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마지막으로 저주로 가득 찬 숲에 도착했습니다.

안개가 눈을 가리고 안개 뒤로 숨어있던 나무들이 발을 막았습니다.

어찌해야할지 몰라 당황하던 아이의 앞에 한 마법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앞으로 나아가면 네 아빠를 찾을 수 있단다.’

아이는 길을 안내해준 마법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열심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앞에 아빠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아빠는 어린 모습의 마법사였습니다.

두 번째 아빠는 그보다 좀 더 자랐으면서 혼자 지내는 마법사였습니다.

세 번째 아빠는 아이가 아는 만큼 커진 마법사였습니다.

네 번째 아빠는 동료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오는 마법사였습니다.

여러 아빠들을 보며 아이는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 때 아빠와 함께 숲으로 들어온 동료가 아이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아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아이가 되돌아오자 길을 안내해준 마법사가 다시 나타나 물었습니다.

네 아빠는 어디 있니?’

아이는 마법사의 모자를 벗기며 외쳤습니다.

당신이 제 아빠예요!’

대답과 함께 숲을 덮고 있는 저주와 안개가 전부 걷어졌습니다.

저주로 인해 잠든 이들이 깨어나고 저주에 걸려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풀려났습니다.

때마침 아이를 찾아온 친구들이 숲으로 들어왔고 아이는 아빠의 손을 잡으며 친구들을 반겼습니다.

아빠와 친구들, 저주로 인해 숲에 묶여있던 이들 모두 아이와 함께 숲을 나왔습니다.

아이가 숲으로 들어오기 전엔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밖은 봄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습니다.

 

 

-어느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Posted by 메멤
,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있니?”
다시 아까처럼 시야가 어두워지고 마치 공부하는데 모르는 문제 있느냐는 듯이 여상하게 들려오는 말에 퍼블리는 입을 떡 벌렸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넘어서 지금까지 엄청난 일들을 봐왔는데요?!”
나도 처음엔 놀랐지만 몇 십, 몇 백, 몇 천 번을 돌려보다 보니 이젠 감흥도 없단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니, ,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며 외치다가 입을 꾹 다물고 나오는 말들을 막아 굴렸다. 밸러니는 기다려줄 생각인지 다시 물어본 이후론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퍼블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보고 감아도 떠도 다르지 않은 눈앞을 보며 천천히 말을 꺼낸다.

사실...지금 엄청 혼란스러워서 뭐부터 물어봐야할지 모르겠지만...마지막에 잘못 본 거 아니죠? ...물웅덩이요.”

제대로 봤단다.”
...뒤를 마저 보여주시지 않은 이유는요?”
그 순간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정신이 없어서 그랬었지 제대로 내 상태를 알게 된 그 다음부터는 내 기억이 아니라고 판정되더구나.”

판정이라는 말에 미묘한 얼굴로 허공을 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고개를 숙인 퍼블리는 이번엔 직설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아빠인가요?”

아니.”
아빠 몸을 차지한 건가요?”
지금은.”

퍼블리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저를 기억하고 아니카도, 선생님도, 마녀 왕국도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어...그리고...”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아빠가 아닌, 숨기기 바쁘면서도 먼저 말도 걸었던 적이 있고 함께 축제를 즐기고 저랑 계속 같이 살았던 제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었단다.”

맞아요! 그러니까 일일이 묻기엔 어떻게 물어봐야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당신은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밸러니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밸러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밸러니의 입매가 실소를 내뱉듯이 그리고 있는 느낌이 들자 퍼블리는 잠깐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나는 대답만 하는 밸러니가 아니지. 그런데 왜 네 아버지 되는 이 마법사는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기억들과 같은 양만큼 모였어도 왜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반응할까 궁금하단다. 몸이 있는 것과 없는 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나? 아니면 기억이 양이 몸에 남아있는 쪽에 더 많아서?”

웃음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 둘을 전부 포함해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도 녹아들어가 있는지 모를 말을 하며 밸러니는 천천히 이야기들을 꺼낸다.

 

최후의 발악으로 아마 몸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실패하고 빼앗으려고 했던 몸 대신 기억들을 뜯어내어 그 뜯어낸 자리만큼 제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게 쓰러진 용사와 뒤에 있는 컨티뉴가 아닌 바로 앞에 있었던 패치였다는 이야기.

뜯어지고 내팽개쳐진 기억들이 이 숲으로 흩어졌다는 이야기.

주인과 이어져있던 숲은 주인을 잃고 숲에 있던 모든 것들과 함께 그대로 환영처럼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

기억들이 자리 잡을 때 마력도 덩달아 흘러들어와 밸러니였던 기억들이 의식이자 마력이 되어 마력을 전부 잃은 패치가 살아있게 됐단 이야기.

그걸 깨닫고 마력이자 자신을 움직여 패치의 몸을 장악하려고 했다던 이야기.

그러자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 오히려 자신의 마력을 이용하여 약새풀을 만들고 뜯어 먹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패치의 이야기.

잠시만요?! 약새풀을 직접 뜯어 먹었다고요?!”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네 아버지는 어디다 던져놔도 정말 잘 살 거라고. 병에 걸려도 그 병을 죽일 자고 목에 바로 칼이 들어와도 그 칼에 목 한 번 베여주고 칼을 들이민 자를 없앤 후에 태연하게 목을 치료할 마법사라는 걸 내 모든 기억을 걸고 장담한다고 했잖니? 게다가 정말 위험했어, 그냥 내 몸이었다면 그다지 위험할 게 없었지만 네 아버지는 내 몸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약새풀에 바로 영향을 받았거든.”

약새풀을 먹으면 체내의 마력이 빠르게 얼어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선생의 말과 뒷마당의 그 많은 약새풀들이 퍼블리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밸러니는 퍼블리의 머릿속이 어지럽든 말든 계속 이야기들을 꺼낸다.

 

비록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었으니 완전히 얼지 않고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

온전치 않은 기억에 혼란스러워 하던 패치의 이야기.

벌판을 돌아다니며 숲을 찾아내려고 했던 패치의 이야기.

결국 몇 십 년이 지난 후에야 포기하고 어느 호수 근처에 오두막과 약새풀 밭을 만든 패치 이야기.

그 뒤로 꾸준한 몸 장악과 꾸준한 약새풀 섭취 이야기.

어쩌다가 패치를 찾게 된 GM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 날 호수로 갔더니 파란 장미가 호수 바로 옆에 피어있더구나.”

분명 뜯어져서 없는 기억인데 퍼블리 셔룰 기억한 패치.

용사가 말한 새 친구이자 태어나서 패치의 아이가 된 마녀 퍼블리.

패치의 눈으로 그 모든 일을 본 마법사.

너는 참 사랑스러웠단다.”
몸 주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은 삼켰다. 마법사는 직접 말을 건네지 못했지만 마법사는 퍼블리를 안아들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항상 지켜봐왔다.

내가 함께 하고 싶었지만 네가 찾고 바라는 건 확고했지. 그게 참 아쉬우면서도 올곧아서 기뻤단다.”
이렇게 빙빙 돌고 도는 끝에,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어려워하고 다가서지 못한 끝에도 퍼블리는 올곧게 손을 뻗고 발을 움직여 찾아 나섰다. 애초에 선택이라는 건 없었다.

모글리제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도 많았지만 한 가지 모글리제가 틀린 걸 알았지. 나는 비참하지 않았단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퍼블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보이는 건 짙은 녹색 풀이었고 천천히 일어나보니 높고 큰 나무들이 보였다.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고 어떻게 되실 건가요?”
이제 못 잔 잠을 다 잘 거란다.”

언제까지요?”
영원히.”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던 퍼블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고요함만이 남아있기를 심장박동이 다섯 번, 퍼블리는 행여나 무언가 밟을까 싶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기를 스무 걸음. 조심스레 손을 뻗어 챙이 넓은 모자를 들어올린다.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그 날, 집에서 건네지 못했던 인사를 건네고

늦어서 미안하다.”

함께 살아온 지난 날, 다가가지 못한 모든 것에 미안한 사과가 돌아왔다.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아요.”

손을 뻗자 팔찌에 달린 돌조각 장식의 얼음꽃무늬가 예쁘게 흔들렸다. 그 손을 맞잡은 손은 여전히 냉기가 감돌았지만 힘이 있었다. 당기는 힘에 천천히 일어나며 눈을 뜬 패치는 햇빛 아래 하늘처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여름처럼 울창한 숲을 가장 먼저 보았다. 패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설마 지금 여름인가?”
...제가 이 숲 들어올 땐 겨울이었어요!”
“...지금 날씨는 전혀 겨울이 아닌 것 같다만.”
, 그래도 그렇게 덥지 않은 걸 보면 봄 같아요!”

패치는 더 붙이지 않고 딱 하나만 물었다.

학교는?”
여름도 아닌데 잔뜩 땀을 흘리기 시작한 퍼블리는 하하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패치는 놔주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던 순간

저기 있네!!!”
~블리~!!”
하늘에서 요란스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둘은 비어있는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 때문에 그림자처럼 까맣게 보이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햇빛을 가려줬고 동시에 그림자가 내려왔다.

아이고~! 날개 깃털 죄다 빠지도록 날아왔는데 여길 안방처럼 편히 앉아들 있는 양반들 봐!!”

우리 근육이~ 참 대단하네, 이 위험한 숲 올 생각을 다 하고~?”

그래도 뭐 찾긴 찾았구나? 하며 어쩐지 섬뜩하면서도 안도가 가득한 눈빛과 웃음에 퍼블리는 마주 웃었다.

그러는 너희들도 여기 들어왔으면서.”
웜머?!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이 위험 가득한 숲에 특급편지보다 더 빨리 날아와서 여기저기 찾느라 튀어나온 내 눈알들이 안 보고 얄미운 말이나 꺼내고 있네!?”

이야아악 화를 내며 혼자 날아가버리려는 산들바람처럼 잽싸게 일어나 전서구를 말리는 퍼블리와 아무 말 없이 뜻 모를 눈으로 패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니카, 아직 잡고 있는 손에 덩달아 일어나서 이 셋을 모두 지켜보다가 잠시 눈을 감는 패치. 이들이 숲을 빠져나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하나는 얼음

 

하나는 냉기

 

둘이 되는 봄으로

 

손을 맞잡아

 

여름을 부르는 숲 위에

 

모든 걸 지켜보는 햇빛 아래에

 

숲을 밟는 둘의 발은

 

어느새 산들바람이 되어

 

Posted by 메멤
,

분명 쓰러져있던 용사였는데 언제 일어나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못 봤다. 여전히 눈이 아플 만큼 불길이 모든 시야를 다 빼앗고 있었지만 간간히 흔들리는 파란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잉~ 불이 안 꺼져!”
무슨...!!.....!!”
멀리서 패치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보다 가까이 있는 용사의 말이 더 또렷하고 빨리 다가오는 건 당연했다. 그보다 더 빨리 다가온 건 난데없는 물벼락이었다. 용사가 물로 불을 끄려고 한 것 같았지만 당연하게도 단순히 물 뿌린다고 해서 꺼질 불이 아니었다.

마니 뜨거워?”
“...뭐하는 거니?”
불 꺼!”

용사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이 약간 옅어졌다.
?”

뜨겁자낭!”
그걸 물은 게 아니야.”
아까보단 조금 가까이에서 패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직 용사처럼 가깝지 않으니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용사를 말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웅?”
왜 날 구하려고 하는 건지 묻는 거란다.”
용사가 이 상황에 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격했던 밸러니의 감정이 잔잔했다. 아까의 물벼락이 끈 건 불이 아니라 밸러니의 감정이었던 것처럼.

 

그야 칭구니까 구하징!”
친구?”
!”
용사에게 담담하게 묻고 있는 동안 저 멀리서 컨티뉴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밸러니를 찌를 때까지만 해도 지친 기색은 가득해도 평정을 유지하듯 담담했던 목소리가 지금은 꽤나 다급했다.

?”

순간 불길이 옅어지고 해맑게 웃는 용사의 얼굴이 반짝이듯 선명하게 스쳐지나갔다.
꿈에서 봤으니까!”
동시에 퍼블리는 몰려오는 감정에 잠시 숨을 멈췄다. 마치 바다에 빠진 그 때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그래, 꿈에서 봤구나.”
그렇게 말한 밸러니는 용사에게 손을 뻗었고 고개를 기울이던 용사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금 밸러니는 아마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너랑 같은 능력을 가진 친구가 있었어.”
밸러니를 휘감고 있던 불길은 아까보다 훨씬 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타서 사라지는 빛이 아까보다 더 늘어 눈이 부실만큼 반짝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일 법한데 이상하게 용사는 불길보다 또렷이 보였다. 쓰러진 용사는 피를 흘리며 위태롭게 숨을 쉬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복부에 무언가 길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조준을 잘못했네, 많이 아프겠구나. 일단 마저 말하자면 그 애는 꿈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자세히 들을 생각은 없었어. 그러니 너에게도 말해주마.”
다시 한 번 용사에게 손을 뻗은 밸러니가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하게 말을 꺼낸다.

꿈은 꿈일 뿐이야.”
피가 튀고 눈앞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잡은 시야에서 보이는 용사는 처음 새겨진 상처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눈을 가리는 건 분명 새빨간 피였다. 아니 피 말고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계속 말했잖나!”

서 있는 것도 꽤나 힘겨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패치가 누구를 향해 외친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패치의 손엔 늘 용사가 들고 다니던 나무 막대가 있었는데 끝부분에 피가 묻어있었다. 밸러니는 천천히 손을 들에 제 이마를 만져봤다. 눈을 가린 새빨간 피가 손에 묻어 있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도 같이 뒤를 따르겠군.”
뒤에서 들려오는 컨티뉴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크게 뒤틀렸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완전히 쓰러질 뻔했지만 후들거리며 땅을 짚는 손과 팔에 억지로 힘을 주며 버티고 있었다.

안 돼....”
안된다니, 많은 이들이 당신 때문에 잠들었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됐어. 그들로는 부족했나? 나또한 그들처럼, 당신 앞의 두 마법사처럼, 그리고 당신처럼 영원히 눈을 감게 됐지.”

그 말 아래에 담긴 감정들이 무엇일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얼마나 깊고 얼마나 무거울지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닿지 않고 말만 닿았다.

영원히 눈을 감는다고?”
그 어느 때보다 밸러니의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숨을 죽이며 모든 걸 보고 느끼고 있던 퍼블리는 불길한 예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지금까지 충격적인 장면을 꾸준히 봐왔고 놀라면서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달랐다.

아니, 그럴 순 없어...”

감정에 맞지 않게 애절하게 나오는 목소리는 퍼블리의 불안감을 더더욱 키웠고 싸한 느낌이 목소리가 나온 목을 틀어쥐듯 자극하며 긴장을 더 높였다. 땅을 짚고 있던 손이 긁듯이 오므리며 흙과 풀을 쥐다가 천천히 펴지며 쥐고 있던 걸 전부 놓았다.

난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말한 밸러니는 바로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너무 당황하고 놀란 퍼블리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빛나는 종이 같으면서도 빛이 종이 모양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가장자리를 보니 거칠게 찢긴 흔적이 보였다. 이런 빛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니 꽤 많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마치 하나의 큰 종이를 찢어서 여기저기 뿌려놓은 듯 했다. 그렇게 빛들이 서로 멀리 떨어졌을 때 쯤, 다시 시야는 어두워졌고 그 상태가 꽤 오래 이어졌다.

젠장, 뭐가 어떻게...!”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가물가물하다가 점점 선명하게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고 난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분명 마력을 전부 희생했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패치였다. 퍼블리는 안도했고 밸러니는 당황했다. 그리고 퍼블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했는데 패치의 목소리만 들려오고 움직이는 시야에 패치가 없었다. 보이는 건 휑한 벌판뿐이었다.

용사는 어디 있고 여긴 대체 어디지? 그리고...”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패치도 마찬가지였는지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기억나는 상황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비가 왔는지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눈에 들어왔지만 시야의 주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퍼블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버렸지만 똑똑히 봤다.

물웅덩이에서 비친 건 패치뿐이었고 눈이 마주쳤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