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아아아아아아!!!”

목청 터져라 외쳐도 응답은커녕 숨소리 하나 안 돌아올 정도로 안개 속은 고요했다. 퍼블리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마법을 써서 빛을 내보거나 불을 내봐도 안개는 걷히지 않고 앞은 여전히 뿌옇게 보여 길은 물론이고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어디선가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퍼블리는 기억이구나 싶어 어찌해야하나 고민했지만 퍼블리가 다른 데로 가기도 전에 안개가 걷히고 패치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선택권은 없다는 모양새였다.

내일까지 부탁하네.”
나도, 나도 할래~!”
우선 자네 뒤에 있는 두더지부터 어떻게 하게나. 아까부터 자네만 보면서 기다리고 있네.”

뚜더쥐이~?”

물론 용사 뒤에는 두더지가 없었다. 용사가 다른 데 신경을 쓰는 틈을 타 패치는 비둘기에게 눈짓했다. 비둘기는 이 상황이 꽤 익숙한지 작게 울고는 바로 편지를 달고 날아올랐다.

뚜더쥐 없엉!”
뒤돌자마자 땅으로 다시 들어갔지.”
바로 쭈그려 앉아 땅을 두드리는 용사에게 패치는 이제 해가 지고 있으니 가야한다고 하곤 앞장섰다. 있지도 않았던 두더지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용사는 바로 패치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패치가 뒤돌아 용사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기억이 사라지고 안개만 남았다. 지켜보고 있던 퍼블리는 얼떨떨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지만 다시 기억이 나타나진 않았다. 묘한 찝찝함에 자리를 뜨고 얼마간 걸으니 안개가 또 걷혔다. 이번에 나타난 건 퍼블리보다 더 작고 어린 패치였다.

...신기하다...”

어린 패치는 다른 어린 마법사들과 함께 종이와 깃펜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학교라기 보단 집이었는데 넓은 탁자 위에 각자 종이를 올려두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여기서 책을 들고 있는 건 어른 마법사 하나뿐이었는데 책을 읽어주다가 듣고 있던 아이들 중 하나라도 궁금한 거에 대해 물어보면 읽어주던 걸 멈추고 궁금한 걸 해결해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질문 공세로 더 이상 책을 읽어줄 수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기 모여 있는 아이들은 패치를 포함하면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패치는 궁금한 거 없니?”

다른 애들이 먼저 다 물어봐서 없어요.”
퍼블리는 신기함과 흐뭇함이 가득한 얼굴로 어린 패치를 바라봤다. 요컨대 아빠도 이렇게 어린 시절이 있고 저렇게 안 딱딱한 말투를 썼었던 때가 있었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퍼블리는 패치와 다른 아이들을 건들지 않게 조심조심 다가가 패치의 종이를 내려다봤다. 읽어준 내용이 토씨하나도 빼먹지 않고 그대로 써져있다 못해 그 아래엔 밑줄과 자체적으로 요약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퍼블리는 고개를 돌려 다른 아이들의 종이도 봤다. 어른 마법사가 중요하다고 말한 부분만 몇 줄 써져있고 그 외엔 낙서였다. 퍼블리는 그래 이게 정상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어른 마법사가 쉬는 시간이라며 먼저 일어나 나가자 다른 아이들은 바로 다른 방이나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거나 집 밖으로 나갔는데 패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썼던 걸 다시 읽어보고 요약하기 시작했다. 패치는 어려도 패치였다.

패치야, 패치야 같이 놀자~”
이것만 더 하고.”
에이 너 그거 다 하고 나면 쉬는 시간 다 끝나 있잖아.”
잠깐만. 금방 끝나.”
그렇게 두 번 더 같이 놀자고 조르던 아이는 다른 아이가 부르자 패치를 한 번 힐끔 돌아보더니 바로 나가버렸다. 패치는 본인이 한 말대로 쓰고 있던 걸 금방 다 끝냈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아이는 이미 나가버렸고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라도 따라 나갈까 싶어 문고리를 잡아봤지만 잠시 머뭇거리면서 고민하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른 마법사가 책상 위에 두고 간 책이 패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번엔 고민도 없이 바로 책으로 다가가 책을 펼쳐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집중하며 읽고 있을 때 문 너머로 다시 아이들이 돌아오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그대로 책을 덮고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걸 마지막으로 기억은 사라졌다.

기억이 나타나는 건 뒤죽박죽이네.”
맨 처음 본 기억과 용사와 함께 있던 기억 속의 패치는 어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건 어린 모습이었으니 기억이 순차적이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퍼블리 앞에 나타난다는 얘기였다. 퍼블리는 이러다가 자기가 어디서 왔고 어느 방향으로 다시 가야할지 헷갈리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들었다.

왜 그러니?”
언제 따라왔는지 마법사가 뒤에서 나타나 퍼블리에게 물었다. 깜짝 놀란 퍼블리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언제 오셨어요?”
네가 뛰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난 이 숲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아. 더군다나 기억이 움직이면 나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단다.”
숲을 잘 안다는 말에 화색이 돈 퍼블리가 바로 다가가 말했다.

그럼 아빠가 있는 데가 어딘지 아시나요? 아깐 너무 놀라고 정신없어서 바로 여기로 뛰어왔는데 아신다면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일단 지켜보기로 결정했단다. 이게 내 최대한의 배려고 네 아버지를 찾는 건 온전히 네 몫이란다. 게다가 내 기준으론 일부일 뿐이라도 기억이 존재고 존재가 기억이라 내가 보기엔 너는 이미 아버지들을 찾고 찾아낸 걸로 보인단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안 갔지만 마법사는 퍼블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거나 도울 수 없다는 뜻을 내보였고 퍼블리는 이렇게 무작정 찾아다니기엔 끝도 없고 자신도 지칠 거라 예상해 어떻게 안 되냐고 요청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직접 안내해줄 순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지치는 건 네 몸이 지치진 않겠지만 네 정신이 지칠 순 있단다. 이 숲은 많은 마법사와 마녀들이 들이닥친 이후론 뒤틀렸거든.”
그럼 안내는 안 되더라도 같이 가줄 순 있나요?”

아무리 생생하게 움직이고 볼 수 있는 기억이라도 말을 걸 순 없으니 퍼블리는 여기서 유일하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법사와 함께 있으면 정신도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마법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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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니 안개 때문에 주변이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다시 한 번 피리를 불어보고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결국 무작정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와 급하게 그곳으로 가보니 저 세 마법사가 대화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퍼블리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들에게 말을 걸고 손을 뻗어 건드려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퍼블리의 목소리에 반응도 하지 않은데다가 건드리자마자 안개마냥 흩어지고 다시 선명해지고를 반복했다. 어느새 그들이 있는 눈앞은 숲이었는데 퍼블리의 뒤는 여전히 안개만 잔뜩 깔려 있었다. 결국 퍼블리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그들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거 외엔 없었다.

비밀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퍼블리는 신기하단 눈으로 용사를 지켜보고 있는 패치를 바라봤다. 해맑은 얼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용사는 퍼블리가 보기에도 어디로 튈지 몰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용사를 챙기고 뒷수습까지 하는 패치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찡그리는 표정에 피곤함은 가득 담겼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행동에서부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처음 보면서도 제 아빠다운 패치의 행동을 묘한 기분으로 보고 있던 퍼블리는 용사가 일곱 번째로 패치가 준 꽃을 망가뜨렸을 때 뒤돌아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왜 더 안 보고 가니?”
뒤에서 누군가가 퍼블리를 향해 묻자 깜짝 놀란 퍼블리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보던 광경은 사라지고 짙은 안개 속에 누군가가 선명하게 서있었다.

...구세요?”
글쎄, 그보다 더 안 보니?”
...계속 보고 있기는 좀 그래서...근데 진짜 누구세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킨 퍼블리는 조심스레 그를 살펴봤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 눈이 잘 안 보이는데다가 망토로 온 몸을 둘러 싸매다시피 해서 정체가 영 가늠이 가지 않았다. 키가 퍼블리보다 살짝 크다는 거 외엔 크게 특징이 보이지 않는 체격이었다. 퍼블리는 일단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니 모르는 분이라는 생각에 인사를 해서 먼저 제 소개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보다 상대가 더 빨랐다.

일단 마법사라고 부르렴.”

제 이름은 퍼블리예요. 마녀고요.”
그래 마녀라고 생각하는구나.”
뭔가 묘한 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 물을 새도 없이 마법사가 바로 말을 이어 처음부터 건넨 의문을 다시 꺼낸다.

왜 더 안 보고 그냥 가는 거니?”
계속 더 보고 있는 게 좀...그래서요.”

?”
정말 의아하다는 어투에 퍼블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꿋꿋이 대답했다.

난데없이 이렇게 누군가의 과거를 보는 건 당혹스럽고 의아하잖아요? 게다가 찜찜하고...”

하지만 궁금했잖니?”
순간 제 심장을 망설임과 악의 없는 손길이 꺼냈다가 다시 넣어놓는 기분에 퍼블리는 퍼뜩 어깨를 떨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네가 알고 싶어 하던 걸 뒤로 하고 다른 데로 가려는 거니?”

그렇긴 하지만...이런 건 직접 본인에게 듣는 게 의미가 있고 예의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넌 피리를 불었잖아.”

마법사의 말대로 결국 지쳐버린 퍼블리는 피리를 불어 비밀이 뭔지 보려고 했다. 예상한 바는 아니었지만 퍼블리가 궁금해 했던 아빠의 과거를 굉장히 생생하고 제 삼자 역할로 볼 수 있게 됐으며 간간히 들어온 용사의 모습도 알게 됐다. 이는 퍼블리가 알고 싶은 것 이전에 일종의 목표였고 지금까지 여행해왔던 이유였다. 어떻게 안 건지 의문스럽지만 상대는 굉장히 핵심을 잘 짚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퍼블리는 기쁘지 않았다. 신기하고 궁금했지만 껄끄러웠다. 지쳐서 피리를 분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거의 충동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비밀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된다는 걸 미리 알고 있다 해도 이미 지쳐있는 퍼블리에게는 충동이 더 강했으니 피리를 불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겪고 다시 피리를 불기 전으로 간다면 퍼블리는 피리를 제 주머니 안으로 다시 넣었을 거다. 겪어보니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신기하네.”
퍼블리의 대답을 들은 마법사는 그렇게 짧게 감상을 남겼다.

결국 직접 물어보겠다는 거구나.”
...생각해보니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그런데 너는 여기 들어온 이상 보고 싶지 않아도 결국 보게 될 거란다.”
단언하는 마법사의 말에 퍼블리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니 담담한 목소리로 폭탄과 다를 바 없는 엄청난 말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여긴 밸러니의 숲.”
“...?”
원래는 들어올 수 없지만 넌 들어올 수 있었고 네가 본 과거는 이 숲에 흩뿌려져 있지. 이 숲을 돌아다니는 동안 넌 보고 싶지 않아도 과거를 볼 수밖에 없어, 과거는 기억이고 기억이라는 건 있었던 사실이자 단순히 그 때 있었던 일만 나타내는 게 아닌 존재를 이루어주는 거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중요해. 그러니 이렇게 기억들이 날뛰는 거란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이 숲을 돌아다녀야 해.”
지금 퍼블리가 있는 장소가 밸러니의 숲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그 숲에 패치의 기억이 흩뿌려져 있다는 게 굉장히 놀라웠다. 확실한 건 본인의 머릿속에만 있어야할 기억이 이렇게 다른 자들도 볼 수 있게 형상화 되고 있다는 건 기억의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거였고 그게 썩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퍼블리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졌냐는 거였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퍼블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 기억이 흩뿌려져 있다고 했고 마법사가 말하길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숲을 돌아다녀야한다고 했다. 퍼블리가 불안한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보자 쐐기를 박는다.

네 아버지는 이 숲에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퍼블리는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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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시 친구래!”

아니야 퍼블리 친구라고 했어.”
메르시를 찾으러 왔다는데?”
퍼블리랑 메르시랑 친구니까 메르시 친구 아니야?”

그러네!”

신나게 떠드는 그들의 얘기에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메르시가 아니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직접적으로 얘기를 나눈 건 아니지만 옆에서 퍼블리를 기다려줬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인사를 나눴고 뒤에서 보고 있던 전서구는 날개가 뻐근하다며 갑판에 드러누웠다. 그 위로 다른 기사단들이 몰려와 깃털을 건드리거나 손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전서구는 귀찮다는 듯이 몸을 뒤틀기만 할뿐 일어나진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왕국 밖으로 나오다가 갑자기 원거리 공격을 받아서 퍼블리가 떨어졌었고 잡으려고 아래로 내려갔는데 정신차려보니 사라졌어요.”

그 말에 메르시는 즉시 그들을 공격할만한 후보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선 메르시가 전서구를 타고 밖으로 나왔을 땐 공격은커녕 집 주변을 지키던 왕궁 마녀들도 알아채지 못했다. 신성지대는 날아오지 않는 이상 거리도 멀었고 영역 내에서 웅크린 채 외부에서 오는 모든 마녀와 마법사들을 경계하고 있느라 바빴다.

일단 후보는 역시 왕국과 신성 둘인데 저를 따로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축제 첫날 때 퍼블리가 말하길 비밀상자 열쇠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왔어요.”
일단 퍼블리가 사지가 결박된 상태가 아니라면 마지막에 비밀은 알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피리를 불 거라는 믿음 아닌 믿음이자 기대 아닌 기대였다. 일단 그 피리에 비밀이라는 걸 공개하는 동안 퍼블리를 방어해주는 마법이라도 걸려있으면 싶은 마음으로 온 거였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퍼블리의 아빠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메르시 외엔 없었다.

일단 피리를 불면 즉시 정해진 장소로 이동하는 이동 마법이 걸려있어요.”

그 말에 아니카는 조금 안심했다가 바로 이어진 말에 심장이 그대로 쿵! 떨어져 뭉개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장소는 밸러니의 숲이에요.”


히익히익 숨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온 사방을 울려댔다.

완전 애보기네 애보기!”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두꺼운 모자를 쓴 늙은 마법사가 다른 마법사를 보며 웃고 있었다.

놀리러 온 거면 돌아가십쇼.”
이렇게 재밌는 광경을 두고? 아까워서 못 가징~!”
그 말에 돌아가라고 했던 마법사가 한숨을 쉬고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마법사였다. 늙은 마법사는 쉬지도 않고 계속 웃어댔고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을 입가로 내리며 드러난 푸른 눈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GM.”

아이고 도끼눈 무서워라! 너무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어~ 용사가 보면 파란 물감 들고 와서 둥글게 칠해주겠다고 할 눈이구만!”
늙은 마법사, GM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한 파란 머리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것보다 더 인상적인 건 정말 반짝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환한 녹색 눈이었다.

패치~!”
요정들도 자기 얘기하면 바로 달려온다더니 저기 네 애 온다~!”
제 애도 아니고 애초에 저 녀석은 애가 아닙니다.”
패치라고 불린 붉은 머리 마법사는 피곤함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부르며 손에 무언가를 쥔 채로 달려오는 파란머리 마법사를 바라봤다.

이거 말하는 꽃이랭~!”
음성 마법을 걸어놓은 꽃이니 당연한 걸세.”
나랑 계속 대화했어!”

미리 녹음한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파란머리 마법사는 마냥 좋다는 얼굴로 들고 있는 꽃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꽃에선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너무 흔들어댔는지 꽃이 줄기에서 툭 떨어져버렸다. 파란머리 마법사는 꽃을 주워 다시 줄기 위에 올려놨지만 이미 떨어진 꽃이 붙을 리가 없었다.

우웅? 왜 안 나오징?”
패치는 그저 한숨을 쉬었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GM은 다시 숨넘어갈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툭툭 떨어지는 꽃을 계속해서 붙이기 바쁜 파란머리 마법사를 두고 패치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름 집중하고 있었는지 패치가 자리를 비운 것도 모르고 꽃을 붙였다가 다시 흔들어보던 그는 이젠 꽃에 말을 걸고 있었다.

기운이 없는 건가~?”

꽃이니까 물 줘야지?”

그렇구나!”
GM이 한술 더 떠 옆에서 바람을 잡으니 꽃을 들고 또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웃으면서 보고 있던 GM 옆으로 다시 패치가 돌아왔다.

용사 어디 갔습니까?”

꽃에 물 주러 갔지!”

저 멀리 물통에 거의 손을 담근 파란머리 마법사, 용사를 발견한 패치는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려다가 옆에서 계속 웃고 있는 GM을 한 번 보고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패치의 손엔 용사가 들고 있던 꽃과 조금 다르게 생긴 꽃이 들려있었다. 그걸 발견한 GM은 정성 가득하다며 웃기 시작했다. 미묘한 표정으로 꽃과 용사를 번갈아보던 패치는 괜한 짓을 한 건가 싶은 얼굴로 용사에게 다가갔다.

패치도 요정꽃 가지고 있넹?”
요정꽃이 아니라...아니, 아닐세. 요정꽃 맞네.”
패치는 뭐라 더 설명하길 포기하고 용사에게 자기가 들고 있던 꽃을 건넸다. 물통에 담갔던 용사가 꽃을 받아들었는데 손을 빼느라 덩달아 꺼내진 용사의 꽃은 완전히 축 처져있었다.

요정꽃 친구들이당!”
용사가 패치한테 받은 꽃을 흔들자 무뚝뚝한 목소리로 안녕이라는 인사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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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릴 새도 없이 눈이 아플 정도로 주위가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급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뻗어보려고 했지만 어딘가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퍼블리의 팔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눈꺼풀 너머로도 화려하게 온 사방을 꿰뚫는 무지개 너머 지금 상황과는 달리 점점 흐려지고 있을 마법사를 떠올린 퍼블리가 외쳤다.

아빩!! 어붋?!”

현실과 무지개는 냉정하게 퍼블리를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무지개가 터뜨린 빛 때문에 아직 시야가 되돌아오지 않은 퍼블리는 더듬거리면서 땅을 짚었다. 흙과 함께 풀이나 잎사귀 같은 것들이 퍼블리의 손가락 사이를 쓸어대며 삐져나왔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쯤 되면 다시 돌아올 법한 시야가 여전히 하얀색만 비추고 있으니 의아해하다가 잠깐 가만히 있었다. 알고 보니 시야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지금 퍼블리가 있는 곳은 익히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약새풀...”
한여름의 햇빛마저도 막아주는 익숙한 냉기들이 이제 알았냐며 투정부리듯 뒤늦게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퍼블리가 장소를 파악하자마자 냉기가 느껴지는 걸 알아챈 퍼블리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고 있나 고민했다.

퍼블리는 다시 천천히 기억을 더듬고 상황파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아빠를 만나고 같이 도망치다가 맞으면 단순히 아야하고 울상 지을 정도가 아닌 마법들이 난무하는 그 광경에서 아난타 선생님과 치트를 발견했고 알고 보니 아빠는 선생님이었고 선생님이 아빠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는 천천히 제 손을 피고 내려다봤다. 무지개 구슬이 완전히 깨져 일어날 때 쥔 흙과 뜯긴 약새풀이랑 섞여있었다.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 모든 게 일렁이며 색이 뿌옇게 흩어졌다.

답답해.”
흐느낌 없이 눈물만 툭툭 떨어뜨리던 퍼블리는 한마디 툭 뱉었다. 눈물 외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비가 내리는 게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우습게도 퍼블리의 눈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내리는 건 햇빛이었다.

답답하고 힘들어요 아빠.”

이쯤에서 퍼블리의 머릿속에 몰려오는 생각들은 그 때 아난타의 모습으로 자신을 봤을 때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머릿속이 고장난 녹음 인형처럼 같은 문장만 뱅뱅 돌면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퍼블리는 지금 답답했다. 힘들고 답답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무지개 구슬 조각을 들고 있던 퍼블리는 손을 뒤집어 털었다. 무지개가 없어지니 얼음꽃무늬가 보였다. 아빠처럼, 마법사처럼, 약새풀처럼 차가워 보이는 얼음꽃무늬가. 얼마간 그걸 계속해서 보고 있던 퍼블리는 엎드렸다.

꿈처럼 저 뒤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가면 호수가 나올까 아니면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뜨면 꿈이었으니 깰까 궁금해 하며 퍼블리는 여전히 눈물이 나오고 있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떨겅! 속이 빈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란 퍼블리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려고 했지만 품속이 방금과는 달리 묘하게 가벼워 바로 내려다봤다. 품속 주머니에 넣어뒀던 피리가 떨어져있었다.

찾다가 지치면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요. 어쩌면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르거든요.”

마지막으로 만났던 메르시의 말이 맴돌았다. 손 때 묻은 피리는 얼른 주워서 나를 불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줍는 손길에 더 이상 망설임이 담겨있지 않았다. 퍼블리는 마지막 기력을 짜서 속에 잔뜩 쌓인 설움과 속상함을 담아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가 뒷마당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다.

 

보이냐? 저게 바다다!”
하루종일 사라진 퍼블리 생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아니카는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바다의 광경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퍼블리의 묘사를 듣기 전에도 영상구로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나 거대하고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런 아니카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서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저 넓은 바다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퍼블리의 무모함을 다시 떠올리고는 구시렁거리기 바빴다.

그나마 배에서 건져서 망정이었지 대체 뭔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가끔가다가 보면 그 머리통 한 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야, 누가 그 마법사에 그 자식 아니랄까봐 무슨 일 닥치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도 배웠어!! 덕분에 내 눈이 튀어나오다 못해 이리저리 통통 튈 정도로 배 찾아다녔는데 아무리 배가 커도 그렇지 이 넓은 바다 한복판에서
, 혹시 저거?”
그래! 저거...?”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 일이 많은 배가 웬일로 땅 가까이 있었다. 물론 신성지대와는 꽤 떨어져 있지만 해안선을 쭉 따라가다 보면 결국 발견하게 될 위치였다. 용케 발견 안 됐다며 호들갑 떨던 전서구는 구시렁거리던 것도 잊고 배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그쪽에서도 전서구와 아니카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가니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어~ 뭐 두고 갔어? 다시 돌아오다니.”
두고 간 거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날갯짓을 천천히 줄여가던 전서구가 불평을 담아 외치고는 배의 난간에 내려앉았다. 아니카가 고개를 들고 몸을 쭉 빼서 흑기사단을 살펴보려고 모습을 보이자 새로운 친구가 왔다며 외치기 시작했다. 분명 듣긴 들었지만 직접 그들의 상태를 보게 된 아니카가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무해한 얼굴로 반가워하는 그들에 바로 긴장을 풀었다. 아직까진 딴 데 보다가 다시 돌아볼 때 또 놀랄 것 같지만 그들의 태도나 표정을 보면 금방 익숙해질 법한 느낌에 묘한 눈으로 보고 있던 아니카는 전서구의 등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퍼블리 친구 아니카랍니다~ 여기로 오신 공주님을 다시 뵈러왔어요~”
? 퍼블리?”
메르시한테 우리 얘기 해줬던 저번의 그 친구!”
그 친구 친구래!”
메르시 보러왔대!”
그들은 웃으면서 퍼블리를 반기기 시작했고 몇몇은 공주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메르시를 부르러 달려갔다. 배에서 계속 생활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찼지만 그만큼 꽤 요란스러웠는지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온 마법사는 흑기사였다.

무슨 일이야?”
그 뒤에 브레이니와 메르시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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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마법사가 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오히려 익숙한 모습이었다. 검고 짧게 머리를 동그랗게 올려 묶은 곱슬머리와 안경 없는 검은 눈. 제 기억 속에 잘 자리 잡고 있는 아난타의 모습이었다. 퍼블리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먼지 구름에서 다른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마법이 또 튀어나오면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이번에 모습을 보인 건 치트였다.

이 정신 없는 상황에 이게 당황한 퍼블리가 뒤에서도 날아오는 마법들이 방어마법을 퉁퉁거리며 두들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방어마법을 펼쳤다. 앞으로 날아오는 파편과 먼지구름을 막아내긴 했지만 저 살벌한 마법들이 바로 날아온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눈에는 보이지만 아직 거리가 멀어 앞에서 벌어지는 마법들이 여기까지 닿진 않았다.

계속 이 자리에서 버티기엔 뒤에선 모드가 다가오고 있었고 앞에선 살벌하게 마법을 날려대는 치트와 마법사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퍼블리가 자신이 만든 방어마법에 최대한 마력을 쏟아 붓고 있는 순간 저 앞에서 치트가 먼저 여길 발견했다.

패치?”
하지만 한눈을 판 대가는 매우 철저했고 보는 마녀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온갖 마법들이 치트를 덮쳤고 그 결과 치트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마법을 날려댄 마법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날려 보낸 후로도 마법을 더 날리다가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퍼블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봤다. 순하고 동글동글한 눈을 마주친 퍼블리는 어쩐지 심장이 따끔했다.

아빠...”

퍼블리는 조금 앓는 소리로 제 아빠를 불렀다.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과 함께 저 앞에서 마법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긴장이 풀린 퍼블리가 결국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풀며 주저앉았다. 다가오던 마법사가 깜짝 놀라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고 뒤에서 걱정스러운 손길이 제 어깨를 건드리는 것도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앞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깜짝 놀란 퍼블리가 숨 쉬는 것도 까먹고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조금 후에 시야가 회복되고 앞이 다시 보였다. 다행히 오고 있던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방어마법을 펼쳤는지 크게 다치진 않아보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를 향해 마법들이 들이닥쳤다. 날아오는 방향은 아까처럼 앞이 아니라 바로 퍼블리의 뒤였다. 퍼블리가 뒤를 돌아보니 모드가 이번엔 마법사를 향해 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퍼블리의 어깨에 얹은 손이 다시 모드에게 마법을 날리자 모드도 마법사를 향해 마법을 날리던 걸 그만두고 다시 피하거나 막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잠시 비틀거리며 시야를 되찾고 있을 때 언제 왔는지 그의 뒤에서 나타난 치트가 마법을 날려댔고 마법사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법을 써서 막아냈다. 정신없는 상황에 누구를 도와야하나 혼란스러워하던 퍼블리는 그냥 얌전히 방어마법에 신경 썼다. 여기서 제 힘을 더 해서 도와준다 해도 들바람 뒤의 휘파람이었다.

이어진 대치 상황은 그다지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갇혀있는 거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거기다가 저 앞의 마법사들도 뒤에도 점점 지쳐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결국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모드의 마법을 막아내던 방어마법이 풀렸다. 치트를 견제하면서도 이쪽을 틈틈이 보고 있던 마법사가 재빨리 마법을 날려 모드를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지쳐버려서 자신까지 챙길 여유가 사라져버린 마법사는 그대로 치트의 마법을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끝까지...애를 먹이네요.”

지친기색으로 쓰러진 마법사를 보던 치트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퍼블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모드도 마법을 날리던 걸 멈췄다.

패치.”
치트가 마법사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웃지 않는 얼굴은 굉장히 낯설고 다른 마법사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손을 따라 뻗으며 갈 일은 없었고 그 전에 쓰러졌던 마법사가 일어나 다시 그에게 공격마법을 날렸다.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모드가 맞서 마법을 날려 공격을 무효화 시켰다. 치트는 다시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강하고 엄청 방해되네요. 하지만 여기서 험한 꼴 보이면 점수도 깎이고 미움도 받겠죠?”
애타게 찾던 마법사를 다시 찾아서 그런지 치트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손을 뻗었다. 그에 마법사가 반격할 준비를 했지만 치트는 마법을 안 날리고 바로 손을 물렸다. 경계를 풀지 않고 기다리던 마법사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특별히 가고 싶어하실 곳으로 보내드림다~ 하지만 안경도 없는데 저주 가득한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마법사의 몸이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치트는 이제 다시 웃음을 머금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파악이 안 되는 퍼블리는 그저 멍하니 다가오는 치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래라면 상당히 멀리 가야하는 일을 줘서 아난타를 멀리 보냈어야 했었지만 우리도 예측 못한 일 때문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고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퍼블리는 고개를 돌렸다. 예측 못한 일이라면 아마 퍼블리가 하루 일찍 왕국을 나온 일이었다.

원래라면 아난타는 멀리 나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패치는 여기 남아서 미끼 역할을 자처해야했는데 당신의 눈치가 좋았던 게 화근이었고
아빠?”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불러보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들켜버려서 급한 대로 이렇게 뛰어왔는데 이렇게 일이 꼬여버릴 줄은...그래도 미끼로 남아서 이렇게 만나는 게 목표였으니 어찌됐든 계획은 반쯤은 성공했죠?”
그렇게 말한 그는 퍼블리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쥐어줬다. 그의 손이 물러나고 뭘 준 건지 조심스레 내려다본 퍼블리의 눈에 익숙하고 화려한 빛이 들어왔다.

무지개 구슬? 이걸 왜...”

다시 고개를 든 퍼블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주본 푸른 게 검게 변했다. 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블리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자네가 나한테 했던 걸 그대로 따라 해 보고 한 번 꼬았을 뿐인데 눈치를 못 채다니, 비밀을 가장 잘 찾는다는 예리한 눈썰미는 어디로 갔나? 이거 참 실망이 크네.”
그 말에 치트도 뒤를 돌아봤다. 아까보다 더 흐릿했지만 아직 형체는 제대로 보였다. 검고 짧은 머리가 점점 붉고 길게 변해가고 있었다. 검은 게 푸르게 변했다.

패치?”
파삭 깨지는 소리와 함께 퍼블리의 손에서 무지개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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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마법사는 아까처럼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갔겠죠?”
순간 귀 끝이 베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훙 하고 마법사의 옆을 잔뜩 쓸어갔다. 요란하게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바로 앞에 있는 어깨를 쓸었다.

다시 묻죠. 패치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 시간에 마저 더 뛰어다니시는 게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같이 작전을 세웠을 자를 먼저 발견했다면 그 자에게서 정보를 털어내는 게 헛걸음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니까 이렇게 묻고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말해드릴게요.”
아난타는 대답하기 전 지었던 웃음보다 더 환하게 웃어보였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게 당연하니 이렇게 대답하고 있잖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났다. 굉음과 함께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방에 얌전히 계십쇼.”
그렇게 말한 모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모습과 말에 퍼블리는 조금씩 긴장을 풀었지만 퍼블리를 뒤로 물린 그는 절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퍼블리는 설득을 해볼까 고민했지만 상관, 즉 치트의 명령이 우선인 듯 하고 저 말을 들어보면 이 방 안에 얌전히 있게 두라는 명령을 받아서 온 것 같아 애초에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모드는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방 안에 걸어뒀던 감지 마법으로 퍼블리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수정구를 통해서 치트에게 누가 나오든 간에 잡아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단 퍼블리는 방 안에 있으니 그대로 있으면 잡아둘 이유는 없었다. 그럼 치트의 명령에서 가장 먼저 의미하는 자는 아난타였다. 모드는 아난타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감지 마법이 퍼블리가 문을 열었다고 알리자 곧바로 들어가라고 말하러 가야할까 싶었지만 바로 문이 닫히고 퍼블리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아난타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모드는 아난타를 발견했지만 근처에 치트가 가까이 다가가는 걸 보고 뒤쫓는 걸 멈췄다. 그래서 퍼블리가 아까 자신을 불렀으니 지금이라도 부름에 응답하고자 했고 늦었으니 이동 마법을 쓰자는 생각에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방 안에 있었다.

하필이면...”
모드도 그가 누군지는 알았다.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붉은 머리에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푸른 눈. 치트는 그를 직접 보여준 적은 없었지만 늘 그의 특징을 머릿속에 거의 새길 정도로 알려주면서 찾아내라고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못 알아볼래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치트가 보여줬던 집착이 엄청났었다.

저항할 생각은 없지만 밖으로 보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모드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이 틀렸고 처음 짰던 계획과 상당히 어긋났던 터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마법사나 마녀라면 몰라도 상대는 모드였다. 설득이나 협상이 통하기 이전에 애초에 치트의 명령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명령 외의 것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마녀였다. 부하들에게 내렸던 치트의 명령이 의외의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완전히 안 나가도 이 방 밖으로 나가는 건...”
누가 나오든 간에 잡아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누가 머리 굴리면서 비밀 캐고 사는 마법사 아니랄까봐 명령 내리는 것도 굉장히 잘 굴리는 치트였다. 혼자였다면 상관없겠지만 뒤에는 퍼블리가 있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모드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잡아두라고 했으니 방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진 않고 나가려는 시도만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방 안에만 있으면 세웠던 계획도 이렇게 퍼블리를 찾아온 의미도 없었다. 어찌해야하나 머리를 굴리다가 뒤에서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퍼블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에 안심하라는 의미인지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숙인다. 쓰다듬을 받고 있는 퍼블리는 순간 어색함을 느꼈다. 그 때였다.

와악?!”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깜짝 놀란 퍼블리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퍼블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떨어지더니 방 안이 크게 번쩍이며 굉음이 눈앞에서 울렸다. 뒤늦게라도 귀를 막을 새도 없이 퍼블리는 저를 잡아끄는 손길에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달려!”
퍼블리를 잡아끌던 그는 이젠 퍼블리를 앞세워 뒤에서 등을 밀며 달리기 시작했다. 굉음은 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부수는지 요란하게 무너지는 소리들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고 그 소리들을 타고 뒤에서 먼지구름과 파편이 잔뜩 어깨와 뺨을 쓸기 시작했다. 뒤에서 전기 공격이라도 하는지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빛이 번쩍거리는 게 순간 앞의 시야를 다 가릴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퍼블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뒤에서 자신을 잡아주는 손 덕분에 간신히 중심을 잡아 계속 달릴 수 있었다.

뒤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싶어서 궁금했던 퍼블리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몸을 반쯤 뒤로 돌린 채 자신을 잡아주는 손 말고 남은 손으로 뒤에다 계속해서 마법을 써대는 아빠와 그 마법들을 피하고 못 피하는 건 쳐내거나 막아대는 것도 모자라 반격으로 마법을 날리는 모드, 그 뒤에 피하고 쳐낸 마법들이 복도 벽에 부딪혀 벽돌들이 전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재난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런 광경에도 모드는 미간도 찌푸리지 않은 채 쫓아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저 무표정이 꿈에서도 나올까 두려울 정도였다.

굉장한 실력의 마녀와 마법사가 공격을 주고받고 피하고 쳐내다보니 꽤나 가까이에 있는 벽들이 무너지느라 굉음이 뒤에서는 물론이고 앞에서도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다시 앞을 돌아본 퍼블리가 기겁해서 외쳤다.

아빠!! 잠깐! 멈춰요, 멈춰!!”
퍼블리의 외침에 그가 견제용으로 날리는 마법들을 멈추고 급하게 방어마법을 펼쳐 앞을 보니 저 앞에서도 마법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벽을 부수고 있었다. 퍼블리는 뒷 상황이 재난이라고 하는 걸 취소했다. 진짜 재난은 바로 앞이었다. 여기보다 더 하다면 더 하다고 할 광경이었다. 여기는 제압이 목적이라면 저 앞은 정말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앞에서 벌어지는 뿌연 먼지구름에서 그림자가 아른거리더니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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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말을 할 순 없었다. 바로 입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조용히 검지로 입을 막은 그는 조심스럽게 퍼블리의 입에서 손을 뗐다. 퍼블리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보다 먼저 나온 건 눈물이었다. 손이 물러남과 동시에 혹시라도 환영일까 사라질까 두려워진 퍼블리는 그의 옷깃을 꽉 쥐고 눈물을 조금씩 흘리다가 이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 아빠...아빠아....”
서럽게 울면서 계속 아빠를 부르는 퍼블리는 머뭇거리며 안는 손길에 바로 품으로 뛰어들었다. 언제 그렇게 컸는지 퍼블리는 이제 품속으로 다 안 들어갈 정도였고 눈물이 흐르는 눈은 어깨 위로 묻었다. 어색하게 등을 감싼 손은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면서 퍼블리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어째선지 더 울렁거려 눈물을 더 쏟는 건 물론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1년 새에 혹은 그 전부터 쌓인 눈물들이 전부 다 쏟아져 나올 기세였다.

..압바가...저도 두고 가..가버린...건지......맨날 부란...불안하고...”
흐느끼며 말하다보니 나오는 말들이 전부 뭉개지고 끊겼다. 속에 있던 말들이 얼음바늘처럼 속을 긁으면서 올라오다가 바로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따끔하고 아프면서도 시원하고 허탈했다. 꺽꺽 우는 소리에 걱정 가득하게 두드려주던 손이 멈췄다. 꽉 안은 손엔 걱정은 물론이고 안타까움과 난감함이 가득했다.

“...퍼블리.”
오랜만에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블리는 더 크게 울었다. 시작은 울음이고 나중은 더 큰 울음이었다. 끝은 탈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는 퍼블리를 진정시킨 건 그의 말이었다.

여기서 나가야해.”
.....?”
단호한 목소리에 아직 히끅 흐느끼며 울고 있는 퍼블리가 반문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푸른 눈이 퍼블리의 눈과 마주쳤다.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건 치트야.”
단호한 말과 함께 퍼블리의 머릿속이 또 멍해졌다.

“...?”
눈물이 딱 멈춘 퍼블리는 머리가 멍해진 기분을 느꼈지만 아직 진정되지 않아 히끅거리는 숨 덕분에 지금이 아직은 꿈이 아니라는 걸 생생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작년 축제 마지막 날 나가려고 했던 나를 아난타로 변장해서 여기로 끌고 온 게 치트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줘도 퍼블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던 집, 잠겨진 서랍에 있었던 파란 장미가 담긴 유리병, 웃으면서 반가워하던 치트, 웃으면서 바깥의 얘기를 들어주던 아니카, 곤란하면서도 어딘가 미안한 웃음을 지었던 아난타, 웃으면서 말을 길게 늘이던 모드, 웃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니카, 아무런 감정 없이 무언가 묻기 전에는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모드, 머리색도 달라지고 눈도 흉흉하게 보이는 인상 쓰던 아난타. 이리저리 뒤섞이고 복잡하게 흔들리는 머릿속에서도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결과 다다른 결론이 하나 툭 떨어졌다.

그럼...아빠를 찾기 위해서, 몰래 납치하기 위해서 왕국에 아난타 선생님을 보낸 거예요? 모드씨를 통해서?”

순간 방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퍼블리는 더 이상 흐느끼지 않았고 그 말을 들은 상대는 놀란 눈으로 퍼블리를 보고 있었다. 그 반응을 보니 퍼블리는 제가 한 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징징대며 아빠한테 달라붙는 치트와 아빠를 여전히 사랑하며 계속 찾겠다고 약속한 치트가 순간 희미해지고 그 둘 뒤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치트가 서 있었다. 확실한 건 희미해진 치트들은 물론이고 뒤에서 숨어있던 치트도 입은 웃고 있었다는 거다.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팔을 문질렀다.

그럼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누가 그랬던가, 졸졸 흘려보낸 맑은 물이 나중엔 물벼락과 다름없는 비로 되돌아온다고. 퍼블리는 이번엔 눈물 대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까 불렀던 모드가 지금 나타났다. 모드가 문을 열어서 들어왔다면 그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겠지만 모드는 바로 이동 마법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 때문에 숨지도 못한 채 결국 들켜버렸다.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들켜버릴 줄은 몰랐는지 그는 난감하단 얼굴로 모드를 바라보곤 주먹을 꽉 쥐다가 팔을 뒤로 뻗어 퍼블리를 뒤로 물렸다. 퍼블리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며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급하게 달리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려 퍼졌다. 치트는 퍼블리를 데려왔을 때 혹시 친절하게 나가는 길을 안내하는 부하들이 있을까봐 데려오기 전날에 미리 다른 곳으로 가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다른 이유로는 부하들이 어린 마녀가 왜 여기로 왔는지 의구심을 품고 행여나 뒷조사를 할 겸 퍼블리에게 다가갈까 미리 만나지도 못하게 하려고 했다.

퍼블리는 당연히 마법사를 찾고 있으니 마법사의 인상착의를 말해줄 게 뻔했고 치트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 마법사를 아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자신만 기억하고 있기를 바랐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더 이상 아는 자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집착 가득한 마음으로 행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퍼블리가 바로 그 전날에 왕국을 나와버려 일이 조금 틀어졌지만 크게 틀어지진 않았다. 중간에 퍼블리와 그들이 마주치긴 했지만 모드가 있었으니 그들은 이유는 궁금해도 어떻게 어린 마녀가 왕국을 나왔는지 의심하진 않을 터였다.

그 덕에 마법사는 지금 자신을 잡는 자들 없이 복도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말이지 철저하고 완벽해요, 하지만 그런 만큼 잔인하다고 할 수 있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법사는 멈춰 섰다. 꽤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상대는 빨랐다. 애초에 여기의 주인이라서 당연한 건가 생각한 마법사는 뒤를 돌았다. 치트는 늘 짓던 얄미운 웃음은 물론이고 눈매가 위로 둥글어 늘 웃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눈도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안경, 어쩌면 쓸 일이 있고 이렇게 당신을 회유하기 위한 발판들이 모두 준비되었을 때 당신을 깨우기 위해서 남겨놓은 거지요. 저주상태로 있던 당신은 그 안경이라면 엄청 질색을 했으니 그걸 자율적으로 쓸 거라는 상상은 못했어요. 그런데 본래의 정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건 더더욱 상상을 못한 바였죠.”
치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패치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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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치트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즐기는 걸 넘어서 좋아할 정도였다. 상대방도 머리가 좋아서 제가 깔아놓은 함정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걸 반겼고 상대의 반격을 즐거워하며 다시 머리를 굴려 함정들을 깔아놓거나 직접 나서는 일도 했다. 누가 본다면 변태를 보는 눈으로 바라보겠지만 치트는 지루함을 느끼는 것보다 자신이 위험해질 상황을 즐기는 걸 더 좋아했다. 빠져나갈 길은 언제나 만들어두고 두 팔 벌려 환영할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가 판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그건 얘기가 달랐다.

..하하...”
치트에게 있어서 가장 최악의 기억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그 날이었다. 집이 있었던 곳엔 재밖에 남지 않았고 뒷마당마저 태워버려 분명 불로 태운 곳인데도 냉기가 감돌던 그 때. 이제는 최악의 기억이 둘이 되었다. 치트의 눈앞에 그 날이 그대로 재현되어있었다.

똑같네요.”

그대로 몸을 숙여 완전히 까맣게 타버린 나뭇조각을 쥐었다. 까만 가죽장갑과 하나가 된 것처럼 까맸다.

정말 똑같아.”
여긴 뒷마당을 만들어놓진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냈는지 약새풀들을 심어놓은 데가 전부 타서 냉기가 잔뜩 감돌고 있었다.

흔적도 하나 안 남기고 태운 게 정말 똑같네요.”

그 때와 다른 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이곳엔 호수가 없었고 호수를 향해 뛰어가는 치트가 없었다. 함정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건 정말 보는 것도 다른 입을 통해 듣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판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치트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통신구를 꺼내들었다.

모드양.”

곧이어 무뚝뚝하게 네. 하고 응답이 왔다. 머리가 어지러운데 신기하게도 나오는 말은 굉장히 차분했다.

누가 나오든 잡아놓으세요.”

연락을 끊은 치트는 천천히 일어났다. 약새풀이 풍기는 냉기는 정말 지독했고 머리까지 다 굳어놓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만 그렇지 머릿속 안은 엉킨 선들이 굉장히 뜨겁게 날뛰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어떤 티끌도 용납하지 않을 셈이었다.

 

....”

퍼블리는 멍하니 누워있었다. 이번에 멍한 이유는 아까 멍하니 누워있던 거와 꽤나 다르고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들고 있던 피리를 이마로 딱딱 두드리던 퍼블리는 다시 누웠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이마를 문지르던 퍼블리는 모드가 대답했던 걸 곱씹었다. 그 눈 아플 정도로 쨍한 주황머리 마법사가 아난타라고 했다. 아난타라고. 아난타.

그럴 리가 없어.”

퍼블리는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동글동글하고 커다란 안경을 쓰던 마법사 선생. 굉장히 순한 분위기로 부드럽게 수업을 하셨던 선생. 검고 짧은 곱슬머리를 동그랗게 묶어올리고 동글동글한 눈 위에 동글동글한 안경을 낀 얼굴 위에 안경을 빼고 쨍한 머리색과 흉흉하게 빛나던 눈을 빨간색으로 덧칠했다. 참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데 놀라울 정도로 다른 마법사로 보였다.

미친.”
욕을 거의 써본 적 없어서 깨끗한 입이라고 옆에서 아니카가 늘 떠들고 다니는 바로 그 입에서 욕을 뒤집어쓴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똑같이 생겼지만 이렇게 생각해봐도 정말 같은 마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딴판이었다, 분위기가. 분위기만으로도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가 있나 싶었지만 흉흉하던 눈빛과 찌푸리던 인상이 바로 따라붙었다. 퍼블리는 생각 끝에 결국 수긍했다.

그러니까...선생님은 원래 신성 측 마법사가 아니라고 거기서도 말했었으니까 여기 속해있는 분이시라는 건데...”
퍼블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는 걸로 생각을 채우고 있었는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지금 뭔가가 상당히 복잡했다. 모드가 왕궁 마녀였고 여기 소속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아난타가 신성 측 마법사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드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게 훤했다. 궁금한 게 한가닥 풀리면 그 가닥을 타고 엄청난 뭉텅이들이 딸려왔다. 왜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일을 벌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왕국과 신성 어느 한쪽이라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곤란한 수준을 넘어설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물어보면 대답해주실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담담하게 대답하는 모드의 상상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대답 이전에 지금 불러도 되겠냐 아니면 얼른 불러서 물어보자라는 의견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퍼블리가 오랫동안 눈뜬 채로 정신을 놓은 건지 아니면 모드가 다시 일을 하러 방에서 나간 걸지 몰라 벌어지는 일이었다. 요컨대 아까와 같았다. 괜히 바쁜 마녀 불러다가 질문하는 거 아니냐.

어쩔까 고민하던 퍼블리는 조심스레 모드를 불렀다.

모드씨?”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바빴구나 고개를 끄덕인 퍼블리는 이대로 계속 묻기만 하면 좀 미안하긴 하구나 싶어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로 피리를 빈손에다가 탁탁 두드려봤다. 손바닥이 살짝 화끈하며 얼얼해졌다. 손을 몇 번 털던 퍼블리는 피리를 제 품 속의 주머니에다가 넣었다. 안쪽의 유리병에 닿았는지 딱하고 맑은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퍼블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고맙다고 인사하러 가야지.”
같이 찾겠다는 치트의 말이 고마웠지만 계속 여기서 신세를 질 순 없는 노릇이라며 퍼블리는 짐 가방을 들었다. 아무래도 메르시를 찾아가며 제 걱정을 하고 있을 아니카와 전서구가 걱정됐고 여기서 마냥 아빠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말하는 김에 이번에 궁금한 건 모드가 아닌 치트에게 직접 묻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던 도중 퍼블리는 아직 남았지만 더 먹을 마음이 안 들어 남겨놨던 음식 그릇이 떠올랐다. 나가는 김에 그것도 역시 들고 나오기 위해 다시 몸을 돌리려고 했었다. 문에서 퍽!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으악!?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기겁하며 뛰쳐나오려던 퍼블리는 곧 밀쳐지는 손길에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퍼블리 혼자 들어온 게 아니었다. !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퍼블리는 순간 심장이 크게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과 그걸 고쳐 쓰는 손보다 더 빨리 눈에 들어온 건 넘실거리는 붉은색.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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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켜버렸네요~”

마법사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소매로 땀을 닦았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한 얼굴이 과연 동일한 마법사였나 싶을 정도였다. 다른 자들이 봤다면 도통 적응이 안 된다며 몸서리를 쳤겠지만 그나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치트는 볼만했다.

“어떻게 아셨나요? 정말 날카롭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했는데 눈치 못 채면 당신도 섭섭하고 저도 섭섭하지 않슴까?”

그 말에 마법사가 싱긋 웃었다.

“저는 별로 섭섭하지 않네요.”

“그렇슴까?”

치트도 싱긋 웃었다. 둘 다 주변에 꽃이라도 피울 것처럼 화사하고 밝게 웃었다.

“그래서 비밀을 알게 됐으니 어쩌실 건가요?”

“뭐가 그리 급하심까? 대화할 시간은 많슴다~”

“바쁘신 분 아니었나요?”

“때에 따라 일을 미룰 수도 있는 거 다 기억하시지 않슴까~?”

“글쎄요? 안경 벗었을 때의 기억은 있지만 꽤나 흐릿해서 말이에요~”

“그런 것치곤 말투가 꽤 자연스러웠던 걸로 기억함다~?”

둘의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싱글 생글 웃으면서 대놓고 욕이나 험한 말만 안했지 부드러운 말투 아래엔 그 어느 때보다도 아슬아슬하고 치열한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대화라는 이름의 간보기였다.

사실 여기서 유리한 건 당연히 치트였다. 지금 있는 데가 바로 치트가 이끄는 곳인데 불리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지금 상황은 치트에게 있어서 그저 눈앞의 상대를 그대로 여기 둘지 아니면 바로 잘라낼지 고민을 가져보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성격만 따지면 원래 성격이 더 나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능력도 원래 성격이 더 능숙한 게 눈에 훤했다. 하지만 능력이 능숙하고 좋다는 건 뒤집어서 말한다면 쥐고 있는 자, 즉 치트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상대적으로 그보다 아래라면 통제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밸러니의 숲 정화 때 참가했던 마법사였다. 그것도 그냥 참가했던 게 아니라 한 단체를 이끌었던 자였다.

이리저리 저울질을 하던 치트는 고민하느라 풀려있던 미소를 다시 지으며 손에 깍지를 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마련한 게 있었다. 상대가 원하는 건 이미 쥐고 있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름다. 저주에 걸렸던 당신은 지나가던 마법사나 여행하던 마녀한테 마법을 날리고 눈앞에 있는 건 부숴야 직성이 풀려했었죠.”

“그 때의 기억은 꽤 강렬해서 기억해요. 그리고 당신이 저를 속박 마법을 써서 끌고 갔던 게 기억나네요~”

“흐음? 단순히 속박 마법으로 기억하는 검까?”

마법사는 그저 웃음으로 답했고 치트는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고자 종이 뭉치를 꺼냈다.

“밸러니의 숲은 지금 사라졌죠? 정확히 말해선 저주 가득한 마력으로 인해 모습이 보이지 않고 길이 왜곡 되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거지 존재는 한다는 걸 압니다.”

“실제로 거기서 깨어난 저도 어떻게 다시 들어가는지 모르죠. 저주로 인해 잠들어있을 때를 떠올려 봐도 흐릿해서 계속 돌아다니기만 했었지요.”

아직까진 웃음이 감돌고 있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하지만 찾았다면?”

“...네?”

“뭘 그리 놀람까? 그 안경을 만들었던 건도 전데 들어가는 길 하나 찾는 건 가능하지 않겠슴까? 어느 한군데는 다른 데보다 저주가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죠. 게다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종이를 툭툭 두드리며 쐐기를 박는다.

“깨워야할 분들이 있잖습니까?”

마법사는 바로 웃음을 거뒀다. 저 종이에 적혀있는 건 얼핏 보기만 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결국 치트는 쥐는 쪽을 선택했다. 상대에게 필요한 걸 전부 쥐고 있었고 생각보다 이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원래 모습과 만나는 것도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사실 치트 스스로가 욕 섞인 말들을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든 터라 미리 준비하고 안경을 계속 씌웠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울질을 해봐도 좀 더 생각해봐도 치트에게 있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쉰 마법사는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철저하시네요? 감탄했어요.”

“이 정도는 해야 비밀들을 얻어서 정보로 장사해먹죠~”

“그보다 아까도 물었지만 바쁘신 분 아니었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때에 따라 일을 미룰 수도 있슴다~ 대화는 중요하잖슴까? 지금처럼 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래요 대화...대화는 중요하죠.”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소매가 덮인 왼쪽 손목을 주무르며 소매를 더 내렸다.

“하지만 대화보다 더 급박한 상황이 있고 당장 뛰어가서 봐야할 일이 있기도 하죠. 언제나 대화가 우선일 순 없는 법이에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바로 잡을 수 있거나 바로 잡지 못하고 그저 멀거니 손만 뻗을 수밖에 없는 상황.”

치트는 마법사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여전히 웃음은 거두지 않은채

“흠? 거절이라는 뜻임까?”

“아뇨. 당신이 내민 거절이 희미한 선택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에 대한 이야기예요. 제가 아까 말하고 방금 또 말했죠? 바쁘신 분이 아니냐고. 당신이 늘 하던 일이 있잖아요?”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 완전히 파악은 못했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치트를 보며 마법사가 좀 더 자세히 얘기를 풀기 시작했다.

“당신은 원래 축제 마지막 날에 퍼블리를 데려오기로 했었는데 퍼블리가 바로 그 전날에 왕국을 나가려고 했고 이는 당신이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바로 잡을 수 있는 일이었죠. 그래서 퍼블리가 지금 여기에 와 있잖아요? 그럼 이제 남은 건 예상치 못하고 바로잡지도 못하는 일이죠.”

양 손을 맞잡은 마법사가 환하게 웃었다. 이번엔 마법사가 쐐기를 박는다.

“지금 제 안경은 어디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치트가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다. 일어나자마자 이동 마법을 급하게 썼는지 손에 닿아있던 가장 위에 있던 종이도 사라졌다. 그걸 전부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는 치트가 사라지자마자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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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방에 혼자 있게 된 퍼블리는 체할 것 같은 얼굴로 그릇을 내려다봤다. 마녀나 마법사나 엄청난 얘기들을 꺼내고 간다. 마녀는 퍼블리가 물어보니 대답한 거였지만 마법사는 갑자기 들어와서는 자장가 대신 옛날얘기 들려준다는 듯이 말하고는 휙 가버렸다. 퍼블리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먹고 체해서 한동안 일어나지 말라고 심술부리고 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빠...아빠한테 구애하는 마법사가 너무...”
퍼블리는 제 옆에 없는 아빠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퍼블리의 머릿속에서 마법사는 그런 엄청난 자가 구애를 해도 제 시간 방해 말라며 귀찮다는 얼굴로 거침없이 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렇게 상상을 마친 퍼블리는 안심하며 그릇을 내려다봤다. 포크를 들어 고기를 찍고 먹기 시작했다. 빵과 야채도 먹으면서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사레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하지만 어투는 전혀 아니었다. 학교에서 책 읽는 것보다 더 감정 없고 딱딱했다. 퍼블리는 콜록 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번 들린 사레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지켜보고 있던 모드는 손수건을 건넸다. 퍼블리는 평소에 들고 다니지도 않아서 별로 쥐어본 적도 없는 손수건을 오늘에서야 받으면서 쓰게 됐다. 그것도 두 번이나.

...언제 들어오신 거예요?”
겨우 진정한 퍼블리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물어봤다.

빵을 드시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그게 언젠지는 퍼블리도 몰랐다. 할 말을 잃은 퍼블리는 빵 하나를 들고 건네봤다.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정중한 거절에 퍼블리는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모드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부담스러워져서 더 먹는 걸 그만뒀다. 대놓고 말할까 고민했지만 알았다며 시선만 다른 데로 옮기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어색한 상황은 여전할 것 같아 퍼블리는 어찌해야하나 고민했다. 아까처럼 또 질문만 하기엔 너무 그런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질문해서 듣게 됐더라도 들은 비밀들이 꽤나 커서 과연 계속 물어봐도 될까 싶은 마음이 망설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티 많이 났나요?”
모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제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속으로만 생각해도 표정으로는 전부 다 나타났었나보다.

고민...이라기보단 모드씨도 저한테 궁금한 게 있나요? 저만 계속 물어보다보니 좀 미안해서요.”
궁금한 건 없습니다. 질문하는 거에 대해선 이미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부담이 바로 사라지진 않았다. 있는 대로 혹은 모르는 대로 궁금한 걸 물어보려고 다짐했었지만 막상 알고 보니 굉장한 부담감이 퍼블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그래도 궁금한 게 없으세요?”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매우 단호했다. 결국 물러난 건 퍼블리였다. 이번엔 질문 말고 알고 있는 재밌는 얘기라도 꺼내서 대화를 이어나갈까 고민하던 중 또 까먹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은 데에는 그냥 잠깐 불쑥 튀어나온 심술이 아니더라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고민을 더 키우고 있었다.

아까 봤던 그, 주황머리 마법사씨는 이름이 뭐예요?”
호기심은 눈앞의 불길도 달려갈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 있었다. 퍼블리는 계속 마법사씨 혹은 주황머리씨라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 이름을 듣기로 결심했다. 절대 호기심이 먼저가 아니라고 연신 생각하며.

아난타입니다.”
대답을 들은 직후 퍼블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드는 없었다.

 

요란스럽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온 사방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리의 원인은 발걸음이었는데 꼭 방망이로 이불 먼지를 털어내듯 힘차게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걸음 속에 있는 건 힘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한 불만이 가득했다. 불만 가득하고 요란한 발걸음이 멈춘 건 목적지 앞에서였다. 깊게 들이쉬는 숨소리와 함께 문을 벌컥 열었다.

X발 썩은 배추머리 새끼야 나랑 갈등을 제대로 빚어보자 이거냐? 오늘 헛걸음을 여러 번 시키는 걸 보면 넌 내가 왼발 오른발 땅 밟은 숫자 다 합한 만큼 처 맞고 싶다 이거지?”

가만히 말을 듣던 치트는 싱긋 웃었다.

피차 욕 하는 것도 듣는 것도 힘들 텐데 그만 두시죠?”
난 안 힘들거든? 네놈새끼가 힘든 거지.”
연기를 그만두라는 얘기였습니다.”
마법사는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안 그래도 험악함을 가득 담은 눈을 더 흉흉하게 치켜떴다. 만약 지금 논점 벗어난 헛소리를 하는 거라면 사지를 다 으깨놓는 거로는 끝나지 않겠다는 기색이었다. 그 흉흉한 기색에도 치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 진지합니다. 아까 손님 앞에서는 욕을 하나도 안 썼잖아요?”
그럼 애 앞에서 욕을 찍찍 뱉으라고? 그것도 네가 그렇게 딸기딸기 노래를 부르면서 싸돌고 다니는 마법사 애 앞에서?”
당신이 언제부터 애 앞에서 욕 쓰는 걸 신경이나 썼습니까? 게다가 답지 않게 제 기분을 배려해주시다니 이것 참 오랫동안 같이 일한 보람이 있다고 입 바른 말이라도 해야함까?”
네 놈 기분 배려한 게 아니라 애를 배려한 거다 애를! 그리고 내가 애 앞에서 쌍욕을 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 쓰는지 네놈새끼가 어떻게 알아?!”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그 순간 미끼를 문 사냥감을 건져 올린 환희가 잠깐 요동쳤다.

저는 그 손님이 패치의 아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노란 빛이 순식간에 가늘어져 마치 날카롭게 꿰뚫는 촉으로 변했다.

당신은 분명 안경 쓸 때를 기억하지 못 했잖습니까?”
그 안경은 저주를 약화시켜주는 역할을 했으니까.

마법사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찌푸린 표정도 흉흉함을 담던 눈빛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마법사가 눈을 감았다 뜨니 머리와 눈이 검게 변했다. 안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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