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는 말 그대로 끝이었다. 천장과 제 머리를 이어 숨을 멈춘 마녀는 하루가 지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음과 그 이후를 처음 보는 나는 처음엔 마녀가 다시 움직여 어디론가 가버린 줄 알았다. 훗날 알게 된 상식으로 죽음 이후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마녀와 마법사는 죽게 되면 바람, , 꽃잎, 풀 이 중 하나만 남기고 사라진다. 다음 날에 아무것도 없었던 걸 보면 그 마녀가 남긴 건 바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깔끔한 뒤처리였다.

 

아픈 것과 귀찮은 것, 그 때까지만 해도 이 두 가지는 내게 있어서 대표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이 두 가지보다 혹은 그 만큼 싫은 건 딱히 없다고 생각했었고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보다 더 참을 수 없고 싫어진 게 나타났다. 정확히는 나타났다고 하기 보단 자각을 하게 됐다는 게 더 적절했다.

 

“...이 책도 다 외웠어.”

 

그동안 느낄 새도 없었으니 자각하지 못했던 건 당연했다. 한 번은 물론이고 열 번, 스무 번, 백 번도 넘게 본 책은 어느 한쪽에 써져있는 내용들을 읊으라면 전부 읊는 걸 넘어 똑같은 책을 만들어낼 정도로 읽었다. 책등과 날개가 닳은 책, 보존마법이 걸려 있는 식량의 양, 가끔 비가 내리는 하늘. 이것들 외엔 주위에서 변하는 게 없었다. 천장에 걸려있는 밧줄마저도 그대로였다.

 

진짜 지겹네.”

 

폭력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던 나는 평온을 맞이한 후엔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프고 귀찮은 건 여전히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바로 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지루함이었다. 지루함을 자각하자마자 집에 있는 모든 책들을 꺼내 읽고 쓰고 외우는데 집중했다. 뜻 모를 문장과 처음 보는 단어가 있어도 무작정 읽고 쓰고 외웠다. 나는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루함을 몰아내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책들도 결국 끝을 보이고 말았다.

단순히 책장에 꽂힌 책들뿐만 아니라 집 곳곳에 숨겨진 책들과 종이뭉치들을 전부 모아 모두 읽고 외웠는데 결국 남은 건 너덜너덜한 책과 종이들, 마녀의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낡고 잠긴 상자 그리고 아직 꽤 남은 식량들. 변한 게 없었다. 집 안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은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책으로 배운 마법을 어설프게 써서 즉시 탈진해서 쓰러지거나 제대로 성공한 마법들을 조합해 발 빠른 토끼, 혹은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 주변에 있는 풀과 열매를 먹이며 상태를 살펴보기도 했고 반응이 괜찮은 것들은 챙겨서 보존마법이 걸린 식량들과 함께 놓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주변의 풀숲들을 전부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밤늦게까지 밖에 있었을 때 먹었던 열매.

 

꼬마야 보호자는 어디 있니? 왜 혼자 있어?”

 

주변에 말을 하는 자는 마녀와 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굳혔지만 어깨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게 있었다.

 

놀러왔어요! 열매 따고나서 이따가 만나기로 했어요!”

 

좋은 곳으로 놀러왔구나? 여긴 위험한 생물들도 없으니 안전하지.”

 

어린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하니 바로 의심을 접고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본 마법사였고 얼굴자체를 기억할 수 없는 마법사였다. 평평하고 색을 넣은 유리가 눈과 그 주변을 가리고 입은 하얀 천으로 싸여있어 빈틈이 아무데도 없었다. 머리에는 당시 내 표현력을 빌리자면 하얀 비누거품 같은 걸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딸기가 아주 달게 익었을 시기구나.”

 

딸기요?”

 

? 딸기 따러 온 거 아니었니?”

 

까만 점들이 가득 박힌 열매예요.”

 

그게 바로 딸기란다.”

 

그 열매의 이름을 알게 된 나는 연신 입 안에서 그 이름을 굴려댔다. 딸기가 많이 열린 데를 봤다는 그 마법사의 말에 답지 않게 경계고 뭐고 옷자락을 잡으면서 데려다달라고 외쳤다. 그 때 마법사가 무슨 얼굴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을 흘리면서 옷자락을 내 손을 잡고 훨씬 작은 내 발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달빛에 겨우 형체만 알아보고 먹은 열매는 자세히 보게 되니 굉장히 빨간색이었다. 분명 희끄무레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도 못한 색이어서 얼떨떨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주위에서 그만큼 빨간 건 딱 하나 뿐이었다. 긁힌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피.

 

왜 그러니?”

 

“...빨개요.”

 

딸기는 익으면 이렇게 빨갛게 된단다.”

 

같은 빨강이었지만 여러모로 달랐다. 홀린 눈으로 새빨갛게 익은 딸기를 하나 따서 입 안에 넣었다. 가장 먼저 터져 나와 입 안 가득 자리 잡은 건 설탕과는 다른 달콤함과 그 뒤에 바로 붙은 상큼함이었다. 단 거라고는 설탕뿌린 빵 외엔 먹어본 적 없고 시큼함은 느꼈어도 상큼함은 처음 느낀 나에게 있어서 이 딸기는 충격과 새로움 그 자체였다. 제대로 익지도 않았을 땐 배를 채우기 위해 급하게 넘겼지만 지금 먹은 딸기는 넘기는 것마저도 아까워 천천히 씹으면서 굴렸다.

 

맛있나보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손이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는 걸 느끼며 딸기를 하나 더 땄다. 혹시나 떨어뜨릴까봐 아니면 생채기라도 낼까봐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딴 후 그 모양 그대로 어느새 비어버린 입 속에 채워 넣었다. 동시에 가슴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만큼 아직 부족함을 느꼈다. 뭐든 간에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설익은 딸기는 시큼하지만 잘 익은 딸기는 달고 상큼하지, 거기서 더 익으면 물렁해지고 단 맛만 강하게 남는데 그만큼 익는 시간이 빨라 잘 익은 때가 금방 지나가버리는 까다로운 녀석이야.”

 

이번에도 딸기를 아껴 씹으면서 그가 하는 말들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이렇게 그냥 먹는 것 말고도 다양하게 가공해서 먹는 방법들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하거나 딸기와 비슷한 종류의 과일들의 이름들을 말해줬다. 얘기를 듣던 중 흥미로운 부분이 딸기에 쏠린 신경을 붙잡았다.

 

마녀왕국이요?”

 

마녀들이 먼저 모여서 이룬 왕국이라 그렇게 불리지. 지금은 에키테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마법사들도 살 수 있게 하고 있어서 지금 들어가려고 하는 마법사들도 많단다.”

 

집 안 곳곳에 마녀가 숨겨놓았던 공책과 종이뭉치에 자주 적혀 있던 단어였다. 마녀왕국, 왕궁 마녀, 장미꽃에서 태어난다는 마녀들 그리고...

 

마녀왕국에 관심이 있니?”

 

. 그런데 마녀왕국이 적힌 책이 없어요.”

 

...이 숲은 마을들이랑 꽤 먼데...”

 

그 마법사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반듯하게 접힌 지도였다. 집에 지도가 있긴 있었지만 그가 건넨 지도에 비해선 굉장히 낡은 지도라 정보의 차이가 컸고 무엇보다 이 숲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어 지도가 있으나마나였다. 그는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지도를 읽는 방법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여기가 지금 위치고 가장 가까운 마을은 바로 여기지.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가면 나오는 마을이야.”

 

방향과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당시 내 눈높이에 맞춰 친절하게 설명한 마법사는 선물이라며 지도를 나에게 줬다. 호의라는 걸 처음 접한 터라 약간의 얼떨떨함과 경계를 담아 올려다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지는 걸 보더니

 

그래 바로 저쪽이 서쪽이야. 하지만 지금 가면 늦고 이제 해도 지고 있으니 얼른 집에 돌아가렴.”

 

그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는 나더러 집에 돌아가라고 했고 나는 집이 근처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보통 이럴 땐 어서 보호자와 만나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어렸던 나는 새로 얻게 된 지도를 보기 바빠 잘 가라고 짧게 인사만 하고 바로 관심을 끊어버려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마법사는 처음 만난 그 날 이후로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하늘의 현자라고 불리던 대단한 마법사였고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왕국 왕의 사망 및 공주가 모은 밸러니의 숲 조사대에 현자가 참여했다는 소식지가 곳곳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 일의 뒷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명확한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 무작위로 소식지를 뿌리는 비둘기들 덕분에 비둘기 우체부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소식지를 신청해 매일 기다렸다. 큰 사건이 없는 이상 어디에 무슨 꽃이 피었다 수준의 평화로운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조금이나마 지루함을 덜어줬기 때문이었다.

 

매워서 못 먹겠는데 잘 먹네요.”

 

구룩! !”

 

소식지 같은 건 돈 대신 바로 먹을 수 있는 먹이 아니면 질 좋은(?) 나뭇가지나 지푸라기도 받는다고 해서 꾸준히 소식지를 볼 수 있게 됐다. 가장 쉽게 얻을 만한 게 나뭇가지와 지푸라기지만 비둘기들 입장에서 질 좋은 건 달랐던 건지 고르는 기준이 까다로워 차라리 돈을 내는 게 더 편할 정도였다. 마침 먹을 수 있는지 실험을 해보려고 모아둔 열매들 중에서 비둘기가 좋아하던 게 있었다. 매우 좋아하면서 멀쩡히 먹어 괜찮은 건가 싶은 마음에 덩달아 먹어봤는데 그렇게 매운 건 처음이었다.

 

혹시 밸러니의 숲에 더 관련해서 적힌 소식은 없나요? 돌아온 이들의 무용담 말고요.”

 

구루룱...”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던 비둘기는 옆에 있는 창문을 두 번 두들겼다. 아니다, 없다라는 뜻이었다. 매번 비슷하다 못해 별무늬가 새겨진 판으로 찍어내는 것처럼 거기서 거기인 내용이 나왔다. 정화가 성공하고 순백의 날이 된 때에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소식지와 정보가 참 즐거웠는데 갈수록 지루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소식지를 끊어버릴까 하던 찰나에 비둘기들도 얇지만 밥줄은 밥줄인지 끊기는 걸 원치 않아 다른 소식지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앞서 말한 평화로운 소식들이었다.

 

만약 나온다면 다음엔 꼭 그걸로 부탁합니다~”

 

이런 소식지를 읽으면서 배운 건 바로 부드러운 말투였다. 상황을 보고 오는 건 비둘기지만 소식을 적고 형상화하는 건 마녀 혹은 마법사였으니까 이런 잔잔한 소식은 그들의 시점과 분위기에 따라 부드럽게 변했고 각자마다 말투가 다르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그리고 말을 알아듣는 비둘기는 그만큼 똑똑해서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면 어쩌다가 몇 번 소식지를 그냥 주기도 할 정도로 자기 기분과 예의를 잘 알고 있었다.

소식지를 다 읽었을 땐 마녀가 집 안 곳곳에 숨겼던 종이들을 계속 읽는 걸 반복했다. 내용은 다 외웠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는 내가 마녀왕국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했다. 어른 마법사들도 모를 정도로 내용을 꼬아놓거나 일부러 중요한 부분을 없애버린 게 많았다. 이걸 알아낸 건 그 현자가 알려준 마을을 한 번 찾아갔을 때 이 종이뭉치 일부를 들고 갔을 때였다.

 

아가. 책 만들기 심부름이라도 왔니?”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종이뭉치를 가득 들고 마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닌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법 했다.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을 귀퉁이의 나무집을 가리키며 저기가 책가게라고 가르쳐주며 해지기 전에 얼른 심부름 끝내고 돌아가라며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그 나무집으로 바로 달려갔고 그곳에 가득한 책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린 손님은 오랜만이네. 동화책은 저쪽에 있다.”

 

아뇨. 책 만들러 왔어요.”

 

책을? 심부름이냐?”

 

.”

 

나에게 심부름을 시킬 마녀는 없었지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니 그렇다고 했다. 책가게 주인은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대여섯 장 훑어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이거...내용이 온전치가 않은데?”

 

온전치 않다는 게 뭐예요?”

 

이론식인가? 군데군데 빠진 데가 많고...뭘 만들려고 했는지 영 알 수가 없네. 실험 주체가 뭔지 아예 안 적혀 있어.”

 

당시에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멀뚱히 듣고만 있었다. 가게 주인은 나에게 정말 이걸로 책을 만들어 오라고 했냐며 물었고 그에 심부름을 받아서 책상 위에 있는 종이뭉치를 가져왔다고 대답했다. 이건 맞는 말이었다. 발견하고 마녀가 죽은 이후론 항상 책상 위에 내가 올려놨으니까 말이다.

 

잘 보고 가져왔어야지. 내가 봐도 이건 책으로 만들 게 아니야. 아마 실패한 실험 이론식 같은데 고치려다가 네가 갖고 온 걸 거야.”

 

실험은 뭐고 이론식은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좀 더 머리랑 키 커진 후에 네 보호자한테 물어봐라.”

 

반사적으로 보호자가 없다고 하려다가 꾹 입을 물어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녀는 보호자라고 하기엔 그 뜻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이뭉치를 다시 돌려받고 주위를 훑어보며 어떤 책들이 있는지 살펴본 나는 저 멀리 열린 방에 얼핏 보인 침대와 난로에 빨리 돌아가서 추운 밤에 대비해야한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가게와 마을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Posted by 메멤
,

나는 마녀에게 길러진 마법사였다.

내가 주위를 제대로 인식하고 당시 상황을 기억 속에 깊이 새길 때쯤 맨 처음으로 선명하게 들은 단어는 바로 미안이었다.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따라하고 몇몇 단어들은 또렷이 말하게 됐을 때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걸 알고 싶으면 알고 싶은 걸 먼저 말하고 뭐야? 라고 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깨닫자마자 말했다.

 

미안이 뭐야?”

 

그 때 매일 미안하다고 말하던 마녀가 지었던 표정을 말해보라고 한다면...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눈여겨보지도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 외엔 나올만한 게 없었다. 다만 나를 기르고 있었던 마녀의 상태가 이상해졌는데 말을 가르쳐주는 내내 같은 말 하나를 하루에 열 번씩은 반복해서 말하게 했다.

 

괜찮아.”

 

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이면서도 이때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말이었다. 그 뜻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그저 반복해서 말하게 했으니 나는 당연하게도 별 생각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마녀는 그 말 자체를 좋아하는가 싶었더니 어느 순간엔 울기 시작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긁어댔으며 나중에는 내 목이 자기 뺨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내 목을 조르듯이 긁어댔다.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자기 뺨을 긁어대다가 내 목을 긁는 걸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긴 있었다.

 

괜찮아가 뭐야?”

 

그렇게 물어본 이후였었다. 아픈 게 싫었던 나는 마녀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틈 사이로 숨었고 마녀는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내 이름을 불러대곤 했었다. 어느 날은 못 찾고 어느 날은 찾는데 성공했는데 못 찾았을 때는 높은 찬장에 있어 내가 손을 못 대는 곳 위에 올려놓은 병을 들어 입에 가져다 불어댔고 찾았을 때는 틈 사이로 팔을 구기듯 넣으며 나를 끌어내려고 안달을 냈었다. 작았을 때는 잡히지 않았지만 몸이 커지면서 쉽게 잡히자 나는 틈 사이로 숨는 걸 포기하고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있었다.

 

어디 갔어!!”

 

문에서부터 열 발자국 떨어져도 소리치는 게 굉장히 생생하게 들려왔었다. 그 소리가 참 듣기 싫어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아무 데나 가곤 했었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면 금방 배고파지는 게 싫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멀어져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해가 질 때쯤이면 마녀도 지쳐서 멍하니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아프고 부어오른 목을 부여잡으며 완전히 떠나버릴까 했지만 흙바닥은 앉아만 있어도 거칠고 딱딱했으며 밤공기는 물보다 차가웠다. 배까지 고프기도 해서 짜증낼 힘도 없이 멍하니 누워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까만 게 잔뜩 박힌 작은 덩어리들이었다. 그 땐 열매라는 개념도 몰랐고 꽃과 다르게 생긴 덩어리들은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막연히 알고만 있어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잽싸게 따서 입에 욱여넣기 바빴다. 아직 제대로 익을 시기가 아니었는지 단맛보다 시큼한 맛이 먼저 터져 나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모두 목 뒤로 넘겼다.

 

밤늦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찾으러 나온 마녀는 나를 끌어안으며 계속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다신 안 그러겠다고 절박하게 외쳐댔다. 나는 그 외침을 흘려들으며 덩어리들이 가득했던 풀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녀가 나를 들어 올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때에도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는 마녀 스스로가 말한 대로 다신 그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참는 듯 했으나 어디까지나 마녀 입장에서 최대한이었으니 완전히 그런 행동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보다는 확실히 줄어들고 자주 밖으로 안 나가도 돼서 조금은 편해졌지만 귀찮고 아픈 건 똑같았다. 울부짖는 순간이 불규칙적으로 변해 미리 폭력을 피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날아오는 손보다 더 빠르게 피하는 순발력을 키우게 됐다. 오히려 더 약이 오르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다음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일이 많아 잡히지만 않으면 바로 바깥으로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마녀가 참고 있는 동안엔 본격적으로 글을 배웠다. 시기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동안 바깥으로 나가있는 시간만큼 하루 종일 단어를 외우고 같은 문장들을 반복해 쓰면서 익히니 늦었다는 흔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얀 풀들이 나부..나부키고?”

 

나부끼고.”

 

..널버...넓어져서 모두가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마녀는 잘못 읽거나 힘들어하는 부분을 고쳐주는 걸 좋아했고 그런 날은 폭력이 일어날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일부러 더듬어 읽었던 때가 많았다. 마녀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그 외에 무언가에 대해 알려주려고 할 때마다 목소리 끝이 천장을 두드릴 것처럼 올라가기 바빴다.

글을 더듬어 읽는 걸 그만둔 건 마녀가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였다. 나를 가르치는 데에 의욕을 두던 마녀는 그것마저 지루해졌는지 아니면 지쳤던 건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창밖에 시선을 던져뒀다.

마녀의 상태가 어찌됐든 더 이상 아플 일이 없다는 것과 멍하니 있을 땐 주변을 살펴보지도 못한 다는 걸 눈치 챈 나는 마녀가 서랍 깊숙이 숨겨뒀던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이제까지 읽어왔던 책과는 다른 느낌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건 누군가의 기록 아니면 일기로 추측되었다.

그 마녀가 쓴 일기는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는 몇몇 부분만 제외하면 있었던 일을 객관적이게 적어놓거나 무언가를 보고 관찰한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기록이라는 단어를 몰랐었고 읽을거리가 책 아니면 일기 외엔 모르던 때라 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었다.

 

심은 이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실패.

불안정한 시험 장소로 인해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의 눈이 곳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실험은 잠정폐쇄.

씨앗하나가 사라졌다.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기억에 남는 부분만 따로 적어서 틈 날 때마다 읽었는데 따로 적은 부분이 바로 저 문장들이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마녀가 언제 일어날지 몰라 급하게 적은 것들이니 온전한 문장들은 아니었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이 전부 담겨 있어 문제는 없었다.

마녀에게는 관심이 없었지만 마녀가 쥔 비밀들에 관심이 있던 나는 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집안 곳곳에 마녀가 숨겨놓은 정보들을 찾아냈다. 마녀의 비밀엔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사과와 폭력의 대상이 담겨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대상이 누군 줄 알게 되면 더 이상 내가 아플 일도, 귀찮을 일도 없을 거라며 지금 생각해도 참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찾아낸 정보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엔 그 바탕이 되는 상식과 세부적인 지식들이 필요했다. 기본적인 역사는 가르쳐주니 문제가 없었지만 그 외의 나머지가 문제였다. 세부적인 지식은 둘째 치고 요정을 좋아할 법한 아이들도 지루해할 평화로운 동화와 옛 전설에 대해서만 읽어주고 알려주는 마녀에 지식 또한 내 스스로 쌓아야한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참 끝까지 도움이 안 된다는 불평을 바로 앞에 내뱉지 않도록 조용히 삼키면서.

 

예전부터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었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집을 부술 것처럼 두려워하던 마녀는 어느 순간 자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폭력도 완전히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려워할 게 없기 때문에 안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포기, 체념에 더 가까워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상세하고 정확하게 정의 내릴 줄은 몰랐지만 위험하다는 거 하나만은 잘 눈치 챈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바로 도망쳤다. 마녀는 내가 도망치는 것도 모르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가거나 아니면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폭력 때문이 아닌 뭔지 모를 위험함 때문에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 중에서 겁이 제일 많았지, 마녀들 많은 거리도 나가기 힘들어했었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다른 마녀들이랑 뭉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을까 신기해.”

 

언제 그 위험함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유는 중요해 보이는 내용들이 많은 것 같아서였고 실제로도 중요한 내용이 맞았다. 바깥에 나가서 오늘 들은 이야기와 전날에 들은 이야기 그보다 훨씬 전에 들었던 것들 전부 곱씹고 되씹으면서 기억 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제대로 아는 게 없고 배워놓은 게 엉망이었으면서도 나름대로 정보라는 걸 쥐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아픈 게 싫었고 마찬가지로 귀찮은 게 싫었다.

 

체념과 함께 갑자기 나타난 위험함은 갑자기 끝났다. 거기에 이어 내가 마녀로 인해 아플 일도 귀찮을 일도 없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실 물은 물론이고 씻을 물도 없어서 작은 통을 들고 근처에 있는 강에 몇 번 왔다갔다 물을 날랐다. 창고 옆의 큰 물통을 전부 다 채우고 얼굴을 다 씻은 후 수건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집에 들어갔었다.

끼익 천장을 잇는 나무가 대신 비명을 질러주는 것 같았다. 물론 내 비명은 아니었다. 끼익끼익 두 번 울리면서 아주 예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닌 만큼 상처도 많이 생겼다는 발이 흉터를 내보이며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발을 보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보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마녀가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을 주었지만 곧바로 관심이 없어졌다.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못 느낀다 해도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는 아파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는 아픈 것과 귀찮은 것, 이 두 가지가 제일 싫었으니 바로 고개를 돌려버린 건 당연했다. 그 때 저 위에 천장과 끈 하나로 이어진 마녀의 마지막 표정을 말해보라고 한다면...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눈여겨보지도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 외엔 나올만한 게 없었다.

Posted by 메멤
,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드니 난감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인다. 마법진을 설계하면서 몇 번 얼굴을 봤던 마법사였다.

 

...몇 번 불렀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급하게 피라도 닦으세요.”

 

물수건을 건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고맙다고 대답한 후 받아들이자 도망치듯 급하게 뒤돌아 뛰어간다. 물수건으로 목과 팔을 닦자 피가 잔뜩 묻어나온다. 이건 내 피가 아니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용사가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사고가 일어나는 거였다. 팔다리 날아갈 각오는 물론이고 숲이 뒤집어진 시점에서부터 이미 대형사고가 난 거나 다름없었지만 책장에 깔리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져 날리는 바위들이나 물은 마법사들에겐 자체 마력저항이 기본적으로 있으니 부상의 정도가 실제보단 옅었다. 하지만 용사는 실제로 책장에, 그것도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에 깔렸다.

굳어있던 것도 잠시, 달려가 책장과 책들을 치우자 가장 먼저 보인 게 묻어서 떨어지는 피였다. 그리고 그 아래엔

 

다행히 바다 근처라 큰 마을이 많아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어. 응급처치가 좋았다는군.”

 

“...어딥니까.”

 

나중에 깨어나면 알려줄테니 기다리고 있게.”

 

용사의 부상은 저의 책임 또한 있습니다. 그러니

 

화장실 가서 얼굴 씻고 거울부터 봐.”

 

GM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그가 말한대로 씻을 필요가 있었다. 그대로 일어나 GM이 간 방향 반대쪽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피 묻은 물수건을 옆에 두고 물통을 끌어와 피가 묻은 데를 씻자 바로 물이 빨갛게 변해 흘러간다.

 

책장이 무너지기 전에 머리를 이미 부딪혀서 그런지 머리의 부상이 제일 심각했다. 우선 입을 열어 혀가 숨을 막지 않게 빼어잡고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부분을 지혈했다. 부러진 부분은 부목으로 쓸만한 것들과 고정마법으로 일시적으로 고정시켜놓았다.

섣불리 부축을 하면 상태가 더 심각해지는 데다가 하필이면 그 난리통에 통신구도 깨져있었다. 어찌해야하나 난감한 순간 아직 마법진 근처에 남아있던 마법사들이 찾아왔다. 굉음과 함께 숲이 흔들리고 뒤집어지고 있는 게 보여 급하게 준비를 하고 숲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의 도움으로 숲 밖의 GM에게 근처에 응급 및 대수술을 할 수 있는 마을을 찾아달라고 연락할 수 있었고 용사도 옮길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아보이면서도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묻기 힘들어했다.

 

피를 다 씻어내고 아래를 보니 온통 붉었다. 물통을 부어 전부 흘러가게 한 후 금이 간 거울을 보니 다친 데도 없으면서 낯색 나쁜 마법사가 있었다. GM이 왜 말렸는지 이해가 되지만 이건 별개였다. 바로 화장실에서 나와 GM을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고 다른 마법사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결국 가방에서 예비용 통신구를 꺼내 연락을 넣어봤지만 통신구를 들고 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받는 건지 반응이 없었다.

 

혹시 어느 마을인지 아는 데 없습니까?”

 

저는 지도만 드려서 아는 바가 없어요.”

 

이렇게 다른 이들이 마을마저 모른다면 GM이 작정하고 숨긴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되면 내 낯색이 괜찮아질 때까지 GM은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을 거고 난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했다. 평소같았으면 기다렸겠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무작정이긴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근처에 있는 큰 마을들의 치료원을 찾아가는 거였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도 그것뿐이었다. 아까 물어본 마법사에게서 지도를 얻고 짐을 챙겨들어 밖으로 나갔다.

 

 

지도 들고 나갔다 했더니 진짜로 돌아다니고 있었어?”

 

이틀에 걸쳐서 마을 네 군데를 돌아다녀보니 그런 환자는 오지 않았다는 말 외엔 들은 게 없었다. 다섯 번째 마을을 찾아가고 있던 도중 GM이 나타났다.

 

어딥니까?”

 

거울 보고 얼굴빛 좀 환하게 하라고 말 안 한 거였는데 지금 보니 틀린 선택이었구먼.”

 

어딘지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이런 때에 좋은 방법이 있지!”

 

제 할 말만 하던 GM은 이내 내 어깨를 붙잡고는

 

자네 안색 괜찮아질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인 것 같은데.”

 

나는 얌전히 돌아가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돌아오게 된 집은 당연하게도 조용했다. GM이 말한 대로 안정을 되찾기 위해 방으로 들어선 순간 벽 한켠에 세워진 책장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쳤지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정신차리고 앞을 보니 책장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멀쩡히 세워져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책도 없었다. 방어막을 없애고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책장 가득 꽂혀진 책들에 이마를 대어 기댔다. 딱딱함이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책이 무너지고 바람소리에 묻어온 악을 듣고 다시 잠드는 꿈을 꾼 건 일주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책장은커녕 책 하나 떨어지지도 않았고 바람이 불어도 잔잔했다. 마음과 감정이라는 게 참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니 결국엔 잔잔해지고 있었다. 거울을 봐도 그 때의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거울 한 켠이 깨져있었다는 것과 바닥이 빨갛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그 때와 달리 내 집에 있는 거울은 깨진 데 없이 멀쩡했고 바닥은 계속 청소를 해놔서 피는 물론, 얼룩진 자국도 없었다.

무려 한 달만에 온 제대로 된 연락이었다. 그동안 연락이라고 해봤자 무슨 의미로 보냈는지 모를 난초들만 결계 밖에 놓여있었다. 난초들을 그늘진 마당 한 켠에 심어놓은 채 기다리길 이 주, 삼 주 그리고 한 달, 어떤 장소에 대한 좌표가 적혀있는 종이가 계속 오던 난초대신 놓여있었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확인한 나는 바로 나갈 준비를 했고 방금 끝마쳤다. 깔끔하게 정리한 집을 뒤로하고 생각 또한 정리하면서 결계밖으로 나가 용사가 있는 마을 근처로 이동했다. 부디 정리한 말들이 엉켜서 나오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온다는 녀석이 네놈이었냐.”

 

오랜만이다냐!”

 

무소식!”

 

이동하자마자 보이는 건 GM을 통해 자주 봤던 들개들이었다. 겹치는 일이 생겨서 다른 이들을 마중 보냈다고 써놓은 걸 봤긴 했지만 용사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치료마법사가 있을 줄 알았다.

 

나도 마중 나온 이들이 자네들인 건 지금 알았네. 치료마법사는 다른 환자들도 있어서 바쁜가?”

 

우리가 그동안 용사녀석 간호를 한 달동안 해왔는데 용사 상태는 치료마법사를 제외하면 우리만 알지.”

 

자네들이 간호했다고?”

 

매일매일 옆에 붙어서 간호했다냐!!”

 

성심성의!”

 

여기서 용사녀석 사정 제대로 아는 게 이번에 처 알게된 너를 제외하면 우리밖에 없지.”

 

납득한 나는 용사가 있는 방으로 가면서 그동안 용사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갈색 들개들은 붕대 맨 상태로 신나게 날아다녔다던지 상황에 대한 얘기만 해서 결국 대장들개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처음 봤을 땐 온 몸의 뼈가 다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붕대를 맨 상태로 고정되어있었고 나중에 가서야 풀게 됐는데...왜 처 다쳤는지 알만하더군.”

 

알만하다니 무슨 소린가?”

 

뭔소리긴 그 성격에 용케도 처 살아남았구나 싶은 소리다. 그래서 이번에 처 죽을 뻔한 건가? 이번 용사녀석은 옛날에 만났었던 용사와 좀 비슷하더만, 저 두 녀석은 그 덕에 신나서 용사랑 친해진지 오래고.”

 

대장들개의 말을 들으니 더욱 혼란이 왔으나 용사가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직접 상태를 확인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날붙이와 무거운 물건이 없는 환자의 방,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문 하나와 환자용 침대 하나. 그런데 그 침대에 용사는 없고 웬 종이들만 놓여있었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아래에서 익숙하면서도 아이처럼 끝이 올라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 용사?”

 

안뇽!!”

 

침대 위에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용사는 바닥에 앉아있었다. 팔 한짝만 빼고 온통 고정붕대로 묶여있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멀쩡한 손으로 무언가를 쥔 채 바닥에 대고 있었다. 바닥에 의미 모를 선들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에 말한 새 친구다냐!!”

 

우정!”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용사가 손에 쥔 걸 놓아 새카만 손으로 내 망토자락을 잡아당기고

 

새 칭구는 이름이 모야아~?”

 

우습게도 나는 그제서야 무너져내렸다.

 

 

 

 

 

열 번이나 얘기했기 때문인지 오랜만에 그 때의 일을 꿈으로 꿨다. 다친 머리 때문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판정된 건지 용사는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문제는 추억에 관한 부분만 잊어버리는 게 정상이었다면 이번엔 추억은 물론 말 그대로 지식, 상식, 생활방식에 대한 기억이 전부 날아갔다는 거였다. 나는 그 때 용사의 모든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했고 GM은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썹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고 그저 아무런 표정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교육 자체가 돌보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들개들은 이런 내 행동에 상당한 경계심을 내보였다. 기본적인 친분조차 쌓지 않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니 의심을 하는 건 당연했다.

 

아이고 비둘기 팔자야~! 내가 이러다 짝을 찾기도 전에 고향도 못 돌아가 죽겠구나~!!”

 

호들갑 그만 떨게. 어차피 자넨 날아서 가니 그다지 위험할 건 없잖나.”

 

지도도 없는 세상의 끝 너머라도 이 하늘, 저 하늘 똑같으니까 위험할 거 없겠다고요?!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무심한 손님 때문에 비둘기 속이 타들어간다~! 위험수당 꼭 받을 거니까 알아둬요!!”

 

로메루의 단서를 찾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나온 건 아니었다.

 

비둘기가 회귀본능이 있어서 쓸만하군.”

 

뭐요?! 지금 뭐랬어요? 쓸만하군? 쓰을마안하아구우우우운~???”

 

뒤따라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무시하고 미리 준비해둔 편지 안에 내가 밟은 곳들을 그려넣은 지도를 끼워넣어 뒤돌아 건넸다.

 

내 아이에게 전해주게.”

 

 

 

 

First side story end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