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내린 폭우는 흥건한 땅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붕을 남겨두고 구름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기를 며칠이 지났을까 폭우에 잠시 물러나있던 더위가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들이닥쳤다. 급작스런 날씨 변화에 적응 못한 학생들은 교실의 더운 공기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열어봤지만 들어오는 건 바깥의 더운 공기와 땅 밑에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민 날벌레들이었다. 급하게 창문을 닫는 창가자리 학생들 뒤로는 책상에 냉기마법을 걸어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미숙한데다 준비되지 않은 마법이었으니 금방 풀려버리고 말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학생들이 날벌레와 더위에 절규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선생은 수업준비물들을 교탁에 올려놓은 후에 손수건을 꺼내고 땀을 닦아내며 하는 말이

수공을 피하니 열공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열공하라는 계시겠지?”
회심의 말장난이었는지 기대 섞인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봤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방금 풀려버린 18번째 냉기마법보다 더 싸늘했다. 그나마 다시 책상으로 눈을 돌린 학생들의 반응이 나은 편이었다. 그런 반응들에 헛기침을 한 선생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학생 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지목하여 오늘 시작할 페이지를 말하라고 한 후 수업준비물들을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각각의 집들에서도 더위를 몰아내기 위해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얇은 옷들을 꺼내고 냉기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준비과정 사이에서 퍼블리네 집은 제일 완벽했다. 애초에 뒷마당에서 흘러나오는 냉기 덕분에 마법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고 급하게 얇은 옷들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다만 퍼블리네 집만 시원하고 밖은 전혀 아니니 퍼블리도 옷장을 열어 외출할 때 입을 얇은 옷들을 꺼내야했다. 아니카도 하교할 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퍼블리네 집으로 갔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가기 일쑤였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냉기를 쐬던 아니카가 문득 말했다.

나 여름 다 갈 때까지 너희 집에서 살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직 완전히 여름도 안 됐는데 이렇게 더운 걸 보면 이번 여름 더위는 장난 아닐 거라는 게 눈에 훤히 보이고 이렇게 여름나기 완벽한 데가 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니?”
어느 부분이?

말은 그렇게 해도 농담이라는 걸 아는 퍼블리는 마찬가지로 농담하는 어투로 집세 들고 오라고 했지만 퍼블리가 없는 동안의 집 관리비를 받아야겠다는 아니카의 농담을 끝으로 농담 대결이 끝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카가 먼저 꺼냈던 농담이 진담으로 바뀌게 될 줄은 둘 다 몰랐다.

 

올해는 유독 더위가 빨리 오는구나. 이 더위가 계속 갈지 아니면 더 더워질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찬 것만 먹거나 냉기마법을 계속 써대다간 병날 테니 적당히 더위를 받아들이렴.”

그렇게 말하는 선생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물론 안경에까지 냉기마법을 잔뜩 걸다 못해 쉬이 풀리지 않게 혹은 냉기가 날아가지 않게 다른 마법들까지 부가적으로 걸어놓은 게 굉장했는데 지나가는 마녀 붙잡고 저기 달린 마력이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저러다 눈에 보일 지경이 아닐까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었다.

퍼블리.”
?”
나 진짜 여름동안 너희 집에서 살까 하는데.”

보기 드물게 웃음을 거둔 아니카는 그 표정만으로도 진심이라는 걸 전하고 있었다. 더위가 이 정도에서 유지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좀 오래갈 뿐이지 작년이랑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버틸만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만약 더 더워진다면 정말 답이 없었다. 애초에 냉기마법 자체가 무한할 순 없었기에 마력 과부하로 인해 마법이 풀린다면 다시 마법을 제대로 준비할 때까지 재앙이나 다를 바 없는 더위를 지켜주던 냉기 없이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녀들이 더 이상 더워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퍼블리네 집은 이런 상황에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아니카 진정해, 더위 먹었어.”

아니 난 멀쩡하고 냉기마법도 멀쩡해, 그러니까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 제정신이야. 진짜 이제 시작하고 많이 남은 여름이 진지하게 걱정돼.”
그렇게 말하며 평소 퍼블리를 부르던 나름대로의 애칭인 근육이도 안 꺼내고 진지하게 설득하는 모습으로 들어갔다. 아니카가 웃음을 거둔 모습은 그럴만한 상황이나 선생 앞에서 종종 있었지만 평소에는 너무나 어색했기 때문에 퍼블리는 그저 손을 모아 말이 전부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같이 지내면 따로 약속시간 안 잡아도 되고 언제든 같이 놀러나가거나 등교 할 수 있잖아?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지내니까 무슨 일인지 당연히 알게 되고 도움도 빨리 요청할 수 있고 아침에 등교할 때 서로 시간 엇갈릴 일도 없으니 곤란한 일도 적어지고.”
그건 좋긴 한데...그럼 너희 엄마는? 혼자 지내게 되잖아. 애초에 허락을 하실까? 친구네 집이라고 해도 하룻밤 자고 오는 게 아니라 여름내내 지내고 온다고 하는데.”

그 말에 아니카는 묘한 눈으로 퍼블리를 보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다시 납득한 눈으로 돌아왔다.

내년이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졸업하겠지?”

졸업과 동시에 학생이던 우리는 뭐가 될까?”

...성인?”

그럼 성인이 된 학생은 뭘 할까?”

갑자기 스무고개라도 하는 건지 하나씩 물어보는 아니카의 말에 성실히 대답한 퍼블리는 마지막 질문에 고민했다. 퍼블리 자신이라면 마법사를 찾으러 나갈 테지만 성인이 된 학생이라는 말을 봤을 때 그 얘기가 아닐뿐더러 퍼블리보단 질문을 꺼낸 아니카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굳이 나뿐만 아니라 아빠 찾으러 나갈 퍼블리 너 말고 그냥 일반적인 학생들을 생각해봐. 나는 엄마도 말했지만 선생님들이 주구장창 얘기하는 거 있잖아? 성인이 되면

독립할 수 있다는 거.

뒷말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둘 다 같은 말을 할 게 뻔했다. 많이 들어보긴 들어봤지만 퍼블리에게 있어선 독립이라는 말은 꽤나 낯선데다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을 터였다. 생각해보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인이었다.

물론 성인이라고 해서 다짜고짜 짐 싸들고 독립할 순 없는 노릇이고 아직 같이 지내고 싶어 하는 엄마나 자식들이 있을 테지만 우리 엄마는 웬만하면 빨리 독립하길 바라는 분이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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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도 결국엔 무작정 나갈 거지?”

머쓱함에 피하는 눈길에서 얼핏 보인 고집에 아니카는 꺼낸 말 뒤에 나오려던 한숨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대로 잠시 멈추면서 다시 삼켰다. 한숨을 쉰다고 해서 답답한 게 사라진다면 진즉에 몇 십번은 넘게 쉬었을 한숨이었다.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답답함이었다. 퍼블리는 내심 아니카가 무언가를 참고 있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당사자가 직접 꺼내지 않고 오히려 무의식적으로도 나오지 않게 눌러 담으니 섣불리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느껴지기만 할 뿐 그 안에 눌러져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뭘 말해야할지 모르는 상태라는 게 더 적절했다.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자리 잡은 침묵이 조금 식은 차를 홀짝이는 소리를 더 크게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나 지났을까 전부 비웠는지 가볍게 탁!하고 소리가 울렸다. 결국 먼저 내려놓는 건 아니카였다.

원래부터 빙빙 돌려가면서 말한 적 없으니 그냥 말할 게. 사실 난 퍼블리 네가 그렇게 열심히 뛰어나가는 게 이해가 안 돼.”
꽤나 꽉 찬 돌직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에게 닿진 못했다. 퍼블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아니카는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이 눈을 반쯤 내려감으며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뛰어나가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게 그러니까...일단 나도 처음에 엄마가 사라진다면 여기저기 전단을 돌리거나 수소문을 할 거야. 하지만 왕국 밖으로 나가야한다면...글쎄? 애초에 너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직 성인이 아닌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나갈 수 있어도 실종자들을 전문적으로 찾는 마녀나 어떻게든 왕궁 마녀한테 찾아갈 것 같아. 물론 너희 아빠도 특수한 경우라 주위의 다른 마녀한테 섣불리 부탁할 수 없는 거 알아 하지만.”

숨을 고른 아니카는 웃는 얼굴을 완전히 내려놓고 말했다.

넌 평생 너희 아빠를 찾으러 다닐 거야?”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퍼블리의 표정이 멍해졌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난 아마 처음 한 번 찾으러 나간 후엔 직접 나서는 건 포기할 거야. 다른 마녀에게 계속 찾아달라고 부탁은 하겠지만 내가 직접 저 넓은 밖을 돌아다니진 않겠지. 분명 슬프고 그립고 찾고 싶겠지만 그것들과 기약 없는 소식에 비례해서 갈수록 지칠 테니까. 더군다나 엄마가 나한테 차지하는 부분이 분명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렇다고 전부는 아니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얘기를 다 들은 퍼블리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끝이 시커먼 두려움이 끝도 없이 몰려와 제멋대로 속을 아프도록 채우고 휘저으며 그에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생각은 두려움에 휩쓸려 여기저기 아프게 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숨을 멈추더니 그와 동시에 떨림이 멎었다. 눈을 감은 퍼블리는 고개를 푹 숙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동시에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여전히 두려움은 밖으로 쏟아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가득 차 있었지만 잔잔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곳에서 올라온 생각은 그 모든 걸 바로 발밑에 두고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 끝은 시커멓고 보이지 않았으며 발을 적시고 있었지만 다시 빠지진 않았다.

“...평생이라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지치지 않는 이상, 아니 지쳐도 계속 찾아다닐 거야.”
?”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의문이었지만 정말로 궁금했는지 물리려는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니카는 잔잔함에 잠시 몸을 맡긴 퍼블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몇 번 눈을 깜빡인 퍼블리가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제자리로 올라왔다.

내 전부건 많은 부분을 차지하건 간에 결국 슬프고 그립고 찾고 싶고 막연히 두려운 걸 끝내려면 직접 아빠를 찾아야하고 아빠한테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그렇게 대답한 퍼블리는 그 어느 때보다 편하고 단단하게 보였다.

대답을 들은 아니카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다시 웃음을 올렸다. 이해고 뭐고 간에 저 높은 장대 위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장대만 겨우 잡아 울상 짓는 것처럼 보이던 제 친구가 이제야 편해 보이는 모습에 저 또한 답답한 게 가셔 편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니카는 들고 왔던 축축한 우산을 들고 신발을 신으며 내일 학교에서 보자며 인사하고는 문을 열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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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마법사가 없는 집에서 시작되는 일상은 떠나기 전부터 그랬듯이 퍼블리에겐 싸늘했지만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이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둥글게 다듬어 그에 맞춰 익숙해지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퍼블리가 빨리 혼자인 상황에 적응된 데에는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 때문이었다. 퍼블리는 여러 번 생각해본 결과 역시 대머리는 아닌 것 같다고 학교 가기 전날 다시 한 번 극렬히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여러모로 쌓인 게 많아보이던 아니카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물론 아니카가 지나가는 학생들 마다 일일이 붙잡아서 얘기한 건 아니었다. 맨 처음 퍼블리에게 다가와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며 걱정 조금 호기심 대부분을 담아 물어보러온 애들에게 딱 한 번 말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한 번 말하나 여러 번 말하나 그게 그거였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 번만 말하니 당사자의 입에서 떠나 들은 자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내용은 눈 내린 언덕 끄트머리에서 굴려진 구슬처럼 원래보다 점점 더 한 내용으로 부풀려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황당했던 건 머리카락이 자아를 가지게 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머리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들은 아니카는 그 날 학교에서는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헤어지고 난 후에도 계속 웃어댔다. 저 갈림길 골목 너머에서 계속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퍼블리는 기분이 굉장히 상했지만 그 웃음으로 깔끔하게 쌓인 것들을 비운 듯 한 아니카의 모습을 위안삼기로 했다. 그 쌓인 것들이 폭발한 아니카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되지 않을뿐더러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보통 재앙이 아닐 거라는 걸 깊게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위로 몸을 내려놓던 퍼블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고 소문이 사그라들 때까지 집에 오자마자 자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잠잠해질 때 쯤 여느 때처럼 침대 위로 바로 눕던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나더니 유리병이나 피리를 꼭 쥐거나 어떤 때는 여전히 냉기를 뿜어대는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엔 다시 침대에 누워 잠들지도 않은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덮기도 했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 낌새를 느낀 건지 작년 가을처럼 자주 왔던 아니카가 아무 말 않고 기다리거나 돌아가며 조금씩 혼자 있을 시간을 늘려주고 있었다.

그런 아니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배려하면서도 왕국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묻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던 퍼블리였지만 직접 물어볼까 아니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물어보지 않아야할까 고민으로 놓인 줄다리가 묻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울일 때까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새 햇빛이 녹빛 짙은 풀을 끌어당겨 올리고 땅을 조금씩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왜 벌써 더워지려고 하는 거야?”
작년보다 빠른 게 올해는 엄청 더우려나 본데?”

더위가 금방 다가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어제 오늘 연속으로 내리고 있는 폭우로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창가에서 폭포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거센 빗줄기들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문득 저러다가 약새풀들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잽싸게 천들을 모아 끌어안고 뒷마당으로 뛰어갔지만 약새풀들은 거센 빗줄기에 조금 땅과 가깝게 눕혀진 거 외엔 꺾인 데도 하나 없이 멀쩡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발자국 하나 없는 눈 밭 위로 비가 쏟아지는 광경처럼 보여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서있던 퍼블리는 몸이 으슬으슬 떨릴 쯤에 정신을 차리고 젖은 천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의외고 다행이라는 점은 비가 내리고 냉기까지 감돌고 있어 꽤나 추웠던 곳에서 쫄딱 젖은 채로 한참 있었는데도 감기는 물론 열도 나지 않았단 거고 피해갈 수 없었던 불행은 젖은 옷과 천들을 빨아야 했고 빨아도 비 때문에 말릴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조금 울상을 지으며 축축해지는 바닥을 보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 의아해할 필요도 없이 퍼블리 혼자 있는 집에 찾아 올 자는 역시 아니카 뿐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떻게 왔어?”

요령껏 왔지. 사실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온통 젖은 우산과 신발의 물기를 털어내다가 젖은 천들과 함께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부엌으로 향한 둘은 찻잎을 컵에 담으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더워질 줄 알았는데 비가 먼저 내리네.”

저거 하늘 깨진 거랑 관련 있는 거 아냐? 어딘가가 아예 구멍이 뻥 뚫려있을지 몰라.”

그에 설마 그럴 리가 있냐며 웃던 퍼블리는 부글부글 끓으며 하얀 김을 올리는 물을 컵에 부었다.

풀들은 멀쩡해?”
보러나간 거 어떻게 알았어?”
컵을 받아든 아니카는 말없이 제 우산과 신발 옆에 뭉쳐놓은 천들을 힐끗 쳐다봤다. 멋쩍게 웃던 퍼블리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어떡할지 생각해 봤어?”
?”
너 이제 올해면 학교도 완전 졸업이고 내년이면 어른이니 수업 다 끝난 겨울 때 아빠 찾을 때까지 무작정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지?”
그에 퍼블리는 시선을 피하고 침묵과 어색한 미소로 대신 답했다.

우리 근육이...밖에서 많은 걸 알아왔으면서 정작 배운 건 없구나~?”
호호 웃는 소리와 함께 나오는 독설에 퍼블리의 시선은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더 이상 아는 게 없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이대로 계속 집에서 혼자 지낼 수도 없고 마냥 기다리거나 포기하고 싶지도 않으니 유일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물론 이걸 입 밖으로 꺼내봤자 날아오는 건 앞선 독설의 연장선일 테니 꺼내지 않았다.

이제 단서가 전혀 없다시피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무작정인데다가 막연하다고 생각되지 않니?”
하지만 이거 외엔 방법이 없는 걸?”

다시 공주님을 찾아가보는 건?”

이동마법판은 그 때 처음 쓴 이후로는 바로 사라졌어. 게다가 찾아간다 해도...공주님이 아빠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알 리가 없잖아.”
공주에 대해 얘기하자 퍼블리는 순간적으로 피리가 떠올랐지만 딱히 피리에 특별해보이는 건 없었고 불어봐도 그저 평범한 피리였다.

그래도 너 그렇게 무작정 나가는 건 진짜 아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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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저 아래로 쑥 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제가 있던 자리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고 텅 비어버렸다. 아직 확신할 순 없었지만 이미 마음은 확신을 내리고 있었다. 저게 이유라고,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냐고, 그날 울면서 마법사의 손을 잡고 여기에 오게 된 것도 늘 놀러가던 마을도 못 가게 된 게 바로 저 약새풀 때문이라고.

“...분명 약새풀을 뒷마당에 밭으로 키우는 건 보통 일은 아니지?”
그걸 보통 일이 아니다는 말로 끝날 게 아니지.”
근데 왜 이렇게 허무할까?”
터질까 두려워 그냥 걸을 수도, 발끝을 세워 걸을 수도 없는 풍선으로 된 길이 한순간에 신기루마냥 사라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주변과 침묵은 아무것도 없던 길 위에서 아슬아슬 걷고 있던 모습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퍼블리 자신이 꺼낸 말대로였다. 허무했다.

일단 뭐 확실한 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히 정황상 확실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굳이 뭐라 덧붙이진 않을게. 그보다는 의외네?”

뭐가?”
안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말에 퍼블리가 눈을 느리게 두 번 깜빡였다. 만약 왕국 밖으로 떠나기 전이었다면 아니카의 말대로 퍼블리의 입에서 나올 건 허무하다는 말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거나 확신을 내리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불안함에 잠겨 있었을지도 몰랐다. 약간 멋쩍은 얼굴을 하며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제 반응들을 상상하던 퍼블리는 약간 편안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허무해.”

뭐 일단 허무한 건 저 뒤로 제껴놓고, 우리 근육이는 이제 다시 현실을 바라봐야지?”
현실이라니?”
학교 어떡할 거야?”
그 말에 퍼블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선생님들은 이상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네 얼굴 잘 아는 작년 반 친구들과 제작년 반 친구들과 그 중에서 같은 반 된 친구들이 나한테 꽃과 잎처럼 딱 붙어 다녔던 우리 근육이가 어디로 솟아나고 어디로 꺼졌는지 나한테 짧으면 하루 길면 일주일씩 물어왔단다~”
어투는 높고 밝았지만 그 말과 뜻은 반 친구들에게 둘러싸일 때 변명하는데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에 퍼블리가 울상을 지으며 애절하게 바라봤지만 돌아오는 건 들어주지 않겠다는 웃음소리였다.

뭐라 말해야 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게다가 이 정돈 각오한 거잖아?”
학교를 이렇게 길게 빼먹는 것도 확실히 시선을 끌 정도인데 왕국 밖으로 나갔다는 말은 어떻게 하겠는가. 뒷사정을 모르는 둘은 선생들이 묻지 않은 건 확실히 의아한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돌아온 순간을 기다려서 물어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분명 떠나기 전에 각오했을 부분이지만 사실 각오만 했지 막상 닥칠 때는 그 각오도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일단 밖으로 나갔을 때 생각해놨던 건데 역시 꽤 오랫동안 아팠다는 게 제일 괜찮고 그럴듯하겠지?”
아픈 이유가 될 병은 뭔지 생각해뒀고?”
...감기 때문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 근육이는 감기를 한 달하고도 그 반을 넘게 앓아누울 정도로 심각하다고 여기고 있었구나~”

알고 있는 온갖 병들을 쥐어짜내고 있었지만 딱히 마땅한 게 없었다. 게다가 아팠다고 하면 아니카가 병문안을 갔을 법한데 그동안 모른다고 잡아뗐던 것도 이상했으니 말이 맞지 않았고 전염성 있는 병이라고 하자니 그랬다면 학교에서 혹시나 방학동안 퍼블리와 접촉한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가 내려왔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으니 무리였다. 지병이 있었다고 하기엔 퍼블리가 너무나도 쌩쌩하다 못해 비행 마법 없이 날아다닐 정도로 체육적인 면에서 활약한 전적이 화려했다. 결국 아파서 못 나왔다는 이유는 댈 수 없었다.

그럼 방학동안 새로운 마법주문을 연습하다가 실수와 실패로 대머리가 되어버려서 원래대로 다시 돌아오느라 이렇게 늦어버렸다고 하자.”

아니 잠깐! 왜 하필 대머리야?!”

그렇다고 팔다리 날아갔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정신적으로도 충격 받았을 텐데 넌 지금 멀쩡하잖아.”

대머리가 된 것도 충분히 잔인하고 충격 받잖아!”

퍼블리가 질색하며 펄쩍 뛰었지만 결국 그동안 학교를 안 나오는 데에 대한 대답은 대머리로 결정됐다. 가발을 쓰고 나오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 충격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아니카도 영문을 모른 채 못 찾아간 이유가 되기엔 충분했다. 퍼블리가 연신 투덜거리며 멀쩡히 잘 있는 제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두건으로 머리를 말아 넣었을 때가 떠올라 더 기분이 묘해지고 가라앉은 덕에 퍼블리의 표정은 썩 좋진 않았다.
일단 이유는 이걸로 됐고 그럼 내일부터 학교로 다시 나올 거야?”
글쎄...”

다시 학교로 가야한다는 말에 퍼블리는 기분이 방금과는 다르게 묘해졌다. 왕국 밖으로 나갔을 때 마을과 마을을 들르며 신성지대로 갔을 때보다도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무언가 저 아래에 잠긴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그런데도 결국 끝은 나가기 전과 같이 학교로 가야했다. 마법사가 있을 곳의 단서를 찾기 위해 찾아 나온 여행인데 결과적으로 봤을 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마법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밖으로 나왔던 도중에 마법사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결국 아빠는 못 찾았네.”
손에 쥐고 있는 피리를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퍼블리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니카가 툭 물었다.

후회해?”

아니.”

피리를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이 단호하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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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 왜 말이 없어?! 갑자기 하늘도 깨지고 얘는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말도 없고!”

불안함이 섞여있는 아니카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퍼블리는 퍼뜩 고개를 떨고는 새하얗게 자리 잡은 약새풀들을 다시 돌아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꽤나 시간이 지났는지 위를 바라보면 파랬던 하늘이 이미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아래를 바라보면 까만 그림자가 꽤나 길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면 늘 짓던 웃음도 거두고 팔짱을 낀 채 꽤나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니카가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낯설어 퍼블리는 나오다가 그대로 굳어버려 나오다가 어정쩡하게 서게 됐다.

“...대체 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말에 퍼블리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눈에 보이는 건 약새풀밭이고 너무 엄청난 광경에 반쯤 정신이 나가서 충동적으로 공주님 집을 이동마법 판에다가 적어놓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하늘은 깨져있고 제가 있는 곳은 장미정원인 데다가 거기서 집을 발견하고 공주님을 만나서 아빠의 엄청난 과거를 듣게 되고 어쩌다가 피리를 받게 됐는데 다시 정신 차리고 보니 약새풀밭으로 돌아오게 됐다는 걸 과연 어떻게 현실성 있게 얘기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제가 직접 겪어본 일인데도 이렇게 다시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 뒷마당으로 들어가기 전 비둘기 우체부 둥지에서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아니카가 화나 보인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물론 웃고 있었을 때도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으니 그 때부터 쌓여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웃음까지 내려놓는 경우는 없었다.

퍼블리.”

“...?”
얼른 말해.”
어차피 어떤 식으로 말할까 고민해도 결국엔 말해야한다는 건 바뀌지 않았다. 일단 계속 밖에 서있는 채로 말할 순 없었으니 집으로 들어오게 된 퍼블리는 아니카의 무언의 재촉에 다시 돌아온 데에 대한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방금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듣던 아니카는 얘기가 다 끝나고 난 후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퍼블리는 뭐라도 더 얘기해야하나 싶었지만 더 이상 꺼낼 얘기는 없었다. 완전히 정리 되지 않고 두서없이 겪었던 일들을 꺼냈지만 결국엔 그게 다였고 다시 정리한다 해도 어쩐지 다시 꺼내면 더 꼬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포기했다. 다행인지 이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퍼블리.”

“...?”
이제 뭘 할 거야?”
뭘 할 거야라니...”
바로 대답하려던 퍼블리는 그대로 멈췄다. 당연히 나오려는 대답은 아빠를 찾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아빠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마냥 신기하기만 했어.”

신기하다고?”
저런 게 바로 애착이구나 싶었지. 근데

답답한 걸 내보내고 싶었는지 그대로 한숨 한 번 쉬더니 다시 말을 마저 붙이기 시작한다.

아무런 말도 안할뿐더러 소소한 말도 삼가는 상대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이고 그 애착이 상대한텐 없을까봐, 그걸 넘어서서 너한테 있는 애착이 떼어져 훨훨 날아가 버릴까봐 꽉 붙들기 위해 확신을 찾으려고 해. 이게 지금까지 봐온 네 상태야.”

퍼블리는 직접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으니 조금 뜨끔한 마음이 들었지만 크게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멋쩍음에 웃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웃음으로 넘어가기엔 지금 분위기는 꽤나 가라앉아있어서 가만히 아니카의 뒷말을 기다린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아빠를 찾으러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도 참 신기한데...단순히 굉장하다고 감탄으로 그칠 수 없는 일들도 겪어왔잖아. 그리고 뭔가 이렇게 다 눈에 보일 정도로 터지고.”

눈에 다 보일 정도로 터졌다니?”

대답은 창문 너머 깨진 하늘을 가리키는 걸로 충분했다.

저건 나도 몰라!”
네가 때맞춰 왕궁 안으로 들어갔었으니 그거랑 어떤 식으로든 연관은 있을 거야. 물론 저것뿐만 아니라 넌 신성지대에서 감옥으로 끌려갔었고 탈옥도 화려하게 했었잖아.”

그 부분에 대해선 퍼블리도 억울한 게 많았지만 일단 일이 크게 벌어진 건 크게 벌어진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성 측도 퍼블리가 마법사로 보였었는지 왕국에 대해 묻진 않았었다.

물론 네가 일 크게 벌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란 건 알겠지만 너무 큰일들 중심에 네가 있어. 그래서 너무 걱정이야. 아무리 네가 아니라고 해도 사건을 파헤치는 손톱과 일들을 묻어놓으려는 손들은 어떻게든 너를 가리키고 끌어내려고 할 거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나도 이젠 가만히 옆에서 보고만 있진 않을 테지만.”
퍼블리가 쥐고 있는 피리를 힐끔 본 아니카는 눈을 꾹 감고 뜰 때 다시 웃음을 끌어올려 달았다.

, 내가 어떻게든 말해도 우리 근육이는 일 저지를 거 아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그보다 아까 뒷마당에 있는 게 약새풀이라고 했었지? 그것도 거의 밭 수준으로?”

재차 물어본 후 퍼블리의 긍정을 확인하듯이 기다린 아니카는 몸을 뒤로 물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냥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고 추측인데. 혹시 우리 마지막으로 GM할아버지네 마을에서 만났었던 날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 조금 가물가물해.”
그 때 우리 엄마랑 만났던 것도?”

, 그건 기억나! 하지만 어떤 모습이셨는지는 잘 기억 안 나.”

그 때 너 가고 나서 나한테 너에 대해 엄청 캐물었었어.”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대로 딱 말하려던 것도 멈춘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난 그냥 다른 데서 사는 친구라고만 얘기했었던 것 같아.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었던 게 분명했거든. 그리고 내가 그 때 왕국 밖으로 나왔던 건 풀 뜯으러 나온 엄마 졸라서 나오게 된 거라고 얘기했었나? 아무튼 그 날을 잘 잊을 수 없었던 게 엄마가 엄청난 걸 뭉텅이로 뜯어오셨거든.”
뒷말을 듣지 않아도 집안까지 들어온 찬 기운이 답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피리를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날 처음 보는 옷을 입어보고 마법사가 잡은 손을 따라 조금씩 주저하면서 따라갔던 작은 발. 그 뒤로는 시커멓고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따가운 연기가 작은 등을 때리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마법사가 야속해 울음을 터뜨렸던 아주 어렸던 아이.

바로 약새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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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퍼블리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지금도 정신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퍼블리의 속사정을 모르고 엄청난 진실을 꺼낸 메르시는 예전에 자기가 봤던 마법사에 대해 얘기하다가 멍한 얼굴로 굳어있는 퍼블리를 몇 번 부르다가 툭툭 쳐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유를 모르는 메르시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고 어찌해야할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퍼블리 언니?”
그렇게 열 번은 더 부르고 다섯 번을 툭툭 쳤을 때쯤에 다시 정신이 돌아온 건지 화들짝 놀라던 퍼블리는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메르시에 하하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퍼블리는 지금 본인 스스로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쉽사리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가 꾹 다물렸다. 충격은 굉장히 크게 다가왔지만 막상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생각보다 퍼블리의 감정은 차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가만히 물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아마 너무 놀랄만한 얘기를 갑작스럽게 들은 덕에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가 굉장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하늘의 현자랑 같이 있던 마법사일 줄은 몰랐어.”
“...하늘의 현자?”
컨티뉴님을 그렇게 불러.”
메르시의 표정이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웃음을 터뜨리고는 싶은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표정 관리를 하기엔 누르기 힘들어서 꾹 참는 그런 표정이었다.

..늘의 현자라고 부르는 구나...”
“...그 때는 달랐어요?”
아니...그 때도 현자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마법사긴 했는데...하늘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구나 싶어서.”
그렇게 완전히 웃음을 억누른 메르시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퍼블리의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다시 피식 웃음이 올라와 결국엔 한마디 꺼낸다.

“GM할아버지랑 제일 잘 맞았고 둘이 좀 닮은 부분이 많아.”
그 말에 바로 납득을 해버렸다. 고개를 끄덕인 퍼블리는 다시 눈앞으로 시선을 둘 수 있게 되자 걱정이 들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느냐가 문제였다.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메르시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데다가 무엇보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퍼블리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같이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얘기하자 메르시는 옅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퍼블리가 계속 설득했지만 계속해서 거절했다.

“...정말 괜찮겠어?”
왕궁 마녀가 다시 들렀을 때 내가 없다면 곤란해질 거야.”
결국 포기한 건 퍼블리였다. 메르시는 나가지 않는 대신에 퍼블리를 통해 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 마법을 걸어도 되냐고 물었고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금 민망해하는 얼굴로 나가는 길을 모르겠다며 털어놓았다.

여기서 나갈 때 왕궁의 문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면 내가 몰래 쓰던 길이 있어. 지금은...워낙 샛길이라서 풀 때문에 뒤덮여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쪽 방향이 제일 안 들키는 길이야.”
“...여긴 바로 장미정원 한가운데라서 장미정원 먼저 벗어나는 게 일이야.”

“...장미정원..?”

순식간에 굳은 표정으로 반문하는 메르시의 모습에 움찔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메르시는 표정을 풀 생각이 없어보였다.

장미정원이라니?”
...정화 때 이후로 세상의 모든 장미들을 모아서 장미정원을 만들고 장미들을 이 정원에서만 필 수 있게 만들었다고 배웠어.”
퍼블리는 여전히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입을 꾹 다물며 아무 말도 안하는 메르시를 조금 불안한 낯으로 살펴봤지만 여전히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 더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메르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메르시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대로 바로 문 밖으로 나가던 메르시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조금 휘청거렸지만 벽을 짚으면서 애써 밖으로 나갔고 퍼블리는 잽싸게 뒤따라 메르시를 부축하려 했지만 메르시는 살짝 밀어내는 걸로 거절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가면서 붉은 물결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하고 강하게 몰려오는 향 때문에 둘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린다. 아직 꽃봉오리 상태의 장미들이 눈에 들어오자 메르시는 굳은 표정을 풀었지만 대신 자리 잡은 건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결국엔 만들었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눈을 감는다. 아마 메르시도 깨져있는 하늘을 봤으리라.

“...언니 혹시 이동마법 쓸 줄 알아?”

아니.”
그걸 쓸 수 있다면 애초에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었다. 선생들도 못쓰거나 쓰기 힘든 마법인데 퍼블리가 과연 쓸 수 있을까? 답은 당연히 아니었다. 꽤나 단호한 대답과 함께 정색하는 얼굴이 제법 현실적이고 재밌게 다가왔는지 작게 웃음을 흘린 메르시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니가 어디서 왔는지 알겠다.”
“...?”
그래서 그 서랍도 열 수 있었던 거겠지. 혹시 그 판 아직도 갖고 있어?”

아니. 여기로 이동할 때 잃어버렸어.”
그 말에 다시 방으로 돌아간 메르시는 다른 서랍을 열고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꺼낸 건 다름 아닌

피리?”
오빠들이랑 같이 불었던 거야.”

꽤나 손때가 묻은 피리였다. 바로 건네자 얼떨결에 받아든 퍼블리는 의아한 눈으로 메르시를 바라봤다.

느끼고 잘 기억해둬 언니.”
그렇게만 말하고는 메르시가 떨어져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들이 퍼블리에게 쏟아졌다. 깜짝 놀란 퍼블 리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보호했을 때 물처럼 쏟아지던 기운들이 그대로 멈춰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조심스럽게 팔을 내리자 메르시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퍼블리가 서있는 곳이 바뀌었다. 지금 이곳은 메르시의 방이 아니었다. 새하얀 약새풀들이 처음 봤을 때처럼 잔뜩 널려있으면서 냉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저 밖에서 퍼블리를 열심히 불러대는 아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퍼블리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한 얼굴로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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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순간 올라오는 소름에 퍼블리가 팔을 문질렀다. 처음 아니카와 주변의 마녀들의 반응을 봤을 때 느꼈던 대놓고 이상하고 상대방이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해 자신만 느끼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알기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아난타에 의해 저주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이것도 저주거나 혹은 저주의 영향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기묘했다. 물론 그동안 의문이 해결됐다는 묘한 안심과 마법사에 대해 더 집중했기 때문에 금방 생각을 놓아버렸지만 잘 생각해보면 참 이상했다. 저주에 직접적으로 언급도 안 했는데 왕궁 마녀가 아닌 마녀들이 메르시, 즉 공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말 그대로 공주가 존재한다, 좀 더 나아가면 축제로 인해 공주의 추억은 빵과 연관이 많다 뿐이었다. 이 정도는 자세히 알기 전에 퍼블리도 아는 부분이었다. 단순히 공주가 저주에 걸렸으니 공주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저주의 영향을 받는다면 퍼블리도 진즉에 영향을 받아 어른이 되지 않는 공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야 했다. 퍼블리는 이에 대해 안일하게 넘겨버린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자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를 찾는다고 했죠?”
...?”
아까 얘기할 때 아빠를 찾으려고 나갔었다고...”

그 말에 퍼블리가 쩡하고 굳어버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아닌 아빠라고 해버린 걸 떠올렸다. 아빠를 찾으러 왕국 밖으로 나갔었다고 곧이곧대로 얘기하다니 마녀만 사는 왕국에서 필사적으로 제 정체를 감추고 살아왔던 마법사의 노력이 무너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며 호호 웃는 아니카와 한숨 쉬며 잔소리할 준비를 하는 마법사의 모습은 덤이었다. 상당히 곤란해 하는 모습이 역력한 게 의아했는지 빨갛게 부은 눈으로 퍼블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기....사실 그게........는 맞는데.......”

?”
..왕국 내에서 산 게...잠시.......”
왕국 내에서 산 게 왜?”
?”
이번에는 퍼블리가 반문했다. 마녀들만 사는 마녀왕국. 여기에서 마법사가 살고 있는 건 단순히 여기로 이사왔다라는 수준이 아니다. 지나가는 마녀 하나 붙잡고 마법사가 여기서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단순히 놀라는 수준으로 끝날 게 아니다. 그런데 바로 눈앞의 마녀, 그것도 이 왕국의 공주가 마법사가 여기 살고 있는 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할 일인가 싶은 반응으로 퍼블리를 보고 있었다.

...여긴 마녀들만 사는 마녀왕국이니까...?”
누가 그래?”
“...?”
여긴 처음에 마녀들이 모이고 마녀들이 많이 살아서 마녀왕국인 거지 마법사가 안사는 건 아니야. 엄마는 물론 아빠도 여기서 살았고 오빠들이랑도 여기서 살고 원래 홀...리랑 프라이드도 여기서 살았었어. 그 둘은 나중에 따로 나가서 마법사들을 모아 살았지만.”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였다. 물론 이제 역사책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저주로 인한 몇십년의 공백뿐만 아니라 그 전의 사실들도 쏙 빼버리다니 그 때 살았던 마녀들이 지금도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의 대담함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묘하게 신성 측의 홀리와 프라이드에 대해 말할 때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은 것 같았지만 다시 넘긴 퍼블리는 메르시에게 현재 마녀만 살아가고 있는 이 왕국에 대해 얘기했다. 과연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무언가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그렇게 마법사랑 마녀를 단순히 다르다는 게 아닌 그렇게 서로 뭉쳐서 나누는 느낌이 아래에 깔려있었지만...아빠 덕분에 아무 말도 안 나온 거였어. 오빠들도 한몫했고.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마녀들이 더 많았었고...결국은 그렇게 됐구나...”

씁쓸함을 가득 담은 말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전서구가 했던 조각 케이크 비유가 떠올랐다.

그래서 퍼블리 언니의 아빠 이름은 뭐야?”

...언니라니...”

잠든 시간은 빼야지! 그럼 퍼블리 언니인 거 맞잖아?”

어느새 순식간에 언니가 되어 있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부은 눈만 아니었다면 아까까지 울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마법사의 이름을 묻는 걸 재촉하자 어차피 이미 흑기사단도 알고 있으니 메르시도 알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순순히 마법사의 이름을 말했다.

패치.”

“...?”

빨간 머리에 파란 눈 마법사야.”

전서구의 반응이 떠오른 퍼블리가 확인사살을 덧붙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눈을 깜빡이던 메르시는 얼마 안 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역시 그 오빠 보살피는 기질 탁월하다니까?”

보살피는 기질?”

항상 그 용사 오빠 보살피다시피 했잖아! . 설마 언니 생길 때쯤에 드디어 독립했대?”

용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닌 전서구와 흑기사를 통해 듣게 된 거긴 하지만 항상 용사 곁에 있었다고 했었고 전서구의 말을 빌리자면 곁에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뒷바라지하고 다녔다고 했다. 여기 메르시의 말도 합쳐보면 거의 애 키우는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용사가 독립하니 진짜 애를 키우고 싶어졌나보다라는 장난스러운 말에 퍼블리는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아 진짜 그 오빠들 재밌었는데! 정확히는 용사 오빠가 사고를 치고 패치 오빠가 수습을 하는 게 일상이었어. 그러고 보니 흑룡 아저씨는 괜찮대?”

흑룡?”

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마법사 곁에 있었던 게 용사만이 아니었던 건가? 의아해하는 퍼블리의 모습에 메르시도 의아해했다.

...그럼 GM 할아버지는?”

“GM 할아버지는 알아.”

...그런데 왜 흑룡 아저씨는....그럼 컨티뉴 할아버지도?”
분명 하늘의 현자 이름이었다. 그런데 현자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말이 있었다.

하늘의 현자 컨티뉴가 속한 소수정예 다섯.

...숲에 들어갔던 마법사야?”

그 때 흑룡 아저씨는 흘러나오는 밸러니의 마력 중 거의 대부분을 막느라 무리해서 GM 할아버지랑 같이 물러나 있었어. 숲에 들어갔던 건 컨티뉴 할아버지랑 용사 오빠, 패치 오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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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엇?! ..잠깐 저기...!”

뚝뚝 눈물을 흘리던 아이가 책을 꽉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있어 시야가 흐릴 텐데도 퍼블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온다.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어떻게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제 이름은 퍼블리고요...그 책은 브레이니씨가 공주님한테 전해달라고 해서 받은 책이에요.”

우선 나온 건 이름이었다. 솔직히 이름 외에 뭐라 더 말하는가. 여기 들어온 방법과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지금 이 대치 상황에서 말하기엔 길었고 그나마 말할 수 있는 게 책에 관한 거였다. 물론 이정도까지만 말한 데에는 그만큼의 확신이 있었기에 충분한 내용이기도 했다. 브레이니라는 이름에 다시 눈물을 터뜨리며 책을 꼭 끌어안는 모습이 안타까움과 동시 씁쓸했기에 퍼블리는 아이가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게 기다렸다. 다섯 번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아이는 다시 눈물을 닦고 제 감정을 가다듬었다. 금방 울음을 그치는 모습이 익숙해보여서 안타까움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더 울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 이름은 메르시예요. 이 책을 전달받을 공주가 바로 저예요.”

사실 퍼블리도 이미 어렴풋이 확신은 하고 있었다. 다만 바로 그 비밀에 둘러싸인 공주가 이렇게나 어리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당연하게도 저주였지만 저주에 걸리기 이전에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정화 전쟁을 하러 갔었단 말이기도 했다. 물론 저주가 어려지는 저주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로부터 지난 시간과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온 왕궁 마녀들의 얘기들을 생각해보면 어려지는 저주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주가 한 종류라고 딱 정해져 있다고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어른거린 아니카의 모습에 무엇이 이상한지 제대로 다가왔다.

“...오빠..!...흑기사단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잠깐의 침묵을 가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퍼블리는 다시 눈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에 이 왕국의 공주를 두고 딴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제법 여유를 되 찾았나보다라며 멋쩍은 마음을 눌렀지만 바로 그 질문 내용에 또 말이 턱 하고 막혔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로의 소식도 몰라 애타는 건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해주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썩어가는 몸으로 배 위에서, 바다에서 갇혀 살다시피 한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퍼블리를 빤히 바라보던 공주는 최대한 감정을 눌렀지만 너무 누른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모를 가라앉은 목소리를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흑기사단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고 빛이 온 숲을 감쌌던 마지막 날에 한 번 정신을 잃었었고 제가 정신을 차렸던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을 때였어요. 그리고 눈을 뜬 제가 제일 처음 눈에 담았던 건 썩어가는 흑기사단의 몸이었어요. 나는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제 손이 닿았던 것보다 그들이 저를 여기로 이동시키는 게 더 빨랐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는 듯 했지만 떨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여기로 도착했을 때 저는 잠들기 전에 당신이 열은 저 서랍을 잠갔고 바로 잠들었어요.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 속을 흔드는 느낌에 깨어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나갈 때까지 자는 척을 했고 그 다음에 당신이 왔어요.”

그대로 굳은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퍼블리와 한 번 눈을 다시 마주하고 작은 한숨을 내쉰 공주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굳은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고 있던 퍼블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 흑기사단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때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부터 얘기해야했다. 거기에다가 퍼블리가 지금까지 보고 살아온 현재의 마녀왕국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왕궁 내의 사정은 퍼블리 본인도 모르는 게 당연했으니 그나마 왕궁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축제뿐이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퍼블리였지만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다. 퍼블리의 이야기를 듣던 공주는 그들이 바다에 갇히다시피 했다는 대목에서 얼굴이 굳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적은 책을 만들었다는 브레이니와 바다를 구경시켜주던 흑기사의 얘기를 꺼내자 그리움과 안타까움, 슬픔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한차례 더 울었다. 그런 공주를 바라보고 있던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편하게 말하세요 공주님.”

..공주님 말고...메르시라고...! 불러주세요.”

. 메르시님.”

자신도 존댓말을 그만둘 테니 존칭과 존댓말 빼달라는 말에 퍼블리는 얌전히 메르시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슬픈 사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는 건 많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메르시의 등을 토닥이며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던 퍼블리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공주, 그러니까 메르시에게 걸려있던 저주는 바로 잠에 빠지는 저주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잠을 자는 저주가 아닌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성장도 다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잠들어있는 저주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저주. 몸만 살아있지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했다. 실제로 메르시는 그렇게 잠들어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제대로 역사책에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으로 인해 메르시는 지금까지 공주로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퍼블리가 등을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다시 생각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주, 시간, 공주.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다. 축제, 공주, 시간, 저주, 아니카, 흑기사단, 신성지대, 잠드는 저주, 몸이 썩어가는 저주. 그리고

저기...메르시. 저주로 인해 잠들었다고 했었지? 들어보니까 저주는 다 다른 것 같고.”

“....”

꽤 진정됐는지 아직은 흐느끼긴 하지만 떨어지는 눈물이 아까보다는 확실히 줄어있었다.

혹시 저주는 다른 마녀나 마법사들한테 영향을 끼쳐?”

..! 저주인 이상...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건 당연한 거야....그래서 입으로도 담지 않아.”

그 말은 아난타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저주에 관해서는 꺼리는 게 당연했고 아무도 공주가 저주에 걸렸다는 얘기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많았다. 저주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 그대로 주위다. , 말로 전하는 게 아닌 이상 저주의 범위는 더 이상 넓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공주가, 메르시가 저주에 걸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왕국의 모든 마녀들은 메르시가 그 긴 시간동안 계속 공주였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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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은 가구도 없이 휑했다. 바닥에 쓸리거나 눌려있는 흔적을 보면 원래 가구들이 있었지만 나중에 치운 것 같았다. 먼지들은 적당히 쌓여있었는데 아마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듯싶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오던 퍼블리는 끼익 울리는 바닥에 흠칫 놀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주위를 살펴보다가 다시 움직이는 걸 반복했다. 부엌에는 화덕이 있었는데 꽤 많이 사용했는지 까맣게 탄 자국이 제법 있었다. 다시 한 번 스쳐지나가는 흑기사의 웃음소리에 다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가만히 머리를 부여잡을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혹시나 왕궁 마녀들이 다시 여기로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화장실을 제외한 문이 두 개인 걸 보면 이 집도 방이 두 개구나라고 생각한 퍼블리는 그 중 하나의 문을 열어봤지만 처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구가 있었던 흔적만 남아있는 채로 텅 비어있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방에서 나오고 남아있는 방문을 돌아보며 긴장해서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토닥이고는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오는 방 안의 모습에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손으로 짧게 잘라 막아냈다. 방 안은 여느 집처럼 책상과 옷장, 침대가 있었는데 그 침대 위에 누군가가 누워있었다. 발끝으로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 갈라진 갈색 앞머리가 인상적인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저보다 훨씬 더 어린 듯 한 아이에 당황한 퍼블리가 뒤로 물러나다 다리가 엉켜 비틀거리다 뒤에 있던 책상과 부딪혔다.

아으...아파라...”

부딪힌 부분을 문지르며 자고 있던 아이가 깼을까 힐끔 쳐다보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이 곤히 자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곤 제대로 섰다. 아픈 데를 문지르던 손을 다시 바로하려는 순간

앗 차가! ..뭐지...?”

손에 스쳐지나가는 차가운 느낌에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올린 퍼블리는 찬 기운이 느껴지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차가운 거라고 할 수 있는 건 금속으로 되어있는 책상서랍의 손잡이 밖에 없었지만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뗄 정도로 차가울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닿은 건 말 그대로 차가운 기운이지 물건이 닿는 감촉은 없었다. 이상함에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손잡이로 손을 뻗었지만 닿기도 전에 손으로 달려드는 찬 기운에 바로 손을 뺐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기운이 묘해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퍼블리는 여전히 자고 있는 아이를 힐끔 돌아보다가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손잡이에 손을 뻗어 쥐었다. 제 손을 타고 오는 기운들이 마치 손톱이 얼마나 길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쥐고 살펴보는 마법사의 손 같아 더더욱 묘한 느낌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던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당겨봤다. 처음에는 잠겨있는 것처럼 조금 덜컹거리던 서랍이 두어번 더 당기자 조금 한차례 크게 덜컹이며 열렸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며 아이를 돌아 본 후 멋대로 서랍을 뒤져보는 데에 미안하다고 속으로 사과하며 서랍 안을 살펴보니 무언가 잔뜩 글이 써져있는 종이가 가득 들어있었다. 조심스레 종이들을 꺼내자 첫 장에 크게 제목이 적혀있었다.

장미 개발 계획?”
글씨체는 꽤나 간결한 편이어서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꽤 오래된 종이인지 종이 자체가 바래있었다. 천천히 종이를 넘기며 읽어가니 전문적인 용어가 대부분이었지만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는 이해가 가능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장미는 대부분 자연 발생을 하니 장미를 이리저리 찾으러 다니는데 시간이 걸릴뿐더러 옮기는 과정 또한 힘드니 마녀의 힘으로 장미를 만들어 장미정원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여기 적힌 전문용어들은 장미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내용 같았다. 퍼블리는 읽다가 이에 대해 의아해했다. 왜냐하면 퍼블리가 역사시간에 배웠을 땐 분명 세상의 자연 발생하는 모든 장미들을 전부 모아 장미정원을 만들었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걸 무슨 수로 만드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전문용어들은 여전히 뜻을 알 수 없었다. 개중에는 마법주문으로 보이는 것들도 꽤 있었는데 아는 마법도 있었지만 하나의 마법주문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 일부일 뿐이었다.

...모르겠네...아빠라면 알아보시려나?”
이 종이를 가져다주자마자 어렵지 않게 여기 적힌 마법들을 사용해 장미를 만들어내는 마법사의 모습이 상상됐다. 문제는 이게 상상만으로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운 마법사의 마법실력이었다. 다시 제 머릿속을 차지하는 사라진 마법사의 모습에 다시 기분이 가라앉은 퍼블리는 일단 일은 엄청나게 크게 저질렀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다시 막막해졌다. 마법사를 다시 찾으러 나가기 이전에 어떻게 여기서 나가는지가 문제였다. 왕궁 내부 길도 모르는 와중에 여기는 아예 일부 담당 왕궁 마녀들만 알곡 있다고 알려진 장미정원이었다. 빠져나갈 길이 매우 막막했다. 최악의 경우는 왕궁 마녀에게 들키는 게 아닌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해 영영 갇히는 경우인데 세상의 모든 장미를 모아오고 세상 곳곳에서 자연 발생하던 장미가 여기서 발생하게 된 이상 이곳이 얼마나 넓을지는 어림짐작만으로도 굉장했다. 우울한 얼굴로 종이에 얼굴을 묻던 퍼블리는 다 읽은 종이를 다시 차곡차곡 모아 정리하고 넣으려고 했다.

당신은 누구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굳은 퍼블리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언제 제 뒤로 왔는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서있는 아이의 모습에 놀라 그대로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에 아이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는데 맞으면 단순히 아프다고 할 순 없을 정도로 굉장히 위협적이게 번쩍이는 빛이었다.

옷을 보면 왕궁 마녀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고 그건 어떻게 연건지 말해요.”

아니, 저기, ....”
하나.”
허둥거리는 퍼블리의 모습에 아랑곳 않고 숫자를 세는 모습이 굉장히 날이 서있었다. 퍼블리가 잽싸게 종이를 다시 서랍 안에 넣고 닫았지만 굳은 표정은 여전했다.

.”

그리고 숫자도 멈추지 않았다.

급하게 돌아선 퍼블리와 바로 셋을 센 목소리와 함께 빛이 한차례 크게 번쩍이는 순간 퍼블리의 품에서 책이 떨어졌다.

!”

손을 뻗어 주우려고 했지만 바로 앞에서 위협하는 빛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책을 주워들었고 퍼블리를 힐끔 보며 책을 펼쳐 넘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으로는 읽기 힘든 브레이니의 글씨를 차근차근 집중해서 읽어보던 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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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어린 마녀가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걸 다른 누군가에게 건넸다. 받아든 자는 마법사였는데 쥐고선 신기하다는 투로 뭐라 크게 말했지만 역시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밝으면서도 꽤 높게 올라가는 말투로 보아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이서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모든 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장소가 바뀌어있었다. 모든 게 굉장히 어지럽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동시에 날아다니는 것과 땅으로 떨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거기에 누군가가 달려드는 모습과 쓰러지고 일어나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서있었던 자들은 분명 둘이었는데 어느새 하나가 됐다. 그러더니 모든 게 땅 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호수가 보였다. 그리고

친구가 태어났어!”

눈을 뜬 퍼블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려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었고 어떻게 된 건지 손에 쥐고 있던 판은 부스러져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누워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후들거리는 팔로 땅을 짚자 물기를 머금은 흙들이 손가락 사이로 뭉쳐 들어왔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는 아마 정신을 잃었을 때 땅에 크게 부딪혔을 거라 짐작하고는 넘어가려고 했지만 도통 통증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무언가 한 번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강렬한 향들이 또다시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려 코를 막고 흐릿한 눈을 몇 번 비비며 눈앞이 다시 또렷해질 때까지 기다리자 천천히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살랑이며 시선을 쓸어간 붉은색에 정신이 번쩍 든 퍼블리가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여긴...?”
점점 또렷하게 들어오는 광경에 거의 눈 아래를 부여잡다시피 한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가려져 있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분명 흑기사가 쓴 대로 썼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떨어졌다. 왕궁에서 사는 공주고 왕궁이 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흑기사단과 함께 정할 때 집이라고 정해놨으니 범상치 않은 데라고는 생각했지만 범상치 않은 걸 뛰어넘어서 너무나 의외의 장소이자 어쩌면 평생 볼일이 없을지도 모를 장소였다. 눈을 깜빡여도 환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책으로 딱 하나만 그려져 있는 설명문을 봤을 뿐인데다 직접 본 건 색도 다른데다 온전한 형태로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환상으로 이 광경을 상상하긴 힘들었다. 순간 모든 색을 빼앗고 차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선을 차지하는 붉은 물결

장미정원에서 빵파티를 했어요?!”

와하하 웃는 흑기사의 모습이 잠깐 흐리게 보였다가 사라지는 환상을 본 퍼블리는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장미정원을 집으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빵파티를 하는 공주와 흑기사단의 범상치 않은 걸 넘어서 기함할 행위들은 이미 퍼블리의 이해 범위를 떠난지 오래였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천천히 널려있는 장미들 쪽으로 다가갔다. 대부분의 장미가 아직 완전히 피어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꽃봉오리가 다른 꽃들보다 비교도 안 되게 컸다. 그나마 작은 게 공 크기였는데 완전히 피어나면 얼마나 커질까 신기하게 바라본 퍼블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장미향에 뒤로 물러나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희미하게 보이는 얇은 선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 보고 있다가 고개를 뒤로 더 젖히고 눈을 크게 뜨자

......?!”
하늘이 깨져있었다.

말 그대로 깨져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퍼블리가 발견한 얇은 선은 하나가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보니 깨진 유리처럼 하늘에 금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금이 간 크기가 꽤나 컸는데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도 모자라 아예 뒤로 돌아 볼 정도여서 일어났을 때 바로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봤으면 큰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법 결계인가? 근데 이렇게 크고 투명한 마법 결계는 전혀 본 적이 없는데?”
손을 들어 더듬어 보면서 살펴보고 싶어도 너무 높았다. 정말 하늘에 유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높고 넓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장미에 가까이가 그 뒤로 몸을 숨겼다.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결계가 깨지냐고?!”
조사해본 결과로는 알 수 없는 마력이 여기로 날아들어 결계랑 부딪히는 바람에 깨졌다는데?”

아니 그건 나도 들었는데 대체 왜 결계가 깨지냐고? 애초에 이 결계가 깨지는 건 말이 안 돼! 현존하는 모든 마력들 중에서 이 결계를 깨뜨릴 수 있는 마력은 없어! 이거랑 같은 거 아닌 이상 없다고! 그럼 같은 마력인데 왜 알 수 없는 마력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장미들 사이의 틈으로 왕궁 마녀를 상징하는 옷을 입은 자들이 하늘의 금을 한 번 서로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며 시끄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다. 애초에 깨어날까?”
야 저 구멍 났을 때 여기 정원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땅 전체가 흔들렸거든? 그렇게 쉽게 깨어날까라면서 넘어갈 게 아니거든?”
그럼 윗분들이 이 결계 만들 때 진작 깨어났겠지. 이 결계 이루는 마력 자체가 저주로 인해 파생된 건데 이용할 때 바로 저주에 영향이 갔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결계에 대해 얘기하던 그들은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었는데 혹시 그들 뒤에 또 누가 있을까 가만히 살펴보던 퍼블리는 그 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자 발소리도 죽인 채 몰래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간간이 장미 뒤로 몸을 숨기며 그들의 대화도 듣던 퍼블리는 저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더욱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웬 굴뚝 딸린 집이었는데 장미와 덤불로만 이루어진 이 정원에서 매우 이질적이었다. 따로 잠금장치도 없는지 바로 문고리를 돌려 들어가던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는데 들어가기 전과는 다른 게 내내 무언가 걱정을 하던 마녀가 안심한 표정으로 나왔다는 점이었다.

거 봐.”
아 그래도 혹시나 싶은 거 있잖아.”
일단 우리가 지금 걱정해야할 건 그 마력이 무엇인지 알아보는데 투자할 우리들의 시간이야.”
그렇게 그들이 그 집에서 떠나고 목소리도 희미해져서 들려오지 않을 쯤 장미 뒤에서 나온 퍼블리는 그 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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