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고 있나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아난타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패치를 보며 물었다. 패치는 거친 숨만 나오는 입 대신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고 아난타는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무언가 반짝이고 있네요.”
그렇게 말한 아난타는 혹시 소환생물일까 싶어 조용히 손을 들어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꽤 오래 대치했는데도 빛은 계속 반짝이기만 하고 달라진 게 없었다.

뭘까요, 저게?”
저게 뭘진 보러가지 않으면 모르지.”

다른 이들도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는지 경계하며 방어마법과 원거리 공격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아직 섣불리 공격하진 말라는 말에 하나씩 준비하고 있던 공격마법을 없앴지만 방어마법은 없애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숨이 돌아온 패치는 무언가를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저기 가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패치의 말에 주변에 있던 마법사와 마녀들이 의아해했다. 그 중에서 아직 기운이 있는 이들은 저게 뭔지 모르는데 섣불리 가는 건 위험할 것 같다며 말렸고 그 중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난타도 있었다. 퍼블리도 패치의 말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이제껏 봐왔다시피 패치가 할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신중하다면 신중하고 주변 모든 것에 의심을 품을 마법사가 패치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뭔지 모를 저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니 만약 이 기억이 계속 되지 않았다면 퍼블리는 저기 있는 패치를 가짜라고 생각했을 거다.

왜 가겠다는 겁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예상가는 게 있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위험해! 지금 당장 소환생물들이 뒤쫓아 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저렇게 수상한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소 신경질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외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패치는 어째선지 물러나지 않고 계속 가겠다며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같이 가겠다고 하는 마녀나 마법사는 없었다. 그리고 기억이 또 사라지려는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는데 어떻게 설득했는지 혼자서 반짝이는 빛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패치가 나타났다.

분명 반짝이는 게 보인다고 했었지.”

그 말로 패치가 왜 가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게 됐다. 용사가 사라지기 전에 어딘가를 가리키며 반짝이는 게 있다고 했었던 걸 마침 떠올리고 가려고 했던 거였다. 물론 함정일 수도 있는데다 정작 가겠다고 했고 바로 지금 가고 있는 패치의 표정도 회의적인 걸 보니 크게 기대하진 않는 것 같았다. 계속 소환생물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보단 함정이라도 일단 확인을 하는 게 지금 패치의 입장에선 속 시원하고 혹시 용사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그 사이를 지나며 반짝이는 곳까지 가까이 도착한 패치는 순간 제 눈으로 환하게 달려오는 빛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숨을 세 번 정도 내쉬었을 때 패치는 이제 됐으려나 속으로 생각하며 반짝이는 빛의 정체가 뭔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얼음?”
새하얀 약새풀밭 위로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발에 바로 밟힐 만큼 작은 얼음파편이 자신들도 있다며 외치는 듯 패치의 발이 지나갈 때마다 잘그락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시야를 빼앗는 건 커다랗고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건 패치보다 더 컸다.

반짝이던 빛은 바로 그 얼음들이 햇빛을 받아 반사했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얼음들에 황당하단 얼굴을 하던 패치는 여기를 지나갈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저 멀리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뒤로 물러나 나무 뒤로 숨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기서 움직이는 거라면 못 만났던 선발대 일원이거나 가짜거나 소환생물이었다.

...............!!”
저 멀리서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거리가 꽤 있다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알 수 없었다. 일단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소환생물은 아니었다. 그렇담 진짜 아니면 가짜였는데 패치는 가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단 이쪽으로 다가온다면 자신을 발견한 진짜거나 진짜 행세를 하는 가짜일 거고 다가오지 않는다면 자신을 발견 못한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
목소리가 가까워지지 않는 걸 보면 이쪽을 향해 외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집중해서 듣던 패치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본 패치는 저 멀리 무얼 향해 크게 외치고 있는 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바로 달려갔다. 이리저리 솟아있는 파란 머리카락과 그 아래 길고 넓은 빨간 망토. 용사였다.

바로 용사를 붙잡을 듯이 달려가던 패치는 갑자기 멈춰서다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아직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 조심스레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용사는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향해 계속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는데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듣기 전에 다른 목소리가 덮어버렸다.

넌 정말 순수하면서도 어리구나.”
?”

난데없는 말에 퍼블리가 반문하며 마법사를 돌아봤지만 마법사는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여기 있어야할 이유는 될 수 없지. 친구가 되는 건 더더욱 그렇고.”
마법사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분명 마법사의 목소린데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퍼블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주변의 얼음보다 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패치의 표정이었고 그 다음으로 들어오는 건 패치와는 반대로 언제나 그랬듯이 환하게 웃고 있는 용사였다. 그리고 그 용사의 앞에 누군가 있었지만 나무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네 친구가 찾아왔구나. 어차피 네 소개를 받았으니 나도 내 소개를 할 참이었단다. 두 번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비밀 같은 자기소개가 나온다.

내 이름은 밸러니고 이 숲의 주인이란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패치가 용사의 어깨를 잡아 제 뒤로 보내면서 방어마법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괴물들이 나타나 달려들었고 투명한 방어막이 얼음처럼 깨지면서 주위에 파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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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길은 잘 보이겠군.”
그렇게 말했지만 원래부터 지쳐있었는데 광범위한 마법까지 쓰니 꽤 피곤했는지 바로 움직이지 않고 약새풀 가득한 땅 위로 털썩 주저앉는 패치였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이번 기억도 흐려지면서 사라졌다. 곧바로 다시 나타난 기억에선 패치가 검은 형체들을 따돌리며 공격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 갑작스레 등장하자 퍼블리는 깜짝 놀라 손을 뻗었고 비록 기억 속이지만 바로 제 뺨을 스쳐지나가는 공격들에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 뒤로도 기억은 사라졌다가 곧바로 나타나는 걸 반복했는데 그 주기가 굉장히 짧아졌다. 어쩔 땐 눈을 한 번 깜빡했는데 기억이 이미 바뀌어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기억이 조금 더 긴 게 나타났는데

키는 바로 뒤에 있는 나무의 밑에서 세 번째 나뭇가지가 자란 높이고 콧수염과 팔근육이 눈에 띄는 자네 일행의 마법사가 전해달라더군.”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과정이 담긴 기억은 없고 바로 나타난 아난타가 웃지 않는 얼굴로 패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두 잠들어버렸고 어서 이 숲에서 도망치라고. 그 말을 끝으로 잠들어버렸네.”
어디였나요?”
원래라면 여기에서 남서 방향의 파란바람 나무들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 남겨놓은 마법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더군.”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난타는 바로 몸을 돌려 패치가 말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패치는 팔짱을 낀 채 보고 있다가 딱 한마디만 꺼냈다.

가는 건가?”
가야죠.”
바로 대답한 아난타는 고개를 돌려 패치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서 깨우러 가야죠.”
퍼블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의 아난타는 전혀 다른 데에 속해있었으니 결국 제 동료들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지금도 찾기 위해서 거기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은 퍼블리는 저 멀리 멀어져가는 아난타를 한 번 보고 아예 눈을 감은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은 또 흐려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퍼블리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피곤하니?”
.”
얼마 안 남았단다. 하지만 조금 쉬는 것도 좋겠지.”
얼마 안 남았다고요?”

퍼블리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계속 보겠다고 했지만

안 돼. 쉬렴.”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그럼 어서 전부 보고
네 지금 얼굴을 비춰줄 호수가 근처에 없는 게 아쉽구나.”
퍼블리의 말까지 자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지금의 마법사는 무척 단호했다. 하지만 쉰다고 해서 딱히 어디 누워서 자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기억이 나타나지 않을 뿐 퍼블리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고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퍼블리는 그대로 자리에 앉은 후 무릎을 모아 안듯이 팔을 다리에 두른 채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마법사는 계속 서 있었기만 했고 퍼블리를 따라 앉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역시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고개를 조금 숙인 게 퍼블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고 퍼블리도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안 앉아도 괜찮아요?”
괜찮단다.”
어쩐지 계속 보고 있는 것도 민망해서 이마를 무릎에 댄 퍼블리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묘하고 찜찜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분명 이상할 게 없는데 이상한 느낌이 드니 괜히 신경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여기 온 이후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긴 했지만 그 때마다 닥치는 기분은 달랐다. 이 이상한 느낌은 지금 당장 찾아온 거니 방금 했던 얘기 중에 무언가 이상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느껴졌다. 물은 멀쩡히 흐르고 있는데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방금 전 했던 대화들이 전부 이상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니 뭐라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뭔가 대화라도 하면 이상한 게 뭔지 다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법사를 올려다보려던 순간 저 뒤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언뜻 보인 파란색에 퍼블리가 당장이라도 따라갈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자 마법사가 퍼블리를 보며 말했다.

다 쉬었니?”
. ?”
그럼 마저 보자꾸나.”
이젠 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인 마법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한 퍼블리의 말을 듣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 기억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려하고 위협적인 마법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오른쪽!”
패치는 원거리 마법을 날려대며 외쳤고 그에 언제 합류했는지 모를 흑기사가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불나비와 가시들을 쳐냈다. 합류한 건 흑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브레이니를 포함한 흑기사단이 앞장서서 그림자 괴물과 소음파리를 몰아내고 그 뒤에 메르시가 실시간으로 치유마법을 쓰면서 버티고 있었다. 동료를 찾으러 갔던 아난타도 원거리 마법을 날리며 폭탄꽃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 외에 잘 모르는 마법사와 마녀들도 있는 걸 보면 안개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선발대들 중 그나마 멀쩡한 이들이 다시 만나 뭉친 모양이었다.

뚫었습니다!”
모두 이쪽으로!”
길이 뚫렸다는 외침이 들려오자마자 모두 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소환생물 무리들을 무찌르고 견제하며 도망치는 모습은 정말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신기하게 한 명의 낙오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얼음장벽을 만들어내 뒤를 막으니 쫓아오던 괴물 무리는 얼음장벽에 부딪히고 그 뒤에 있던 소환생물들은 뒤따라오다가 앞서 부딪힌 소환생물들과 함께 땅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오도록 뛴 이들은 누구 하나가 다리가 풀려 넘어질 때쯤 멈춰 섰다.

...모두 무사....후우욱!”

다른 이들이 무사한지 물어보려던 메르시는 숨이 차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입을 막았다. 모두 빠져나오는데 성공은 했지만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기절했는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질 않았다. 조금 숨을 고른 이들은 언제 소환생물이 쫓아올지 몰라 초조한 눈으로 아직 숨을 몰아쉬는 이들과 쓰러진 이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좋아 괜찮아 보이는 흑기사단은 메르시를 포함해 힘들어하는 이들의 등을 쓸어주며 다독여줬지만 결국 몇몇 이들은 눈물을 터뜨리거나 신경질적으로 몸을 틀었고 울먹이며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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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인가...?”
그렇게 말하는 상대 마법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안색도 새파란데다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있었다.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척 봐도 굉장히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상대 마법사는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다가와 패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네가 진짜라면!! 아난타님을 만나면 꼭 전해주...!”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퍼블리가 당황해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기억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나타난 기억은 바로 뒤에 이어진 기억이 아니었다. 지금 나타난 기억 속의 패치는 또 혼자서 걷고 있었고 사방을 둘러싼 안개가 조금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왜 갑자기 끊어지고 다른 기억이 나타난 거예요?”
원래 나타나는 모든 기억이 이랬단다.”
아니 그렇긴 하지만...”
기억은 계속 흐려지면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마치 천천히 깜빡거리는 것 같았는데 보고 있던 퍼블리는 어쩐지 더욱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퍼블리의 불안함은 어떤 의미론 적중이 되었다. 안개가 흐려지면서 발밑만 겨우 보이던 주위가 조금 멀리 떨어진 땅까지 보일 수 있게 됐다. 물론 땅이라고 해봤자 약새풀이 빽빽하게 자라있는데다 안개 덕분에 흐리게 보여 눈밭처럼 보였는데 그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다른 색 점들을 찍은 것처럼 하얀 약새풀밭 사이에 있으니 얼핏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보게 된 퍼블리는 소름이 돋아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죽은 거예요?”
아니.”
안개가 끼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고 움직이던 선발대였다. 물론 전부 다 있는 건 아니지만 꽤 많은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약새풀밭 위에 누워있었다. 어디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고요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은 장소가 장소다보니 소름이 돋을 만 했다.

왜 모두들 누워있나 마법사에게 물어보려던 퍼블리는 안개가 끼기 전 저주막이 소란이 벌어진 원인이자 저주에 걸려 쓰러진 마녀를 떠올렸다.

모두 저주에 걸린 거군요.”
언제 깨어날지 모를 정도로 계속 잠들어있는 저주. 굳이 멀리 볼 것 없이 그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공주인 채로 잠들어있는 메르시를 떠올리면 간단했다. 패치는 잠들어있는 그들을 애써 보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심리적인 부담은 컸는지 안색이 아까보다 나쁜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나무가 나타났다. 하지만 패치는 거기에 기대지 않고 계속 걸어갔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에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또 기억이 사라졌는데 이번엔 다음 기억이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괜찮니?”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게 티가 났지만 마법사는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지금 기억이 나타나지 않는 걸 기회삼아 쉬는 겸 지금까지 본 기억들을 천천히 떠올려봤다. 물론 다 기억해내는 건 무리기 때문에 가장 인상 깊은 기억들 먼저 더듬어봤다. 사실 본 기억이 많은 만큼 인상 깊었던 것도 꽤 많아 골라내는 것도 꽤 걸렸다.

제가 흩어진 기억을 전부 본 건 아니죠?”
그래.”

당연하게도 한 마법사의 일생이 담긴 기억이 적을 순 없었다. 그걸 깨닫자 퍼블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저번에 마법사가 말했다시피 날뛰는 기억들이 한 곳으로 뭉치니 전부 볼 필요가 없다는 건 퍼블리도 알고 있었지만 역시 기억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숲에서의 기억이 끝난다면 그 이후의 기억도 봐야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든 거였다. 퍼블리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 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며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하던 순간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왜 아빠의 기억이 흩어진 거지?

그리고 뒤를 이어 의문이 또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왜 이제야 이런 의문을 떠올린 거지?

너무 이상해요.”

뭐가 말이니?”
전부 다 라고 말하기 전에 퍼블리는 말을 골랐다. 이렇게 뭉뚱그려 말하면 달라지는 게 없었다.

“...여기 저주받은 곳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제 상태도 이상해요. 어떻게 이렇게 오래 버티고 어떻게 이렇게 마냥 기억만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려면 처음부터 들거나 아니면 더 일찍 들었을 텐데 이제야 드는 것도 이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퍼블리는 녹색 눈을 또렷하게 빛내며 마법사를 마주봤다.

제 기억은 멀쩡한데 아빠의 기억이 왜 흩어졌던 건가요?”
퍼블리도 그의 아빠도 보내준 대상이 다르긴 하지만 이동 마법으로 이 숲에 왔다. 굳이 차이를 더 따지자면 먼저 온 자도 이곳에 이미 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빠 쪽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렇게 기억이 흩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을까?

쿨럭!”
기억이 다시 나타난 건지 뒤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지만 퍼블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가득해보였다. 이렇게 마냥 기억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퍼블리가 생각해도 끝이 안 보였다. 이 기억이 대체 언제 끝날까.

안 봐도 괜찮겠니?”
대답해주세요.”

네 아버지가 피투성이인 걸?”
깜짝 놀란 퍼블리가 재빨리 돌아보니 피는커녕 빨간색은 패치의 머리카락과 눈썹 외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았다고 뭐라 외치며 다시 마법사를 보기엔 피 묻은 것만 없지 패치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보였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걸 보니 탈진한 것 같았다. 퍼블리가 불안함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패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숨도 몰아쉬고 있는데 눈빛만은 기운 넘치다 못해 살벌했다.

...어떤 미친 숲이...그림자 괴물이랑 불나비를...후우!”
처음 듣는 패치의 험한 말에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지만 그림자 괴물과 불나비라는 말에 퍼블리는 납득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마법소환 생물체였는데 이름 그대로 그림자로 된 괴물과 불로 된 나비였다. 아마 시달리다 못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으리라.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이를 뿌득 갈던 패치는 손을 들어 그 위에 또 빛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둥글지 않고 울룩불룩 제멋대로 모양이 계속 바뀌는 빛이었다.

손님 맞을 땐 낯짝을 까야지.”
그 빛을 꽉 쥐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폭발하듯 빛이 터졌다. 눈부심에 눈을 감은 퍼블리가 눈꺼풀 너머로 빛이 더 느껴지지 않을 때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안개가 깨끗하게 걷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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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평범한 숲인 척 가장하고 이렇게 한 번에 일을 터뜨릴뿐더러 저렇게 대놓고 속이기 시작하다니, 숲 자체가 그런 건지 숲을 만든 자가 그런 건지 상당히 악취미군.”

패치는 주위를 다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안개가 매우 짙어 주변이 다 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요 비록 가짜긴 했지만 컨티뉴의 말대로 여기에 마냥 있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팔짱낀 팔 사이로 나와 있는 손의 검지손가락을 까딱이며 고민하던 패치는 팔짱을 풀고 손바닥 위에 공처럼 둥근 빛을 만들어냈다.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당하진 않을 걸세.”
그리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무작정 가는 건 위험했지만 달리 선택지도 없었다. 옆으로 가나 뒤로 가나 결국에는 길 자체가 안 보이는데 길을 잃을 걱정을 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가짜가 패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을지는 모르겠으나 따라가면 좋지 않은 건 물론이고 아까 의 비명들의 뒤를 마저 이었을지도 몰랐다.

걷는 내내 패치는 가짜가 아니라면 누구든 마주쳤으면 좋겠지만 웬만하면 용사이길 바라고 있었다. 컨티뉴는 멀쩡히 있는 건 당연하고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훨씬 더 오래 버티는 걸 넘어서 저주의 근원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괜히 하늘의 현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용사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불안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았다.

누구 없어요?!”
나 여기 있어!!”
도와주세요!”

사방에서 누군가를 찾고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들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패치는 입을 꾹 다물고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 저 목소리에 반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

...려줘....”
“...죽는 거야?”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비명과 외침들 사이사이로 이번엔 후회가 가득한 말들이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말려 죽이려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목소리들은 처절했고 안개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단 귀로 듣는 데에 더 집중이 되다보니 듣고 있는 입장에선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나를 따라왔으면 바로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패치가 뒤돌아보니 아까 사라졌던 가짜가 나무처럼 서 있었다.

지금이라도 따라오지 않겠어? 이 숲 밖으로 안내해줄게.”
패치는 그 말을 듣고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손에 있는 빛을 가짜에게 쐈다. 가짜의 몸이 절반은 날아갔는데도 피는 물론이고 남아있는 상반신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이 찢어져있는 것처럼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뭘 믿고?”
눈도 안 깜빡이고 단호하게 말하는 패치에 가짜는 또 사라졌고 가짜가 말하는 동안 조용했던 주위는 다시 비명과 외침으로 가득 찼다. 패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패치야~!”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패치는 바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개판이 되기도 전에 갑자기 사라진 용사였다.

숲이 막! ! 안개로 가득차구~”
안개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여기저기 삐죽 솟은 머리카락 그림자를 보면 용사 같은데 패치는 아직 섣불리 확신할 수 없어 다가가지 않았다. 반면에 그림자가 점점 커지고 있는 걸 보니 패치가 안 가고 있는 만큼 용사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숲이 이상해!”
그 말과 동시에 용사가 제대로 보일 정도로 안개를 헤치며 나왔고 패치는 아까 가짜에게 했던 것처럼 둥근 빛을 쐈다. 용사도 가짜였다.

어떻게 알았어~?”
용사의 모습을 한 가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아까 사라진 가짜처럼 몸의 반이 날아갔는데도 움직이는 남은 부분과 그 중에서 해맑게 웃는 용사의 얼굴은 분위기를 섬뜩하게 만들고 있었다. 얌전히 보고 있는 퍼블리도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데 정작 기억 속의 당사자인 패치는 눈썹만 한 번 까닥이곤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순순히 알려주겠나?”
그렇게 18번 째 가짜 용사가 패치의 공격에 날아간 이후론 가짜 쪽도 포기했는지 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같이 숲이 이상하다느니 같이 나가자느니 나가는 길을 찾았다느니 나중엔 그나마 교묘했지만 안개 낀 이후로 패치와 컨티뉴를 찾으려고 돌아다녔다는 용사가 절대 안 할 말들만 꺼내는 터라 속고 싶어도 못 속는 상황이었다. 물론 패치는 그 말을 친절히 꺼내줄 생각이 없었으니 입만 계속 꾹 다문 채 공격마법만 쓰고 있었다.

비명과 외침들도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조용해져서 드디어 끝났나 싶었는데 앞에 또 가짜가 나타나는 건지 안개 너머로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패치가 멈춰서 말없이 공격마법을 준비했는데 그림자는 아까처럼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패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공격마법은 없애지 않고 안개 너머의 상대를 불렀다.

혹시 누구 있나?”

그러자 안개 너머 그림자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상대도 패치처럼 꽤 시달렸는지 아니면 가짜가 고도의 전략을 짜고 있는 건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일단 그림자는 보이니 맞으면 위 아래로, 아니면 양 옆으로 몸을 움직이게. 내 목소리를 아는가?”
그림자가 질문을 들었을 땐 잠시 움직임을 보이지 않더니 조금 지나서 위 아래로 움직였다.

내 이름을 아는가?”

이번엔 양 옆으로 움직였다. 그에 패치는 상대가 진짜라면 한 번쯤은 말을 섞은 인가 싶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았어도 어쩌다 가까이 있느라 제 목소리를 들은 이들도 많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들어본 것과 기억하고 있는 건 별개이니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할까 또 무슨 질문들로 확인을 해봐야할까 고민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움직였다.

자네는...”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상대방은 패치도 아는 마법사였다. 사실 안다고 하기엔 미묘했지만 모습이 꽤나 강렬해서 패치는 물론이고 퍼블리도 기억하고 있는 마법사였다. 뚜렷하고 튼튼한 팔다리 근육과 함께 눈에 띄는 콧수염. 아난타가 인사하러 왔을 때 곁에 따라왔던 일행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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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간 거야?!”
그 짧은 새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용사의 파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마녀와 마법사가 많이 뭉쳐 있는데다 모두 저주막이를 확인하고 다시 만들고 있다 보니 그 사이를 지나가기 곤란하고 힘들었다. 그럼 용사도 마찬가지로 지나가기 힘들 텐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라졌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쩐지 용사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기억을 비록 제 삼자로서 본다고 할 수 있었지만 주인은 역시 패치였기 때문에 패치의 시점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져서 용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퍼블리도 못 본 터라 초조해하고 있었다.

...어어어어어어쩌죠?!!”
진정하렴, 기억이란다.”
아니 기억이래도...!”
그러다 문득 퍼블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으니 아까 직접 만난 용사였다. 여기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 용사의 말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은 퍼블리는 열심히 마녀들과 마법사들 사이를 헤쳐 용사를 찾고 있는 패치를 봤다.

그럼 아빠는...지금 용사를 놓친 이후로 찾지 못했다는 거예요?”

마법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퍼블리는 기다리느라 숲에 온 이후로 나가지 않았다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용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용사라는 분을 이해 못할 것 같아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도 그렇고 행동도요. 물론 다른 이들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해서 이해하는 거라면...”

이해라...”

어쩐지 묘하게 가라앉은 어투에 망연히 기억을 보고 있던 퍼블리가 마법사를 돌아봤다. 마법사의 분위기를 자세히 보니 가라앉았다기 보단 뭔가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퍼블리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들었던 말들 중에서 가장 우스웠던 말이 떠올랐단다.”
우스웠던 말이요?”
마법사는 퍼블리의 아빠에 대해서 얘기할 때 외엔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마저도 우연히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것 같았으니 만난 이후로 감정을 드러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 한 번 이후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던 마법사가 입매를 조금 비튼 채 말을 꺼낸다.

마법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마법사지 않느냐는 말.”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기억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짙은 회색 안개가 다시 끼기 시작하는 게 기억이 사라지나 싶었더니

뭐야? 갑자기 웬 안개야?!”
저주들이 날뛰기 시작하는 건가?”
기억 속에서 안개가 끼고 있었다. 새벽도, 아침도 아닌 햇빛이 쨍쨍한 낮이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끼는 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퍼블리가 맨 처음 왔을 때처럼 옆에 있는 일행 그림자도 안 보일 정도로 짙게 깔려 시야를 막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쪽에서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그 뒤로 여러 방향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는데 소리만 들리고 보이지 않다보니 실제로 겪고 있는 것도 아닌데 퍼블리도 무의식적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긴장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비명들 사이로 제 일행을 부르짖는 목소리도 들려오고 넘어진 건지 털썩 쓰러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마벨린? 마벨린이야?”
누가 쓰러졌어!!”

패치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집중해서 들으며 옆을 쳐다봤다. 다행히 컨티뉴가 옆에 있었다. 용사를 찾으려고 마녀들과 마법사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갈 때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컨티뉴가 안개가 끼는 동안 빨리 패치의 옆으로 왔었는지 짙은 안개 속에서 둘만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이거 큰일이군.”
컨티뉴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한 바퀴 돌며 안개를 휘저어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에 있는 모두가 공황에 빠져 어디론가 뛰어간 게 아닌 이상 바로 옆에 있었을 다른 일행들이 손에 걸리는 게 당연할 텐데 무언가 부딪히는 느낌 없이 안개만 휘젓고 있었다.

이렇게 한 순간에 갑자기 안개가 끼고 주변에 있던 모든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사라지다니, 보통 일이 아니야.”
저주 가득한 숲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싶습니다.”
우선 여기 마냥 있을 순 없으니 움직여야겠군, 어서 다른 이들을 찾으러 가야지.”

그렇게 말한 컨티뉴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는데 패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열 발자국 앞으로 갔던 컨티뉴가 뒤돌아 패치를 불렀다.

가만히 서서 뭐하나? 이럴 시간 없어.”

컨티뉴가 까딱 손짓하며 재촉을 하지만 패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까지 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컨티뉴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 번쯤 재촉이 돌아왔을 때 패치가 입을 열었다.

첫째, 아무리 온 사방에 끼어있는 안개라 해도 직접 손을 뻗는 성급한 행위는 금물.”

무슨 소리를
둘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마냥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만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건 더더욱 금물.”

패치는 상대방이 뭐라 묻기도 전에 제 말이 아직 안 끝났다는 듯이 단호하게 끊어내 말을 이었다. 손까지 뻗으며 재촉하던 컨티뉴는 어느새 손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셋째, 반복해서 말하지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건 물론이고 바로 옆에 있는 마법사도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제법 떨어졌는데도 모습이 보이는 수상한 이를 따라가는 건 금물.”

거기까지 말한 패치는 한숨을 쉬며 쐐기를 박았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게.”
저 멀리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컨티뉴가 말한다.

들켰네?”
어디선가 멀리서 깔깔 비웃는 소리와 함께 가짜가 기괴하게 녹아내리며 안개처럼 사라졌다. 굉장히 소름끼치는 상황인데도 패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 패치는 완전히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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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일단 물러나세요! 만지지 마시고요!”
바로 울려 퍼지는 메르시의 외침에 약새풀밭을 바로 앞에 둔 이들이 흠칫 어깨를 떨며 물러났다. 메르시가 꽤 급하게 마법을 쓰느라 제대로 목소리 크기 조절이 안 됐는지 메르시 가까이에 있던 마법사와 마녀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막고 있었다.

진짜 약새풀이야?”
그럼 가짜겠냐.”

아니 이렇게 많이, 그것도 한꺼번에 자라있는 건 처음 봤으니까 그렇지!”

귀한 약새풀이 한꺼번에 자라있었지만 섣불리 손을 뻗는 마녀나 마법사는 없었다. 저주를 먹고 자란다는 약새풀이었다. 돈 벌려고 약새풀 캐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마녀와 마법사는 이게 무슨 일이야 놀라면서 좋아했겠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이렇게 저주를 조사를 하러 나온 이들에겐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저주가 강하게 나타날지도 몰라, 아니 나타날 거야.”
긴장과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들이 드넓고 새하얀 약새풀밭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물러나는 마녀와 마법사는 없었다.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메르시의 외침에 따라 제 일행들과 함께 약새풀밭 위로 발을 내딛었다.

온통 새하얗당~!!”
약새풀을 사진 말고 실제로는 처음 봤을 용사는 눈을 빛내면서 제 발 주변의 약새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당부했던 대로 손대진 않았지만 계속 아래만 보니 뒤에 있는 마법사와 부딪힐까싶어 패치가 주의를 주고 있었다.

끝이 없어...”

계속 걸어도 약새풀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더 걸으면 걸을 수록 처음 들어온 이후의 나흘이 아니었다면 이 숲의 땅에 자라있는 풀은 모두 약새풀일 거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나뭇잎을 제외하면 녹색은 하나도 안 보이게 됐다. 퍼블리는 이 광경을 보며 잠시 제 뒷마당을 떠올렸다가 아니카를 생각했다. 전서구와 함께 무사히 왕국으로 돌아갔을까. 메르시에게 무슨 말을 들으러 갔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금 울적해졌다.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니카는 멀쩡하다 못해 퍼블리네 집 뒷마당에서 약새풀을 뜯어 팔면서 밸러니의 숲 옆에 진을 치고 있었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전서구를 통해 알아내고 있었다. 물론 퍼블리가 이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원인을 찾아도 돌아갈 수 있을까?”
못 돌아가도 어쩔 수 없어. 애초에 각오하고 온 거잖아?”
그래도 원인을 전할 전령은 있어야지.”

아직 저주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없었지만 갈수록 약새풀 때문에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것만 같아 불안해하는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괜찮을 거라는 격려와 어차피 각오한 게 아니냐는 결심까지 꺼내며 안정시키고는 있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로 불안해 보였고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우웅?”
왜 그러나?”

조오기~ 뭐가 이썽!”
용사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지만 같이 가는 선발대 무리들로 가려져 있어 잘 안보였다. 패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용사의 손끝이 가리키는 데를 빤히 봤지만 그래도 마법사의 몸 너머를 꿰뚫어 보는 재주는 없었다. 결국 패치는 보는 걸 포기하고 용사에게 물었다.

뭘 봤나?”

우웅~ 멀어서 잘 안 보이눈뎅~”
용사는 제가 본 걸 자세히 보려고 까치발을 들다가 콩콩 뛰기도 했다.

막 빤짝빤짝 빛나!”
빛난다고?”
빛난다면 눈에 띌 법도 한데 패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옆에서 같이 보고 있을 컨티뉴에게도 물어봤지만 컨티뉴도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용사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기 때문에 눈을 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거나 용사가 말한 반짝이는 게 있는 데로 갈 순 없었다. 이런 곳에서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었고 그렇다고 선발대 모두가 갈 수도 없었다.

아직 반짝이는 게 그대로 남아있나?”
!”

그렇다면 저긴 나중에 가보도록 하지.”
나중이라는 말은 그만큼 기약 없는 말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해두지 않으면 용사는 당장 그 쪽으로 튀어갈 것 같았다.

이봐! 왜 그래?!”
그런데 그 때 반대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패치와 컨티뉴도 소란이 일어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있던 메르시가 비행마법을 써서 그 쪽으로 날아갔다.

무슨 일입니까?”
제 일행이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물론이고 기억을 보고 있던 퍼블리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이에 있던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퍼블리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마법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모두! 진정하고 저주막이 마법을 확인하세요!”
분명 자신도 놀랐을 메르시는 침착하게 외치고 쓰러진 마녀를 살펴봤다. 메르시에게 대답했던 마녀는 겁먹은 얼굴로 쓰러진 제 일행을 보다가 메르시의 외침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력을 담아 마법진을 그렸다.

마력이 강하거나 저주막이 마법을 쓰는데 능숙한 이들은 저주막이가 멀쩡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의 저주막이는 어느새 얇아져있었다. 메르시가 쓰러진 마녀의 저주막이를 확인해보니 얇아진 이들보다 더 얇은 저주막이가 드러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저주막이가 얇아지신 분들은 다시 저주막이 마법을 사용해서 원래 상태로 돌려놓으셔야 합니다! 저주막이가 멀쩡하신 분들은 다시 저주막이가 완성될 때까지 저주막이를 같이 쓰고 계세요!”

멀쩡한 이들은 재빨리 제 주변에 얇아진 이들에게 저주막이를 씌웠고 여기저기서 마법 취소와 마법 발동이 일어났다. 패치와 컨티뉴도 메르시의 말을 따라 저주막이를 확인해보니 멀쩡했다.

용사 자네도 얼른 확인을...?”
패치가 용사에게도 저주막이를 확인해보라며 고개를 돌렸지만 용사가 있어야 할 그 옆엔 정신없이 저주막이를 확인하는 마법사와 저주막이를 고치는 마녀 밖에 없었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저주막이를 잡은 채 패치를 마주보고 있는 컨티뉴만 있었다. 용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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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울창한 것도 이상했지만 이상한 게 또 있어요. 여기 동물은 물론이고 벌레들도 없어요.”
기억에서 밸러니의 숲속이 나타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퍼블리가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사실 퍼블리는 첫날 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었지만 혹시 몰라 계속 주위를 살펴보니 날벌레는 물론이고 숲이라면 흔히 있는 모기도 안 보이는 걸 보니 확신했다. 물론 나뭇잎과 풀이 이렇게 무성해도 진짜 날씨는 눈이 한창 내리고 있을 한겨울이니 모기가 없다고 할 순 있겠지만 여긴 정말 식물만 있었다.

동물들이 저주를 피해간 걸까요?”
숲이 거부를 했으니 동물들도 따른 거란다.”
숲이 거부를 해요?”

정확히는 숲을 만든 자가 거부를 한 거지.”
마법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딱 다물었지만 숲을 만든 자라면 이름을 붙이게 된 밸러니라는 마녀인 게 분명했다. 식물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못하게 숲을 만들어낸 걸까. 어찌 생각해보면 동물이 없어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식물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직접 다가오거나 공격하진 않으니.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숲이 워낙 커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군.”
일단 남겨온 표시가 없는 걸 보면 같은 자리는 아닌 것 같아.”
사흘이 지났는데도 숲은 여전히 아무 이상이 없을뿐더러 울창하고 아름다웠다. 다른 말로는 변화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정말 저주가 흘러나오는 숲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몸 상태는 이상이 없나요? 어디 아프거나 졸리진 않나요?”

저흰 괜찮습니다!”
들려오는 외침에 돌아보니 아난타가 이끄는 전장과 분노였다. 그 중에서 콧수염이 두껍게 자라있는 마법사가 꽤 눈에 띄었다.

아난타 선생님의 동료 분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첫 수업을 할 때 신성지대에서 온 마법사라고 소개를 했었고 전장과 분노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한 때 그들의 대표를 맡았다는 말을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던 아난타가 동료들과 함께 있는 아난타 위로 잠깐 덧씌워졌다. 퍼블리에게 있어서 제 아빠만큼이나 잘 모르겠는 마법사는 바로 아난타였다. 마지막에 제 아빠와 모습을 바꾼 마법을 풀며 무지개 구슬을 건네줬던 모습이 떠올라 퍼블리는 손을 들어 반대쪽에 낀 팔찌에 손을 올렸다. 익숙한 구슬 장식이 퍼블리의 손을 둥글게 눌렀다.

숲에 들어간 모든 분들, 여기 있는 마녀와 마법사들 전부 저주를 받은 건가요?”

그래.”

그렇담 저들도 메르시처럼 잠들어 있을까, 흑기사단처럼 살아있는데도 온 몸이 썩고 있을까 아니면....

안뇨옹~!”
잠깐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언제 거기로 갔는지 용사가 전장과 분노 쪽으로 가 있었다.

너는 누구지?”

용사!”
아난타를 제외한 전장과 분노의 마법사들과 마녀들은 갑자기 다가온 용사에게 약간의 경계심을 보였다. 물론 용사는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고 얼마 안 가 경계심이 풀린 채 용사와 함께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평소라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패치도 오랜 움직임에 조금 지쳤는지 용사가 있는 쪽을 흘깃 보고만 있었다.

그들도 패치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패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패치가 주목하고 있는 게 용사라는 걸 알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난타는 제 동료들이 오랜만에 밝게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기분이 좋은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패치와 눈을 마주치고 손을 흔들곤 했다.

왜 용사님한테 아빠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 걸까요?”
직접 물어보고 직접 듣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용사는 그 이후로 다른 일행들에게 찾아가 인사한 후 같이 놀곤 했다. 정확히는 놀고 있는 건 용사뿐이었고 용사와 인사를 나눈 이들은 옆에서 용사가 노는 걸 지켜보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용사의 활기찬 모습에 힘을 얻어 웃는 이들이 많았지만 몇몇은 좋은 눈빛을 보내진 않았다. 심각하고 예민한 와중에 정신 사납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용사.”

?”

용사는 패치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패치 옆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다시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졌나 싶었더니 용사가 다시 돌아다니려고 했고 패치는 용사를 잡아서 제 옆에 두고 있었다. 좋지 않은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시비를 걸 수도 있기 때문에 잡아두는 것 같았다.

다른 칭구들이랑 놀구 싶엉!”

패치가 용사를 계속 붙잡아두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결국 패치는 한 발 양보했는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에게만 가라는 거였고 용사는 다 같이 놀아야한다고 했지만 쉬고 싶은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며 용사를 설득했고 용사가 납득하며 성공했다.

과보호야.”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상황이 상황입니다.”
이해는 해.”
컨티뉴도 뭐라 더 말하지 않고 용사를 지켜봤다. 그나마 용사가 숲에 들어오기 전에 약속한 대로 주변 식물들에 섣불리 손을 안 대고 있는 거에 많이 안심하고 있었던 터라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기도 했고 용사의 친화력을 믿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았지만 예민해진 이들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 저주 가득한 숲에 들어온 이상 주의해야할 건 많았고 특히 주변의 다른 이들을 자극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외침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저기...!!”
그 자에게 다가간 이들도 하나같이 깜짝 놀라 외치거나 숨을 들이켰다. 패치와 컨티뉴도 그 쪽으로 달려갔고 용사도 패치의 뒤를 따라 갔다. 마녀와 마법사들의 어깨너머 언뜻 하얀 게 보인다. 얼핏 봐선 눈이 쌓여 눈밭이 이루어졌나 싶었는데

전부 약새풀이잖아?!”

약새풀들이 눈밭처럼 새하얗게 자라있었다. 퍼블리네 집 뒷마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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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당~!!”
용사가 콩콩 뛰듯이 까치발을 들며 외쳤다. 이제까지 지나쳤던 숲보다 나무가 크고 넓게 자라있는 숲이 나타났다. 양 옆을 돌아봐도 끝이 바다처럼 안 보일 정도로 굉장히 넓었는데 이 숲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벌판만 남았다니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퍼블리는 묘한 눈으로 용사 옆으로 다가가 숲을 둘러봤다.

용사가 숲 바로 앞에 서 있는 건 아니었다. 흑기사단과 메르시,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먼저 앞서서 숲 앞에 서 있었고 그 많은 마녀와 마법사들 때문에 가려진 숲을 보려고 용사가 콩콩 까치발을 들면서 뛰고 있었다. 용사는 패치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컨티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앞쪽에서 나타나 다시 둘의 곁으로 돌아왔다.

세상의 끝에 오게 되니 기대되지 않나?”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당연히 진심이야.”
패치가 컨티뉴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을 짓는 것과 동시에 저 앞에서 누군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메르시였다.

모두들 각오하고 오셨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앞에 저주 그 자체인 숲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으신 분은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메르시는 같은 내용을 두 번 더 외치고 반응을 기다렸다. 앞에 있는 마녀와 마법사들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돌아가겠다고 손을 들거나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자들은 없었다. 메르시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거고 비난할 수 없다고 덧붙이며 외쳤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출발합니다!”
메르시는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다시 땅으로 내려왔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는 패치와 용사를 보던 퍼블리는 이렇게 뒤에 있는데도 보일 정도로 큰 나무들을 눈에 담았다.

이 때는 안개가 없었네요.”
이제 막 들어섰을 뿐이지만 밸러니의 숲은 다른 숲보다 나무가 더 큰 걸 빼면 다른 숲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안개는커녕 나무가 크고 빽빽한데도 햇빛이 잘 내려와 주위가 환하면서 선명하게 보였고 나무 외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도 피어있어 만약 밸러니의 숲인 줄 모르고 들어왔다면 저주 가득한 숲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바람이 불어와서 주위를 흔들고 가니 나뭇가지에 잔뜩 붙어있는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와 함께 흔들리면서 주위를 반짝이는 모습은 숲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용사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고 퍼블리도 그 옆에서 어째서 이렇게 위화감이 드는지 알아내기 위해 둘러보다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무들을 쏘아보는 패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이제 보니 패치만 표정이 심각한 게 아니었다. 얼굴이 안 보이는 컨티뉴와 늘 웃는 용사를 제외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마녀와 마법사의 표정들이 굉장히 심각했다.

“...예정보다 조금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 한겨울이고 봄이 오려면 멀었는데...”

그제야 퍼블리는 어째서 위화감이 들었는지 알아챘다. 지금은 한겨울이고 여긴 마치 여름을 맞이하는 숲처럼 울창했다. 소름이 돋은 퍼블리는 팔을 쓸어내리며 패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비록 기억이라 기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분 상으로는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으니까.

여기 직접 와 있으면서 하는 말치곤 웃긴데요, 사실 기억 보는 내내 저주 가득한 숲이라길래 다 말라 죽어가는 나무들과 동물 시체들이 잔뜩 쌓여있는 음침한 숲이 아닐까 상상했었어요.”
직접 와 있는 이 숲은 나무도 안 보일정도로 안개가 가득하니 그렇게 상상하는 건 무리가 아니란다.”
그런데 이렇게 안개도 없고 선명하고 예쁜 숲인데 왜 지금은 이렇게 안개가 가득한 거죠?”
퍼블리는 새삼 생각해보니 여기 달리면서 나무에 부딪힌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이렇게 나무가 크고 빽빽한데 바로 안 보인다는 것도 이상하고 앞도 제대로 안 보고 정신없이 달리기도 했는데 나무에 부딪히지도 않은 게 이상했다. 아까 호수를 발견했을 땐 나무에 손을 짚기도 했지만 역시 부딪히지 않은 건 말이 안 됐다.

지금 이 숲은 어떻게 되어있는 거죠?”
어차피 기억에서 다 나올 테지만...한 번 맞춰보렴. 맞으면 맞았다고 얘기할 테니.”
퍼블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일단 순백의 날 이후로 이렇게 된 거죠?”
맞아.”
퍼블리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정화의 영향으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렇게 되면 안개는 모르겠지만 나무들이 부딪히지 않았던 건 이해가 간다고 생각한 퍼블리가 자신 있게 제가 생각해낸 걸 말했다.

순백의 날 때 사용된 정화 방법이 혹시 숲의 나무를 태우거나 전부 없애는 건가요?”
아니란다.”

마법사의 단호한 대답에 퍼블리는 고개를 숙였다. 막연하게 정화라고만 하고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했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숲이 사라졌다고 하니 당연히 숲을 아예 없애서 그걸 정화했다고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나온 방법이었다.

모든 건 기억에서 다 나타날 거란다.”

그 말에 퍼블리는 그냥 얌전히 기억이나 보기로 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고 숲도 아까보다 어두워졌다. 어두워졌어도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주위의 풍경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고 곧 있으면 날이 완전히 저물어버릴 테니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저주 가득한 숲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최대한 빨리 숲을 조사하고 나가길 바랐지만 밤에, 그것도 숲 속에서 움직이는 건 매우 위험한 짓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모두 누울 자리를 더듬어 앉기 시작했다. 각각의 일행마다 불침번을 정했지만 긴장이 가득한 표정들을 보아하니 불침번을 당장 서지 않아도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아보였다.

잘 자네.”

물론 용사는 예외였다. 용사는 불침번을 세워도 한밤중에 혼자서 숲을 돌아다닐지도 몰라 애초에 제외됐다. 패치는 그 옆에서 컨티뉴와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긴장 가득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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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에 말입니까?”

패치가 의아하단 어투로 반문했다. 꿈에서 갈 정도로 숲에 가고 싶었나 하는 의아함이었다. 컨티뉴는 그 때 한 번 뿐이긴 했지만 확실하게 들었다고 덧붙이며 못을 박았다. 패치는 꿈결이라면 제가 못들을 만 하다는 걸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곤히 자고 있는 용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용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지 모르는지 편안한 얼굴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금은 용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다른 마법사나 마녀 생각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야.”

적어도 예상은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사는 흥미로운 게 눈에 보이면 바로 눈을 빛내며 달려간다는 걸 예상할 수 있잖나?”

패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컨티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물론 컨티뉴가 그 속에 담긴 뜻을 몰라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일종의 말장난이라면 말장난이라 할 수 있었고 크게 개의치 말라는 격려라면 격려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부분은 패치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었다.

용사가 왜 숲으로 가고 싶어 했는지는 숲에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그것보다 궁금한 건 용사 말고 자네 스스로가 밸러니의 숲으로 가볼 생각은 있었는지 궁금한데.”

그 질문을 받은 패치는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이렇게 용사 곁에 딱 붙어서 돌보는 게 아닌, 혼자 있었던 패치라면 소식지를 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상황에 따라 달랐을 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패치는 다시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댔다. 패치는 밸러니의 숲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거기에 가야하는 뚜렷한 목표나 이유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저주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없던 이유가 생긴 거나 다름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조사차 가는 거였고 당장 생활에 위험하고 심각하거나 이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마법사와 마녀들이 참가해야하지 않는 이상 굳이 참가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다보니 그 때 상황에 따라 달랐을 거라는 대답이 아주 적절하게 나온 것 같았다.

영 모르겠군.”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용사 곁에 붙어 있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그 말에 패치의 한쪽 눈썹 끝이 올라갔다. 컨티뉴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이 입을 가린 천을 더듬으며 잠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용사가 꿈결에 두 번 웅얼거릴 때쯤 컨티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곁의 용사로 인해 자네의 주변이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용사만 곁에 두고 모든 걸 밀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 많이 들고 있어.”
처음부터 이랬습니다만.”
뭐든 간에 주변에 영향을 받아 변하기 마련이지. 특히 서로 얘기를 나누는 마법사나 마녀는 특히.”
컨티뉴는 용사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걸까 아니면 용사를 통해 주변을 받아들일지도 모를 패치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걸까. 패치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 컨티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눈에도 컨티뉴는 그저 어깨만 으쓱하며 용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사실 이번 조사는 첫 번째 조사가 아니라 첫 번째 전쟁이 될지도 몰라.”

사실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예상이었다. 굳이 아예 모르고 있을 마법사나 마녀가 있다고 꼽는다면 바로 여기 곤히 자고 있는 용사라고 할 수 있었다. 꿈속에서 밸러니의 숲에 갔다고 현실에서도 가려고 하는 용사였으니 이미 조사고 전쟁이고 용사에게 있어선 딴 세상 얘기나 다름없었다.

다른 이들처럼 밟고 있는 땅을 위해 조사한다는 거창한 이유 없이 그저 가고 싶다고 가는 용사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지.”

“...숲으로 가는 거와 제 변화는 아예 상관없을뿐더러 딴 얘기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그 부분은 꿈 때문에 기대하고 있는 거고 그것 말고도 다른 것들도 기대하고 있어. 어쩌면 용사가 가장 먼저 저주가 흘러나오는 원인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 말에 패치는 당연히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 컨티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목적이 뚜렷한 건 좋지만 너무 긴장하고 찾으려고만 한다면 오히려 시야가 어두워져서 안 보이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도 놓치는 일이 많아.”

요컨대 용사의 어디로 튈지 모를 자유분방함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거였다. 약새풀을 찾기 위해 열심히 숲 주변을 살펴보는 마녀보다 옆에서 같이 가고 싶다고 졸라 따라 나온 아이가 먼저 발견했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패치는 이렇게 비유하니 먼저 원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는 건 아직 이해가 안 가 다시 물었다.

꿈 때문에 기대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혹시 꿈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알고 있는 게 있냐고 물으셔도 자고 있을 때 보는 허상이 꿈이라고 알고 있는 거 외엔 없습니다.”

허상이 아니라는 얘기는?”

패치는 꿈 자체가 현실에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무언가를 쥐는 그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눕고 눈을 감은 채 자면서 꾸는 꿈이니 허상이 아닌 게 무슨 소린가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컨티뉴가 묻는 게 정확히 무언지 알아내려고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아직 확실한 게 아니니 여기까지만 말하지. 용사에게 직접 물어보면 더 빠를 것 같지만 미리 진실을 알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추측이라도 말씀하실 생각은...”

없어.”
단호하게 거절한 컨티뉴는 일어나 메르시와 흑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흑기사단 중 몇몇이 취해 바닥에 누워있었고 그 사이에 대표인 흑기사도 섞여 있었다. 메르시는 아직 어른이 아니니 술을 마시지 않아서 멀쩡했고 술에 취한 흑기사단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었다. 아직은 모두가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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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에서 순백의 날에 대해 쓴 마녀와 마법사들은 전부 후발대였던 거예요?”
전부라기 보단 대부분은 그렇단다. 살아 돌아왔어도 저주 때문에 일상생활도 힘드니까.”

진실이 담긴 내용을 썼어도 책으로 내지 못했을 자들이 많았을 게 뻔했다. 퍼블리는 집에 돌아가면 역사책부터 태우기로 결심했다. 세상이 사기꾼 천지였다.

용사는 여행하는 게 잘 맞는 것 같아 보이네.”
지금 이 상황은 여행이 아닙니다만.”
용사에게 있어선 여행이지 않을까?”
아직 숲에 도착하진 않았지만 선발대에 속한 대부분의 이들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패치와 컨티뉴도 아예 긴장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고 숲으로 들어간 이후에 어떻게 될지 미리 걱정도 하고 있었다. 다만 패치는 본인보다 용사를 더 걱정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를테면

숲으로 들어간 이후엔 절대 아무거나 따서 먹으면 안 돼, 열매는 물론이고 버섯과 풀 그 외 모두.”
패치는 숲으로 가는 길 내내 용사를 붙잡고 거의 상식수준의 얘기들을 당부하고 있었다. 아무리 용사라도 아무거나 주워 먹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었다. 눈에 띄는 버섯을 바로 제 따서 제 입에 넣은 전적이 있는지라 패치가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는지 바로 옆에서 본 컨티뉴와 퍼블리는 잘 알고 있었다.

우웅~ 나뭇잎은?”
안 돼.”

미리 챙겨온 식량들 외엔 입에 절대 넣어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하니 그제야 용사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패치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으로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는 그런 패치의 속도 모르고 메르시와 흑기사단과 놀다 오겠다고 말하며 흑기사단이 있는 데로 뛰어갔다. 당연하게도 선발대로 온 메르시는 숨을 돌리고 싶을 때 흑기사단 사이로 모습을 숨겼고 남들이 다 지쳐 쉬고 있을 때도 기운이 넘치는 용사가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후로는 매번 쉬어가는 시간마다 흑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흑기사단은 놀러오는 용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쾌한 그들의 분위기는 용사와도 아주 잘 맞아 용사를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빨간 머리 마법사와는 무슨 사이야?”
칭구!”
얼굴 가린 마법사는?”

칭구!”
우리는?”
칭구!”
정말 잘 맞는 친구들을 제대로 만난 모습이었다. 이따금씩 컨티뉴도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함께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패치는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고만 있었다. 몇몇 흑기사단원이 그런 패치에게 말을 걸며 다가갈 때도 있었는데 패치는 대답을 길게 하지 않았고 아예 대답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 듣거나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용사가 흑기사단과 함께 있는데도 자리를 피할 때가 있었는데 흑기사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술통을 들고 올 때였다.

아빠가 술을 싫어하나요?”
술 자체보단 술을 먹어서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지.”
아빠가 술을 마신 걸 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굳이 마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럼 마실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긴장을 풀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선발대 모두에게 술잔이 한잔씩 돌아갔고 패치처럼 안 마시는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제 술잔을 넘겼고 나머지는 신나는 얼굴로 받은 술을 한 번에 넘기기 시작했다. 용사는 술을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구석에서 곤히 잠들었고 패치도 용사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 앉아 눈을 감았다. 이번 술판은 여러모로 긴장을 푸는데 성공적이었다.

숲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대로만 간다면 열흘 정도.”
이제 마을도 나오지 않겠군요.”
곧 나눠서 마을들을 들리고 모이겠지.”
술판에서 벗어나 옆으로 온 컨티뉴와 얘기를 하던 패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곤히 자고 있는 용사를 봤다.

결국 끝까지 말리지 못했습니다.”
가고 싶은 마음도 자유고 말리는 마음도 자유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고 단단해서 그런 거지.”

가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모르는 게 당연하지, 가고 싶은 마법사 마음에 있으니까. 사실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용사가 밸러니의 숲에 가고 싶어 한 걸 본적이 있어.”
그 일은 지금 숲으로 향하게 된, 모든 일의 발단인 왕궁 마녀들이 숲 근처에서 왕과 왕후의 시신을 숨겼던 사건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용사가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밸러니의 숲에 가고 싶어 했다니, 패치는 용사를 만난 이후로 용사에게 밸러니의 숲에 대해 한 번도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고 그건 용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때 용사는 자고 있었는데 꿈결에 이렇게 말하더군, 밸러니의 숲에 도착했다고.”
꿈이라는 말에 퍼블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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