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녀에게 길러진 마법사였다.

내가 주위를 제대로 인식하고 당시 상황을 기억 속에 깊이 새길 때쯤 맨 처음으로 선명하게 들은 단어는 바로 미안이었다.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따라하고 몇몇 단어들은 또렷이 말하게 됐을 때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걸 알고 싶으면 알고 싶은 걸 먼저 말하고 뭐야? 라고 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깨닫자마자 말했다.

 

미안이 뭐야?”

 

그 때 매일 미안하다고 말하던 마녀가 지었던 표정을 말해보라고 한다면...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눈여겨보지도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 외엔 나올만한 게 없었다. 다만 나를 기르고 있었던 마녀의 상태가 이상해졌는데 말을 가르쳐주는 내내 같은 말 하나를 하루에 열 번씩은 반복해서 말하게 했다.

 

괜찮아.”

 

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이면서도 이때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말이었다. 그 뜻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그저 반복해서 말하게 했으니 나는 당연하게도 별 생각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마녀는 그 말 자체를 좋아하는가 싶었더니 어느 순간엔 울기 시작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긁어댔으며 나중에는 내 목이 자기 뺨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내 목을 조르듯이 긁어댔다.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자기 뺨을 긁어대다가 내 목을 긁는 걸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긴 있었다.

 

괜찮아가 뭐야?”

 

그렇게 물어본 이후였었다. 아픈 게 싫었던 나는 마녀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틈 사이로 숨었고 마녀는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내 이름을 불러대곤 했었다. 어느 날은 못 찾고 어느 날은 찾는데 성공했는데 못 찾았을 때는 높은 찬장에 있어 내가 손을 못 대는 곳 위에 올려놓은 병을 들어 입에 가져다 불어댔고 찾았을 때는 틈 사이로 팔을 구기듯 넣으며 나를 끌어내려고 안달을 냈었다. 작았을 때는 잡히지 않았지만 몸이 커지면서 쉽게 잡히자 나는 틈 사이로 숨는 걸 포기하고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있었다.

 

어디 갔어!!”

 

문에서부터 열 발자국 떨어져도 소리치는 게 굉장히 생생하게 들려왔었다. 그 소리가 참 듣기 싫어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아무 데나 가곤 했었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면 금방 배고파지는 게 싫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멀어져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해가 질 때쯤이면 마녀도 지쳐서 멍하니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아프고 부어오른 목을 부여잡으며 완전히 떠나버릴까 했지만 흙바닥은 앉아만 있어도 거칠고 딱딱했으며 밤공기는 물보다 차가웠다. 배까지 고프기도 해서 짜증낼 힘도 없이 멍하니 누워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까만 게 잔뜩 박힌 작은 덩어리들이었다. 그 땐 열매라는 개념도 몰랐고 꽃과 다르게 생긴 덩어리들은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막연히 알고만 있어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잽싸게 따서 입에 욱여넣기 바빴다. 아직 제대로 익을 시기가 아니었는지 단맛보다 시큼한 맛이 먼저 터져 나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모두 목 뒤로 넘겼다.

 

밤늦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찾으러 나온 마녀는 나를 끌어안으며 계속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다신 안 그러겠다고 절박하게 외쳐댔다. 나는 그 외침을 흘려들으며 덩어리들이 가득했던 풀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녀가 나를 들어 올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때에도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는 마녀 스스로가 말한 대로 다신 그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참는 듯 했으나 어디까지나 마녀 입장에서 최대한이었으니 완전히 그런 행동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보다는 확실히 줄어들고 자주 밖으로 안 나가도 돼서 조금은 편해졌지만 귀찮고 아픈 건 똑같았다. 울부짖는 순간이 불규칙적으로 변해 미리 폭력을 피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날아오는 손보다 더 빠르게 피하는 순발력을 키우게 됐다. 오히려 더 약이 오르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다음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일이 많아 잡히지만 않으면 바로 바깥으로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마녀가 참고 있는 동안엔 본격적으로 글을 배웠다. 시기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동안 바깥으로 나가있는 시간만큼 하루 종일 단어를 외우고 같은 문장들을 반복해 쓰면서 익히니 늦었다는 흔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얀 풀들이 나부..나부키고?”

 

나부끼고.”

 

..널버...넓어져서 모두가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마녀는 잘못 읽거나 힘들어하는 부분을 고쳐주는 걸 좋아했고 그런 날은 폭력이 일어날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일부러 더듬어 읽었던 때가 많았다. 마녀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그 외에 무언가에 대해 알려주려고 할 때마다 목소리 끝이 천장을 두드릴 것처럼 올라가기 바빴다.

글을 더듬어 읽는 걸 그만둔 건 마녀가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였다. 나를 가르치는 데에 의욕을 두던 마녀는 그것마저 지루해졌는지 아니면 지쳤던 건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창밖에 시선을 던져뒀다.

마녀의 상태가 어찌됐든 더 이상 아플 일이 없다는 것과 멍하니 있을 땐 주변을 살펴보지도 못한 다는 걸 눈치 챈 나는 마녀가 서랍 깊숙이 숨겨뒀던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이제까지 읽어왔던 책과는 다른 느낌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건 누군가의 기록 아니면 일기로 추측되었다.

그 마녀가 쓴 일기는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는 몇몇 부분만 제외하면 있었던 일을 객관적이게 적어놓거나 무언가를 보고 관찰한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기록이라는 단어를 몰랐었고 읽을거리가 책 아니면 일기 외엔 모르던 때라 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었다.

 

심은 이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실패.

불안정한 시험 장소로 인해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의 눈이 곳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실험은 잠정폐쇄.

씨앗하나가 사라졌다.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기억에 남는 부분만 따로 적어서 틈 날 때마다 읽었는데 따로 적은 부분이 바로 저 문장들이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마녀가 언제 일어날지 몰라 급하게 적은 것들이니 온전한 문장들은 아니었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이 전부 담겨 있어 문제는 없었다.

마녀에게는 관심이 없었지만 마녀가 쥔 비밀들에 관심이 있던 나는 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집안 곳곳에 마녀가 숨겨놓은 정보들을 찾아냈다. 마녀의 비밀엔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사과와 폭력의 대상이 담겨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대상이 누군 줄 알게 되면 더 이상 내가 아플 일도, 귀찮을 일도 없을 거라며 지금 생각해도 참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찾아낸 정보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엔 그 바탕이 되는 상식과 세부적인 지식들이 필요했다. 기본적인 역사는 가르쳐주니 문제가 없었지만 그 외의 나머지가 문제였다. 세부적인 지식은 둘째 치고 요정을 좋아할 법한 아이들도 지루해할 평화로운 동화와 옛 전설에 대해서만 읽어주고 알려주는 마녀에 지식 또한 내 스스로 쌓아야한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참 끝까지 도움이 안 된다는 불평을 바로 앞에 내뱉지 않도록 조용히 삼키면서.

 

예전부터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었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집을 부술 것처럼 두려워하던 마녀는 어느 순간 자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폭력도 완전히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려워할 게 없기 때문에 안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포기, 체념에 더 가까워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상세하고 정확하게 정의 내릴 줄은 몰랐지만 위험하다는 거 하나만은 잘 눈치 챈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바로 도망쳤다. 마녀는 내가 도망치는 것도 모르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가거나 아니면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폭력 때문이 아닌 뭔지 모를 위험함 때문에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 중에서 겁이 제일 많았지, 마녀들 많은 거리도 나가기 힘들어했었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다른 마녀들이랑 뭉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을까 신기해.”

 

언제 그 위험함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유는 중요해 보이는 내용들이 많은 것 같아서였고 실제로도 중요한 내용이 맞았다. 바깥에 나가서 오늘 들은 이야기와 전날에 들은 이야기 그보다 훨씬 전에 들었던 것들 전부 곱씹고 되씹으면서 기억 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제대로 아는 게 없고 배워놓은 게 엉망이었으면서도 나름대로 정보라는 걸 쥐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아픈 게 싫었고 마찬가지로 귀찮은 게 싫었다.

 

체념과 함께 갑자기 나타난 위험함은 갑자기 끝났다. 거기에 이어 내가 마녀로 인해 아플 일도 귀찮을 일도 없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실 물은 물론이고 씻을 물도 없어서 작은 통을 들고 근처에 있는 강에 몇 번 왔다갔다 물을 날랐다. 창고 옆의 큰 물통을 전부 다 채우고 얼굴을 다 씻은 후 수건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집에 들어갔었다.

끼익 천장을 잇는 나무가 대신 비명을 질러주는 것 같았다. 물론 내 비명은 아니었다. 끼익끼익 두 번 울리면서 아주 예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닌 만큼 상처도 많이 생겼다는 발이 흉터를 내보이며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발을 보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보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마녀가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을 주었지만 곧바로 관심이 없어졌다.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못 느낀다 해도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는 아파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는 아픈 것과 귀찮은 것, 이 두 가지가 제일 싫었으니 바로 고개를 돌려버린 건 당연했다. 그 때 저 위에 천장과 끈 하나로 이어진 마녀의 마지막 표정을 말해보라고 한다면...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눈여겨보지도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 외엔 나올만한 게 없었다.

Posted by 메멤
,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드니 난감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인다. 마법진을 설계하면서 몇 번 얼굴을 봤던 마법사였다.

 

...몇 번 불렀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급하게 피라도 닦으세요.”

 

물수건을 건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고맙다고 대답한 후 받아들이자 도망치듯 급하게 뒤돌아 뛰어간다. 물수건으로 목과 팔을 닦자 피가 잔뜩 묻어나온다. 이건 내 피가 아니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용사가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사고가 일어나는 거였다. 팔다리 날아갈 각오는 물론이고 숲이 뒤집어진 시점에서부터 이미 대형사고가 난 거나 다름없었지만 책장에 깔리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져 날리는 바위들이나 물은 마법사들에겐 자체 마력저항이 기본적으로 있으니 부상의 정도가 실제보단 옅었다. 하지만 용사는 실제로 책장에, 그것도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에 깔렸다.

굳어있던 것도 잠시, 달려가 책장과 책들을 치우자 가장 먼저 보인 게 묻어서 떨어지는 피였다. 그리고 그 아래엔

 

다행히 바다 근처라 큰 마을이 많아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어. 응급처치가 좋았다는군.”

 

“...어딥니까.”

 

나중에 깨어나면 알려줄테니 기다리고 있게.”

 

용사의 부상은 저의 책임 또한 있습니다. 그러니

 

화장실 가서 얼굴 씻고 거울부터 봐.”

 

GM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그가 말한대로 씻을 필요가 있었다. 그대로 일어나 GM이 간 방향 반대쪽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피 묻은 물수건을 옆에 두고 물통을 끌어와 피가 묻은 데를 씻자 바로 물이 빨갛게 변해 흘러간다.

 

책장이 무너지기 전에 머리를 이미 부딪혀서 그런지 머리의 부상이 제일 심각했다. 우선 입을 열어 혀가 숨을 막지 않게 빼어잡고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부분을 지혈했다. 부러진 부분은 부목으로 쓸만한 것들과 고정마법으로 일시적으로 고정시켜놓았다.

섣불리 부축을 하면 상태가 더 심각해지는 데다가 하필이면 그 난리통에 통신구도 깨져있었다. 어찌해야하나 난감한 순간 아직 마법진 근처에 남아있던 마법사들이 찾아왔다. 굉음과 함께 숲이 흔들리고 뒤집어지고 있는 게 보여 급하게 준비를 하고 숲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의 도움으로 숲 밖의 GM에게 근처에 응급 및 대수술을 할 수 있는 마을을 찾아달라고 연락할 수 있었고 용사도 옮길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아보이면서도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묻기 힘들어했다.

 

피를 다 씻어내고 아래를 보니 온통 붉었다. 물통을 부어 전부 흘러가게 한 후 금이 간 거울을 보니 다친 데도 없으면서 낯색 나쁜 마법사가 있었다. GM이 왜 말렸는지 이해가 되지만 이건 별개였다. 바로 화장실에서 나와 GM을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고 다른 마법사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결국 가방에서 예비용 통신구를 꺼내 연락을 넣어봤지만 통신구를 들고 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받는 건지 반응이 없었다.

 

혹시 어느 마을인지 아는 데 없습니까?”

 

저는 지도만 드려서 아는 바가 없어요.”

 

이렇게 다른 이들이 마을마저 모른다면 GM이 작정하고 숨긴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되면 내 낯색이 괜찮아질 때까지 GM은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을 거고 난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했다. 평소같았으면 기다렸겠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무작정이긴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근처에 있는 큰 마을들의 치료원을 찾아가는 거였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도 그것뿐이었다. 아까 물어본 마법사에게서 지도를 얻고 짐을 챙겨들어 밖으로 나갔다.

 

 

지도 들고 나갔다 했더니 진짜로 돌아다니고 있었어?”

 

이틀에 걸쳐서 마을 네 군데를 돌아다녀보니 그런 환자는 오지 않았다는 말 외엔 들은 게 없었다. 다섯 번째 마을을 찾아가고 있던 도중 GM이 나타났다.

 

어딥니까?”

 

거울 보고 얼굴빛 좀 환하게 하라고 말 안 한 거였는데 지금 보니 틀린 선택이었구먼.”

 

어딘지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이런 때에 좋은 방법이 있지!”

 

제 할 말만 하던 GM은 이내 내 어깨를 붙잡고는

 

자네 안색 괜찮아질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인 것 같은데.”

 

나는 얌전히 돌아가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돌아오게 된 집은 당연하게도 조용했다. GM이 말한 대로 안정을 되찾기 위해 방으로 들어선 순간 벽 한켠에 세워진 책장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쳤지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정신차리고 앞을 보니 책장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멀쩡히 세워져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책도 없었다. 방어막을 없애고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책장 가득 꽂혀진 책들에 이마를 대어 기댔다. 딱딱함이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책이 무너지고 바람소리에 묻어온 악을 듣고 다시 잠드는 꿈을 꾼 건 일주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책장은커녕 책 하나 떨어지지도 않았고 바람이 불어도 잔잔했다. 마음과 감정이라는 게 참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니 결국엔 잔잔해지고 있었다. 거울을 봐도 그 때의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거울 한 켠이 깨져있었다는 것과 바닥이 빨갛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그 때와 달리 내 집에 있는 거울은 깨진 데 없이 멀쩡했고 바닥은 계속 청소를 해놔서 피는 물론, 얼룩진 자국도 없었다.

무려 한 달만에 온 제대로 된 연락이었다. 그동안 연락이라고 해봤자 무슨 의미로 보냈는지 모를 난초들만 결계 밖에 놓여있었다. 난초들을 그늘진 마당 한 켠에 심어놓은 채 기다리길 이 주, 삼 주 그리고 한 달, 어떤 장소에 대한 좌표가 적혀있는 종이가 계속 오던 난초대신 놓여있었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확인한 나는 바로 나갈 준비를 했고 방금 끝마쳤다. 깔끔하게 정리한 집을 뒤로하고 생각 또한 정리하면서 결계밖으로 나가 용사가 있는 마을 근처로 이동했다. 부디 정리한 말들이 엉켜서 나오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온다는 녀석이 네놈이었냐.”

 

오랜만이다냐!”

 

무소식!”

 

이동하자마자 보이는 건 GM을 통해 자주 봤던 들개들이었다. 겹치는 일이 생겨서 다른 이들을 마중 보냈다고 써놓은 걸 봤긴 했지만 용사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치료마법사가 있을 줄 알았다.

 

나도 마중 나온 이들이 자네들인 건 지금 알았네. 치료마법사는 다른 환자들도 있어서 바쁜가?”

 

우리가 그동안 용사녀석 간호를 한 달동안 해왔는데 용사 상태는 치료마법사를 제외하면 우리만 알지.”

 

자네들이 간호했다고?”

 

매일매일 옆에 붙어서 간호했다냐!!”

 

성심성의!”

 

여기서 용사녀석 사정 제대로 아는 게 이번에 처 알게된 너를 제외하면 우리밖에 없지.”

 

납득한 나는 용사가 있는 방으로 가면서 그동안 용사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갈색 들개들은 붕대 맨 상태로 신나게 날아다녔다던지 상황에 대한 얘기만 해서 결국 대장들개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처음 봤을 땐 온 몸의 뼈가 다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붕대를 맨 상태로 고정되어있었고 나중에 가서야 풀게 됐는데...왜 처 다쳤는지 알만하더군.”

 

알만하다니 무슨 소린가?”

 

뭔소리긴 그 성격에 용케도 처 살아남았구나 싶은 소리다. 그래서 이번에 처 죽을 뻔한 건가? 이번 용사녀석은 옛날에 만났었던 용사와 좀 비슷하더만, 저 두 녀석은 그 덕에 신나서 용사랑 친해진지 오래고.”

 

대장들개의 말을 들으니 더욱 혼란이 왔으나 용사가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직접 상태를 확인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날붙이와 무거운 물건이 없는 환자의 방,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문 하나와 환자용 침대 하나. 그런데 그 침대에 용사는 없고 웬 종이들만 놓여있었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아래에서 익숙하면서도 아이처럼 끝이 올라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 용사?”

 

안뇽!!”

 

침대 위에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용사는 바닥에 앉아있었다. 팔 한짝만 빼고 온통 고정붕대로 묶여있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멀쩡한 손으로 무언가를 쥔 채 바닥에 대고 있었다. 바닥에 의미 모를 선들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에 말한 새 친구다냐!!”

 

우정!”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용사가 손에 쥔 걸 놓아 새카만 손으로 내 망토자락을 잡아당기고

 

새 칭구는 이름이 모야아~?”

 

우습게도 나는 그제서야 무너져내렸다.

 

 

 

 

 

열 번이나 얘기했기 때문인지 오랜만에 그 때의 일을 꿈으로 꿨다. 다친 머리 때문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판정된 건지 용사는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문제는 추억에 관한 부분만 잊어버리는 게 정상이었다면 이번엔 추억은 물론 말 그대로 지식, 상식, 생활방식에 대한 기억이 전부 날아갔다는 거였다. 나는 그 때 용사의 모든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했고 GM은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썹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고 그저 아무런 표정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교육 자체가 돌보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들개들은 이런 내 행동에 상당한 경계심을 내보였다. 기본적인 친분조차 쌓지 않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니 의심을 하는 건 당연했다.

 

아이고 비둘기 팔자야~! 내가 이러다 짝을 찾기도 전에 고향도 못 돌아가 죽겠구나~!!”

 

호들갑 그만 떨게. 어차피 자넨 날아서 가니 그다지 위험할 건 없잖나.”

 

지도도 없는 세상의 끝 너머라도 이 하늘, 저 하늘 똑같으니까 위험할 거 없겠다고요?!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무심한 손님 때문에 비둘기 속이 타들어간다~! 위험수당 꼭 받을 거니까 알아둬요!!”

 

로메루의 단서를 찾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나온 건 아니었다.

 

비둘기가 회귀본능이 있어서 쓸만하군.”

 

뭐요?! 지금 뭐랬어요? 쓸만하군? 쓰을마안하아구우우우운~???”

 

뒤따라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무시하고 미리 준비해둔 편지 안에 내가 밟은 곳들을 그려넣은 지도를 끼워넣어 뒤돌아 건넸다.

 

내 아이에게 전해주게.”

 

 

 

 

First side story end

Posted by 메멤
,

하고픈 말이 뭔가?”

 

잠깐.”

 

용사는 다시 안경을 꺼내 썼다. 다시 쓸 거면 왜 벗어놨는지 모르겠다.

 

역시 얘기를 하려면 차분히 해야할 것 같아서. 어디까지 했지?”

 

아직 시작도 안 했네.”

 

말투와 행동은 굉장히 차분했지만 머릿속은 반대로 꽤 복잡한 상태인지 시작도 안한 대화 순서를 묻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온다길래 땅은 물론 하늘에 물 한 방울 없다고 정정해줬다.

 

그래,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은...나는 너에게 배운 게 많아. 스승과 제자처럼 함께 책상에 앉아서 책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너에게 배운 게 많으면서 맞지.”

 

자네 말대로 스승과 제자 관계는 아니지만 맞네.”

 

그만큼 너는 아는 게 많고 내가 만나본 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똑똑해.”

 

한숨처럼 숨을 내쉰 용사가 살짝 입꼬리를 씰룩였다.

 

나는 널 좋아해.”

 

고백이라기보단 확인하고자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똑똑한 넌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게 맞았다.

 

넌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네.”

 

그러니까 왜?”

 

말한다면 무엇이 달라지나? 나는 결국 마법진을 완성시켜 마을 마법사들의 이주를 완료하면 떠날 것이고 자넨 이 숲을 떠나지 않을텐데.”

 

결국 똑똑한 용사가 이겼다. 이대로 묻힌 채 사라지길 바랐건만 감정이 어리다고 해도 용사는 어른이었다. 자각하더라도 내가 떠난 후이길 기대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나는 책을 들어 품 속에 넣어놨던 변형 마법진 종이를 가리면서 꺼냈다.

 

떠난 이후엔? 연락하고 지낼 수 있잖아.”

 

애초에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소식지 외의 우편물을 걸러내기 위해서였네.”

 

심심하지 않아?”

 

심심하다기 보단 외롭다는 표현이 올바른 걸세. 말상대가 있으면 좋지만 난 책이 더 좋네.”

 

왜 그렇게까지 관계를 끊어내려는 거지? 내가 널 좋아해서?”

 

그 말에 반사적으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자네의 감정에 상관없이 난 애초에 선을 그어놨고 자네의 감정은 그저 원래있던 그 선 위에 더 짙게 그어 보인 것뿐일세. 내 행동에 자네의 감정을 섞어 있지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게.”

 

내 대답이 어떻게 닿았을진 모르겠지만 용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쪽 입술을 깨물고 있어 일그러진 저 입매 뒤에 무슨 말들이 쌓였을지는 예상이 가지 않았지만 감정들은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감정이 뭉쳐져서 단순해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게 터져나올 때는 뭉친만큼 복잡하게 엉켜서 쉬이 풀지 못했다.

거부에 대한 억울함, 울분, 서러움, 분노 적어도 이 중에 하나는 있으리라.

 

그럼 이만 가보겠네.”

 

들어올 때 열어뒀던 문이 내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닫혔다.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꺼낸 종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긴급 순간이동을 시도했고 반은 성공했다. 설정해논 이동장소는 밖에 있는 마법진 근처였는데 이동하고 앞을 보니 나무들이 잔뜩 보이는 걸 보면 아직 숲이었다.

제대로 이동이 안 된 이유를 살펴보고자 돌을 두 개 주워 하나는 그냥 위로 던지고 다른 하나는 이동마법을 써보았다. 위로 던진 돌은 꽤 높이 올라가는 반면 이동마법으로 올려본 돌은 어느 부분에서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중간에 나타나 떨어지고 있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력이 남아도니 이런 정신나간 짓을 잘도 하는군.”

 

용사가 숲 전체에 방해결계를 쳐놨다. 그쪽도 마찬가지로 내 행동을 예상했던 건 그렇다 치더라도 보통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론 집 하나도 겨우 될까말까인데 이렇게나 대규모에다가 틈도 거의 없다시피한 결계마법을 혼자서 하다니 그렇게나 고이고 쌓인 마력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렇게 마력이 많은 그에게도 한계가 있는 건지 물리적인 방해는 없었다. 쫓아와서 다시 잡기 전에 이대로 숲을 나간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 내가 아직 숲에 있다는 것 그 자체였다.

지도가 없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숲은 그야말로 용사의 마당 그 자체였다. 바다꽃밭만 제외하고 갑자기 나타난 회오리 바람이 숲의 모든 장소를 쓸어대기 시작하자 반사적으로 상쇄를 위한 공격마법을 날렸다. 이로 인해 내 위치가 노출되었고 이동마법 특유의 일그러짐이 느껴지자마자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겨 숨을 참은 채 대기했다.

 

일그러진 흔적이 두 개밖에 없는 걸 보면 근처에 있구나.”

 

다시 바람이 불었지만 방금 전의 회오리 바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바람 그 자체였지만 나무들이 뽑혀져 나가는 걸 보면 위력은 그냥 바람 수준이 아니었다. 헛웃음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왔는데 바람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나무만 날렸지 그 뒤에 숨어있던 나에겐 타격이 없었던 점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된 용사가 꺼낸 말이 한 몫했다.

 

아직 얘기는 안 끝났어.”

 

얘기가 끝나기 전에 자네는 아직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정리부터 해야할 것 같네만.”

 

정리하는 동안에 너는 떠나겠지.”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나는 널 좋아해. 그래서 너와 연락이라도 하고 싶어.”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얘기가 아닌 그저 감정호소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게.”

 

좋아하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고 그 감정 때문에 내가 그은 선을 넘고 싶어한다. 애초에 얘기를 통한 설득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받아들여주길 원하는 게 감정 그 자체인데 감정호소 외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너는 나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거야?”

 

각별한 감정은 없네.”

 

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 다른 마법사들보다 자주 옆에 있고 같이 책도 읽고 얘기도 나눴는데 왜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오늘 떠난 마을 마법사들은 나보다 더 자네와 오래 알고 지낸데다가 자네를 존경했고 지금도 그렇지. 그들의 존경을 받은 자네는 그들에게 같은 감정이 들던가?”

 

난 적어도 밀어내진 않았어!”

 

바람이 멈추는 걸 느꼈고 나는 한 마디만 했다.

 

그렇지만 별 감정은 없었겠지.”

 

눈을 감아 빛폭발을 일으킨 후 쓰러진 나무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용사의 뒤쪽으로 이동시켰다. 먹먹해진 귀를 빛과 폭음 때문에 시야와 청각이 막힌 용사는 나뭇가지를 향해 마법들을 날려댔다. 마력을 먹거나 소환된 생물들과는 수도 없이 싸워왔겠지만 반대로 마법사들과 싸움은 물론이고 대련 한 번 해본 적은 없을 것 같다는 예상 하에 벌인 일이었다.

용사의 행동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예상이 들어맞았고 나는 즉시 뒤돌아 달렸다. 숲이 용사의 마당이라지만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는 내가 더 능숙했다. 용사는 주로 생물들을 붙잡거나 쓰러뜨리기 위해 주로 범위가 큰 마법을 사용하는 듯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이라 통하는 거였다.

범위가 큰 마법은 결계 분야를 제외하면 크기만큼 빈틈이 많았고 웬만한 교란이나 정교한 가짜수식으로 보완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몸풀기 대련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단순히 특징을 지닌 마력을 삼킨 생물들만 상대해서 빈틈은 물론이고 가짜수식으로 범위 마법들을 보완했을 리가 없는 용사가 나를 잡기 위해 숲 전체를 뒤덮는 추적 및 통행 방해 마법을 써서 길을 막아도 간단한 방해 마법 하나만 쓰면 쉽게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되면 나가는 길만 찾으면 내가 이기는 상황이었다.

 

“..!....!!...!”

 

내용은 잘 안들리지만 뭐라 외치는 소리 자체가 들리는 걸 보면 거리를 안심할 정도로 벌리진 않은 것 같았다. 흙바닥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복제해 곳곳에 퍼뜨리고 풀을 헤집고 지나간 흔적 또한 여러군데 남겨놨다. 이 가짜 흔적들이 용사의 발을 잡아주길 바라면서 꾸준히 짓눌러대는 범위 마법들을 없앴다.

조금 많이 뛰었다 싶었을 때 용사는 전략을 바꿨는지 계속 써대던 범위 마법을 그만두고 무차별 마법폭격을 시작했다. 마을 마법사들이 계속 근처 마을에 지냈다면 무너지는 나무들과 휩쓸려 날아가는 꽃과 풀들을 보고 굉장히 아까워하며 용사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장 달려왔을테지만 이미 그들은 떠나버렸다. 마법진의 처분 때문에 남아있을 마법사들을 기대하기엔 마을 마법사들의 용사에 관한 무용담을 실컷 얘기했으니 힘들었고 GM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짜 뒷일은 전혀 생각도 안 하는군!”

 

비록 우연이긴 하지만 바람을 탄 바위가 바로 앞에 내던져지는 걸 보고 불안감을 느꼈다. 저 공격에 맞는 게 불안한 게 아니라 마력이 고일 정도로 특수한 이 숲이 이렇게나 뒤집어지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이렇게 뒷일 생각 안 하고 날뛰는 걸 보아하니 이대로 숲 밖으로 빠져나가도 용사가 나를 따라 밖으로 따라오진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졌다.

 

팔 다리 하나 날아가도 원망 말게!”

이건 날뛰고 있는 용사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경험없어도 마력을 저렇게 때려붓는 상대와 맞붙으면 긁힌 상처나 멍드는 걸로 끝날 수가 없다. 날아오는 마법들과 휩쓸린 바위파편들을 역으로 되돌리는 걸로 시작해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되돌린 공격에 맞았는지 막았는지 날아오던 공격이 끊긴 것도 점시, 나무 사이로 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왔고 방수막과 충격완화 마법을 두른 후 물살에 몸을 맡겼다. 꽤나 빠른 세기로 흘러온 터라 순식간에서 서 있던 자리에서 멀어졌지만 그 자리 바로 위 나무보다 높은 공중에 환상마법으로 내 모습을 만들어냈다. 용사가 마법을 멈추고 환상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용사에게 전격 마법을 날리고 흙들을 흩뿌려 모습을 가렸다.

 

별 감정은 없었겠다고?! 그래서 너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그들에게처럼 너도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제법 가까워진 터라 목을 긁듯이 외쳐대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파란 가시들이 소환되어 내가 있는 곳 주변을 내리찍었다. 그 틈을 타 다시 한 번 전격 마법을 날린 후 땅에 꽂힌 가시를 발판 삼아 뛰어올라 먼저 날린 전격을 없애느라 뒤돌아 있는 용사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분명 체중을 실어 내리찍은 건데 용사는 기침도 안 터뜨리고 그대로 뒤돌아 내 팔을 잡았다.

 

그런데 그게 왜 내가 납득할 이유가 되지?”

 

안경을 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금 용사의 표정에 평정은 없었다. 워낙 두꺼워서 눈은 물론이고 눈동자 색도 안 보이던 안경 너머로 초록불이 생생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안에서 불을 피우다못해 넘쳐흐르는 감정은 분노를 가장 앞세우고 서러움, 울분, 억울함을 한데 뭉친 것처럼 커다랗고 그 정도가 일관됐다.

용사의 감정이 가득 담긴 표정에 시선이 빼앗기는 동안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용사가 나를 붙잡고 순간 이동을 했고 도착 장소는 바로 아까 탈출한 용사의 집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 그렇구나 그동안 즐거웠어 네 말대로 다신 보지 말자하고 그냥 보내줄줄 알았어? 주위 관계를 얄팍하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용사가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용사가 나를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원래부터 선을 그어놨고 뭐고를 떠나서 눈치챘으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 다물고 덮어두려고 했다는 게 정말 짜증나, 말해봤자 무엇하냐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울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너는 네가 떠난 이후로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을 거고 난...!”

 

끌려가는 걸 이용해서 체중을 실어 용사와 부딪혔다. 휘청거리며 잡고 있던 힘이 약해지는 순간 바로 다시 뿌리쳐서 뒤로 물러났다. 원망 가득한 말과 함께 다시 제대로 선 용사는 나를 노려본 채 현재 몸 안에 있는 마력을 전부 손안에 때려붓듯이 모으며 악에 받쳐 외쳤다.

 

이 숲에 갇혀 죽어가면서 절대 오지 않는 널 영원히 기다렸겠지!!!”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용사의 손 안에 하나로 뭉쳐졌다. 다급하게 구속 마법을 펼쳐 용사를 묶어뒀지만 용사의 저항이 굉장히 거셌다. 구속끈을 잡아당겨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힘을 준 게 원인이었는지 팔 힘이 한순간 풀려버렸고 용사는 자신이 저항하던 힘 때문에 뒤로 넘어졌다. 하필이면 책장이 있는 곳이었고 머리를 부딪힌 용사는 손에 쥐고 있던 마력의 제어를 놓쳐버렸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마력들이 주위를 뒤흔들었고 책장들이 무너져 그대로 용사 위로 쓰러졌다. 그 광경에 나는 끈을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Posted by 메멤
,

끝났네.”

 

밤하늘은 다시 비구름으로 돌아왔고 바다꽃은 줄기만 남아있었다.

 

돌아가지.”

 

 

좋아한다는 감정에도 어떤식으로 좋아하느냐, 그 감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얕으냐 같은 구분이 있다. 그 이후로 용사를 살펴본 결과 용사의 감정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관심과 나가질 못했으니 외부의 상식을 배움으로서 발생하는 동경 및 마법이론에 관해 대화가 통하는 상대. 그리고 이 모든 게 합쳐지니 한창 어릴 때 겪을 법한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뭉쳐졌다.

이를 어린시절의 첫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상대가 사라지면 식어버리는 그런 좋아함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지만 일단 식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식어버리는 걸 전제로 생각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감정이 어린 용사 본인은 감정만큼 어리지 않았고 머리가 좋았다. 그러니 저 대부분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보니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각을 한다면 그 감정이 어떤식으로 변화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감정의 변화는 온전히 용사의 몫이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용사가 감정을 자각하든, 그 감정이 변화하든 결국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일이 끝나면 돌아갈 거고 편지를 주고받는 식의 교류를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정해놓은 선을 더 짙게 그어놨다.

 

선을 짙게 그었다고 해서 용사가 넘으려고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자각에다가 무의식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선을 넘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에 나는 쉬는시간이 되면 바로 자리를 뜨는 행동을 추가했다. 용사는 나를 졸졸 쫓아오다가 어차피 내가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한다는 걸 깨닫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런 내 추가된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건 당사자인 용사가 아니라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왜 이젠 거리까지 둬요?”

 

원래 뒀네만.”

 

정정할게요. 왜 멀어지려고 해요?”

 

선을 더 확실히 보여야할 필요성을 느꼈네.”

 

갈색머리 마법사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아무리 왜 그러냐고 말을 해도 애초에 내가 그은 선 자체부터 시작한 상황이었다. 뭐라 더 얘기를 하기엔 그 선부터 언급을 해야하니 물러난 듯 싶었다.

 

이제 알아챘구만?”

 

처음부터 저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내가 키워본 애들만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딱보면 보이지!”

 

GM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내 행동이 썩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GM도 그걸 아니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깔끔한 건 좋지만 칼 같은 건 때론 아프지.”

 

제재를 가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경고를 꺼낸다. 경고 내용이 틀릴 게 없었지만 나는 지금 행동을 바꿀 생각이 없었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얼음 연못에도 햇빛이 내리는 법이야.”

 

그 말을 끝으로 GM은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말뜻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 말 그대로인 내용에 자연스럽게 눈이 가늘어졌다. 설령 내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용사를 들인다해도 그게 내 감정이 용사와 같아진다는 건 아니었다. 용사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을 그은 게 아니라 원래 그은 선을 더 짙게 그었을 뿐이다. 어째서 GM이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을 남겼을까 의아했다.

 

안 좋은 얘기라도 나눴어?”

 

아니.”

 

표정이 심각해.”

 

생각할 게 있으니 이후로는 대답하지 않겠네.”

 

용사는 바로 입을 다물며 계속 나를 바라봤다. 안경으로도 가려진 그 시선이 진실을 깨달은 후엔 참 부담스럽게 느껴져 눈을 감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고 애초에 누군가에게 이런식의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될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가정도 해본 적 없는 이 상황은 참 당황스러우면서도 떠날 시간이 빠르게 왔으면 했다.

감정이라는 게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 위에 그린 그림을 문지르는 것처럼 바로 없애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이대로 용사가 자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원한다.

머리 좋은 용사라면 금방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감정을 처음 겪는 용사라면 이대로 흘러갈 것이다. 감정을 처음 겪는 용사가 우세하길 원한다.

 

 

 

“...드디어 완성했군.”

 

이번에 온 비 때문에 무너지는 영역이 넓어질 게 분명해 모두가 최대한의 속도를 낸 결과였다. 급하게 마무리가 되어서 어디 오류가 날 부분이 있나 검사 및 시험차 마력을 불어넣으니 다행히 마법진은 멀쩡하게 작동했다. 다만 마력을 기존에 계산한 것보다 더 불어넣어야했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선 내였다.

 

모두 필요한 짐들을 챙기고 한 가운데로 모이세요!”

 

마을 자체를 옮기는 거지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가장 안전한 마법진 가운데로 마을 마법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미리 짐을 준비한 마법사들은 빠른 시간내에 모두 모였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당신은 제가 본 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냉정하고 매정해요.”

 

갈색머리 마법사가 용사의 감정을 눈치챈 건지 가운데로 가기 전에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담 내 행동 이유도 눈치챘다는 거였다.

 

짐 챙기고 가운데로 가게.”

 

그렇지만 난 이에 대해 그와 얘기를 해야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선 긋고 밀어내고 떠나려고요?”

 

그럼 내가 용사에게 가서 자넨 날 좋아하네라고 말해야하나?”

 

적어도 밀어내는 이유는 말했어야죠.”

 

그게 그거 아닌가. 그리고 이유를 말하면? 그 다음엔 내가 같은 감정이 될 일은 절대 없을테니 헛짓 그만하고 당장 접으라고 할까, 아님 같은 감정이 될 순 없지만 친분을 쌓는 건 괜찮다는 겉치레를 해야하나?”

 

화를 담아 쏘아보던 얼굴이 바로 아연해졌다. 과하게 말하긴 했지만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서 상대가 납득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오히려 감정을 이해해달라는 말만 돌아올 게 훤했고 애초에 난 부드럽게 말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상황이 굉장히 피곤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한 몫했다.

 

“...정도 안 쌓여요? 아니 아예 없어요?”

 

귀찮은 걸 제외하면 대화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연락을 주고 받을 생각은 없지만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인사를 하고 나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눌 정도라고 생각했다.

 

없네.”

 

감정이 섞여드는 건 매우 피곤했다. 결국 인사도 나누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가는 걸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를 붙잡는 손이 또 있었다.

 

용사님이 책을 두고 가셨어요.”

 

그동안 매일 책을 들고오다시피 했던 용사가 쉼터에 책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내가 일하는 걸 구경하러 왔을 용사가 다시 가져갔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마법진이 완성된 오늘, 용사는 공중부양 마법만 유지시키기만 하고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법진에서 떠날 수 없는 마을 마법사인 쉼터의 주인은 용사를 찾아갈 수 없었다.

 

전해주겠습니다.”

 

상황을 납득하고 책을 받아들었다. 쉼터의 주인도 가운데로 가는 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모두 위치로!”

각자의 위치로 가서 선 후 마력을 흘려넣자 마법진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이 한순간에 마법진의 가운데로 집중됐다. 저 안쪽에서 불안함과 신기함이 섞인 웅성거림이 얼핏 들렸지만 곧바로 사라졌다. 흩뿌려놓은 고운 가루들이 바람에 따라 흘러사라지듯 기척들과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두 다 사라진 후 일제히 손을 모아 박수를 한 번 치는 걸로 이주가 완료됐다.

 

어으! 드디어 끝났네!”

 

요 마법진은 우짤거예요? 다 뿌수고 가야하나?”

 

냅둬도 땅이랑 같이 무너질테니까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용도를 다 한 마법진의 처분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한 가운데 나는 GM을 찾았다. 용사에게 책을 돌려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얘기했다.

 

고백받으러 가는 건감?”

 

“...방금 책을 돌려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그렇게 비장햌!”

 

이대로 붙잡혀서 놀림받으면 끝이 없겠단 생각에 바로 갔다오겠다 말한 후 숲으로 들어갔다. 여러번 왔다갔다했던 숲이지만 이번엔 용사가 잔상현상을 보여주기 위해 데려왔을 때를 빼곤 들어온 적이 없었다. 상황도 두 번째로 숲에 발을 딛을 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용사의 집에 도착한 나는 다섯 번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손에 든 책을 다시 제대로 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용사의 수작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같은 방법으로 두 번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용사는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너는 책 읽는 걸 좋아하지. 내가 아는 건 그것밖에 없고.”

 

빽빽하게 꽂힌 책들 중 딱 하나 비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용사는 그 옆에 서서 빈 부분을 손가락으로 딱딱 두드렸다.

 

너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넌 기회 자체를 주지 않지.”

 

일부러 책을 두고 가서 나를 오게 만든 용사는 상대적으로 자주 쓰지 않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말투를 쓰고 있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추가됐다.

 

나와 얘기 좀 해보지 않겠어?”

 

지금 나를 오게 만든 용사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Posted by 메멤
,

준비 다 했어?”

 

다 했네.”

 

가자.”

 

그 전에 이거 받게.”

 

털어내기 힘들 정도로 진흙이 묻을 수 있으니 새로운 신발들을 챙겨왔다. 용사의 발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거라는 생각에 한 켤레를 건넸다.

 

이건...”

 

진흙 묻은 신발로 돌아올 순 없잖나. 혹시 크기가 안 맞나?”

 

받아든 신발을 보던 용사는 고개를 저으며 맞을 것 같다고 했다. 마땅히 넣어놓을 주머니가 없었는지 용사는 신발을 손에 쥔 채 앞장섰다. 주머니에 넣어놓고 돌아올 때 꺼내줄까 물어봤지만 용사는 들고 있어도 상관없다며 거절했다.

용사가 앞장서서 도착한 곳은 용사의 집이 있는 바로 그 숲이었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력이 고이는 현상 말고 다른 현상도 있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숲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용사의 발이 멈추고 드디어 도착한 장소는 이미 본 적 있는 장소였다.

 

여긴 바다꽃밭 아닌가?”

 

커다란 비달팽이를 용사가 해결하고 나는 흩어진 책들과 깔아놓은 지뢰들을 수거했던 그 날, 씨앗을 뿌렸던 그 바다꽃밭이었다. 이미 씨앗과 꽃잎을 날린 바다꽃들은 줄기만 남은지 오래였다. 용사는 그 줄기를 두 개 꺾어 하나는 나에게 건넸다.

 

절대 놓으면 안 돼.”

 

뭐라 묻기도 전에 줄기를 쥐자마자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밤이 된 것처럼 주위가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내 손에 있던 줄기는 어느새 활짝 핀 바다꽃이 되어있었고 주위로 꽃잎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리고 있는 비는 현실이었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환상이었다.

 

잔상이군.”

 

간혹가다 그 장소 자체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잔상으로 남아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영상구처럼 재생되는 현상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신기했고 그 아래에 바다꽃들이 있으니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불어와 바다꽃잎들이 저번에 봤을 때처럼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밤에 씨앗을 뿌리는 건 꽤 보기 힘든 광경인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예쁘지?”

 

자넨 왜 그렇게 예쁜 걸 묻나?”

 

예쁜 걸 보여주는 게 가장 좋다고 들었어.”

 

“...아름다운 광경이네. 만족하나?”

 

내 대답을 들은 용사는 입만 보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본 나는 문득 예전과 아까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부터 좋아했어요.”

 

사실 그리 감정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얼굴과 행동에서 보이는 감정은 알아보고, 일부러 덮어서 감추는 감정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덮어두어도 잘 보일 정도로 새어나오는 게 있다고 하지만 그걸 눈치챌만큼 길게 얘기해본 마법사가 없었다. 그 때까지는.

 

좋아해요.”

 

하물며 향하는 방향이 내 쪽이 아니었으니 더욱 모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말도 이젠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다행이네. 넌 예쁘다고 느끼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이라는 잔상으로 비구름이 가려졌다 해도 이렇게 비가 직접 내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데 그보다 더 작은 안경을 핑계삼다니 참 우스웠다.

GM이 왜 그 둘에게 열심히라고 했는지, 왜 그 둘이 그렇게 기행과 의미모를 말들을 꺼내고 다녔는지 이제 제대로 알게됐다.

 

갈색머리 마법사는 쉼터의 주인을 좋아한다.

용사는 나를 좋아한다.

둘 다 똑같이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전했다.

이제 다른 점은 갈색머리 마법사는 본인의 감정을 자각을 했고 용사는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Posted by 메멤
,

“둘이 많이 가까워졌구만?”


그 이후로 용사는 책을 가져와 옆에 앉아서 읽거나 자잘한 말들을 툭툭 건넸다. 그에 나도 자잘하게 대답했고 마저 책을 읽는 걸 반복했다. 그러던 중 GM이 문득 찾아와서 저런 말을 꺼냈다.


“그렇게 보입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일단 늘 웃고 있는 GM이지만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의미심장한 웃음은 구분할 정도로 많이 봐왔으니 지금 짓고 있는 웃음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구경할 생각이지!”


내 눈은 자연스럽게 가늘어졌지만 GM의 웃음을 더 북돋을 뿐이었다. 구경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번엔 GM이 직접 장난을 치는 게 아닐테지만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찜찜함이 거슬렸지만 거기에 집중을 쏟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좀 더 주위 경계를 올리는 걸로 덮어뒀다.


“저 오래된 마법사랑 친해?”


“자네는 표현도 보통이 아니군. 친하다고 묻는다면 애매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사이일세.”


“애매해?”


“믿음이 가지만 친밀감을 느끼기엔 꺼려지지.”


애초에 GM이 나를 편하게 놀릴지언정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용사는 내 대답을 듣더니 힘을 빼고 나무에 기대앉았다. 읽는데 집중하다보니 나도 나무에 많이 기댔는지 용사와 팔이 닿았다. 책을 넘기는데 불편하니 바로 떨어져 앉았다.


“친하다고 느껴지는 마법사는 없어?”


“없네.”


“보통 그러면 외롭다던데 넌 안 그런가봐?”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용사는 할 말이 없었는지 그 뒤로 더 묻지 않았다. 도우면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을 텐데 같이 일하는 마법사들은 자신의 몫은 자기가 전부 하겠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스스로 자신의 몫을 끝내는 건 좋지만 시기와 효율을 따지자면 괜한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 필요 없다는 마법사를 굳이 붙잡고 내가 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쉬면 더 좋지 않아? 왜 그렇게 일을 하려는 거야?”


“시간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걸세. 쉬는 것도 쉬는 것 나름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일하는 거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네.”


“일벌레라는 단어 알아?”


“자주 듣는 단어지.”


용사는 일중독이라는 단어도 말했지만 그것 또한 자주 듣는 단어였다. 그만큼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왜 그렇게 질린다는 얼굴들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용사는 책 말고 다른 물건들도 가져오기 시작했다.


“이거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알아?”


“...나는 알지만 자네가 모르고 있는 것 같군.”


어린 마법사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들을 가져오고선 그것들로 노는 방법을 설명하는 용사의 모습이 참 황당했다. 왜 가져왔냐 물으면


“일하는 거 말고 노는 법도 알아야지.”


“그리 말하는 자네도 정작 제대로 놀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만.”


나를 위해 가져왔다고 하는데 어쩐지 가져온 용사가 더 신난 기색이었다. 입으로 불어서 돌리는 종이 팽이를 바람 마법까지 이용해 돌리던 용사는 꼬을수록 늘어나는 실을 팽이에 감고 한계까지 늘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옆에 있는 것도 까먹고 혼자서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

넓은 데에서 혼자 열심히 놀라는 배려를 담아 책들을 들고 다른 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책을 세 권 정도 읽고 있을 때쯤 옆에서 다시 기척이 느껴졌다.


“노는 건 끝났나?”


“너랑 같이 놀려고 가져온 거였어.”


“흥미없네.”


“재밌어.”


“이미 예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라 지금은 재미없네.”


용사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깃털 색이 예쁜 새를 잡아와서 손에 쥐여주려고 하거나 바다꽃잎을 책갈피로 써보라는 둥 저번보다 훨씬 더 의미모를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용사만큼이나 기행을 부리는 마법사가 있었으니 그건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사가 갈색머리 마법사를 따라하는 것 같았다. 갈색머리 마법사가 먼저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고 용사가 그 뒤를 이어 나에게 찾아오는 식이었다.

용사의 기행 대상이 나였다면 갈색머리 마법사의 기행 대상은 쉼터의 주인이었다. 곤혹스러워보이는 쉼터의 주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도 둘을 이상하게 봤지만 정작 그 둘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적당히 좀 하게.”


“네? 뭐가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자네와 용사 둘 다 행동이 똑같은 데다 둘 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 쉼터의 주인과 내 입장에선 자네들은 정말 영문모를 말과 행동들만 해서 곤혹스러운 거 외엔 느끼지 못 해.”


“어...진짜요?”


“쉼터의 주인이 무지개 잎에다가 물방울 구슬을 싸서 자네 손에 쥐여주고 햇빛 받으니까 예쁘죠? 하고 묻는다면 자넨 뭐라 대답할 건가?”


“예쁘네요!”


이 둘은 대체 뭐가 문젤까. 자연스럽게 차게 식은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태도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예시를 변형했다.


“내가 자네에게 그런다고 생각해보게.”


“...왜 그러세요?”


“그래 그걸세.”


충격받은 얼굴로 정말 그 정도냐며 되묻는 갈색머리 마법사를 보니 용사도 마찬가지겠구나 싶어서 같은 예시 대상은 쉼터의 주인으로 용사에게 말해줬다. 그리고 반응은 참 가관이었다.


“무지개 잎까진 아니어도 그런 적은 많은데?”


마을 마법사들이 용사에게 호의적이었다는 걸 망각하고 말한 예시였다. 그리고 용사는 마을 밖 마법사들을 만난 적이 이번 외엔 별로 없으니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가 문득 호의라는 단어에 실마리가 잡힌 걸 느꼈다.

같이 지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는 상대는 따로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 이들과 더 자주, 오래 만나서 친구로 남는 일이 많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주변에 존재했다. 들개들과 GM과 하늘의 현자가 그러했다.


“...어쨌든 다짜고짜 그런다면 상대는 당연히 당황하고 자네들이 대체 왜 그러나 의아해할걸세. 그냥 다른 이들 대하듯 하면 나도 쉼터의 주인도 곤혹스럽지 않고 자네들을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어지지.”


부담스럽다는 말에 또다시 충격을 먹은 건지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저번처럼 굳은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진 않았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다른 이들 대하듯 하라고 한 거였지만 쉼터의 주인 입장은 어떨지 모르니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해지고 싶었던 거냐고 물으면서 운을 떼면 내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이미 친하지 않다고 못 박고 그은 선을 제대로 느꼈으니 눈치 좋고 머리 좋은 저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알아챌지도 몰랐다. 선을 확실히 더 그은 셈 치며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정신차린 둘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다른 이들처럼 대해야 부담스럽지 않을 거냐며 붙잡고 물어보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손이 빠르시네요.”


사실 이렇게 말해도 저 둘은 다른 식으로 기행을 펼칠 게 훤했고 GM의 열심히라는 말이 걸렸으니 이 둘이 어째서 나와 쉼터의 주인에게 다른 이들보다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싶어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대놓고 묻자니 그냥 좋다거나 자신도 몰랐다는 반응이 나오거나 계속 그랬듯이 입을 다물거고 아니면 그걸 기회삼아 친해지자며 본격적으로 선을 넘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와 비슷한 처지인 마법사 즉 쉼터의 주인에게 찾아가서 그동안 갈색머리 마법사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아내는 거였다. 내가 용사와 겪은 일들을 비교해보면 이유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고생이 많아보이더군요.”


“네? 고생이라니 무슨...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용사와 갈색머리 마법사를 보던 쉼터의 주인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에 보이는 피곤함에 동질감이 더욱 깊어졌다.


“악의가 없는 건 알고 있어요. 오히려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쉼터의 주인은 그간 자신이 얼마나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웠는지 겪은 일에 대한 감정을 담아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사이에 짜증이나 귀찮음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짐작이 갑니까?”


꽃잎들을 하얀 천과 합체시켰다는 일까지 들은 나는 질문을 했다. 그에 쉼터의 주인은 말을 멈추고 잠깐 생각하더니 전혀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다꽃을 구경하러 온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많아 쉼터가 바빴어서 마을에 이사 온 마법사가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여유로워졌을 때야 알게됐다고 했다. 그 때가 마침 내가 결계 마법 때문에 용사를 찾아왔던 시기였다. 

애초에 여행객이 아닌 이상 쉼터에 들릴 이유도 없었으니 갈색머리 마법사도 굳이 바쁜 쉼터에 찾아가 인사를 할 생각이 없었고 둘의 접점은 최근을 제외하고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한 후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그대로였다. 그 둘이 공통적으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만큼 나와 쉼터의 주인 사이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공통점은 둘째치고 겹치는 게 마법사라는 거 외엔 아예 없었다.


“...이런 일로 머리가 아프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제일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은 마법진 완성을 빨리 마치고 빨리 떠나는 거였다. 다만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고 설령 떠난다해도 GM이 가만히 떠나게 둘 리가 없다는 점도 한 몫했다. 앞으로 한참 남은 시간동안 무시해야할지 아니면 원인을 알아내 그만두게 할 해결책을 만들어내야하나 고민했지만 우습게도 이 고민은 바로 무색해졌다.

확실하게 못을 박고 대놓고 얘기를 꺼낸 효과를 보는 건지 용사의 기행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많이 사라졌다. 사실 기행 자체도 거슬리는 게 아닌 가볍게 넘길만한 수준으로 바뀌었다. 가령


“어깨 주물러줄까?”


“됐네.”


정정한다. 다시 되짚어보면 기행이라기보단 농담이나 장난 혹은 그냥 하는 말 수준으로 바뀌었다. 갈색머리 마법사와 쉼터 쪽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쉼터의 주인의 당황하는 표정이 줄어든 걸 보면 어느정도 용사처럼 알아들은 것 같았다.


“저기 어깨 아파하는 마법사들 많은데?”


“나는 그 마법사들이 아닐세. 애초에 자네 다른 마법사들 어깨 주물러봤나?”


“아니.”


참 실 없는 대화였지만 기행보단 훨씬 괜찮았다. 그러다가 그 이후로 계속 어깨뿐만이 아니라 팔, 다리, 허리, 등을 안마해줄까 묻는 걸 듣고 저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안마 자체가 필요 없다고 대답하고 이제 일에 집중해야한다는 걸 이유로 용사의 입을 막았다.


“왜 마법진을 이런식으로 설계하는 거야?”


“모든 마법사들이 자네의 마법진 같은 형식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네. 그러니 누구나 쓸 수 있는 보편적인 형식으로 설계한 거지.”


기행이 줄어든 대신 그만큼 용사는 질문이 많아졌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용사는 나를 통해 보편적인걸 배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행은 갈색머리 마법사와 마을 마법사들에게서 배우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게 보편적인 거야? 통로가 많은 것 같은데?”


“앞서 말한 걸 변형하자면 모든 마법사들이 자네처럼 마력이 많지 않으니까 이렇게 통로를 많이 만들게 설계한 걸세.”


“불편하겠네.”


마력이 용사 자신에게 비하면 적은 게 불편하겠다는 건지 아님 설계 자체가 불편하겠다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용사는 설계도를 복사해도 되냐고 물어봤고 예비로 미리 복사해둔 게 있었으니 그걸 넘겨줬다.


“그런데 무엇에 쓰려고 그러나?”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보편적인 설계방식으로 마법진을 설계 해볼려나 싶었다. 복사본을 구기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쥐던 용사는 잠시 집에 들렸다 오겠다며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냥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듣는 귀가 많았고 용사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

어느 정도 내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용사는 꽤 오랜시간 돌아오지 않았다. 갈색머리 마법사도 쉼터의 주인 옆에 붙어서 쉴새없이 떠드느라 여기로 오지 않았다. 드디어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안 오니까 그렇게 좋았어요?”


“조용한 환경은 언제나 좋을 수밖에 없지.”


“이해 못해요. 심심하잖아요?”


“일하는데 왜 심심한가?”


작정하고 빠르게 했을 때만큼이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세워진 하얀 돌들과 나무판자들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문양을 그려넣는 담당인 마법사가 말리지 않았다면 더 했겠지만 문양은 일정한 시간차로 그려야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다고 해서 더 할 순 없었다.

이 참에 문양 그리는 것도 맡을까 고민했지만 한 마법사가 일을 많이 쥐면 안 된다며 GM이 말리는 김에 장난을 칠 게 훤하니 바로 생각을 접었다.

조금 뒤로 물러나 마을을 빙 돌며 살펴보니 7할은 완성되었다.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연달아 살펴보니 삐뚤게 세워져있는 나무판자 두 개 외엔 없었다. 자잘한 실수들을 전부 찾아 없애고 일어서니 언제왔는지 용사가 바로 뒤에 멀거니 서 있었다.


“언제왔나?”


“네가 왼쪽에서 세 번째 돌들을 다시 정갈하게 놓을 때부터.”

약 20분 전부터 와있었다는 얘기였다. 별 생각없이 말을 걸었던 처음과는 달리 방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르침을 받고 학습하는 아이같아 조금 묘했다.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보단 관리감독이 쉬는 시간을 알릴 때나 일이 완전히 끝나는 해질녘에 찾아오는 게 더 나을텐데.”


“상관없어. 그리고 이거 받아.”


용사가 내민 것은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였다. 본 적 있는 모양새였지만 내가 준 복사본에 그려진 이동 마법진이 아닌 다른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내가 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게 뭔가?”


“내가 쓰는 결계 마법진을 변형했어.”


“이걸 내게 주는 이유가 뭔가?”


“쓰라고.”


반사적으로 눈을 좁혔다. 당연히 쓰라고 줬겠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물어본 건데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여전히 두꺼워서 안 보이는 안경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마법을 쓸 수 있게 굳이 자네가 변형까지 해서 줘야할 이유가 뭔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 날 찾아온 것도 이 마법을 쓰고 싶어서였잖아.”


맞는 말이긴 하지만...이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이렇게 보통 마법사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변형까지 했다면 이 마법서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게 분명하다. 이런 걸 그냥 받을 순 없었고 받는 것 자체가 뭔가 꺼림칙했다.


“...거래를 다시 할 의향이 있었으면 미리 말하게. 그 때 내가 대가로 챙겨온 건 놔두고 와서 지금은 값을 치를 수 없네.”


“아니, 거래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그....선물이야.”


선물이라는 말에 내 눈은 더욱 가늘어졌지만 곧이어 이어진 버섯은 안 좋아한다고 말했고 좋아하는 목록으로 말한 것들을 읊으면서 조금 힘이 풀렸다.


“자네 혹시 선물을 주는 것 자체가 처음인가?”


“처음이지. 마을 마법사들한테 받는 건 꽤 있긴 있었는데 뭘 주려고 해도 거절하더라.”


마법진에 대해 캐러 온 마법사들과 마녀들은 귀찮고 불쾌해서 밀어냈다고 한다. 일단 납득을 하며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내려다봤다.


“역시 그냥 받을 순 없네. 단순히 선물로 받기엔 가치가 높아.”


“난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네.”


몇 번의 거절 끝에 보통 마법사 맞춤형으로 변형까지 한 정성이 있으니 나중에 용사가 원하는 걸 이 마법진 값어치만큼 주기로 타협을 봤다.


“원래 선물은 거래용도가 아니고 선의로 받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는 거야?”


“선의의 선물도 정도가 있지, 누가 자네에게 산을 하나 선의의 선물이랍시고 주는 걸 생각해보게.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있나?”


그래도 용사는 이해한 기색이 아니었다. 어차피 용사가 숲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 여기서 굳이 더 설명하진 않았다. 이해를 시키려면 용사를 아예 모르는 세상 자체를 돌아다니면서 배워야했으니.

주변이 조금 어두워지고 용사의 머리카락에 주황빛이 도는 걸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때마침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관리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들어가지.”


나는 다른 마법사들을 따라, 용사는 나를 따라 쉼터로 들어갔다.



“둘이 사이가 꽤 가까워졌네요?”


쉼터의 주인에게 계속 붙어있느라 바빴던 갈색머리 마법사가 오자마자 한 말이었다. 가까워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일하는 중에 용사를 밀어내지 않고 용사도 일정거리에 떨어져있고 일정량의 말만 하면서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까워졌다기보단 타협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말을 걸고 바로 옆에 딱붙어서 행동에 지장을 주는 게 아니니 밀어낼 명분이 없는 게 당연했다. 대신 용사쪽에서도 전처럼 가까이 오거나 말을 자주 걸 수 없으니 서로가 물러난 자연스러운 타협이었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웬일로 쉼터의 주인과 떨어져있군.”


“이번엔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바쁘지 않아 보일 땐 종일 붙어있겠다는 소리로 들려오는 건 그동안 질리게도 붙어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인가.

드디어 선을 좀 지우거나 늘렸냐며 넉살좋게 얘기를 붙여오려고 하지만 난 바로 일에 집중을 해야하니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없다고 딱 잘라냈다. 그에 여전하다며 툴툴거리더니 용사에게 다가가 비결이 뭐였냐고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용사에게 말을 별로 안 걸고 일정거리 떨어져 앉았다는 대답을 듣자 기대와 호기심 가득한 눈은 안쓰러운 빛을 띄기 시작했다.


“...힘내요, 용사님.”


그렇게 말을 남긴 그는 숲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든 의문에 용사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숲에 들어오는 건 통제하지 않는 건가? 마력을 먹은 생물들 때문에 위험할 텐데.”


“마력이 고이기까지 시간이 어느정도 걸리기도 하니 별 문제 없어. 나타날 때 위험도를 확인하고 통제하는 식이야.”


이유인 즉슨 숲에서 마을 마법사들이 숲에서 캐는 식물들이 꽤 되기 때문이었다. 항상 통제를 하면 그들은 꽤 먼 곳까지 갔다와야했다.


“자네가 맡은 게 정말 많군.”


용사는 그런가 하며 넘겼다. 다행히 생필품들은 마을 마법사들이 마련해주고 있어서 사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바다꽃을 또 보러온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있었는데 그 때 비달팽이 덕분에 비가 많이 내려서 그들 모두 시기를 한차례 놓쳤지.”


“마지막 차례였나?”


“응.”


아쉬워하면서 돌아갔을 무리들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 뒤를 이을 말은 떠오르지 않아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그 뒤로 용사는 질문보단 샘 근처에 파란 빛을 내는 버섯이 자랐다던지 자잘한 일상 얘기를 꺼냈고 나는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돌아온 후엔 말 없이 옆에 앉아 다시 나를 구경하고 말을 꺼내는 게 반복이었다. 정말 적절한 타협 범위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손이 바로 멈췄다.


“쉬는 시간이래.”


“...너무 집중했나보군.”


나무 그늘에 가기 전에 용사가 햇빛 아래서 잠깐 이걸 보라며 손을 내밀었다. 용사의 손엔 거울석을 껍데기로 삼은 손가락 두마디 크기의 벌레가 있었다. 거울석이 햇빛을 반사시키면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뻐?”


“왜 나한테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빛나고 환하다고 해서 전부 다 예쁜 건 아니네. 일단 이건 너무 빛이 강해서 눈이 아프네만.”


내 대답에 용사는 미련없이 벌레를 땅에 내려뒀다. 거울석을 껍데기로 삼은 벌레는 흔치 않은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껍데기가 거울석이지 벌레 자체가 귀한 건 아니었기에 그리 가치있는 발견은 아니었다. 저 아래서 반짝반짝 빛으로 존재감을 내뿜으며 사라지는 벌레를 애써 무시하고 용사에게 말했다.


“공통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마법사마다 예쁘다고 느끼는 기준은 다르다네.”


“그럼 넌 어떤 게 예쁘다고 생각해?”


“나한테 물어봤자 의미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네만...다른 이들과 공통적인 부분으로 바다꽃이지.”


“그 때 본 바다꽃들 예뻤나보구나.”


“많은 이들이 보려고 했던 것 만큼 당연한 게 아닌가?”


“당연하다라...”


말을 흐린 용사는 얼굴 중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입으로 미소를 짓고는


“정말 예뻤어.”


어쩐지 대화의 흐름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느낌에 떨떠름해졌다. 어딘가가 조금 어긋나고 마구잡이 같아 위화감도 들었다. 몰려오는 찜찜함에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리니 용사가 어디 안 좋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가 말았다.


“그래서 가져왔던 이유가 뭔가?”


“너한테 예쁜가 싶어서.”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 벌레가 예쁜지를 물어보려고 한 건가?”


“...바깥에서 온 마법사들 중에서 네가 객관적이고 통상적인 걸 잘 말하니까.”


“한 마법사의 말만 들어선 의미가 없네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물어보는 게 더욱 확실하고 효율적이지.”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는지 용사는 쉬는 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동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지고 쉬는 시간이 끝났을 때 계속 생각에 잠겨 있던 용사가 문득 물었다.


“...마법진은 언제쯤 완성돼?”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사흘 후에 마무리 단계네.”


“약속 잊지 않았지?”


약속이라고 한다면 거래를 말하는 거였다. 대체 뭘 보여주고 싶길래 저리 안달인가 싶었지만 정말 변수가 없다면 사흘 후에 보겠거니 했다. 그리고 변수라는 단어는 어째선지 말을 꺼내자마자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빨리 방수막 쳐!”


“문양 지워지면 망한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어야했지만 갑작스럽겍 내린 비 때문에 그려넣은 문양들이 일부 지워졌다. 


“분명 비는 그 때 비달팽이 때문에 한꺼번에 쏟아져서 더 이상 내릴 비가 없을 텐데?”


그동안 구름이 조금 끼거나 아예 화창했었는데 지금은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꽤 어두웠다.


“비 내릴 때 함께 숲을 돌아다녔던 게 떠오르네.”


“돌아다녔다기보단 수색이 아니었나? 그리고 따로 다녔던 걸로 기억하네만.”


“바다꽃밭 말이야. 그러고보니 오늘 마무리 단계 아니었어?”


“그래, 자네가 말한 데를 오늘 보러 가려고 했는데 비가 내리는 군.”


“그럼 보러 갈래?”


지금 바깥에 비오는 날씨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신발이 더러워지는 거 외엔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방수막은 하루내내 걷는 게 아닌 이상 빗물이 샐 일이 없었다.


“비가 와도 상관이 없는 곳인가?”


“오히려 비가 내리면 더 좋더라.”


대체 어떤 곳이길래 비가 오면 더 좋은 곳일까. 어차피 오늘 갈 예정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신발은 돌아올 때 들어오기 전에 진흙들을 털어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비가 내려서 일을 진행할 수 없으니 하루종일 책 읽기 외엔 할 일이 없었다.


“바로 준비하겠네. 자네도 준비가 필요한가?”


“아니.”


“금방 끝내고 오겠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도중 계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들어본 이 목소리는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그 옆에는 쉼터의 주인인지 일이 많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늘 하던 일이라 괜찮다고 대답하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계단 뒤로 가서 저 둘에게 말을 걸며 인사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대로 올라가려고 했다.


“.....요.”


만약 그대로 올라갔다면 내 발소리에 묻혀서 내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방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직 발을 계단에 올리지도 않았으니 제대로 들었다. 바로 그 옆에 있을 쉼터의 주인은 당연히 들었을 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정적이 깨지기 전에 계단에 발을 딛고 올라갔다. 어쩌다가 듣게 된 거지 크게 관심 가질 일도, 관심이 이어질 일도 아니었으니까.

Posted by 메멤
,

대규모 마법진인만큼 완성되는 기간이 긴 건 당연했고 여기에 환경적인 요인과 변수까지 발생하면 그 기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이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늘어나는 기간이 정해진다. 그리고 내 눈엔 점점 하루씩 늘어나는 기간이 보였다.


“넘어진다, 넘어진다고!”


“어어 빼빼빼빼!!”


넘어지는 나무 기둥과 그 아래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하얀 돌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이번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환경적인 요인과 변수 둘 다였다. 환경적인 요인은 바로 마법진 안에 있는 마을의 내려앉는 지반이었고 변수는 그게 마법진을 만들고 있는 데까지 뻗었다는 거였다. 땅을 두드려 다 확인했는데 내려앉은 만큼 밖에 있는 흙이 그 자리를 채우려고 덩달아 쓸려내려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다 계산하고 만든 마법진의 크기였다.


“말뚝 가져와 말뚝!!”


멀쩡한 땅에 말뚝을 박아서 기둥이 완전히 무너지는 참사는 막았지만 곤란한 문제들이 남았다.


“이대로 진행하기엔 오차가 너무 커져요.”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완성하기엔 이미 늦었어요. 기둥 치우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 거고요.”


다시 만들자 오차는 나중에 수정하자라는 의견들이 반반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방금 그것들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떠올랐다.


“공중부양 마법으로 쓰러진 부분들을 고정시키고 마저 완성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즉각적으로 회의적인 반응들이 튀어나왔지만 예상했고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확도는 둘째치고 마력 문제가 있었지만 내가 이 해결책을 떠올린 이유가 있었다.


“자네가 말한 장소 같이 가줄테니 이번 일을 도와주게.”


그늘 아래 어제 저녁에 이어서 인형처럼 서 있는 용사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했다. 언제 그렇게 인형처럼 있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걸 넘어서 나무 기둥과 하얀 돌들과 함께 날고 있는 용사를 보고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단 일에 집중을 해야하고 나만 딴 길 샐 수 없다는 이유에서 용사가 말한 재밌는 현상이 발생하는 장소는 마법진이 다 완성되거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갈 때라고 못 박았다. 언제가 됐든 같이 가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는지 용사는 별말 않고 동의했다.


“무슨 말을 했길래 저렇게 신났어요?”


“도와주는 대가로 같이 가자고 하던 데를 같이 가겠다고 했을 뿐이네. 그보다 그것들은 대체 뭔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질문하는 갈색머리 마법사의 품에 용도 모를 물건들이 가득했다. 토끼를 비롯한 작은 동물 인형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양말을 끼워넣은 듯한 모양새의 막대기는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쉼터씨가 좋아하는 물건들이요.”

“....다른 건 몰라도 그 막대는 농담 삼아 자네한테 말한 것 같으니 안 갖다 주는 게 더 나을 걸세.”


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마을 마법사들을 믿는다면서 쉼터의 주인에게로 달려갔다. 멀리서봐도 당황한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물건들을 안겨주는 모습에 나는 절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저 상황은 곧 내 상황이 됐다.


“...공중부양 마법은 어쩌고 왔나.”


“그냥 고정만 시켜두면 되니까 문제 없어.”


웬 잡초들과 대체 어디서 캐왔는지 모를 특이한 모양의 버섯들이 용사의 손에 한가득 쥐여져있었다.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며 공중부양 마법과 그 고정의 안정성 및 마력에 대해 얘기를 돌렸지만 전부 딱딱 대답한 용사는 여전히 안경 때문에 안 보이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결국 말을 돌리는 걸 포기한 나는 물었다.


“대체 그것들은 뭔가?”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들었어.”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전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고 자네와 나를 골리려고 그런 말을 한 걸세.”


“그럼 뭘 좋아해?”


바로 물어보는 말에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용사는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들고온 것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어쩐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다시 돌아온 용사는 씻고 온 건지 말끔한 손으로 책을 들고 왔다. 방금 전의 일은 없던 일 마냥 그대로 옆에 앉아서 책을 펼쳐 읽는 용사를 보고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는 뭘 원하는 건가?”


용사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종이를 넘기진 않았다. 움직이던 손도 멈추고 용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용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갈색머리 마법사는 나와 얘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고 했지만 용사는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다.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눈이 보여도 속내를 알기 힘든데 의미모를 말과 행동들만 하고 안경으로 눈까지 가리고 있으니 용사가 직접 속내를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아내는 건 힘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길래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건가 넘어가려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상황에 용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봤다. 미동도 없었다.


“용사님 불쌍하지도 않아요?”

“어느 부분을 불쌍해해야하나?”


갈색머리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게 노려봤자 아닌 건 아닌 걸세.”


“아니, 그...하.....”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자넨 쉼터의 주인에게 왜 그러는가?”


“제가요?”


“자네와 용사가 똑같다는 말을 한 마법사가 있는데 하는 행동이 비슷하네.”


갈색머리 마법사는 뭐가 충격인지 용사처럼 굳어버렸다. 어차피 일하느라 이 두 마법사에게 신경을 쓸 순 없었다. 이대로 있는 게 더 도움된다는 걸 깨달은 나는 둘을 내버려두고 하얀 돌들이 가득한 상자들을 들어 선을 그어놓은 데로 가 일을 다시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몫의 하얀 돌을 전부 세우는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빨리 완성시킬겸 다른 마법사들을 도우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모두 거절했다. 다음 순서를 먼저 하자니 아직 다 세우지 못한 게 대부분이라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봐, 정신차리게.”


할 일이 없어진 내가 선택한 건 용사의 책을 빌려 읽는 거였다. 아직도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한 용사를 두 번정도 흔든 다음에 책을 읽겠다고 말을 한 후 발 밑에 있는 책을 주워 흙을 털어냈다.

그 옆에 앉아 책을 펼치니 어쩐지 굳어있던 용사가 움찔 팔을 떨더니 조금 떨어져 앉았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싶어 신경을 끄고 마저 읽는 데에 집중했다.


“...책만큼 좋아하는 게 있어?”


“연구일지나 개발 및 발달 계획서.”


“그런 거 말고, 예를 들면...나비?”


“좋아하지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네.”


“반짝이 풀이랑 꽃은?”


“수집하는 취미 없네.”


“술은?”


“웬만하면 안 마시지.”


그 뒤로 장신구, 희귀한 돌, 쓰는 마법 도구 등 용사가 물어보는 건 많았다. 장신구는 선호하지 않았고 수집하는 건 마법서 뿐이었으니 희귀한 돌에 관심 없었다. 마법 도구는 직접 만들 거나 만들기 까다로운 것들은 사서 쓰긴 하지만 실용성 위주로 살펴보다보니 내가 직접 고르는 걸 선호했다.

계속 질문하면서 대답을 듣기를 반복하던 용사는 이렇게 툭 말을 꺼냈다.


“미지근하네.”


딱딱하거나 재미없게 산다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저런 표현은 처음이었다.


“무슨 의민가?”


“말 그대로야. 관심이 없는 게 가장 크겠지만 막상 쥐여주면 던져버리진 않을 거잖아? 싫어하진 않으니까 던질 이유는 없겠지,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감정을 뜻하는 거였군. 뒤에 덧붙이자면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계속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 어딘가에 내려놓을 거라네.”


“행동은 확고하구나.”


옆에서 용사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림자가 진 걸 보니 일어난 게 분명했다. 굳이 고개를 들 필요성을 못 느껴 이야기를 나누느라 놓친 부분을 다시 찾으면서 훑어봤다. 종이를 두 장 넘겼을 때 용사가 문득 물었다.


“책 더 가져올까?”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용사를 올려다봤다. 까맣게 그림자가 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고맙네.”


용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지금 들고 있는 책을 다 읽기 위해 집중력을 높였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줄을 읽고 있을 때 옆에서 둔탁하게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손을 뻗어 새로운 책을 집었다. 다 읽은 책은 무릎에 올려놨었는데 어느새 용사가 가져갔다.

나는 용사가 가져다 준 새로운 책들을 읽었고 용사는 내가 다 읽은 책들을 읽었다.

Posted by 메멤
,

“하루만에 새로운 얘깃거리가 생겼나보군.”


“어제의 연장선이에요.”


“이미 어제 끝나지 않았나.”


“저도 이제 경계하기 시작한 걸 보면 일부러 정을 안 붙이시려는 유형이시군요?”


그렇게 거창한 단어만큼 거창하게 세운 벽이 아니었다. 지금같은 경우에는 그저 귀찮았다. 귀찮음을 바람삼아 흔들리며 밀어내는 장막이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는지 왜 그렇게 벽 세우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첫째,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명확히 답이 나온 주제를 계속 이어나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 둘째, 일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셋째, 귀찮다. 여기서 더 이유가 필요한가?”


“와...진짜.....”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더 말을 잇지 않던 갈색머리 마법사는 그대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려했다.


“아 그 전에 혹시 저기 계신 쉼터 주인님이랑 친해요?”


가려고 하기 전에 멈춰서서 뜬금없는 질문을 꺼냈고 나는 인사하고 말 몇마디는 나눌 정도지만 그 이상으로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진짜 냉정하시네요.”


그렇게 말한 갈색머리 마법사는 방금 친한 정도를 물어본 쉼터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신경을 끄고 마저 일하려던 찰나 쉼터의 주인 옆에 있는 마법사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색은 무난하지만 온갖 화려한 무늬가 가득 새겨져있는 망토를 칭칭 둘러싼 마법사였다.

둘러싼 게 이상할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둘러쌀 정도로 추운 날씨도 아니었다. 나만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는지 짐을 나르면서 그 주위를 지나가던 마법사도 흘끗보면서 발걸음도 느려지고 있었고 아예 쉼터의 주인에게 가고 있던 갈색머리 마법사는 그대로 멈춰섰다.


“그러니까.....라는....용사님?”


거리가 좀 있어서 묻히는 말들이 많았지만 저 망토를 둘러싼 마법사를 용사라고 부르는 건 똑똑히 들었다. 그나마 더 가까이 있던 갈색머리 마법사도 들었는지 어깨를 떨더니 나를 돌아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용사가 무슨 말을 했길래 웃음과 걱정이 섞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열심히야!”


언제 왔는지 옆에서 하얀 돌로 난초를 그리고 있는 GM이 불쑥 말했다.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리해둔 거 어지르지 마십쇼.”



“어지르긴! 예쁘게 정리해두고 있는 건데!”


흙을 묻혀서 명암까지 넣고 있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고 빠르게 돌들을 수거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열심히 웃던 GM은 뜬금없는 말만 남기고 다시 돌아갔다.



“모르면서도 둘 다 참 열심히지?”



흙 묻은 부분을 털어내며 한층 더 소란스러워진 셋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중 누구를 제외하면 GM이 말하는 둘이 될까 잠시 생각을 굴려봤지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쉼터의 주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뭐가 열심히라는 걸까 추측을 해보려고 했지만 나 아니면 쉼터의 주인에게 열심히 말 걸려고 하는 거 외엔 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바로 멈췄다. 계속 신경쓰고 있기엔 마법진을 완성시켜야했고 그다지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이 바빠?”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온갖 시선을 잡아끌던 망토는 어디다 뒀는지 평범한 옷과 안경을 쓴 용사가 옆에 와서 바쁘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내 할 일을 계속 했다.



“내가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말이야.”


보통 무시하고 할 일을 하면 바쁘다는 무언의 대답이었고 상대방은 아 바쁘구나 하면서 자리를 뜨기 마련인데 용사에게는 계속 말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나?”



“잠깐 쉬었다하면 되잖아.”



“지금 쉴 생각 없네.”



“언제 쉴 건데?”



“그걸 내가 정하나? 일하는데 방해말고 저리가게.”



뭐라 따진다면 몇마디 더 할 생각이었는데 용사는 순순히 자리를 떴다. 정말 자리만 순순히 떴다.



“지금부터 두 시간 쉬었다 합시다!”



일한지 아직 30분도 안 지났건만 뜬금없는 외침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관리감독 옆에서 용사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고 나는 돌을 쥐어 흔들어보였다. 이 행동의 의미는 허튼짓 말고 일정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는 의미였다. 그 외에 돌을 들고 흔들어보이는 행동 자체가 통상적으로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닌데



“3시간이요...?”



용사에게는 통상적으로 와닿지 않았나보다. 관리감독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고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양손에 돌을 쥔 채 일어섰다.



“어때? 시간도 남아도는데 내가 말한 거 보러 갈래?”



“자네는 내가 왜 돌을 들었다고 생각하나?”



“나한테 던지려고?”


“의미는 어느정도 파악한 것 같다만 먼저 기회를 주지. 오히려 시간을 늘린 이유는?”


“2시간은 3시간보다 짧으니까.”


용사의 말을 참고 삼아 돌 두 개는 부족할 테니 더 많이 준비했다는 의미로 마력탄 수 십개를 던지기 전에 보여줬다. 뒤에서 누가들어도 GM의 웃음소리라는 걸 알 수 있는 히이익 소리에 기분이 더 가라앉았지만 기겁한 관리감독이 쉬는 시간을 철회하고 원래 일정을 외침으로서 나는 마력탄들을 전부 없앴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왜 그러는가?”


“그야...”


뭔가 말하려던 용사는 입을 딱 다물더니 무언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선 숲으로 뛰어갔다. 어째선지 뒤에서 들려오는 GM의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진 것 같아 무언가에 휘말리기 전에 빨리 내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GM만 문제가 아니었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다수의 시선이 느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마법사들도 전부 이상한 표정을 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급격히 쌓이는 찜찜함에 더더욱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덮어두고 일에 집중했다.


“혹시 쉼터씨가 뭘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용사 아니면 갈색머리 마법사 이 둘은 서로 닮은 부분이 없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나를 찾아와 귀찮게 군다는 점 말이다.


“모르네만.”


“에이~ 그래도 서로 얘기 많이 나눠봤을 텐데 뭐 좋아한다 싫어한다 소소한 거 하나도 안 꺼내봤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얘기를 나눈 거라기보단 쉼터의 주인이 말을 꺼내고 나는 흘려듣는 식이었다. 그렇게 말해봤자 그것도 얘기를 나눈 게 아니냐 혹은 저번처럼 너무 냉정한 게 아니냐라는 말이 돌아올 게 훤했기에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자네는 왜 쉼터의 주인이 뭘 좋아하는지를 알고 싶은 거지?”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요!”


그럼 이사온 이후 한 달은 대체 어떻게 지낸 거냐 따지기엔 개인의 비밀을 단체적으로 숨기고 있을 마을의 폐쇄성과 배척성을 생각한다면 마을에 들어선 것 자체가 신기한 노릇이었다.


“한 달로는 마을 마법사들과 친해지기 힘들었나?”


“아뇨? 모두들 친절하셨어요.”


용사와 숲의 비밀을 제외하면 너그러웠는지 마을 마법사들의 친절한 행위들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하는 모습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꾹 눌러담았다. 일단 머릿속에 있는 마을 마법사들의 행동 및 태도들을 수정했다.

그렇다면 갈색머리 마법사가 쉼터의 주인과 친해지지 않았던 건 딱히 서로 볼 일이 없었던 게 아닐까 추측됐다. 확실한 건 직접 물어보는 거였지만 물어보면 이들의 관계에 더 깊게 관여하게 되고 휘말릴 것 같아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들을 흩어놓았다.


“정말 몰라요?”


“나한테 묻지 말고 직접 물어보게.”


이렇게 말하니 뭐가 또 문제인 건지 난감함이 대부분인 표정으로 쉼터의 주인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숙인다.


“그건 좀...”


“직접 물어보는 게 꺼려지면 다른 마을 마법사들에게 물어보면 되잖나. 아무리 쉼터의 주인이 내게 말을 많이 건넸다고 해도 정작 주인 취향을 알만한 건 같이 지냈을 마을 마법사들일 텐데.”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멍하니 나를 보더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나한테 물은들 어떻게 알겠나, 생각을 안 한 자네만 알 테지.”


끝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라고 소리치며 다른 마법사들에게 달려가는 갈색머리 마법사를 보니 GM이 말했던 열심히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건가 싶었다.

마을 마법사들과 나와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도와주러 온 마법사들 구분않고 붙잡아 물어보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 뒤에서 또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안 바쁘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비효율적이었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예고없이 마력탄을 뒤로 쏴서 날렸다.






“솔직히 말해봐요. 용사님 싫어하죠?”


마력탄을 열네 발 정도 쐈을 때 저 멀리서 일하는 마법사들 붙잡느라 바쁘던 갈색머리 마법사가 기겁하면서 달려와 말리는 걸로 용사와 마력탄의 술래잡기는 끝이 났다.


“귀찮다는 것도 싫어하는 범주에 들어간다면 싫어하는 거겠군.”


“아니 귀찮다고 그...번쩍번쩍하고 위험한 걸 날려대요?!”



엄연히 안전성 검증을 받은 비살상 위협용 마력탄이었지만 말 해봤자 안 들어먹을 걸 뻔히 아니 입 아프게 설명 않고 일하는데 방해말라는 뜻과 자네도 귀찮다는 뜻을 함께 담아 마력탄을 만들어보였다. 뜻이 제대로 통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뒤돌아 달리는 갈색머리를 지켜보다가 바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마저 일을 해야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쉬었다 합시다!”



쫓아내던 와중에 시간은 착실히 흐르고 있었고 어제만큼 진도가 안 나간 내 몫의 일처리에 자연스럽게 내 표정은 좋지 않았다.



“5분 정도면 어제 몫은 따라잡겠어.”


평소보다 더 집중을 한 결과 5분만에 어제 몫보다 조금 더 많이 세워진 하얀 돌들을 살펴보며 쓰러지지 않게 마무리 고정을 마치고 흙 묻은 장갑을 벗었다. 나머지 55분동안 편안하게 쉬기 위해 적당한 나무그늘을 탐색하고 근처에 놓여진 유리봉 다섯 개를 들고와 눈에 들어온 나무그늘 아래에 원모양을 이루도록 세워놨다.

원 안으로 들어와 몇가지 도형과 문장을 그려넣음으로써 원 밖으로 밀어내는 바람을 일으키는 임시 통행거부 마법진을 완성했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 사이에 또 찾아온 갈색머리 마법사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질린다는 눈으로 마법진을 보더니 돌아갔다. 역으로 이렇게까지 해야만 안 오는 자네들은 대체 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시 찾은 평온이 우선이라 나무에 기대어 설계도를 보면서 가장 빨리 끝날 부분과 가장 마지막에 해야할 부분을 표시해두고 중간을 어떻게 진행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계획을 짜냈다.

그러던 중 나는 각종 특성을 지닌 생물들과 싸워온 용사를 너무 얕잡아봤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엄청 부네.”


단순히 통행거부용이니 마법사가 날아갈 정도로 강한 바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리에 조금만 힘 주면 들어올 정도로 애매한 바람도 아니었다. 앞으로 일정 범위 내에 발을 딛는다면 일반 마법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뒤돌아오는 세기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용사는 다리에 힘도 주지 않고 평소보다 강한 바람 맞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자네가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자꾸 망각하게 되는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보다 임시로 그린 거지만 대단한 마법진인데? 바람 쐬려고 하는 거였으면 안쪽으로 바람을 넣지 왜 바깥으로 바람을 내보내는 거야?”



“바람 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지 말라고 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낸 거였는데 자네가 그냥 들어온 걸세.”



“이왕 들어왔으니까 옆에 앉을게. 책도 들고왔어.”


옆에 털썩 주저앉은 용사는 안경을 고쳐쓰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신경을 끄고 마저 계획을 짜 정리단계로 들어갔다.



“내가 옆에 있는 게 싫어?”


사실 일하는데 방해하거나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옆에서 책을 읽든 드러누워서 자든 상관이 없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말을 걸고 귀찮게 굴면 누가 좋아하겠나? 심지어 계속 방해해서 일처리가 늦어지고 있다면 그것만큼 짜증나는 건 없다네.”


“그럼 가만히 옆에서 보는 건?”


“방해만 안 하면 상관없다네.”


용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쉬는 시간이 끝나갈 때까지 종이 넘기는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


“다시 시작합시다!”


관리감독의 외침이 들려오기 5분 전, 세워둔 유리봉들을 수거하고 땅에 그린 도형과 문장들을 발로 문질러 지웠다. 책을 읽고 있던 용사도 나를 따라 발로 땅을 문질렀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외침에 여기 온 이후로 매일 잡다시피하는 하얀 돌들을 그려진 선들에 맞춰 세웠다.

뒤따라온 용사는 네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내가 일하는 걸 지켜보기 시작했다. 반복노동에 뭐가 볼 게 있을까 했지만 두꺼운 안경 때문에 시선이 잘 보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세도 한참동안 변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심심해서 옆에 앉은 채 멍하니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집중해서 일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일어나서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제보다 더 많이, 빽빽하게 세워진 하얀돌이었고 그 다음으로 들어온 건 앉은 채로 잠든 건지 미동없이 그대로인 용사였다.


“거기 앉아서 뭐 하나? 일은 다 끝났네.”


“잠깐 생각 정리.”


“그럼 들어가서 하게.”


일하고 있던 때라면 모를까 엄연히 마법사 다니는 길목이었으니 통행에 방해가 되는 건 당연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는 나를 따라 쉼터로 들어왔다. 곳곳에서 용사를 부르는 마을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용사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방해의 기준은 어느 정도야?”


“일처리의 진행속도를 늦추거나 멈추게 만드는 정도.”


“쉬는 시간엔?”


“혼자 있는 게 더 좋지만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할 일을 하면 상관없네.”


“그럼 말 거는 것 자체가 싫은 거 아니야?”


“다짜고짜 친밀하게 말을 걸고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면 누구나 다 싫어하지.”


“친밀하게 말을 거는 게 싫다고? 왜?”


나는 어쩐지 반응이 격한 용사를 보며 되물었다.


“우리가 친한가?”


용사는 입을 딱 다물면서 그대로 멈췄다. 다시 짚어보자면 나와 용사는 애매하지만 친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이렇게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만날 일이 없고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이야기 분야가 겹치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물론이고 용사 또한 맑은 하늘, 비내리는 밤과 같은 자잘한 안부 인사가 담긴 편지를 쓸 리가 없었다.

용사는 다시 되짚어보니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게 충격적이었는지 그로부터 40분이 지나도 같은 자세로 굳어있었다. 어쩐지 기쁜 기색이 가득한 쉼터의 주인이 여기서 함께 저녁을 먹을 거냐고 물으러왔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어깨를 툭툭 두드릴 때까지 용사는 굳은 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용사님?”


두드리는 걸 넘어서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야 용사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반응이라고 해봤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말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긍정으로 간주한 쉼터의 주인은 용사 몫의 저녁까지 준비해왔고 용사는 거의 반복활동만 하는 인형처럼 입에 쑤셔넣고 있었다.


“...용사님이 왜 저러시는지 아시나요?”


나는 차마 나와 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서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 게 많다보니 별별 마법사들이랑 마녀들을 봤거든요? 그런데 당신처럼 냉정한 마법사는 정말 처음봤어요.”


“미리 말하는데 난 자네와도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렇게 벽을 세우고 밀어내는데 누가 몰라요?”


나는 말 없이 여전히 멍하니 앉아있는 용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용사님은 예외라고 칠 게요. 근데 정말 애매...하다고 해야하나? 보통은 좋거나 싫거나 둘 중 하나가 확실하단 말이에요.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밀어내는 건 또 처음인데 그렇다고 가시 세워서 밀어내는 느낌은 아니라 정말 모르겠다고요.”


“가시를 세워야할 이유는 없으니 세우지 않는 거고 밀어내는 건 친해질 생각이 없으니 밀어내는 걸세.


“그런 마법사가 어디 흔하겠어요? 게다가 완전히 밀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어느정도 말도 받아주니 더 헷갈린다고요.”


“말 허리를 자르거나 아예 듣지도 않고 자리를 뜨는 건 좋고 싫고를 확실히 표현하는 걸 떠나서 무례한 거니 대답을 바라는 말엔 대답을 하는 거라네.”


“이건 또 묘하게 올곧으셔.”


사실 태도가 애매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고 이해가 안됐다. 이런식으로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상대방 측에서 말 거는 걸 꺼려했다. 여기서 용사와 이 마법사를 제외하고 예외를 꺼내자면 마법사 마녀 안 가리고 놀리는 걸 좋아하는 GM과 GM의 심부름으로 간혹 찾아오는 들개들인데 들개들도 나를 꺼려하니 실질적인 예외는 GM 하나뿐이었다.


그러는 자네는 밀어내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계속 쓸데없고 자잘한 질문을 하는 거지?


아니 저기요, 쓸데없고 자잘하다뇨! 진짜 이 마법사 막말이 거침없네!


반응을 과장해서 어물쩍 넘기려들지 말고 제대로 말하게. 보통 이런식으로 밀어내는 걸 느끼면 꺼려하기 마련인데 자네는 왜 일부러 질문을 하는 건가?


갈색머리 마법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당신이랑 얘기 나누는 건 재밌거든요.


그런 말을 툭 남기고 쉼터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인형처럼 앉아있던 용사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Posted by 메멤
,

집으로 돌아가는데는 조금 시일이 더 걸렸다. 애당초 이렇게 돌아다니는 목적이 새로운 결계마법 혹은 이식할 만한 마법진을 찾는 거였다. 비 때문에 발목이 잡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상관없는 일에 썼다. 그 이후로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그럭저럭 괜찮은 마법진을 발견해 기존의 결계마법의 구조에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물리적인 인식조차 왜곡시키는 용사의 결계를 제일 먼저 봐서 그런지 지금 완성된 결계마법은 어딘가 아쉬웠지만 목표는 어디까지나 북도를 비롯해 다른 이들이 멋대로 마법이나 마력을 끼워넣지 못할 결계를 만들어내는 거였다. 그 이상은 지금당장 필요하진 않았다.

꼭 용사를 만나야하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이제 용사와 볼 일도 관련될 것도 없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용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냐!”

“용사!”


“맞다! 용사 냄새다냐!”

마법진을 완성하기 전에 갑자기 찾아온 들개들이었다. 항상 붙어있다시피하던 검은 들개는 어디로 갔는지 소란스러운 두 갈색 들개들만 나타나 다짜고짜 용사 냄새가 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결계마법 때문에 만났었다네. 용사를 아는가?”


“지금 용사는 모르지만 예전 용사랑 자주 놀았다냐!”

“옛친구!”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이 두 들개라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에 바로 납득했다. 한창 열심히 떠들던 들개들은 마법진을 완성했을 때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검은 들개가 찾아왔다.


“용사를 처 만났다고?”


“이렇게 찾아오는 걸 보면 그 용사라는 마법사와 굉장히 친한가보군.”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 아니다.”


“그 예전이라는 게 안경을 벗으면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관련있나?”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듯 숨을 뱉으며 그대로 뒤돌아 왔던 길로 돌아갔다. 확실히 그 난데없는 변화와 들개들이 말하는 예전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세히 알고 싶진 않았다. 엄연히 들개들과 용사 사이의 일이었으니 잠깐 개인적인 일로 찾아간 나는 그 사이를 파고들 이유도 의욕도 없었다.

검은 들개가 찾아온 이후론 북도의 편지도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도의 편지가 오긴 오지만 결계마법으로 선별이 되어 북도의 편지를 가지고 온 비둘기 우체부는 그대로 돌아가는 형식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이제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여행은 잘 갔다왔는감!”

이렇게 GM이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만큼 무언가 일이 터졌거나 장난치러 왔다 이 둘중 하나였다.

“용사를 만났다며?”


용사는 몸을 사린 것치곤 발이 넓은 마법사 사이에선 꽤나 유명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GM이 무슨 말을 더 할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지금 용사랑 친해졌나~?”


“결계마법 건으로 찾아간 거 외엔 특별한 교류는 쌓지 않았습니다만.”


“안경 벗으면 왔다리갔다리 하는 거까지 보고 와놓고선 빼기는!”


어제 괜히 말을 더 붙였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긴 교류를 쌓은 게 아닌 이상 초면에 그런 변화를 알기는 힘들겠지만 상황이 꽤 특수했다. 우선 내 입장에선 특별한 교류를 쌓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고 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용사쪽에서 나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과 확인하고픈 게 있어서 계속 접촉을 해왔던 거지 나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놨다. 용사가 꽤 여러번 선을 넘기는 했지만 그 넘은 깊이보다 비와 질척한 땅과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더 싫고 귀찮았을 뿐, 선과 넘은 발자국들을 지운 건 아니었다.


“반응 보니 지금 용사는 별론가보구만!”


“자꾸 지금 용사라던지 비밀이 떡하니 있는 점을 들어서 말하는 걸 보면 그 비밀이 뭐냐고 묻길 원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척하면 착이구만! 어때, 들을텐감?”


안 들으면 더 귀찮아질 게 훤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고이는 숲에 대해 알고 있나?”


“용사가 사는 그 숲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설명은 간단하게 끝나겠네! 용사도 그 원리로 태어난 마법사지.”


“...제가 기억하기론 그 숲엔 호수가 없었습니다.”


“호수라기엔 너무 작고 샘이라기엔 조금 큰 물웅덩이는?”


“비가 오던 때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호수만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바로 납득이 들었다. 호수가 있어도 자연적으로 뭉치는 마력을 기다리고 있는데 구조 자체가 모이고 고이기 쉬운 구조라면 푸른달이 뜰 때마다 아기들이 태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특성을 지닌 마력이 모인다고 했으니 용사 자체가 특성입니까?”


“그렇지! 바로 눈치채는구만?”


용사 자체가 특성이라는 건 말 그대로 용사의 모습과 마력 그대로 태어난다는 얘기였다.


“그렇담 용사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짧은 시간 내에 죽었을 테고 다시 태어나는 걸 반복한 거군요. 성격은 바뀌는 걸 보니 기억은 이어지지 않고.”


“지식은 마력과 함께 전해지지.”


무용담과 비달팽이,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론 턱 없이 부족할 정도인 결계마법. 고인 마력을 먹은 생물들을 상대하다가 죽고 다시 태어날 때 마침 고이기 시작하는 마력들도 끌어오게 되어서 마력이 많아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여러 가지로 아직 납득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만...아기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성장한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히익거리며 웃기 시작하던 GM은 제 동업자라면 자세히 알 것 같다고 했다. 그 마을 쉼터의 주인이 왜 말하길 꺼려했는지는 이해가 됐고 외부의 마법사가 안다해도 당사자가 이렇게 비밀은 잘 지킬법한 마법사라는 데에 감탄이 들었다. 마을 전체가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게 굉장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자네 다시 용사 만나야할 것 같은데?”


“...일단 앞뒤 사정을 먼저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에 뭔가가 엉망이 됐는지 마을이 이주한다네.”


그 비는 아주 잘 알고 있고 잘 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용사와 함께 커다란 비달팽이에게 휘말린 걸 알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마을 마법사들이 예전에 GM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거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믿을 만한 외부 마법사가 GM이라는 거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던 건 명확했다. GM의 발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넓게 뻗어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 마을까지 밟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GM이 그 마을에서 이주관련 도움을 부탁을 받았다는 거고


“...저는 왭니까?”

“거기 쉼터 주인이랑 친하다고 들었지!”


나도 같이 가서 도우라는 말이었다. 쉼터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말을 꽤 많이 걸었던 주인이 떠올랐다.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니니 친근하게 느껴진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쉼터의 주인 생각이었다.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이 마법사 마음, 정이 있자너~!”


그 뒤로 계속 거절했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찾아온 GM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얼마간의 준비기간을 마친 나는 한 달만에 다시 그 마을로 가게 됐고 거기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용사도 쉼터의 주인도 아니었다.


“아 저번에 여행오셨던 마법사분이시네? 속삭이 바람 듣고 오셨나요?”


저번에도 용사와 쉼터의 주인보다 먼저 만났었던 약초 캔다는 그 마을 주민이었다. 나와 GM 외에도 이주를 도와줄 다른 마법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얼굴이 꽤 익었는지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


“한꺼번에 쉬지 않고 내린 비 때문에 마을에 문제가 생겼고 이주를 해야한다고 해서 도우러 온겁니다. 정확히 무슨 문제가 생긴겁니까?”


“원래 여기 지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는데 비가 쉬지도 않고 내려서 무너지는 게 앞당겨졌다네요.”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조금 기울어진 집들과 울타리들이 보였다. 나중에 땅이 더 가라앉는다면 지금 이주를 하는 게 확실히 옳은 선택이었다.


“저는 운이 없네요...여기로 이사 온지 두 달도 안 됐는데.”


뭐라 더 말하려던 그 마법사는 저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실례한다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쩐지 이 마을 이주를 돕는 동안 저쪽에서 자주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편의상 갈색머리 마법사라고 기억해두기로 했다.

어떤식으로 이주를 할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잡아돌렸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용사의 얼굴이 보였다.


“너...!”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놓고 말하게.”


내 어깨를 잡은 손을 툭툭 두드려 떼어내고 마주보니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진정을 한 건지 새빨간 얼굴을 잠깐 쓸어내리던 용사는 이렇게 말했다.


“또 왔다길래...”


“마을 이주를 도와주러 왔네만.”

숨이 완전히 돌아온 용사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그럼 설명해줄까?”

“이미 들었으니 됐네.”


용사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설명하고 안내하는 이를 앞에두고 마냥 얘기를 나눌 순 없으니 가봐야겠다며 그 마법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다행히 급한 게 해야할 말은 아니었는지 용사는 붙잡지 않았다.


“일단 이거랑 저기 나무판자들을 옮겨주시고요, 내일은 하얀돌들을 저기 선에 맞춰서 세워주세요.”


아무래도 이주 방법은 단체 순간이동인 듯 했다. 나무판자로 세워지는 뼈대와 땅에 그림을 그리는 하얀돌. 한쪽에다가 나무판자들과 숯을 옮겨놓고 그어진 선들을 살펴봤다.


“반듯하게 참 잘 그려졌지~?”


“땅은 미리 알아두셨을 테니 도착지점은 이미 정해두셨을테고 복잡한 방식이 아니니 어려움은 없지만 마을 마법사들을 전부 이동시킬 마법진을 그리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 같은데 급한 게 아니었습니까?”


“한두 달 정도는 땅도 기다려줄 테니 걱정 없어!”


그러면 대체 왜 저를 데려온 거냐며 묻기엔 GM의 생각은 이미 짐작이 갔다. 다른 마법사 즉 나와 쉼터의 주인 혹은 용사와의 교류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마 용사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사회성이 없는 마법사 두 명이 서로가 서로를 인연 삼아 교류를 시작하는 게 나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되고 좋은 거니까 만나게 해준다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이지만 GM은 당당하게 호기심과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말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얘기는 잘 나눴남?”


“얘기라고 나눌 것도 없습니다만.”


“용사는 아닌 것 같은데~!”


GM이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뒤돌지 않았다. GM은 둘이서 열심히 얘기 나누라며 자리를 떴고 나는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 또 오셨네?”


쉼터의 주인은 나를 바로 알아보고 반갑다는 듯이 다가왔다. 인사를 나눈 후 꺼내는 얘기는 갑작스럽게 비가 와서 땅이 가라앉는 게 빨라졌다던지 여기 와서 맨 처음 만난 갈색머리 마법사가 꺼낸 얘기와 비슷했다. 다른 얘기라고는 많은 마법사들이 도와주러 와서 다행이라고 하거나 혹시 도와주러 온 마법사 중 하나냐고 묻고 쉼터에서 얼마든지 지내도 된다는 말들이었다.


“우리야 그냥 떠나면 그만이지만 용사님이 걱정이에요.”


“같이 떠나면 되지 않습니까?”


“음...용사님은 숲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셔서...”


사실 숲과 용사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지만 이렇게 반문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마을이 이주를 하면 용사는 생활용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들겠구나 싶었지만 어쩐지 알아서 만들 거나 방법을 강구할 것 같으니 그에 관련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 맞다. 이것 좀 용사님께 전해주실래요?”


쉼터의 주인이 내민 건 저번에 그를 통해 용사가 보냈던 책 중 하나였다.


“저번에 전해주러 갔다가 실수로 땅에 떨어뜨려서 진흙투성이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 하나 사는데 좀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 용사님이 계신 곳까지 갈 시간이 도통 나질 않아서...”


미안하다는 얼굴로 책을 내밀고 있지만 그다지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사실 쉼터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를 통해 책을 받은 일이 많았으니 이정도 쯤은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쉼터의 주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외치고는 제 일터로 돌아갔다. 나는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뒤돌아 책을 건넸다.


“받게.”


“나인 건 어떻게 알았어?”


“등이 뚫리는 착각이 들 정도인데 모를 리가 있나.”


책을 받아든 용사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두꺼운 안경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는 물론 어떤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비달팽이 네 말대로였어.”


“뭐가 말인가.”


“마력을 토해낸 거.”


그리고는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투명한 상자 하나를 들어 나에게 보여줬다. 그 안엔 여유롭게 잎을 뜯어먹는 비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설마 그 커다랗던 녀석인가?”


“응. 물리 공격이 약점이었는지 엄청나게 반항해서 검을 갖다대지도 못했지만 열심히 날뛰는 바람에 부러진 나무가 운 좋게 이 녀석 쪽으로 쓰러졌거든.”


“그 마력은 어떻게 됐나.”


“대부분 공기중으로 흩어졌지만 특성을 지녔으니 아주 조금이나마 남았지.”


또 생물들이 먹어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집 안 서랍 깊숙이 봉인을 해뒀다고 한다. 그렇다면 책들과 집의 파편을 찾으러 다닐 때 마력과 비달팽이를 찾았다는 말이 된다. 이제서야 말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기도 우스운 것이 그 때는 워낙 빨리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 애초에 듣지도 않으려고 했을 게 뻔했다. 그보다는 다른 이유로 궁금했다.


“처음 방법으로 세운 가설에 확신을 얻어서 좋긴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뭔가?”


“비달팽이의 원래 서식지는 어디야? 나는 오랫동안 숲을 비울 수 없으니까 방생하기 힘들고 계속 데리고 살 생각도 없어.”


“이주가 끝나면 내가 서식지에 방생하겠네. 그런데 이 녀석 말고 나머지 비달팽이들은 어디있나?”


나머지 아홉 마리의 평범한 비달팽이들은 그 큰 녀석이 날뛰는 난장판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기엔 너무 작고 연약했다.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쓰러뜨리려고 했던 녀석이 살아남고 별 생각 없이 잡아놓은 아홉 마리가 죽었다는 게 참 황당했다.

용사는 떠날 때 집으로 찾아와달라며 돌아갔다. 그냥 처음부터 내게 맡기면 되지 않느냐고 묻기엔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용사는 이미 저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 뒤로 용사는 완전히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닌 건지 종종 찾아와서 밥은 먹었냐고 묻거나 남는 시간에 읽을 책을 빌려줄까 하면서 책들을 들고 오고 있었다. 일단 책을 받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안 가고 얼쩡거리길래 그냥 책을 돌려주고 자리를 떴다. 다행히 다음 날엔 용사는 찾아오지 않았고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혹시 용사님 싫어하셔요?”

“자넨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하얀 돌은 열 개쯤 세웠을 때 갈색머리 마법사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저렇게 물어오는 바람에 평소 볼 일이 많은 이들에게 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와, 말투 특이하셔요! 그리고 뜬금없는 게 아니라 보고 느낀 그대로 드리는 말이에요. 용사님 싫어하셔요?”

“아니.”


“그럼 좋아하셔요?”


“말장난하러 온 거면 다른 마법사를 찾게.”

“말장난 아닌데!”


처음 볼 때의 어색함과 어제의 거리감은 어디갔는지 바로 옆까지 와서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들이밀고는


“에이~ 둘 다 아니면 뭐가 있어요?”


“자네는 저 쉼터의 주인을 싫어하나?”


“네? 아뇨!”


“그럼 좋아하나?”


“그럴 리가요!”


“방금 자네의 말을 빌리자면 둘 다 아니면 뭐가 있나?”


펄쩍 뛰며 부정하던 갈색머리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물더니 얌전히 옆에서 하얀 돌을 세우는 걸 돕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용사님을 경계하는 게 뻔히 보여요.”


정정한다. 입을 다문 게 아니라 계속 입을 열려고 돕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이 마을 마법사들 만큼 용사님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용사님이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마법사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반대로 용사님을 경계해서 오히려 눈에 띄어요.”


“경계한 건 사실이나 굳이 용사만 경계하는 건 아닐세.”


“...저 일단 할 말이 없으니까 좀 더 생각하고 올게요.”


“생각하고 와도 별 다를 게 없네. 사실이니.”


“너무 매정하게 그런 말 하기 없기!”


피해다닐 목록에 갈색머리 마법사도 추가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쉼터의 주인에게 뛰어가던 그는 결국 넘어졌고 가까이 있던 쉼터의 주인이 다가가 일으켜줬다. 그 모습을 잠깐 보고 있던 나는 내 할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돌을 집어들었다.


“모두 한 시간 쉬었다 합시다!”


마법진을 만들고 있던 마법사들이 나무판자와 돌을 내려놓고 그늘 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흙 묻은 손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킨 나는 잠시 쉼터로 들어가려고 했다.


“왔어?”


오늘따라 정정해야할 말들이 참 많았다.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난 용사는 꽤나 두꺼운 책들을 품 안 가득히 안아들고 있었다.


“...그 책들은 뭔가?”


“심심할까봐.”


“일하는 중엔 읽을 수 없네. 설령 지금이 쉬는 시간이라도 다 못 읽는다네.”


용사는 내 대답에 입을 딱 다물더니 책들을 옆에 두고 그 중 하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일하느라, 그리고 짧은 쉬는 시간동안 많이 못 읽을 나를 놀리겠다는 뜻인 건지 아니면 나머지 책들은 자기가 읽을 몫이라는 건지 알기 힘들고 알고 싶지도 않은 행동이었다.

근육통이 오는 건지 목 언저리가 다시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요즘 운동을 잠깐 줄였다고 이렇게 금방 통증이 생기니 다시 예전만큼 운동량을 늘릴 계획을 세우고 가볍게 목을 양 옆으로 까딱였다.


“무리했구나?”


“그 정도 일한 걸 누가 무리했다고 하는가. 다시 일하기 전에 풀어두는 걸세. 안마 필요 없으니 손 치우게.”


용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렸고 나는 뒤로 한 발 물러나면서 거부의사를 표했다. 순순히 손을 내린 용사는 다시 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고 일을 하지 않으면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그 옆에서 함께 책을 읽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끝났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두 번째 선 위로 돌을 세운 후 내일 할 일을 미리 정리하고 따로 적어놓으면서 일을 마무리했다.

Posted by 메멤
,

사실 그리 감정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얼굴과 행동에서 보이는 감정은 알아보고, 일부러 덮어서 감추는 감정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덮어두어도 잘 보일 정도로 새어나오는 게 있다고 하지만 그걸 눈치챌만큼 길게 얘기해본 마법사가 없었다. 그나마 연구를 위해 잠깐 만나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자주 보게 되는 GM은 감정표현은 물론 생각까지도 자유롭게 말하는 마법사였으니 이 상황에 적합한 예시는 절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새로 쓴 마법서랍시고 각 종이 쪽마다 화초가 크게 그려진 책을 준 GM을 찾아가 얼음을 넣은 주제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차와 진짜 마법서를 받고 온 날이었다.


“전부터 좋아했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그냥 모른 척 하며 마을 밖으로 나갈까, GM의 놀림을 받을 각오로 다시 들어갈까 고민에 빠졌다. 언제 왔는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방들은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지금 자신들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이 자리를 벗어났다. GM의 집이 마을 출입구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아 저들과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게 될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다.

이 마을 마법사들은 전부 GM에게 배우고 자라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숙한 편이라 누가 누구고 어떤 마법사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방금 본 두 마법사는 마을에서 유독 서로가 제일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고 고백한 쪽이 자주, 그리고 먼저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챙기곤 했었다.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었을 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어쩌다가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거라 생각이 이어졌던거지 크게 관심 가질 일도, 관심이 이어질 일도 아니었으니까.


열 두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못보던 마법이론이 적혀있는 새로운 마법서가 맞았다. 찢어서 뗄 수도 없게 앞장은 이론식, 뒷장은 화초 그림으로 이루어진 종이들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기에 한술 더떠 화초 그림에도 이론식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찾다보니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걸 계속 읽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때에 바로 옆에 있는 창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루룱!”

다리에 편지를 매고 있는 걸 보면 비둘기 우체부인데 소식지는 바로 어제 받았고, GM은 편지보단 직접 찾아오는 걸 택하는 마법사인데다가 GM을 통해 몇 번 만났었던 들개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창문을 열어 다리에 매인 편지를 풀어도 날아가지 않는 걸 보면 답장이 필요한 편지인 것 같아 한 번쯤은 얼굴을 봤겠거니 했다. 편지 내용을 보기 전까진.


“답장은 없으니 가도 좋네.”

우체부들이 좋아하는 마른과자를 물려주고 편지는 잠시 뒤집어뒀다. 최근에 책을 낸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책을 감명 깊게 봤다에서부터 시작해 얹고자 하는 의견을 끝에 붙인 편지였다. 온갖 말과 글로 현혹해서 읽은 마법사나 마녀가 다음 책을 낼 때 은근슬쩍 자기 의견이 실리게 만든 후 공동 저자라고 우길 준비를 하는 강도였다. 글솜씨가 뛰어나 지팡이 대신 붓을 든 강도들이라고 해서 북도들이라고 책가게 마녀와 토론으로 만났던 이들이 주의삼아 해준 말들로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편지가 온 건 처음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편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귀찮아졌다.


“이 편지 때문에 찾아온 거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서성거리지 말고 그냥 오게. GM이 보냈나?”

“여기 처 찾아올 녀석들도 없는 주제에 괜히 경계마법이나 처 깔긴, 영감탱이가 신나게 처 웃던데 대체 무슨 편지길래 난리야?”GM에게 북도 편지를 알려준 정보제공자는 누군지 안 봐도 훤했다. 애초에 전서구가 비둘기 우체부 대표인 이상 비밀편지같은 건 없었다.


“북도가 내 본명을 알았다. 이 편지 냄새를 맡고 집에 같은 냄새가 나는 게 있는지 찾아봐주게.”

비둘기 우체부의 편한 점이자 단점은 받는 상대의 이름만 적으면 그 집으로 편지를 배달해준다는 거였다. 굳이 주소를 안 적어도 된다는 게 편한 점이었고 단점은 본명만 안다면 이렇게 쓸모없는 편지들도 온다는 거였다. 문제는 북도가 어떻게 내 본명을 알고 있느냐였다. 항상 책을 낼 땐 책내기용으로 다른 이름을 적어서 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어코 편지 처 보내는 북도도 징그러운데 책을 처 낸게 몇 권인데 이제야 그런 편지 처 받는 너도 참 징글맞아.”

굳이 그 말에 뭔가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껴 편지만 내미니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지 코웃음을 친다.


“일단 이 편지랑 같은 냄새가 처 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 출판사쪽에서 이름을 돈 받고 처 팔아넘긴 것 같은데.”


“출판사쪽에도 본명을 알려준 적은 없네만.”

“...진짜 징글맞은 새끼들이야.”

이름을 알아내는 마법이라도 만들어낸건가 싶을 정도로 편지 외엔 흔적이 없는가 싶었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네 옆으로 한 발 움직여보게.”

“뭔데?”

대장들개가 옆으로 움직이니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눈에 보이는 풍경과 결계가 어그러지는 게 보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네. 가서 GM에게 한동안 집에 없을 거라고 전하면 될걸세.”

“영감이 처 오는 건 못 막는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대장들개는 GM에게 돌아가고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옷과 말린 과일들을 챙겼다. GM이 오면 일이 귀찮은 걸 넘어서 지금보다 더 복잡해질 게 눈에 훤했다. GM도 피하고 이사할 새로운 집도 찾을겸 결계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마법사들을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어느 마법이나 그렇듯이 기존의 방식들을 짓누를 정도로 기발한 기술력과 수식이 아닌 이상 마법 설계자 본인의 판단력과 감각에 달려있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일에는 감각 좋은 장인들을 찾아가는 게 좋아보이지만 최근에 들려오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파란머리집 말이야? 들어는 봤는데 어딨는지는 글쎄...”

“저 어디 하얀잎나무산 아랫마을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노란가시나무숲에 숨겨져 있대.”

“각진나무 무덤 아니고?”


파란머리집은 최근에 꽤 유명하게 돌고 있는 이야기였다. 헛소문으로 취급하는 마법사들도 종종 있지만 이야기의 시작이 전문가들에게서부터 시작됐다면 마냥 헛소문이라고 덮어둘 순 없었다. 

지붕이 파란색이기 때문인지 집주인이 파란머리라서 그렇게 불리는지 아직 모르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 집주인은 전문가들이 입에 담다가 흘릴 정도로 새로운 기술력이나 수식을 만든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전문가들에게 최근에 정리한 분해마법 수식을 던져놓음으로써 소문의 진실 여부도 확인할겸 마법사가 많은 마을의 쉼터를 찾아갔다.


“당신도 파란머리집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믿는 건가요?”

“요정의 장난처럼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보물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소문이라는 게 원래 과장되고 헛된 이야기가 붙기 마련이죠. 원래는 당신 말대로 요정의 장난만 떠돌고 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아주 귀한 보물이 있다는 얘기까지 붙어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미래를 보는 수정구가 있다나 뭐라나. 워낙에 허무맹랑해서 믿는 마법사라고 해봐야 동화가 진짜라고 믿는 애들밖에 없지요.”


그리 말한 쉼터의 주인은 안쪽에서 칭얼대는 아기 울음소리에 급하게 들어갔다. 지금까지 돌아다녀본 마을 마법사들과 쉼터의 주인들의 얘기를 들어본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장소는 바다꽃밭, 하얀잎나무산, 각진나무 무덤 이 세군데다. 바다꽃밭은 이름처럼 바닷가에 있었고 하얀잎나무산은 마녀왕국보다 더 동쪽에 있는 산, 각진나무 무덤은 북쪽에 있는 검은산 근처에 있는 장소였다. 서로 연관도 없고 서로의 거리도 보통 먼 거리가 아닌데 이 셋이 제일 많이 언급된 걸 보면 일부러 의도한 게 분명했다.


“길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는데.”

지도를 두 번 정도 훑어보고 나서 가볼 장소를 정했다. 바다꽃은 바닷물이 없으면 피어날 수 없었고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에 숲이 있었다.


신기루다, 요정의 장난이다. 이렇게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도는 내용은 비둘기 우체부도 찾아갈 수 없다는 것과 한 번 그 집을 찾아가는데 성공한 마법사와 마녀들이 다시는 그 집으로 가지 않았다는 거였다. 일단 소문은 진짜라고 확인받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그 집을 찾는 거였다. 

가봤다는 이들중에 당연히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소문은 긍정하면서 장소는 물론, 그곳에서 벌어진 자세한 일은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만류까지 했다. 이유를 묻자 곤란한 건지 두려운 건지 애매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로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들에게 더 정보를 얻기 포기한 후 제일 처음 고른 바닷가 근처 숲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기, 잠깐만요!”


“음?”

“숲에 들어가시려고요?”

“그렇습니다만.”

약초를 캐고 나왔는지 바구니를 든 마법사 하나가 나타났다. 내 대답을 듣고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숲을 가리키고는


“지금은 바다꽃들이 씨앗을 뿌리는 시기라 보기 힘들어요. 덕분에 안개도 껴서 길을 잃으실 거예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바다꽃을 보러 온 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바다꽃을 보러 왔다고도 안 했는데 친절히 설명해주는 마법사를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바다꽃이 어떻게 씨앗을 뿌리는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댄 핑계겠지만 이미 예전에 바다꽃이 어떻게 씨앗을 뿌리는지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뒤에서 당황하며 뭐라 외치는 게 들리지만 뒤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처음 오자마자 찾다니 운이 좋았다.


“...그 세 군데나 언급된 이유가 있었군.”

길이 나 있지 않은 숲 안쪽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니 파란지붕으로 된 집이 나타났다. 거울같이 투명한 바다꽃이 먼저 시야를 빼앗고 하얀잎나무와 각진나무가 마법진을 대신하고 있었다. 각진나무가 수식을, 하얀잎이 그림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이런식으로 응용하는 건 장인들 사이에서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흐려지고 손을 뻗으니 잡히는 거 하나 없이 완전히 사라진다. 신기루나 요정의 장난이라고 불릴만 했다.

찾아가봤다는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하기도 꺼려하는 걸 보면 분명 어떤식으로든 안에 들어가서 말하기도 꺼릴만한 일을 당한 게 확실한데 어떻게 들어갔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마법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니 뭘 할 수도 없었다. 일단 바로 찾은 거에 만족하고 물러나려는 순간 사라졌던 집이 다시 나타났다.


“음?”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고 멀어지면 다시 나타나는 형식이라고 하기엔 사라진 이후로 한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손을 뻗어보니 사라지지 않는다. 집주인이 들어오는 걸 허락해서 다시 나타난 건지 아니면 마침 결계가 풀릴 정도로 마력이 다 한 건지 애매했기에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문을 다섯 번 두드렸을 때 문이 열렸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와요.”

목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 확실하게 허락을 받았으니 집으로 들어섰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이었다. 이렇게 책이 가득한 집은 책을 팔기 위한 서점이나 연구 때문에 관련서적을 모으는 집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가운데에 놓여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였다. 앉으라는 건지 살짝 빼어져 있는 의자에 앉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용건.”


한 번. 급격한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당신이 연구한 결계마법에 대해 의논하고자 왔습니다.”


“똑같네. 일단 뭐 사족 붙이지 않은 건 훌륭해요. 근데 똑같아.”

두 번.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기다려봤다.


“가끔, 아니 매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괜히 책 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녀도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왕궁 마녀가. 대체 누가 내 책을 마녀왕국까지 보냈는지 참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고 지금 그 연구를 계속해가느라 바쁜데 의논하자고 하면서 핵심정보만 쏙 빼가려는 녀석들이 많아. 근데 그나마 그런 녀석들은 점잖은 편이었어요. 어떤 녀석들은 내 연구와 정보만 쏙 빼갈려고 집을 날리기 위해서 마법을 날려댔어. 내가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그대로 있는데 대놓고 강도짓을 하려고 했지요.”


책을 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마 책을 만들기로한 서점과 다른 전문가들이 왕궁 마녀들과 거래를 해서 책을 공식적으로 내지 않고 이곳으로 찾아와 압박을 가한 모양이다. 

아직 남아있는 결계마법의 흔적을 보며 확실히 정교하고 장인도 쉽게 손 댈 수 없는 결계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계를 살펴보고 있던 중에 목주변이 작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빛이 칼날처럼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결계마법에서 파생된 공격마법인 듯 싶었다. 이걸로 세 번이었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아니면 돌아갈래?”

“일단 나도 더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그쪽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일세.”


굉장하고 훌륭한 결계였다. 실제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손도 못 댈 정도였지만 직접 보게 되니 파훼법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위협하는 빛을 전부 없애고 일어나 문이 있는 뒤로 돌아갔다.


“잠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나가는 문을 열었다.


“기다리라니까!”

저 마법을 완전히 파악하기엔 연구기록과 세운 수식들을 자세히 봐야겠지만 구조를 얼핏보니 명백한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단점은 바로 마법을 유지할 마력이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많이 드는 구조였다는 점이었다. 훌륭하고 효과적인 마법이지만 효율적이진 않은 마법이었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하늘과 어둑해진 길을 더듬고 이사갈 집을 어디로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걸으니 숲을 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만난 바다꽃 씨앗 얘기를 했던 마법사는 아직 떠나지 않았던 건지 나오자마자 마주쳤다.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내 모습이 그리 신기한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인다.


“근처에 마을이 있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하하 웃으며 마침 저도 돌아가던 참이라고 말한 후 앞장을 서기 시작한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들어서면서 쉼터까지 안내해준 그 마법사는 안으로 들어와 바로 옆에 앉으면서 궁금함을 참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멀쩡하셔요?”

“바로 사라지더군요. 혹시 멀쩡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많았습니까?”

“마법사뿐이겠어요? 마녀들도 엄청 탈진해서 겨우겨우 기어나오던데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일이 더 귀찮아질 게 눈에 훤했다. 들어갔다 나왔는데 멀쩡하게 나왔다면 실패한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대체 어떻게 한 거냐며 한동안 저 집주인 대신 나를 귀찮게 할 게 분명했다. 옆에 앉은 마법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집도 원래는 결계가 없었는데 저번에 다른 데서 온 마법사들이 한꺼번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부터 결계가 생겨났고 소문이 이상하게 퍼져서 결계 통과하는 걸 도전하러 온 마법사들이 많아졌어요. 거기다가 마녀들도 오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탈진해서 기어나오거나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쳐서 나왔어요.”


“일단 전 들어가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가까이에 마을이 있는데 어째서 숲에 집을 지었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멀쩡히 나오셔서 다행이에요.”


그 뒤로 조금 더 말하는가 싶더니 창문 밖이 어두워진 걸 보고 이만 가봐야겠다며 쉼터를 떠났다. 이제 알만한 건 다 알았지만 결국 원점이었다. 애초에 쉽게 풀릴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급적이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싶진 않았다. 이사를 간다해도 일시적이고 언젠가 또 뒤를 밟는 북도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해가 땅 아래로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꽤 걸린데다가 아까 마법을 파훼하느라 쓴 마력이 꽤 있어서 바로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의외라면 의외인 상황을 맞이했다.


“여기 있었군.”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봤던 목소리를 지닌 마법사가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만 들어보고 얼굴 한 번 안 봤던 마법사가 들어왔다. 분명 문은 잠궈뒀고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손에 열쇠가 쥐여져있는 걸 보면 쉼터 주인이 예비 열쇠를 준 모양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무례함은 숨과 마찬가지인가? 아주 자연스럽게 무례한 짓들을 저지르는군.”


“해가 이미 저물어버렸고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게 더 무례한 거라 생각해서 아침에서야 뒤따라 왔다. 어떻게 내 마법을 부쉈지?”

“내가 지적하는 무례함은 지금 이렇게 마법사가 뻔히 머무는 방문을 문도 두드리지 않고 열어버린 것과 어제 얼굴은 물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목에 공격마법을 들이댄 것일세. 그리고 마법은 파훼법이 훤히 보이길래 부쉈네만.”


“워낙 시달리는 일이 많았고 지금은 굉장히 급해서 이렇게 다짜고짜 들어왔다. 정말 급한 일이니 찾아왔다 아니 찾아왔어.”


어제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 마법사의 말투는 정말 오락가락했다. 어제는 존댓말과 반말이 섞였지만 그동안 쌓인 게 많구나 싶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존댓말 없이 어딘가 권위적인데다가 난데없는 친근감까지 덧붙이려 하는 말투였다. 거기다 뻔뻔하기까지한 이 두서없는 마법사는 잠깐이지만 내 정신을 빼놓는데에 성공했다.


“세상의 멸망에 대해 알고 있...어?”


두서없는 마법사의 난데없는 말은 내 정신을 다시 돌려놓기도 했다. 눌려있던 짜증과 함께 마력을 손에 담아 튕겼다. 마력에 떠밀려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다시 회수하면서 문을 닫고 마법으로 단단히 잠갔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짜증이 가라앉은 건 나갈 준비를 전부 다 마쳤을 때였다. 그제야 머릿속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아까 전 들이닥쳤던 마법사의 인상착의가 떠올랐다. 지붕이 파란색이어서 파란머리집인가 싶었더니 집주인의 머리색도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또 보게 됐다.


“드디어 나왔군요.”

내 표정은 굳이 거울을 안 봐도 좋지 않을 게 훤했다. 게다가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존댓말로 바뀌어있는 데다가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상한 말들만 한 것과 어제의 무례함에 사과드릴게요. 그러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말투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군. 그리고 난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 않네만.”


“급한 일이라 그럽니다. 제 결계마법에 대한 모든 이론식과 마법진 설계도를 드릴테니 어떻게 부순 건지 말해요.”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지만 얼핏 구조만 봐도 엄청난 마력이 들어가는 게 눈에 훤하더군. 조금이라도 마력을 밀어넣어 그 흐름을 어긋나게 하니 부숴질 수밖에 없었지. 어차피 마력량이 부족해 못 쓰는 마법이라 관심 없으니 됐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미로 자리를 떴다. 다행히 뒤따라오진 않는지 발소리도 불러세우는 목소리도 없었다. 쉼터의 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이구 엄청 쏟아지네. 지금 나가시려고요?”


그렇다고 하니 쉼터의 주인이 시기가 비올 시기라 당분간 비가 계속 쏟아졌다가 그쳤다를 반복할 거라고 한다. 땅이 마를 새도 없이 계속 질퍽거려 이동하기 불편할 거라는 충고와 함께 말하길


“비가 마지막으로 내릴 때 바다꽃들이 씨앗을 뿌릴 거예요. 그거 보고 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째서 다른 마법사에게 제 방 열쇠를 준겁니까?”


“용사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였어요?”


그 마법사의 이름이 용사인 듯 싶었다. 아니라고 하니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한 후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는 도중 든 생각은 이 마을 마법사들은 전부 난데없으면서 용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걸 즐기는 건가였다.

쉼터의 주인이 말해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용사는 적어도 이 마을에 있어서 제일 특별하면서 축복받은 마법사라는 얘기였다. 자세한 업적은 말할 수 없다고 딱 잘라냈지만 이미 결계 마법에서부터 그 능력이 짐작이 가니 저 눈에서 보이는 존경, 동경, 기대들이 납득은 됐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용사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에요. 다른 마을 마법사분들도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래전부터 지켜져온 약속이에요. 저뿐만이 아니라 이 마을 마법사들이 모두 약속한 거예요.”


바로 저 맹목적인 태도였다. 애초에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예전에 본 신이라는 걸 믿는 마법사들을 보는 기분이 들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실체가 없는 걸 믿었지만 용사는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사였다. 모든 마을 마법사들의 맹목적인 태도가 쉼터의 주인과 같다면 이 마을에 머무르는 건 고려를 해봐야할 것 같았다. 다른 마을 마법사들도 그들처럼 알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봤을 때 강요할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었다.

하루정도 더 머물고 만약 자신들처럼 용사를 대하라거나 그와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그 즉시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비에 젖는 걸 하루종일 막아내는 건 힘들겠지만 불편한 마을에 있는 건 사양이었다.


“아직 안 갔네.”


하지만 다시 눈앞에 나타난 이 마법사, 용사를 보고 지금 당장 떠나야할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의미로 이렇게 단기간 내에 같이 있기 싫어진 마법사는 GM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민이 끝난 건 갑자기 용사가 종이뭉치를 꺼내 내게 건넸을 때였다.


“뭔가?”


“아까 말하지 않았어? 이론식이랑 마법진 설계도야.”


“그건 봐도 아네만. 자네도 아까 듣지 않았나? 관심 없다고.”


“없는 것보단 낫잖아?”

“때론 없어서 편한 게 있네.”

결국 포기한 건지 돌아오는 말이 없다. 더 할말이 없는 나는 다시 짐을 챙겨들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미안해.”

날아오는 사과가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의도인지 훤해 뒤돌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지금 비가 안 왔다면 진즉에 떠났을 텐데 이번 운은 찾는 데를 한 번에 찾아낸 걸로 끝인 듯 싶었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비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 내내 내릴테고 그 사이에 그치는 것도 잠깐이었다.

태도변화가 이상하고 더 이상 상대하기 싫은 마법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떠받치는 이 마을에 굳이 남아있어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 이유들 때문에 저 쏟아지는 비를 막고 지금도 질척거릴 땅을 밟으며 무리하게 떠나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후자가 더 귀찮았다.

그의 태도를 봤을 때 포기하고 물러날 것 같진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내 호의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해가 가장 높이 뜰 시간인데도 짙은 비구름에 하늘이 어두웠다. 마찬가지로 짙은 땅을 보며 부디 이곳에 있는 동안 저 비와 땅보다 귀찮아지지 않기를 바랐다.


챙겨온 책을 읽으면서 어제를 보내고 쉼터 한 구석에 있는 책장에서 혹시 본 적 없는 책이 있을까 살펴보는 걸로 오늘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파란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의 효력은 오늘까지였던 건지 바로 다음날 다 읽은 책들을 다시 갖다놓기 위해 모두 챙겨들고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상황이 펼쳐졌다.


“...지금 상황에서 조금 뜬금없지만 궁금하니 바로 물어보겠네. 대체 그 안경은 무슨 의미인가?”


“안경을 쓰면 머리가 더 잘 돌아가거든, 생각도 많아지고. 그리고 다시 사과하러 왔어. 미안해.”

일단 의미 모를 안경에 대해선 궁금함이 풀렸다. 하지만


“혹시 주위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하나라도 오지 않았나?”

미안하다면서 밖으로 못 나오게 비키지도 않고 서 있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나가게 비키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돌아오는 말이 있었다.


“사실 그동안 제대로 사과를 해본 적이 없었다.”


덩달아 안경까지 벗고서 그렇게 말한다. 안경을 벗으니 말투가 또 변했다. 이건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과는 별개가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줄 수 있나 싶어서 직접 물어보러 왔다.”


“...할말이 많으면 오히려 뭘 먼저 해야할지 고민이 들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이렇게 느끼는군. 그 전에 묻겠네, 왜 굳이 사과를 받아들였으면 하는 거지? 내가 자네의 사과를 받든 안 받든 나는 이 마을 마법사가 아니니 상관없지 않나?”


그러자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더니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줄 정도로 용서를 구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 말에 그의 첫인상이 조금 무너졌다. 한순간이지만 머리가 멍해진 건 사실이었고 확인 반 진심 반으로 말을 꺼내봤다.


“내가 자네의 사과를 받는 건 자네가 더 이상 이렇게 날 찾아오지 않을 때일세.”


그 말에 용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나를 잠깐동안 쳐다보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쯤 나 또한 방을 나와 읽은 책들을 고쳐들고 책장이 있는 데로 갔다. 책들을 제자리에 전부 꽂은 후 천천히 더 읽을 책들을 찾아 더듬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책장 모서리의 흠집난 부분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첫인상이 빠르게 무너지는 건 꽤 오랜만에 느꼈다.

말투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행동 자체가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걸 빼고서 생각해도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느닷없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고 뭔지를 모르겠다는 게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책장 앞에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걸 느끼고 돌아보니 다른 것들보다 확연히 두꺼워보이는 책을 내게 내미는 쉼터의 주인이 있었다. 읽을 책이 없어 망설이는 걸로 보였던 건가 싶었는데


“용사님께서 전해주라고 하셨거든요. 이 책 찾고 있던 거 맞죠?”


아무래도 용사라는 마법사는 정말 말 그대로 날 찾아오지 않을 생각인 듯 싶었다. 그러니까 본인은 오지 않고 이렇게 다른 마법사를 통해 소통을 하겠다는 거였다. 이 얄팍한 말장난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지만 쉼터의 주인은 바빴던 건지 책을 넘기며 뛰다시피 어디론가 뛰어갔고 책을 꽂기엔 책들 사이 군데군데 빈 공간이 많았지만 책 자체가 두꺼워서 끼울 수 없었다. 애초에 끼워놔도 나중에 정리하러 올 쉼터의 주인이 다시 책을 갖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나중에 쉼터의 주인을 통해서 다시 돌려주거나 안 받으면 숲에다가 던져둘 생각으로 저 멀리 놔둔 뒤에 책장에서 꺼낸 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놔둔 그 책을 다시 가져와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 책장에서 가져온 책들은 예전에 만들어진 거라 표지만 바뀌고 내용이 같은, 이미 읽었던 책들과 읽다보니 점점 흥미가 사라지는 책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책장에 책들이 얼마 없어서 지금 가져온 것들이 안 읽었던 책들이라 새로운 걸 가져온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읽기로 했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지가 처음보는 색조합과 그림인 책인 걸로 보아 적게 뽑거나 마을 서점에서 많이 팔지 않는 책인가 했는데 내용을 보니 왜곡 현상이 일어난 장소를 관찰하는 개인 일지였다. 출판을 생각한 건지 꽤나 다듬은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종이를 세 번 정도 넘겼을 때 쯤 감상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책을 열심히 읽어서 그런지 마지막 쪽을 넘기고 딱딱한 표지가 다시 만져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뻐근한 목을 뒤로 살짝 젖히니 빗물이 잔뜩 흘러내리고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런데 빗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비가 그쳤군.”


창문을 열자 그 위로 고여있던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걸 제외하면 내리는 건 없었다. 잠깐 멈춘 건지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어두웠고 땅 위엔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묘할 정도로 적절한 때에 비가 그쳤다.

제대로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 방금 다 읽은 책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땅은 당연하게도 질척거렸지만 비가 안 내리고 있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마을을 나와 숲으로 들어가니 군데군데 튀어나온 나무뿌리들에 물기가 가득해 미끄러웠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집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직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책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이 있었고 그 가운데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다. 다른 점이라곤 탁자 너머에 집주인이 앉아있다는 거였다.


“안녕?”

안경을 쓴 채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침 여기 책들이 많이 있고 마침 밖에 비도 와.”

뒤를 돌아보니 열린 문 너머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는 물론이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 없었는데 잠깐 그치기 전보다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보니 집주인이 어두운 밤중에 불 없이 길이 보이게 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선 말하길

“이걸로 용서해주면 안될까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들고 있던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대로 그 집에서 나왔다. 찾아오지 말랬더니 수작이나 부리고 있었다. 방수막을 만들어 비를 막아내면서 쉼터에 도착했고 즉시 짐을 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준비만 마쳤다.


“...비가 원래 이렇게 많이 내립니까?”


“그렇진 않지만 몇 번 이렇게 많이 내리는 때가 있었어요.”


자칫하면 창문은 깨지고 지붕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센 비였다. 쉼터의 주인도 걱정이 됐는지 지붕 먼저 확인하러 갔다. 저 정도면 방수막이 다음 마을까지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보통 하루 길면 이틀에 적당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빗줄기는 사흘 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굵고 많이 내렸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한 일은 쉼터의 주인이 전해주는 책을 읽는 거였다. 이쯤되니 자주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쉼터의 주인도 내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 건지 책을 건네줄 때 먼저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대부분이 책 주인의 이야기였다.

이 마을 마법사들이 곤란에 빠지거나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질 때마다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는데 듣다보니 무용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란과 문제가 외부 혹은 소환마법으로 나타난 위험 생물이었고 전부 싸워서 승리하고 내쫓았다는 식으로 끝났으니.


“어쩐지 일관적이고 끝이 없군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만요.”

그렇게 말하던 쉼터의 주인은 실수로 말한 건지 깜짝 놀라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묘한 말에 가득 깔린 의심에서 의아함이 올라왔지만 곧바로 신경을 껐다. 사실 일부러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기도 했다. 듣고 싶지 않다며 잘라내기엔 쉼터의 주인은 통상적인 의미로 친절했고 비가 내리는 시기가 끝날 때까지 이 쉼터에서 시간을 보내야하니 당연한 얘기지만 괜히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저번에도 물었지만 정말 용사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세요?”

“아닙니다.”


미심쩍다는 눈빛이 책과 나를 향해 번갈아가며 날아오지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났고 또 건네진 책을 받아 방으로 돌아가 읽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니 드디어 빗줄기가 눈에 띄게 얇아졌다. 즉시 준비해논 짐들을 메고 책을 챙겨든 후 밖으로 나와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이유가 어찌됐든 전해주는 책들을 전부 읽었으니 그 책값으로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비가 왜 많이 내리나 했더니...”


숲으로 들어오니 저 멀리 비를 부르는 달팽이 무리가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가 숲이라고 해도 바닷가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고 바다꽃이 피기 위해 어딘가로 바닷물이 흘러들어올 텐데 어떻게 비달팽이가 여기 있을 수 있지?


“...!...젠...!!...아...!”

빗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날뛰고 있었다. 마침 만나야했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자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군.”


이 숲의 나무보다 조금 작고 저기 선 마법사의 두 배만큼 큰 비달팽이가 있었다. 거대화 마법으로 커진 물건들은 자주 봤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커 마법사는 물론이고 생물에게 쓰는 경우가 없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만만치 않군! 허나 나 또한 물러나진 않을 거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말을 직접 들으니 놀랍게도 저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감이 잡혔다. 정직하고 자기가 옳다 싶은 전사. 일단 이건 안경을 끼지 않았을 때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납득가는 부분들이 꽤 많았다. 진짜로 그런 성격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지만 쉼터의 주인 같은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런 성격이 형성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게 먼저일진 모르겠지만 일단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성격과 반응이 만들어지게 영향을 주고 있는 건 확실해보였다.

커다란 비달팽이는 거대화 마법만 걸려있는 게 아닌지 지금 본 것만해도 8개는 될 법한 공격마법들을 맞았는데 휘청거리기만 할 뿐 굉장히 멀쩡해보였다. 그러자 공격하던 그는 마법 뿐만 아니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긴 칼을 들고 휘두르기까지 했는데 그 순간 비달팽이가 크게 더듬이를 휘둘렀다.


“...다 젖을 뻔 했군.”

비가 폭포처럼 단숨에 쏟아져내렸다. 일단 나는 방수막이 아슬아슬하게 버텨줘서 젖진 않았지만 방수막은 물론 얇은 비막이도 안 걸친 채 공격만 하고 있던 저 마법사는 당연하게도 그 비를 몽땅 맞아 쓰러졌다. 책을 돌려줘야하는 입장이고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으니 저 비달팽이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지만 마법이 잘 듣지 않는 걸 보니 무슨 마법을 걸어도 마력 낭비일 게 훤해 실을 붙여놓기만 했다. 기절한 건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그를 업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으으...”


그가 일어난 건 도착한 후 업느라 젖은 망토를 벗고 있을 때였다. 주위가 파악이 안 된 건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 난 짧게 대답했다.


“책값.”


“괴물...괴물은 어떻게 됐지?”


“자네가 말하는 괴물이 그 커다란 비달팽이라면 멀쩡하게 저 숲에서 돌아다니고 있네만.”


다급한 얼굴로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적이더니 뜬금없이 손에 안경이 나타났다. 그걸 쓰고 조금 진정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던 그는 한숨을 쉬듯 숨을 내쉰 후에야 말을 꺼냈다.


“여전히 내가 못마땅할테고 뜬금없겠지만 미안해. 도와줘.”

“본인도 뜬금없다는 걸 아주 잘 아는 것 같아서 더 말은 안 하겠네. 그 비달팽이 때문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껄끄러움과 불쾌감, 짜증을 전부 덮어두고 상황을 정리해봤다. 내리는 걸 넘어서 폭포 아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비달팽이 무리, 커다란 비달팽이.


“해결할 때까지 이 집 책을 읽겠네.”


“책뿐만 아니라 여기서 지내는 게 어때?”


“그건 됐네.”


상황이 감정을 누르고 호기심이 감정을 지웠다.

우선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듣자하니 특징을 가지게 된 마력이 고이는 특성을 띄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요약을 하자면 이 숲은 마력이 고이기 쉬운 구조를 띄고 있고 장미 씨앗만큼은 아니지만 특징을 가진 마력이 그렇게 고이고 뭉쳐져서 형태를 띄게 되었는데 그걸 먹은 게 바로 아까 본 커다란 비달팽이다 이거군.”


“이해가 빠르네.”


“이해 못할 부분이 없잖나.”


“마을 마법사들은 못 알아들어서 말이야.”


특정분야의 전문용어들을 써대는데 그쪽에 발 들여본 적 없는 일반 마법사가 퍽이나 알아듣겠군.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담아 누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하나.


“일단 비달팽이가 그 마력을 토해내게 해야겠군.”


“왜 굳이? 쓰러뜨리면 되잖아.”


쓰러뜨린다의 뜻은 상대를 서 있는 상태에서 누운 상태로 만든다는 뜻과 아니면 죽여서 없앤다는 뜻 이 두가지가 있다. 그리고 저 말은 아무리 되씹어봐도 후자의 뜻 같았다. 기절하기 전에 그 커다란 비달팽이에게 각종 공격마법과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를 긴 칼을 휘둘러 댄 걸 보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문득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무용담.


“쉼터의 주인에게 자네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지. 혹시 상대한 녀석들 전부 이 숲에서 고인 마력을 먹은 건가?”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너 진짜 머리 좋구나.”


아무래도 상대를 보는 기준이 저기 있는 마을, 그러니까 일반 마법사들인 듯 싶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기준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비달팽이도 그렇고 외부에서 온 녀석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왔는지 조사도 안 하고 그냥 다 죽인 건가?”

“고이고 뭉친 마력에 홀려서 오는 거야. 조사라고 할 것도 없지.”


“소환생물은?”

“마을 마법사들이 시험삼아 하다가 나타난 거.”


“협조성이 최악인 걸 넘어서 앞일을 생각도 안 하는군.”


“협조?”

“숲이 바로 옆에 있으니 자네만의 문제가 아닐텐데 같이 해결하기는커녕 마력에 홀릴 생물들을 그것도 꼭 필요한 게 아니라 시험삼아 소환하다니”


정정한다. 당연한 기준이 아니었다.


“너도 마찬가지지만 이 마을도 답이 없군.”

답이 없다는 말에 충격받았는지 입매를 굳히던 대화상대는 뜻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용사다. 너는?”


“패치.”


이렇게 나는 이번 사태의 도움과 책값으로 용사와 거래를 했다.

일단 확실한 걸 우선시 했기 때문에 어째서 쓰러뜨리는 방식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세히 생각은 안 해봤어.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거든. 물론 겨우 이런 이유로 네가 납득을 안 할 것 같으니까 일단 내가 알아낸 것들을 말할게.”

특성을 지닌 마력은 한 번 생명체를 거쳤으니 생명체가 죽으면 본래 지니고 있던 마력과 함께 자연으로 흩어진다는 거였다. 확실하고 깔끔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아직 의문점은 많이 남았다.


“혹시 생물들의 탐지 능력이 마법사보다 뛰어난가?”


“특성을 지닌데다 뭉쳤다해도 결국엔 자연적인 마력이니까 민감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못 찾아.”


“숲 안이라면 뭉친 마력이 나타나는 장소는 무작위인가?”


“응.”


운이 좋아서 먼저 발견하는 게 아닌 이상 쓰러뜨리는 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숲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영원히 반복하게 될 일이기도 해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비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구조를 바꾸겠다고 숲 자체를 뒤집어 엎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거기까진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 그 비달팽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봐야겠군. 마법이 안 통했지만 마법을 잔뜩 날려댄 걸 보면 그 비달팽이 이전의 생물들은 마법이 통했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용사는 뭔가 기분이 좋은 듯이 웃으면서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력이 뭉치게 된 원인인 특성 그 자체 때문인데 그 마력을 먹게 된 생물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많으면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 비달팽이가 가지게 된 특성은 거대화와 마법저항이었다.


“그래서 그 칼을 꺼낸 거였군. 아쉽게도 비달팽이가 더 빨랐지만.”


“단순한 칼이 아니라 용검이다.”


“일단 나는 모르는 게 당연하니 더 설명할 생각은 말게 이 대화의 목표가 흐려질...안경은 또 언제 벗었나?”


“방금.”


당당하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이 저번에 마주했을 때와 조금 달랐다. 처음엔 무언가에 대해 놀라거나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면 이번엔 나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눈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에게 원하는 거나 듣고 싶은 게 있고 그걸 이미 방으로 다짜고짜 처들어온다던지, 책을 보내는 행동으로 많이 보여줬었다.

다시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고 저렇게 대놓고 탐색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저 아래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상대를 파악하려고 탐색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도 적당선을 지키는 편이었다. 저건 손만 안 움직였지 마법사를 풀처럼 뽑으면서 이리저리 헤집는 태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만나 얘기하지.”


“왜 여기서 머물지 않고 나가려는 거지? 여기서 지내면서 괴물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할텐데.”

“다른 모든 게 불편하니까.”


비구름 때문에 어둑한 숲이 해가 지기 시작하니 깜깜해졌다. 뒤에서 길도 안 보이고 비도 와서 위험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지내야겠네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동그란 빛을 만들어내 띄우니 앞이 환해져 길이 보였다. 발 아래에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다가 멀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여유를 주지 않고 길을 따라 숲을 나왔다.

쉼터의 주인은 잠시 어디 나갔다 온 줄 안 건지 왜 짐가방을 메고 있냐 물었다. 아무 말 않고 그 옆에 꽂아놨던 열쇠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의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는 걸 들으면서 여전히 난데없는 하루를 끝냈다.


일이 빨리 끝났으면 싶었지만 물길은 원하는대로 흐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세 가지인 것 같은데.”


이 숲은 그리 넓지 않았다. 숲이 넓다고 해도 그 정도 크기의 비달팽이라면 당연히 멀리서도 눈에 띌 텐데 등껍질은 물론 더듬이도 보이지 않았다. 발견한 거라곤 커다란 덩치에 짓눌린듯한 식물들의 흔적과 어제 얼핏 봤던 정상 크기의 비달팽이 무리였다. 


“투명화라고 하기엔 흔적에서 만져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네만. 숲 밖으로 나가버린 게 아닌가?”


“아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먹은 생물들은 적어도 한 달동안 이 숲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아. 확실히 이 숲에 있어.”


용사는 확실히 외부활동을 사렸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이 숲을 이렇게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마을 마법사들의 입을 막지 않았던 건 내가 느낀 대로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보이는 무용담처럼 말해서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음?”


“이것들은 왜 가져온 거야?”


용사가 가리킨 건 열 마리의 비달팽이 무리였다.


“원래라면 비달팽이는 바닷가가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없네 그러니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커다란 녀석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데려왔네만.”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비달팽이가 그리 신기한지 쉽게 눈을 떼지 못하길래 손을 바로 앞으로 가져가 똑똑 책상을 두드렸다.


“집중하게. 아무리 신기해도 일단 녀석을 잡아야하는 게 우선이잖나.”


“...잠깐 생각중이었어.”


안경을 고쳐쓰며 비달팽이들에게 눈을 뗀 용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종이를 가져와 펼치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는 얼마 안 가 숲의 지도가 되어있었다.


“일단 찾아내는 게 우선이야. 집은 여기 한 가운데고 결계마법이 작동하는 건 집 주위로 열 걸음.”


“딱 하얀잎나무와 각진나무가 심어진 데까지군. 일단 나는 마을에서부터 찾아봤으니 여기쯤엔 없었네.”


“여기 있는 새에 왔을지도 몰라.”


그렇게 한가운데에 있는 집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 반으로 나눈 숲의 영역중 윗부분은 내가 가보기로 했다. 출발 시간은 내가 책을 세권을 읽은 후로 정했고 용사는 그동안 방에 들어가 있겠다면서 다 읽으면 부르라고 했다. 옆에 앉아서 어제처럼 헤집듯이 탐색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권을 다 읽을 때까지 용사는 나오지 않았고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넣은 후 방문을 두드리니 다 읽었냐며 나왔다.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네?”

“일부러 빨리 읽었네만. 녀석을 빨리 찾아야하지 않나.”


안경 알이 두꺼워 눈은 안 보이지만 입매가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일그러지나 싶더니 지도를 내민다.


“난 길을 잘 알지만 넌 모를테니까.”


“고맙네.”


감사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용사를 뒤로 하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감정과 상황을 별개로 봐야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꺼낸 감사인사였고 불편한 건 맞기 때문에 먼저 뜬 자리였다.

안 그래도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인데 비달팽이 때문에 잠깐이라도 그치는 때가 없었다. 신발에 미리 방수 및 미끄럼방지 처리를 했지만 오래가진 못해 빠른 걸음으로 숲을 돌아다녔다.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니 어딘가에서 갑자기 끊기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다시 발견되기를 두어번 반복했을 때쯤 지도에 표시된 영역을 다 돌았다. 비와 나무 때문에 시야가 제한 되는 걸 감안하더라도 없는 건 확실했다. 더 찾는 걸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니 먼저 온 건지 용사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찾았나?”

“아니. 흔적만 뚝뚝 끊겨있었다.”

비 때문인지 안경을 벗고 있는 용사가 각진나무 밑동을 발로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용사가 돌아다닌 영역에도 흔적이 뚝뚝 끊겨있었고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확실한 건 세 번째 특성은 투명화가 아니라는 걸세.”


“곳곳에 흔적이 끊겼다가 다시 나타나는 걸 보면 순간이동 같은데...”


그렇다면 일이 귀찮아도 보통 귀찮아진 게 아니었다. 마법저항에다가 순간이동이라니 정말 끔찍한 조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아예 이 마을에 눌러 살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일주일 내로 녀석을 잡지 못한다면 며칠 내내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걷는다 해도 떠날 생각이었다.


“곳곳에 함정을 설치해야겠군.”

“숲이 훼손되는 건 곤란해.”


“그정도로 강한 함정을 설치할 생각은 없네만.”

그 뒤로 그래도 안 된다, 그럼 이대로 흔적만 졸졸 쫓아다닐 거냐 실랑이한 끝에 나무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파를 일으켜 신호를 보내는 함정을 설치하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충격파가 비달팽이의 움직임을 잡을 지도 몰랐다.


“단, 바다꽃들이 있는 데는 안 돼.”


“그건 당연하지만 그 전에 그 비달팽이가 바다꽃밭에 가지 않길 바라야하지 않나.”


그렇게 우리가 해야할 일에 일정시간마다는 물론 그 외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다꽃밭을 살펴보러 가는 일도 추가됐다. 곳곳에 충격파 함정을 만드는데 반나절이 걸리고 곳곳에 설치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늦은 밤에 돌아오는 나를 쉼터의 주인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포기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숲을 한바퀴 돌고 바다꽃밭으로 올 때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짓눌린 풀들은 다시 원래대로 일어나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녀석의 흔적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여기까진 자연스러웠다.


“왔구나.”


“흔적이 더 늘어나지 않는 거, 자네도 눈치챘나.”


“그래.”


“순간이동도 아닌 것 같네만.”


아무리 순간이동이어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흔적이 발견되기는커녕 원래 있던 흔적도 지금 사라지고 있는 중이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애먹이는 녀석은 참 오랜만이다 싶은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무언가 요란하게 부숴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무언가 날아오는 게 있었다. 반사적으로 잡아채니 익숙한 질감이 느껴졌다.


“...책?”


분명 용사의 집에 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이게 왜 날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책들이 비와 함께 내리고 있었다. 이 책들이 있어야할 용사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기 있는 건


“...거대화가 아니라 크기조절이었군.”


용사는 바로 뛰어갔고 나는 그대로 흩어진 책들을 찾으러 자리를 떴다. 책들이 함정 위로 떨어졌는지 마력이 담긴 충격파가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열심히 작동하는 함정들 덕분에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다.

책을 열 권쯤 찾아냈을 때 저 멀리 나무보다 높게 솟은 더듬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나 싶더니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어쩐지 그동안 헛짓거리를 한 것 같아 허탈한 느낌이 들었지만 젖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책들을 보니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책들은 하나하나 훼손방지 마법이 있는 건지 구겨진 부분도 없이 멀쩡했다. 그렇게 제법 모았다고 생각했을 때 쯤 바다꽃밭으로 가니 흙투성이가 된 용사가 먼저 와 있었다.


“잡았나?”


“응.”


“날아간 책들은 일단 보이고 함정에 떨어진 대로 주워왔네만.”

“나머지는 집 근처에 있어.”


커다란 비달팽이도 쓰러뜨렸으니 이제 가도 되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바다꽃들의 꽃잎이 일제히 하얗게 변하며 오므려졌다.


“원래는 날이 좀 더 지나야 하는데 그동안 비가 쉬지도 않고 내려서 시기가 앞당겨졌군.”


“그러고보니 비가 그쳤네.”


비가 그친 걸 깨닫고 바다꽃들을 지켜봤다. 오므려진 바다꽃잎들은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자 터지듯이 펼쳐지면서 바람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듯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하얀 꽃잎들은 다시 투명해지면서 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때마침 햇빛이 내려와 꽃잎들에 반짝임을 더했다.


“예전에도 봤지만 정말 장관일세.”


아주 어린날 책으로만 봤던 바다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짧은 여행을 하던 길이었다. 방수막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지겹도록 내린 비에 전부 젖은데다가 마을은 보이지 않아 한창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피곤함은 비를 맞은 만큼 쌓여있었던 상태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지겨운 비가 그칠 때쯤 저 멀리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마녀들도 뭉쳐있는 걸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갔었다.

왜 거기 뭉쳐있었는지 의아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쉼터가 있는 마을이 급했고 가장 가까워진 마법사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던 순간 지금처럼 바다꽃이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아름다워 한순간 모든 생각이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마을 마법사들은 아쉽겠군 그래, 이 시기를 기다려왔을 텐데.”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의아했다. 반짝이는 바람에서 눈을 떼고 용사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쳤다. 아니 눈이 마주친 건지 애매했다. 용사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굉장히 멍해보였다. 어쩐지 목 언저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어 순간적으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계속 책을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용사에게 다가갔다.


“정신차리게. 아직 뒷수습할 게 많네.”


그 커다란 비달팽이를 물리적인 공격으로만 때려잡아야 했으니 지친 건 당연할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서서 쉬기엔 뒷수습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가령 무너진 집 복구라던지.


“책들도 이게 전부가 맞는지 확인해야하네.”


용사는 그제야 정신차린 듯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커다랬던 녀석이 섞인 비달팽이 무리를 집으로 데려온 건 나였으니 이 뒷수습에 동참해야하는 건 당연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거래는 끝났으니 여기 계속 남는 건 사양이었다.


“오늘 안으로 마무리한다.”


책은 물론이고 손톱만한 지붕과 벽 파편을 전부 주워와 용사의 집을 원상태로 복구해놨지만 결국 지쳐서 쓰러지다시피 잠들어버려 오늘을 보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사의 집에서 자게된 나는 해가 뜨자마자 바로 나와 이 마을과 숲을 떠났다. 그동안 비를 잔뜩 내렸던 비달팽이 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가는 동안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