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 말이 뭔가?”

 

잠깐.”

 

용사는 다시 안경을 꺼내 썼다. 다시 쓸 거면 왜 벗어놨는지 모르겠다.

 

역시 얘기를 하려면 차분히 해야할 것 같아서. 어디까지 했지?”

 

아직 시작도 안 했네.”

 

말투와 행동은 굉장히 차분했지만 머릿속은 반대로 꽤 복잡한 상태인지 시작도 안한 대화 순서를 묻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온다길래 땅은 물론 하늘에 물 한 방울 없다고 정정해줬다.

 

그래,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은...나는 너에게 배운 게 많아. 스승과 제자처럼 함께 책상에 앉아서 책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너에게 배운 게 많으면서 맞지.”

 

자네 말대로 스승과 제자 관계는 아니지만 맞네.”

 

그만큼 너는 아는 게 많고 내가 만나본 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똑똑해.”

 

한숨처럼 숨을 내쉰 용사가 살짝 입꼬리를 씰룩였다.

 

나는 널 좋아해.”

 

고백이라기보단 확인하고자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똑똑한 넌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게 맞았다.

 

넌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네.”

 

그러니까 왜?”

 

말한다면 무엇이 달라지나? 나는 결국 마법진을 완성시켜 마을 마법사들의 이주를 완료하면 떠날 것이고 자넨 이 숲을 떠나지 않을텐데.”

 

결국 똑똑한 용사가 이겼다. 이대로 묻힌 채 사라지길 바랐건만 감정이 어리다고 해도 용사는 어른이었다. 자각하더라도 내가 떠난 후이길 기대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나는 책을 들어 품 속에 넣어놨던 변형 마법진 종이를 가리면서 꺼냈다.

 

떠난 이후엔? 연락하고 지낼 수 있잖아.”

 

애초에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소식지 외의 우편물을 걸러내기 위해서였네.”

 

심심하지 않아?”

 

심심하다기 보단 외롭다는 표현이 올바른 걸세. 말상대가 있으면 좋지만 난 책이 더 좋네.”

 

왜 그렇게까지 관계를 끊어내려는 거지? 내가 널 좋아해서?”

 

그 말에 반사적으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자네의 감정에 상관없이 난 애초에 선을 그어놨고 자네의 감정은 그저 원래있던 그 선 위에 더 짙게 그어 보인 것뿐일세. 내 행동에 자네의 감정을 섞어 있지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게.”

 

내 대답이 어떻게 닿았을진 모르겠지만 용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쪽 입술을 깨물고 있어 일그러진 저 입매 뒤에 무슨 말들이 쌓였을지는 예상이 가지 않았지만 감정들은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감정이 뭉쳐져서 단순해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게 터져나올 때는 뭉친만큼 복잡하게 엉켜서 쉬이 풀지 못했다.

거부에 대한 억울함, 울분, 서러움, 분노 적어도 이 중에 하나는 있으리라.

 

그럼 이만 가보겠네.”

 

들어올 때 열어뒀던 문이 내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닫혔다.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꺼낸 종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긴급 순간이동을 시도했고 반은 성공했다. 설정해논 이동장소는 밖에 있는 마법진 근처였는데 이동하고 앞을 보니 나무들이 잔뜩 보이는 걸 보면 아직 숲이었다.

제대로 이동이 안 된 이유를 살펴보고자 돌을 두 개 주워 하나는 그냥 위로 던지고 다른 하나는 이동마법을 써보았다. 위로 던진 돌은 꽤 높이 올라가는 반면 이동마법으로 올려본 돌은 어느 부분에서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중간에 나타나 떨어지고 있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력이 남아도니 이런 정신나간 짓을 잘도 하는군.”

 

용사가 숲 전체에 방해결계를 쳐놨다. 그쪽도 마찬가지로 내 행동을 예상했던 건 그렇다 치더라도 보통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론 집 하나도 겨우 될까말까인데 이렇게나 대규모에다가 틈도 거의 없다시피한 결계마법을 혼자서 하다니 그렇게나 고이고 쌓인 마력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렇게 마력이 많은 그에게도 한계가 있는 건지 물리적인 방해는 없었다. 쫓아와서 다시 잡기 전에 이대로 숲을 나간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 내가 아직 숲에 있다는 것 그 자체였다.

지도가 없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숲은 그야말로 용사의 마당 그 자체였다. 바다꽃밭만 제외하고 갑자기 나타난 회오리 바람이 숲의 모든 장소를 쓸어대기 시작하자 반사적으로 상쇄를 위한 공격마법을 날렸다. 이로 인해 내 위치가 노출되었고 이동마법 특유의 일그러짐이 느껴지자마자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겨 숨을 참은 채 대기했다.

 

일그러진 흔적이 두 개밖에 없는 걸 보면 근처에 있구나.”

 

다시 바람이 불었지만 방금 전의 회오리 바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바람 그 자체였지만 나무들이 뽑혀져 나가는 걸 보면 위력은 그냥 바람 수준이 아니었다. 헛웃음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왔는데 바람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나무만 날렸지 그 뒤에 숨어있던 나에겐 타격이 없었던 점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된 용사가 꺼낸 말이 한 몫했다.

 

아직 얘기는 안 끝났어.”

 

얘기가 끝나기 전에 자네는 아직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정리부터 해야할 것 같네만.”

 

정리하는 동안에 너는 떠나겠지.”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나는 널 좋아해. 그래서 너와 연락이라도 하고 싶어.”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얘기가 아닌 그저 감정호소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게.”

 

좋아하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고 그 감정 때문에 내가 그은 선을 넘고 싶어한다. 애초에 얘기를 통한 설득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받아들여주길 원하는 게 감정 그 자체인데 감정호소 외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너는 나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거야?”

 

각별한 감정은 없네.”

 

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 다른 마법사들보다 자주 옆에 있고 같이 책도 읽고 얘기도 나눴는데 왜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오늘 떠난 마을 마법사들은 나보다 더 자네와 오래 알고 지낸데다가 자네를 존경했고 지금도 그렇지. 그들의 존경을 받은 자네는 그들에게 같은 감정이 들던가?”

 

난 적어도 밀어내진 않았어!”

 

바람이 멈추는 걸 느꼈고 나는 한 마디만 했다.

 

그렇지만 별 감정은 없었겠지.”

 

눈을 감아 빛폭발을 일으킨 후 쓰러진 나무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용사의 뒤쪽으로 이동시켰다. 먹먹해진 귀를 빛과 폭음 때문에 시야와 청각이 막힌 용사는 나뭇가지를 향해 마법들을 날려댔다. 마력을 먹거나 소환된 생물들과는 수도 없이 싸워왔겠지만 반대로 마법사들과 싸움은 물론이고 대련 한 번 해본 적은 없을 것 같다는 예상 하에 벌인 일이었다.

용사의 행동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예상이 들어맞았고 나는 즉시 뒤돌아 달렸다. 숲이 용사의 마당이라지만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는 내가 더 능숙했다. 용사는 주로 생물들을 붙잡거나 쓰러뜨리기 위해 주로 범위가 큰 마법을 사용하는 듯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이라 통하는 거였다.

범위가 큰 마법은 결계 분야를 제외하면 크기만큼 빈틈이 많았고 웬만한 교란이나 정교한 가짜수식으로 보완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몸풀기 대련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단순히 특징을 지닌 마력을 삼킨 생물들만 상대해서 빈틈은 물론이고 가짜수식으로 범위 마법들을 보완했을 리가 없는 용사가 나를 잡기 위해 숲 전체를 뒤덮는 추적 및 통행 방해 마법을 써서 길을 막아도 간단한 방해 마법 하나만 쓰면 쉽게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되면 나가는 길만 찾으면 내가 이기는 상황이었다.

 

“..!....!!...!”

 

내용은 잘 안들리지만 뭐라 외치는 소리 자체가 들리는 걸 보면 거리를 안심할 정도로 벌리진 않은 것 같았다. 흙바닥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복제해 곳곳에 퍼뜨리고 풀을 헤집고 지나간 흔적 또한 여러군데 남겨놨다. 이 가짜 흔적들이 용사의 발을 잡아주길 바라면서 꾸준히 짓눌러대는 범위 마법들을 없앴다.

조금 많이 뛰었다 싶었을 때 용사는 전략을 바꿨는지 계속 써대던 범위 마법을 그만두고 무차별 마법폭격을 시작했다. 마을 마법사들이 계속 근처 마을에 지냈다면 무너지는 나무들과 휩쓸려 날아가는 꽃과 풀들을 보고 굉장히 아까워하며 용사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장 달려왔을테지만 이미 그들은 떠나버렸다. 마법진의 처분 때문에 남아있을 마법사들을 기대하기엔 마을 마법사들의 용사에 관한 무용담을 실컷 얘기했으니 힘들었고 GM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짜 뒷일은 전혀 생각도 안 하는군!”

 

비록 우연이긴 하지만 바람을 탄 바위가 바로 앞에 내던져지는 걸 보고 불안감을 느꼈다. 저 공격에 맞는 게 불안한 게 아니라 마력이 고일 정도로 특수한 이 숲이 이렇게나 뒤집어지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이렇게 뒷일 생각 안 하고 날뛰는 걸 보아하니 이대로 숲 밖으로 빠져나가도 용사가 나를 따라 밖으로 따라오진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졌다.

 

팔 다리 하나 날아가도 원망 말게!”

이건 날뛰고 있는 용사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경험없어도 마력을 저렇게 때려붓는 상대와 맞붙으면 긁힌 상처나 멍드는 걸로 끝날 수가 없다. 날아오는 마법들과 휩쓸린 바위파편들을 역으로 되돌리는 걸로 시작해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되돌린 공격에 맞았는지 막았는지 날아오던 공격이 끊긴 것도 점시, 나무 사이로 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왔고 방수막과 충격완화 마법을 두른 후 물살에 몸을 맡겼다. 꽤나 빠른 세기로 흘러온 터라 순식간에서 서 있던 자리에서 멀어졌지만 그 자리 바로 위 나무보다 높은 공중에 환상마법으로 내 모습을 만들어냈다. 용사가 마법을 멈추고 환상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용사에게 전격 마법을 날리고 흙들을 흩뿌려 모습을 가렸다.

 

별 감정은 없었겠다고?! 그래서 너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그들에게처럼 너도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제법 가까워진 터라 목을 긁듯이 외쳐대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파란 가시들이 소환되어 내가 있는 곳 주변을 내리찍었다. 그 틈을 타 다시 한 번 전격 마법을 날린 후 땅에 꽂힌 가시를 발판 삼아 뛰어올라 먼저 날린 전격을 없애느라 뒤돌아 있는 용사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분명 체중을 실어 내리찍은 건데 용사는 기침도 안 터뜨리고 그대로 뒤돌아 내 팔을 잡았다.

 

그런데 그게 왜 내가 납득할 이유가 되지?”

 

안경을 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금 용사의 표정에 평정은 없었다. 워낙 두꺼워서 눈은 물론이고 눈동자 색도 안 보이던 안경 너머로 초록불이 생생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안에서 불을 피우다못해 넘쳐흐르는 감정은 분노를 가장 앞세우고 서러움, 울분, 억울함을 한데 뭉친 것처럼 커다랗고 그 정도가 일관됐다.

용사의 감정이 가득 담긴 표정에 시선이 빼앗기는 동안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용사가 나를 붙잡고 순간 이동을 했고 도착 장소는 바로 아까 탈출한 용사의 집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 그렇구나 그동안 즐거웠어 네 말대로 다신 보지 말자하고 그냥 보내줄줄 알았어? 주위 관계를 얄팍하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용사가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용사가 나를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원래부터 선을 그어놨고 뭐고를 떠나서 눈치챘으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 다물고 덮어두려고 했다는 게 정말 짜증나, 말해봤자 무엇하냐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울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너는 네가 떠난 이후로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을 거고 난...!”

 

끌려가는 걸 이용해서 체중을 실어 용사와 부딪혔다. 휘청거리며 잡고 있던 힘이 약해지는 순간 바로 다시 뿌리쳐서 뒤로 물러났다. 원망 가득한 말과 함께 다시 제대로 선 용사는 나를 노려본 채 현재 몸 안에 있는 마력을 전부 손안에 때려붓듯이 모으며 악에 받쳐 외쳤다.

 

이 숲에 갇혀 죽어가면서 절대 오지 않는 널 영원히 기다렸겠지!!!”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용사의 손 안에 하나로 뭉쳐졌다. 다급하게 구속 마법을 펼쳐 용사를 묶어뒀지만 용사의 저항이 굉장히 거셌다. 구속끈을 잡아당겨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힘을 준 게 원인이었는지 팔 힘이 한순간 풀려버렸고 용사는 자신이 저항하던 힘 때문에 뒤로 넘어졌다. 하필이면 책장이 있는 곳이었고 머리를 부딪힌 용사는 손에 쥐고 있던 마력의 제어를 놓쳐버렸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마력들이 주위를 뒤흔들었고 책장들이 무너져 그대로 용사 위로 쓰러졌다. 그 광경에 나는 끈을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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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네.”

 

밤하늘은 다시 비구름으로 돌아왔고 바다꽃은 줄기만 남아있었다.

 

돌아가지.”

 

 

좋아한다는 감정에도 어떤식으로 좋아하느냐, 그 감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얕으냐 같은 구분이 있다. 그 이후로 용사를 살펴본 결과 용사의 감정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관심과 나가질 못했으니 외부의 상식을 배움으로서 발생하는 동경 및 마법이론에 관해 대화가 통하는 상대. 그리고 이 모든 게 합쳐지니 한창 어릴 때 겪을 법한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뭉쳐졌다.

이를 어린시절의 첫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상대가 사라지면 식어버리는 그런 좋아함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지만 일단 식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식어버리는 걸 전제로 생각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감정이 어린 용사 본인은 감정만큼 어리지 않았고 머리가 좋았다. 그러니 저 대부분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보니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각을 한다면 그 감정이 어떤식으로 변화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감정의 변화는 온전히 용사의 몫이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용사가 감정을 자각하든, 그 감정이 변화하든 결국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일이 끝나면 돌아갈 거고 편지를 주고받는 식의 교류를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정해놓은 선을 더 짙게 그어놨다.

 

선을 짙게 그었다고 해서 용사가 넘으려고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자각에다가 무의식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선을 넘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에 나는 쉬는시간이 되면 바로 자리를 뜨는 행동을 추가했다. 용사는 나를 졸졸 쫓아오다가 어차피 내가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한다는 걸 깨닫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런 내 추가된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건 당사자인 용사가 아니라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왜 이젠 거리까지 둬요?”

 

원래 뒀네만.”

 

정정할게요. 왜 멀어지려고 해요?”

 

선을 더 확실히 보여야할 필요성을 느꼈네.”

 

갈색머리 마법사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아무리 왜 그러냐고 말을 해도 애초에 내가 그은 선 자체부터 시작한 상황이었다. 뭐라 더 얘기를 하기엔 그 선부터 언급을 해야하니 물러난 듯 싶었다.

 

이제 알아챘구만?”

 

처음부터 저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내가 키워본 애들만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딱보면 보이지!”

 

GM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내 행동이 썩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GM도 그걸 아니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깔끔한 건 좋지만 칼 같은 건 때론 아프지.”

 

제재를 가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경고를 꺼낸다. 경고 내용이 틀릴 게 없었지만 나는 지금 행동을 바꿀 생각이 없었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얼음 연못에도 햇빛이 내리는 법이야.”

 

그 말을 끝으로 GM은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말뜻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 말 그대로인 내용에 자연스럽게 눈이 가늘어졌다. 설령 내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용사를 들인다해도 그게 내 감정이 용사와 같아진다는 건 아니었다. 용사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을 그은 게 아니라 원래 그은 선을 더 짙게 그었을 뿐이다. 어째서 GM이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을 남겼을까 의아했다.

 

안 좋은 얘기라도 나눴어?”

 

아니.”

 

표정이 심각해.”

 

생각할 게 있으니 이후로는 대답하지 않겠네.”

 

용사는 바로 입을 다물며 계속 나를 바라봤다. 안경으로도 가려진 그 시선이 진실을 깨달은 후엔 참 부담스럽게 느껴져 눈을 감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고 애초에 누군가에게 이런식의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될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가정도 해본 적 없는 이 상황은 참 당황스러우면서도 떠날 시간이 빠르게 왔으면 했다.

감정이라는 게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 위에 그린 그림을 문지르는 것처럼 바로 없애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이대로 용사가 자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원한다.

머리 좋은 용사라면 금방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감정을 처음 겪는 용사라면 이대로 흘러갈 것이다. 감정을 처음 겪는 용사가 우세하길 원한다.

 

 

 

“...드디어 완성했군.”

 

이번에 온 비 때문에 무너지는 영역이 넓어질 게 분명해 모두가 최대한의 속도를 낸 결과였다. 급하게 마무리가 되어서 어디 오류가 날 부분이 있나 검사 및 시험차 마력을 불어넣으니 다행히 마법진은 멀쩡하게 작동했다. 다만 마력을 기존에 계산한 것보다 더 불어넣어야했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선 내였다.

 

모두 필요한 짐들을 챙기고 한 가운데로 모이세요!”

 

마을 자체를 옮기는 거지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가장 안전한 마법진 가운데로 마을 마법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미리 짐을 준비한 마법사들은 빠른 시간내에 모두 모였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당신은 제가 본 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냉정하고 매정해요.”

 

갈색머리 마법사가 용사의 감정을 눈치챈 건지 가운데로 가기 전에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담 내 행동 이유도 눈치챘다는 거였다.

 

짐 챙기고 가운데로 가게.”

 

그렇지만 난 이에 대해 그와 얘기를 해야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선 긋고 밀어내고 떠나려고요?”

 

그럼 내가 용사에게 가서 자넨 날 좋아하네라고 말해야하나?”

 

적어도 밀어내는 이유는 말했어야죠.”

 

그게 그거 아닌가. 그리고 이유를 말하면? 그 다음엔 내가 같은 감정이 될 일은 절대 없을테니 헛짓 그만하고 당장 접으라고 할까, 아님 같은 감정이 될 순 없지만 친분을 쌓는 건 괜찮다는 겉치레를 해야하나?”

 

화를 담아 쏘아보던 얼굴이 바로 아연해졌다. 과하게 말하긴 했지만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서 상대가 납득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오히려 감정을 이해해달라는 말만 돌아올 게 훤했고 애초에 난 부드럽게 말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상황이 굉장히 피곤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한 몫했다.

 

“...정도 안 쌓여요? 아니 아예 없어요?”

 

귀찮은 걸 제외하면 대화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연락을 주고 받을 생각은 없지만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인사를 하고 나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눌 정도라고 생각했다.

 

없네.”

 

감정이 섞여드는 건 매우 피곤했다. 결국 인사도 나누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가는 걸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를 붙잡는 손이 또 있었다.

 

용사님이 책을 두고 가셨어요.”

 

그동안 매일 책을 들고오다시피 했던 용사가 쉼터에 책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내가 일하는 걸 구경하러 왔을 용사가 다시 가져갔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마법진이 완성된 오늘, 용사는 공중부양 마법만 유지시키기만 하고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법진에서 떠날 수 없는 마을 마법사인 쉼터의 주인은 용사를 찾아갈 수 없었다.

 

전해주겠습니다.”

 

상황을 납득하고 책을 받아들었다. 쉼터의 주인도 가운데로 가는 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모두 위치로!”

각자의 위치로 가서 선 후 마력을 흘려넣자 마법진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이 한순간에 마법진의 가운데로 집중됐다. 저 안쪽에서 불안함과 신기함이 섞인 웅성거림이 얼핏 들렸지만 곧바로 사라졌다. 흩뿌려놓은 고운 가루들이 바람에 따라 흘러사라지듯 기척들과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두 다 사라진 후 일제히 손을 모아 박수를 한 번 치는 걸로 이주가 완료됐다.

 

어으! 드디어 끝났네!”

 

요 마법진은 우짤거예요? 다 뿌수고 가야하나?”

 

냅둬도 땅이랑 같이 무너질테니까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용도를 다 한 마법진의 처분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한 가운데 나는 GM을 찾았다. 용사에게 책을 돌려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얘기했다.

 

고백받으러 가는 건감?”

 

“...방금 책을 돌려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그렇게 비장햌!”

 

이대로 붙잡혀서 놀림받으면 끝이 없겠단 생각에 바로 갔다오겠다 말한 후 숲으로 들어갔다. 여러번 왔다갔다했던 숲이지만 이번엔 용사가 잔상현상을 보여주기 위해 데려왔을 때를 빼곤 들어온 적이 없었다. 상황도 두 번째로 숲에 발을 딛을 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용사의 집에 도착한 나는 다섯 번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손에 든 책을 다시 제대로 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용사의 수작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같은 방법으로 두 번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용사는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너는 책 읽는 걸 좋아하지. 내가 아는 건 그것밖에 없고.”

 

빽빽하게 꽂힌 책들 중 딱 하나 비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용사는 그 옆에 서서 빈 부분을 손가락으로 딱딱 두드렸다.

 

너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넌 기회 자체를 주지 않지.”

 

일부러 책을 두고 가서 나를 오게 만든 용사는 상대적으로 자주 쓰지 않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말투를 쓰고 있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추가됐다.

 

나와 얘기 좀 해보지 않겠어?”

 

지금 나를 오게 만든 용사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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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다 했어?”

 

다 했네.”

 

가자.”

 

그 전에 이거 받게.”

 

털어내기 힘들 정도로 진흙이 묻을 수 있으니 새로운 신발들을 챙겨왔다. 용사의 발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거라는 생각에 한 켤레를 건넸다.

 

이건...”

 

진흙 묻은 신발로 돌아올 순 없잖나. 혹시 크기가 안 맞나?”

 

받아든 신발을 보던 용사는 고개를 저으며 맞을 것 같다고 했다. 마땅히 넣어놓을 주머니가 없었는지 용사는 신발을 손에 쥔 채 앞장섰다. 주머니에 넣어놓고 돌아올 때 꺼내줄까 물어봤지만 용사는 들고 있어도 상관없다며 거절했다.

용사가 앞장서서 도착한 곳은 용사의 집이 있는 바로 그 숲이었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력이 고이는 현상 말고 다른 현상도 있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숲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용사의 발이 멈추고 드디어 도착한 장소는 이미 본 적 있는 장소였다.

 

여긴 바다꽃밭 아닌가?”

 

커다란 비달팽이를 용사가 해결하고 나는 흩어진 책들과 깔아놓은 지뢰들을 수거했던 그 날, 씨앗을 뿌렸던 그 바다꽃밭이었다. 이미 씨앗과 꽃잎을 날린 바다꽃들은 줄기만 남은지 오래였다. 용사는 그 줄기를 두 개 꺾어 하나는 나에게 건넸다.

 

절대 놓으면 안 돼.”

 

뭐라 묻기도 전에 줄기를 쥐자마자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밤이 된 것처럼 주위가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내 손에 있던 줄기는 어느새 활짝 핀 바다꽃이 되어있었고 주위로 꽃잎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리고 있는 비는 현실이었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환상이었다.

 

잔상이군.”

 

간혹가다 그 장소 자체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잔상으로 남아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영상구처럼 재생되는 현상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신기했고 그 아래에 바다꽃들이 있으니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불어와 바다꽃잎들이 저번에 봤을 때처럼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밤에 씨앗을 뿌리는 건 꽤 보기 힘든 광경인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예쁘지?”

 

자넨 왜 그렇게 예쁜 걸 묻나?”

 

예쁜 걸 보여주는 게 가장 좋다고 들었어.”

 

“...아름다운 광경이네. 만족하나?”

 

내 대답을 들은 용사는 입만 보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본 나는 문득 예전과 아까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부터 좋아했어요.”

 

사실 그리 감정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얼굴과 행동에서 보이는 감정은 알아보고, 일부러 덮어서 감추는 감정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덮어두어도 잘 보일 정도로 새어나오는 게 있다고 하지만 그걸 눈치챌만큼 길게 얘기해본 마법사가 없었다. 그 때까지는.

 

좋아해요.”

 

하물며 향하는 방향이 내 쪽이 아니었으니 더욱 모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말도 이젠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다행이네. 넌 예쁘다고 느끼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이라는 잔상으로 비구름이 가려졌다 해도 이렇게 비가 직접 내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데 그보다 더 작은 안경을 핑계삼다니 참 우스웠다.

GM이 왜 그 둘에게 열심히라고 했는지, 왜 그 둘이 그렇게 기행과 의미모를 말들을 꺼내고 다녔는지 이제 제대로 알게됐다.

 

갈색머리 마법사는 쉼터의 주인을 좋아한다.

용사는 나를 좋아한다.

둘 다 똑같이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전했다.

이제 다른 점은 갈색머리 마법사는 본인의 감정을 자각을 했고 용사는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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