먹이 아니면 질 좋은(?) 나뭇가지나 지푸라기도 받는다고 해서 꾸준히 소식지를 볼 수 있게 됐다. 가장 쉽게 얻을 만한 게 나뭇가지와 지푸라기지만 비둘기들 입장에서 질 좋은 건 달랐던 건지 고르는 기준이 까다로워 차라리 돈을 내는 게 더 편할 정도였다. 마침 먹을 수 있는지 실험을 해보려고 모아둔 열매들 중에서 비둘기가 좋아하던 게 있었다. 매우 좋아하면서 멀쩡히 먹어 괜찮은 건가 싶은 마음에 덩달아 먹어봤는데 그렇게 매운 건 처음이었다.
“혹시 밸러니의 숲에 더 관련해서 적힌 소식은 없나요? 돌아온 이들의 무용담 말고요.”
“구루룱...”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던 비둘기는 옆에 있는 창문을 두 번 두들겼다. 아니다, 없다라는 뜻이었다. 매번 비슷하다 못해 별무늬가 새겨진 판으로 찍어내는 것처럼 거기서 거기인 내용이 나왔다. 정화가 성공하고 순백의 날이 된 때에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소식지와 정보가 참 즐거웠는데 갈수록 지루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소식지를 끊어버릴까 하던 찰나에 비둘기들도 얇지만 밥줄은 밥줄인지 끊기는 걸 원치 않아 다른 소식지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앞서 말한 평화로운 소식들이었다.
“만약 나온다면 다음엔 꼭 그걸로 부탁합니다~”
이런 소식지를 읽으면서 배운 건 바로 부드러운 말투였다. 상황을 보고 오는 건 비둘기지만 소식을 적고 형상화하는 건 마녀 혹은 마법사였으니까 이런 잔잔한 소식은 그들의 시점과 분위기에 따라 부드럽게 변했고 각자마다 말투가 다르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그리고 말을 알아듣는 비둘기는 그만큼 똑똑해서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면 어쩌다가 몇 번 소식지를 그냥 주기도 할 정도로 자기 기분과 예의를 잘 알고 있었다.
소식지를 다 읽었을 땐 마녀가 집 안 곳곳에 숨겼던 종이들을 계속 읽는 걸 반복했다. 내용은 다 외웠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는 내가 마녀왕국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했다. 어른 마법사들도 모를 정도로 내용을 꼬아놓거나 일부러 중요한 부분을 없애버린 게 많았다. 이걸 알아낸 건 그 현자가 알려준 마을을 한 번 찾아갔을 때 이 종이뭉치 일부를 들고 갔을 때였다.
“아가. 책 만들기 심부름이라도 왔니?”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종이뭉치를 가득 들고 마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닌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법 했다.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을 귀퉁이의 나무집을 가리키며 저기가 책가게라고 가르쳐주며 해지기 전에 얼른 심부름 끝내고 돌아가라며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그 나무집으로 바로 달려갔고 그곳에 가득한 책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린 손님은 오랜만이네. 동화책은 저쪽에 있다.”
“아뇨. 책 만들러 왔어요.”
“책을? 심부름이냐?”
“네.”
나에게 심부름을 시킬 마녀는 없었지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니 그렇다고 했다. 책가게 주인은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대여섯 장 훑어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이거...내용이 온전치가 않은데?”
“온전치 않다는 게 뭐예요?”
“이론식인가? 군데군데 빠진 데가 많고...뭘 만들려고 했는지 영 알 수가 없네. 실험 주체가 뭔지 아예 안 적혀 있어.”
당시에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멀뚱히 듣고만 있었다. 가게 주인은 나에게 정말 이걸로 책을 만들어 오라고 했냐며 물었고 그에 심부름을 받아서 책상 위에 있는 종이뭉치를 가져왔다고 대답했다. 이건 맞는 말이었다. 발견하고 마녀가 죽은 이후론 항상 책상 위에 내가 올려놨으니까 말이다.
“잘 보고 가져왔어야지. 내가 봐도 이건 책으로 만들 게 아니야. 아마 실패한 실험 이론식 같은데 고치려다가 네가 갖고 온 걸 거야.”
“실험은 뭐고 이론식은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좀 더 머리랑 키 커진 후에 네 보호자한테 물어봐라.”
반사적으로 보호자가 없다고 하려다가 꾹 입을 물어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녀는 보호자라고 하기엔 그 뜻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이뭉치를 다시 돌려받고 주위를 훑어보며 어떤 책들이 있는지 살펴본 나는 저 멀리 열린 방에 얼핏 보인 침대와 난로에 빨리 돌아가서 추운 밤에 대비해야한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가게와 마을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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