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볼 때랑 선생님한테 들었을 때는 딱히 실감하지 못했는데 직접 보니까 정말 엄청나요!”
뭐든 한꺼번에 움직이는 게 가장 위협적이면서도 눈이 가는 구경이지.”
마녀들과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행렬이 왕궁의 문을 넘어가고 있었다. 퍼블리는 용사와 컨티뉴를 양 옆에 두고 행렬 사이에 따라 걷는 패치를 보다가 전서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직 눈이 내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구름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혹시 큰 비둘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더 장관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니?”
, 어떻게 아셨어요?”

이 광경을 두고 하늘을 보길래 알았단다.”
그래도 전서구를 어떻게 아나 궁금했지만 전서구를 타고 용사를 찾아다니던 기억 속의 패치를 떠올리고 궁금증을 해결했다. 아마 패치가 퍼블리보다 전서구의 등을 더 많이 올라탔지 덜 올라타진 않았을 거다.

오늘은 여기서 쉽니다!”
중간에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에서 쉬거나 노숙을 하는 모습을 보며 퍼블리는 마법사에게 숲이 어디쯤에 있는지 물어봤다. 그 유명한 밸러니의 숲은 정작 어디에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알고 있는 건 왕궁 마녀들이랑 이 때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어른 마녀들밖에 없었다. 한 때 저주가 가득했고 정화했어도 저주가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곳을 어린 마녀들에게 알려줄 어른들은 없었고 퍼블리는 메르시가 준 피리를 통해서 이동 마법으로 바로 왔으니 밸러니의 숲이 정확히 지도상에서 어디쯤에 있는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바다를 본 적 있니?”
. 신성지대에 갔을 때 봤어요.”

그 해안선을 남쪽으로 쭉 따라가면 나오는 벌판은?”
직접 가보진 않았고 지도로 봤어요. 거기가 지도 맨 아래쪽이자 남쪽이고 북쪽의 산맥과 서쪽의 바다와 함께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고 있다고만 들었어요.”

거기란다.”
?”
그 벌판 전부가 숲이었어.”
지도 한가운데에 있는 마녀왕국, 그 주변에 가득한 숲을 조금 지나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쪽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방향은 끝을 보고 완성되어있다고 알려진 게 지금 누구나 쓰고 있는 지도였다. 북쪽은 험준하고 높은 산맥이 있었고 서쪽은 제일 넓고 끝이 안 보이는 바다가 있었고 남쪽은 아무것도 없이 넓은 벌판이 있었다. 그 남쪽의 벌판이 사실은 밸러니의 숲이었던 자리라니 퍼블리는 왜 벌판을 세상의 끝이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는 눈으로 컨티뉴와 함께 노숙을 준비하는 패치를 바라봤다. 아무리 왕국이 한가운데에 있어도 비둘기들처럼 날아가는 게 아닌 이상 남쪽 끝은 멀었다.

비록 생각했던 방향은 아니지만 끝 너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나쁜 기분은 아니야.”
어디까지나 조사차 가는 거니 가는 김에 끝 너머를 보는 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 끝 너머가 세상의 끝 너머였구나. 정화 후 하늘의 현자가 어디에 있는지 한창 얘기가 많다가 결국 죽었다는 결론이 내려졌었는데 사실 살아서 숲 너머로 간 게 아닐까 퍼블리는 추측했다. 어떤 책에서는 현자가 현명하지만 슬픈 방법으로 희생을 자처해서 현자의 죽음과 동시에 숲이 정화되었다고 써져있었다. 물론 그 책을 쓴 자는 하늘의 현자 추종자로 유명해서 믿는 자는 같은 추종자 외엔 별로 없었다. 어쩌면 현자가 멀쩡히 살아있을 거라 점점 생각을 굳히고 있던 퍼블리는 잊고 있던 마법사 하나를 떠올렸다.

맞다, 용사님!”
용사?”
이제까지 본 기억들이 뭉친 패치를 만나서 혼란스러웠던 와중에 퍼블리에게 말을 걸었던 용사.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는데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나타나서 정신없는 와중이었고 다 본 후엔 마법사를 찾아 뛰어오느라 용사를 깜빡 잊고 있었다.

용사님이요!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어요!”

무슨 소리니?”
아까 기억들이 뭉친 아빠를 만났을 때 용사님이 나타나서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말을 걸었다고?”
!”

용사를 깜빡 잊은 퍼블리는 생각해보니 출생의 비밀이 담긴 기억을 보고 용사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퍼블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사가 기억 속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도 숲 어딘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사부터 찾아야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역시 제 아빠를 한시라도 빨리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용사는 멀쩡해보였지만 기억이 흩어진 지금 아빠는 어떻게 되어있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일단 용사가 어디 있는지 마법사가 알 수 있을까 싶어 물어보려는 순간 기억 속의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체에 속해 있어서 단체로 움직이는 데 익숙한 마녀와 마법사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단체들도 다 제각 학교생활이나 친구 모임 외엔 단체 생활을 겪어본 적 없는 이들도 많았다.

개별적으로 가도 결국 뒤처질 이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어요.”
역시 훈련과 실전은 다르네요.”
지쳐있는 이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지체할 순 없었다. 하루 빨리 숲으로 가서 저주가 흘러나오는 원인을 알아내야했다. 이대로 있다간 겨울이 다 지나가고 봄이 올 거다. 숲이 다시 생기를 되찾을 테고 저주가 더 빨리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이미 지쳐있는데 숲으로 데려간다고 해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누군가가 냉정하게 말을 꺼냈고 그 뒤를 이어 두고 가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친 이들은 그래도 따라갈 수 있다며 남은 힘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가지 말고 나눠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지친 이들은 잠시 쉬어서 그 뒤를 따라오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더 좋은 말로 포장하자면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누자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말이 좋아 후발대지 못 따라가는 자들은 아예 못 따라가서 결국 따라가지도 못하게 된다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왔다.

그렇다면 저희가 후발대에 남겠습니다. 저희의 가장 큰 특기 마법은 치유와 회복 계열이니까요.”

신성의 대표 홀리가 나서서 말했다. 회복 마법을 쓰면서 이들을 이끌면 충분히 뒤따라갈 수 있다는 말에 반대하던 이들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신성은 후발대에 남았고 지친 이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퍼블리는 왜 신성 측이 다른 이들에 비해 멀쩡해보였는지 이 기억을 통해 눈치 챘다.

그들은 애초에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 후발대는 숲에 들어가지 않았다.

Posted by 메멤
,

혹시 저 이후로 대화 못 한 거예요?”
그건 아니겠지만 가는 자들이 저들 뿐만은 아니었으니 시간이 부족했던 거 아닐까 싶단다.”
확실히 흑기사단과 신성만 봐도 마법사들이 수두룩한데 여기에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마녀들도 있으니 과연 모두와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저주막이 마법 수련과 오랜 시간동안 단체 이동에 대해 훈련도 하다 보니 일일이 인사를 나눌 시간은 더더욱 적었다. 그래도 아난타와 그의 동료들은 꿋꿋하게 인사를 나누러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퍼블리가 보기엔 신기할 따름이었다. 때마침 훈련이 끝나자마자 한창 저주의 위험성과 저주면역 마법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왕궁 마녀가 나타났다.

모두 집중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설명에 컨티뉴는 여전히 얼굴이 안 보이니 잘 모르겠지만 패치의 얼굴이 썩 좋진 않았다. 찌푸리거나 아예 외면해버린 건 아닌데 한기가 저절로 느껴질 정도로 싸늘한 얼굴로 왕궁 마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왕궁 마녀에게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일지 둘 사이의 거리는 꽤 먼데다 그 사이에 다른 마법사나 마녀들이 있어서 왕궁 마녀는 패치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전에 말씀하신 거와 비슷한데 맞습니까?”
맞아.”
둘의 의미심장한 대화는 주변에 있는 마녀와 마법사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퍼블리는 알아들었다. 저 왕궁 마녀가 바로 왕과 왕후의 시신을 숨긴 마녀들 중 하나라는 걸. 사실 말만 떼어놓고 듣는다면 퍼블리도 조금 머리를 굴려야했겠지만 싸늘한 패치의 얼굴이 매우 결정적이었다. 물론 패치는 컨티뉴한테 확인 받은 후 바로 원래의 딱딱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능숙한 표정 갈무리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퍼블리는 그 마녀가 설명하는 내용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비록 숲에서 장미와 책을 훔치고 왔던 이들 중 하나긴 하지만 저주에 걸리지 않고 멀쩡히 나온 마녀이니. 그런데 퍼블리는 잠깐 이상한 점을 또 이제야 느꼈다.

생각해보니 저 지금 계속 이 숲에 있는 건 물론이고 엄청 오래 있었는데 이미 저주에 걸린 거 아니에요? 원래 저주는 발현이 늦어요?”
넌 저주에 걸리지 않았단다.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저 마녀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건 엉터리야.”
그럼 저 마녀는 왜 멀쩡해요? 그리고 저는 왜 저주에 안 걸린 거예요?”

저 마녀를 포함한 도둑들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뿐이란다. 하지만 처음 들어왔을 땐 모르지만 그 뒤는...그리고 너는 나중에 얘기해줄 거란다.”
패치와 컨티뉴도 마녀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진 않는 것 같았다. 숲에 들어갔다가 저주 없이 나왔다는 걸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아예 신뢰를 할 수 없는 자들이기에 나오는 모든 말이 둘에게 닿을 일은 없었다. 용사는 이미 패치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느라 안 듣고 있었다.

마녀의 설명은 훈련보단 빨리 끝났다. 그리고 매일 반복해서 설명하러 올 거라고 덧붙인 후 그대로 다시 왕궁 안으로 돌아가고 남은 마녀와 마법사들은 저게 정말 진짜일까 미심쩍어 하면서도 종이와 필기구를 꺼내들어 방금까지 들었던 설명을 적기 시작했다.

일단 꽤 자신에 차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지?”

근처에 있어도 얼마든지 닿을 수 있지만 그만큼 미약하고 무사한 자들도 많았으니 아마 직접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된 종이를 발견해서 나름의 흥정으로 높은 의자를 샀고.”
그럼 들어간 김에 멋대로 갖고 나온 거로군요. 그리고 용사가 저번에 선물을 받은 게 있는데 그것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마디 설명과 거기에 실린 어투와 태도로 역으로 비밀을 추측해서 털어버리는 둘의 대화에 퍼블리는 소름이 돋아 팔을 쓸었다. 물론 퍼블리가 알게 된 비밀들도 아난타로 변신한 제 아빠가 알려줘서 알게 된 거였고 기억 속에서 비밀들을 알아내는 건 당연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알아내는 건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게다가 그저 단순히 제 머리 속에서 추측한 비밀을 섣불리 말할 마법사도 아니었으니 나중에 추측이 맞아들었다는 증거와 정보를 얻었을 게 분명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요?”
글쎄 역시 불안감?”

둘은 이제 왜 마녀가 순순히 저주 없이 숲에 들어갔다 나온 방법을 설명해주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불안감은 역시 저주 때문이겠지만 패치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아하니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컨티뉴도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하하 웃으며 다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 둘도 상대방이 지금당장 무엇이 목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생각보다 빨리 알게 됐다.

저와 함께 일하는 제 동료들을 포함해 여러분과 함께 밸러니의 숲으로 갈 겁니다.”
너무 뒤에서 가만히 있으면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하니 이제 직접 나서서 시선을 환기시키려는 게 목적이었다. 물론 여덟 마녀 전부 다 가는 건 아니고 그 중 반인 네 명이 다시 숲으로 가는 거였다. 일단 자신들만 멀쩡히 돌아오면 더 의심이 갈 게 분명하니 같이 가는 이들도 멀쩡히 돌아오게 하는 것도 목표라면 목표였다.

꽤 크게 뒀군요.”
뭐얼~?”
마녀가 호수에 돌을 던졌네.”

호수에 돌 던져도 됑?”

안 돼.”
안 되는 걸 했구낭!”

용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호수에 돌 던지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마법사와 마녀들이 용사가 외치는 소리에 잠깐 흘끗 돌아보다 다시 제 할 일을 하려고 시선을 뗐고 패치는 그 틈에 뛰어다니는 용사를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패치가 예상하길 용사가 숲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왕국에 와서 훈련을 받다가 다른 흥밋거리를 발견하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용사는 꾸준히 훈련을 받으며 숲으로 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패치는 제 예상처럼 용사가 다른 흥밋거리를 발견해서 숲에 흥미가 떨어져 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용사는 예상보다 숲에 가고 싶은 마음이 단단해 보였다.

물론 꾸준히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용사 성격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 천진난만함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점은 여전했고, 그 때문에 왕국 밖이나 안이나 용사를 챙기는 패치의 일상은 훈련을 제외하면 똑같았다.

왕국으로 들어왔을 때 시간은 여름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여름은 어디가고 어느새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나무가 나뭇가지만 남아 앙상해지기 시작할 때쯤 간간히 흑기사단을 만날 때와 훈련 받을 때를 제외하면 왕궁에 있었던 메르시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합니다!”
왕국에 모인 모든 마법사와 마녀들이 밸러니의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Posted by 메멤
,

넌 정말 쉽게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신중하구나.”
마법사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으로 손을 들어 턱과 입을 감쌌다.

뭐부터 말하고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할지 고민이란다. 하지만 그 전에 선택하렴. 넌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니,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니?”

갑자기 들이밀어진 선택지에 퍼블리는 당황해서 마법사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모자에 가려져 눈이 안 보이는 마법사는 그 말을 꺼낸 후론 입을 딱 닫아버렸다. 퍼블리는 눈을 꼭 감고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를 기억하고 아니카도, 선생님도, 마녀 왕국도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아빠가 아닌, 숨기기 바쁘면서도 먼저 말도 걸었던 적이 있고 함께 축제를 즐기고 저랑 계속 같이 살았던 제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퍼블리의 대답을 들은 마법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퍼블리가 무언가 더 자세히 말했어야 했나 고민하던 중 머리에 손이 올려지는 걸 느껴 깜짝 놀랐다.

신중하게 대답했구나.”
묘하게 기특한 느낌을 담아 쓰다듬는 손은 조금 차가웠다. 퍼블리는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어쩐지 굉장히 어색했다. 이렇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건 아니카를 제외하면 별로 없어서 그런 건가 생각해도 어색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아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손이 물러났다.

어차피 보다보면 네가 궁금했던 건 알게 될 거란다.”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쓰다듬었던 그 손을 바로 옆의 안개 속으로 뻗더니 그대로 옆으로 치우듯 움직이자 안개들이 손길에 따라 걷히더니 기억이 나타났다.

기억은 역시 임의로 보여주신 거였나요?”

지금부터 볼 기억은 그렇지만 그 전에 네가 봐왔던 기억은 내 말대로 흩뿌려져 있었던 거란다.”
마법사는 딱히 뭔가를 꾸민 적은 없다며 덧붙였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말하지 않고 피한다는 건 퍼블리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기억을 봐야하나 조금 고민했지만 어차피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계속 물어봐도 지금처럼 직접적인 대답은 피할 뿐이니 그냥 더 묻지 않고 기억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보다보면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아빠는 멀쩡하셔요?”

무슨 뜻이니?”

저는 기억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고 잠도 안 잤는데 일단은 멀쩡하잖아요, 아까는 피곤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은 또 괜찮아요. 그런데 아빠가 저처럼 괜찮을지는 모르잖아요?”

“...네 아버지는 어디다 던져놔도 정말 잘 살 거란다. 병에 걸려도 그 병을 죽일 자고 목에 바로 칼이 들어와도 그 칼에 목 한 번 베여주고 칼을 들이민 자를 없앤 후에 태연하게 목을 치료할 마법사야. 내 모든 기억을 걸고 장담해.”
굉장히 섬뜩한 비유에 퍼블리는 마법사를 한 번 보다가 다시 제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억 속의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패치는 아무것도 모르고 묵묵히 훈련을 받으면서도 컨티뉴와 이번에 만들어낸 저주막이를 이루고 있는 마법 이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 바빴다. 저렇게만 보면 마법 공부와 연구에 열의가 가득한 마법사처럼 보이는데 곰곰이 생각해보고 자세히 살펴보면 열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새삼 퍼블리는 아빠가 뭘 하고 싶었던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오?”
열 띈 토론이 한창이던 중 익숙한 마법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바로 아난타였다. 퍼블리는 원래부터 안경을 안 쓰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난타의 뒤에 있는 자들을 살펴봤다. 아마 그들이 아난타의 동료인 전장과 분노에 속한 이들 같았는데 모두 마법사인 건 아니었다. 마녀들도 속해있었지만 마법사측이라고 책에 적히고 그렇게 소개된 이유가 아마 상대적으로 마법사가 더 많아서인 것 같았다. 격투가라는 말에 걸맞게 그들의 팔다리 근육은 평범한 마녀와 마법사보다 더 뚜렷하고 튼튼해보였다. 컨티뉴와 패치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격투가로 유명하신 전장과 분노군요.”

컨티뉴가 먼저 그들을 안다면서 운을 뗐고 패치는 가만히 있었다. 아난타는 숲으로 같이 가게 될 마녀와 마법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얼굴을 익히러 온 거였지만 뒤의 동료들은 소문으로 듣던 하늘의 현자를 보게 되어 굉장히 영광스럽고 기쁜 기색이 만연했다. 패치는 익숙하단 얼굴로 펼쳐놓은 이론 종이들을 모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직 식지 않은 기세를 보아하니 지나가던 마녀나 마법사 하나 붙잡고 의견을 나누거나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라도 이론을 파헤치는 걸 넘어서 아예 머릿속에 새길 기세였다. 그런 패치를 잡은 건 아난타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던 건지 여쭤도 될까요?”
그렇게 해서 아난타까지 합류했다. 물론 뒤에 있던 동료들도 대표인 아난타가 합류했으니 자신들도 합류해서 이론을 살펴보고 의견을 내거나 모르겠는 걸 물어보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됐지만 현자가 괜히 현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의견을 내기는커녕 의견들을 듣는 데 바빴다. 내고 있는 건 지금까지 그래왔던 컨티뉴와 패치, 관심을 보이며 합류한 아난타 이 셋뿐이었다.

새삼 생각난 건데요.”
뭔데?”
아난타 선생님도 임시지만 괜히 선생님을 했던 게 아니란 거요.”
아난타는 이제 자신의 동료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씩 짚어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마 가르치는 능력만 따지자면 여기 앉아있는 마녀와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꽤 기억에 오래 남는 아난타의 수업을 떠올린 퍼블리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아난타가 설명하고 있어도 아직 학교에서만 마법을 배우던 어린 마녀가 이해하기엔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해있었다.

그림자가 조금 길어질 때쯤 아난타는 이제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하러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료들도 따라 일어났다. 패치도 컨티뉴와 아난타랑 의견을 나누는데 푹 빠지느라 용사를 깜빡한 걸 떠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하늘을 나는 마법을 쓰며 비둘기와 놀고 있는 용사에게로 달려갔다.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던 아난타가 그런 패치를 보고 깜빡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분의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다시 다가가 이름을 물어보기엔 용사를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패치는 바빠 보였고 아난타는 아쉽다는 눈으로 보다가 어차피 같이 숲에 가는 상황이란 걸 떠올리곤 나중으로 기회를 미뤘다.

Posted by 메멤
,

그보다 공주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전서구가 부리에다 물고 오는 바다 소식은 변함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가을 끝자락쯤에 흑기사단이 기습적으로 신성지대로 들이닥쳤다는 소식이 아니카에게 왕국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날아왔다. 바다를 계속 경계했는데도 신성측이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배를 댈 수 있는 땅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 땅이 어딘지는 흑기사단과 메르시를 제외하면 갈매기와 전서구만 알고 있었고 아니카도 굳이 어딘지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바다가 아닌 바로 땅을 통해 기습해 들어왔고 메르시가 진실을 외치며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기를 열 번 정도 계속 반복했고 아니카가 여기 머무른지 닷새 째 되는 날 그만두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고 한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문스럽지만 더 의문인 건 그동안 기습할 때마다 기습목표인 신성측에 상처 하나 없이 제압만 하고 돌아갔다는 얘기였다.
내가 높은 데 날아다닌다 해도 자리에 앉아있는 마녀나 마법사 생각은 나도 모른다.”

전서구는 그렇게 대답하며 따뜻해진 날개를 거두고 반대쪽 날개를 난로 가까이에 댔다. 따뜻한 불을 쬐며 전서구는 마지막으로 그 날의 일을 외치고 배에 오르던 메르시와 흑기사단에게 무슨 일인가 묻기 위해 다가갔던 일을 떠올려봤다. 그저 웃던 메르시와 나중에 만나자라고 당당하게 외친 흑기사.

꼭 어디 멀리 갈 것처럼 그러더라.”

 

용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울고 있던 퍼블리는 용사가 사라지고 난 후에 바로 발밑을 내려다봤다. 흙은 그대로 볼록 튀어나와있었다. 저기서 장미가 자라 피어났구나, 그것도 파란장미가. 제 품속의 유리병을 꼭 쥔 퍼블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무 뒤에서 용사를 기다리고 있던 패치가 기억이 나타나기 전처럼 서 있었다. 퍼블리는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그 아픔이 오히려 머릿속을 선명하게 만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지금 안개에 둘러싸인 이 숲보다 퍼블리의 머릿속이 더 깨끗해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아빠.”

패치는 부르는 목소리에도 여전히 그림처럼 서 있기만 했다.

혹시 저 알아요?”
아니.”

“GM할아버지는요?”
알고 있네.”
아니카는요?”
아니.”

아난타 선생님은요?”
전장과 분노의 대표를 말하는 거라면 알고 있네.”
퍼블리의 눈동자는 어떤 마법사와 색이 같았지만 빛은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눈물에 젖어있던 눈동자가 순간 거울 같은 호수처럼 반짝였다.

왜 용사를 따라다니면서 챙겨줬는지 그 이유가 기억나요?”
아니.”
퍼블리는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뒤돌아 안개 가득한 숲으로 달려갔다. 패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안개들이 퍼블리를 막는 것처럼 퍼블리의 시야를 가렸지만 다리를 막을 순 없었다. 그나마 보였던 나무들도 안 보일 정도로 주변엔 안개만 남았다. 나무에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퍼블리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그동안 지나올 때는 아프지 않던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느껴지지 않던 피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가쁠 일 없던 숨이 가쁘기 시작해도 퍼블리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왜 그러니?”
목소리가 들려오자 퍼블리는 바로 멈췄다. 처음 이 숲에서 만났을 때처럼 주위에는 안개가 가득했고 마법사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중간에 헤어졌던 마법사는 그 이후로 이 자리에 서 있었는지 아니면 달려오는 퍼블리를 마주 보러 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둘은 다시 만났다. 퍼블리는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마법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퍼블리의 숨소리가 다시 고르게 될 때 입을 열었다.

왜 여기로 뛰어온 거니?”

, 후우...아빠를 찾으려고요.”
찾았잖니?”

아니요. 못 찾았어요.”

너를 기억하지 못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아빠는 대답만 하지 않아요.”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아까 호수에 두고 온 패치를 떠올렸다. 아빠라고 불러도 반응을 안 하고 묻는 것만 대답하던 패치. 안아 봐도 되냐고 요청했을 때 아무 말도 안 했었다. 거기 있던 패치는 질문에는 답했지만 요청에는 답하지 않았다. 거기 있던 패치는 GM과 용사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퍼블리와 아니카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거기 있던 패치는 왜 용사를 챙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 있던 그동안 퍼블리가 계속 봐왔던 기억속의 패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아무도 섣불리 제 옆에 두지 않고 쉽게 누구 곁에 있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숨기는 것도 많고 그나마 말 나누는 GM할아버지한테도, 그 유명한 하늘의 현자한테도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빠예요.”

퍼블리는 마법사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속내도, 말도, 모습도 전부 숨기는 제 아빠를 그렇게 잘 안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퍼블리는 왕국으로 들어와 산 이후로 제 아빠가 학교 입학에 대해 나왔을 때와 작년의 축제 때를 제외하곤 만나고 대화했던 건 같이 사는 퍼블리 자신 외엔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Posted by 메멤
,

온 사방이 하얄 정도로 눈이 가득 쌓였다. 왕국에선 길이 미끄러울까봐 소금과 흙을 뿌려두거나 가끔 심각할 땐 선생들이 미끄럼방지 마법과 눈을 금방 녹이는 열 마법을 썼었다. 하지만 여기엔 그런 선생들은 당연히 없었고 식량과 함께 소금도 챙겨 왔지만 눈을 녹이기엔 부족했고 흙은 파서 따로 놓기 전에 이미 지금도 잔뜩 내리는 눈으로 덮여 모습을 감춘지 오래였다. 임시로 지은 집 지붕은 땅처럼 눈이 가득 쌓여있었지만 생각보다 튼튼해서 꽤 버티고 있었다. 아마 겨울동안은 버틸 것 같았다. 만약 봄에도 눈이 내린다면 그 때엔 무너질 게 뻔했다. 튼튼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로 지은 거에 비해선 튼튼한 거였으니.

멀리서 봤을 때 웬 눈덩이가 날아오나 싶었어요~”
호호 웃는 소리와 함께 거침없는 말이 전서구에게 날아왔지만 이제 전서구도 익숙한지 아니면 추웠는지 부리도 꾹 닫은 채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로 만든 집은 꽤 작아 전서구가 들어가면 마녀 하나 누울 정도의 공간만 남았다.

그래서 숲은 아직도 신기루 상태고?”
, 아직도 그러네요. 그래도 저번보단 더 선명해졌어요. 바다 쪽은요?”
땅은 진즉에 밟은지 오랜데 이상하게 발을 땅에 오래 붙여놓질 않아.”
이제는 겨울이 되어버렸지만 아니카는 축제가 한창 시작됐을 둘째 날, 퍼블리와 난데없이 헤어진 그 여름날에 멈춰있었다. 메르시를 찾아가 피리에 대해들은 아니카는 왜 그런 저주 가득한 위험한 데로 퍼블리를 보낼 생각을 했냐고 따져 묻는 대신 그 위치가 어딘지 부터 물었다. 듣자마자 갑판에 드러누운 전서구에게 달려가 어서 가자고 재촉한 후 바로 이곳으로 온 게 시작이었다. 전서구는 그 날의 일을 후에 말하길 그냥 웃는 얼굴도 어딘가 무서웠는데 그렇게 정색한 표정으로 재촉을 하니 순간 겨울이 된 줄 알고 오한이 들었고 지금도 상상하면 날개가 오들오들 떨린다고 했다. 그렇게 긴장한 건 패치가 용사에게 언성을 높이며 숲에 가는 걸 말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처음 숲이 있어야할 곳으로 왔을 땐 숲은커녕 나무도 안 보이는 허허벌판이라 전서구가 정말 여기가 맞냐 계속 물었었다. 그 때 아니카의 표정은 재촉할 때처럼 굳어있었지만 그나마 전서구 등에 타고 있는 터라 못 봐서 그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지 만약 얼굴을 봤으면 얌전히 날갯짓을 했을 터였다. 아니카는 허허벌판을 내려다보면서 여기로 오기 전에 아직 배에 있을 때 벌떡 일어난 전서구의 등 위로 올라타는 순간 들려온 메르시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무사할 거예요, 저주는 퍼블리에게 통할 수 없어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머리 좋은 아니카는 그 말을 단순히 안심시키기 위해 던진 말로 덮어 누르지 않고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눈으로 보게 됐다.

그보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나무는 물론이고 풀이나 조금 있던 허허벌판 위로 저렇게 숲이 생기다니.”

그 여름날에 왔던 허허벌판과 지금 창문 너머로 눈으로는 보이는데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숲이 같은 장소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직접 본 아니카와 전서구도 놀라워서 숲을 계속 눈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숲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처음엔 허공에 웬 나뭇잎 하나가 둥둥 떠 있었는데 다음날 다시 보니 나뭇잎 여러 장 붙은 나뭇가지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 다시 보니 나무 하나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 다시 보니 나무 열 그루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들을 반복하니 어느새 숲이 나타났다.

정화된 순백의 날 이후 저주로 가득 찬 숲은 모습을 감췄고 숲이 있던 장소에는 아직 저주가 남아있으니 위험하다며 다녀온 마녀와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책으로밖에 숲을 알 수 없는 어린 마녀들에게는 숲이 있는 장소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나마 알고 있던 그 때 당시 어른들은 애들보다 저주 무서운 줄 모르고 약새풀 찾으러 갔다가 허탕치고 왔다. 전서구와 비둘기들은 제 목숨이 귀한 줄 당연히 알고 있으니 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십년간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던 숲이었다. 그런데 그런 숲이 이제야 갑자기 나타난다는 건 무언가 다시 숲의 모습을 드러내게 할 요소가 있었다는 거고 아니카는 그게 뭔지 눈치 챘다. 바로 피리 불고 숲으로 들어간 퍼블리임이 틀림없었다.

저 신기루 안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렇게 드러나는 모습이 넓어지고 있을까.”
아니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숲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전서구는 난로 옆에 제 날개를 가까이 대며 지난 몇 달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봤다. 누가 그 붉은 머리 마법사의 아이 아니랄까봐 퍼블리는 무모하게 돌격하기 바빴고 누가 그 무모한 아이의 친구 아니랄까봐 아니카는 좋은 머리를 굴려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바빴다. 전서구는 그 여름날, 허허벌판으로 내려올 때 설마 아니카가 무턱대고 숲을 찾으려고 땅을 파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다행히 아니카는 그러지 않았고 땅 한 번 밟은 후 다시 전서구의 등 위로 올라타 왕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전서구는 기쁨을 느끼기 전에 의외와 의아함을 먼저 느끼고 눈을 굴려 제 위에 타고 있는 아니카를 보려고 했지만 아니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무슨 개인 이동수단이여?!”
소식을 전하고 보여주는 비둘기 우체부 대표지요~”
아니카는 학교가 끝날 때마다 매일 그 허허벌판으로 태워다주고 바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냐고 했다. 요컨대 일단 자신의 수업일수는 채워야한다는 거였다. 제 현실도 챙기고 원하는 일도 챙기는 바였다.

따지자면 나도 할 일이 있다고!! 내 원래 직업은 비둘기 우체부인데 직업도 아닌 공짜 이동수단 한 게 대체 몇 번인...”

물론 아니카는 머리가 좋았다. 공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니카가 전서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고 전서구는 흥분해서 치뜬 눈과 벌린 부리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이이이이이이이이거....”
이제 값 치르면 되죠?”
아니카가 내민 건 약새풀이었다. 일단 저주를 먹은 풀이라고 불리지만 지금의 마녀와 마법사의 인식은 그래도 그 가치는 매우 뛰어난데다 귀하기까지 해서 굉장히 비싼 풀이었다. 그건 비둘기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밸러니의 숲이 사라진 이후론 이제 한자리에 고정되어 자라지도 않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자라는 풀이었다. 줄기 하나만 발견해도 주먹만 한 금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는 바로 그 풀이었다.

전서구는 아까 전엔 흥분해서 외쳤던 거고 지금도 충분히 흥분한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한 풀을 그것도 아직 어린 마녀에게서 받아낸다는 건 좀 미안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 빨리 두 날개가 사뿐히 날듯이 모여 그 귀한 풀을 고이 받쳤다. 물론 그 풀은 퍼블리네 집 뒷마당에서 하나 뜯어온 거였고 당연하게도 아니카의 손해는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전서구는 겨울 방학이 오기 전까지 아니카를 극진히 모시다시피 하며 점점 숲이 드러나고 있는 벌판과 왕국을 왕복했다.

그리고 겨울이 됐을 때 아니카는 더 이상 왔다갔다 하지 않고 왕국 밖으로 여행 나가는 마녀들이 자주 쓰는 휴대용 임시 집을 사서 아예 숲 옆에 눌러앉았다. 그 후 아니카는 전서구가 없는 동안 벌판을 가득 메운 숲을 살펴보기 위해 다가가 봤지만 손을 뻗으면 나무의 꺼끌하고 딱딱한 감촉은 손에 닿지 않았고 오히려 나무가 안개처럼 흐려지기 바빴다. 손을 떼니 나무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마침 날아오고 있던 전서구가 저주 받으려고 작정했냐며 잔소리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숲의 상태는 신기루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아냈다. 전서구는 아니카가 여기 눌러앉은 이후로 식량과 생필품과 바다 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데에 쓰이는 돈은 퍼블리네 뒷마당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Posted by 메멤
,

 

 

하나는 얼음

 

하나는 냉기

 

둘이 되는 봄으로

 

손을 맞잡아

 

여름을 부르는 숲 위에

 

모든 걸 지켜보는 햇빛 아래에

 

숲을 밟는 둘의 발은

 

어느새 산들바람이 되어

 

 

 

 

 

 

 

 

 

                                                                                                   -모글리제-

Posted by 메멤
,

왜 울엉?”
속상...해서요.”
왜 속상행?”
서럽고...아는 것도 정말...없었다는 게 너무 슬..프고, 서럽고, 과거보단 그냥...그냥 아빠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 알...고 싶었고 그리고....”
눈물이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퍼블리는 손을 들어 닦지도 않았고 참지도 않았다. 호수에 빠지지도 않았는데 물속에 가라앉아 숨이 틀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꿨던 꿈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꿈에서는 호수에 빠졌어도 바로 앞에 있을 제 아빠를 만나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지금은 제 아빠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힘이 쭉 빠졌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꿈속에서 호수에 뛰어들었을 때도, 각오하면서 정말 위험하게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렇게 숨 막히진 않았다.

왜 그랭?”

저도...”
모르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퍼블리는 이제야 이상한 걸 눈치 챘다. 다른 이유로 이상하게도 지금은 퍼블리가 먼저 묻지 않으면 질문은 물론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게 패치였다. 그런데 누군가 퍼블리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자 왜 우냐고 물었다. 여기 있는 건 퍼블리와 패치 외엔 아무도 없었는데 패치가 물어본 거라기엔 목소리도 말투도 패치가 아니었다. 기억들을 함께 보면서 오다가 중간에 헤어진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처음 들어본 목소리는 또 아니었다. 퍼블리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그대로 가만히 인형처럼 서 있는 패치가 있었다. 아니 이제는 너무 가만히 있어 밤하늘과 나무들과 호수를 배경삼은 그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퍼블리는 천천히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쳤당~!”
분명 기억 속에서만 움직이고, 기억 속에서만 말을 하던 용사가 호수 위에 서 있었다.

용사...?”
아빠의 동료 이름을 그냥 부르다가 한 박자 늦게 존칭을 붙였다.

안녕!”
제 이름이 불린 용사는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기억처럼 첫 만남인 한 번 빼고는 한결같이 해맑은 마법사였다. 용사는 패치보다 조금 더 키가 커서 그런지 패치는 바로 앞에 있고 용사는 호수 위에 서 있어 조금 더 떨어져 있는데도 이렇게 얼핏 보면 둘의 키가 같아보였다.

이제 안 속상해~?”
...그 저기...속상하기 이전에 용사님...?”
!”

...아빠랑 같이 다니던 용사님 맞으시죠...?”

!”

정말 이 상황에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해맑은 용사였다. 퍼블리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얼굴 위에 표정으로 띄웠다. 용사는 퍼블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웃고만 있었다.

...왜 여기 계세요?”
~속 여기 있어썽!”
언제부터요?”
요기 숲에 처음 왔을 때부터!”
숲에 처음 왔을 때가 퍼블리가 숲에 처음 왔을 때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용사가 이 숲에 처음 왔을 때부터인지 헷갈렸다. 만약 후자라면 숲으로 들어간 정화의 날 이후로 절대 안 나갔다는 얘기였다. 일단 전자든 후자든 적어도 퍼블리가 피리를 통해 이 숲에 막 왔을 때 숲에 있었던 건 패치와 중간에 헤어졌던 마법사뿐만 아니라 용사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숲 밖으로 안 나갔어요?”
기다리느라!”
누구를요?”
그 말에 분명히 계속 웃고 있었는데도 마치 그보다 더 위에 웃음이 또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용사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주위까지 환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맑고 환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었다.

, 하늘이 밝아졌어?!”

분명 방금 전까지 하늘은 별이 가득했던 밤하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푸른 하늘로 바뀌어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퍼블리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용사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호수 위에 있었던 용사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깜짝 놀란 퍼블리가 재빨리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패치도 사라져있었다. 다시 아빠를 부르며 찾으려던 순간 뒤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또 사고 쳤나보군.”

순간 퍼블리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패치가 전서구를 뒤로하고 호수 옆에 쪼그려 앉아 들개들과 함께 있는 용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다가오는 패치를 발견한 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새로운 친구야!”

봤던 기억이자 다른 기억들과 다르게 중간에 사라졌던 기억들이었다. 퍼블리는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눈앞의 모든 것에 눈을 떼지 않았다. 패치가 용사의 손에 담긴 걸 보고 당황한 얼굴이 됐다. 여기에서 갑자기 기억이 흐려지고 사라졌었다. 다시 나타난 지금은 그 때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퍼블리는 이 모든 걸 눈으로 본적은 없었다. 다만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모든 걸 느끼고 있었고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너무 오래전이라 제대로 생각이라는 게 있기도 전이라 떠오르지 못했을 뿐.

새 칭구야!”
패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패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용사를 찾으러 메르시를 찾아갔었고 메르시를 만났을 땐 이미 용사가 여기로 와버렸으니까. 다시 쪼그려 앉은 용사는 곧 흙을 파내더니 손에 쥐고 있었던 걸 그 안에 넣고 다시 흙을 덮었다. 그리고 용사가 일어나는 동시에 눈앞이 일렁이더니 하늘이 다시 밤하늘로 변했다.

친구야, 친구야 나랑 같이 가자.”

흙을 덮은 날 바로 밤에 용사가 다시 여기로 온 건지 덮은 부분은 낮이었던 방금 전처럼 그대로 볼록했다. 용사는 거길 토닥이며 재촉 아닌 재촉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언제 나오는 거야?”
오늘 바로 심은 게 올라올 리가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 나무 뒤에서 패치가 용사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웅~ 메르시가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었는데...”
용사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대로 일어나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앞에 퍼블리가 있었던 터라 기억 속인데도 퍼블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퍼블리 셔.”

고요한 숲, 그 한가운데에 있는 맑고 깨끗한 호수, 바로 그 옆에 심은 장미씨앗.

얼른 나와서 나랑 같이 가자 퍼블리.”
어느새 퍼블리는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번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Posted by 메멤
,

아빠아아아아아!!!”

퍼블리가 달려가는 동안 다행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그렇다고 퍼블리의 외침에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잠시 주춤했지만 조심스레 패치의 옆으로 다가갔다. 퍼블리가 바로 옆으로 다가갔는데도 패치는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계속 호수만 보고 있었다. 퍼블리가 조심스레 아빠라고 불러도 전혀 안 들리는 것처럼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손을 뻗어 패치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패치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아빠?”

퍼블리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시 제 아빠를 다시 불러봤지만 패치는 아까처럼 또 아무 말도 안하고 호수를 보듯 퍼블리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느낀 퍼블리는 자기도 모르게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찾으러 왔어요.”

누구를?”
누구긴요, 아빠요!”
패치는 또 입을 다물었다. 이건 무언가 이상한 게 아니라 확실히 이상했다. 퍼블리는 조심스레 옷자락을 놓았고 패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하다못해 퍼블리에게 왜 이 위험한 숲으로 왔느냐고 소리치는 게 정상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정말 고개 돌리기 전까지 계속 보고 있던 호수를 보듯이 퍼블리를 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패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요? 제가 왜 여기로 왔는지 안 궁금해요?”

자네가 여기로 오기로 결심했으니 자네는 여기 있는 거지. 내가 궁금해 할 이유가 없네.”

그 말을 들은 퍼블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패치가 이상한 게 맞았다. 퍼블리는 뭐라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지만 모두 엉키고 뭉쳐서 잘 나오지 않아 입만 달싹였다. 패치는 여전히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복잡한 눈으로 패치를 보고 있던 퍼블리는 잠시 패치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아빠를 찾으러 여기 왔어요.”

패치는 역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만약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면 인형인 줄 알았을 정도로 정말 모든 게 잔잔했다.

아빠한테 묻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고 천천히 대화도 하고 싶었어요, 아빠랑 같이 있으면서도 아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아빠가 정말 저를 사랑하는 걸까, 언젠가 나를 툭 두고 떠나버리지 않을까 막연히 불안하기만 했고 그렇다고 물어보면 정말 떠날까봐 묻기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그대로 있으면 더 답이 없다는 걸 겨우 깨달아서요.”
퍼블리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엇을 물어봐야할까, 무엇을 먼저 말해야할까.

일단 아빠 과거가 궁금했어요. 다른 애들이 다 엄마에 대한 걸 말했을 때 전 딱히 뭐라 말할 게 없었어요. 다들 예전에 엄마가 어디 학교를 다녔었다, 무슨 일을 했었다, 지금도 무슨 일을 한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전 하나도 몰랐죠. 아빠가 항상 집에 있고 간혹 가다 제 숙제와 공부를 도와주고 예전 집에 대해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다는 거 외엔 아무것도 몰랐어요.”
늘 옆에 앉는 아니카가 아니라 앞에 앉았던 같은 반 친구가 언젠가 말했었다. 엄마가 사과를 정말 좋아하셔서 언제나 아침에 사과를 먹는다고 말했었고 또 오르골을 좋아해서 생일날 때 오르골을 선물해드렸는데 정말 좋아해서 안아줬다며 자랑스럽고 행복한 얼굴로 말했었다. 퍼블리는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너는 어땠냐며 물었을 땐 비밀이라고 얼버무렸다. 자기도 말해줬으니 너도 말해달라고 졸라도 그냥 웃었다. 퍼블리는 아빠가 어떤 과일을 좋아하는지, 생일이 언젠지도 몰랐다. 무슨 물건을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포옹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퍼블리는 그런 거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어볼 때 그냥 웃었다. 울고 싶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딱히 크게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네.”

어떤 물건을 좋아하세요? 오르골?”
책을 선호하지, 오르골은 있으면 나쁘진 않지만 굳이 갖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진 않네.”
생일은 언제예요?”
“831일일세.”
그럼 포옹은 좋아하세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크게 좋아할 것 같진 않군.”

사과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네만.”
퍼블리는 잠시 묻는 걸 멈췄다. 또 뭘 물어봐야할까 고민했다. 패치는 퍼블리가 물어도 무시하거나 그냥 그렇다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면서 넘어가지 않았다. 퍼블리가 빤히 바라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면서 대답했고 대답도 크게 막히는 게 없었다. 정말 딱히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거 외엔 잘 대답했다.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크지 않다고 대답했고 오르골보단 책이 더 좋았고 생일은 831일이며 포옹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지만 그리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혹시나 싶어 콕 집어본 사과도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매일 먹을 정도로 좋다고 하지도 않았다.

딸기는요?”
자라는 것도 드물고 먹기도 좀 힘든 거라 잘 모르겠군.”

책은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웬만한 마법서적은 다 좋아하네.”
하늘의 현자가 속했던 마법사들 중 하나였던 게 진짜예요?”
그와 같은 조를 이루긴 했지.”
그럼, 그럼....”
퍼블리는 지금 떠오르는 대로 묻고 있었다. 어쩌면 굉장히 자잘하면서도 티가 나지 않으면 모를만한 것들과 본인이 알아낸, 우리 아빠는 이런 마법사였다! 라고 자랑할 만한 엄청난 과거를 확인 차 묻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물어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퍼블리는 물으면서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퍼블리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꺼냈다.

안아...봐도 돼요?”
패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퍼블리는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퍼블리는 울고 있었다. 입술을 꾹 문 채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퍼블리 자신도 몰랐다. 그냥 울고 싶었다. 퍼블리는 계속 울었다. 고개를 숙인 채.

Posted by 메멤
,

컨티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말하진 않았다. 그리고 퍼블리는 저 말들이 무슨 뜻일까 머리를 굴려 해석해보려고 했지만 경계심을 벽에 비유한 거 밖에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확실한 건 용사가 지금 모습과 맨 처음 패치와 만났을 때의 모습이 다른 이유가 패치 때문이라는 거였고 컨티뉴는 그에 대해 계속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패치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게 떡하니 보였고 결국 대화는 이어가긴 했지만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보고 있는 입장에선 아무것도 몰라도 답답해보였다.

아빠는 원래부터 자기 얘기를 말하기 꺼렸구나.”
다만 주위 마법사들은 패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제 아빠가 퍼블리에게 많은 걸 숨겼던 건지 아니면 퍼블리가 아직 꿰뚫어보기 어려웠는지 퍼블리 스스로가 의문이 들어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패치를 빤히 바라보면서 따라가기도 했다. 기억 속의 패치는 퍼블리의 아빠인 지금 보단 어떤 의미론 접근하기 어려워보이진 않았다. 아마 주변에 용사와 GM, 컨티뉴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덜 딱딱해 보이는 것 같았다.

메루시다 메루시~!”

공주님이요?”
저 멀리 흑기사단과 함께 오는 메르시가 보였다. 그리고 퍼블리는 흑기사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아직 밸러니의 숲으로 들어가기 전이니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흑기사단은 저주에 걸리기 전이나 걸린 후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유쾌해보였다. 지금은 메르시가 함께 있어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선 행복해보였지만 왕과 왕후의 죽음이 알려진지 아직 한 해도 넘지 않아서 그런지 조금은 가라앉아있었다.

? 공주님과 아는 사이인가?”

메루시가 나한테 새 칭구 맡겨줬엉!”
새 친구라면 저번에 말했던?”

! 나랑 가치 갈 칭구!”
용사가 말하는 새 친구는 대체 누구일까. 컨티뉴는 용사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지만 용사는 새 친구는 새 친구라는 말 외엔 더 꺼내지 않았다. 같이 간다는 건 무슨 얘기일까. 늘 그렇긴 하지만 용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패치도 몰라보였다. 하늘의 현자는 알고 있을까, 용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과 왕후 없이 이 왕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메르시는 처음 만났던 깨어났을 때, 축제에서 만나고 사라졌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치의 기억 속에서도 작았고 퍼블리의 기억 속에서도 작았던 어린 마녀였다. 메르시는 옆에 흑기사를 두고 뒤에 왕궁 마녀들을 열 명 두면서 여기 모인 마녀와 마법사들에게 모여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숲의 저주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금이라도 두려우신 분은 떠나도 괜찮다는 말을 했다. 퍼블리는 패치의 곁으로 다가가 저 위에 서 있는 메르시와 흑기사를 눈에 담았다. 메르시는 퍼블리가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날을 잠들어 있었고 흑기사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산채로 몸이 썩어갔다. 둘은 분명 지금 이렇게 각오를 하고 숲으로 가는 동안에도 숲 안에서도 계속 각오를 다졌겠지만 후회하진 않았을까.

새 칭구는 이름이 모야~?”

용사의 말에 퍼블리가 용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기억이 사라졌다. 용사가 말한 새 친구를 보나 싶었는데 기억은 여기까지였는지 보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퍼블리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메르시와 흑기사를 봤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근데 옛날에도 숲이 이렇게 안개로 가득 찼었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가득했던 처음에 비해 바로 앞의 나무들이 보일 정도로 조금 사라지긴 했지만 고개를 올려보면 여전히 하늘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퍼블리는 또 이상한 걸 느꼈다. 안개가 가득하다 해도 밤이 되면 어두워지는데 여긴 하얀 안개만이 가득했다. 퍼블리는 또 제 둔해진 감각에 놀라면서도 여기 들어온 이후로 계속 여러모로 둔해지지 않았냐며 바로 신경을 끄려 했다. 이젠 무신경한 스스로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여기에 적응한 건가 싶기도 했다.

괜차나?”
용사의 목소리가 또 들려오는 걸 보면 기억이 다시 나타나려고 하는 건가 싶어 퍼블리는 기다렸다. 하지만 눈을 깜빡인 게 스무 번이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섯 번 더 기다리던 퍼블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기억이 안 나타나면 이렇게 또 걸으면 된다.

“...그런데 왜 안 나오지?”
서른 걸음에서 세는 걸 멈추고 계속 걸었는데도 기억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억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나타나는 게 늦는 건가 싶은 순간 퍼블리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빽빽한 나무들이 멈추고 안개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기억이 나타났구나.”
퍼블리는 제 옆에 있는 나무에다 손을 대며 담담하게 앞을 바라봤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고 그 아래 거울 같은 호수가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호수 가까이 가볼까 싶었던 퍼블리는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주변에 있는 빽빽한 나무들도 퍼블리처럼 밤하늘을 담은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에워싼 것처럼 호수에 비춰지지 않을 거리에 자라 있었다. 그리고 퍼블리의 맞은편, 호수 바로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나타난 건 당연하게도 기억의 주인인 패치였다. 퍼블리는 얌전히 기억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조금 멀리 있어서 패치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몰라 퍼블리는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둘은 완전히 마주보게 됐고 퍼블리는 얌전히 그 자리에 서서 패치를 지켜봤다. 패치는 퍼블리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얌전히 서 있었다. 퍼블리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지금까지 뻐근하지 않던 제 다리가 조금씩 뻐근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아빠?”
퍼블리가 조심스레 불러봤지만 패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미동 없이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퍼블리는 이 상황이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 직접 겪어본 적은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싶었던 퍼블리가 제 손등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설마...”
퍼블리는 제 손등을 문지르다가 조심스레 무릎을 굽혀 호수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밤하늘 위로 제 얼굴이 비춰졌다. 가만히 보고 있던 퍼블리는 제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천천히 호수에 제 손을 담가봤다. 차가운 호수물이 퍼블리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아빠!”
퍼블리는 벌떡 일어나 패치에게로 뛰어갔다. 이번엔 호수를 가로지르지 않고 빙 돌아서 달려갔다.

Posted by 메멤
,

이렇게 된 거구나...”
저주가 가득한 숲인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텐데도 모집 문구를 보고 온 마녀와 마법사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인 모두가 숲으로 갈 수는 없었다. 주의사항과 저주에 관해서 듣는 것은 물론, 비상사태에 대비해 훈련을 시작했다. 각각 저주에 반응하는 정도도 다르니 탐지계열로 저주에 민감한 게 아닌 말 그대로 저주 자체에 민감해 저주에 걸리기 쉬운 마녀와 마법사들은 모두 제외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컨티뉴가 방어마법을 손보기 시작했는데 목표는 저주를 막을 방어마법인 저주막이를 만들어내는 거였다. 예전부터 저주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는지 정보를 모아놨던 컨티뉴는 패치는 물론이고 여기 모인 실력 좋은 마녀와 마법사들과 함께 만들어냈는데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존재하는 저주막이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저주막이를 만들어냈다. 저주가 꽤 오래전부터 존재해오고 그만큼 시간을 많이 먹어온 저주이니 이렇게라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저주막이가 생긴 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마법연구를 하시는 분이니 저주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자세하고 방대한 정보를 모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비록 시작은 예상한 바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이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거든.”
저주가 그대로 숲에만 있는 게 아니라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상 그 사실은 언젠가 밝혀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저주를 막아내거나 없애야했다. 아니면 저주가 흘러나오지 않더라도 나중에 저주를 먹고 자라는 약새풀을 대신할 게 생기거나 필요 없어질 때, 혹은 저주 자체가 불안해 없애기 위해서 방법들을 만들어낼 마녀나 마법사들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컨티뉴는 전자와 후자 모두 생각하고 미리 저주에 대해서 정보를 모아왔던 거였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지금처럼.

모든 건 때가 있기 마련이고 전혀 나와 상관이 없었어도 결국 내가 있는 쪽으로 흐르게 돼. 특히 이렇게 큰일은 누구에게나 다 흐르게 되지.”

다른 것도 아니고 나타난 세월도 까마득한 저주가 흘러나오고 있으니 누구나 다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패치는 그렇게 납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컨티뉴는 여전히 얼굴은 안 보였지만 고개를 패치에게서 돌리지 않는 걸 보면 패치를 계속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네는 여기로 온 걸 후회하고 있나?”

아뇨.”

그럼 용사를 막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나?”

그럴 겁니다.”

그건 자네가 후회할 게 아니야. 용사의 선택이었지.”
패치는 뭐라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지켜보고 있던 퍼블리가 생각해도 용사는 확실히 눈을 떼면 어찌될지 굉장히 불안했다. 거기다가 가고 싶다는 데가 밸러니의 숲이니 불안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불안과는 별개로 패치가 어째서 용사를 그렇게나 신경 쓰는지는 아직 모르니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자네 혹시 운명이라는 걸 믿는...절대 안 믿겠군.”
운명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이 저를 쳐다보는 패치에 컨티뉴는 바로 알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과는 다른 식으로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이 마녀와 마법사의 목숨이나 제 주변을 감싸고 있는 상황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걸 운명이라고들 말하지, 다른 뜻도 있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운명은 바로 이 뜻이고 이에 대해 자네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

갑자기 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걸까. 패치는 의아한 눈으로 뒤에 더 나올 말을 기다렸다.

나는 운명이라는 걸 반쯤은 믿는데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은 바로 살면서 이루는 관계고 그걸로 주변상황이 정해진다기 보단 변하고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얘기를 듣고 패치는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어쩌면 예전부터 자신과 이 얘기를 나누려고 기회와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습니까?”
그냥 자네의 얘기가 듣고 싶을 뿐이야.”

저 같은 경우엔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치는 그렇게 딱 잘라 말했고 컨티뉴는 예상했는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진 않았다. 패치는 이 얘기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고 얼굴이 다 가려져 있는 컨티뉴는 도통 무슨 표정을 짓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네의 경계심은 흔히 보이는 가시처럼 튀어나와서 다가오려는 자들을 물러나게 하는 모양이 아니야, 마치 마법사의 형상으로 쌓아올린 벽 모양이지. 손을 뻗어도 만질 수는 있지만 그 속을 만질 순 없고 틈새 없는 경계심만 만져보다가 결국 물러가게 하는 식이라 어쩌면 가시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어. 자네 같은 경우가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패치는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컨티뉴가 꿰뚫어보고 그대로 말하고 있는 거에 대해 크게 놀라진 않았다. 애초에 스스로 만들고 대놓고 내보이는 경계심이었으니 이렇게 알아보는 자가 있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패치는 컨티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자네가 편하다면 상관은 없어. 내가 예전의 자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경계심이 많고 단단한 건 무언가 아주 큰일을 겪었기 때문이겠지, 원래부터 있었고 단단했을 벽이었겠지만 자네는 그 정도가 너무 커.”

나쁠 건 없습니다.”

이미 나쁘게 작용했지, 죄책감이 섞여버렸으니.”
패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동요도 하지 않았고 불쾌함도 담지 않았고 늘 찌푸렸던 눈썹도 찌푸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책 내용을 듣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어보였다.

부디 그 벽으로 스스로를 짓누르지 않길 바라.”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