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고 있나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아난타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패치를 보며 물었다. 패치는 거친 숨만 나오는 입 대신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고 아난타는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무언가 반짝이고 있네요.”
그렇게 말한 아난타는 혹시 소환생물일까 싶어 조용히 손을 들어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꽤 오래 대치했는데도 빛은 계속 반짝이기만 하고 달라진 게 없었다.

뭘까요, 저게?”
저게 뭘진 보러가지 않으면 모르지.”

다른 이들도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는지 경계하며 방어마법과 원거리 공격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아직 섣불리 공격하진 말라는 말에 하나씩 준비하고 있던 공격마법을 없앴지만 방어마법은 없애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숨이 돌아온 패치는 무언가를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저기 가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패치의 말에 주변에 있던 마법사와 마녀들이 의아해했다. 그 중에서 아직 기운이 있는 이들은 저게 뭔지 모르는데 섣불리 가는 건 위험할 것 같다며 말렸고 그 중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난타도 있었다. 퍼블리도 패치의 말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이제껏 봐왔다시피 패치가 할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신중하다면 신중하고 주변 모든 것에 의심을 품을 마법사가 패치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뭔지 모를 저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니 만약 이 기억이 계속 되지 않았다면 퍼블리는 저기 있는 패치를 가짜라고 생각했을 거다.

왜 가겠다는 겁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예상가는 게 있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위험해! 지금 당장 소환생물들이 뒤쫓아 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저렇게 수상한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소 신경질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외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패치는 어째선지 물러나지 않고 계속 가겠다며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같이 가겠다고 하는 마녀나 마법사는 없었다. 그리고 기억이 또 사라지려는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는데 어떻게 설득했는지 혼자서 반짝이는 빛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패치가 나타났다.

분명 반짝이는 게 보인다고 했었지.”

그 말로 패치가 왜 가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게 됐다. 용사가 사라지기 전에 어딘가를 가리키며 반짝이는 게 있다고 했었던 걸 마침 떠올리고 가려고 했던 거였다. 물론 함정일 수도 있는데다 정작 가겠다고 했고 바로 지금 가고 있는 패치의 표정도 회의적인 걸 보니 크게 기대하진 않는 것 같았다. 계속 소환생물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보단 함정이라도 일단 확인을 하는 게 지금 패치의 입장에선 속 시원하고 혹시 용사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그 사이를 지나며 반짝이는 곳까지 가까이 도착한 패치는 순간 제 눈으로 환하게 달려오는 빛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숨을 세 번 정도 내쉬었을 때 패치는 이제 됐으려나 속으로 생각하며 반짝이는 빛의 정체가 뭔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얼음?”
새하얀 약새풀밭 위로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발에 바로 밟힐 만큼 작은 얼음파편이 자신들도 있다며 외치는 듯 패치의 발이 지나갈 때마다 잘그락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시야를 빼앗는 건 커다랗고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건 패치보다 더 컸다.

반짝이던 빛은 바로 그 얼음들이 햇빛을 받아 반사했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얼음들에 황당하단 얼굴을 하던 패치는 여기를 지나갈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저 멀리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뒤로 물러나 나무 뒤로 숨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기서 움직이는 거라면 못 만났던 선발대 일원이거나 가짜거나 소환생물이었다.

...............!!”
저 멀리서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거리가 꽤 있다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알 수 없었다. 일단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소환생물은 아니었다. 그렇담 진짜 아니면 가짜였는데 패치는 가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단 이쪽으로 다가온다면 자신을 발견한 진짜거나 진짜 행세를 하는 가짜일 거고 다가오지 않는다면 자신을 발견 못한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
목소리가 가까워지지 않는 걸 보면 이쪽을 향해 외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집중해서 듣던 패치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본 패치는 저 멀리 무얼 향해 크게 외치고 있는 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바로 달려갔다. 이리저리 솟아있는 파란 머리카락과 그 아래 길고 넓은 빨간 망토. 용사였다.

바로 용사를 붙잡을 듯이 달려가던 패치는 갑자기 멈춰서다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아직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 조심스레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용사는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향해 계속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는데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듣기 전에 다른 목소리가 덮어버렸다.

넌 정말 순수하면서도 어리구나.”
?”

난데없는 말에 퍼블리가 반문하며 마법사를 돌아봤지만 마법사는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여기 있어야할 이유는 될 수 없지. 친구가 되는 건 더더욱 그렇고.”
마법사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분명 마법사의 목소린데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퍼블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주변의 얼음보다 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패치의 표정이었고 그 다음으로 들어오는 건 패치와는 반대로 언제나 그랬듯이 환하게 웃고 있는 용사였다. 그리고 그 용사의 앞에 누군가 있었지만 나무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네 친구가 찾아왔구나. 어차피 네 소개를 받았으니 나도 내 소개를 할 참이었단다. 두 번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비밀 같은 자기소개가 나온다.

내 이름은 밸러니고 이 숲의 주인이란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패치가 용사의 어깨를 잡아 제 뒤로 보내면서 방어마법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괴물들이 나타나 달려들었고 투명한 방어막이 얼음처럼 깨지면서 주위에 파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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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길은 잘 보이겠군.”
그렇게 말했지만 원래부터 지쳐있었는데 광범위한 마법까지 쓰니 꽤 피곤했는지 바로 움직이지 않고 약새풀 가득한 땅 위로 털썩 주저앉는 패치였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이번 기억도 흐려지면서 사라졌다. 곧바로 다시 나타난 기억에선 패치가 검은 형체들을 따돌리며 공격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 갑작스레 등장하자 퍼블리는 깜짝 놀라 손을 뻗었고 비록 기억 속이지만 바로 제 뺨을 스쳐지나가는 공격들에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 뒤로도 기억은 사라졌다가 곧바로 나타나는 걸 반복했는데 그 주기가 굉장히 짧아졌다. 어쩔 땐 눈을 한 번 깜빡했는데 기억이 이미 바뀌어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기억이 조금 더 긴 게 나타났는데

키는 바로 뒤에 있는 나무의 밑에서 세 번째 나뭇가지가 자란 높이고 콧수염과 팔근육이 눈에 띄는 자네 일행의 마법사가 전해달라더군.”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과정이 담긴 기억은 없고 바로 나타난 아난타가 웃지 않는 얼굴로 패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두 잠들어버렸고 어서 이 숲에서 도망치라고. 그 말을 끝으로 잠들어버렸네.”
어디였나요?”
원래라면 여기에서 남서 방향의 파란바람 나무들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 남겨놓은 마법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더군.”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난타는 바로 몸을 돌려 패치가 말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패치는 팔짱을 낀 채 보고 있다가 딱 한마디만 꺼냈다.

가는 건가?”
가야죠.”
바로 대답한 아난타는 고개를 돌려 패치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서 깨우러 가야죠.”
퍼블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의 아난타는 전혀 다른 데에 속해있었으니 결국 제 동료들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지금도 찾기 위해서 거기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은 퍼블리는 저 멀리 멀어져가는 아난타를 한 번 보고 아예 눈을 감은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은 또 흐려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퍼블리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피곤하니?”
.”
얼마 안 남았단다. 하지만 조금 쉬는 것도 좋겠지.”
얼마 안 남았다고요?”

퍼블리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계속 보겠다고 했지만

안 돼. 쉬렴.”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그럼 어서 전부 보고
네 지금 얼굴을 비춰줄 호수가 근처에 없는 게 아쉽구나.”
퍼블리의 말까지 자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지금의 마법사는 무척 단호했다. 하지만 쉰다고 해서 딱히 어디 누워서 자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기억이 나타나지 않을 뿐 퍼블리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고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퍼블리는 그대로 자리에 앉은 후 무릎을 모아 안듯이 팔을 다리에 두른 채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마법사는 계속 서 있었기만 했고 퍼블리를 따라 앉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역시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고개를 조금 숙인 게 퍼블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고 퍼블리도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안 앉아도 괜찮아요?”
괜찮단다.”
어쩐지 계속 보고 있는 것도 민망해서 이마를 무릎에 댄 퍼블리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묘하고 찜찜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분명 이상할 게 없는데 이상한 느낌이 드니 괜히 신경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여기 온 이후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긴 했지만 그 때마다 닥치는 기분은 달랐다. 이 이상한 느낌은 지금 당장 찾아온 거니 방금 했던 얘기 중에 무언가 이상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느껴졌다. 물은 멀쩡히 흐르고 있는데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방금 전 했던 대화들이 전부 이상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니 뭐라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뭔가 대화라도 하면 이상한 게 뭔지 다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법사를 올려다보려던 순간 저 뒤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언뜻 보인 파란색에 퍼블리가 당장이라도 따라갈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자 마법사가 퍼블리를 보며 말했다.

다 쉬었니?”
. ?”
그럼 마저 보자꾸나.”
이젠 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인 마법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한 퍼블리의 말을 듣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 기억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려하고 위협적인 마법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오른쪽!”
패치는 원거리 마법을 날려대며 외쳤고 그에 언제 합류했는지 모를 흑기사가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불나비와 가시들을 쳐냈다. 합류한 건 흑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브레이니를 포함한 흑기사단이 앞장서서 그림자 괴물과 소음파리를 몰아내고 그 뒤에 메르시가 실시간으로 치유마법을 쓰면서 버티고 있었다. 동료를 찾으러 갔던 아난타도 원거리 마법을 날리며 폭탄꽃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 외에 잘 모르는 마법사와 마녀들도 있는 걸 보면 안개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선발대들 중 그나마 멀쩡한 이들이 다시 만나 뭉친 모양이었다.

뚫었습니다!”
모두 이쪽으로!”
길이 뚫렸다는 외침이 들려오자마자 모두 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소환생물 무리들을 무찌르고 견제하며 도망치는 모습은 정말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신기하게 한 명의 낙오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얼음장벽을 만들어내 뒤를 막으니 쫓아오던 괴물 무리는 얼음장벽에 부딪히고 그 뒤에 있던 소환생물들은 뒤따라오다가 앞서 부딪힌 소환생물들과 함께 땅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오도록 뛴 이들은 누구 하나가 다리가 풀려 넘어질 때쯤 멈춰 섰다.

...모두 무사....후우욱!”

다른 이들이 무사한지 물어보려던 메르시는 숨이 차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입을 막았다. 모두 빠져나오는데 성공은 했지만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기절했는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질 않았다. 조금 숨을 고른 이들은 언제 소환생물이 쫓아올지 몰라 초조한 눈으로 아직 숨을 몰아쉬는 이들과 쓰러진 이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좋아 괜찮아 보이는 흑기사단은 메르시를 포함해 힘들어하는 이들의 등을 쓸어주며 다독여줬지만 결국 몇몇 이들은 눈물을 터뜨리거나 신경질적으로 몸을 틀었고 울먹이며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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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인가...?”
그렇게 말하는 상대 마법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안색도 새파란데다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있었다.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척 봐도 굉장히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상대 마법사는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다가와 패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네가 진짜라면!! 아난타님을 만나면 꼭 전해주...!”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퍼블리가 당황해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기억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나타난 기억은 바로 뒤에 이어진 기억이 아니었다. 지금 나타난 기억 속의 패치는 또 혼자서 걷고 있었고 사방을 둘러싼 안개가 조금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왜 갑자기 끊어지고 다른 기억이 나타난 거예요?”
원래 나타나는 모든 기억이 이랬단다.”
아니 그렇긴 하지만...”
기억은 계속 흐려지면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마치 천천히 깜빡거리는 것 같았는데 보고 있던 퍼블리는 어쩐지 더욱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퍼블리의 불안함은 어떤 의미론 적중이 되었다. 안개가 흐려지면서 발밑만 겨우 보이던 주위가 조금 멀리 떨어진 땅까지 보일 수 있게 됐다. 물론 땅이라고 해봤자 약새풀이 빽빽하게 자라있는데다 안개 덕분에 흐리게 보여 눈밭처럼 보였는데 그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다른 색 점들을 찍은 것처럼 하얀 약새풀밭 사이에 있으니 얼핏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보게 된 퍼블리는 소름이 돋아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죽은 거예요?”
아니.”
안개가 끼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고 움직이던 선발대였다. 물론 전부 다 있는 건 아니지만 꽤 많은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약새풀밭 위에 누워있었다. 어디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고요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은 장소가 장소다보니 소름이 돋을 만 했다.

왜 모두들 누워있나 마법사에게 물어보려던 퍼블리는 안개가 끼기 전 저주막이 소란이 벌어진 원인이자 저주에 걸려 쓰러진 마녀를 떠올렸다.

모두 저주에 걸린 거군요.”
언제 깨어날지 모를 정도로 계속 잠들어있는 저주. 굳이 멀리 볼 것 없이 그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공주인 채로 잠들어있는 메르시를 떠올리면 간단했다. 패치는 잠들어있는 그들을 애써 보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심리적인 부담은 컸는지 안색이 아까보다 나쁜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나무가 나타났다. 하지만 패치는 거기에 기대지 않고 계속 걸어갔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에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또 기억이 사라졌는데 이번엔 다음 기억이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괜찮니?”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게 티가 났지만 마법사는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지금 기억이 나타나지 않는 걸 기회삼아 쉬는 겸 지금까지 본 기억들을 천천히 떠올려봤다. 물론 다 기억해내는 건 무리기 때문에 가장 인상 깊은 기억들 먼저 더듬어봤다. 사실 본 기억이 많은 만큼 인상 깊었던 것도 꽤 많아 골라내는 것도 꽤 걸렸다.

제가 흩어진 기억을 전부 본 건 아니죠?”
그래.”

당연하게도 한 마법사의 일생이 담긴 기억이 적을 순 없었다. 그걸 깨닫자 퍼블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저번에 마법사가 말했다시피 날뛰는 기억들이 한 곳으로 뭉치니 전부 볼 필요가 없다는 건 퍼블리도 알고 있었지만 역시 기억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숲에서의 기억이 끝난다면 그 이후의 기억도 봐야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든 거였다. 퍼블리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 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며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하던 순간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왜 아빠의 기억이 흩어진 거지?

그리고 뒤를 이어 의문이 또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왜 이제야 이런 의문을 떠올린 거지?

너무 이상해요.”

뭐가 말이니?”
전부 다 라고 말하기 전에 퍼블리는 말을 골랐다. 이렇게 뭉뚱그려 말하면 달라지는 게 없었다.

“...여기 저주받은 곳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제 상태도 이상해요. 어떻게 이렇게 오래 버티고 어떻게 이렇게 마냥 기억만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려면 처음부터 들거나 아니면 더 일찍 들었을 텐데 이제야 드는 것도 이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퍼블리는 녹색 눈을 또렷하게 빛내며 마법사를 마주봤다.

제 기억은 멀쩡한데 아빠의 기억이 왜 흩어졌던 건가요?”
퍼블리도 그의 아빠도 보내준 대상이 다르긴 하지만 이동 마법으로 이 숲에 왔다. 굳이 차이를 더 따지자면 먼저 온 자도 이곳에 이미 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빠 쪽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렇게 기억이 흩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을까?

쿨럭!”
기억이 다시 나타난 건지 뒤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지만 퍼블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가득해보였다. 이렇게 마냥 기억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퍼블리가 생각해도 끝이 안 보였다. 이 기억이 대체 언제 끝날까.

안 봐도 괜찮겠니?”
대답해주세요.”

네 아버지가 피투성이인 걸?”
깜짝 놀란 퍼블리가 재빨리 돌아보니 피는커녕 빨간색은 패치의 머리카락과 눈썹 외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았다고 뭐라 외치며 다시 마법사를 보기엔 피 묻은 것만 없지 패치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보였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걸 보니 탈진한 것 같았다. 퍼블리가 불안함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패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숨도 몰아쉬고 있는데 눈빛만은 기운 넘치다 못해 살벌했다.

...어떤 미친 숲이...그림자 괴물이랑 불나비를...후우!”
처음 듣는 패치의 험한 말에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지만 그림자 괴물과 불나비라는 말에 퍼블리는 납득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마법소환 생물체였는데 이름 그대로 그림자로 된 괴물과 불로 된 나비였다. 아마 시달리다 못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으리라.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이를 뿌득 갈던 패치는 손을 들어 그 위에 또 빛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둥글지 않고 울룩불룩 제멋대로 모양이 계속 바뀌는 빛이었다.

손님 맞을 땐 낯짝을 까야지.”
그 빛을 꽉 쥐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폭발하듯 빛이 터졌다. 눈부심에 눈을 감은 퍼블리가 눈꺼풀 너머로 빛이 더 느껴지지 않을 때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안개가 깨끗하게 걷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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