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많이 가까워졌구만?”


그 이후로 용사는 책을 가져와 옆에 앉아서 읽거나 자잘한 말들을 툭툭 건넸다. 그에 나도 자잘하게 대답했고 마저 책을 읽는 걸 반복했다. 그러던 중 GM이 문득 찾아와서 저런 말을 꺼냈다.


“그렇게 보입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일단 늘 웃고 있는 GM이지만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의미심장한 웃음은 구분할 정도로 많이 봐왔으니 지금 짓고 있는 웃음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구경할 생각이지!”


내 눈은 자연스럽게 가늘어졌지만 GM의 웃음을 더 북돋을 뿐이었다. 구경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번엔 GM이 직접 장난을 치는 게 아닐테지만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찜찜함이 거슬렸지만 거기에 집중을 쏟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좀 더 주위 경계를 올리는 걸로 덮어뒀다.


“저 오래된 마법사랑 친해?”


“자네는 표현도 보통이 아니군. 친하다고 묻는다면 애매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사이일세.”


“애매해?”


“믿음이 가지만 친밀감을 느끼기엔 꺼려지지.”


애초에 GM이 나를 편하게 놀릴지언정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용사는 내 대답을 듣더니 힘을 빼고 나무에 기대앉았다. 읽는데 집중하다보니 나도 나무에 많이 기댔는지 용사와 팔이 닿았다. 책을 넘기는데 불편하니 바로 떨어져 앉았다.


“친하다고 느껴지는 마법사는 없어?”


“없네.”


“보통 그러면 외롭다던데 넌 안 그런가봐?”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용사는 할 말이 없었는지 그 뒤로 더 묻지 않았다. 도우면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을 텐데 같이 일하는 마법사들은 자신의 몫은 자기가 전부 하겠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스스로 자신의 몫을 끝내는 건 좋지만 시기와 효율을 따지자면 괜한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 필요 없다는 마법사를 굳이 붙잡고 내가 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쉬면 더 좋지 않아? 왜 그렇게 일을 하려는 거야?”


“시간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걸세. 쉬는 것도 쉬는 것 나름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일하는 거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네.”


“일벌레라는 단어 알아?”


“자주 듣는 단어지.”


용사는 일중독이라는 단어도 말했지만 그것 또한 자주 듣는 단어였다. 그만큼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왜 그렇게 질린다는 얼굴들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용사는 책 말고 다른 물건들도 가져오기 시작했다.


“이거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알아?”


“...나는 알지만 자네가 모르고 있는 것 같군.”


어린 마법사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들을 가져오고선 그것들로 노는 방법을 설명하는 용사의 모습이 참 황당했다. 왜 가져왔냐 물으면


“일하는 거 말고 노는 법도 알아야지.”


“그리 말하는 자네도 정작 제대로 놀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만.”


나를 위해 가져왔다고 하는데 어쩐지 가져온 용사가 더 신난 기색이었다. 입으로 불어서 돌리는 종이 팽이를 바람 마법까지 이용해 돌리던 용사는 꼬을수록 늘어나는 실을 팽이에 감고 한계까지 늘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옆에 있는 것도 까먹고 혼자서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

넓은 데에서 혼자 열심히 놀라는 배려를 담아 책들을 들고 다른 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책을 세 권 정도 읽고 있을 때쯤 옆에서 다시 기척이 느껴졌다.


“노는 건 끝났나?”


“너랑 같이 놀려고 가져온 거였어.”


“흥미없네.”


“재밌어.”


“이미 예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라 지금은 재미없네.”


용사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깃털 색이 예쁜 새를 잡아와서 손에 쥐여주려고 하거나 바다꽃잎을 책갈피로 써보라는 둥 저번보다 훨씬 더 의미모를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용사만큼이나 기행을 부리는 마법사가 있었으니 그건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사가 갈색머리 마법사를 따라하는 것 같았다. 갈색머리 마법사가 먼저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고 용사가 그 뒤를 이어 나에게 찾아오는 식이었다.

용사의 기행 대상이 나였다면 갈색머리 마법사의 기행 대상은 쉼터의 주인이었다. 곤혹스러워보이는 쉼터의 주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도 둘을 이상하게 봤지만 정작 그 둘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적당히 좀 하게.”


“네? 뭐가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자네와 용사 둘 다 행동이 똑같은 데다 둘 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 쉼터의 주인과 내 입장에선 자네들은 정말 영문모를 말과 행동들만 해서 곤혹스러운 거 외엔 느끼지 못 해.”


“어...진짜요?”


“쉼터의 주인이 무지개 잎에다가 물방울 구슬을 싸서 자네 손에 쥐여주고 햇빛 받으니까 예쁘죠? 하고 묻는다면 자넨 뭐라 대답할 건가?”


“예쁘네요!”


이 둘은 대체 뭐가 문젤까. 자연스럽게 차게 식은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태도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예시를 변형했다.


“내가 자네에게 그런다고 생각해보게.”


“...왜 그러세요?”


“그래 그걸세.”


충격받은 얼굴로 정말 그 정도냐며 되묻는 갈색머리 마법사를 보니 용사도 마찬가지겠구나 싶어서 같은 예시 대상은 쉼터의 주인으로 용사에게 말해줬다. 그리고 반응은 참 가관이었다.


“무지개 잎까진 아니어도 그런 적은 많은데?”


마을 마법사들이 용사에게 호의적이었다는 걸 망각하고 말한 예시였다. 그리고 용사는 마을 밖 마법사들을 만난 적이 이번 외엔 별로 없으니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가 문득 호의라는 단어에 실마리가 잡힌 걸 느꼈다.

같이 지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는 상대는 따로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 이들과 더 자주, 오래 만나서 친구로 남는 일이 많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주변에 존재했다. 들개들과 GM과 하늘의 현자가 그러했다.


“...어쨌든 다짜고짜 그런다면 상대는 당연히 당황하고 자네들이 대체 왜 그러나 의아해할걸세. 그냥 다른 이들 대하듯 하면 나도 쉼터의 주인도 곤혹스럽지 않고 자네들을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어지지.”


부담스럽다는 말에 또다시 충격을 먹은 건지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저번처럼 굳은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진 않았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다른 이들 대하듯 하라고 한 거였지만 쉼터의 주인 입장은 어떨지 모르니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해지고 싶었던 거냐고 물으면서 운을 떼면 내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이미 친하지 않다고 못 박고 그은 선을 제대로 느꼈으니 눈치 좋고 머리 좋은 저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알아챌지도 몰랐다. 선을 확실히 더 그은 셈 치며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정신차린 둘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다른 이들처럼 대해야 부담스럽지 않을 거냐며 붙잡고 물어보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손이 빠르시네요.”


사실 이렇게 말해도 저 둘은 다른 식으로 기행을 펼칠 게 훤했고 GM의 열심히라는 말이 걸렸으니 이 둘이 어째서 나와 쉼터의 주인에게 다른 이들보다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싶어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대놓고 묻자니 그냥 좋다거나 자신도 몰랐다는 반응이 나오거나 계속 그랬듯이 입을 다물거고 아니면 그걸 기회삼아 친해지자며 본격적으로 선을 넘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와 비슷한 처지인 마법사 즉 쉼터의 주인에게 찾아가서 그동안 갈색머리 마법사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아내는 거였다. 내가 용사와 겪은 일들을 비교해보면 이유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고생이 많아보이더군요.”


“네? 고생이라니 무슨...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용사와 갈색머리 마법사를 보던 쉼터의 주인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에 보이는 피곤함에 동질감이 더욱 깊어졌다.


“악의가 없는 건 알고 있어요. 오히려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쉼터의 주인은 그간 자신이 얼마나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웠는지 겪은 일에 대한 감정을 담아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사이에 짜증이나 귀찮음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짐작이 갑니까?”


꽃잎들을 하얀 천과 합체시켰다는 일까지 들은 나는 질문을 했다. 그에 쉼터의 주인은 말을 멈추고 잠깐 생각하더니 전혀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다꽃을 구경하러 온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많아 쉼터가 바빴어서 마을에 이사 온 마법사가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여유로워졌을 때야 알게됐다고 했다. 그 때가 마침 내가 결계 마법 때문에 용사를 찾아왔던 시기였다. 

애초에 여행객이 아닌 이상 쉼터에 들릴 이유도 없었으니 갈색머리 마법사도 굳이 바쁜 쉼터에 찾아가 인사를 할 생각이 없었고 둘의 접점은 최근을 제외하고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한 후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그대로였다. 그 둘이 공통적으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만큼 나와 쉼터의 주인 사이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공통점은 둘째치고 겹치는 게 마법사라는 거 외엔 아예 없었다.


“...이런 일로 머리가 아프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제일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은 마법진 완성을 빨리 마치고 빨리 떠나는 거였다. 다만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고 설령 떠난다해도 GM이 가만히 떠나게 둘 리가 없다는 점도 한 몫했다. 앞으로 한참 남은 시간동안 무시해야할지 아니면 원인을 알아내 그만두게 할 해결책을 만들어내야하나 고민했지만 우습게도 이 고민은 바로 무색해졌다.

확실하게 못을 박고 대놓고 얘기를 꺼낸 효과를 보는 건지 용사의 기행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많이 사라졌다. 사실 기행 자체도 거슬리는 게 아닌 가볍게 넘길만한 수준으로 바뀌었다. 가령


“어깨 주물러줄까?”


“됐네.”


정정한다. 다시 되짚어보면 기행이라기보단 농담이나 장난 혹은 그냥 하는 말 수준으로 바뀌었다. 갈색머리 마법사와 쉼터 쪽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쉼터의 주인의 당황하는 표정이 줄어든 걸 보면 어느정도 용사처럼 알아들은 것 같았다.


“저기 어깨 아파하는 마법사들 많은데?”


“나는 그 마법사들이 아닐세. 애초에 자네 다른 마법사들 어깨 주물러봤나?”


“아니.”


참 실 없는 대화였지만 기행보단 훨씬 괜찮았다. 그러다가 그 이후로 계속 어깨뿐만이 아니라 팔, 다리, 허리, 등을 안마해줄까 묻는 걸 듣고 저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안마 자체가 필요 없다고 대답하고 이제 일에 집중해야한다는 걸 이유로 용사의 입을 막았다.


“왜 마법진을 이런식으로 설계하는 거야?”


“모든 마법사들이 자네의 마법진 같은 형식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네. 그러니 누구나 쓸 수 있는 보편적인 형식으로 설계한 거지.”


기행이 줄어든 대신 그만큼 용사는 질문이 많아졌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용사는 나를 통해 보편적인걸 배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행은 갈색머리 마법사와 마을 마법사들에게서 배우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게 보편적인 거야? 통로가 많은 것 같은데?”


“앞서 말한 걸 변형하자면 모든 마법사들이 자네처럼 마력이 많지 않으니까 이렇게 통로를 많이 만들게 설계한 걸세.”


“불편하겠네.”


마력이 용사 자신에게 비하면 적은 게 불편하겠다는 건지 아님 설계 자체가 불편하겠다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용사는 설계도를 복사해도 되냐고 물어봤고 예비로 미리 복사해둔 게 있었으니 그걸 넘겨줬다.


“그런데 무엇에 쓰려고 그러나?”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보편적인 설계방식으로 마법진을 설계 해볼려나 싶었다. 복사본을 구기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쥐던 용사는 잠시 집에 들렸다 오겠다며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냥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듣는 귀가 많았고 용사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

어느 정도 내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용사는 꽤 오랜시간 돌아오지 않았다. 갈색머리 마법사도 쉼터의 주인 옆에 붙어서 쉴새없이 떠드느라 여기로 오지 않았다. 드디어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안 오니까 그렇게 좋았어요?”


“조용한 환경은 언제나 좋을 수밖에 없지.”


“이해 못해요. 심심하잖아요?”


“일하는데 왜 심심한가?”


작정하고 빠르게 했을 때만큼이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세워진 하얀 돌들과 나무판자들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문양을 그려넣는 담당인 마법사가 말리지 않았다면 더 했겠지만 문양은 일정한 시간차로 그려야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다고 해서 더 할 순 없었다.

이 참에 문양 그리는 것도 맡을까 고민했지만 한 마법사가 일을 많이 쥐면 안 된다며 GM이 말리는 김에 장난을 칠 게 훤하니 바로 생각을 접었다.

조금 뒤로 물러나 마을을 빙 돌며 살펴보니 7할은 완성되었다.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연달아 살펴보니 삐뚤게 세워져있는 나무판자 두 개 외엔 없었다. 자잘한 실수들을 전부 찾아 없애고 일어서니 언제왔는지 용사가 바로 뒤에 멀거니 서 있었다.


“언제왔나?”


“네가 왼쪽에서 세 번째 돌들을 다시 정갈하게 놓을 때부터.”

약 20분 전부터 와있었다는 얘기였다. 별 생각없이 말을 걸었던 처음과는 달리 방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르침을 받고 학습하는 아이같아 조금 묘했다.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보단 관리감독이 쉬는 시간을 알릴 때나 일이 완전히 끝나는 해질녘에 찾아오는 게 더 나을텐데.”


“상관없어. 그리고 이거 받아.”


용사가 내민 것은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였다. 본 적 있는 모양새였지만 내가 준 복사본에 그려진 이동 마법진이 아닌 다른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내가 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게 뭔가?”


“내가 쓰는 결계 마법진을 변형했어.”


“이걸 내게 주는 이유가 뭔가?”


“쓰라고.”


반사적으로 눈을 좁혔다. 당연히 쓰라고 줬겠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물어본 건데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여전히 두꺼워서 안 보이는 안경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마법을 쓸 수 있게 굳이 자네가 변형까지 해서 줘야할 이유가 뭔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 날 찾아온 것도 이 마법을 쓰고 싶어서였잖아.”


맞는 말이긴 하지만...이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이렇게 보통 마법사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변형까지 했다면 이 마법서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게 분명하다. 이런 걸 그냥 받을 순 없었고 받는 것 자체가 뭔가 꺼림칙했다.


“...거래를 다시 할 의향이 있었으면 미리 말하게. 그 때 내가 대가로 챙겨온 건 놔두고 와서 지금은 값을 치를 수 없네.”


“아니, 거래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그....선물이야.”


선물이라는 말에 내 눈은 더욱 가늘어졌지만 곧이어 이어진 버섯은 안 좋아한다고 말했고 좋아하는 목록으로 말한 것들을 읊으면서 조금 힘이 풀렸다.


“자네 혹시 선물을 주는 것 자체가 처음인가?”


“처음이지. 마을 마법사들한테 받는 건 꽤 있긴 있었는데 뭘 주려고 해도 거절하더라.”


마법진에 대해 캐러 온 마법사들과 마녀들은 귀찮고 불쾌해서 밀어냈다고 한다. 일단 납득을 하며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내려다봤다.


“역시 그냥 받을 순 없네. 단순히 선물로 받기엔 가치가 높아.”


“난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네.”


몇 번의 거절 끝에 보통 마법사 맞춤형으로 변형까지 한 정성이 있으니 나중에 용사가 원하는 걸 이 마법진 값어치만큼 주기로 타협을 봤다.


“원래 선물은 거래용도가 아니고 선의로 받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는 거야?”


“선의의 선물도 정도가 있지, 누가 자네에게 산을 하나 선의의 선물이랍시고 주는 걸 생각해보게.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있나?”


그래도 용사는 이해한 기색이 아니었다. 어차피 용사가 숲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 여기서 굳이 더 설명하진 않았다. 이해를 시키려면 용사를 아예 모르는 세상 자체를 돌아다니면서 배워야했으니.

주변이 조금 어두워지고 용사의 머리카락에 주황빛이 도는 걸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때마침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관리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들어가지.”


나는 다른 마법사들을 따라, 용사는 나를 따라 쉼터로 들어갔다.



“둘이 사이가 꽤 가까워졌네요?”


쉼터의 주인에게 계속 붙어있느라 바빴던 갈색머리 마법사가 오자마자 한 말이었다. 가까워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일하는 중에 용사를 밀어내지 않고 용사도 일정거리에 떨어져있고 일정량의 말만 하면서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까워졌다기보단 타협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말을 걸고 바로 옆에 딱붙어서 행동에 지장을 주는 게 아니니 밀어낼 명분이 없는 게 당연했다. 대신 용사쪽에서도 전처럼 가까이 오거나 말을 자주 걸 수 없으니 서로가 물러난 자연스러운 타협이었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웬일로 쉼터의 주인과 떨어져있군.”


“이번엔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바쁘지 않아 보일 땐 종일 붙어있겠다는 소리로 들려오는 건 그동안 질리게도 붙어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인가.

드디어 선을 좀 지우거나 늘렸냐며 넉살좋게 얘기를 붙여오려고 하지만 난 바로 일에 집중을 해야하니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없다고 딱 잘라냈다. 그에 여전하다며 툴툴거리더니 용사에게 다가가 비결이 뭐였냐고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용사에게 말을 별로 안 걸고 일정거리 떨어져 앉았다는 대답을 듣자 기대와 호기심 가득한 눈은 안쓰러운 빛을 띄기 시작했다.


“...힘내요, 용사님.”


그렇게 말을 남긴 그는 숲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든 의문에 용사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숲에 들어오는 건 통제하지 않는 건가? 마력을 먹은 생물들 때문에 위험할 텐데.”


“마력이 고이기까지 시간이 어느정도 걸리기도 하니 별 문제 없어. 나타날 때 위험도를 확인하고 통제하는 식이야.”


이유인 즉슨 숲에서 마을 마법사들이 숲에서 캐는 식물들이 꽤 되기 때문이었다. 항상 통제를 하면 그들은 꽤 먼 곳까지 갔다와야했다.


“자네가 맡은 게 정말 많군.”


용사는 그런가 하며 넘겼다. 다행히 생필품들은 마을 마법사들이 마련해주고 있어서 사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바다꽃을 또 보러온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있었는데 그 때 비달팽이 덕분에 비가 많이 내려서 그들 모두 시기를 한차례 놓쳤지.”


“마지막 차례였나?”


“응.”


아쉬워하면서 돌아갔을 무리들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 뒤를 이을 말은 떠오르지 않아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그 뒤로 용사는 질문보단 샘 근처에 파란 빛을 내는 버섯이 자랐다던지 자잘한 일상 얘기를 꺼냈고 나는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돌아온 후엔 말 없이 옆에 앉아 다시 나를 구경하고 말을 꺼내는 게 반복이었다. 정말 적절한 타협 범위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손이 바로 멈췄다.


“쉬는 시간이래.”


“...너무 집중했나보군.”


나무 그늘에 가기 전에 용사가 햇빛 아래서 잠깐 이걸 보라며 손을 내밀었다. 용사의 손엔 거울석을 껍데기로 삼은 손가락 두마디 크기의 벌레가 있었다. 거울석이 햇빛을 반사시키면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뻐?”


“왜 나한테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빛나고 환하다고 해서 전부 다 예쁜 건 아니네. 일단 이건 너무 빛이 강해서 눈이 아프네만.”


내 대답에 용사는 미련없이 벌레를 땅에 내려뒀다. 거울석을 껍데기로 삼은 벌레는 흔치 않은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껍데기가 거울석이지 벌레 자체가 귀한 건 아니었기에 그리 가치있는 발견은 아니었다. 저 아래서 반짝반짝 빛으로 존재감을 내뿜으며 사라지는 벌레를 애써 무시하고 용사에게 말했다.


“공통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마법사마다 예쁘다고 느끼는 기준은 다르다네.”


“그럼 넌 어떤 게 예쁘다고 생각해?”


“나한테 물어봤자 의미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네만...다른 이들과 공통적인 부분으로 바다꽃이지.”


“그 때 본 바다꽃들 예뻤나보구나.”


“많은 이들이 보려고 했던 것 만큼 당연한 게 아닌가?”


“당연하다라...”


말을 흐린 용사는 얼굴 중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입으로 미소를 짓고는


“정말 예뻤어.”


어쩐지 대화의 흐름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느낌에 떨떠름해졌다. 어딘가가 조금 어긋나고 마구잡이 같아 위화감도 들었다. 몰려오는 찜찜함에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리니 용사가 어디 안 좋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가 말았다.


“그래서 가져왔던 이유가 뭔가?”


“너한테 예쁜가 싶어서.”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 벌레가 예쁜지를 물어보려고 한 건가?”


“...바깥에서 온 마법사들 중에서 네가 객관적이고 통상적인 걸 잘 말하니까.”


“한 마법사의 말만 들어선 의미가 없네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물어보는 게 더욱 확실하고 효율적이지.”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는지 용사는 쉬는 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동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지고 쉬는 시간이 끝났을 때 계속 생각에 잠겨 있던 용사가 문득 물었다.


“...마법진은 언제쯤 완성돼?”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사흘 후에 마무리 단계네.”


“약속 잊지 않았지?”


약속이라고 한다면 거래를 말하는 거였다. 대체 뭘 보여주고 싶길래 저리 안달인가 싶었지만 정말 변수가 없다면 사흘 후에 보겠거니 했다. 그리고 변수라는 단어는 어째선지 말을 꺼내자마자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빨리 방수막 쳐!”


“문양 지워지면 망한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어야했지만 갑작스럽겍 내린 비 때문에 그려넣은 문양들이 일부 지워졌다. 


“분명 비는 그 때 비달팽이 때문에 한꺼번에 쏟아져서 더 이상 내릴 비가 없을 텐데?”


그동안 구름이 조금 끼거나 아예 화창했었는데 지금은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꽤 어두웠다.


“비 내릴 때 함께 숲을 돌아다녔던 게 떠오르네.”


“돌아다녔다기보단 수색이 아니었나? 그리고 따로 다녔던 걸로 기억하네만.”


“바다꽃밭 말이야. 그러고보니 오늘 마무리 단계 아니었어?”


“그래, 자네가 말한 데를 오늘 보러 가려고 했는데 비가 내리는 군.”


“그럼 보러 갈래?”


지금 바깥에 비오는 날씨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신발이 더러워지는 거 외엔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방수막은 하루내내 걷는 게 아닌 이상 빗물이 샐 일이 없었다.


“비가 와도 상관이 없는 곳인가?”


“오히려 비가 내리면 더 좋더라.”


대체 어떤 곳이길래 비가 오면 더 좋은 곳일까. 어차피 오늘 갈 예정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신발은 돌아올 때 들어오기 전에 진흙들을 털어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비가 내려서 일을 진행할 수 없으니 하루종일 책 읽기 외엔 할 일이 없었다.


“바로 준비하겠네. 자네도 준비가 필요한가?”


“아니.”


“금방 끝내고 오겠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도중 계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들어본 이 목소리는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그 옆에는 쉼터의 주인인지 일이 많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늘 하던 일이라 괜찮다고 대답하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계단 뒤로 가서 저 둘에게 말을 걸며 인사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대로 올라가려고 했다.


“.....요.”


만약 그대로 올라갔다면 내 발소리에 묻혀서 내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방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직 발을 계단에 올리지도 않았으니 제대로 들었다. 바로 그 옆에 있을 쉼터의 주인은 당연히 들었을 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정적이 깨지기 전에 계단에 발을 딛고 올라갔다. 어쩌다가 듣게 된 거지 크게 관심 가질 일도, 관심이 이어질 일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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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마법진인만큼 완성되는 기간이 긴 건 당연했고 여기에 환경적인 요인과 변수까지 발생하면 그 기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이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늘어나는 기간이 정해진다. 그리고 내 눈엔 점점 하루씩 늘어나는 기간이 보였다.


“넘어진다, 넘어진다고!”


“어어 빼빼빼빼!!”


넘어지는 나무 기둥과 그 아래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하얀 돌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이번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환경적인 요인과 변수 둘 다였다. 환경적인 요인은 바로 마법진 안에 있는 마을의 내려앉는 지반이었고 변수는 그게 마법진을 만들고 있는 데까지 뻗었다는 거였다. 땅을 두드려 다 확인했는데 내려앉은 만큼 밖에 있는 흙이 그 자리를 채우려고 덩달아 쓸려내려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다 계산하고 만든 마법진의 크기였다.


“말뚝 가져와 말뚝!!”


멀쩡한 땅에 말뚝을 박아서 기둥이 완전히 무너지는 참사는 막았지만 곤란한 문제들이 남았다.


“이대로 진행하기엔 오차가 너무 커져요.”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완성하기엔 이미 늦었어요. 기둥 치우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 거고요.”


다시 만들자 오차는 나중에 수정하자라는 의견들이 반반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방금 그것들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떠올랐다.


“공중부양 마법으로 쓰러진 부분들을 고정시키고 마저 완성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즉각적으로 회의적인 반응들이 튀어나왔지만 예상했고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확도는 둘째치고 마력 문제가 있었지만 내가 이 해결책을 떠올린 이유가 있었다.


“자네가 말한 장소 같이 가줄테니 이번 일을 도와주게.”


그늘 아래 어제 저녁에 이어서 인형처럼 서 있는 용사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했다. 언제 그렇게 인형처럼 있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걸 넘어서 나무 기둥과 하얀 돌들과 함께 날고 있는 용사를 보고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단 일에 집중을 해야하고 나만 딴 길 샐 수 없다는 이유에서 용사가 말한 재밌는 현상이 발생하는 장소는 마법진이 다 완성되거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갈 때라고 못 박았다. 언제가 됐든 같이 가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는지 용사는 별말 않고 동의했다.


“무슨 말을 했길래 저렇게 신났어요?”


“도와주는 대가로 같이 가자고 하던 데를 같이 가겠다고 했을 뿐이네. 그보다 그것들은 대체 뭔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질문하는 갈색머리 마법사의 품에 용도 모를 물건들이 가득했다. 토끼를 비롯한 작은 동물 인형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양말을 끼워넣은 듯한 모양새의 막대기는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쉼터씨가 좋아하는 물건들이요.”

“....다른 건 몰라도 그 막대는 농담 삼아 자네한테 말한 것 같으니 안 갖다 주는 게 더 나을 걸세.”


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마을 마법사들을 믿는다면서 쉼터의 주인에게로 달려갔다. 멀리서봐도 당황한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물건들을 안겨주는 모습에 나는 절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저 상황은 곧 내 상황이 됐다.


“...공중부양 마법은 어쩌고 왔나.”


“그냥 고정만 시켜두면 되니까 문제 없어.”


웬 잡초들과 대체 어디서 캐왔는지 모를 특이한 모양의 버섯들이 용사의 손에 한가득 쥐여져있었다.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며 공중부양 마법과 그 고정의 안정성 및 마력에 대해 얘기를 돌렸지만 전부 딱딱 대답한 용사는 여전히 안경 때문에 안 보이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결국 말을 돌리는 걸 포기한 나는 물었다.


“대체 그것들은 뭔가?”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들었어.”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전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고 자네와 나를 골리려고 그런 말을 한 걸세.”


“그럼 뭘 좋아해?”


바로 물어보는 말에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용사는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들고온 것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어쩐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다시 돌아온 용사는 씻고 온 건지 말끔한 손으로 책을 들고 왔다. 방금 전의 일은 없던 일 마냥 그대로 옆에 앉아서 책을 펼쳐 읽는 용사를 보고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는 뭘 원하는 건가?”


용사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종이를 넘기진 않았다. 움직이던 손도 멈추고 용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용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갈색머리 마법사는 나와 얘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고 했지만 용사는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다.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눈이 보여도 속내를 알기 힘든데 의미모를 말과 행동들만 하고 안경으로 눈까지 가리고 있으니 용사가 직접 속내를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아내는 건 힘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길래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건가 넘어가려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상황에 용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봤다. 미동도 없었다.


“용사님 불쌍하지도 않아요?”

“어느 부분을 불쌍해해야하나?”


갈색머리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게 노려봤자 아닌 건 아닌 걸세.”


“아니, 그...하.....”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자넨 쉼터의 주인에게 왜 그러는가?”


“제가요?”


“자네와 용사가 똑같다는 말을 한 마법사가 있는데 하는 행동이 비슷하네.”


갈색머리 마법사는 뭐가 충격인지 용사처럼 굳어버렸다. 어차피 일하느라 이 두 마법사에게 신경을 쓸 순 없었다. 이대로 있는 게 더 도움된다는 걸 깨달은 나는 둘을 내버려두고 하얀 돌들이 가득한 상자들을 들어 선을 그어놓은 데로 가 일을 다시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몫의 하얀 돌을 전부 세우는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빨리 완성시킬겸 다른 마법사들을 도우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모두 거절했다. 다음 순서를 먼저 하자니 아직 다 세우지 못한 게 대부분이라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봐, 정신차리게.”


할 일이 없어진 내가 선택한 건 용사의 책을 빌려 읽는 거였다. 아직도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한 용사를 두 번정도 흔든 다음에 책을 읽겠다고 말을 한 후 발 밑에 있는 책을 주워 흙을 털어냈다.

그 옆에 앉아 책을 펼치니 어쩐지 굳어있던 용사가 움찔 팔을 떨더니 조금 떨어져 앉았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싶어 신경을 끄고 마저 읽는 데에 집중했다.


“...책만큼 좋아하는 게 있어?”


“연구일지나 개발 및 발달 계획서.”


“그런 거 말고, 예를 들면...나비?”


“좋아하지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네.”


“반짝이 풀이랑 꽃은?”


“수집하는 취미 없네.”


“술은?”


“웬만하면 안 마시지.”


그 뒤로 장신구, 희귀한 돌, 쓰는 마법 도구 등 용사가 물어보는 건 많았다. 장신구는 선호하지 않았고 수집하는 건 마법서 뿐이었으니 희귀한 돌에 관심 없었다. 마법 도구는 직접 만들 거나 만들기 까다로운 것들은 사서 쓰긴 하지만 실용성 위주로 살펴보다보니 내가 직접 고르는 걸 선호했다.

계속 질문하면서 대답을 듣기를 반복하던 용사는 이렇게 툭 말을 꺼냈다.


“미지근하네.”


딱딱하거나 재미없게 산다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저런 표현은 처음이었다.


“무슨 의민가?”


“말 그대로야. 관심이 없는 게 가장 크겠지만 막상 쥐여주면 던져버리진 않을 거잖아? 싫어하진 않으니까 던질 이유는 없겠지,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감정을 뜻하는 거였군. 뒤에 덧붙이자면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계속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 어딘가에 내려놓을 거라네.”


“행동은 확고하구나.”


옆에서 용사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림자가 진 걸 보니 일어난 게 분명했다. 굳이 고개를 들 필요성을 못 느껴 이야기를 나누느라 놓친 부분을 다시 찾으면서 훑어봤다. 종이를 두 장 넘겼을 때 용사가 문득 물었다.


“책 더 가져올까?”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용사를 올려다봤다. 까맣게 그림자가 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고맙네.”


용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지금 들고 있는 책을 다 읽기 위해 집중력을 높였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줄을 읽고 있을 때 옆에서 둔탁하게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손을 뻗어 새로운 책을 집었다. 다 읽은 책은 무릎에 올려놨었는데 어느새 용사가 가져갔다.

나는 용사가 가져다 준 새로운 책들을 읽었고 용사는 내가 다 읽은 책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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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새로운 얘깃거리가 생겼나보군.”


“어제의 연장선이에요.”


“이미 어제 끝나지 않았나.”


“저도 이제 경계하기 시작한 걸 보면 일부러 정을 안 붙이시려는 유형이시군요?”


그렇게 거창한 단어만큼 거창하게 세운 벽이 아니었다. 지금같은 경우에는 그저 귀찮았다. 귀찮음을 바람삼아 흔들리며 밀어내는 장막이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는지 왜 그렇게 벽 세우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첫째,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명확히 답이 나온 주제를 계속 이어나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 둘째, 일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셋째, 귀찮다. 여기서 더 이유가 필요한가?”


“와...진짜.....”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더 말을 잇지 않던 갈색머리 마법사는 그대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려했다.


“아 그 전에 혹시 저기 계신 쉼터 주인님이랑 친해요?”


가려고 하기 전에 멈춰서서 뜬금없는 질문을 꺼냈고 나는 인사하고 말 몇마디는 나눌 정도지만 그 이상으로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진짜 냉정하시네요.”


그렇게 말한 갈색머리 마법사는 방금 친한 정도를 물어본 쉼터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신경을 끄고 마저 일하려던 찰나 쉼터의 주인 옆에 있는 마법사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색은 무난하지만 온갖 화려한 무늬가 가득 새겨져있는 망토를 칭칭 둘러싼 마법사였다.

둘러싼 게 이상할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둘러쌀 정도로 추운 날씨도 아니었다. 나만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는지 짐을 나르면서 그 주위를 지나가던 마법사도 흘끗보면서 발걸음도 느려지고 있었고 아예 쉼터의 주인에게 가고 있던 갈색머리 마법사는 그대로 멈춰섰다.


“그러니까.....라는....용사님?”


거리가 좀 있어서 묻히는 말들이 많았지만 저 망토를 둘러싼 마법사를 용사라고 부르는 건 똑똑히 들었다. 그나마 더 가까이 있던 갈색머리 마법사도 들었는지 어깨를 떨더니 나를 돌아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용사가 무슨 말을 했길래 웃음과 걱정이 섞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열심히야!”


언제 왔는지 옆에서 하얀 돌로 난초를 그리고 있는 GM이 불쑥 말했다.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리해둔 거 어지르지 마십쇼.”



“어지르긴! 예쁘게 정리해두고 있는 건데!”


흙을 묻혀서 명암까지 넣고 있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고 빠르게 돌들을 수거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열심히 웃던 GM은 뜬금없는 말만 남기고 다시 돌아갔다.



“모르면서도 둘 다 참 열심히지?”



흙 묻은 부분을 털어내며 한층 더 소란스러워진 셋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중 누구를 제외하면 GM이 말하는 둘이 될까 잠시 생각을 굴려봤지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쉼터의 주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뭐가 열심히라는 걸까 추측을 해보려고 했지만 나 아니면 쉼터의 주인에게 열심히 말 걸려고 하는 거 외엔 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바로 멈췄다. 계속 신경쓰고 있기엔 마법진을 완성시켜야했고 그다지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이 바빠?”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온갖 시선을 잡아끌던 망토는 어디다 뒀는지 평범한 옷과 안경을 쓴 용사가 옆에 와서 바쁘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내 할 일을 계속 했다.



“내가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말이야.”


보통 무시하고 할 일을 하면 바쁘다는 무언의 대답이었고 상대방은 아 바쁘구나 하면서 자리를 뜨기 마련인데 용사에게는 계속 말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나?”



“잠깐 쉬었다하면 되잖아.”



“지금 쉴 생각 없네.”



“언제 쉴 건데?”



“그걸 내가 정하나? 일하는데 방해말고 저리가게.”



뭐라 따진다면 몇마디 더 할 생각이었는데 용사는 순순히 자리를 떴다. 정말 자리만 순순히 떴다.



“지금부터 두 시간 쉬었다 합시다!”



일한지 아직 30분도 안 지났건만 뜬금없는 외침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관리감독 옆에서 용사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고 나는 돌을 쥐어 흔들어보였다. 이 행동의 의미는 허튼짓 말고 일정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는 의미였다. 그 외에 돌을 들고 흔들어보이는 행동 자체가 통상적으로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닌데



“3시간이요...?”



용사에게는 통상적으로 와닿지 않았나보다. 관리감독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고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양손에 돌을 쥔 채 일어섰다.



“어때? 시간도 남아도는데 내가 말한 거 보러 갈래?”



“자네는 내가 왜 돌을 들었다고 생각하나?”



“나한테 던지려고?”


“의미는 어느정도 파악한 것 같다만 먼저 기회를 주지. 오히려 시간을 늘린 이유는?”


“2시간은 3시간보다 짧으니까.”


용사의 말을 참고 삼아 돌 두 개는 부족할 테니 더 많이 준비했다는 의미로 마력탄 수 십개를 던지기 전에 보여줬다. 뒤에서 누가들어도 GM의 웃음소리라는 걸 알 수 있는 히이익 소리에 기분이 더 가라앉았지만 기겁한 관리감독이 쉬는 시간을 철회하고 원래 일정을 외침으로서 나는 마력탄들을 전부 없앴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왜 그러는가?”


“그야...”


뭔가 말하려던 용사는 입을 딱 다물더니 무언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선 숲으로 뛰어갔다. 어째선지 뒤에서 들려오는 GM의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진 것 같아 무언가에 휘말리기 전에 빨리 내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GM만 문제가 아니었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다수의 시선이 느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마법사들도 전부 이상한 표정을 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급격히 쌓이는 찜찜함에 더더욱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덮어두고 일에 집중했다.


“혹시 쉼터씨가 뭘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용사 아니면 갈색머리 마법사 이 둘은 서로 닮은 부분이 없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나를 찾아와 귀찮게 군다는 점 말이다.


“모르네만.”


“에이~ 그래도 서로 얘기 많이 나눠봤을 텐데 뭐 좋아한다 싫어한다 소소한 거 하나도 안 꺼내봤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얘기를 나눈 거라기보단 쉼터의 주인이 말을 꺼내고 나는 흘려듣는 식이었다. 그렇게 말해봤자 그것도 얘기를 나눈 게 아니냐 혹은 저번처럼 너무 냉정한 게 아니냐라는 말이 돌아올 게 훤했기에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자네는 왜 쉼터의 주인이 뭘 좋아하는지를 알고 싶은 거지?”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요!”


그럼 이사온 이후 한 달은 대체 어떻게 지낸 거냐 따지기엔 개인의 비밀을 단체적으로 숨기고 있을 마을의 폐쇄성과 배척성을 생각한다면 마을에 들어선 것 자체가 신기한 노릇이었다.


“한 달로는 마을 마법사들과 친해지기 힘들었나?”


“아뇨? 모두들 친절하셨어요.”


용사와 숲의 비밀을 제외하면 너그러웠는지 마을 마법사들의 친절한 행위들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하는 모습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꾹 눌러담았다. 일단 머릿속에 있는 마을 마법사들의 행동 및 태도들을 수정했다.

그렇다면 갈색머리 마법사가 쉼터의 주인과 친해지지 않았던 건 딱히 서로 볼 일이 없었던 게 아닐까 추측됐다. 확실한 건 직접 물어보는 거였지만 물어보면 이들의 관계에 더 깊게 관여하게 되고 휘말릴 것 같아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들을 흩어놓았다.


“정말 몰라요?”


“나한테 묻지 말고 직접 물어보게.”


이렇게 말하니 뭐가 또 문제인 건지 난감함이 대부분인 표정으로 쉼터의 주인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인다.


“그건 좀...”


“직접 물어보는 게 꺼려지면 다른 마을 마법사들에게 물어보면 되잖나. 아무리 쉼터의 주인이 내게 말을 많이 건넸다고 해도 정작 주인 취향을 알만한 건 같이 지냈을 마을 마법사들일 텐데.”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멍하니 나를 보더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나한테 물은들 어떻게 알겠나, 생각을 안 한 자네만 알 테지.”


끝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라고 소리치며 다른 마법사들에게 달려가는 갈색머리 마법사를 보니 GM이 말했던 열심히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건가 싶었다.

마을 마법사들과 나와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도와주러 온 마법사들 구분않고 붙잡아 물어보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 뒤에서 또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안 바쁘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비효율적이었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예고없이 마력탄을 뒤로 쏴서 날렸다.






“솔직히 말해봐요. 용사님 싫어하죠?”


마력탄을 열네 발 정도 쐈을 때 저 멀리서 일하는 마법사들 붙잡느라 바쁘던 갈색머리 마법사가 기겁하면서 달려와 말리는 걸로 용사와 마력탄의 술래잡기는 끝이 났다.


“귀찮다는 것도 싫어하는 범주에 들어간다면 싫어하는 거겠군.”


“아니 귀찮다고 그...번쩍번쩍하고 위험한 걸 날려대요?!”



엄연히 안전성 검증을 받은 비살상 위협용 마력탄이었지만 말 해봤자 안 들어먹을 걸 뻔히 아니 입 아프게 설명 않고 일하는데 방해말라는 뜻과 자네도 귀찮다는 뜻을 함께 담아 마력탄을 만들어보였다. 뜻이 제대로 통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뒤돌아 달리는 갈색머리를 지켜보다가 바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마저 일을 해야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쉬었다 합시다!”



쫓아내던 와중에 시간은 착실히 흐르고 있었고 어제만큼 진도가 안 나간 내 몫의 일처리에 자연스럽게 내 표정은 좋지 않았다.



“5분 정도면 어제 몫은 따라잡겠어.”


평소보다 더 집중을 한 결과 5분만에 어제 몫보다 조금 더 많이 세워진 하얀 돌들을 살펴보며 쓰러지지 않게 마무리 고정을 마치고 흙 묻은 장갑을 벗었다. 나머지 55분동안 편안하게 쉬기 위해 적당한 나무그늘을 탐색하고 근처에 놓여진 유리봉 다섯 개를 들고와 눈에 들어온 나무그늘 아래에 원모양을 이루도록 세워놨다.

원 안으로 들어와 몇가지 도형과 문장을 그려넣음으로써 원 밖으로 밀어내는 바람을 일으키는 임시 통행거부 마법진을 완성했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 사이에 또 찾아온 갈색머리 마법사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질린다는 눈으로 마법진을 보더니 돌아갔다. 역으로 이렇게까지 해야만 안 오는 자네들은 대체 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시 찾은 평온이 우선이라 나무에 기대어 설계도를 보면서 가장 빨리 끝날 부분과 가장 마지막에 해야할 부분을 표시해두고 중간을 어떻게 진행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계획을 짜냈다.

그러던 중 나는 각종 특성을 지닌 생물들과 싸워온 용사를 너무 얕잡아봤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엄청 부네.”


단순히 통행거부용이니 마법사가 날아갈 정도로 강한 바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리에 조금만 힘 주면 들어올 정도로 애매한 바람도 아니었다. 앞으로 일정 범위 내에 발을 딛는다면 일반 마법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뒤돌아오는 세기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용사는 다리에 힘도 주지 않고 평소보다 강한 바람 맞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자네가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자꾸 망각하게 되는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보다 임시로 그린 거지만 대단한 마법진인데? 바람 쐬려고 하는 거였으면 안쪽으로 바람을 넣지 왜 바깥으로 바람을 내보내는 거야?”



“바람 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지 말라고 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낸 거였는데 자네가 그냥 들어온 걸세.”



“이왕 들어왔으니까 옆에 앉을게. 책도 들고왔어.”


옆에 털썩 주저앉은 용사는 안경을 고쳐쓰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신경을 끄고 마저 계획을 짜 정리단계로 들어갔다.



“내가 옆에 있는 게 싫어?”


사실 일하는데 방해하거나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옆에서 책을 읽든 드러누워서 자든 상관이 없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말을 걸고 귀찮게 굴면 누가 좋아하겠나? 심지어 계속 방해해서 일처리가 늦어지고 있다면 그것만큼 짜증나는 건 없다네.”


“그럼 가만히 옆에서 보는 건?”


“방해만 안 하면 상관없다네.”


용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쉬는 시간이 끝나갈 때까지 종이 넘기는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


“다시 시작합시다!”


관리감독의 외침이 들려오기 5분 전, 세워둔 유리봉들을 수거하고 땅에 그린 도형과 문장들을 발로 문질러 지웠다. 책을 읽고 있던 용사도 나를 따라 발로 땅을 문질렀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외침에 여기 온 이후로 매일 잡다시피하는 하얀 돌들을 그려진 선들에 맞춰 세웠다.

뒤따라온 용사는 네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내가 일하는 걸 지켜보기 시작했다. 반복노동에 뭐가 볼 게 있을까 했지만 두꺼운 안경 때문에 시선이 잘 보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세도 한참동안 변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심심해서 옆에 앉은 채 멍하니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집중해서 일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일어나서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제보다 더 많이, 빽빽하게 세워진 하얀돌이었고 그 다음으로 들어온 건 앉은 채로 잠든 건지 미동없이 그대로인 용사였다.


“거기 앉아서 뭐 하나? 일은 다 끝났네.”


“잠깐 생각 정리.”


“그럼 들어가서 하게.”


일하고 있던 때라면 모를까 엄연히 마법사 다니는 길목이었으니 통행에 방해가 되는 건 당연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는 나를 따라 쉼터로 들어왔다. 곳곳에서 용사를 부르는 마을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용사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방해의 기준은 어느 정도야?”


“일처리의 진행속도를 늦추거나 멈추게 만드는 정도.”


“쉬는 시간엔?”


“혼자 있는 게 더 좋지만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할 일을 하면 상관없네.”


“그럼 말 거는 것 자체가 싫은 거 아니야?”


“다짜고짜 친밀하게 말을 걸고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면 누구나 다 싫어하지.”


“친밀하게 말을 거는 게 싫다고? 왜?”


나는 어쩐지 반응이 격한 용사를 보며 되물었다.


“우리가 친한가?”


용사는 입을 딱 다물면서 그대로 멈췄다. 다시 짚어보자면 나와 용사는 애매하지만 친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이렇게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만날 일이 없고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이야기 분야가 겹치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물론이고 용사 또한 맑은 하늘, 비내리는 밤과 같은 자잘한 안부 인사가 담긴 편지를 쓸 리가 없었다.

용사는 다시 되짚어보니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게 충격적이었는지 그로부터 40분이 지나도 같은 자세로 굳어있었다. 어쩐지 기쁜 기색이 가득한 쉼터의 주인이 여기서 함께 저녁을 먹을 거냐고 물으러왔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어깨를 툭툭 두드릴 때까지 용사는 굳은 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용사님?”


두드리는 걸 넘어서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야 용사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반응이라고 해봤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말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긍정으로 간주한 쉼터의 주인은 용사 몫의 저녁까지 준비해왔고 용사는 거의 반복활동만 하는 인형처럼 입에 쑤셔넣고 있었다.


“...용사님이 왜 저러시는지 아시나요?”


나는 차마 나와 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서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 게 많다보니 별별 마법사들이랑 마녀들을 봤거든요? 그런데 당신처럼 냉정한 마법사는 정말 처음봤어요.”


“미리 말하는데 난 자네와도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렇게 벽을 세우고 밀어내는데 누가 몰라요?”


나는 말 없이 여전히 멍하니 앉아있는 용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용사님은 예외라고 칠 게요. 근데 정말 애매...하다고 해야하나? 보통은 좋거나 싫거나 둘 중 하나가 확실하단 말이에요.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밀어내는 건 또 처음인데 그렇다고 가시 세워서 밀어내는 느낌은 아니라 정말 모르겠다고요.”


“가시를 세워야할 이유는 없으니 세우지 않는 거고 밀어내는 건 친해질 생각이 없으니 밀어내는 걸세.


“그런 마법사가 어디 흔하겠어요? 게다가 완전히 밀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어느정도 말도 받아주니 더 헷갈린다고요.”


“말 허리를 자르거나 아예 듣지도 않고 자리를 뜨는 건 좋고 싫고를 확실히 표현하는 걸 떠나서 무례한 거니 대답을 바라는 말엔 대답을 하는 거라네.”


“이건 또 묘하게 올곧으셔.”


사실 태도가 애매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고 이해가 안됐다. 이런식으로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상대방 측에서 말 거는 걸 꺼려했다. 여기서 용사와 이 마법사를 제외하고 예외를 꺼내자면 마법사 마녀 안 가리고 놀리는 걸 좋아하는 GM과 GM의 심부름으로 간혹 찾아오는 들개들인데 들개들도 나를 꺼려하니 실질적인 예외는 GM 하나뿐이었다.


그러는 자네는 밀어내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계속 쓸데없고 자잘한 질문을 하는 거지?


아니 저기요, 쓸데없고 자잘하다뇨! 진짜 이 마법사 막말이 거침없네!


반응을 과장해서 어물쩍 넘기려들지 말고 제대로 말하게. 보통 이런식으로 밀어내는 걸 느끼면 꺼려하기 마련인데 자네는 왜 일부러 질문을 하는 건가?


갈색머리 마법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당신이랑 얘기 나누는 건 재밌거든요.


그런 말을 툭 남기고 쉼터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인형처럼 앉아있던 용사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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