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데는 조금 시일이 더 걸렸다. 애당초 이렇게 돌아다니는 목적이 새로운 결계마법 혹은 이식할 만한 마법진을 찾는 거였다. 비 때문에 발목이 잡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상관없는 일에 썼다. 그 이후로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그럭저럭 괜찮은 마법진을 발견해 기존의 결계마법의 구조에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물리적인 인식조차 왜곡시키는 용사의 결계를 제일 먼저 봐서 그런지 지금 완성된 결계마법은 어딘가 아쉬웠지만 목표는 어디까지나 북도를 비롯해 다른 이들이 멋대로 마법이나 마력을 끼워넣지 못할 결계를 만들어내는 거였다. 그 이상은 지금당장 필요하진 않았다.

꼭 용사를 만나야하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이제 용사와 볼 일도 관련될 것도 없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용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냐!”

“용사!”


“맞다! 용사 냄새다냐!”

마법진을 완성하기 전에 갑자기 찾아온 들개들이었다. 항상 붙어있다시피하던 검은 들개는 어디로 갔는지 소란스러운 두 갈색 들개들만 나타나 다짜고짜 용사 냄새가 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결계마법 때문에 만났었다네. 용사를 아는가?”


“지금 용사는 모르지만 예전 용사랑 자주 놀았다냐!”

“옛친구!”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이 두 들개라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에 바로 납득했다. 한창 열심히 떠들던 들개들은 마법진을 완성했을 때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검은 들개가 찾아왔다.


“용사를 처 만났다고?”


“이렇게 찾아오는 걸 보면 그 용사라는 마법사와 굉장히 친한가보군.”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 아니다.”


“그 예전이라는 게 안경을 벗으면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관련있나?”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듯 숨을 뱉으며 그대로 뒤돌아 왔던 길로 돌아갔다. 확실히 그 난데없는 변화와 들개들이 말하는 예전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세히 알고 싶진 않았다. 엄연히 들개들과 용사 사이의 일이었으니 잠깐 개인적인 일로 찾아간 나는 그 사이를 파고들 이유도 의욕도 없었다.

검은 들개가 찾아온 이후론 북도의 편지도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도의 편지가 오긴 오지만 결계마법으로 선별이 되어 북도의 편지를 가지고 온 비둘기 우체부는 그대로 돌아가는 형식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이제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여행은 잘 갔다왔는감!”

이렇게 GM이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만큼 무언가 일이 터졌거나 장난치러 왔다 이 둘중 하나였다.

“용사를 만났다며?”


용사는 몸을 사린 것치곤 발이 넓은 마법사 사이에선 꽤나 유명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GM이 무슨 말을 더 할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지금 용사랑 친해졌나~?”


“결계마법 건으로 찾아간 거 외엔 특별한 교류는 쌓지 않았습니다만.”


“안경 벗으면 왔다리갔다리 하는 거까지 보고 와놓고선 빼기는!”


어제 괜히 말을 더 붙였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긴 교류를 쌓은 게 아닌 이상 초면에 그런 변화를 알기는 힘들겠지만 상황이 꽤 특수했다. 우선 내 입장에선 특별한 교류를 쌓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고 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용사쪽에서 나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과 확인하고픈 게 있어서 계속 접촉을 해왔던 거지 나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놨다. 용사가 꽤 여러번 선을 넘기는 했지만 그 넘은 깊이보다 비와 질척한 땅과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더 싫고 귀찮았을 뿐, 선과 넘은 발자국들을 지운 건 아니었다.


“반응 보니 지금 용사는 별론가보구만!”


“자꾸 지금 용사라던지 비밀이 떡하니 있는 점을 들어서 말하는 걸 보면 그 비밀이 뭐냐고 묻길 원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척하면 착이구만! 어때, 들을텐감?”


안 들으면 더 귀찮아질 게 훤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고이는 숲에 대해 알고 있나?”


“용사가 사는 그 숲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설명은 간단하게 끝나겠네! 용사도 그 원리로 태어난 마법사지.”


“...제가 기억하기론 그 숲엔 호수가 없었습니다.”


“호수라기엔 너무 작고 샘이라기엔 조금 큰 물웅덩이는?”


“비가 오던 때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호수만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바로 납득이 들었다. 호수가 있어도 자연적으로 뭉치는 마력을 기다리고 있는데 구조 자체가 모이고 고이기 쉬운 구조라면 푸른달이 뜰 때마다 아기들이 태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특성을 지닌 마력이 모인다고 했으니 용사 자체가 특성입니까?”


“그렇지! 바로 눈치채는구만?”


용사 자체가 특성이라는 건 말 그대로 용사의 모습과 마력 그대로 태어난다는 얘기였다.


“그렇담 용사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짧은 시간 내에 죽었을 테고 다시 태어나는 걸 반복한 거군요. 성격은 바뀌는 걸 보니 기억은 이어지지 않고.”


“지식은 마력과 함께 전해지지.”


무용담과 비달팽이,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론 턱 없이 부족할 정도인 결계마법. 고인 마력을 먹은 생물들을 상대하다가 죽고 다시 태어날 때 마침 고이기 시작하는 마력들도 끌어오게 되어서 마력이 많아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여러 가지로 아직 납득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만...아기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성장한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히익거리며 웃기 시작하던 GM은 제 동업자라면 자세히 알 것 같다고 했다. 그 마을 쉼터의 주인이 왜 말하길 꺼려했는지는 이해가 됐고 외부의 마법사가 안다해도 당사자가 이렇게 비밀은 잘 지킬법한 마법사라는 데에 감탄이 들었다. 마을 전체가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게 굉장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자네 다시 용사 만나야할 것 같은데?”


“...일단 앞뒤 사정을 먼저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에 뭔가가 엉망이 됐는지 마을이 이주한다네.”


그 비는 아주 잘 알고 있고 잘 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용사와 함께 커다란 비달팽이에게 휘말린 걸 알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마을 마법사들이 예전에 GM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거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믿을 만한 외부 마법사가 GM이라는 거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던 건 명확했다. GM의 발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넓게 뻗어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 마을까지 밟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GM이 그 마을에서 이주관련 도움을 부탁을 받았다는 거고


“...저는 왭니까?”

“거기 쉼터 주인이랑 친하다고 들었지!”


나도 같이 가서 도우라는 말이었다. 쉼터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말을 꽤 많이 걸었던 주인이 떠올랐다.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니니 친근하게 느껴진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쉼터의 주인 생각이었다.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이 마법사 마음, 정이 있자너~!”


그 뒤로 계속 거절했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찾아온 GM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얼마간의 준비기간을 마친 나는 한 달만에 다시 그 마을로 가게 됐고 거기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용사도 쉼터의 주인도 아니었다.


“아 저번에 여행오셨던 마법사분이시네? 속삭이 바람 듣고 오셨나요?”


저번에도 용사와 쉼터의 주인보다 먼저 만났었던 약초 캔다는 그 마을 주민이었다. 나와 GM 외에도 이주를 도와줄 다른 마법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얼굴이 꽤 익었는지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


“한꺼번에 쉬지 않고 내린 비 때문에 마을에 문제가 생겼고 이주를 해야한다고 해서 도우러 온겁니다. 정확히 무슨 문제가 생긴겁니까?”


“원래 여기 지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는데 비가 쉬지도 않고 내려서 무너지는 게 앞당겨졌다네요.”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조금 기울어진 집들과 울타리들이 보였다. 나중에 땅이 더 가라앉는다면 지금 이주를 하는 게 확실히 옳은 선택이었다.


“저는 운이 없네요...여기로 이사 온지 두 달도 안 됐는데.”


뭐라 더 말하려던 그 마법사는 저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실례한다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쩐지 이 마을 이주를 돕는 동안 저쪽에서 자주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편의상 갈색머리 마법사라고 기억해두기로 했다.

어떤식으로 이주를 할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잡아돌렸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용사의 얼굴이 보였다.


“너...!”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놓고 말하게.”


내 어깨를 잡은 손을 툭툭 두드려 떼어내고 마주보니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진정을 한 건지 새빨간 얼굴을 잠깐 쓸어내리던 용사는 이렇게 말했다.


“또 왔다길래...”


“마을 이주를 도와주러 왔네만.”

숨이 완전히 돌아온 용사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그럼 설명해줄까?”

“이미 들었으니 됐네.”


용사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설명하고 안내하는 이를 앞에두고 마냥 얘기를 나눌 순 없으니 가봐야겠다며 그 마법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다행히 급한 게 해야할 말은 아니었는지 용사는 붙잡지 않았다.


“일단 이거랑 저기 나무판자들을 옮겨주시고요, 내일은 하얀돌들을 저기 선에 맞춰서 세워주세요.”


아무래도 이주 방법은 단체 순간이동인 듯 했다. 나무판자로 세워지는 뼈대와 땅에 그림을 그리는 하얀돌. 한쪽에다가 나무판자들과 숯을 옮겨놓고 그어진 선들을 살펴봤다.


“반듯하게 참 잘 그려졌지~?”


“땅은 미리 알아두셨을 테니 도착지점은 이미 정해두셨을테고 복잡한 방식이 아니니 어려움은 없지만 마을 마법사들을 전부 이동시킬 마법진을 그리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 같은데 급한 게 아니었습니까?”


“한두 달 정도는 땅도 기다려줄 테니 걱정 없어!”


그러면 대체 왜 저를 데려온 거냐며 묻기엔 GM의 생각은 이미 짐작이 갔다. 다른 마법사 즉 나와 쉼터의 주인 혹은 용사와의 교류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마 용사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사회성이 없는 마법사 두 명이 서로가 서로를 인연 삼아 교류를 시작하는 게 나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되고 좋은 거니까 만나게 해준다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이지만 GM은 당당하게 호기심과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말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얘기는 잘 나눴남?”


“얘기라고 나눌 것도 없습니다만.”


“용사는 아닌 것 같은데~!”


GM이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뒤돌지 않았다. GM은 둘이서 열심히 얘기 나누라며 자리를 떴고 나는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 또 오셨네?”


쉼터의 주인은 나를 바로 알아보고 반갑다는 듯이 다가왔다. 인사를 나눈 후 꺼내는 얘기는 갑작스럽게 비가 와서 땅이 가라앉는 게 빨라졌다던지 여기 와서 맨 처음 만난 갈색머리 마법사가 꺼낸 얘기와 비슷했다. 다른 얘기라고는 많은 마법사들이 도와주러 와서 다행이라고 하거나 혹시 도와주러 온 마법사 중 하나냐고 묻고 쉼터에서 얼마든지 지내도 된다는 말들이었다.


“우리야 그냥 떠나면 그만이지만 용사님이 걱정이에요.”


“같이 떠나면 되지 않습니까?”


“음...용사님은 숲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셔서...”


사실 숲과 용사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지만 이렇게 반문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마을이 이주를 하면 용사는 생활용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들겠구나 싶었지만 어쩐지 알아서 만들 거나 방법을 강구할 것 같으니 그에 관련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 맞다. 이것 좀 용사님께 전해주실래요?”


쉼터의 주인이 내민 건 저번에 그를 통해 용사가 보냈던 책 중 하나였다.


“저번에 전해주러 갔다가 실수로 땅에 떨어뜨려서 진흙투성이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 하나 사는데 좀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 용사님이 계신 곳까지 갈 시간이 도통 나질 않아서...”


미안하다는 얼굴로 책을 내밀고 있지만 그다지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사실 쉼터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를 통해 책을 받은 일이 많았으니 이정도 쯤은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쉼터의 주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외치고는 제 일터로 돌아갔다. 나는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뒤돌아 책을 건넸다.


“받게.”


“나인 건 어떻게 알았어?”


“등이 뚫리는 착각이 들 정도인데 모를 리가 있나.”


책을 받아든 용사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두꺼운 안경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는 물론 어떤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비달팽이 네 말대로였어.”


“뭐가 말인가.”


“마력을 토해낸 거.”


그리고는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투명한 상자 하나를 들어 나에게 보여줬다. 그 안엔 여유롭게 잎을 뜯어먹는 비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설마 그 커다랗던 녀석인가?”


“응. 물리 공격이 약점이었는지 엄청나게 반항해서 검을 갖다대지도 못했지만 열심히 날뛰는 바람에 부러진 나무가 운 좋게 이 녀석 쪽으로 쓰러졌거든.”


“그 마력은 어떻게 됐나.”


“대부분 공기중으로 흩어졌지만 특성을 지녔으니 아주 조금이나마 남았지.”


또 생물들이 먹어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집 안 서랍 깊숙이 봉인을 해뒀다고 한다. 그렇다면 책들과 집의 파편을 찾으러 다닐 때 마력과 비달팽이를 찾았다는 말이 된다. 이제서야 말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기도 우스운 것이 그 때는 워낙 빨리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 애초에 듣지도 않으려고 했을 게 뻔했다. 그보다는 다른 이유로 궁금했다.


“처음 방법으로 세운 가설에 확신을 얻어서 좋긴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뭔가?”


“비달팽이의 원래 서식지는 어디야? 나는 오랫동안 숲을 비울 수 없으니까 방생하기 힘들고 계속 데리고 살 생각도 없어.”


“이주가 끝나면 내가 서식지에 방생하겠네. 그런데 이 녀석 말고 나머지 비달팽이들은 어디있나?”


나머지 아홉 마리의 평범한 비달팽이들은 그 큰 녀석이 날뛰는 난장판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기엔 너무 작고 연약했다.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쓰러뜨리려고 했던 녀석이 살아남고 별 생각 없이 잡아놓은 아홉 마리가 죽었다는 게 참 황당했다.

용사는 떠날 때 집으로 찾아와달라며 돌아갔다. 그냥 처음부터 내게 맡기면 되지 않느냐고 묻기엔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용사는 이미 저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 뒤로 용사는 완전히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닌 건지 종종 찾아와서 밥은 먹었냐고 묻거나 남는 시간에 읽을 책을 빌려줄까 하면서 책들을 들고 오고 있었다. 일단 책을 받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안 가고 얼쩡거리길래 그냥 책을 돌려주고 자리를 떴다. 다행히 다음 날엔 용사는 찾아오지 않았고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혹시 용사님 싫어하셔요?”

“자넨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하얀 돌은 열 개쯤 세웠을 때 갈색머리 마법사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저렇게 물어오는 바람에 평소 볼 일이 많은 이들에게 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와, 말투 특이하셔요! 그리고 뜬금없는 게 아니라 보고 느낀 그대로 드리는 말이에요. 용사님 싫어하셔요?”

“아니.”


“그럼 좋아하셔요?”


“말장난하러 온 거면 다른 마법사를 찾게.”

“말장난 아닌데!”


처음 볼 때의 어색함과 어제의 거리감은 어디갔는지 바로 옆까지 와서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들이밀고는


“에이~ 둘 다 아니면 뭐가 있어요?”


“자네는 저 쉼터의 주인을 싫어하나?”


“네? 아뇨!”


“그럼 좋아하나?”


“그럴 리가요!”


“방금 자네의 말을 빌리자면 둘 다 아니면 뭐가 있나?”


펄쩍 뛰며 부정하던 갈색머리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물더니 얌전히 옆에서 하얀 돌을 세우는 걸 돕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용사님을 경계하는 게 뻔히 보여요.”


정정한다. 입을 다문 게 아니라 계속 입을 열려고 돕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이 마을 마법사들 만큼 용사님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용사님이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마법사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반대로 용사님을 경계해서 오히려 눈에 띄어요.”


“경계한 건 사실이나 굳이 용사만 경계하는 건 아닐세.”


“...저 일단 할 말이 없으니까 좀 더 생각하고 올게요.”


“생각하고 와도 별 다를 게 없네. 사실이니.”


“너무 매정하게 그런 말 하기 없기!”


피해다닐 목록에 갈색머리 마법사도 추가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쉼터의 주인에게 뛰어가던 그는 결국 넘어졌고 가까이 있던 쉼터의 주인이 다가가 일으켜줬다. 그 모습을 잠깐 보고 있던 나는 내 할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돌을 집어들었다.


“모두 한 시간 쉬었다 합시다!”


마법진을 만들고 있던 마법사들이 나무판자와 돌을 내려놓고 그늘 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흙 묻은 손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킨 나는 잠시 쉼터로 들어가려고 했다.


“왔어?”


오늘따라 정정해야할 말들이 참 많았다.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난 용사는 꽤나 두꺼운 책들을 품 안 가득히 안아들고 있었다.


“...그 책들은 뭔가?”


“심심할까봐.”


“일하는 중엔 읽을 수 없네. 설령 지금이 쉬는 시간이라도 다 못 읽는다네.”


용사는 내 대답에 입을 딱 다물더니 책들을 옆에 두고 그 중 하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일하느라, 그리고 짧은 쉬는 시간동안 많이 못 읽을 나를 놀리겠다는 뜻인 건지 아니면 나머지 책들은 자기가 읽을 몫이라는 건지 알기 힘들고 알고 싶지도 않은 행동이었다.

근육통이 오는 건지 목 언저리가 다시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요즘 운동을 잠깐 줄였다고 이렇게 금방 통증이 생기니 다시 예전만큼 운동량을 늘릴 계획을 세우고 가볍게 목을 양 옆으로 까딱였다.


“무리했구나?”


“그 정도 일한 걸 누가 무리했다고 하는가. 다시 일하기 전에 풀어두는 걸세. 안마 필요 없으니 손 치우게.”


용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렸고 나는 뒤로 한 발 물러나면서 거부의사를 표했다. 순순히 손을 내린 용사는 다시 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고 일을 하지 않으면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그 옆에서 함께 책을 읽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끝났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두 번째 선 위로 돌을 세운 후 내일 할 일을 미리 정리하고 따로 적어놓으면서 일을 마무리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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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 감정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얼굴과 행동에서 보이는 감정은 알아보고, 일부러 덮어서 감추는 감정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덮어두어도 잘 보일 정도로 새어나오는 게 있다고 하지만 그걸 눈치챌만큼 길게 얘기해본 마법사가 없었다. 그나마 연구를 위해 잠깐 만나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자주 보게 되는 GM은 감정표현은 물론 생각까지도 자유롭게 말하는 마법사였으니 이 상황에 적합한 예시는 절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새로 쓴 마법서랍시고 각 종이 쪽마다 화초가 크게 그려진 책을 준 GM을 찾아가 얼음을 넣은 주제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차와 진짜 마법서를 받고 온 날이었다.


“전부터 좋아했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그냥 모른 척 하며 마을 밖으로 나갈까, GM의 놀림을 받을 각오로 다시 들어갈까 고민에 빠졌다. 언제 왔는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방들은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지금 자신들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이 자리를 벗어났다. GM의 집이 마을 출입구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아 저들과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게 될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다.

이 마을 마법사들은 전부 GM에게 배우고 자라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숙한 편이라 누가 누구고 어떤 마법사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방금 본 두 마법사는 마을에서 유독 서로가 제일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고 고백한 쪽이 자주, 그리고 먼저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챙기곤 했었다.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었을 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어쩌다가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거라 생각이 이어졌던거지 크게 관심 가질 일도, 관심이 이어질 일도 아니었으니까.


열 두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못보던 마법이론이 적혀있는 새로운 마법서가 맞았다. 찢어서 뗄 수도 없게 앞장은 이론식, 뒷장은 화초 그림으로 이루어진 종이들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기에 한술 더떠 화초 그림에도 이론식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찾다보니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걸 계속 읽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때에 바로 옆에 있는 창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루룱!”

다리에 편지를 매고 있는 걸 보면 비둘기 우체부인데 소식지는 바로 어제 받았고, GM은 편지보단 직접 찾아오는 걸 택하는 마법사인데다가 GM을 통해 몇 번 만났었던 들개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창문을 열어 다리에 매인 편지를 풀어도 날아가지 않는 걸 보면 답장이 필요한 편지인 것 같아 한 번쯤은 얼굴을 봤겠거니 했다. 편지 내용을 보기 전까진.


“답장은 없으니 가도 좋네.”

우체부들이 좋아하는 마른과자를 물려주고 편지는 잠시 뒤집어뒀다. 최근에 책을 낸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책을 감명 깊게 봤다에서부터 시작해 얹고자 하는 의견을 끝에 붙인 편지였다. 온갖 말과 글로 현혹해서 읽은 마법사나 마녀가 다음 책을 낼 때 은근슬쩍 자기 의견이 실리게 만든 후 공동 저자라고 우길 준비를 하는 강도였다. 글솜씨가 뛰어나 지팡이 대신 붓을 든 강도들이라고 해서 북도들이라고 책가게 마녀와 토론으로 만났던 이들이 주의삼아 해준 말들로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편지가 온 건 처음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편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귀찮아졌다.


“이 편지 때문에 찾아온 거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서성거리지 말고 그냥 오게. GM이 보냈나?”

“여기 처 찾아올 녀석들도 없는 주제에 괜히 경계마법이나 처 깔긴, 영감탱이가 신나게 처 웃던데 대체 무슨 편지길래 난리야?”GM에게 북도 편지를 알려준 정보제공자는 누군지 안 봐도 훤했다. 애초에 전서구가 비둘기 우체부 대표인 이상 비밀편지같은 건 없었다.


“북도가 내 본명을 알았다. 이 편지 냄새를 맡고 집에 같은 냄새가 나는 게 있는지 찾아봐주게.”

비둘기 우체부의 편한 점이자 단점은 받는 상대의 이름만 적으면 그 집으로 편지를 배달해준다는 거였다. 굳이 주소를 안 적어도 된다는 게 편한 점이었고 단점은 본명만 안다면 이렇게 쓸모없는 편지들도 온다는 거였다. 문제는 북도가 어떻게 내 본명을 알고 있느냐였다. 항상 책을 낼 땐 책내기용으로 다른 이름을 적어서 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어코 편지 처 보내는 북도도 징그러운데 책을 처 낸게 몇 권인데 이제야 그런 편지 처 받는 너도 참 징글맞아.”

굳이 그 말에 뭔가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껴 편지만 내미니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지 코웃음을 친다.


“일단 이 편지랑 같은 냄새가 처 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 출판사쪽에서 이름을 돈 받고 처 팔아넘긴 것 같은데.”


“출판사쪽에도 본명을 알려준 적은 없네만.”

“...진짜 징글맞은 새끼들이야.”

이름을 알아내는 마법이라도 만들어낸건가 싶을 정도로 편지 외엔 흔적이 없는가 싶었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네 옆으로 한 발 움직여보게.”

“뭔데?”

대장들개가 옆으로 움직이니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눈에 보이는 풍경과 결계가 어그러지는 게 보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네. 가서 GM에게 한동안 집에 없을 거라고 전하면 될걸세.”

“영감이 처 오는 건 못 막는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대장들개는 GM에게 돌아가고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옷과 말린 과일들을 챙겼다. GM이 오면 일이 귀찮은 걸 넘어서 지금보다 더 복잡해질 게 눈에 훤했다. GM도 피하고 이사할 새로운 집도 찾을겸 결계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마법사들을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어느 마법이나 그렇듯이 기존의 방식들을 짓누를 정도로 기발한 기술력과 수식이 아닌 이상 마법 설계자 본인의 판단력과 감각에 달려있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일에는 감각 좋은 장인들을 찾아가는 게 좋아보이지만 최근에 들려오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파란머리집 말이야? 들어는 봤는데 어딨는지는 글쎄...”

“저 어디 하얀잎나무산 아랫마을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노란가시나무숲에 숨겨져 있대.”

“각진나무 무덤 아니고?”


파란머리집은 최근에 꽤 유명하게 돌고 있는 이야기였다. 헛소문으로 취급하는 마법사들도 종종 있지만 이야기의 시작이 전문가들에게서부터 시작됐다면 마냥 헛소문이라고 덮어둘 순 없었다. 

지붕이 파란색이기 때문인지 집주인이 파란머리라서 그렇게 불리는지 아직 모르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 집주인은 전문가들이 입에 담다가 흘릴 정도로 새로운 기술력이나 수식을 만든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전문가들에게 최근에 정리한 분해마법 수식을 던져놓음으로써 소문의 진실 여부도 확인할겸 마법사가 많은 마을의 쉼터를 찾아갔다.


“당신도 파란머리집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믿는 건가요?”

“요정의 장난처럼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보물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소문이라는 게 원래 과장되고 헛된 이야기가 붙기 마련이죠. 원래는 당신 말대로 요정의 장난만 떠돌고 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아주 귀한 보물이 있다는 얘기까지 붙어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미래를 보는 수정구가 있다나 뭐라나. 워낙에 허무맹랑해서 믿는 마법사라고 해봐야 동화가 진짜라고 믿는 애들밖에 없지요.”


그리 말한 쉼터의 주인은 안쪽에서 칭얼대는 아기 울음소리에 급하게 들어갔다. 지금까지 돌아다녀본 마을 마법사들과 쉼터의 주인들의 얘기를 들어본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장소는 바다꽃밭, 하얀잎나무산, 각진나무 무덤 이 세군데다. 바다꽃밭은 이름처럼 바닷가에 있었고 하얀잎나무산은 마녀왕국보다 더 동쪽에 있는 산, 각진나무 무덤은 북쪽에 있는 검은산 근처에 있는 장소였다. 서로 연관도 없고 서로의 거리도 보통 먼 거리가 아닌데 이 셋이 제일 많이 언급된 걸 보면 일부러 의도한 게 분명했다.


“길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는데.”

지도를 두 번 정도 훑어보고 나서 가볼 장소를 정했다. 바다꽃은 바닷물이 없으면 피어날 수 없었고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에 숲이 있었다.


신기루다, 요정의 장난이다. 이렇게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도는 내용은 비둘기 우체부도 찾아갈 수 없다는 것과 한 번 그 집을 찾아가는데 성공한 마법사와 마녀들이 다시는 그 집으로 가지 않았다는 거였다. 일단 소문은 진짜라고 확인받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그 집을 찾는 거였다. 

가봤다는 이들중에 당연히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소문은 긍정하면서 장소는 물론, 그곳에서 벌어진 자세한 일은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만류까지 했다. 이유를 묻자 곤란한 건지 두려운 건지 애매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로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들에게 더 정보를 얻기 포기한 후 제일 처음 고른 바닷가 근처 숲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기, 잠깐만요!”


“음?”

“숲에 들어가시려고요?”

“그렇습니다만.”

약초를 캐고 나왔는지 바구니를 든 마법사 하나가 나타났다. 내 대답을 듣고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숲을 가리키고는


“지금은 바다꽃들이 씨앗을 뿌리는 시기라 보기 힘들어요. 덕분에 안개도 껴서 길을 잃으실 거예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바다꽃을 보러 온 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바다꽃을 보러 왔다고도 안 했는데 친절히 설명해주는 마법사를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바다꽃이 어떻게 씨앗을 뿌리는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댄 핑계겠지만 이미 예전에 바다꽃이 어떻게 씨앗을 뿌리는지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뒤에서 당황하며 뭐라 외치는 게 들리지만 뒤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처음 오자마자 찾다니 운이 좋았다.


“...그 세 군데나 언급된 이유가 있었군.”

길이 나 있지 않은 숲 안쪽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니 파란지붕으로 된 집이 나타났다. 거울같이 투명한 바다꽃이 먼저 시야를 빼앗고 하얀잎나무와 각진나무가 마법진을 대신하고 있었다. 각진나무가 수식을, 하얀잎이 그림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이런식으로 응용하는 건 장인들 사이에서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흐려지고 손을 뻗으니 잡히는 거 하나 없이 완전히 사라진다. 신기루나 요정의 장난이라고 불릴만 했다.

찾아가봤다는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하기도 꺼려하는 걸 보면 분명 어떤식으로든 안에 들어가서 말하기도 꺼릴만한 일을 당한 게 확실한데 어떻게 들어갔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마법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니 뭘 할 수도 없었다. 일단 바로 찾은 거에 만족하고 물러나려는 순간 사라졌던 집이 다시 나타났다.


“음?”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고 멀어지면 다시 나타나는 형식이라고 하기엔 사라진 이후로 한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손을 뻗어보니 사라지지 않는다. 집주인이 들어오는 걸 허락해서 다시 나타난 건지 아니면 마침 결계가 풀릴 정도로 마력이 다 한 건지 애매했기에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문을 다섯 번 두드렸을 때 문이 열렸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와요.”

목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 확실하게 허락을 받았으니 집으로 들어섰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이었다. 이렇게 책이 가득한 집은 책을 팔기 위한 서점이나 연구 때문에 관련서적을 모으는 집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가운데에 놓여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였다. 앉으라는 건지 살짝 빼어져 있는 의자에 앉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용건.”


한 번. 급격한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당신이 연구한 결계마법에 대해 의논하고자 왔습니다.”


“똑같네. 일단 뭐 사족 붙이지 않은 건 훌륭해요. 근데 똑같아.”

두 번.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기다려봤다.


“가끔, 아니 매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괜히 책 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녀도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왕궁 마녀가. 대체 누가 내 책을 마녀왕국까지 보냈는지 참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고 지금 그 연구를 계속해가느라 바쁜데 의논하자고 하면서 핵심정보만 쏙 빼가려는 녀석들이 많아. 근데 그나마 그런 녀석들은 점잖은 편이었어요. 어떤 녀석들은 내 연구와 정보만 쏙 빼갈려고 집을 날리기 위해서 마법을 날려댔어. 내가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그대로 있는데 대놓고 강도짓을 하려고 했지요.”


책을 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마 책을 만들기로한 서점과 다른 전문가들이 왕궁 마녀들과 거래를 해서 책을 공식적으로 내지 않고 이곳으로 찾아와 압박을 가한 모양이다. 

아직 남아있는 결계마법의 흔적을 보며 확실히 정교하고 장인도 쉽게 손 댈 수 없는 결계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계를 살펴보고 있던 중에 목주변이 작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빛이 칼날처럼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결계마법에서 파생된 공격마법인 듯 싶었다. 이걸로 세 번이었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아니면 돌아갈래?”

“일단 나도 더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그쪽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일세.”


굉장하고 훌륭한 결계였다. 실제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손도 못 댈 정도였지만 직접 보게 되니 파훼법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위협하는 빛을 전부 없애고 일어나 문이 있는 뒤로 돌아갔다.


“잠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나가는 문을 열었다.


“기다리라니까!”

저 마법을 완전히 파악하기엔 연구기록과 세운 수식들을 자세히 봐야겠지만 구조를 얼핏보니 명백한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단점은 바로 마법을 유지할 마력이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많이 드는 구조였다는 점이었다. 훌륭하고 효과적인 마법이지만 효율적이진 않은 마법이었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하늘과 어둑해진 길을 더듬고 이사갈 집을 어디로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걸으니 숲을 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만난 바다꽃 씨앗 얘기를 했던 마법사는 아직 떠나지 않았던 건지 나오자마자 마주쳤다.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내 모습이 그리 신기한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인다.


“근처에 마을이 있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하하 웃으며 마침 저도 돌아가던 참이라고 말한 후 앞장을 서기 시작한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들어서면서 쉼터까지 안내해준 그 마법사는 안으로 들어와 바로 옆에 앉으면서 궁금함을 참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멀쩡하셔요?”

“바로 사라지더군요. 혹시 멀쩡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많았습니까?”

“마법사뿐이겠어요? 마녀들도 엄청 탈진해서 겨우겨우 기어나오던데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일이 더 귀찮아질 게 눈에 훤했다. 들어갔다 나왔는데 멀쩡하게 나왔다면 실패한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대체 어떻게 한 거냐며 한동안 저 집주인 대신 나를 귀찮게 할 게 분명했다. 옆에 앉은 마법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집도 원래는 결계가 없었는데 저번에 다른 데서 온 마법사들이 한꺼번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부터 결계가 생겨났고 소문이 이상하게 퍼져서 결계 통과하는 걸 도전하러 온 마법사들이 많아졌어요. 거기다가 마녀들도 오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탈진해서 기어나오거나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쳐서 나왔어요.”


“일단 전 들어가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가까이에 마을이 있는데 어째서 숲에 집을 지었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멀쩡히 나오셔서 다행이에요.”


그 뒤로 조금 더 말하는가 싶더니 창문 밖이 어두워진 걸 보고 이만 가봐야겠다며 쉼터를 떠났다. 이제 알만한 건 다 알았지만 결국 원점이었다. 애초에 쉽게 풀릴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급적이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싶진 않았다. 이사를 간다해도 일시적이고 언젠가 또 뒤를 밟는 북도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해가 땅 아래로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꽤 걸린데다가 아까 마법을 파훼하느라 쓴 마력이 꽤 있어서 바로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의외라면 의외인 상황을 맞이했다.


“여기 있었군.”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봤던 목소리를 지닌 마법사가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만 들어보고 얼굴 한 번 안 봤던 마법사가 들어왔다. 분명 문은 잠궈뒀고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손에 열쇠가 쥐여져있는 걸 보면 쉼터 주인이 예비 열쇠를 준 모양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무례함은 숨과 마찬가지인가? 아주 자연스럽게 무례한 짓들을 저지르는군.”


“해가 이미 저물어버렸고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게 더 무례한 거라 생각해서 아침에서야 뒤따라 왔다. 어떻게 내 마법을 부쉈지?”

“내가 지적하는 무례함은 지금 이렇게 마법사가 뻔히 머무는 방문을 문도 두드리지 않고 열어버린 것과 어제 얼굴은 물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목에 공격마법을 들이댄 것일세. 그리고 마법은 파훼법이 훤히 보이길래 부쉈네만.”


“워낙 시달리는 일이 많았고 지금은 굉장히 급해서 이렇게 다짜고짜 들어왔다. 정말 급한 일이니 찾아왔다 아니 찾아왔어.”


어제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 마법사의 말투는 정말 오락가락했다. 어제는 존댓말과 반말이 섞였지만 그동안 쌓인 게 많구나 싶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존댓말 없이 어딘가 권위적인데다가 난데없는 친근감까지 덧붙이려 하는 말투였다. 거기다 뻔뻔하기까지한 이 두서없는 마법사는 잠깐이지만 내 정신을 빼놓는데에 성공했다.


“세상의 멸망에 대해 알고 있...어?”


두서없는 마법사의 난데없는 말은 내 정신을 다시 돌려놓기도 했다. 눌려있던 짜증과 함께 마력을 손에 담아 튕겼다. 마력에 떠밀려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다시 회수하면서 문을 닫고 마법으로 단단히 잠갔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짜증이 가라앉은 건 나갈 준비를 전부 다 마쳤을 때였다. 그제야 머릿속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아까 전 들이닥쳤던 마법사의 인상착의가 떠올랐다. 지붕이 파란색이어서 파란머리집인가 싶었더니 집주인의 머리색도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또 보게 됐다.


“드디어 나왔군요.”

내 표정은 굳이 거울을 안 봐도 좋지 않을 게 훤했다. 게다가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존댓말로 바뀌어있는 데다가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상한 말들만 한 것과 어제의 무례함에 사과드릴게요. 그러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말투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군. 그리고 난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 않네만.”


“급한 일이라 그럽니다. 제 결계마법에 대한 모든 이론식과 마법진 설계도를 드릴테니 어떻게 부순 건지 말해요.”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지만 얼핏 구조만 봐도 엄청난 마력이 들어가는 게 눈에 훤하더군. 조금이라도 마력을 밀어넣어 그 흐름을 어긋나게 하니 부숴질 수밖에 없었지. 어차피 마력량이 부족해 못 쓰는 마법이라 관심 없으니 됐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미로 자리를 떴다. 다행히 뒤따라오진 않는지 발소리도 불러세우는 목소리도 없었다. 쉼터의 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이구 엄청 쏟아지네. 지금 나가시려고요?”


그렇다고 하니 쉼터의 주인이 시기가 비올 시기라 당분간 비가 계속 쏟아졌다가 그쳤다를 반복할 거라고 한다. 땅이 마를 새도 없이 계속 질퍽거려 이동하기 불편할 거라는 충고와 함께 말하길


“비가 마지막으로 내릴 때 바다꽃들이 씨앗을 뿌릴 거예요. 그거 보고 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째서 다른 마법사에게 제 방 열쇠를 준겁니까?”


“용사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였어요?”


그 마법사의 이름이 용사인 듯 싶었다. 아니라고 하니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한 후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는 도중 든 생각은 이 마을 마법사들은 전부 난데없으면서 용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걸 즐기는 건가였다.

쉼터의 주인이 말해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용사는 적어도 이 마을에 있어서 제일 특별하면서 축복받은 마법사라는 얘기였다. 자세한 업적은 말할 수 없다고 딱 잘라냈지만 이미 결계 마법에서부터 그 능력이 짐작이 가니 저 눈에서 보이는 존경, 동경, 기대들이 납득은 됐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용사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에요. 다른 마을 마법사분들도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래전부터 지켜져온 약속이에요. 저뿐만이 아니라 이 마을 마법사들이 모두 약속한 거예요.”


바로 저 맹목적인 태도였다. 애초에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예전에 본 신이라는 걸 믿는 마법사들을 보는 기분이 들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실체가 없는 걸 믿었지만 용사는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사였다. 모든 마을 마법사들의 맹목적인 태도가 쉼터의 주인과 같다면 이 마을에 머무르는 건 고려를 해봐야할 것 같았다. 다른 마을 마법사들도 그들처럼 알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봤을 때 강요할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었다.

하루정도 더 머물고 만약 자신들처럼 용사를 대하라거나 그와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그 즉시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비에 젖는 걸 하루종일 막아내는 건 힘들겠지만 불편한 마을에 있는 건 사양이었다.


“아직 안 갔네.”


하지만 다시 눈앞에 나타난 이 마법사, 용사를 보고 지금 당장 떠나야할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의미로 이렇게 단기간 내에 같이 있기 싫어진 마법사는 GM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민이 끝난 건 갑자기 용사가 종이뭉치를 꺼내 내게 건넸을 때였다.


“뭔가?”


“아까 말하지 않았어? 이론식이랑 마법진 설계도야.”


“그건 봐도 아네만. 자네도 아까 듣지 않았나? 관심 없다고.”


“없는 것보단 낫잖아?”

“때론 없어서 편한 게 있네.”

결국 포기한 건지 돌아오는 말이 없다. 더 할말이 없는 나는 다시 짐을 챙겨들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미안해.”

날아오는 사과가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의도인지 훤해 뒤돌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지금 비가 안 왔다면 진즉에 떠났을 텐데 이번 운은 찾는 데를 한 번에 찾아낸 걸로 끝인 듯 싶었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비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 내내 내릴테고 그 사이에 그치는 것도 잠깐이었다.

태도변화가 이상하고 더 이상 상대하기 싫은 마법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떠받치는 이 마을에 굳이 남아있어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 이유들 때문에 저 쏟아지는 비를 막고 지금도 질척거릴 땅을 밟으며 무리하게 떠나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후자가 더 귀찮았다.

그의 태도를 봤을 때 포기하고 물러날 것 같진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내 호의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해가 가장 높이 뜰 시간인데도 짙은 비구름에 하늘이 어두웠다. 마찬가지로 짙은 땅을 보며 부디 이곳에 있는 동안 저 비와 땅보다 귀찮아지지 않기를 바랐다.


챙겨온 책을 읽으면서 어제를 보내고 쉼터 한 구석에 있는 책장에서 혹시 본 적 없는 책이 있을까 살펴보는 걸로 오늘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파란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의 효력은 오늘까지였던 건지 바로 다음날 다 읽은 책들을 다시 갖다놓기 위해 모두 챙겨들고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상황이 펼쳐졌다.


“...지금 상황에서 조금 뜬금없지만 궁금하니 바로 물어보겠네. 대체 그 안경은 무슨 의미인가?”


“안경을 쓰면 머리가 더 잘 돌아가거든, 생각도 많아지고. 그리고 다시 사과하러 왔어. 미안해.”

일단 의미 모를 안경에 대해선 궁금함이 풀렸다. 하지만


“혹시 주위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하나라도 오지 않았나?”

미안하다면서 밖으로 못 나오게 비키지도 않고 서 있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나가게 비키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돌아오는 말이 있었다.


“사실 그동안 제대로 사과를 해본 적이 없었다.”


덩달아 안경까지 벗고서 그렇게 말한다. 안경을 벗으니 말투가 또 변했다. 이건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과는 별개가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줄 수 있나 싶어서 직접 물어보러 왔다.”


“...할말이 많으면 오히려 뭘 먼저 해야할지 고민이 들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이렇게 느끼는군. 그 전에 묻겠네, 왜 굳이 사과를 받아들였으면 하는 거지? 내가 자네의 사과를 받든 안 받든 나는 이 마을 마법사가 아니니 상관없지 않나?”


그러자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더니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줄 정도로 용서를 구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 말에 그의 첫인상이 조금 무너졌다. 한순간이지만 머리가 멍해진 건 사실이었고 확인 반 진심 반으로 말을 꺼내봤다.


“내가 자네의 사과를 받는 건 자네가 더 이상 이렇게 날 찾아오지 않을 때일세.”


그 말에 용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나를 잠깐동안 쳐다보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쯤 나 또한 방을 나와 읽은 책들을 고쳐들고 책장이 있는 데로 갔다. 책들을 제자리에 전부 꽂은 후 천천히 더 읽을 책들을 찾아 더듬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책장 모서리의 흠집난 부분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첫인상이 빠르게 무너지는 건 꽤 오랜만에 느꼈다.

말투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행동 자체가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걸 빼고서 생각해도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느닷없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고 뭔지를 모르겠다는 게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책장 앞에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걸 느끼고 돌아보니 다른 것들보다 확연히 두꺼워보이는 책을 내게 내미는 쉼터의 주인이 있었다. 읽을 책이 없어 망설이는 걸로 보였던 건가 싶었는데


“용사님께서 전해주라고 하셨거든요. 이 책 찾고 있던 거 맞죠?”


아무래도 용사라는 마법사는 정말 말 그대로 날 찾아오지 않을 생각인 듯 싶었다. 그러니까 본인은 오지 않고 이렇게 다른 마법사를 통해 소통을 하겠다는 거였다. 이 얄팍한 말장난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지만 쉼터의 주인은 바빴던 건지 책을 넘기며 뛰다시피 어디론가 뛰어갔고 책을 꽂기엔 책들 사이 군데군데 빈 공간이 많았지만 책 자체가 두꺼워서 끼울 수 없었다. 애초에 끼워놔도 나중에 정리하러 올 쉼터의 주인이 다시 책을 갖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나중에 쉼터의 주인을 통해서 다시 돌려주거나 안 받으면 숲에다가 던져둘 생각으로 저 멀리 놔둔 뒤에 책장에서 꺼낸 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놔둔 그 책을 다시 가져와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 책장에서 가져온 책들은 예전에 만들어진 거라 표지만 바뀌고 내용이 같은, 이미 읽었던 책들과 읽다보니 점점 흥미가 사라지는 책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책장에 책들이 얼마 없어서 지금 가져온 것들이 안 읽었던 책들이라 새로운 걸 가져온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읽기로 했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지가 처음보는 색조합과 그림인 책인 걸로 보아 적게 뽑거나 마을 서점에서 많이 팔지 않는 책인가 했는데 내용을 보니 왜곡 현상이 일어난 장소를 관찰하는 개인 일지였다. 출판을 생각한 건지 꽤나 다듬은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종이를 세 번 정도 넘겼을 때 쯤 감상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책을 열심히 읽어서 그런지 마지막 쪽을 넘기고 딱딱한 표지가 다시 만져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뻐근한 목을 뒤로 살짝 젖히니 빗물이 잔뜩 흘러내리고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런데 빗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비가 그쳤군.”


창문을 열자 그 위로 고여있던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걸 제외하면 내리는 건 없었다. 잠깐 멈춘 건지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어두웠고 땅 위엔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묘할 정도로 적절한 때에 비가 그쳤다.

제대로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 방금 다 읽은 책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땅은 당연하게도 질척거렸지만 비가 안 내리고 있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마을을 나와 숲으로 들어가니 군데군데 튀어나온 나무뿌리들에 물기가 가득해 미끄러웠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집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직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책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이 있었고 그 가운데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다. 다른 점이라곤 탁자 너머에 집주인이 앉아있다는 거였다.


“안녕?”

안경을 쓴 채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침 여기 책들이 많이 있고 마침 밖에 비도 와.”

뒤를 돌아보니 열린 문 너머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는 물론이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 없었는데 잠깐 그치기 전보다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보니 집주인이 어두운 밤중에 불 없이 길이 보이게 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선 말하길

“이걸로 용서해주면 안될까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들고 있던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대로 그 집에서 나왔다. 찾아오지 말랬더니 수작이나 부리고 있었다. 방수막을 만들어 비를 막아내면서 쉼터에 도착했고 즉시 짐을 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준비만 마쳤다.


“...비가 원래 이렇게 많이 내립니까?”


“그렇진 않지만 몇 번 이렇게 많이 내리는 때가 있었어요.”


자칫하면 창문은 깨지고 지붕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센 비였다. 쉼터의 주인도 걱정이 됐는지 지붕 먼저 확인하러 갔다. 저 정도면 방수막이 다음 마을까지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보통 하루 길면 이틀에 적당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빗줄기는 사흘 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굵고 많이 내렸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한 일은 쉼터의 주인이 전해주는 책을 읽는 거였다. 이쯤되니 자주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쉼터의 주인도 내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 건지 책을 건네줄 때 먼저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대부분이 책 주인의 이야기였다.

이 마을 마법사들이 곤란에 빠지거나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질 때마다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는데 듣다보니 무용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란과 문제가 외부 혹은 소환마법으로 나타난 위험 생물이었고 전부 싸워서 승리하고 내쫓았다는 식으로 끝났으니.


“어쩐지 일관적이고 끝이 없군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만요.”

그렇게 말하던 쉼터의 주인은 실수로 말한 건지 깜짝 놀라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묘한 말에 가득 깔린 의심에서 의아함이 올라왔지만 곧바로 신경을 껐다. 사실 일부러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기도 했다. 듣고 싶지 않다며 잘라내기엔 쉼터의 주인은 통상적인 의미로 친절했고 비가 내리는 시기가 끝날 때까지 이 쉼터에서 시간을 보내야하니 당연한 얘기지만 괜히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저번에도 물었지만 정말 용사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세요?”

“아닙니다.”


미심쩍다는 눈빛이 책과 나를 향해 번갈아가며 날아오지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났고 또 건네진 책을 받아 방으로 돌아가 읽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니 드디어 빗줄기가 눈에 띄게 얇아졌다. 즉시 준비해논 짐들을 메고 책을 챙겨든 후 밖으로 나와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이유가 어찌됐든 전해주는 책들을 전부 읽었으니 그 책값으로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비가 왜 많이 내리나 했더니...”


숲으로 들어오니 저 멀리 비를 부르는 달팽이 무리가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가 숲이라고 해도 바닷가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고 바다꽃이 피기 위해 어딘가로 바닷물이 흘러들어올 텐데 어떻게 비달팽이가 여기 있을 수 있지?


“...!...젠...!!...아...!”

빗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날뛰고 있었다. 마침 만나야했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자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군.”


이 숲의 나무보다 조금 작고 저기 선 마법사의 두 배만큼 큰 비달팽이가 있었다. 거대화 마법으로 커진 물건들은 자주 봤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커 마법사는 물론이고 생물에게 쓰는 경우가 없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만만치 않군! 허나 나 또한 물러나진 않을 거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말을 직접 들으니 놀랍게도 저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감이 잡혔다. 정직하고 자기가 옳다 싶은 전사. 일단 이건 안경을 끼지 않았을 때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납득가는 부분들이 꽤 많았다. 진짜로 그런 성격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지만 쉼터의 주인 같은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런 성격이 형성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게 먼저일진 모르겠지만 일단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성격과 반응이 만들어지게 영향을 주고 있는 건 확실해보였다.

커다란 비달팽이는 거대화 마법만 걸려있는 게 아닌지 지금 본 것만해도 8개는 될 법한 공격마법들을 맞았는데 휘청거리기만 할 뿐 굉장히 멀쩡해보였다. 그러자 공격하던 그는 마법 뿐만 아니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긴 칼을 들고 휘두르기까지 했는데 그 순간 비달팽이가 크게 더듬이를 휘둘렀다.


“...다 젖을 뻔 했군.”

비가 폭포처럼 단숨에 쏟아져내렸다. 일단 나는 방수막이 아슬아슬하게 버텨줘서 젖진 않았지만 방수막은 물론 얇은 비막이도 안 걸친 채 공격만 하고 있던 저 마법사는 당연하게도 그 비를 몽땅 맞아 쓰러졌다. 책을 돌려줘야하는 입장이고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으니 저 비달팽이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지만 마법이 잘 듣지 않는 걸 보니 무슨 마법을 걸어도 마력 낭비일 게 훤해 실을 붙여놓기만 했다. 기절한 건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그를 업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으으...”


그가 일어난 건 도착한 후 업느라 젖은 망토를 벗고 있을 때였다. 주위가 파악이 안 된 건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 난 짧게 대답했다.


“책값.”


“괴물...괴물은 어떻게 됐지?”


“자네가 말하는 괴물이 그 커다란 비달팽이라면 멀쩡하게 저 숲에서 돌아다니고 있네만.”


다급한 얼굴로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적이더니 뜬금없이 손에 안경이 나타났다. 그걸 쓰고 조금 진정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던 그는 한숨을 쉬듯 숨을 내쉰 후에야 말을 꺼냈다.


“여전히 내가 못마땅할테고 뜬금없겠지만 미안해. 도와줘.”

“본인도 뜬금없다는 걸 아주 잘 아는 것 같아서 더 말은 안 하겠네. 그 비달팽이 때문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껄끄러움과 불쾌감, 짜증을 전부 덮어두고 상황을 정리해봤다. 내리는 걸 넘어서 폭포 아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비달팽이 무리, 커다란 비달팽이.


“해결할 때까지 이 집 책을 읽겠네.”


“책뿐만 아니라 여기서 지내는 게 어때?”


“그건 됐네.”


상황이 감정을 누르고 호기심이 감정을 지웠다.

우선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듣자하니 특징을 가지게 된 마력이 고이는 특성을 띄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요약을 하자면 이 숲은 마력이 고이기 쉬운 구조를 띄고 있고 장미 씨앗만큼은 아니지만 특징을 가진 마력이 그렇게 고이고 뭉쳐져서 형태를 띄게 되었는데 그걸 먹은 게 바로 아까 본 커다란 비달팽이다 이거군.”


“이해가 빠르네.”


“이해 못할 부분이 없잖나.”


“마을 마법사들은 못 알아들어서 말이야.”


특정분야의 전문용어들을 써대는데 그쪽에 발 들여본 적 없는 일반 마법사가 퍽이나 알아듣겠군.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담아 누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하나.


“일단 비달팽이가 그 마력을 토해내게 해야겠군.”


“왜 굳이? 쓰러뜨리면 되잖아.”


쓰러뜨린다의 뜻은 상대를 서 있는 상태에서 누운 상태로 만든다는 뜻과 아니면 죽여서 없앤다는 뜻 이 두가지가 있다. 그리고 저 말은 아무리 되씹어봐도 후자의 뜻 같았다. 기절하기 전에 그 커다란 비달팽이에게 각종 공격마법과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를 긴 칼을 휘둘러 댄 걸 보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문득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무용담.


“쉼터의 주인에게 자네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지. 혹시 상대한 녀석들 전부 이 숲에서 고인 마력을 먹은 건가?”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너 진짜 머리 좋구나.”


아무래도 상대를 보는 기준이 저기 있는 마을, 그러니까 일반 마법사들인 듯 싶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기준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비달팽이도 그렇고 외부에서 온 녀석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왔는지 조사도 안 하고 그냥 다 죽인 건가?”

“고이고 뭉친 마력에 홀려서 오는 거야. 조사라고 할 것도 없지.”


“소환생물은?”

“마을 마법사들이 시험삼아 하다가 나타난 거.”


“협조성이 최악인 걸 넘어서 앞일을 생각도 안 하는군.”


“협조?”

“숲이 바로 옆에 있으니 자네만의 문제가 아닐텐데 같이 해결하기는커녕 마력에 홀릴 생물들을 그것도 꼭 필요한 게 아니라 시험삼아 소환하다니”


정정한다. 당연한 기준이 아니었다.


“너도 마찬가지지만 이 마을도 답이 없군.”

답이 없다는 말에 충격받았는지 입매를 굳히던 대화상대는 뜻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용사다. 너는?”


“패치.”


이렇게 나는 이번 사태의 도움과 책값으로 용사와 거래를 했다.

일단 확실한 걸 우선시 했기 때문에 어째서 쓰러뜨리는 방식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세히 생각은 안 해봤어.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거든. 물론 겨우 이런 이유로 네가 납득을 안 할 것 같으니까 일단 내가 알아낸 것들을 말할게.”

특성을 지닌 마력은 한 번 생명체를 거쳤으니 생명체가 죽으면 본래 지니고 있던 마력과 함께 자연으로 흩어진다는 거였다. 확실하고 깔끔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아직 의문점은 많이 남았다.


“혹시 생물들의 탐지 능력이 마법사보다 뛰어난가?”


“특성을 지닌데다 뭉쳤다해도 결국엔 자연적인 마력이니까 민감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못 찾아.”


“숲 안이라면 뭉친 마력이 나타나는 장소는 무작위인가?”


“응.”


운이 좋아서 먼저 발견하는 게 아닌 이상 쓰러뜨리는 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숲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영원히 반복하게 될 일이기도 해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비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구조를 바꾸겠다고 숲 자체를 뒤집어 엎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거기까진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 그 비달팽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봐야겠군. 마법이 안 통했지만 마법을 잔뜩 날려댄 걸 보면 그 비달팽이 이전의 생물들은 마법이 통했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용사는 뭔가 기분이 좋은 듯이 웃으면서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력이 뭉치게 된 원인인 특성 그 자체 때문인데 그 마력을 먹게 된 생물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많으면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 비달팽이가 가지게 된 특성은 거대화와 마법저항이었다.


“그래서 그 칼을 꺼낸 거였군. 아쉽게도 비달팽이가 더 빨랐지만.”


“단순한 칼이 아니라 용검이다.”


“일단 나는 모르는 게 당연하니 더 설명할 생각은 말게 이 대화의 목표가 흐려질...안경은 또 언제 벗었나?”


“방금.”


당당하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이 저번에 마주했을 때와 조금 달랐다. 처음엔 무언가에 대해 놀라거나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면 이번엔 나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눈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에게 원하는 거나 듣고 싶은 게 있고 그걸 이미 방으로 다짜고짜 처들어온다던지, 책을 보내는 행동으로 많이 보여줬었다.

다시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고 저렇게 대놓고 탐색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저 아래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상대를 파악하려고 탐색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도 적당선을 지키는 편이었다. 저건 손만 안 움직였지 마법사를 풀처럼 뽑으면서 이리저리 헤집는 태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만나 얘기하지.”


“왜 여기서 머물지 않고 나가려는 거지? 여기서 지내면서 괴물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할텐데.”

“다른 모든 게 불편하니까.”


비구름 때문에 어둑한 숲이 해가 지기 시작하니 깜깜해졌다. 뒤에서 길도 안 보이고 비도 와서 위험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지내야겠네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동그란 빛을 만들어내 띄우니 앞이 환해져 길이 보였다. 발 아래에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다가 멀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여유를 주지 않고 길을 따라 숲을 나왔다.

쉼터의 주인은 잠시 어디 나갔다 온 줄 안 건지 왜 짐가방을 메고 있냐 물었다. 아무 말 않고 그 옆에 꽂아놨던 열쇠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의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는 걸 들으면서 여전히 난데없는 하루를 끝냈다.


일이 빨리 끝났으면 싶었지만 물길은 원하는대로 흐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세 가지인 것 같은데.”


이 숲은 그리 넓지 않았다. 숲이 넓다고 해도 그 정도 크기의 비달팽이라면 당연히 멀리서도 눈에 띌 텐데 등껍질은 물론 더듬이도 보이지 않았다. 발견한 거라곤 커다란 덩치에 짓눌린듯한 식물들의 흔적과 어제 얼핏 봤던 정상 크기의 비달팽이 무리였다. 


“투명화라고 하기엔 흔적에서 만져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네만. 숲 밖으로 나가버린 게 아닌가?”


“아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먹은 생물들은 적어도 한 달동안 이 숲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아. 확실히 이 숲에 있어.”


용사는 확실히 외부활동을 사렸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이 숲을 이렇게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마을 마법사들의 입을 막지 않았던 건 내가 느낀 대로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보이는 무용담처럼 말해서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음?”


“이것들은 왜 가져온 거야?”


용사가 가리킨 건 열 마리의 비달팽이 무리였다.


“원래라면 비달팽이는 바닷가가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없네 그러니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커다란 녀석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데려왔네만.”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비달팽이가 그리 신기한지 쉽게 눈을 떼지 못하길래 손을 바로 앞으로 가져가 똑똑 책상을 두드렸다.


“집중하게. 아무리 신기해도 일단 녀석을 잡아야하는 게 우선이잖나.”


“...잠깐 생각중이었어.”


안경을 고쳐쓰며 비달팽이들에게 눈을 뗀 용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종이를 가져와 펼치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는 얼마 안 가 숲의 지도가 되어있었다.


“일단 찾아내는 게 우선이야. 집은 여기 한 가운데고 결계마법이 작동하는 건 집 주위로 열 걸음.”


“딱 하얀잎나무와 각진나무가 심어진 데까지군. 일단 나는 마을에서부터 찾아봤으니 여기쯤엔 없었네.”


“여기 있는 새에 왔을지도 몰라.”


그렇게 한가운데에 있는 집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 반으로 나눈 숲의 영역중 윗부분은 내가 가보기로 했다. 출발 시간은 내가 책을 세권을 읽은 후로 정했고 용사는 그동안 방에 들어가 있겠다면서 다 읽으면 부르라고 했다. 옆에 앉아서 어제처럼 헤집듯이 탐색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권을 다 읽을 때까지 용사는 나오지 않았고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넣은 후 방문을 두드리니 다 읽었냐며 나왔다.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네?”

“일부러 빨리 읽었네만. 녀석을 빨리 찾아야하지 않나.”


안경 알이 두꺼워 눈은 안 보이지만 입매가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일그러지나 싶더니 지도를 내민다.


“난 길을 잘 알지만 넌 모를테니까.”


“고맙네.”


감사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용사를 뒤로 하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감정과 상황을 별개로 봐야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꺼낸 감사인사였고 불편한 건 맞기 때문에 먼저 뜬 자리였다.

안 그래도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인데 비달팽이 때문에 잠깐이라도 그치는 때가 없었다. 신발에 미리 방수 및 미끄럼방지 처리를 했지만 오래가진 못해 빠른 걸음으로 숲을 돌아다녔다.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니 어딘가에서 갑자기 끊기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다시 발견되기를 두어번 반복했을 때쯤 지도에 표시된 영역을 다 돌았다. 비와 나무 때문에 시야가 제한 되는 걸 감안하더라도 없는 건 확실했다. 더 찾는 걸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니 먼저 온 건지 용사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찾았나?”

“아니. 흔적만 뚝뚝 끊겨있었다.”

비 때문인지 안경을 벗고 있는 용사가 각진나무 밑동을 발로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용사가 돌아다닌 영역에도 흔적이 뚝뚝 끊겨있었고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확실한 건 세 번째 특성은 투명화가 아니라는 걸세.”


“곳곳에 흔적이 끊겼다가 다시 나타나는 걸 보면 순간이동 같은데...”


그렇다면 일이 귀찮아도 보통 귀찮아진 게 아니었다. 마법저항에다가 순간이동이라니 정말 끔찍한 조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아예 이 마을에 눌러 살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일주일 내로 녀석을 잡지 못한다면 며칠 내내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걷는다 해도 떠날 생각이었다.


“곳곳에 함정을 설치해야겠군.”

“숲이 훼손되는 건 곤란해.”


“그정도로 강한 함정을 설치할 생각은 없네만.”

그 뒤로 그래도 안 된다, 그럼 이대로 흔적만 졸졸 쫓아다닐 거냐 실랑이한 끝에 나무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파를 일으켜 신호를 보내는 함정을 설치하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충격파가 비달팽이의 움직임을 잡을 지도 몰랐다.


“단, 바다꽃들이 있는 데는 안 돼.”


“그건 당연하지만 그 전에 그 비달팽이가 바다꽃밭에 가지 않길 바라야하지 않나.”


그렇게 우리가 해야할 일에 일정시간마다는 물론 그 외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다꽃밭을 살펴보러 가는 일도 추가됐다. 곳곳에 충격파 함정을 만드는데 반나절이 걸리고 곳곳에 설치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늦은 밤에 돌아오는 나를 쉼터의 주인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포기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숲을 한바퀴 돌고 바다꽃밭으로 올 때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짓눌린 풀들은 다시 원래대로 일어나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녀석의 흔적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여기까진 자연스러웠다.


“왔구나.”


“흔적이 더 늘어나지 않는 거, 자네도 눈치챘나.”


“그래.”


“순간이동도 아닌 것 같네만.”


아무리 순간이동이어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흔적이 발견되기는커녕 원래 있던 흔적도 지금 사라지고 있는 중이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애먹이는 녀석은 참 오랜만이다 싶은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무언가 요란하게 부숴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무언가 날아오는 게 있었다. 반사적으로 잡아채니 익숙한 질감이 느껴졌다.


“...책?”


분명 용사의 집에 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이게 왜 날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책들이 비와 함께 내리고 있었다. 이 책들이 있어야할 용사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기 있는 건


“...거대화가 아니라 크기조절이었군.”


용사는 바로 뛰어갔고 나는 그대로 흩어진 책들을 찾으러 자리를 떴다. 책들이 함정 위로 떨어졌는지 마력이 담긴 충격파가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열심히 작동하는 함정들 덕분에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다.

책을 열 권쯤 찾아냈을 때 저 멀리 나무보다 높게 솟은 더듬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나 싶더니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어쩐지 그동안 헛짓거리를 한 것 같아 허탈한 느낌이 들었지만 젖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책들을 보니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책들은 하나하나 훼손방지 마법이 있는 건지 구겨진 부분도 없이 멀쩡했다. 그렇게 제법 모았다고 생각했을 때 쯤 바다꽃밭으로 가니 흙투성이가 된 용사가 먼저 와 있었다.


“잡았나?”


“응.”


“날아간 책들은 일단 보이고 함정에 떨어진 대로 주워왔네만.”

“나머지는 집 근처에 있어.”


커다란 비달팽이도 쓰러뜨렸으니 이제 가도 되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바다꽃들의 꽃잎이 일제히 하얗게 변하며 오므려졌다.


“원래는 날이 좀 더 지나야 하는데 그동안 비가 쉬지도 않고 내려서 시기가 앞당겨졌군.”


“그러고보니 비가 그쳤네.”


비가 그친 걸 깨닫고 바다꽃들을 지켜봤다. 오므려진 바다꽃잎들은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자 터지듯이 펼쳐지면서 바람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듯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하얀 꽃잎들은 다시 투명해지면서 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때마침 햇빛이 내려와 꽃잎들에 반짝임을 더했다.


“예전에도 봤지만 정말 장관일세.”


아주 어린날 책으로만 봤던 바다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짧은 여행을 하던 길이었다. 방수막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지겹도록 내린 비에 전부 젖은데다가 마을은 보이지 않아 한창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피곤함은 비를 맞은 만큼 쌓여있었던 상태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지겨운 비가 그칠 때쯤 저 멀리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마녀들도 뭉쳐있는 걸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갔었다.

왜 거기 뭉쳐있었는지 의아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쉼터가 있는 마을이 급했고 가장 가까워진 마법사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던 순간 지금처럼 바다꽃이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아름다워 한순간 모든 생각이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마을 마법사들은 아쉽겠군 그래, 이 시기를 기다려왔을 텐데.”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의아했다. 반짝이는 바람에서 눈을 떼고 용사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쳤다. 아니 눈이 마주친 건지 애매했다. 용사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굉장히 멍해보였다. 어쩐지 목 언저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어 순간적으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계속 책을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용사에게 다가갔다.


“정신차리게. 아직 뒷수습할 게 많네.”


그 커다란 비달팽이를 물리적인 공격으로만 때려잡아야 했으니 지친 건 당연할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서서 쉬기엔 뒷수습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가령 무너진 집 복구라던지.


“책들도 이게 전부가 맞는지 확인해야하네.”


용사는 그제야 정신차린 듯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커다랬던 녀석이 섞인 비달팽이 무리를 집으로 데려온 건 나였으니 이 뒷수습에 동참해야하는 건 당연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거래는 끝났으니 여기 계속 남는 건 사양이었다.


“오늘 안으로 마무리한다.”


책은 물론이고 손톱만한 지붕과 벽 파편을 전부 주워와 용사의 집을 원상태로 복구해놨지만 결국 지쳐서 쓰러지다시피 잠들어버려 오늘을 보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사의 집에서 자게된 나는 해가 뜨자마자 바로 나와 이 마을과 숲을 떠났다. 그동안 비를 잔뜩 내렸던 비달팽이 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가는 동안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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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썼어.”

?”
저번에 네 얘기로 글 쓴다고 했잖아?”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니카가 퍼블리에게 그동안 퍼블리가 겪었던 일들을 글로 써도 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노렸던 건지 그 때는 마침 아침이었고 퍼블리는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에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며 아니카는 허락을 받자마자 평소처럼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으니 퍼블리가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내용은 완전히 똑같이 하진 않았고 조금 다르게 썼어.”

어쩐지 내 얘기가 글로 써지니 좀 민망하네...”
아니카가 건네는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받아든 퍼블리는 빨개진 목을 가리듯이 고개를 푹 숙여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동화네?”
왠지 그냥 수필이나 소설보다는 동화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동화로 써봤어.”

동화다보니 어린아이들도 읽을 수 있게 간결한 문장과 간단한 단어로 쓰려고 애를 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더 번지지 않게 조심스레 종이를 넘기던 퍼블리는 마지막으로 써져있는 문장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들어 아니카를 마주봤다. 아니카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솔직하게 말해봐.”

별로는 아닌데 예상이랑 달라서 말이야. 보통 동화들은 항상 마지막에 모두 행복해졌다는 식으로 써지는데 이건 그...”
동화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부 해결은 됐지만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다라고 하기 보단 강조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당연하지. 지금까지도 모두가 행복하진 않잖아.”
그 말에 퍼블리는 더 말하지 않고 꺼내놓은 얼음을 집어 입 안에 굴렸다. 얼음에서 맛이 날 리가 없는데 혀뿌리에서 쓴맛이 도는 느낌에 퍼블리는 눈을 찌푸리며 작게 웃었다.

 

가장 이상적이고 상상하기 쉬운 미래라면 셋이서 전서구를 타고 왕국으로 날아가는 거였다. 물론 전서구는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고 극렬하게 날뛰었겠지만. 여기서 아니카와 전서구가 예상치 못한 게 있었으니 바로 저주 때문에 잠들어버려서 그대로 숲에 남아있었던 선발대들이 있다는 거였다.

흑기사단과 아난타처럼 잠드는 저주가 아닌 다른 저주에 걸려 숲이 사라지기 전에 빠져나온 이들도 있었지만 잠드는 저주가 월등히 더 많았다는 거였다. 숲에서 나온 메르시마저도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잠들어있었으니.

뭐야?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
곳곳에서 자다 일어난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와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패치는 주위를 한 번 슥 둘러보다가 옷에 붙은 풀을 털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퍼블리와 아니카, 전서구가 그런 패치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언제부터 이 근처에 누워있었는지 일어나고 있는 마녀들과 마법사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려서 따라갈 때를 놓쳤지만 다행히 패치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패치는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어떤 마법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덕분에 멀리서 그 마법사를 본 퍼블리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일어났나?”
, 너는?”
커다란 덩치에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 콧수염과 팔 근육이 인상 깊은 마법사. 흩어진 기억들을 봤을 때 아난타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말했던 그 마법사였다.

잠꾸러기들을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그 말에 그 마법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전서구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눈에 담아 굴리고 있었다. 이 난데없는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당연한 거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
저주에 걸려서 잠든 선발대들이 깨어나는 상황.”
간결한 질문과 간결한 대답이 오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전서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촉새처럼 빠르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낼 부리가 딱 벌어진 채로 멈춰있었다. 그에 아니카가 끝을 내듯 쐐기를 박았다.

지금 있는 역사책들 전부 태워지겠네?”
아니카가 가벼운 어투로 말하긴 했지만 역사책이 불태워지는 건 당연한 얘기이자 약과였고 왕국 자체가 지금까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돌아온 선발대들과 공적을 가로챈 후발대, 공주가 잠들어있던 걸 비밀로 했던 왕궁 마녀들과 살아 돌아왔지만 저주 때문에 겨우겨우 살아왔지만 저주가 풀린 덕에 다시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된 몇몇 이들과 왜곡된 역사책을 보며 살아왔던 이들. 난리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신성지대도 한창 불타고 있었는데 의외로 신성측을 공격하고 있는 건 흑기사단과 메르시가 아니었다.

아이고! 날개 아프다!”

소식 전하는 비둘기들이 가장 바쁘구나.”
바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요것아! 내 깃털 좀 봐, 튼튼해서 풍차처럼 날개 돌려도 한두 개 떨어질까 하던 깃털이 민들레 홀씨마냥 바람만 불어도 숭숭 빠지고 있는 거 봐!”

전서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퍼블리는 어색하게 하하 웃고 패치는 한숨을 쉬며 얼음을 넣은 물통을 가져왔고 전서구는 물통을 낚아채서 급하게 들이켰던 적이 있었다.

그 벌판, 아 이젠 숲인가? 아무튼 거기로 당신네들 찾으러 가기 전부터 묘한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진짜 홀랑 떠날 줄은 몰랐죠.”

그 뒤로 저주가 제대로 풀렸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둥 아무리 그래도 좀 더 있다가 저주가 확실히 풀렸을 때 떠나야하지 않았겠느냐는 둥 걱정 섞인 말들을 툴툴 내뱉던 전서구는 창문을 툭툭 두드리면서 구구 울어대는 비둘기를 보고 핼쑥한 얼굴로 마저 일하러 나갔다. 퍼블리는 창문에 붙어 전서구가 저 멀리 날아가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한참 용사와 컨티뉴를 찾았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아 찾는 걸 포기하고 전서구를 타고 막 깨어난 선발대들보다 먼저 왕국에 왔을 때 패치가 제일 먼저 한 건 뒷마당의 약새풀밭을 전부 태우는 거였다. 전서구는 그 때 부리를 쩍 벌리며 아까워했고 아니카는 여름에 시원했는데 아쉽다며 호호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건 바로 왕국을 나가는 거였다.

엄청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날 줄 알았는데 GM할아버지네 마을 가는 길은 바로 기억났어요!”

그리고 돌아온 곳은 왕국으로 오기 전에 살았던 숲이었다. 집을 태운 잔해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집이 있던 곳은 풀이 자라지 않아 곧바로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고 난 후 아니카가 종종 놀러오고 있었는데 예전엔 골목만 조금 지나면 됐는데 이젠 놀러오기 굉장히 멀어졌다는 작은 불만 외엔 크게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가다 패치가 자리를 비울 때 나중에 독립하면 같이 살지 않겠냐는 말을 넌지시 꺼내고 퍼블리는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벌써 2년이 흘렀다.

오늘은 왜 용사님과 같이 다니게 됐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이번까지 합치면 열 번째다.”
그래도 또 들을래요.”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퍼블리는 패치의 과거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게 하루 일과가 됐다. 숲에 흩어진 기억들은 퍼블리 덕분에 다시 뭉쳐졌지만 안에 아직 밸러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었는지 아니면 다시 돌아왔지만 너무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패치는 기억하지 못했다. 퍼블리는 이제 패치가 알고 있는 과거뿐만 아니라 특별히 무언가를 계속 먹을 정도로 좋아해본 적 없다는 미지근한 입맛과 포옹보다는 악수가, 연애서적보다는 추리 서적을, 추리서적보다는 마법서적을 더 좋아한다는 책 취향과 그 외 패치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사소한 취향들을 알게 됐다.

잠깐 물 갖고 올게요!”
왕국에서 살았을 때보다 확연히 밝아지고 쉽게 다가오는 퍼블리에 패치는 가장 먼저 미안함을 느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나온 건 사과였고 퍼블리는 사과보단 아빠의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싶다는 말을 했다. 퍼블리가 듣고 싶다고 했던 것들 중에 두 번 이상 듣지 않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둘이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는 게 있었으니 바로 치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얘기할 때 외엔 둘은 치트에 대한 걸 완전히 묻어뒀다.

내일 새로 물을 떠와야할 것 같아요.”
이제 여름이라 그런지 금방 마르나보군.”
그러고 보니 올해 축제는 진행할까요? 작년에는 워낙 정신없어서 축제도 생략됐던데.”
아마 안할 거다. 이제는 축제의 의미가 없어졌을 테니.”
패치는 그렇게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넘기고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패치를 통해 용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퍼블리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 이야기를 자주 듣는 이유는 한순간에 달라진 용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면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제 아빠가 더 이상 거기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느낌이 가장 컸다.

이야기를 다 듣고 생각에 빠져있는 퍼블리를 힐끗 보다가 눈을 감은 패치는 꽤 복잡한 심정이 담겨있는 한숨을 쉬더니 바로 입을 연다.

숲에 나온 이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고 지금에서야 겨우 결심이 든 게 있지.”

한창 생각에 빠져있던 퍼블리는 패치의 말에 다시 눈을 또렷이 떴다.

세상의 끝 너머로 가볼까 한다.”
언젠가 전서구가 전해줬던 소식 때문일까, 아니면 숲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용사와 컨티뉴 때문일까. 퍼블리는 놀라긴 했지만 곧이어 담담해졌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진정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용사님과 현자님을 찾기 위해서요?”

아니.”
단호하게 부정한 패치가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대답한다.

끝을 맺지 않고 잠드는 걸 선택한 불법침입자의 끝을 제대로 매듭 지어주기 위해.”

퍼블리가 그 때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놀란 건 당연했고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자리 잡은 감정은 신기하게도 기쁨이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패치는 안심한 얼굴로 편안하게 힘을 빼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었다. 그리고 퍼블리는

퍼블리?”

?”
우리 근육이, 감상은 안 들고 딴생각이 들었구나~?”

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동화를 보니 옛기억이 떠올랐다고 해도 딴생각을 한 건 맞았으니.

그래서 무슨 생각했어?”

예전에 내가 고생했던 생각.”
패치는 그 말을 꺼낸 날 바로 떠난 건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준비해뒀는지 짐을 고르고 챙기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사는 거창하지 않았다. 마치 평소처럼 식량을 사러 근처 마을에 갔다 올 때 하는 인사처럼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올 것처럼 둘은 큰 걱정 없이 인사했고 큰 동요 없이 몸을 돌렸다. 퍼블리는 예전만큼 슬프지 않았고 예전만큼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감나지 않아서 차분하다고 하기엔 굉장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예전만큼 막막하진 않았다.

아니카.”
?”
매번 드는 생각인데.”
슬프진 않은데 허전해서 그 허전한 만큼 눈물이 채울 뻔한 날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짐까지 챙겨서 온 아니카는 이제 같이 살겠다며 허전함을 조금씩 없애줬고 눈물이 나올 일도 이유도 없었다.

고마워.”

남은 허전함은 가끔가다 가지고 있던 튼튼한 유리병을 굴려 바람처럼 움직이는 파란꽃잎들을 지켜보거나 어렸을 때 가지 못했던 호수를 구경하러 가는 걸로 채워 넣었다. 그래도 가장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허전함을 없애는 건 바로 아니카였다.

그래. 그래서 감상은?”
여전히 힘들었고 글이랑 현실은 다르구나 싶어.”
당연한 얘기야.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고 좀 더 다듬어야할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까 마저 쓰러갈게.”
늦었으니까 나랑 더 얘기하고 자고난 후에 쓰는 건 어때?”
원래 늦은 시간에 더 집중이 잘 되는 법이야.”
아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뭉치를 다시 가져갔고 퍼블리는 시계를 힐끗 보다가 입을 열었다.

“GM할아버지는 어디 갔을까?”


다시 숲이었지만 벌판이었을 때도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바다 너머도, 산 너머도, 발을 딛을 수 있는 들판 너머에도. 넘어갔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는지, 않았는지 갔다 와서 그 너머에 뭐가 있다고 말해준 이들이 없었다.

그래도 가보고 싶으니까 가는 녀석들은 많지.”

높디높은 검은 산, 그 너머를 본 여행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산이 제 위로 올라가는 걸 허락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찌 보면 밸러니의 숲보다 더 까다로운 녀석이지. 컨티뉴는 생각을 단순하게 해서 산에게 직접 물어봤다는 거야. 그랬더니 뭐 놀랍다면 놀랍고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 거지.”

올라타는 건 간지럽고 거슬리고 아프기 때문이다냐!”
민감 피부!”
영감이 하도 처 말해서 외울 지경이야.”
퉁명스럽게 말한 검은 들개가 검은 산을 힐끗 돌아본다.

얼마나 처 대단한 제자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정말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컨티뉴도 제자 녀석도 누가 서로 스승, 제자 아니랄까봐 얼굴 한 번 처 보기 힘들 줄이야.”
그게 매력이지!”

히익히익 웃는 GM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검은 들개는 바람을 타고 오는 냄새에 눈을 떴다.

이미 철이 다 처 지나고 여기엔 없는 건데 웬...”
달콤새콤한 냄새가 난다냐!”

딸기향!”

결국 온 모양이구만?”

그 말에 GM은 무언가 알고 있는지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탁탁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 순간 갑자기 흔적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사라졌나 싶었던 녀석들이 있는데 한 2년 전에 한창 난리 났을 때 겨우 꼬리가 보여서 꼬리 잡고 쪼매 흔들어주니 엄청 골이 났나봐?”

일어나는 GM을 따라 누워있거나 엎드려있던 들개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익살스런 웃음을 지은 GM이 어둠속의 노란 안광과 마주한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

 

퍼블리가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GM의 이야기를 꺼내며 조금 더 떠들려고 했다가 바로 간파당하고 신나게 여행하고 있을 거라는 대답에 하하 웃으며 들어가는 아니카에게 손을 흔들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침대에 누운 거였다. 마땅히 할 게 없고 시간도 애매해 일찍 누운 거였지만 졸리지 않아 조금 뒤척이다가 잠들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퍼블리는 바로 잠에 빠졌었다.

“...일찍 잠들어서 일찍 깼다기엔 너무 이른데?”
이제 막 한밤중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퍼블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유 없이 퍼뜩 잠에서 깼는데 평소 같으면 잠결이라 바로 다시 잠들었겠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잠들기 전보다 훨씬 더 또렷했다. 몇 번 침대에서 뒤척이던 퍼블리는 결국 몸을 일으켰고 아니카가 아직 안자고 계속 글을 쓰고 있지 있을까하는 기대를 가지다가 다시 시계를 보고 생각을 접었다. 그러다가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웬 파란빛이...”
창문 바로 아래에 놓인 탁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혹시 파란 무언가가 창문에 붙었나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살펴본 퍼블리는 하늘에서 평소와 다른 달을 발견했다.

푸른 달이구나.”
달이 푸르게 빛나는 때는 달이 가장 높게 떠 있을 어느 날이었고 그 때쯤에 퍼블리는 항상 자고 있어서 푸른 달을 직접 본 적은 드물었다. 여느 때처럼 노란 빛이 아닌 푸른 달은 굉장히 신비롭게 느껴져서 퍼블리는 다시 침대로 가지 않고 탁자에 걸터앉아 달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순간 퍼블리는 반쯤 충동적으로 서랍을 열어 얇은 천을 꺼내 두르고는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방을 나오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 집을 나왔다. 여름이어도 아직 초여름이라 한밤중은 입고 있는 잠옷으로 돌아다니기엔 조금 서늘했다. 가볍게 어깨를 두른 천을 꼭 쥐고 발을 재촉하듯 빠른 걸음으로 퍼블리가 도착한 곳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호수였다.

...”
용사가 장미씨앗을 심고 퍼블리가 태어난 푸른 장미가 피어났다는 땅과 그 옆의 호수. 밤하늘을 담고 있는 맑은 호수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만약 풀과 나무가 없었다면 하늘만 존재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깨끗한 거울 같았다. 감탄을 흘린 퍼블리는 그대로 서 있던 자리에 앉아 호수를 바라봤다.

내가 태어났던 날도 이렇게 푸른 달이 뜨는 날이라고 말해줬었지. 그래서 오늘 이렇게 깬 건가?”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한 혼잣말이자 물음이었는데 어디선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퍼블리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니카?”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깨서 아니카가 따라 나온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지만 아니카의 노란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아무리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숲이라고 해도 아예 안 온다는 건 안일한 생각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퍼블리는 천천히 패치에게 배운 방어마법과 원거리 공격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퍼블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분명 눈을 떼기 전까지 밤하늘 외엔 아무것도 담지 않은 호수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푸른 달 위에 있는 무언가가 조그맣게 꼬물거리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천천히 퍼블리가 있는 곳으로 물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던 퍼블리는 가까이 오는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두르고 있던 천을 풀어 손에 들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허벅지까지만 잠길 깊이쯤에 건질 수 있게 됐는데 건진 즉시 퍼블리는 천으로 물을 닦으며 감싸 안아들었다.
, 아기?”
퍼블리가 건진 건 다름 아닌 아기였는데 마법사가 호수에서 태어난다는 걸 퍼블리도 알고 있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이 만남이 퍼블리는 마냥 당황스러웠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작은 머리에 맞게 작고 적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호수에 비친 달보다 훨씬 더 짙은 파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얌전히 퍼블리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
아기의 눈을 본 퍼블리의 외마디 감탄이 모든 걸 담고 나타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환하고 맑은 녹색 빛을 퍼블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도 퍼블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리지도, 품에 안길 정도로 작지도 않았지만 퍼블리는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한숨 같은 웃음을 지어본 퍼블리는 까르륵 웃는 아기를 쓰다듬으며

만나서 반가워요, 용사님.”

모든 것은 운명 같은 우연이길 바라.

 

 

 

 

 

 

 

 

 

 

 

end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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