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리는 전서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아니카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전서구는 궁시렁거리다가 뒷마당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표정을 풀며 지붕 위로 날아올라가 앉았다. 제법 쨍쨍하지만 냉기 덕분에 덥게 느껴지지 않는 햇빛을 받으며 조금 졸고 있던 전서구는 문 열리는 소리에 퍼뜩 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퍼블리의 머리와 짐을 조금 챙겼는지 저번보단 조금 가벼워 보이는 짐가방이 전서구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짐을 들고 있는 게 퍼블리 뿐만이 아니었다.

“...넌 왜 메고 있냐?”

나도 갈 거니까.”
어디를?”
바깥을.”

“...누구랑 어떻게?”

퍼블리랑 당신을 타고.”
그 말 뒤로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아니카의 말에 전서구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등에 태우는데 한 번에 태우는 게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무슨 상관인가 애써 자기 자신을 위한 위로를 빙자한 포기를 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햇빛은 정말 쨍쨍했다.

자자 얼른 수그리세요.”
한숨과 함께 몸을 숙인 전서구의 위로 올라탄 아니카는 생각보다 부드럽다는 평을 남기며 자세를 잡았다. 퍼블리도 그 옆에 올라타며 미안하고 고맙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퍼블리까지 제대로 자세를 잡자 전서구가 날개를 퍼덕이며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광경 진짜 끝내주네~”

하늘에서 마녀왕국을 내려다본 아니카의 감상이었다. 집들이 엄지손톱보다 작게 보이고 집들보다 작은 마녀들은 안 보일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길거리로 나온 마녀들이 굉장히 많아 집들 사이로 다양한 색상들이 옹기종기 뭉쳐서 신비롭고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퍼블리는 이미 한 번 본 광경이었지만 역시 두 번 봐도 눈을 떼기 힘들었는지 아니카와 함께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데?”
...아직 안 정했는데...”
뭐여?!”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불만과 잔소리가 곧장 튀어나왔다. 퍼블리는 미안해하며 어디로 갈지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는 머리를 쥐어짜내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니카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아래의 광경을 눈에 담아두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이씨! 일단 왕국이나 벗어나야겠다! 등이랑 날개 아파서 죽겠네!!”

그렇게 투덜거린 전서구는 왕국과 바깥을 나누는 벽 너머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아래를 계속 내려다보던 아니카의 눈에 들어오는 건 이제 녹색 가득한 세상이었다. 퍼블리도 새삼 신기해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것도 잠시, 저 아래에서 무언가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날카로운 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웜머?”
아직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전서구의 의문 섞인 감탄을 시작으로 곧이어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잔뜩 쏘아져 올라오고 있었다.

웜매나?! 이게 뭣이여?! 뭣이냐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맞으면 단순히 아야하는 수준이 아닐 거라고 경고하듯 위협적이게 번쩍이며 저 아래에서부터 잔뜩 날아올라오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비행하는 전서구는 스치면서 제 깃털들을 뽑아대는 가시들에 비명과 함께 알 수 없는 말들을 섞어 꺼내며 혼란에 빠졌다. 정체불명의 가시 공격들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급하게 멈추고 돌고 위로 솟고 아래로 바로 내려가는 걸 반복하다보니 전서구의 등에 있던 퍼블리와 아니카는 타고 있는 게 아닌 매달려서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아니카!! 저거 뭔지 알고 있어?!”
제대로는 몰라도 딱 보면 원거리계 최상위 마법 중 하나인 것 같아!!”
저거 어떻게 막는 방법 없어!?”
방어막 마법 쓸 테니까 마력 쏟아 부어!!!”
전서구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순간적으로 안정적으로 있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을 때 그 틈을 타 아니카가 마법을 사용했고 퍼블리가 마력을 쏟아 부었다. 급하게 만들었지만 제법 튼튼한 방어막이 완성됐고 날아오는 가시들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두 마녀와 비둘기는 안심했다.

뭐야? 누가 공격하는 거야?!”

누구 원한 삼을 만한 일 한 마녀와 비둘기~?”
있을 리가!!”

하지만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일까, 순간 모든 세상이 빛나듯 눈앞이 번쩍이며 방어막이 깨졌다. 그 반동으로 흔들린 전서구 위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한 아니카가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자세를 낮춰서 손에 닿는 깃털들을 꽉 쥐었다. 하지만 퍼블리는 아니었다.

퍼블리!!!”
갑자기 가벼워진 제 등에 기겁한 전서구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퍼블리가 아직 눈이 부신지 눈을 감은 채 떨어지고 있었다. 전서구가 급강하를 하며 퍼블리를 향했고 다시 시야를 회복한 아니카가 바람을 잔뜩 맞으며 몸을 일으켰다.

얼른 잡아, 얼른!!”
퍼블리는 등을 마구 때리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전서구와 아니카가 굉장히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향해 내려오고 아니카가 손을 뻗는 게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느껴졌다. 마주 손을 뻗는데 제 손도 마찬가지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손들이 서로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엇갈리고 있던 그 순간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이며 시야를 빼앗았다.

다가올 아픔에 전서구와 아니카는 눈을 꽉 감았지만 그들을 때리는 건 아래로 급격히 내려가면서 맞게 되는 바람 외엔 없었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풀밭이었다. 전서구가 당황하며 급하게 멈추자 아니카는 저마저도 튕겨져 나가려는 걸 간신히 버텨냈고 다행히 전서구는 부딪히기 전에 멈췄다.

퍼블리는?!”
정신을 차린 아니카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퍼블리는 보이지 않았다. 잡지 못했으니 분명 풀밭으로 떨어졌을 텐데 보이는 건 온통 녹색 가득한 풀뿐이었다. 공중에서 피하고 급하게 내려오고, 멈추고를 반복해서 지쳐버린 전서구는 그대로 풀밭 위로 쓰러지듯 내려왔다.

퍼블리...? 퍼블리!!”

전서구의 등에서 내린 아니카는 큰 목소리로 퍼블리를 부르며 찾기 시작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가올 아픔에 대비해 눈을 꼭 감았건만 아픔은커녕 이상하게 방금전까지 잔뜩 맞고 있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아 의아해진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보이는 건 하늘이었고 고개를 눈을 옆으로 돌렸더니 풀밭이었다. 하지만 땅을 딛는 감각은 없었다.

괜찮으세요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어딘가 본 듯한 보라색 머리 마녀가 걱정스럽게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곰곰이 생각하던 퍼블리는 그 마녀가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신성지대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퍼블리를 도우러 왔던 왕궁 마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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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라는 말에 주변의 모든 마녀들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곧이어 마녀들은 진짜 공주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 섞인 행사인가 추측하며 의견이 분분해졌다. 퍼블리와 아니카는 아무 말도 못했는데 그 목소리가 진짜 메르시라는 걸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진실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의아해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진 않았다. 다만 메르시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예상보다 그림이 너무 컸다는 게 문제였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렇게 목소리를 전달할까 정말 공주가 맞을까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거기다가 하늘까지 깨져있으니 이제 무슨 일인가 많이 혼란스럽죠?]

그 말에 모든 마녀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마녀들이 지금 가장 궁금해 하고 있을 것들을 톡톡 짚은 메르시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전하지 않다가 다시금 소란스러워질 때쯤 말을 전달했다.

[...뭐부터 말을 할지 좀 고민해봤어요. 모든 게 워낙 긴 얘기가 될 것 같고 시간이 얼마 없어서요. 우선 제가 왜 그동안 모습도 안 보이고 이렇게 목소리도 안 냈는지에 대해 얘기할게요. 저는 밸러니를 쓰러뜨릴 때 그러니까...지금은 그 날을 정화의 날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아무튼 그 날에 저주를 받고 얼마 전 하늘이 깨질 때까지 잠들어있었어요.]

그 말에 마녀들은 이번엔 다른 이유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퍼블리와 아니카는 궁금한 점을 짚어서 전달했을 때부터 메르시가 진실을 알리려는 걸 눈치 채고 마녀들 사이를 빠져나오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때 밸러니의 숲으로 들어갔던 마녀와 마법사들은 전부 저주에 걸렸어요. 그런 저주들 사이에 오히려 제 저주는 약한 편이었어요.]

약한 편이었다는 저주에 순간 퍼블리가 멈췄다. 제 옆이 텅 비어있어 돌아본 아니카가 왜 그러냐는 말을 꺼내기 전에 신발에 돌이 들어갔다고 한 퍼블리가 발을 한 차례 탁탁 구르며 다시 옆으로 갔다.

“...약한 편이었다고?”
퍼블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최근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게 약한 저주였다고 메르시가 말했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건 천진난만하게 놀고 슬픈 기색 없이 배 위에서 살아가던 흑기사단이었다. 확실히 산 채로 몸이 썩어가던 그들에 비해선 저주가 약해보인다고 할 수 있었지만 보기엔 메르시보다 더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멀리 볼 것 없이 신성지대에서 봤던 이들이 그랬다.

[일어나보니 왕국이 이렇게 커져있는 게 정말 놀라웠어요. 물론 제가 그동안 잠들어있었으니 왕궁에 있는 마녀 분들께서 해낸 일이죠. 지금 하늘이 깨져있는 건...저주와 조금 관련이 있는데 제 마력이 저주를 받은 이후론 변형이 많이 되고 상당히 증폭됐어요. 그 마력으로 만든 게 바로 저 하늘이 깨진 것처럼 보일정도로 투명한 결계인데 제가 깨어나고 마력이 다시 저한테로 돌아와서 저렇게 된 거예요. 지금 이렇게 모두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엄청난 말을 책에 있는 내용 말하는 듯이 담담하게 말하는 어투에 듣고 있던 마녀들은 자기들이 과연 뭘 들었나 싶은 표정이었다. 퍼블리는 어쩐지 하하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겨우 막고 고개를 푹 숙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 웃음 속에 담길 건 여러 가지가 가득 담긴 허탈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진짜 공주인지 모두들 모르는데다가 섣불리 믿지 못할 거예요.]

그 말과 함께 모든 게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녀들이 불안해 하며 옆에 있는 일행의 손과 팔을 잡거나 주변 건물 벽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메르시의 말과 함께 흔들림은 멈췄다.

[하지만 그동안에 이뤄진 건 제가 이룬 것도 아닌데다가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이뤄진 거니 사실 이제 공주는 있을 필요가 없어요.]

한차례 말을 멈춘 메르시가 다시 전한다.

[저희의 세대와 이야기는 이미 예전에 모두 끝났고 전 이제 제가 가야할 곳으로 가요.]

메르시의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와 동시에 금 갔던 하늘이 완전히 깨지고 소리 없는 충격이 그 아래에 있던 모든 마녀들에게 퍼졌다.

순간 어지러움에 휘청거리는 퍼블리를 아니카가 잡아줬지만 아니카도 어지러운 건 마찬가지였으니 결국 둘 다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어우..따거...”
바로 집이 코앞이었는데!”

바로 집 앞에서 넘어진 걸 통탄한 둘은 쓸리고 흙이 묻은 무릎과 손을 탁탁 털어내며 일어섰다. 하지만 들어가기도 전에 둘의 머리위에서 푸드덕 날갯짓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가볍게 퍼블리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어우 날개아파! 드디어 찾았네!”

퍼블리가 위를 바라보니 머리 위에 닿았던 게 떨어지고 짙은 파란색과 보라색이 섞여 시야를 가렸다. 부들부들한 감촉에 손을 들어 치워보니 커다란 비둘기 깃털이 눈가를 간질이고 치운 게 무색하게 바로 보이는 건 마찬가지로 짙은 파란색과 보라색이 눈앞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난 우체부지 탑승용 비둘기가 아니라고! 그 성격 더러운 마법사도 그렇고, 할배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공주도 그렇고!”
다다닥 쏘아붙이는 익숙한 말투에 퍼블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바로 이젠 웃기까지 한다며 세상 서러워서 살기 슬프다는 푸념이 바로 튀어나온다. 커다란 덩치와 날개를 이리저리 파닥이며 오두방정을 떠는 비둘기는 어제 하루 종일 하늘을 날아다닌 전서구였다. 퍼블리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희번덕거리는 전서구와 겨우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럼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공주님이 너도 모시고 왕국 나오란다! 네가 가고 싶은 데로 데려다주란다!!”

그리고는 탈거면 빨리 올라타라고 몸을 웅크리듯 숙인다. 그에 퍼블리가 반사적으로 올라타려고 하자 아니카가 잡아 세웠다.

맨몸으로 나가게?”
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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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괜찮아?”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니카를 반기는 건 팔에서부터 시작된 근육통이었다. 하루 종일 들고 다닌 것도 모자라 비록 나눴다고는 하지만 바구니를 꽤 채울 정도의 빵들을 집까지 들고 오느라 평소보다 팔을 많이 쓰는 바람에 팔 근육이 무리를 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아니카의 팔을 주물러주기까지 하는 퍼블리는 굉장히 쌩쌩해 보였다. 매일 근육이라며 놀리듯이 불렀지만 정말 제 친구는 온 몸이 근육인 게 아닌가 싶어 묘한 눈으로 바라보니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챘는지 퍼블리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어머 우리 근육이 눈치가 정말 많~이 늘었네?”
눈치고 뭐고 간에 방금 전처럼 매일 근육이라고 부르면서.”

투덜거리던 퍼블리는 그렇게 말하곤 근육통이 난 팔을 주물러주는 걸 멈추고 부엌으로 갔다. 아니카는 다시 그대로 누우면서 방문을 넘는 퍼블리를 향해 외쳤다.

얼음 동동 띄워서!”
눈을 감은 아니카의 귀에 곧이어 물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꽤 길어지는 소리에 퍼블리가 얼음을 가득 담아오려나 싶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물소리는 진즉에 끊겼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번엔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깜짝 놀란 아니카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니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물건들이 흔들리는 걸 보게 됐다. 으악!하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퍼블리가 넘어지고 컵이 깨진 듯 했다. 아니카는 저러다가 다치겠구나 싶어 얼른 일어나 가보고 싶었지만 흔들림이 꽤나 심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애써 다칠 각오를 무릅쓰고 일어났건만 제대로 다 일어서기도 전에 흔들림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틈에 아니카는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갔다.

퍼블리! 괜찮아? 안 찔렸어?”
난 멀쩡해!”

퍼블리는 다친 데가 없어보였지만 바닥은 멀쩡하지 않았다. 컵이 깨져있는 건 당연했고 물통도 함께 쏟아졌는지 바닥이 온통 물바다였다. 크게 흔들린 거에 비해선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들이 퍼블리가 들고 있던 컵과 물통뿐이었고 그 외의 물건들은 전부 멀쩡했다. 아니카는 안도와 심란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고 깨진 파편들을 줍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물을 닦기 위해 햇빛 드는 창가에다 널어놓은 빨래들로 다가가 걸레를 집어들고 부엌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창밖을 보기 전까진.

..아니카!! 하늘이 깨졌어!!”
으음? 또 깨졌어? 왕궁 쪽에서도 한 번 깨지니 관리하기 힘들었나보네? 아님 축제라서 놀다가 방심했나? 조만간 또 수리하겠네~”

아니 그게 깨진 게 저번처럼 깨진 게 아니고 하늘이 완전히 부서질 기세야! 하늘이 온통 쩍쩍 금이 갔다고!”

퍼블리의 호들갑에 얼추 다 주운 파편들을 쓰레기통에 넣은 아니카는 곧바로 퍼블리 옆으로 가서 창밖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런 미친.”
퍼블리는 호들갑을 떤 게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고 사실만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지금 하늘의 상태는 꽤나 심각했다. 용케 구멍은 안 뚫렸지만 쩍쩍 갈라진 금이 온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의 매끈한 부분이란 거의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겨우 남아있었다. 저것들이 완전히 깨져서 구멍이 뚫리면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푸른색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아슬아슬했다. 저 상황을 목격한 건 둘 뿐만이 아니었는지 집 안에 있었던 마녀들이 밖으로 나와 직접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고 있었다.

뭔 일이야?!”
미친! 하늘이 깨졌어!!”

종말이야? 종말인 거야?!”

안 돼애애애애!!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많다고오오오!!!”
상대적으로 더 날뛰는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퍼블리와 아니카는 금방 진정했다. 우선 집에 그대로 있을 건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자세히 살펴볼지 고민하다가 가위바위보로 퍼블리가 이기면 밖으로 나가고 아니카가 이기면 그대로 집에 있기로 결정했다. 이긴 건 퍼블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어.”

복잡한 건 물론이고 오늘은 원래 축제 둘째 날이었다. 첫날보다 더 돌아다니는 마녀들이 많고 행사가 다양한 날이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지니 온 거리가 혼란스러운 건 당연했으니 길거리가 복잡한 걸 넘어서 단체적인 난동수준인 건 예상한 바였다. 결국 둘은 마녀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런 곳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둘이 있었던 집 안 외에는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늘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고 마녀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계속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순간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마녀들이 그대로 굳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귀로 들린 게 아닌 머릿속에서 울렸고 혹시 자신한테만 들렸나 싶어 힐끔거리며 옆에 있는 마녀를 보는 마녀들부터 너도 들었냐며 같은 일행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마녀들까지 조금씩 나타나고 움직이며 곧이어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이로써 한 마녀만이 아닌, 적어도 밖으로 나온 모든 마녀들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목소리 전달 마법을 한 마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목소리를 들은 마녀들은 모두 놀라워하거나 감탄했다.

[아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오랜만에 써보거든요. 혹시 들리나요?]

그 말에 마녀들은 마법을 쓴 당사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어찌해야하나 눈만 굴리고 있거나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계속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확인하던 목소리는 난감한지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들려요!”
그러다가 한 마녀가 소리쳤고 그 마녀를 시작으로 하나둘 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마녀들이 소리치게 됐고 열 번쯤 반복했을까 드디어 닿았는지 이번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머금은 어린 마녀의 목소리에 몇몇 마녀들은 미소를 지었지만 다른 마녀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게 단순한 마법이라도 이렇게 다수에게 거는 건 어른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목소리의 주인이 궁금증을 풀어주듯 바로 말을 전달한다.

[그럼 이제 제 소개를 할게요. 제 이름은 메르시, 이 왕국의 공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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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마녀들이 퍼블리 앞을 지나가면서 시야를 가린 덕에 그대로 잘못 본 거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녀들 사이 틈을 비집고 다가가보니 메르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똑바로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 바로 다가선 퍼블리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메르시를 보고 있었을 뿐이고 메르시는 그저 웃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쪽은 태평하고 한쪽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시선교환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니카는 결국 가까이 다가와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리 근육이 새로운 친구 있었구나? 그래서 누구야? 얼른 새 친구 소개시켜줘.”
하지만 질문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카에게 공주에 대해 얘기는 했었지만 그 공주가 어떻게 생겼느냐 공주의 이름이 무엇이냐 세세하게 말하진 않았었다. 지금 아니카가 공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자기들보다 더 어리고 계속 잠들어있어서 더 자라지 않은 어린 마녀라는 거 외엔 없었다. 그렇다고 길 한복판에서 공주라고 속삭이면 되지 않을까 해도 당사자인 메르시가 섣불리 다른 마녀에게 제 정체를 밝혀도 된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어쩌다 알게 됐다고 얼버무리기엔 어쩐지 미안했고 눈치 빠른 아니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퍼블리보다 메르시가 한 발 더 빨랐다.

저는 메르시예요. 저번에 퍼블리 언니가 저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왔어요.”
아니카는 그렇구나 하고 얌전히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여기 다른 마녀가 있었다면 둘이 얘기 나누라고 물러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퍼블리는 깨달았다. 돌아보자 바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니카와 짧은 시선교환을 나눴다.

눈치 챘구나.

눈치 챘어.

다시 메르시를 본 퍼블리는 무릎을 살짝 굽혀 메르시와 눈을 마주했다. 메르시는 바로 퍼블리에게 다가가 새어나가 누군가가 들을까 바로 손을 모아 작게 속삭였다.

찾다가 지치면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요. 어쩌면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르거든요.”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메르시는 바로 뒤돌아 마녀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릎을 다시 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보고 있던 퍼블리의 정신을 되돌린 건 어깨를 툭툭 두드린 아니카였다.

그래서 뭐래?”
피리가 비밀상자 열쇠래.”
다시금 몰려오는 마녀들의 물결에 퍼블리와 아니카는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 빵을 만든 마녀들이 바구니채로 나눠주는 빵들을 받아들었다. 빵을 하나 꺼내 먹던 아니카는 저기 마녀들이 빵을 받고 있네라는 어투로 말을 꺼낸다.

공주님이 큰 그림 그리고 있었던 걸로 다시 잠들었나 아님 탈출했나 궁금했던 건 해결됐네.”

물론 그 큰 그림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퍼블리는 대답 대신 빵에 입을 넣었다. 아니카도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퍼블리가 다섯 번째 내밀어지는 빵바구니를 거절할 때쯤 머리 위에서 크게 푸드덕 날갯짓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까 하늘에서 봤던 전서구가 이번엔 반대편으로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퍼블리는 새삼 저렇게 바쁜 비둘기를 붙잡아서 태워달라고 했구나 싶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편지길래 축제 때에도 저렇게 바쁠까?”
축제라서 더 바쁜 거 아닐까?”

축제는 작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기묘한 묘기를 선보이는 마녀들과 날아드는 비둘기들. 저 한구석에선 색깔열매를 이용해서 구운 빵들이 눈길을 끌고 있었는데 저마다 화려한 색을 자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지개 빵이었다. 화사하고 화려해서 그 길을 지나가던 많은 마녀들이 무지개 빵을 집어 들었지만 퍼블리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다.

자꾸 얘기 꺼내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그래서 왜 추억이 빵인지 혹시 이유 알아냈어?”
때마침 빵을 넘기던 퍼블리는 그대로 사레가 들릴 뻔 했다. 함께 빵파티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 흑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장소가 장미정원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카가 주는 사과주스로 겨우겨우 진정한 퍼블리는 그대로 말해줬다.

근데 오히려 반대일 것 같은데?”
반대?”

원래 집 앞마당이었는데 가져오는 장미들 둘 데가 없어서 장미정원이 거기까지 넓어진 거 아냐?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장미를 모았다고 선언한 게 50년이 안 지났어.”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공주는 물론이고 다른 얘기들도 꺼내지 않았다. 여전히 바쁘게 날아다니는 전서구가 그림자로 제 존재감을 여러 번 드러냈지만 둘은 그 때마다 올려다보고 동시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대회에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기로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그랬듯이

비둘기판이네.”
깃털 떨어진다~!”

대회용으로 나온 빵들에 날아드는 비둘기무리와 그런 비둘기들을 손을 흔들어대며 내쫓는 만든 마녀들, 그리고 역시나 하면서 웃음 반 진부함 반에 뒤를 도는 관객들. 진행자는 이제 포기했는지 비둘기들도 이렇게 날뛰는 빵들이라며 빵의 위험성이라는 농담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 광경들을 옥수수 튀긴 것 대신 빵을 씹으며 구경하고 있던 퍼블리와 아니카는 폭신하고 매끈한 감촉이 아닌 까끌까끌한 감촉에 손을 바라봤다. 어느새 바구니는 텅 비어있었다.

더 받으러 갈까?”
아니카는 여전히 바구니째 나눠주는 마녀들을 가리키며 물었고 퍼블리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견과류나 옥수수가 박혀있는 빵들을 받아온 아니카는 마실 것도 찾으러 가자며 앞장섰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술을 내놓는 곳은 없었고 음료수는 꽤나 다양했다.

새삼 생각했는데 그 많은 추억 중에 빵파티가 뽑힌 건 역시 첫째 날은 잔뜩 먹어서 남은 축제를 버티라는 거 아닐까?”
가장 설득력 높네.”
그렇게 해가 지기 전까지 둘은 돌아다니면서 먹고 구경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 둘은 남은 빵을 나눠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퍼블리는 오늘 축제가 재밌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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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하고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귀를 통해 직접 듣는 것도 새삼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런 짓을 한 마녀들이 잘못한 거지 그 결과로 태어난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아니카는 여전히 달고 다니는 웃음을 내리지 않는 걸 보면 퍼블리와는 반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데에 확신을 가까이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퍼블리가 의아해 하며 물어보니

장미정원을 만들 때 왕국의 모든 마녀들이 장미를 모으는데 동참했거든. 그 때 우리 엄마도 당연히 참여했었고 장미 찾아다니느라 눈알 빠지고 허리 휘는 줄 알았다며 그 때 생각만 하면 아득해진다고 엄청 뭐라 그러시더라.”
요컨대 장미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면 반대와 비난은 꾸준히 받아도 밀어붙였을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장미를 모은다는 얘기도 나중으로 미뤄져서 지금의 장미정원이 없었을 거라고 덧붙이자 퍼블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장미는 이제 정원에서만 피어나니까 장미를 만들 이유는 더 이상 없기도 하지.”
그러니까 몸 편한 게 짱이라고?”
그렇지.”
이제 금방금방 이해하는 게 기특하다며 쓰다듬는 손길에 퍼블리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니카를 바라봤지만 손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퍼블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그 때 종이에 써져있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자연발생하는 장미를 전부 모으는 건 어렵기 때문에 장미를 만들어 장미정원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일단 그런 종이가 있었던 걸 보면 연구는 진행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결국엔 자연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알아내고 대신해서 장미가 피어날 환경을 준비하기로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지금의 장미정원이다.

그럼 왜 그 계획이 적힌 종이가 공주 즉 메르시의 책상 서랍 안에 있었던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쓰다듬던 손으로 손가락을 딱딱 튕기는 아니카를 바라보던 퍼블리가 문득 말했다.

나 예전보다 생각을 엄청 많이 하게 됐어.”
그래.”
근데 이상하게 더 이상 안 나가는 경우가 많아.”
그건 아직 네가 몰라서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퍼블리는 조금 울고 싶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 모르는 걸 알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중인데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니.

일단 네 머릿속에서 굉장한 음모론이 펼쳐지고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일단 확실한 건...”
아니카는 이젠 좀 진짜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뭘 해도 비밀은 사라진 마법사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의 출생의 비밀부터 약새풀까지. 무언가 감춰져있던 비밀이 터지면 모든 진실은 마법사가 감추고 있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바로 제 자식인 퍼블리한테까지. 자식의 친구이자 좀 멀게 따지자면 생판 남인 아니카까지도 이쯤 되면 궁금해 미칠 지경에 도달했다.

너희 아빠는 진짜 세상의 모든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근육이 진짜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네, 마음고생 많았어~ 근데 지금도 마음고생을 하고 앞으로도 고생길 훤한 걸 보면 내가 다 마음이 아파~”
그렇게 말하곤 아예 팔을 어깨에 두르며 끌어안을 듯 했던 아니카는 이내 덥다고 하며 바로 떨어졌다. 그런 아니카 덕분에 작게 웃음이 터진 퍼블리는 밀려드는 생각들을 덮어뒀다.

일단 학교를 졸업하면 아빠를 꼭 찾으러 나갈 거니까 이번 축제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 없이 너랑 즐길게. 요즘 너무 나 혼자 생각이랑 고민만 하고 있었으니까 많이 미안했어.”

나는 우리 근육이가 성장한 것 같아서 기뻤는데? 근데 우리 축제 생각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날 퍼블리와 아니카는 아니카의 어머니에게 강화마법을 부탁하러 갈까 아님 약새풀을 캐서 옷에 넣고 다닐까 해가 질 때까지 함께 고민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천천히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던 축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작년 축제 때 보존마법을 걸어놓은 빵은 우스갯소리로 내년 축제 때까지 남아있을 양이라고 말했었지만 이번 여름 때까지 한 바구니는 더 남아서 진짜가 되어버릴 뻔했다. 왕국 밖으로 나갈 때 조금 챙겨간 거 외엔 전부 다 그대로 두고 왔었던 데다 생각보다 오래 집을 비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마법사의 보존 마법이었다.

어쩐지 아깝네~ 진짜 1년 찍는 건가 궁금했는데.”
이번 여름에 같이 살게 된 아니카 덕분에 빵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고 축제 첫째 날 3주 전에 바구니의 안쪽 끝을 보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먹어서 1년 채워볼 걸 그랬나?”

그러면 난 첫째 날을 안 즐겼을 거야...”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하지만 퍼블리는 알고 있었다. 말 속에 아쉬움이 담겨있고 아쉬움 속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가늘게 뜬 퍼블리의 눈을 마주하는 아니카의 웃음은 매우 당당했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기는 자는 당당한 자였다.

축제 첫째 날은 언제나 그랬듯이 갓 구운 빵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마녀들 손에 잔뜩 들려있는 건 물론이고 빵으로 예술을 펼치는 자들도 걷다보면 계속 보일 정도였다.

저기 익숙한 비둘기네.”
마녀 하나는 거뜬히 태울 정도로 커다란 비둘기. 끝끝내 태우길 거부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퍼블리를 태우고 왕국으로 돌아왔던 전서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흔들며 전서구를 불렀지만 듣지 못했는지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에 머쓱해진 퍼블리는 손을 도로 내렸다.

작년에는 축제를 즐기더니 올해는 축제 때에도 바쁜가봐?”

그러게...”
손가락 하나로 가려질 만큼 멀리 날아간 전서구를 보던 퍼블리는 지나가던 마녀가 자신과 어깨를 부딪히는 걸 보고 길을 막고 있었구나 싶어 아니카와 함께 옆으로 비켜나려고 고개를 다시 돌리다가 길 건너편의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튀어나온 갈색 앞머리가 인상적인 어린 마녀.

메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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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 장미를 만든다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아니카는 이상한 걸 들었다는 얼굴로 퍼블리를 쳐다봤다.
어떻게 생각하고 뭐고를 떠나 그건 불가능한 거 아냐? 장미들은 자연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고 그나마 피어날 환경을 만든 게 바로 그 유명한 장미정원이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만들 수 있다면?”

퍼블 리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아니카는 눈을 마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려는 건지 신중한 표정을 한 채 느릿하게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같은 반 학생들의 얘기소리가 한층 더 소란스러웠을 즈음에 입을 열었다.

, 너희들 성적표 다 받았지? 망한 애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울고불고 하지 말고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은 축제나 준비하고 있어라.”

공교롭게도 그 순간 저 말과 함께 들어온 선생에 의해 대답은 나오지도 못했다. 아니카는 다음에 얘기하자며 몸을 앞으로 돌렸고 다음 쉬는 시간에는 선생의 수업을 빙자한 축제 얘기 때문에 까먹었는지 나온 말은 축제의 식물부에 관한 얘기였다.

얘네는 어째 해가 갈수록 기술이 늘어?”
이쯤 되면 왕국 기관에서 기술 연구하는 마녀들이 학생으로 위장한 거 아닐까?”
작년에 꽤나 여러모로 큰 파급을 가져다 준 식물부였다. 물론 가져다 준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직접 가서 말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학생들은 내심 식물부 애들이 빨리 홍보를 하러 왔으면 하는 마음에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소리지만 식물부 정말 인기 많네.”

인기야 늘 많았지.”
축제는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매일 새로운 걸 맞이하는 듯 한결같이 떠들썩한 반응이었다. 벌써부터 땅따먹기 신경전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학년이 올라가며 선도부에서 나온 아니카는 이제 제가 정리할 일 아니라고 숲 너머 모래바람 구경하듯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보고 있던 퍼블리는 말려야할까 말아야할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런 일들을 이미 예상했는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능숙하게 사태를 해결하는 선도부의 모습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올해 축제는 왠지 별로 기대가 안 돼.”
그 전부터도 넌 축제 자체는 별로 기대 안했었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들어올 때마다 성적 얘기를 하는 선생들을 몇 번 주목하고 나니 어느새 모든 수업이 끝나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학교를 나가기 전에 점심시간 때보다 햇빛이 더 환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보니 새삼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라고 생각한 퍼블리와 아니카는 그늘이 있는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운동장 끄트머리에 짙은 흙 위로 나무들이 일렬로 심어져 있었지만 그쪽으로 가면 운동장을 빙 돌아서 가야했다. 그렇게 운동장 한가운데와 나무그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하던 둘은 그냥 평소대로 한가운데를 쭉 가로지르기로 했다. 아무리 그늘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빙 돌아가는 건 역시 귀찮은 일이었다.

“...날씨가 정말 재앙인데?”
문제는 아직 시작이라는 거.”
하하 정말 살기 싫어지는 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학생들 몇몇은 결국 그늘이 있는 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벌써 더위를 먹었는지 점점 헛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학생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햇빛 아래 더위에서 떠들다간 금세 지쳐버릴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도중 드디어 집이 눈에 들어오자 둘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집에 가까이 가자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냉기가 둘을 반겼다.

으아, ! 으아, 사랑!”

저 하늘의 유리벽이 여기 더위를 가두는 게 틀림없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둘은 몰아치는 시원함에 무릎을 꿇었다. 냉기마법을 건 옷들이 다 소용이 없었다. 지금 둘에겐 시원함 그 자체인 집이 최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날씨가 이렇게 더운 건 이상해...이건 왕국이 망할 징조야.”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니카였지만 어차피 들을 마녀는 옆에 있는 퍼블리 밖에 없으니 거침없었다. 평소라면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말렸을 퍼블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바닥에 드러누워 시원함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이성을 빨리 되찾았는지 일어나서 방에 가방을 던져두던 아니카는 손을 씻은 후 부엌으로 가 익숙하게 얼음을 동동 띄운 물통을 꺼내 컵 두 개를 담갔다가 건져올렸다. 그리곤 아직까지 현관문 바로 앞바닥에 엎어져있는 퍼블리에게 컵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얼른 일어나서 손 씻어.”
그 전에 나 물 좀...”
씻은 다음에 줄 거야.”
그 말에 퍼블리는 냉큼 일어나 가방을 두고 손을 씻으러 갔다. 그 김에 세수도 했는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오던 퍼블리는 아니카가 건네는 컵을 받아들었다.

강화마법 할 줄 알아?”
할 줄 알았으면 오는 중에 진작 했을 거야.”

그럼 너희 어머니한테 부탁하러 가야겠다.”

가는 도중이 많이 괴롭겠지.”
냉기마법 강화에 대해 말하던 둘은 순식간에 컵을 다 비우고 부엌으로 가서 다시 물을 떠서 마셨다. 이제 제법 많이 여유를 되찾은 둘은 의자를 당겨 끌은 후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얼음을 와드득 씹어 먹던 아니카는 새가 하늘을 날아간다는 걸 말하는 어투로 먼저 말을 꺼낸다.

그래서 넌 만들어진 장미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
어쩐지 확신이 담겨있는 표정과 유리병의 파란 장미꽃잎을 떠올린 아니카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네가 확신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입 안에 남은 얼음조각들을 마저 씹어 넘긴 아니카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퍼블리와 눈을 마주했다.

만들려고 하는 자는 물론이고 그런 걸 생각한 자들도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 만들기 위해선 멀쩡히 있는 장미를 파헤쳐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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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지 다시 누운 마법사는 고개만 돌려 아직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여기 있는 모든 걸 부수고 밖으로 나갈까 싶었지만 힘이 쭉 빠진 몸이 바로 붙잡는다. 이곳에 갇힌 이후론 이젠 있었나 싶을 충동이 잠들었다 깨어나는 새에 점점 더 올라와 마법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중간에 정신이라도 잃었나 싶었지만 들어오는 햇빛은 아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왔나?”

저를 경계하긴 하지만 듣는 욕은 역시 괴롭죠.”

대답을 듣고 마법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부탁한 입장에서 할 말 치곤 이상하지만 괜찮으신가요?”
자네 말대로 이상한 말이군. 나쁘지 않은 부탁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가야할 곳이 괜찮지 않은 곳이니까요.”

다시 눈을 떠서 바라보니 굳어있는 순박한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차피 다시 가봤어야 했던 곳이네.”
“...당신은 참...대단하네요.”
감탄과 걱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가득 섞인 말을 들었을 때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단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끝냈겠지.”

터무니없는 자책 아닌 자책에 아난타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 때문에 찾아온 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쓸 여유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겹치네요.”
그럼 하루 당기지. 그리고...”
마법사가 오른손을 쥔 채 내밀자 아난타는 두 손을 모아 폈다. 마법사가 손을 놓자 둥글고 매끄러운 감촉이 굴러다닌다.

퍼블리에게 전해주게.”
놓았던 손이 물러가니 무지개 구슬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다양한 일들을 겪고 생각이 넓어지거나 강해지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학교의 시험은 그저 공부가 답이었다. 아무리 퍼블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양한 일들을 겪고 이겨내서 돌아와도 그건 학교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나빴던 성적 위로 빠진 수업에다 심란했던 마음까지 더하니 역대 최악의 결과가 퍼블리 앞으로 도착했다.

그래 우리 근육이~ 지금 어떤 심정이니?”
“...지금 내 손의 성적표가 대신 나타내주고 있어.”
마녀의 심정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잖니?”
하지만 성적표는 가능하지.”
내용은 슬프지만 가볍게 얘기하니 조금은 무거움을 덜은 퍼블리는 울면서 자유와 축제를 외치는 같은 반 학생들을 구경했다.

이제 축제가 진짜 얼마 안 남았네...”
그러게.”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그러게.”
그렇게 말하니 겨울과 봄에 있었던 일들이 실은 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끄럽고 재잘대는 커다란 비둘기를 만난 것도, 신성지대 감옥에 갇혔었던 것도, 몸이 썩어가지만 유쾌했던 흑기사단을 만난 것도, 장미정원의 작은 집에서 잠들어있던 공주 메르시를 만난 것도 전부 다 꿈이 아니었을까. 1년도 안 지난 일들이 1년이 다 되어가는 일보다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익숙해지기 싫었는데 익숙해졌나봐.”
그럴 땐 성적표를 봐.”
확실히 성적표에 적혀있는 결과는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어쩐지 다른 이유로 슬퍼진 퍼블리는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공주님은 어찌하실까~?”

어찌하다니? ?”
이번 축제 말야. 하늘 깨진 그 날에 네 얘기 들어보니 공주님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나는 물론 여기 왕국 살던 마녀들 머리가 좀 이상했다는 것도 일단 나랑 너는 다 알게 됐어. 그러면 이거 그동안 공주님 자고 있었을 왕국 안쪽 상황이 너무 뻔하지 않니?”
그래도 메르...공주님 편이 있을...”

퍼블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니카는 박수를 쳐서 순서를 가로챘다.

공주님이 잠든 게 단순히 1, 2년이 지난 게 아니야.”
자신들은 물론 여기 젊은 선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잠들었을 공주. 굳이 꽁꽁 싸맨 안쪽상황을 파헤쳐보지 않아도 아직까지 땅을 밟지 못한 채 배 위에서 잠든 공주를 생각하는 흑기사단이 모든 걸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히 나같으면 깨어난 후에 적절한 순간 노려서 왕국 밖으로 뛰쳐나갔을 거야.”

금 갔던 하늘은 하루가 지날수록 지우개로 검은 선들을 조금씩 지우듯이 사라지고 결국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깨끗해졌다. 그걸 발견한 아니카와 퍼블리는 같은 반 학생들을 붙잡고 몇십 년 째 어른도 왕도 되지 않는 공주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들은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채고 축제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역시 빨리 주변에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다면 왕궁 마녀들이 우리 얼굴 보러 왔겠지.”

결국 지금 알 수 있는 건 언제 하늘에 박혀있었는지 모를 투명한 결계랑 모순투성이 이야기와 잠들어 있던 공주가 관계되어있다는 거였고 결계가 다시 돌아간 걸 보면 최소한 공주는 깨어난 후에 왕국 밖을 떠나지 않았거나

공주님 너 가자마자 다시 잠들었을지도 몰라.”

“...나 무슨 숨겨진 힘 같은 거 있는 걸까?”
숨겨진 출생의 비밀은 확실히 있잖니?”
파란 장미 꽃잎. 거기에서 태어난 퍼블리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안아들어 키웠을 마법사. 결국엔 원점이었다.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마법사에 아니카도 조금 질린 기색을 느꼈다. 눈에 띌 건 다 갖추고 있는 자인데 정작 뿌린 건 끝이 안 보이는 비밀이다.

자신의 장미를 떠올리던 퍼블리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깨어난 메르시와 대화하기 전에 서랍에서 꺼냈던 종이뭉치.

“...장미 개발 계획.”

뭉치고 엉킨 실타래를 통째로 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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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진실공방은 이쯤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해야하지 않겠슴까? 우리 패치는 저랑 뭘 하고 싶나요?”
거기서 자네를 빼거나 내가 자네의 목을 직접 꺾고 싶네만.”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너무하다는 둥 자기는 진심으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데 그렇게 살벌한 말만 하니 슬프다는 둥 마법사에게 닿을 리 없는 말들만 실컷 늘어놓던 치트는 이젠 짜증스런 표정으로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 마법사의 모습에 외면하면 슬프다는 말도 덧붙이곤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우는 소리를 내며 징징대면서도 손가락 틈 사이로 특유의 날카로운 노란빛을 굴리며 마법사의 얼굴은 물론 옷과 손끝,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발목까지도 꿰뚫을 듯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네 눈알 굴러다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네. 그렇게 눈이 한자리에 계속 붙어있는 게 불편했으면 진즉에 말하지 그랬나?”

평생 한자리에서 우리 패치 볼 수 있게 계속 여기 있어주시겠슴까?”
난 이미 예전에 답을 줬고 자네 고백은 실패했네.”

고백이란 건 아직 마음이 있는 한, 한 두 번으로 끝날 게 아니잖슴까?”

문제는 마음이 한쪽에만 있다는 거고 그럴 경우엔 한 번으로 끝내야 둘 다 서로 아플 일이 없을 텐데 자네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붙들어서 둘 다 아픈 결과를 초래하는군.”

그 말에 치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십쇼, 제 고백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거고 저는 그저 제 방식대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저는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하얀 구름과 선명한 무지개를 걸어놓은 하늘, 따뜻하게 내려오는 햇살, 그 모든 걸 그림처럼 담고 있는 창문, 그 앞에 햇살을 받으며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마법사와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은 채 서있는 또 다른 마법사.

달달하고 포근한 연애 소설의 일부같은 이 상황을, 이 순간을 치트는 정말 완벽하다고 느꼈고 패치는 정말 역겹다고 느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다음에 일어난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기...패치? 안 그래도 많이 힘들 텐데 진정하시고 의자 좀 내려놓으십쇼. 던지면 우리 패치 체력손해는 물론 다친 제가 한동안 못 올 테니 눈 호강 손실 아님까?”
내 체력손해도 아쉽지만 현재 여기서 들만하고 자네에게 제법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의자밖에 없는 게 더 아쉬울 뿐이고 자네 얼굴을 안 본다면 이만한 이득은 없다고 생각하네만.”
치트는 저번처럼 손을 들어 슥 그어봤지만 마법사는 이제 제법 내성이라도 생겼는지 잠시 휘청거리다가 다시 미간사이를 찌푸린 채 의자를 질질 끌고 오기 시작했다. 한 번 더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쾅쾅 두드려댔다.

야 이 사시새끼야!! 너 또 X발 일 내팽겨 치고 여기서 그놈의 사랑타령 하고 있지!? 내가 살다살다 일을 성실하게 할 줄은 몰랐다, 이 시X X같은 상사 잡아오는 일을!!”

굉장히 억울한 소리였다. 치트가 마법사 앞에서 우스갯소리로 일도 내버려두고 왔다고는 하지만 사실 다 끝내놓고 오는 길이었다. 다만 다시 밀려오는 일이 끝도 없었을 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대치상황을 어찌해야하나 싶었지만 역시 억지로 버텼는지 팔을 부들부들 떨며 의자를 내려놓고 기대는 마법사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다가간다.

이런 당신의 체질 덕분에 당신을 여기 붙잡아 둘 수 있지만 한 편으론 불안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신은 이 집을 나갈 수 없고 설령 나간다 해도 이 집에 공급되는 약새풀들은 근처에 잔뜩 만들어뒀지만 결계마법을 쳐놔서 눈으로 찾을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말에 마법사는 픽 비웃으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내 마법실력을 알고서 그 말을 꺼낸다면...그냥 답을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지. 자네가 두려운 건...”
뒷말은 꺼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치트가 두려운 건 이대로 마법사가 이 나갈 수 없는 집 밖으로 나간 채 약새풀도 찾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비웃음과 함께 감상한 마법사는 결국 그대로 쓰러졌고 의자와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마법사를 안아들은 치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으며 조금 거칠게 침실 방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마법사를 침대에 눕혔다.

도발하는 건 좋았지만 우리 패치는 그럴 생각이 없잖슴까?”

어느새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오고선 잠들어 있는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빗듯이 쓸어보던 치트는 몇 가닥 쥐더니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걸 놓고 이번엔 뺨을 쓰다듬더니 다른 손으론 품에서 통신수정구를 꺼내고 톡톡 두드렸다.

모드양~ 들립니까?”
무슨 일입니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통화를 하나요? 모드양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랬답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시킬 일이 있슴다~”

어쩌면 딱딱하기로는 눈앞의 잠든 마법사보다 더 딱딱한 그의 부하는 묵묵히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년도 안 남았기도 했고 원래는 성인 될 때까지 기다려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패치가 못 만난 새에 홀랑 멀리 떠나는 방랑벽이 생겼나봄다~ 그러니 데려올 날짜를 조금 땡길까~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줬지요.”
언제입니까.”
지금 바로!...라면 너무 급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쪽으로 오게 돼서 정신없을 지도 모르니 조금 여유로우면서도 빠른 날을 생각해보니 이제 얼마 안 있음 축제잖슴까? 앞으로는 마녀왕국에서 지내지 못할 테니 마지막 축제를 즐기라는 의미에서 축제 마지막 날로 생각했는데 모드양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축제 마지막 날에 데려오겠습니다.”
~! 모드양이랑은 의견충돌이 없어서 정~말 편해요.”

나중에 또 목소리 듣고 싶으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신수정구를 다시 톡톡 두드린 치트는 아쉬운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며 일어난 후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 여전히 쿵쿵 두드려지고 있는 현관문으로 비척비척 움직였다. 집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차가운 공기들은 방 안에 누워있는 마법사를 향해가고 있었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욕설들이 잠깐 흘러들어왔지만 문 닫는 소리와 함께 희미해지고 곧이어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눈을 뜬 마법사는 말없이 천장을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차가운 공기가 옅어졌을 즈음에 복잡한 감정을 듬뿍 담은 한숨을 쉬며 왼쪽 손을 들어 올리곤 손목에 걸린 아무장식 없는 밋밋한 팔찌를 천장대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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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축제가 다가오고 있지? 하지만 그 전에 너희 앞엔 시험이 남아있다는 걸 잊지 않길 바란다. 그런고로 시험범위를 말해주마.”
학생들의 절규와 야유가 한차례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것들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선생은 책을 피고 꿋꿋하게 시험범위를 짚어주고 자습이라고 외치며 유유히 앞문을 열고 나갔다. 시험기간과 범위와 함께 자습이 달려오자 학생들은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펼치기 바빴다.

퍼블리에게 닿은 건 시험보다는 축제였지만 즐거운 기분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험이라는 말에 다른 학생들처럼 소리 없이 울면서 책을 펼치거나 최후의 방법으로 마법사를 찾아갔거나 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냉기마법 하나 더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얼어 죽지 않을까?”
야 더워 죽거나 얼어 죽기 전에 진짜 교실에 눈 한 번 내려볼래?”
더위와 시험은 이성을 빼앗기에 충분했는지 눈 내리자는 한마디에 슬금슬금 일어나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학생무리가 있었다. 구경하던 다른 학생들은 설마 진짜 눈을 내리기야 하겠냐며 얌전히 있었지만 설마가 마녀를 잡았다.

야 이 또라이들아!!”

이 모든 것은 더위와 축제를 가로막는 시험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리를 막을 자, 더위와 시험을 지배해봐라!”
그렇게 또다시 한 바탕 난리가 났고 이번엔 말리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상황이 웃겼는지 그들의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이긴 마녀가 동료라고 응원 아닌 응원을 하며 여전히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니카는 응원도 뭣도 안 하고 하나의 희극을 보는 기분으로 구경하고 있었고 퍼블리는 말리는 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써대는 마법 덕분에 흩날리고 쌓이는 눈을 멍하니 보면서 왼쪽 손목을 쓰다듬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위로 흩날리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밖에선 잠깐 비가 쏟아지는 듯 하더니 금세 그치고 햇빛 아래에 무지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 전 왔었던 폭우가 끝난 후에도 보이지 않았던 무지개는 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볼 생각이었는지 의자를 창가로 가져와 창문 너머로 향한 고개를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예 손으로 덮어버린다.

무지개가 참 예쁘게도 떴네요~”
나가.”

정말 너무하심다! 깨어있는 날도 별로 없으신데 매번 찾아올 때마다 그렇게 매정하게 굴고! 예전에는 같이 밥도 먹고 같이 한 침대에서도 잤었는...”
마법사가 여기에 갇힌 후로 제대로 알게 된 건 말은 한 번으로도 족하다는 거였고 잘못 듣지 않는 이상 다시 말해 줄 필요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는 거였다. 아무 말 없이 의자를 잡자 멀찍이 물러나는 모습에 던지지는 않았다. 계속 갇혀 지내고 대부분을 잠든 채로 있었으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체력과 근육이 꽤 떨어진 상태였다. 괜히 여기서 힘쓰기 싫었으니 위협은 이 정도로만 하고 다시 의자에 앉으니 다시 슬금슬금 다가오는 모습에 다시 한 번 위협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섯 걸음 정도 남겨놓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닿을 수 없다니...뭔가 아련한 사랑 소설의 주인공들이 된 것 같지 않슴까?”
헛소리는 그쯤하고 여기 온 이유나 말하게.”
아아 우리 패치도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그리고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패치가 여기 있으니까 제가 올 수밖에 없잖슴까?”

얼굴 봤으면 꺼지게.”
매정함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 자체도 굉장히 힘을 쓰는 일이었으니 계속해서 화를 내니 생각보다 금방 지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더군다나 체력도 꽤 떨어져 요즘 무기력함을 많이 느끼고 있는 마법사는 혹시 녀석이 이걸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을 쓰기 피곤해졌다. 아마 지금도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그리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올라왔지만 힘을 쓰면 더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금방 올라와 기운을 빼버리는 바람에 이러다가 나중에는 일어나 있는 것도 피곤해질까봐 조금 걱정이 든 마법사는 여전히 왼쪽 손목을 덮고 있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줬다.

너무 절 싫어하시는 거 아님까?”
이 상황에 대체 누가 자넬 싫어하지 않을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 있다면 한 번 데려와보게, 자네처럼 말이고 예의상식이 안 통하는 녀석인지 알아보고 싶으니까 말일세.”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 패치 외엔 그럴 마법사도 마녀도 없으니 안심하십쇼.”

마법사는 다시 의자를 던지고 싶은 충동과 함께 등받이에서 일어났지만 분노의 기세를 느꼈는지 한걸음 물러나는 모습에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자네 마음은 평생 일방적이겠군. 이제 내가 자네를 좋아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일세.”
그렇게 쏘아댄 후 또 징징거릴까 눈을 감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의외로 아무런 말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다시 눈을 뜨고 쳐다보니 거의 달고 살다시피 하던 얄미운 웃음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당신이 떠난 이유는 제가 고백했기 때문입니까?”
아니.”
별달리 동요 없는 모습을 보니 자신 때문에 떠난 게 아니란 걸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떠나면서 뒷마당까지 함께 태웠으니 뒷마당의 진실을 알고 있던 치트도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걸 차가운 잿더미 앞에서 깨닫고 대답을 듣기 위해 호수로 달려갔었다.

그럼 제가 계속 당신을 기다렸으면 당신은 다시 저를 만나러 올 생각이 있었습니까?”

마법사는 이번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꺼낸 본인도 그다지 대답을 바라고 질문한 건 아니었다. 앞서 치트가 말한 사랑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나간 일에 만약을 가정해보는 미련 많은 자의 흉내라도 내려는가 싶었지만 이번 연기는 영 아니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마법사는 말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대답은 같았다.

그럼 자네는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나를 이렇게 가둬놓진 않았을 텐가?”

치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대답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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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싫어하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에 퍼블리 스스로도 놀라 움찔 어깨를 떨며 손이 제 입으로 올라갔지만 그보다 아니카의 답이 더 빨랐다.

나를 싫어한다기보단 싫고 좋고의 여부와는 별개로 독립했으면 싶은 거지. 물론 다짜고짜 집 나가라고 하진 않을 테지만 웬만하면 빨리 독립할 능력을 갖추길 바라고 있어.”

여전히 먼 곳에서 들리는 이야기였다. 선생들이나 주변 애들이 하는 말들은 들어봤지만 마법사에게서 직접 독립이라는 말은 들어본 건 그 단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때 외엔 없었다. 그 설명을 들을 당시에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모든 게 어색한 이야기였다.

너야 뭐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겠지. 너희 아빠도 그렇고. 그러니까 그렇게 너무 충격 받은 얼굴 할 필욘 없어.”

그 말에 퍼블리는 애써 표정을 수습했지만 충격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주위의 마녀들과 달리 자기는 혼자 여전히 마녀왕국이 아닌 저 밖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왕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많았는데도.

그런 퍼블리의 모습을 본 아니카는 급하게 수습하느라 여전히 딱딱한 표정에 뭐라 더 말을 해야 할까 싶었지만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돌려 말하는 건 연기를 하지 않는 이상 본인 스스로가 무리였고 뭐라 더 말을 해도 지금은 귀에 안 들어갈 게 뻔했다. 제 보호자에게 무언가 섣불리 표현하기가 두려워 서투른 제 친구와 자식 키우는데 서툴기로는 제 친구보다 더 한 친구 보호자의 관계에 어찌 끼어들 수 있겠는가. 그나마 제 친구가 드디어 우물쭈물하던 걸 멈추고 돌격하려는 마음을 먹은 게 다행이었지만 보호자 쪽이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이는데 찾고 나서 돌격한 뒤의 결과가 어찌될지 정말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른 쪽도 정말 궁금했다.

널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라 정말 궁금하다.”
?”
마녀나 마법사마다 타고난 성격이 있고 자라다보니 보호자한테 영향 받은 성격이 있는데 넌 정말 타고난 성격이 강하구나라고 생각해.”
.....그래...?”
네가 생각해도 넌 너희 아빠같은 성격은 아니잖아?”
그렇지.”
그나마 너희 아빠를 내가 제대로 본 게 아주 어릴 때지만 인상이 내 기억 속에 굉장히 잘 남아있거든. 돌석상도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딱딱하게 느껴지는 그 표정. 거의 대부분 그 표정일 게 뻔하고 네가 너희 아빠에 대해서 꽤 얘기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마법사지만 어떤 성향이고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알만한 마법사란 말이지.”

..그렇지...?”

그럼 너희 아빠는 대체 왜 너를 키우려고 했을까?
긍정하는 퍼블리를 빤히 바라보며 아니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당황섞인 눈빛으로 아니카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니카는 그저 턱을 괴고 퍼블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국 퍼블리가 먼저 입을 뗐는데 때마침 다음 수업 선생이 들어왔다. 의자를 다시 앞으로 돌리던 퍼블리는 아니카를 한 번 힐끔 쳐다보고 방금 전 돌렸던 의자처럼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칠판을 두드리며 수업을 시작하는 선생을 한 번 옆에 있는 퍼블리를 한 번 번갈아보던 아니카는 책으로 고개를 내렸다. 애초에 보호자라는 데에 적성을 따지는 것도 이상했지만 마법사는 자식을 키우고 독립시키는 보호자엔 얘기를 통해 듣기만 해도 적성이 안 맞았다. 애초에 마법사 스스로가 그걸 잘 알고 자식을 키울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 같았는데 왜 퍼블리를 직접 키웠을까. 빡세긴 하겠지만 마법 교육면으로 스승으로선 적합할 것 같았는데. 퍼블리를 맨 처음 발견했다 해도 GM할아버지한테 맡기고 대리 보호자라 할 수 있는 스승이 되는 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상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유가 있었을 테고 그 이유는 당사자만이 알고 있으니 지금 이렇게 추측해도 연관 지을 수 있는 건 파란 장미에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뿐이었다.

아니카는 다시 제 옆자리에 앉은 퍼블리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퍼블리도 고개를 돌리다가 아니카와 눈을 마주쳤다.

어리다고 할 수 있지만 어리석다라고 할 수 없는 제 친구.

서툴게 받아왔겠지만 분명히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을 제 친구.

비밀 많은 보호자만큼이나 자기 스스로도 모를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제 친구.

아니카는 마법사의 대답이건 진실이건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제 친구인 퍼블리가 상처받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냐는 퍼블리의 물음에 아니카는 까먹었다고 대답했다. 퍼블리는 뭔가 찜찜하다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니카는 말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결국 먼저 포기한 건 퍼블리였다. 그러다가 더위를 유독 많이 느끼는 한 학생이 교실에 걸린 냉기마법에 마력을 과하게 때려 붓는 바람에 결국 과부하로 마법이 풀려버리자 한바탕 난동이 일어났고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휴게실로 뛰어가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 행렬에 퍼블리와 아니카 또한 동참했다. 갑작스런 소동에 결국 수업시간 외에 교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선생들이 나와 냉기마법을 다시 새기고 돌아가는 걸로 소동은 마무리 되었다.

하교할 때 갈림길에서 아니카와 헤어진 퍼블리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바깥의 더운 날씨에 익은 몸을 식히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으로선 집에 찾아올만한 마녀는 아니카 뿐이었고 문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아니카였지만 손과 등에는 무언가 잔뜩 달려있었다.

오는 내내 진짜 더워서 길바닥에 쓰러질 뻔 했어.”

그렇게 잔뜩 들고 오니까 그렇지. 근데 뭘 그리 많이 들고 온 거야?”
여름 내내 너희 집에서 지낸다고 했잖아? 내 옷이랑 칫솔이랑 필기도구 등등 내 방에 있는 것들 다 가져왔지. 좀 나눠서 들고 올까 싶었지만 역시 더운 날에 왔다갔다하는 건 많이 아니잖아?”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같이 살게 되면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는 말이 있었지만 같이 살게 된 둘은 생각보다 마찰이 없었다. 정확히는 둘의 집에서의 생활이 서로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부딪히는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퍼블리도 혼자 있었을 때에 비해선 덜 외롭다고 느끼며 여름동안이지만 아니카와 같이 살기로 한 게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학교도 함께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함께 하고 더위를 피하며 가끔가다 가방을 던져두고 놀러나가는 날도 지내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축제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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