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길었던 이번 기억은 끝났고 가만히 모든 걸 보고 있던 퍼블리는 이미 결과와 범인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한 내용은 몰랐던 터라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흐려졌다고는 하나 안개는 아직 하늘을 가릴 정도로 남아있었다. 몸은 피곤하지 않았지만 정신이 피곤해졌다. 메르시가 말한 비밀은 과연 이 비밀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메르시는 이렇게 패치의 기억이 흩어져 있는 건 예상치 못했을 거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과거에 벌어졌던 일의 흔적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기억은 가만히 있어도 나타났었는데 이번엔 배려라도 하듯이 퍼블리가 한참을 누워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다 꿈이 아닐까 싶었지만 현실도피를 하기엔 감각이 매우 선명했다.

힘들엉?”
다시 기억이 나타났는지 용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지쳐있던 퍼블리는 눈을 뜨지 않았다.

패치랑 또 만날 수 있어서 기뻤엉! 하지만 약속했구! 패치는 같이 갈 칭구가 있는데에~”
이건 무슨 말일까. 기억은 워낙 비슷한 일상이 많았어도 그 날 했던 대화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고 기억은 상당히 띄엄띄엄했다. 아마 또 기억이 이어진 게 아니라 다른 기억이 나타난 건가 싶어 눈을 뜰까 고민했다. 하지만 지친 정신은 망설임을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나도 새 칭구처럼 빨리 나올께! 꼭 가치 가자!”

대체 새 친구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기억은 이미 사라졌는지 안개 낀 숲이 퍼블리를 반기고 있었다. 여기 계속 누워있으면 아빠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퍼블리는 그대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쳤다고 해서 퍼블리는 포기할 생각은 없었고 이미 몇 번이고 계속 지쳐왔고 충격을 많이 받아왔으니 이젠 익숙할 지경이었다.

제 발 따가운 왕궁 마녀들은 이제 공주님을 몰아세우기 시작했어.”

아무리 자신들 때문이라고 사고가 터졌어도, 죄책감에 사로잡혀도 어렵게 잡은 제 위치와 저주에 대한 불안감은 생각이 평범했던 마녀들의 시야를 좁히고 날카롭게 몰아가기엔 충분했다. 아마 일을 벌인 여덟 마녀들도 이렇게 일이 순조로우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극단적인 상황은 예상치 못했을 거다.

흘러나오는 저주를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으니 결국 더 심각해지기 전에 직접 그 숲으로 가서 저주의 원인을 없애야한다는 의견이 나왔지.”
물론 메르시 혼자서 그 숲으로 가는 건 당연히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메르시의 뒤를 따르는 왕궁 마녀들은 있었고 흑기사단 또한 이 땅에서 사는 건 마법사도 마찬가지니 마법사인 자신들도 메르시를 따라 숲으로 갈 거라고 외쳤다. 그에 감명을 받았는지 마을 단위로 몇몇 무리의 마법사들이 왕국으로 오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큰 무리가 바로 홀리와 프라이드가 이끄는 무리였는데 이들은 나중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신성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였다.

그리고 나도 갈 거니 한동안 못 볼 거고 그동안 말 안 했지만 난 제자가 있었어, 이름은 흑룡이지. 내가 숲으로 가있는 동안 GM이 맡아준다고 했으니 혹시 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생긴다면 내 제자에게 찾아가 물어보면 웬만한 건 다 알려줄 거야.”

하늘의 현자에게 제자가 있었다는 건 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룬 마법연구 업적만 가득하지 사적인 부분은 일절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건 당연한 얘기였다. 패치 또한 제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는지 살짝 눈을 크게 떴지만

호의에 감사합니다.”
더 묻진 않고 넘어갔다. 다만 여기서 컨티뉴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게 패치와 용사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소식지를 발에 달고 온 전서구가 깜짝 놀라 부리를 떡 벌리고 있었다.

뭐요?! 제자!? 제자가 있었어요?!!”

비둘기들은 소식을 전하는 데 굉장히 탁월했다. 이게 다른 말로 본다면 소식을 알아내는데 엄청난 관심과 힘을 들인다는 얘기였다.

아니 이런 엄청난 얘기를 그동안 마법연구보다 더 꽁꽁 숨겨왔단 거예요?!”

하하 숨긴 적은 없지, 말하지 않았을 뿐.”
전서구는 이 얘기를 들은 틈을 타 제자에 대한 건 물론이고 지금 전서구도 알고 있는 일행을 제외하고 엄청난 일행이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물론 컨티뉴는 하하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패치는 전서구의 집요함과 컨티뉴의 단단한 웃음을 구경하고 있었고 용사는 전서구의 발에 묶여있는 소식지가 궁금했는지 다가가 풀었다. 전서구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계속 묻고 있느라 용사가 소식지를 풀어내는 걸 못 느꼈고 어차피 보여주려고 가져온 소식지였으니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 !! 쬐매만 알려주쇼!!”
패치는 소식지를 펼쳐 보고 있는 용사를 힐끗 보고 부엌에 들어가서 물통을 가지러 갔다. 저렇게 물어봐도 컨티뉴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고 전서구의 입만 아플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입담도 뛰어난 전서구지만 상대가 상대였다. 패치가 아무 말 없이 물통을 옆에 툭 놓자 묻다 지친 전서구가 자연스럽게 물통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나 여기 갈래!”
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소식지를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듯이 흔들어댔다. 물을 마시던 전서구는 그대로 마시던 걸 뿜으면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패치와 전서구가 뿜은 물을 피한 컨티뉴가 용사가 흔들어대는 소식지를 잡아 읽기 시작했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혹시 왕국에 가보고 싶었나?”
왕국도 가보고 싶구~ 거기 적힌 숲도 가구 싶어!”
패치는 내심 아니길 바라면서 물었지만 용사가 아주 단단하게 못을 박아버렸다. 소식지에는 왕궁 마녀들과 흑기사단과 밸러니의 숲을 조사할 마녀와 마법사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용사는 여기 적힌 밸러니의 숲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이 소식지에 같이 조사할 자들을 모집한다는 건 말 그대로 저주 가득한 밸러니의 숲을 조사하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용사가 그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고 싶다 아니 갈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당연히 패치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건 절대 놀러 가는 게 아니야!”
!”
저주를 조사하러 가는 거라고!!”
!”
평소 용사에게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던 패치가 소리쳤다. 심각한 그 분위기에 전서구는 부리를 닫고 슬금슬금 컨티뉴 옆으로 물러났다. 용사는 대놓고 제게 심각하게 소리치고 있는 패치를 마주하고도 여전히 순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 있었다.

안 돼.”
갈랭!”
절대 안 돼.”
갈래앵~!”

패치는 소리치던 걸 멈추고 용사의 어깨를 잡으며 절대 안 된다고 하지만 용사는 계속 웃으면서 간다고 했다. 상대방은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않을뿐더러 받지도 않은 채 마치 평소처럼 어디 놀러간다는 어투로 웃고 있으니 여기서 저 혼자 심각하게 외치는 패치는 어쩐지 힘이 쭉 빠져서 더 외칠 기력이 나지 않았고 때마침 놀러온 들개들은 용사를 제외하고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무슨 일인가 전서구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자초지종을 묻고 들은 후 패치와 함께 말리기 시작했다.

거기가 무슨 소풍이라도 처 가는 덴 줄 알아?!”

저주가 가득하다냐!!”
목숨위험!”

들개들이 격렬히 말려도 용사의 고집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한숨을 쉰 패치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고 들개들도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계속 소리를 질러대서 목이 쉬어버렸다. 전서구는 어찌할 줄 몰라 눈만 도륵도륵 굴리고 있었고 컨티뉴는 용사가 소식지를 흔들며 가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아무 말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돌연 용사가 갑자기 말했다.

들개 칭구들은 흑룡이랑 가치 먼저 가서 기다려!”
?”
새 칭구 만나고 오고~ 또 새 칭구랑 가치 갈겡!”
그 때 컨티뉴가 용사의 말에 반응했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기만 했던 그는 다른 이들처럼 반대하기는커녕 자신과 같이 왕국으로 가면 되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패치와 들개들은 당연히 환장했다. 말릴 판국에 이게 무슨 일인가. 그렇게 따지니 돌아온 대답은

용사도 엄연히 마법사이고 어른이지.”

용사도 말릴 수 없었는데 컨티뉴까지 가세해버렸다. 이미 얘기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심각하고 살벌한 분위기에서 마치 자기 자신을 지키듯이 날개로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전서구는 얘기가 거의 마무리가 된 이 틈을 타 집에서 나와 다시 제 둥지이자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날갯짓을 했다. 일단 용사가 가기로 했다면 패치가 따라가는 건 당연했고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며 컨티뉴를 따라 왕국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들개들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결국 용사와 컨티뉴의 말에 따라 GM과 함께 있을 흑룡을 찾아갔다. 그리고 훗날 이들은 비둘기 소식지에 이렇게 적혔다. 하늘의 현자 컨티뉴가 속한 소수정예 다섯 명중 세 명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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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왕궁 마녀들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게 관건이겠군요.”
아니면 컨티뉴와 깜장 들개가 뭔가 물어올지도 모르지!”
컨티뉴와 검은 들개가 돌아온 건 바로 이틀 뒤였다. 늘 바쁘다고 외치면서 살던 전서구도 궁금했는지 잠시 우편물이 여유로울 때마다 들렸던 터라 같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공주님께 말을 전하고 왔어.”
검은 들개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걸 보면 당연하겠지만 진실을 듣게 된 메르시는 충격을 많이 받았을 터였다. 그리고 평소 공주와 함께 어울리는 흑기사단들도 왕과 왕후와도 친분이 있는 건 당연했고 그들 또한 충격을 많이 받은 것 또한 당연했다. 당장 왕궁으로 들어가 뒤집어엎으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왕과 왕후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왕궁 마녀들이 있다는 거였다. 컨티뉴에게 편지를 전해줬던 왕궁 마녀가 마침 메르시를 찾아왔다가 컨티뉴를 알아봤다는 거였다. 그 날 이후로 왕과 왕후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명령 때문에 왕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던 상황인데 마침 컨티뉴가 이곳으로 온 거였다.

그 여섯의 인상착의를 말해주니 누군지 바로 알아채더군.”

특수한 사례로 일행이 한꺼번에 왕궁 마녀가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총 여덟 명의 마녀였는데 그들의 주장으론 밸러니의 숲 근처에서 엄청난 기록종이들을 발견했고 그건 퍼블리가 알고 있다시피 모글리제의 산들바람 시가 포함되어있는 종이들이었다. 일단 미심쩍긴 하지만 판별한 결과 꽤 오래 전에 사용된 종이였고 로메루와 밸러니의 이야기가 적힌 종이들과 비슷한 시대 때 쓰인 거라는 게 확인되었다. 여러 말이 오가다 결국 이 일을 그들의 공적으로 인정했고 그들 각각의 능력 또한 좋아 왕궁 마녀가 된 일행들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사교성과 언변이 다들 뛰어나 금세 기존의 왕궁 마녀 몇몇과 가까워졌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보였다.

엄청 수상하다냐!”
위험요소!”
일단 물질적인 증거가 없으니 대놓고 그들이 범인이라고 외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왕과 왕후가 살해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숲 근처에 갔어도 이미 흔적은 철저하게 없앤 후였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그나마 숲 근처에서 발견한 건 GM이 사진으로 찍은 약새풀들이었다고 한다.

일단은 반응을 기다려볼 수밖에 없어.”

그리고 얼마 뒤 왕과 왕후의 죽음이 왕국에 퍼졌지만 퍼블리의 기억대로 저주가 아닌 모종의 이유로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마녀들은 당연히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목소리를 모아 계속해서 물었지만 왕궁에서는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즉 모든 왕궁 마녀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건데 아무리 뛰어난 사교성과 언변이 있다고 하지만 단기간 내에 모든 왕궁 마녀들을 자기네들 편으로 넘어오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컨티뉴는 다시 흑기사단에 섞여 메르시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알아낸 왕궁 내부는 소문보다 더 예상치 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폭발?”

최대한 대피했지만 결국 사상자가 나타났는데 거기에 왕과 왕후가 사망자 무리에 있었다는 얘기야.”

그 자들은 생각보다 교묘하고 머리가 좋은 데다 대담하고 잔인했다. 왕궁에선 한창 폭발 마법에 대해 연구 중이었고 더 나아가 위력을 올리고 범위를 넓히고자 마법을 개발 하자고 많은 왕궁 마녀들이 주장했다고 한다. 당연히 위험성 때문에 왕은 반대했지만 결국 왕의 눈을 피해 몰래 마법을 개발하다가 사달이 났다는 거였다. 갑작스레 마법이 폭주하기 시작했고 몇몇 봉인마법이 뛰어난 마녀들이 폭발을 억누르고 다른 마녀들은 대피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억누르던 마녀들은 전부 죽었으며 그들 사이에 왕과 왕후가 있었다는 게 모종의 이유의 전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왕궁 마녀들이 충격을 받은 사이에 몇몇의 마녀들이 왕과 왕후가 폭발을 억누르기 위해서 뛰어 들어가는 걸 봤다고 외쳤고 워낙 긴급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으니 대부분의 왕궁 마녀들이 그 말에 넘어갔다고 한다. 당연히 외친 마녀들은 바로 그 여덟 마녀들이었다.

녀석들이 강제적으로 폭발을 일으켰고 그 사이에 왕과 왕후의 시신을 그 폭발에 던져 넣었다는 거군요.”

그리고 폭발과 함께 모든 흔적이 날아갔지.”
일단 폭발자체가 왕의 눈을 피해 행하다가 벌어진 일이었으니 왕궁 마녀들은 급하게 시신을 수습하고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책임을 묻고 일부를 대표 희생자로 올려도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개발에 가담한 마녀들이 많았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마법을 개발하려고 했대요?!”
일단 처음엔 많았어도 이렇게 모두가 입 다물 정도로 많았던 건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들이 이용한 건 바로 약새풀 사진이었어.”
당연히 위험한 마법인 만큼 왕처럼 반대하는 이들 또한 많았다. 하지만 폭발보다 더 위험한 게 있다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밸러니의 숲에서만 자란다고 하는 약새풀, 저주가 저주다보니 깊숙이 들어가진 못했지만 다행히 약새풀은 숲의 가장자리에서도 자라났다. 그런데 약새풀이 자라는 영역이 사진으로 얼핏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넓어졌다. 게다가 약새풀은 저주를 먹고 자란다.

저주가 흘러나온다는 불안감을 역으로 이용한 거야.”

누군가가 문 너머로 지나가며 속삭였다. 저주가 점점 더 빨리 흘러나올지도 몰라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여기 왕국에까지 닿는 건 시간문제지, 왕국뿐만 아니라 온 땅이 저주로 뒤덮이지 않을까, 그럼 빨리 저주의 원인을 알아내고 제거해야하지, 저주는 섣불리 건들 수 없어, 하지만 저주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떻게?

폭발 마법으로 원거리에서 밸러니의 숲을 완전히 날려버린다.”
비록 폭발의 여파로 저주가 흩어질 순 있겠지만 영원히 저주를 만들어내는 밸러니의 숲은 폭발로 사라진다.

미친놈들.”
검은 들개가 못 참고 입을 열었고 낌새를 느낀 패치는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용사의 귀를 막았다. 용사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패치를 돌아봤고 패치는 눈을 감았다. 지금 용사에게 제 눈을 보여주기엔 어떤 감정이 제 눈을 일그러뜨리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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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왕과 왕후가 죽은 것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고 충격적인데 정황상 그들은 살해당했고 시체를 숨기는 자들이 왕궁 마녀들이라고 한다. 다른 마법사나 마녀라면 몰라도 이 말을 꺼낸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늘의 현자라고 불리고 있는 컨티뉴가 꺼낸 말이었다. 뒤늦게라도 농담이라며 평소처럼 은근하게 놀리는 분위기로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고 평소라면 분위기를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킬 GM도 가만히 있었다. 무거운 침묵 끝에 패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모든 왕궁 마녀들이었습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여섯 명 정도였어.”

왕궁 마녀들이 고작 여섯 명으로 끝은 아닐 거였다. 하지만 딱 그 여섯이 범인이자 일행의 끝인지 아니면 그들이 대표적으로 오고 그 뒤에 숨어있는 자들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후자라면 숨어있는 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왕궁 마녀들 중 또 누구인지 알아내기 힘들 터였다.

순간 퍼블리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패치의 기억이 아닌 퍼블리의 기억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숲으로 들어오기 전의 정신없는 기억들이 휙휙 넘어가던 중 멀지 않은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쨍한 머리색의 아난타로 변신한 채 엄청난 비밀들을 말해준 아빠, 도둑맞은 하얀 장미와 수첩, 분열, 왕궁 마녀가 된 몇 명의 마녀들. 사실 퍼블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기억 속의 저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왕과 왕후께서 승하하신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우리가 거기서 여기까지 바로 왔으니 나흘이 지났지.”
그 말로 듣고 있던 마법사와 동물들은 분명 뒤에 누가 더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시간이 더 지나고도 둘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분명해진다. 애초에 왕궁 마녀라고 해도 고작 여섯이서 오랫동안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가기 전에 컨티뉴에게 왕의 편지를 건네준 왕궁 마녀가 있었고 편지를 받은 컨티뉴와 GM이 아직까진 직간접적인 위협이 없는 걸로 보아 모든 왕궁 마녀가 한패는 아니라는 걸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담 그 녀석들이 뭘 태웠고 그걸 찾는 게 우선이겠지, 그래서 우리를 부른 건가 영감들?”

비록 탄내가 가득하고 가봤자 이미 사라져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부탁한다.”

검은 들개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기엔 들은 이야기가 무척 큰데다가 이대로 묻어두기엔 그도 당연히 찝찝했기 때문이다. 얘기 끝에 두 가지 목적과 두 조가 생겼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왕과 왕후의 죽음에 대한 것과 왕궁 마녀가 태운 게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컨티뉴와 검은 들개가 조가 되어 조사하기로 했고 그 근처에 혹시라도 숨어있을 왕궁 마녀들과 왕과 왕후가 저주가 흘러나온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 GM과 연한 갈색 들개가 조가 되어 살펴보기로 했다.

워낙 분위기가 심각해 미처 용사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용사는 어느새 자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조용했구나 싶어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퍼블리는 무언가 생각에 빠져있는 패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패치는 늘 그랬듯이 용사 곁에 있을 거고 남은 갈색 들개도 다른 들개들을 기다리면서 용사와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전서구는 늘 그랬듯이 다시 우체부 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마음의 편치는 않아보였다.

두 조는 다음날 바로 준비하고 떠났는데 만약 이주가 넘도록 오지 않으면 자신들을 찾지 말고 잠시 몸을 숨기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며 떠났다.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꽤 길어지는 기억에 퍼블리는 그대로 앉아 무릎을 모았다가 결국 다리를 펴서 편하게 앉았다. 기억은 여느 때처럼 들개와 노는 용사와 뒷정리를 하는 패치의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하루가 지나고 다시 또 비슷하게 반복되고 또 하루가 지나는 식이었다.

그러다 문득 퍼블리는 이 숲으로 오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뭘 먹은 적도 잠든 적도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기억이 현실의 시간과 다를 게 없이 흘러가고 있는데도 배도 고프지 않았고 졸리지 않았다. 이제야 자각한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마법사가 말한 네 몸이 지치진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깨달았다. 퍼블리는 제가 이렇게 둔했나 의아해하는 한편 정신이 지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말 그대로 몸은 멀쩡한데 계속해서 보다가 지루해서 지친다는 걸까. 아직 퍼블리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와서 대부분 봤던 게 이런 반복되는 일상이었는데도.

아니 이게 뭔 일이래요?!”
일주일이 넘었을 무렵 갑자기 전서구가 들이닥쳤다. 만약 무슨 일이 없다면 컨티뉴와 GM, 들개들이 먼저 오고 전서구는 얘기 들으러 그 뒤에 오지 지금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일은 없었다. 무언가에 엄청 놀라서 연신 오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그게 그거였나라는 의미모를 말만 하고 진정 못하는 전서구에 패치가 다가가 말했다.

우선 진정부터 하게. 자네가 말하는 무슨 일이 뭔지는 우리가 모르네.”
그 말에 전서구는 급하게 제 다리에 묶여있는 종이를 부리로 쪼아 풀어 패치에게 건넸다. 펼쳐보니 비둘기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보거나 제보를 받아 소식을 담은 소식지였는데 이번 소식지엔 딱 하나의 실물 사진과 소식만 적혀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제목으로.

자라는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 약새풀.

소식지를 읽은 패치와 들개는 심각한 얼굴로 내용을 읽기 시작했고 퍼블리는 저주가 흘러나오는 일이 알려진 게 저렇게 알려졌기 때문에 왕과 왕후의 이야기는 없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아직은 뭔가가 미심쩍었다. 패치와 들개는 이게 정말 사실인지 전서구에게 물으려던 순간 뒤에서 익살스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사진은 잘 나왔는감?”

엄청난 일이다냐!!”
GM과 그 옆에 같이 갔던 들개가 돌아왔다.

할배가 찍었어요?!”
전서구의 말에 의하면 익명제보로 사진이 들어왔고 깜짝 놀란 전서구가 사진을 받아온 비둘기에게 누군지 물어봤지만 그 비둘기는 이상하게 인상착의가 기억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아하니 혼동 마법에 걸려 기억을 못하는 건가 싶어 일단 소식지부터 만들어 뿌리고 바로 여기로 날아왔다는 게 아까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제보자의 정체는 방금 여기 온 GM이라고 한다.

컨티뉴랑 깜장 들개는 일단 공주 만나러 갔지.”
메르시와 친분이 있는 흑기사단으로 변장해 몰래 찾아가서 진실을 들려주러 갔다고 했다. 퍼블리는 이미 지나갔고 벌어진 과거였지만 충격 받을 메르시가 걱정 됐다. 그리고 이상한 걸 깨달았다. 마침 시기도 이러니 왕과 왕후의 시체를 감춘 왕궁 마녀들 측에서 최선의 선택지는 먼저 저주가 흘러나오는 낌새를 눈치 챈 왕과 왕후가 비밀리에 조사하러 그들 혹은 다른 왕궁 마녀들과 함께 숲 근처로 갔다가 그만 저주에 영향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승하하셨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거였다. 하지만 퍼블리도 알다시피 흘러나오는 저주에 대해서 왕과 왕후의 이야기는 전혀 적히지 않았고 모종의 이유로 죽었다고만 알려져 있었다.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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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티뉴는 바로 편지를 받았고 마녀는 고개를 숙인 후 비둘기와 함께 사라졌다. 메르시가 아직 공주였고 깨어날 때까지도 공주였으니 에키테는 메르시의 어머니이자 마녀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반려인 아케이와 함께 서거했다는데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왕국에 살던 마녀들은 당연히 궁금해 했지만 어느 순간 관심이 사라졌다. 퍼블리는 아마 메르시가 마지막에 깨고 간, 왕국 전체를 감쌌던 결계의 힘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 결계 때문에 왕국 내에서 살아왔던 마녀들은 메르시가 아직까지 공주인 거에 대해서 의아해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왕국에서 살았었지만 그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은 퍼블리와 그의 아빠는 따져보면 밀입국자였다.

비둘기를 이용해서 간단한 안부인사 편지는 서로 보내본 적 있었지만 저렇게 휘하의 마녀까지 동반한 긴급편지는 처음이군. 자네도 함께 보지 않겠어?”
그런 엄청난 편지를 함부로 다른 마법사와 읽는 건 당사자인 저에게도, 편지를 보낸 왕께서도 곤란한 일입니다.”
저번에 안부인사 편지 보낼 때 자네 얘기 써서 보냈으니 괜찮아.”
패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컨티뉴는 태연하게 편지봉투를 뜯고 있었다. 패치는 아예 눈을 감아 고개를 돌렸고 그에 컨티뉴는 웃으면서 친절히 편지를 읽어주려고 했었다.

...같이 읽고 싶어도 내용이 내용이군.”

그게 정상입니다.”
일단 이만 가봐야겠어. 만약 사실이라면 당분간 여기 오지 못할 거야.”

컨티뉴는 벌떡 일어나 바로 짐을 챙기고는 문으로 갔다. 늘 돌아갈 때마다 장난 식으로 그리워도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는 말도 안 꺼내고 급하게 나갔다. 패치는 내심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이런 큰일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관심은 잠에서 깬 용사덕분에 아침에 청소하기 전에 창가에 남아있던 먼지처럼 쓸려 사라져버렸다.

뽀글이 어디가썽?”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갔네.”
이잉~ 가치 놀구 싶었는데...”
용사는 아쉬운 얼굴로 문을 한 번 보다가 패치의 손을 잡고 같이 놀자고 했다. 패치는 곤란한 얼굴로 아직 다 정리를 못 한 탁자를 바라봤는데 때마침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우리왔다냐!!”
방문!”
용사는 바로 문으로 달려가 열었고 문이 열리자마자 갈색 들개 둘이 용사에게 뛰어들었다. 검은 들개는 아직 들어오진 않고 패치를 잠깐 보더니 함께 바닥에 뒹굴고 있는 용사와 들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아직 왕께서 살아계셨을 때의 기억이구나.”
퍼블리는 조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공주인 메르시는 물론이고 왕에 대한 건 역사책을 읽었는데도 기억이 안 나기 이전에 자세히 적혀있지 않았다. 왕과 그의 왕후는 상냥하면서도 공정했으며 다른 마녀와 마법사들을 끌어 모으는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 밖에 아는 게 없었다. 혹시나 퍼블리는 아빠가 왕도 만난 적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다음 기억을 보기 위해 발을 뻗었다. 그러자 편지를 받고 곧바로 나갔던 컨티뉴가 다시 나타났다. 둥그런 탁자에 용사를 가운데 두고 패치와 들개들이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전서구가, 맞은편에는 컨티뉴와 GM이 앉아있었다. 가장 먼저 컨티뉴가 입을 열었다.

에키테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쿨럭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퍼블리는 진정하기 바빴다. 다행히 그 얘기를 들은 패치와 다른 이들도 충격이 컸는지 말이 없었고 컨티뉴도 아직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정적이 가득했다. 그 때문에 퍼블리는 기침소리가 괜히 더 요란하게 울리는 것 같아 얼른 멈추고 싶었지만 진정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이건 극비사항이고 아직 왕국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어.”

아니 그..그런 그.........극비를!! 왜 이런 가정집 탁자에서 터뜨리는 거예요?!!! 비둘기 날지도 않았는데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요!?!!”
깜짝 놀란 전서구가 가장 먼저 외치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러다 갈매기도 반딧불이도 모르는 새에 죽는 거 아니냐는 곡소리가 요란스레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GM은 평소와는 다르게 웃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걸 보니 컨티뉴와 함께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패치는 직감했다. 저번에 컨티뉴가 받은 편지와 관련이 있다고.

저번에 에키테 폐하께서 내게 편지를 보냈지. 편지의 내용은 밸러니의 숲에서 저주가 흘러나오는 걸로 의심된다는 내용이었고 왕후와 함께 조사 및 저주 억제를 할 방법을 찾고 있지만 역부족이라 우리의 손도 빌리고 싶다는 편지였어. 마침 GM도 같은 편지를 받아서 같이 갔었지. 그런데 갔을 땐 이미...”

경청하고 있던 퍼블리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약새풀이 자라는 지역이 넓어지는 게 저주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증거, 즉 저주가 흘러나온다는 증거가 되어서 정화 작전을 짜고 성공한 게 정화의 날이자 순백의 날이 아닌가. 그런데 왕과 왕후가 이미 저주가 흘러나온다는 걸 알아냈다고? 왕과 왕후는 모종의 사건으로 죽게 되었다고 얘기만 나왔고 약새풀이 자라는 지역이 넓어진 거에 대해서 둘의 이야기는 아예 얘기가 없었다. 그저 정화작전에 가담한 공주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을 뿐.

저기...저 잘못들은 겁니까? 머리가 갑자기 멈춰 버렸는 데요...? 왕과 왕후가 죽었고...저주가 흘러나오는데 그걸 발견하신 분들이 그분들이고...?”
제대로 들었군.”

전서구의 현실부정은 통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사실을 박아 넣자 전서구는 날개를 들어 제 얼굴을 쓸었다.

저주에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엔 살해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살해요...? 살해 저주요...? 저주에 당한 것과 같은 거잖아요?”
우리가 편지에 써져있는 곳으로 가자마자 보게 된 건 무언가를 불로 태우고 그들의 시체를 봉인 마법을 써서 숨기던 이들이었어.”

순간 퍼블리는 숨을 멈췄다. 아련하게 중얼거리던 전서구마저도 입을 다물었고 들개들은 이를 뿌득 갈았고 패치는 팔짱낀 손에 힘을 더 줬다. 신기하게도 용사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재빨리 숨기느라 바빠 숨는 우리를 발견 못했지.”

날카로운 긴장 위로 위태로운 진실이 터졌다.

그 자들은 왕궁 마녀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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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옅어진 것과 기억들이 관련이 있었는지 기억들은 이제까지 봐온 기억들에 비해 꽤 길었다. 물론 중간에 사라지기도 하지만 걷지도 않았는데 다시 나타나기도 했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가보니 끝난 기억 뒤에 바로 뒷내용이 담긴 기억이 연속으로 나타나는 일이 많아졌다. 기억의 내용은 저번처럼 용사와 패치의 일상이었지만 이번엔 컨티뉴도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자네는 용사가 가고 싶다고 하면 따라갈 걸 잘 알아. 하지만 그래도 자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 몇 번이고 물은 거야.”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제 의사입니다.”
이제 패치와 컨티뉴는 제법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컨티뉴는 패치에게 말을 놓았고 패치는 말을 놓진 않았지만 조금 세우고 있던 긴장도 풀었고 어투도 딱딱하진 않았다. 매일 하는 권유는 마치 같이 산책 나가지 않겠냐는 가벼운 권유 같았고 계속되는 패치의 거절에도 그다지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처음엔 아무런 감흥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듯이 거절했던 패치도 이젠 궁금했는지 의아하단 얼굴로 돌아봤다.

저 말고 당신을 따를 이는 물론이고 가고 싶어 할 이들은 많을 텐데 어째서 제게 계속 권유하십니까?”

이미 다른 이들에게 물어봤고 가고 싶다고 한 이들도 있어. 물론 그들과 함께 갈 거야. 거기에 자네도 같이 가자고 계속 권유한 거지. 용사에게도 물어본지 오래였어.”
용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컨티뉴는 해맑은 얼굴로 들개들과 뛰어노는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중에 새 친구와 함께 가고 싶다더군.”
새 친구라는 말에 패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컨티뉴는 그런 패치의 모습에 어깨를 떨었다.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아.”

걱정을 할 수밖에 없으니 많아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웃을 거면 그냥 웃으세요. GM한테 익숙합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어깨는 계속 떨려도 웃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참는 게 익숙하거나 괜찮다고 해도 참아보는 것 같았다. 패치는 비록 나중이지만 용사가 가긴 가겠다고 했으니 저도 따라 가야하나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웃음을 멈춘 컨티뉴는 패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깊게 고민해 봐도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패치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컨티뉴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책임을 지는 것도 좋지만 자네가 거기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았으면 싶어. 책임질 기회를 잡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다른 기회들도 버리는 건 아쉽지 않나?”

책임질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하지만 자네는 버리는 게 많아. 이제 그만 놓으라는 소리가 아니야, 그저 자네 자신도 신경 쓰라는 얘기지.”
저는 충분히 제 자신도 챙기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패치는 더 말하길 거부하듯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함에 물러설 법도 한데 컨티뉴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마저 말했다.

비록 시작은 죄책감으로 묶여버렸지만 그 관계의 과정과 끝은 애정으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끝이 안 좋을 거라는 건 자네도 알잖아.”
애정 말입니까?”
그렇게 대답한 패치는 픽 입꼬리가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굉장히 자조적이었다.

만약 제가 용사에게 애정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상 자체가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패치는 이제 들개들이 던지는 막대기를 주우러 뛰어가는 용사를 눈에 담았다.

제가 다른 기회들을 버리는 게 다른 자들 눈엔 아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잘못에 대해 책임질 기회마저도 잡았는데 용사는 기회는 물론이고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게 애정이 생긴다고 해서 용사가 잃은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옵니까?”

컨티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패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둘 사이를 메우고 있었고 저 멀리 용사가 막대기를 잡는 걸로 기억이 끝났다. 그리고 보고 있던 퍼블리는 당연히 당황했다. 그게 대체 무슨 대화였던 걸까.

그으러니까아.....아빠가 용사한테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가...?”
패치의 용사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했다. 패치는 용사에게 애정이 없는데 그거와 관련되어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계속 뒤에서 용사를 돌봐주고 있었던 거고 애정은 지금도 없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퍼블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려고 했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친구 사이에도 어느 정도 애정이 있기 마련인데 저렇게 계속 용사 곁에 있다 못해 돌보기까지 하는데도 애정이 없다니 과연 그게 가능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퍼블리는 컨티뉴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컨티뉴의 말대로 작은 애정도 없이 이어져 가는 그 관계 끝은 여러모로 위험했고 전혀 좋지 않을 게 훤했다. 그렇게 계속 생각을 이어가던 도중 문득 마법사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너와 용사의 시작을 붙든 감정과 이유는 비슷하겠지만 결과는 달라졌단다. 모순되게도 용사는 모든 걸 잃어서야 네 아버지가 곁에 있게 됐지만 네 아버지는 용사에게 정을 붙였을지언정 사랑하진 않았으니.”

 

그럼 그 말뜻은...”

무언가의 윤곽의 끝자락이 손끝에 스쳐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퍼블리는 조금 더 나아가 잡으려고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조금만 더 닿았으면 싶은 마음에 손을 더 뻗어보았지만 역시 부족했다.

시작과 끝, 비슷한 시작, 결과는 달라졌다, 그리고...

하늘의 현자님을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 뒤로 몇발짝 물러났다. 언제 나타났는지 기억이 다시 퍼블리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패치와 컨티뉴는 집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뭔가가 잔뜩 써져있는 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간 컨티뉴가 문을 열었고 밖엔 비둘기를 어깨에 얹은 처음 보는 마녀가 서 있었다. 컨티뉴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묻기도 전에 마녀는 비둘기 다리에 묶여있는 편지를 풀어 건넸다.

에키테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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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퍼블리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패치를 발견한 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들개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쪼그려 앉아있던 용사가 벌떡 일어나 패치에게 다가갔다.

새로운 친구야!”
용사가 패치에게 손을 내밀고 패치가 그 위의 무언가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기억이 갑자기 멈추더니 흐려지고 일그러지기 시작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퍼블리가 방금 전까지 용사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기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분명 이 기억 전까지는 기억들이 끝에 다다를 무렵엔 안개처럼 훅 사라졌었는데 이 기억은 이상하게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갑자기 끊긴 모양새였다.

..갑자기 왜 사라진 거예요?”
퍼블리의 심장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고 어서 그 기억의 뒷부분을 마저 봐야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기억은 어딘가 익숙했으면서도 보는 건 처음 보는 게 분명했는데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퍼블리의 심장을 꽉 쥐고 놔주질 않았다. 이상하게 안개는 일렁이며 퍼블리의 시야를 더 방해했고 물기까지 머금어 앞을 더 보기 힘들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런 퍼블리의 어깨를 잡아 손수건을 건넸다. 눈물이 툭툭 떨어짐과 동시에 퍼블리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가 일렁거리는 걸 반복했다.

저 왜 울고 있어요?”
그건 네가 알 거란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진정이 됐는지 퍼블리의 눈물은 바로 멈췄다. 애초에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울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니 금방 그칠 수 있었다. 퍼블리의 심장을 쥐고 있던 이상한 느낌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심장 옆에 한구석을 차지한 의아함뿐이었다.

예상은 가지만 확실한지는 모르겠단다.”

...예상하신 걸 말해주시면 안될까요?”
확실하지 않은 걸 섣불리 말해봤자 네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그렇단다. 어차피 네 아버지를 찾는다면 다 해결될 일이야.”

퍼블리는 그 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제 아빠한테 달려있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했던 제 생각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까지 아빠가 비밀을 다 드러내지 않았고 이젠 아빠한테 물어볼 거라고 먼저 말 해온 건 퍼블리 본인이 아니었나. 이렇게 기억을 보는 건 아니라며 아빠한테 물어보겠다고 한 건 퍼블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퍼블리는 다음 기억을 찾으러 앞으로 걸어가기 전에 마법사한테 물었다.

저기, 아빠랑 안 친하다고 했었는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정말 표현하기 어려웠는지 마법사는 생각보다 오래 고민했다. 퍼블리는 괜히 물은 건가 걱정이 들기 시작했고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마법사가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너무 많고 복잡해서 곤란하니 어떤 사이냐고 말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 이걸로 대답할 게, 서로 증오하는 사이란다.”
벌집 쑤신 줄 알았더니 지뢰를 밟은 격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퍼블리가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을 때 마법사가 태연하게 마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네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건 그리 기분 나쁘진 않단다. 애초에 네 아버지도 똑같이 나를 증오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니 엄청 걱정되는데요?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꾹 깨물며 막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기억들이 나타나 이 어색한 상황을 흘려보냈으면 싶었지만 이상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함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싶었는데 열 걸음을 걷고 스무 걸음을 걷고 거기에 더 열 걸음을 걸었는데도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퍼블리의 어깨는 이미 풀린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빠르다고는 했지만...이건 너무 빠른데?”
마법사는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고 퍼블리는 뭐가 빠른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기억이 나타나는 주기라면 아까 빨라지긴 했지만 지금은 아무리 걸어도 기억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가 빠른 거예요?”
기억이 모이는 게.”
갑자기 온 세상을 쓸어가는 거대한 무언가에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제 팔을 쓸었다. 오돌토돌 소름이 일어났다. 만약 주변의 모든 공기가 말을 할 수 있고 술렁거리며 달려간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다시 뒤를 돌아본 퍼블리는 깜짝 놀랐다. 안개가 조금 걷히고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잔뜩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제 주위 전부 안개가 나무에 살짝 걸쳐있는 것처럼 연해졌다. 드디어 숲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혼자갈 수 있겠니?”
?”
같이 가자고 한다면 갈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더 가고 싶지 않단다.”

애매했다. 못 가는 건 아니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거지만 굳이 가고 싶지 않은 마법사를 끌고 가기엔 마법사가 처음 만난 사이치곤, 곤란한 어린 마녀를 도와준다는 것치곤 필요 이상으로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래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기억들이 단순히 책의 이야기를 읽듯이 간단하게 보는 게 아닌 실제 시간과 같이 기억들이 흐르고 있는데다 보게 된 기억들도 자잘하게 많았으니 마법사랑 같이 있었던 시간은 다시 돌아보면 놀랄 정도로 꽤 길었다.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정말...고마웠어요. 또 만날 수 있나요?”
네가 만나길 원한다면.”

아직 떠나기를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결심했는지 마법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마법사의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퍼블리는 모자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고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몸을 크게 숙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건넨 퍼블리에 마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하늘을 예쁘게 머금은 것 같은 동그란 머리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었지만 움찔 손이 떨리며 바로 내려갔다. 얼굴이 땅을 향한 채 눈을 꾹 감고 있느라 그걸 모르는 퍼블리는 천천히 일어나 마법사를 한 번 더 보고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엔 살짝 고개만 숙이며 뒤돌아 안개 걷힌 숲으로 나아갔다.

퍼블리는 다시 혼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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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는 굉장히 지쳐보였지만 그만큼 능숙해보였고 그나마 쉴 수 있는 때는 용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지쳐 잠들었을 때나 여행하면서 환상마법을 연습할 겸 환상연극을 보여주는 극단 무리가 마침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환상연극을 보고 있는 용사는 눈을 빛내며 가까이 오는 환상들과 놀고 있으니 사고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흥미로운 존재들도 등장했다.

이쪽이다냐!!”
빠른통과!”
전서구와 비슷한 존재들이었는데 말할 수 있는 들개들이었다.

막대기 쓰는 건 반칙이다냐!”
빠른퇴장!”

우웅?”
들개들은 총 세 마리였고 각각 검은색, 진한 갈색, 연한 갈색 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갈색 들개들이 용사와 공을 차며 놀고 있었는데 용사는 막대기로 열심히 공을 치고 있었다. 물론 차면서 노는 놀이였으니 용사는 당연히 반칙이었다. 다만 놀고 있는 건 그 셋밖에 없었으니 용사가 퇴장해도 둘만 노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용사와 놀기 위해 시작한 공놀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냐!”

초기화!”
흙바닥에 점수로 보이는 숫자들을 지운 들개들은 다시 공을 차기 시작했다. 나머지 들개 하나는 패치와 함께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함께 있는 둘은 서로 사이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정확히는 검은 들개는 패치를 경계하고 있었고 패치는 검은 들개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안 그래도 눈빛과 송곳니 때문에 험악해 보이는데 경계를 하며 눈가를 찌푸리고 있으니 굉장히 화난 것처럼 보였다. 저러다 싸우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해 하던 퍼블리는 공을 신나게 막대기로 후려쳐서 폭죽처럼 저 하늘 위로 쏘아 올리는 용사를 보고 진짜 걱정해야할 건 용사라는 걸 깨달았다.

검은 들개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발동한 막대를 물어 막고 패치가 하늘에 있는 공에 흘러들어간 마법을 풀어내는 걸로 기억이 사라졌다.

들개들에서 대해선 못 들어봤어요.”
저들은 용사의 인연이란다. 용사의 기억에 더 많이 남아있을 자들이지.”

용사랑은 친한데...아빠랑은 별로 안 친해보였어요.”

저들은 용사를 많이 아껴. 하지만 경계심이 많지.”

하지만 아빠는 용사를 엄청 챙기지 위협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왜...”

다행히 그에 대한 이유가 담긴 기억은 멀지 않단다. 행운인지 바로 옆으로 떨어졌었네.”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억이 나타났다. 방금 전 끝났던 기억과 이어지는지 용사는 공과 막대기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고 용사와 놀고 있던 들개들은 용사를 지켜보면서 졸고 있었다.

이봐.”
검은 들개가 부르는 소리에 패치는 그저 눈만 움직여 그를 봤다.

“GM이야 재밌으면 장땡이라는 양반이니 그렇다 쳐도 너는 절대 누군가의 뒤를 처 돌봐줄 녀석은 아니야.”
요컨대 이유가 있을 거고 그게 뭔지 말하라는 건가? 자네들은 용사와 친하니까?”
속내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녀석이 친구 곁에 처 붙어있으면 경계하기 마땅하지.”
그렇게 따지자면 자네들과 나는 친하지도 않은데 이유를 말해야할 이유가 없지 않나?”
둘의 만만치 않은 기 싸움을 질린 얼굴로 보고 있던 퍼블리는 만약 나설 수 있다면 제 아빠를 감싸고 싶으면서도 검은 들개처럼 그 이유가 궁금해 가만히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래 말할 이유가 없다라, 그렇다면 이것만 알아둬라. 네놈이 무슨 짓을 처 하던 간에 용사 녀석에게 위협이 간다면 그 날이 바로 네 숨통이 처 끊기는 날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니 숨통 끊는 자리는 다른데 알아보게.”

검은 들개의 찌푸린 눈두덩이 한차례 꿈틀거렸고 퍼블리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봤지만 다행히 둘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고 기억도 거기서 끝났다. 퍼블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법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저렇게 아빠를 경계하는 거예요?”
네 아버지 성질머리는 예전에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단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빠는 누군가를 위험하게 할 마법사는 아니에요!”
어떤 의미론 웃는 낯을 한 채 뒤에서 몰래 흉계를 꾸미고 있는 자보단 대놓고 성격은 안 숨기고 이유는 숨기면서 원래대로라면 전혀 안 할 일을 제 할 일처럼 하는 자가 더 무섭단다. 위험하진 않겠지만.”
퍼블리는 그게 왜 무서울까 고민하다가 어쩐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 납득했다.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건 확실히 무서웠다. 뭘 안 할 건지는 확실히 알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면 상대방은 답답하거나 불안할 게 뻔했다. 퍼블리처럼.

기억이 나타나는 주기는 어차피 조금 걸으면 나타날 정도로 짧았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짧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스무 걸음을 걸으면 기억이 한 번 나타나던 게 아까였고 다섯 걸음 걸으면 나타나는 게 지금이었다. 이번 기억엔 반가운 이가 있었다.

저도 제 할 일 있다고요!! 용사도 그렇고 댁도 그렇고 어째 둘이 저 바쁠 때만 이렇게 태풍처럼 찾아 오냐고요?!”
그렇게 따지자면 자네는 늘 바쁘잖나.”
잘 알고 있구만?! 비둘기 우체부 대표가 어디 노는 자린 줄 알아요!?”
전서구는 패치를 태운 채 어디론가 급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전서구가 예전에 투덜댔던 상황이 떠올랐다. 제 아빠가 아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타는 바람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어디쯤에 내려줬나?”
용사가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렇게 뒷바라지하면서 살 거예요?”
패치는 그 말에 마치 사실을 읊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가만히 냅두면 호수가 무지개로 뒤덮이는 건 물론이고 작은 숲의 나무들에 꽃을 피워 나무 모양의 꽃밭이 생겨있겠지.”

그 말에 전서구는 반박도 더 말도 안 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며 날갯짓을 했다. 다행히 용사는 금방 찾았는데 어느 호수 바로 옆에 있었다. 정말 호수가 무지개로 뒤덮이는 건가싶어 보고 있던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고 전서구가 용사가 있는 데로 천천히 내려가니 다행히 용사 외에 들개들도 있었다. 다만 들개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전서구의 등에서 내린 패치는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한숨을 쉬었다.

또 사고 쳤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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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타난 기억은 다른 기억들보다 좀 더 길었다. 그래도 내용은 앞에 나왔던 용사를 돌보던 기억들과 다를 게 없었다. 기억을 보는 건 의외로 지루하지도 지치지도 않았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기만 했던 기억들도 있어서 용사가 나오는 기억은 보는 마녀와 마법사가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 한낮에 별 뿌리기 마법을 써대는 용사를 막는 패치로 여덟 번째 뒷수습 기억을 봤을 때쯤 퍼블리는 문득 든 생각에 마법사에게 물었다.

날뛴 기억들이 뭉친다고 했었는데 그럼 아빠의 모든 기억들을 봐야하는 거예요?”
큰 기억들은 작은 기억들을 끌어들여. 아마 지금 이렇게 네가 깨우면서 뭉쳐지게 된 기억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기억들을 끌어 모으고 있을 거란다.”

기억 속의 GM은 지금처럼 한결같이 유쾌하면서 짓궂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패치가 곁에 있을 때는 용사를 돌보는 걸 히익히익 웃으면서 놀려댔지만 막상 패치가 용사가 친 사고를 수습하러 갔을 땐 웃지 않았다. 수염에 입이 다 가려져 있다 보니 웃지 않을 때는 무표정을 짓는 건지 아니면 입꼬리를 아래로 내린 건지 영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표정 아래에 좋은 의미들이 담겨있는 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아빠는 저를 절대 버리지도 못하고 다른 자들에게 완전히 맡길 수도 없다고 하셨죠?”
그래.”
무슨 의미예요?”

그 전에 말해주자면 난 모든 걸 대답할 수 있지만 곤란하다고 느끼고 있는 걸 대답하기 피한단다. 그러니 빙빙 돌려 말할 거란다.”

충분히 솔직하셔요.”
GM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남은 건 지쳐서 잠든 용사와 마찬가지로 지쳐서 나무에 기댄 패치였다. 그걸 끝으로 기억은 또 사라졌다.

무슨 의미냐고 한다면 말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단다. 너를 절대 버리지 못하고 다른 자들에게 완전히 맡길 수 없어. 맡긴다고 해도 잠깐 맡는 거라면 GM이 유일했지 그 외엔 스스로가 용납을 못해.”

이번에 나타난 기억엔 새로운 마법사가 나타났다. 하늘색의 망토와 같은 색의 뭔지 모를 몽글몽글한 걸 머리에 쓰고 눈도 얼굴도 전부 다 가린 마법사였다. 얘기를 나누느라 기억이 나타나도 마법사만 보고 있던 퍼블리가 바로 고개를 돌릴 정도로 옷차림이 여러 의미로 강렬한 마법사였다.

그 방식도 나쁘진 않지만 마법진이 가동할 때 많은 열기가 나올 것 같군요. 이런 건 어떤가요?”
대단하십니다.”
패치는 새로 나타난 그 마법사에게 존경과 감탄이 가득 담긴 눈과 대답을 보냈다. 퍼블리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라 꽁꽁 싸맨 그 마법사를 뚫어져라 봤다. 애초에 제 아빠가 누군가에게 쉬이 존경을 표할 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퍼블리의 첫인상에 누군진 모르겠지만 엄청나고 범상치 않을 마법사로 강하게 박혔다.

생각보다 빠르네.”
빠르다뇨?”
저 자가 등장한 게 생각보다 빠르다고 했단다. 우선 누군지부터 알려주자면 꽤 유명한 마법사야. 하늘의 현자라고 알고 있니?”
모를 리가 있겠나. 가장 유명한 마법사인데.

퍼블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청나고 범상치 않은 마법사인 건 맞았다. 그런데 정체가 너무 엄청난 마법사였다. 모습이 담긴 영상구는 남겨져 있지 않아 과연 어떻게 생긴 분일까 궁금해 한 적은 다른 마녀들처럼 한 번쯤은 있었지만 예상은 물론이고 상상이 든 적도 없는 모습이었다. 한편으론 저렇게 꽁꽁 싸매서 영상구가 남겨지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가 하늘의 현자라고 불리던 컨티뉴라니 전혀 예상도 못한 퍼블리는 패치와 컨티뉴를 번갈아봤다. 마법진을 보며 무언가 더 얘기를 나누더니 컨티뉴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거듭 제안하지만 저와 함께 제가 말한 끝 너머를 보러가지 않을래요?”
아니요. 거듭 거절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패치는 존경과는 별개로 단호하게 무엇인지 모를 제안을 거절했다. 퍼블리는 어떤 의미론 구별이 뚜렷한 제 아빠가 새삼스럽게 대단하고 신기해 보였다. 아마 다른 자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컨티뉴는 그렇습니까 하고 더 말을 꺼내지 않았고 패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니 이번엔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는 용사가 있었다. 비가 그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땅이었는지 보기만 해도 굉장히 질척거리는 흙들이 용사 손에 묻는 건 물론이고 옷에도 잔뜩 묻어서 빨래를 해도 저게 가실까 걱정될 정도였다. 게다가 땅을 판 것도 꽤 오래 팠는지 용사의 푸른 머리카락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용사는 제가 판 구덩이 안에서 계속 흙을 파내려가고 있었다. 패치는 그런 용사에게 다가가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뭘 찾나?”
뚜더쥐!”
패치는 한숨과 함께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두더지는 바쁜 일이 생겨서 저 멀리 가버렸다고 말한 후 용사를 끄집어 올렸다. 용사는 아쉬운지 이잉 소리를 냈고 패치는 흙이 잔뜩 묻은 용사의 모습에 또다시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언제 나왔는지 모를 컨티뉴는 워낙 꽁꽁 싸맨 터라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웃음을 참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흙투성이가 되부렀네!!”
그리고 언제 어디서 왔는지 모를 GM이 용사를 보며 실컷 웃고 있었다. 패치는 용사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 용사를 욕실에 넣었다. 웬만한 어린아이보다 더 천진난만한 용사는 그나마 혼자 씻을 순 있었는지 따라 들어가진 않았고 패치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떨어진 축축한 흙과 그 흙들이 가득한 용사의 옷을 번갈아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생각에 빠졌다. 퍼블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툭 말했다.

아빠가 가끔 청소마법과 세탁마법을 써요. 물론 이미 있는 마법이긴 한데 기껏해야 먼지를 없애고 얼룩을 지우는 정도예요. 근데 아빠가 쓰는 마법은 손으로 한 것보다 더 깔끔하게 청소되고 세탁도 돼요.”

물걸레를 가져온 패치는 바닥을 닦기 시작했지만 그 바닥은 얼마 안 가 다 씻은 용사가 끌어안고 나온 제 흙 묻은 옷 중, 미처 길이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망토 끝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흙을 묻히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졌다.

그 마법들의 위력이 그렇게 강했던 이유가 지금 이 기억 때문이겠죠?”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과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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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라니까!”
용사도 그 뒤를 따라 문을 열었지만 이미 패치는 저 멀리 머리만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기억이 끝났다.

“...방금 용사 맞아요?”

맞아.”
이 기억은 둘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죠?”

그렇겠지.”

퍼블리는 어쩌다가 용사의 행동과 성격이 그렇게 변했는지 궁금해졌다. 저 정도면 바뀐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른 마법사인 거나 다름없었지만 일단 모습은 누가 봐도 용사였기 때문에 변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가보니 기억들이 또 나타났지만 그 기억 속에 나타났던 용사들은 전부 해맑았다. 이상하게 까칠하고 무례했던 안경 쓴 용사는 그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퍼블리는 점점 더 커지는 괴리감에 비례해 궁금증을 키웠고 마법사는 모자 때문에 보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감거나 딴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기억들만 보고 아빠를 못 찾으면 어떡하죠?”
기억들은 그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란다. 기억들이 점점 빠르게 나타나고 있지? 기억 하나가 날뛰기 시작하면 주위에 있던 다른 기억들도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해. 그리고 날뛴 기억들은 전부 다 보여주면 한군데로 모이고 뭉쳐.”

이번에 나타난 건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고 있는 패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사라졌다.

강한 기억들은 서로 멀지 않지, 가장 인상적인 기억들과 최근의 기억들. 특히 최근의 기억들이 제일 가깝단다. 그래서 그런 기억들은 차례대로 나타날 거야. 그리고 그 가까이에 네 아버지가 있을 거고 뭉친 기억들은 그곳으로 향할 거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아까 말했다시피 난 이 숲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아. 그리고 숲만큼 잘 아는 건 바로 네 아버지란다. 거기에다 네 아버지만큼, 아니 그보다 더 너를 잘 알기도 하지.”

그들의 앞으로 잠시 책장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는 마법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빠랑 많이 친하셨나요?”
아니.”
단호한 대답을 들은 퍼블리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껏 감정 없던 목소리가 이번 대답에서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 둘은 또 아무 말 없이 걸으며 나타나는 기억들을 바라봤다. 히익히익 웃어대는 GM과 이번엔 폭발했는지 GM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패치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상하게 기억들은 하나같이 하루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어떤 건 극단적으로 짧았다. 마치 마구잡이로 찢은 것처럼.

너는 무엇이 두려운 거니?”
?”
넌 항상 네 아버지가 너와의 관계를 그 검은 머리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끝내 버릴까봐 두려워했잖니. 네 아버지는 선을 넘은 자는 절대 다시 들이지 않으니까 혹여나 선을 넘은 질문일까 말하지 않고 꽁꽁 싸매는 데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늘 생각하면서 섣불리 궁금한 것도 묻지 못했고. 지금 이렇게 너에게 말할 수 있으니까 말하지만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었단다. 네 아버지는 절대 너를 버리지도 못하고 다른 자들에게 완전히 맡길 수도 없어. 그래서 마녀로 변장해서 왕국으로 갔던 거고 검은 머리는 그 과정에서 완전히 제 선으로 들어온 자도 아닌 애매한 자였으니 과감하게 밀어낸 거였지. 우습게도 나중에 그렇게 돌아오는 것도 모자라 완전히 선을 넘어버릴 줄은 나도 네 아버지도 예상 못했지만.”
어쩐지 비웃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누구를 비웃는지 퍼블리는 감을 못 잡았다. 제 아빠를 비웃는 걸까 아니면 치트?

그 성격에 너를 평생 싸고 돌 리는 없겠지만 최대한 모든 위험과 변수가 너에게 닿기도 전에 차단하려고 했어, 적어도 네가 힘을 쓸 수 있는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 위험을 없앨 수 있을 때까지 너를 키울 생각이었지. 나는 늘 생각하고 느꼈단다, 네 아버지라는 존재가 참 신기하다고. 정말 질릴 정도로 신기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마법사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르게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지자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이번에 나온 감정은 굉장히 많은 게 섞여있었지만 순수한 감탄이 눈에 띄었다.

너와 용사의 시작을 붙든 감정과 이유는 비슷하겠지만 결과는 달라졌단다. 모순되게도 용사는 모든 걸 잃어서야 네 아버지가 곁에 있게 됐지만 네 아버지는 용사에게 정을 붙였을지언정 사랑하진 않았으니.”

그러다가 마법사는 다시 차분해졌다. 방금까지 내보이던 감정들이 전부 허상이라는 듯이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답답해 보였나요?”
답답하다기 보단 무얼 두려워하는지 궁금했단다.”

이건 두려움이라기 보단 불안한 거예요. 아빠한테 아무것도 묻지 못할 때 마냥 불안하고 그 불안한 게 두려움으로 변했었나 봐요. 그리고 아까는 아빠랑 친한 사이인줄 알고 이것저것 아빠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사실 사이가 굉장히 나쁜데 괜히 물어봤구나 싶어서 불안했던 거예요.”

불안해할 필요 없단다. 사이가 좋진 않지만 말하는 거에 대해선 기분 나쁘지 않으니.”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조금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내쉬었다. 마치 한숨을 쉬는 것처럼.

또 말하는 거지만 네 아버지는 정말 신기하단다. 어떤 때에는 충동적이지만 말 그대로 충동은 충동일 뿐 이성 자체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어, 제 심장에 꽂힌 가시도 필요하다면 바로 뽑아서 휘두를 자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건 무의식이야, 위력도 엄청나서 이성이 무의식을 옭아맨 건지 무의식이 이성을 이룬 건지 궁금할 정도란다. 무의식에 잠겨있으면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음이 있어. 아마 그게 지금의 모든 관계의 시작과 현재를 이었을 거야. GM과 하늘의 현자가 예외였을 테지.”

기억이 다시 나타났을 때쯤 마법사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너의 이름과 내가 느끼는 것들이 그 무의식의 증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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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안개 속을 걷기 시작한 퍼블리는 발소리도 잘 안 들려올 정도로 조용히 따라오는 마법사를 몇 번 돌아봤다. 일단 처음 만났을 때와 기억을 보고 난 후에 얘기했을 때는 정신이 없던 상태였으니 급한 마음에 물어보기 바빴지만 이렇게 같이 걷고 천천히 생각하니 마법사와 퍼블리는 처음 본 사이였다. 다짜고짜 이것저것 물어봐서 많이 당황스러울 텐데도 마법사는 처음 본 사이치곤 굉장히 차분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비록 내용이 난해하긴 해도 대답도 해주고 이렇게 선뜻 동행 요청도 받아주니 생각하면 할수록 굉장히 좋은 분이구나 싶었다.

저기, 고맙습니다. 먼저 감사인사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고맙다니?”

친절하신 분 같아서요.”
마법사는 한차례 아무 말도 꺼내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구나.”
정말요?”
정말.”

단호한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친절하시고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앞만 보면서 대답하던 마법사가 퍼블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정말 한결같으면서도 변하고 변하면서도 한결같구나.”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안개가 걷혔다. 기억이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패치는 어린 패치보다 좀 더 컸지만 어른처럼 보이진 않았다. 딱 퍼블리 나잇대 모습이었다. 패치는 책을 읽으면서도 무언가를 종이에 쓰기 바빴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는 종이의 글씨체와 읽는 책의 글씨체가 같았다. 얼핏 살펴봐도 패치가 쓴 거구나 싶을 정도로 정갈한 달필이었다.

한창 무언가를 쓰다가 새로운 종이를 꺼내오더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고 마법진이 빛났을 때 아까 무언가 쓰던 종이를 올려놓으니 마법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위에 올려놓은 종이의 글이 그대로 복사 되었다. 그 뒤로는 또다시 무언가를 쓰고 복사하고를 반복하다가 기억이 그대로 끝나버렸다.

아빠는 진짜 열심히 살았군요.”
그래 보이니?”
누가 봐도 그런 걸요.”
그 뒤로 나타난 기억들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어른이 된 패치였지만 용사가 곁에 없었던 패치가 나타나기도 했고 용사와 함께 있으면서 용사의 뒷수습을 하는 패치도 나타났다. 어른이 안 된 패치도 많이 나왔지만 그 때의 패치는 거의 종이만 붙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GM이 나타나 패치를 놀리면서도 나름대로의 조언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장난이었다. 그럴 때마다 패치는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GM의 장난을 넘겼다. 용사는 한결같이 순수한 얼굴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속이 타는 패치가 보였지만 묵묵히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곤란한 일들을 다 쳐냈다.

아빠는 왜 용사라는 분을 챙기는 걸까요?”

모든 이유는 다 기억에 있어.”

기억만으론 짐작을 못하겠어요. 뭔가 이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뭔지 감도 잘 안 오고요. 일단 가만히 두면 확실히 큰일이 날 것 같지만 아빠 성격에 저렇게 다 챙기고 뒤를 봐주기 보단 가르쳤을 것 같은데...”

네 아버지의 성격이라...내가 보기엔 성격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너를 키운 것도 그렇고.”
저를 키운 것도 그렇다니요?”
마법사는 입을 다물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뒤에서 계속 물어봤지만 다음 기억이 나타날 때까지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기억이 나타나도 퍼블리는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어봤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멈췄다. 마법사가 입을 다물고 앞장 선 후 세 번째로 발견한 기억 때문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계십니까?”

패치는 누군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섯 번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는데 열어준 자는 없었다. 패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문은 집주인이 마법으로 열어야 열리는 방식 같았다. 패치가 안으로 들어가니 사실 온 데가 집이 아니고 도서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벽마다 책장이 붙어있었고 그 안엔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패치는 바로 그 의자에 앉았다.

용건.”
집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들렸다. 말도 아니고 단어 하나만 툭 던져나왔는데도 패치는 별로 불쾌한 표정도 짓지 않고 말 그대로 용건을 말했다.

당신이 연구한 결계마법에 대해 의논하고자 왔습니다.”
똑같네. 일단 뭐 사족 붙이지 않는 건 훌륭해요. 근데 똑같아.”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말투가 방 안을 떠돌고 있었다. 패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가끔, 아니 매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괜히 책 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녀도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왕궁 마녀가. 대체 누가 내 책을 마녀왕국까지 보냈는지 참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고 지금 그 연구를 계속해가느라 바쁜데 의논하자고 하면서 핵심정보만 쏙 빼가려는 녀석들이 많아. 근데 그나마 그런 녀석들은 점잖은 편이었어요. 어떤 녀석들은 내 연구와 정보만 쏙 빼갈려고 집을 날리기 위해서 마법을 날려댔어. 내가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그대로 있는데 대놓고 강도짓을 하려고 했지요.”
목소리는 차분한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 아래엔 칼날이 가득했고 언제 찌르려고 달려들지 몰라서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패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가 닿은 부분이 안개처럼 흐려지자 바로 손을 거뒀다. 그와 동시에 패치의 목에 진짜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이 목에 닿을 듯 말 듯 번쩍이면서 나타났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아니면 돌아갈래?”
일단 나도 더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그쪽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일세.”
패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빛이 전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패치는 그대로 들어왔던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방 안쪽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잠깐.”
퍼블리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며 패치를 불러 세우려는 집주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워낙 차분하고 또렷해서 처음엔 누군지도 몰랐는데 지금껏 기억에서 봐왔던 자였다. 커다랗고 뿌연 안경이 환하게 반짝이던 녹색 빛을 가렸지만 척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용사였다. 용사는 한 번 더 잠깐 기다리라며 나가려는 패치에게 손을 뻗었지만 패치는 무시하면서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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