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깊숙하고 까다로운 녀석들이 많은 데로 던져놨는데.”
그래서 이렇게...후우....오래 걸렸지요.”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은 아래에 있는 모든 걸 짓누르듯이 저주를 뿌리고 있었다. 마법진을 힐끗 올려다본 밸러니는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피를 그대로 말과 함께 내뱉었다.

나를 죽여도 소용없단다.”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이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최악이 남아있었다며 그 생각을 비웃듯이 시야 한 구석에서 커지고 있는 마법진에 퍼블리는 기겁을 했다. 컨티뉴도 마법진이 커지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난감함이 가득담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버티고 서 있던 패치는 결국 손으로 땅을 짚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용사는 어느새 쓰러져있었다.

저주를 뿌려서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설득할 생각이라면 포기해. 거둘 생각 없으니.”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일 뿐, 설득은 이미 당신의 친구부터 실패했으니 이렇게 만나자마자 바로 찔렀지요.”
그 말에 밸러니의 시선이 컨티뉴의 손으로 돌아갔다. 손잡이와 손 사이에 구겨진 종이가 눈에 들어오자 시야가 자연스레 가늘어졌다.

도둑들은 참 뻔뻔하구나.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다시 이 숲에 들어오는 걸 보고 헛웃음이 튀어나왔어. 여기 들어온 녀석들에게 제일 먼저 너희들이 저주라고 부르는 빛을 쏟아부어줬지. 그리고 녀석들을 통해서 저 밖의 도둑들에게도 친히 전해줬고. 그런데 여기 또 도둑이 생기다니 기분이 참 별로네.”

집주인이 안에 없고 밖에서 날뛰고 있어서 달리 선택사항이 없었던 걸 이해해주시길.”

그 말에 코웃음 친 밸러니는 피를 한 차례 더 뱉고는 쓰러져 있는 용사와 주저앉았지만 아직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패치를 돌아보다가 다시 컨티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는 건 없어, 달라지는 것도 없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곳으로 가서 내 소중한 장미와 수첩을 다시 가져와 언제나 그랬듯이 이 숲에서 계속 기다리고만 있겠지.”

이제는 가장자리의 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진 마법진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고 바람에 속삭이듯이 중얼거린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지.”
겨우 그런 말로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꿰뚫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 온 몸을 뒤흔들었다. 이건 직접적으로 받은 충격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유리처럼 깨져 산산이 흩어지고 있는 마법진이었다. 밀려오는 아픔과 당황스러운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내리니 분명 방금 전까지 주저앉아있던 패치가 하늘에 손을 뻗은 채 서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대로 저주에 눌려 죽거나, 모든 마력을 잃어서 죽거나 결과가 매한가지라면 적어도 엿은 주고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나.”
패치가 남아있는 마력을 죄다 위로 쏘아 올려 마법진을 부순 모양이었다. 아직 작동이 멈추지 않은 마법진이 부서질 때 그 충격은 고스란히 마법진을 발동시킨 자에게 돌아오고 거기에 더 해 마법진이 크면 클수록 받는 충격은 그만큼 더 커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바로 몸에 있는 모든 마력이 죄다 나가는 거였다. 거기다가 더 심각한 건 마력이 없는 자는 5분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내에 손쓸 틈도 없이 죽어버린다는 거였다. 상태를 보여주듯 창백한 안색이 시체와 다름없었지만 아까처럼 주저앉지 않지는 않았다. 흉흉하게 불타고 있는 푸른 눈을 보면 곧 죽을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숨죽인 채 보고 있던 퍼블리는 죽지 않고 저를 키우기까지 한 제 아빠를 떠올리며 지금 상황에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죽음을 피했는지는 퍼블리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패치는 살았으니까.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군.”
그렇게 말한 컨티뉴는 손잡이를 잡는 힘을 더 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의 고집을 끝낼 시간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잡이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밸러니를 감싸기 시작했다. 보통의 빨간 불과는 다른 진한 녹색 불은 언뜻 보면 마치 풀이 자라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기에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워보였다. 그리고 그 불은 단순히 보통 불처럼 밸러니를 태우는 게 아니었다.

무슨 짓이야?”
불길이 닿자마자 하얀 빛들이 일어나 불길과 함께 타서 사라지고 있었다.

왜 이걸 태워?”
그 빛이 무엇인지는 여기 있는 모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저주가 아니야, 우리들이...나와 로메루, 밸러니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자 희망이야.”
속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았어도 태도와 어투로 계속 유지했던 평온함이 깨지고 있었다.

너희들이 안 맞을 뿐인데 왜 저주라고 하는 거야?”
점점 격앙되는 어조를 따라 불길이 더 강해지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아까보다 더 높게 타오르는 녹색 불은 밸러니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걸, 그 장미를, 우리의 결과물을, 내 친구들의 흔적들을 훔쳐간 건 네놈들인데 왜!!”
비명 같은 한마디와 함께 빛이 터져 나왔고 온 세상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폭주에 가까이 있던 컨티뉴가 미처 방어막도 준비하지 못한 채 불길에 휩쓸려 저 멀리 밀려났다. 하지만 그 뒤로 뒤늦게라도 막아냈는지 아니면 그래도 계속 밀려나 쓰러졌는지 볼 수 없었다. 온통 하얀 빛과 녹색 불길만이 눈에 들어왔고 밸러니는 목을 긁어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 같은 외침을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게 정신없고 눈과 귀가 아플 정도로 날뛰고 있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돌아가면서 파란 게 눈에 들어왔다.

많이 아팡?”
천진난만함이 가득 담긴 익숙한 목소리에 퍼블리는 깜짝 놀랐고 밸러니도 당황스러웠는지 눈을 깜빡였다.

아프면 내가 호~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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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친구가 찾아왔구나. 어차피 네 소개를 받았으니 나도 내 소개를 할 참이었단다. 두 번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뒤는 아까와 똑같았다. 다른 점을 굳이 꼽자면 시점이 밸러니의 시점이라 구경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하고 아슬아슬했던 전투를 당사자가 되어 직접 체험하게 된 게 아까와 다른 점이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목숨이 위험한데도 전혀 위협을 못 느끼는 건지 여전히 해맑은 용사의 웃음이 눈에 들어왔다. 아예 공격을 맞지 않았으면 모를까 패치도 몸은 하나였으니 용사의 방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용사도 마냥 맞고 있지 않고 오히려 패치보다 더 빠른 반응속도로 피하고 방어했지만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공격들은 맞았다. 그런데도 표정이 여전히 해맑았다.

세 번!”
패치의 외침에 따라 용사가 세 가지 마법을 날려댔다. 꽤 위력적인 불기둥 공격마법이 가장 먼저 날아왔다. 그 뒤를 이어 어째서 날리는지 모를 빛가루 마법과 축제용으로 쓰는 잘게 자른 색종이들이 흩뿌려지는 마법이 앞서 날아온 불기둥보다 더 존재감을 내뿜으며 밸러니의 시야를 가렸다.

그 뒤로 패치가 한 번, 두 번 외칠 때마다 용사는 한 가지 마법, 두 가지 마법을 날려댔는데 횟수는 외침에 따라도 날리는 마법은 무작위로 용사가 날리고 싶은 걸 날리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아예 공격마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끄기에는 거슬리는 마법도 있었고 언제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데다가 용사는 패치의 외침이 없을 때에도 마법을 날려댔다.

“...!...저쪽...!!”

...음이 왜...!?”
저 멀리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패치가 떠난 이후로 남은 선발대 일행들이 마냥 한 자리에서 머무를 수만은 없었는지 패치와 얼음이 반짝이는 빛을 따라온 것 같았다. 보통 이렇게 되면 불리할 법 한데 밸러니는 겉은 물론이고 속으로도 전혀 동요가 없었다. 패치도 목소리들을 들었는지 용사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고 밸러니도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춰 그대로 대치상태가 됐다.

저쪽에 누가 있다!”
아까 갔던 마법사잖아?”
일행 쪽에서 패치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다가오다가 밸러니와 그 주변에 있는 그림자 괴물들을 보고 멈췄다. 천천히 공격마법과 방어마법들을 펼치는 걸 보면 누가 적인지 제대로 알아본 것 같았다. 메르시와 흑기사단이 앞으로 나와 방어 마법을 더 강화하는 동안 아난타가 패치와 용사에게 다가왔다.

저 분은?”
이 숲 주인.”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이제까지 우릴 대했던 숲이 대답하고 있지.”
아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그 주위에서 밸러니의 정체를 들은 다른 이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물론 각종 위험을 감수하고 왔을 테지만 저주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숲의 주인인 밸러니를 직접 볼 줄은 그들도 몰랐을 거다.

많아진 적들에 숨겨진 마법진들이 빛나고 각종 소환 생물들이 튀어나와 밸러니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물량에 기겁할 법도 한데 쓰러뜨려할 게 누구인지 명확히 알게 된 다수의 마녀와 마법사들은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누군가가 던진 불덩이 마법을 시작으로 소환 생물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그대로 대치상황이 끝났다.

검은 날개, 오른쪽!”

위로 온다!”
사기가 올라갔다고 해도 지친 몸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리는 없었다. 마법을 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이들이 있었고 소환 생물들은 놓치지 않고 달려들다가 바로 옆에서 공격을 맞고 뒤로 물러났다. 공격이 아닌 방어전이 되어버렸지만 모두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마법을 날려댔다. 그러다가 이 방어전이 꽤 길어졌다고 느껴질 때 쯤, 갑자기 앞장서서 방어막을 펼치고 있던 이들이 옆으로 흩어졌고 그 뒤에 있었던 한 무리의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언제 그렸는지 모를 복잡한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자 엄청난 크기의 불기둥과 번개가 마법진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방어막에 몸을 부딪혀가며 달려들던 소환 생물들은 갑자기 방어막이 사라지자 그대로 그 공격들에 뛰어드는 꼴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이들이 공격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소환 생물들에게 공을 던졌고 맞추자마자 터지며 공 안에 들어있던 가루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가루가 불기둥이 있는 데까지 닿자 곧이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물러났던 이들은 다시 방어막을 펼치며 제 몸과 뒤에 있는 이들을 지켰다.

이 숲으로 오기 전 왕국에서 했던 훈련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 남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승산 있다!”
이 공격으로 반 이상의 소환 생물들이 사라졌다. 기세를 몰아 아까보다 더 거센 공격과 준비된 마법들이 소환 생물들을 덮쳤고 소환 마법진까지 지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환 생물들이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고 모든 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해냈..!!”
누군가가 흥분에 차 소리쳤지만 끝을 다 맺지도 못하고 갑자기 쓰러져버렸다. 바로 옆에 있던 일행이 당황스러워하며 일으켜주기도 전에 평온한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모두 뭉쳐 있어서 수고를 덜었네.”
시간을 벌어 커다란 마법을 준비한 건 선발대뿐만이 아니었다. 소환 생물들이 방패 역할을 하는 동안 밸러니도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울 만큼 복잡한 마법진이 눈 깜빡할 새에 모든 이들의 머리 위를 다 덮을 정도로 커지면서 익숙한 하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쓰러지는 이들이 늘어났고 거기에 더 해, 갑자기 얼굴에 주름이 생기며 급격하게 늙어가는 이들도 나타났고 눈물 대신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재빨리 저주막이를 펼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빛이 더 강력했는지 저주막이를 펼쳤는데도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다. 저 멀리서 흑기사가 쓰러지는 메르시를 감싼 채 빛을 직격으로 맞고 있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더 끔찍했다. 빛이 닿은 부분이 전부 썩어가며 퍼블리가 바다에 빠지고 그들을 처음 만났던 날, 그 때의 모습이 되고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밸러니는 아무런 감흥 없이 모든 걸 눈에 담고 있었고 밸러니의 눈을 통해 이 광경을 보게 된 퍼블리는 충격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이들 중에 패치와 용사가 있었지만 둘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얼마 안 가 피를 토하는 패치의 모습에 퍼블리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기억인 것도 잊고 그만두라고 외치려고 했다.

내가 너무 늦었나...?”

굉장히 지쳐있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밸러니는 제 가슴을 꿰뚫은 날카로운 날붙이를 내려다보고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봤다. 뒤에 있는 마법사는 얼굴을 꽁꽁 싸매다시피 했지만 오히려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퍼블리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컨티뉴.”

퍼블리는 가슴 안쪽이 아릿한 게 제 자신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밸러니가 공격 받았기 때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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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제 말 들리나요?”

아까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던 걸 기억한 퍼블리가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감정을 완전히 느끼는 게 아니어도 지금 밸러니가 진심이라는 건 퍼블리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기억이라 이미 일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그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퍼블리 입장에서 궁금한 건 있었다.

왜 직접 나오지 않았던 거예요?”
숲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기엔 모글리제라고 추정되는 회색머리 마녀의 편지 내용이 걸렸다. 떠날 시간이라고 하는 걸 보면 밸러니는 충분히 숲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퍼블리의 질문을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계속 대답이 없었다.

그 와중에 기억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빛을 뿌리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게, 그리고 단숨에 약새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약새풀이 자라는 지역이 넓어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한발만 내딛으면 바로 숲 밖인 곳에서 그렇게 빛을 뿌리는데 약새풀들이 바깥까지 안자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숲 곳곳을 돌아다니며 빛을 뿌리기 시작했고 손을 한 번 휘젓자 퍼블리가 처음 보는 마법진들이 곳곳에 나타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선 밸러니는 다시 어디론가 발을 움직였는데 약새풀이 어느 곳보다 가득 자라있는 곳에 도착하더니 멈추고는 직접 약새풀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뜯어서 한구석에 던져진 약새풀들은 뭉친 만큼 냉기를 내뿜었는데 뒷마당에서 느낀 것보다 더 한 냉기에 퍼블리는 당연히 깜짝 놀랐다.

손님맞이는 다 끝났네.”
밸러니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약새풀들이 잔뜩 있을 땐 몰랐는데 뽑아낸 약새풀들에 가려진 파낸 흙구덩이를 보고 여기가 숲의 어디인지 퍼블리도 알게 됐다. 하얀 장미가 있었던 곳이다.

밸러니는 아까처럼 손을 한 번 휘저으며 마법진을 나타나게 하고 하얀 장미가 있었을 흙구덩이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언제 생겼는지 모를 커다란 얼음덩어리들과 그림자 괴물과 불나비와 기타 소환 생물들이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 물량을 본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 마법진에도 저렇게 많이 나왔는데 곳곳에 새겨놨을 마법진들을 다 합하면 얼마나 많겠는가. 패치가 험한 말을 했던 건 당연했다.

우리의 마법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마법을 만들어낸 자가 있나?”
이 숲은 밸러니의 숲이라고 불리고 있었고 실제로도 밸러니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숲에 들어온 침입자들이 어디 있고 얼마나 있는지 느낄 수 있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선발대들에게 감탄하던 밸러니는 다시 한 번 빛을 뿌리고 잠시 기다리더니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설마 용사가 발견했던 빛이...”

이렇게 뒤에 숨겨져 있을 진실들을 알게 된 퍼블리는 어쩐지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엄청나고 충격적인 비밀들을 알게 됐다 싶으면 뒤에 더 한 비밀들이 퍼블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이 기억의 끝은 단순히 제 아빠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비록 심각한 저주들을 받았지만 밸러니를 무찌르고 숲을 정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같은 결말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 한 엄청난 비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이런 퍼블리의 불안한 속내와는 달리 기억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안개가 낀 사이 소환 생물들이 안개를 방패삼아 아직 움직이고 있는 선발대들을 기습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패치의 활약으로 안개가 걷혔지만 예상하던 바였는지 아니면 결국엔 다 죽을 거라고 확신을 하는 건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밸러니도 예상치 못한 마법사가 있었으니.

우와아아앙~!!”
여기까지 오는데 소환 생물을 한 번도 안 마주친 건지 멀쩡한 행색의 용사가 햇빛에 반짝이는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밸러니는 당황과 더불어 심각한 상황일텐데도 해맑은 용사의 얼굴에 황당함까지 더해 느끼며 저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
용사는 밸러니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나무 그늘 때문에 잘 안 보였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
마치 아는 마법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는 용사의 모습에 밸러니는 이번엔 아예 말을 잃었다. 밸러니가 어떤 심정인지 알 리가 없는 용사는 얼음이 엄청 크고 하얀 풀들이 많아서 신기하다는 감상을 꺼내고 있었다. 그에 밸러니는 탐색하려는 것도 그만두고 물어봤다.

넌 대체 왜 여기에 온 거니?”
새 친구 기다리러!”
용사는 거침없이 대답했고 밸러니는 용사가 다른 이들처럼 저주라고 불리는 걸 조사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대답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용사는 밸러니의 얼굴을 제대로 봤는지 무언가 아는 기색으로 소리쳤다.

내 칭구의 새 친구구나!”

네 친구의 새 친구?”
! ~ 잤을 때 봤어! 우리 이렇게 만났고 안녕! 했어!!”
용사의 말에 밸러니의 감정이 묘하게 변했다. 용사를 만났어도 당황과 황당을 잠깐 느낀 거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는데 마치 물에 가라앉은 것처럼 답답하고 귀가 먹먹한 느낌이었다.

나두 친해지고 싶어서 빤짝빤짝 따라왔어!”
용사는 뒤를 볼 수 없으니 모르지만 용사를 마주보고 있던 밸러니는 용사 뒤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용사와는 달리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상황도 익숙한 상황이지만 빨간 머리카락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패치였다.

넌 정말 순수하면서도 어리구나.”

다가오는 패치를 힐끗 본 밸러니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그게 여기 있어야할 이유는 될 수 없지. 친구가 되는 건 더더욱 그렇고.”

퍼블리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지금 밸러니의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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