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 앉은 어린 마녀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 자리에 앉게 된 어린 마녀는 안타깝게도 내려오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 자리를 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아줄 테니 다칠 걱정 말고 뛰어내리라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마녀를 붙잡는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당신이 필요하다며 애원하는 자들도 있었고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앉게 된 이상 책임을 져야한다며 으름장을 놓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린 마녀는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엔 자리에 앉아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을 받아주려다가 가족들이 다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마녀는 높은 곳에 앉아 아래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보다 낮은 곳의 모든 걸 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찾아내 해결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마녀는 열심히 둘러본 덕에 금방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가족들은 무리하지 말라며 걱정했고 가족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은 괜찮다고 했지만 어린 마녀는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린 마녀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저를 붙잡았던 손들과 함께 달려갔고 가족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어린 마녀와 가족들이 힘을 합쳐 그 일을 해결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줄 알았던 어린 마녀는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습니다.

 

정작 바로 발밑은 보이지 않았다는 걸.

 

일을 해결한 후엔 어린 마녀는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남은 어른들은 전부 기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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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퍼블리는 아 하고 눈을 깜빡였다. 하도 많은 일이 있어서 그만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편지를 보고 나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확인해봐야겠다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많은 일이 있었다지만 다시 왕국으로 돌아왔는데도 계속 잊고 있었던 게 조금 머쓱한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까먹고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 난리를 겪었는데 뒷마당 생각할 시간이 있었겠어?”

이 말은 뒤에 붙여진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날 보러 오는 것도 까먹었는데 뒷마당 쯤이야란 말이 없었다면 평범한 위로의 말이 되었을 거다. 물론 아니카는 보러 오지 않았던 거에 서운한 게 아닌 그동안 못 놀렸으니 실컷 놀리려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말하는 거였다. 퍼블리 특유의 놀리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과 나중에 가서 부루퉁해지는 얼굴이 은근히 재밌었다. 그런 아니카의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 챈 퍼블리는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봤다고 너무 놀려대는 거 아니야?”
한동안 못 봤으니까 기회다 싶어 놀려대는 거지. 그럼 다른 내용으로 다양하게 놀려줄까?”

됐어...어차피 당하는 건 나잖아.”
제 못된 친구를 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제는 제가 앞장 서는 모습에 아니카가 웃음을 흘렸다. 퍼블리는 오랜만에 만나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는 모습에 말의 내용과 조금 피곤한 몸이 아니었다면 그동안의 여행은 꿈이고 계속 왕국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여행 중에 겪었던 일들이 실감 나지 않고 멀게 느껴진 것이리라.

그런데 아까 듣기로는 바다에 빠지고 나서 구출됐을 때 흑기사단의 배에서 하룻밤 지냈다면서? 그 마법사들은 어땠어?”
썩어가는 얼굴로도 순박하게 웃고 썩어가는 몸으로도 신나게 놀던 마법사들. 그들에게서 충격이라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들이 그렇게 몸이 저주받아 썩어갈 때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전혀 그런 낌새도 없었다. 게다가 바다에 갇혀있는 데도 우울해하지도 않았고 비관적이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신기하면서도 감탄스럽고 경이로우며 동경이 들 마법사들이었다.

엄청 유쾌하신 분들이었어.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로 자신에게 책을 건네던 브레이니가 어른거리고는 곧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품속에 넣어놓은 책을 꾹 누르자 같이 있던 둥근 유리병의 감촉도 함께 느껴졌다. 움찔 손을 떤 퍼블리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마저 붙였다.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많은 걸 들려줬던 분들이야.”

가만히 퍼블리의 말을 듣던 아니카는 꽤나 복잡해 보이는 퍼블리의 표정에 마찬가지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제 아빠에 관해서는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설익은 과일마냥 위태로워 보이는 제 친구는 알다가도 모를 데에 속해있었다. 나름대로 위로하고 무언가 힘을 보태주고 싶었지만 제가 알고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본인은 애초에 매달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저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이는 친구 앞에서 함부로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아니카가 깊은 공감을 느끼고 있었거나 아예 이해하길 완전히 포기해버렸다면 왕국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붙잡았을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어중간하게 서서 들어주거나 옆에 서있는 거 외엔 방법을 모르겠는 본인에 대한 답답함이 이 복잡함 속에 꽤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복잡함을 담으며 살펴보고 있던 둘은 뺨을 한 번 느리게 쓰다듬기 시작하는 냉기에 다시 시선을 눈앞으로 돌렸다.

...순간 누군가 겨울을 흉내 내려고 냉기를 뿜어대는 마법을 넓게 걸어놨나 싶었는데...이렇게 냉기가 심했어?”

아니. 너 오기 전까지는 내가 계속 왔었으니까 확실히 차이가 느껴져. 이렇게 냉기가 심한 건 처음이야.”

확실히 네가 편지에 썼던 것처럼 겨울에 느끼는 그런 느낌이 아닌데...”

어쩐지 꽤 익숙한 느낌에 의아해하던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나 열었었던 문고리를 돌려보자 늘 냈던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당연하게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해?”
아니 그냥...”

혹시나 싶은 마음을 확실히 눌러준 허전함과 실망을 안으며 다시 문을 닫은 퍼블리는 재촉하는 아니카를 따라 집의 뒤쪽으로 갔다.

여기서 냉기가 나오고 있어. 왜 이렇게 심해졌담?”

진짜 바위가 없어졌네?”
분명 바위로 막혀 있었던 곳이 바위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집과 다른 돌무더기와 나무 사이가 휑하게 뚫려있었다. 퍼블리는 처음 보는 빈공간이 신기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냉기 때문에 오돌토돌 올라오는 팔을 문지르며 가까이 다가가본 아니카는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다르지 않게 저를 밀어내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 안에 냉기를 내뿜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고 바위가 사라지고 냉기가 점점 더 많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걸 보면 이곳을 숨기고 막던 결계마법이 약해진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걸 보면 보통 마법이 아니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에 아니카가 불만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너희 아빠 능력 좋으신 건 아주 잘 알겠는데 너무 능력이 좋으셔서 탈이야. 이거 뭐 어떻게도 할 수 없는...퍼블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옆에 있던 퍼블리가 사라졌다.

 

...추운데...안 추워 아니.....?”

뻗었던 팔을 거두며 팔을 문지른 퍼블리가 제 친구를 부르며 돌아봤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앞을 보고 뒤 돌아도 아니카는 없었다. 당황스러워하며 뒤로 물러나려던 퍼블리의 발을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주위의 모든 걸 얼려버릴 듯 이 공간에 가득 자리 잡고 있는 냉기였다. 상당히 익숙한 느낌을 풍기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냉기는 정말 이대로 다시 나갈 거냐는 생각을 건져 올렸다. 천천히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퍼블리는 아니카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마치 밀어내려고 하는듯한 공간. 아니카는 밀어냈고 자기는 들여보낸 이 알 수 없는 공간. 마치 기회를 이대로 놓을 거냐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쉰 퍼블리는 살짝 안쪽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굳게 결심했던 시간에 비해 목적지는 멀지 않았는지 열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빽빽하게 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눈에 들어온 건

“...?”

온통 하얀색이다.

눈이 쌓인 것처럼 온통 하얀 게 발아래 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쩐지 눈이 부시는 것 같아 눈을 꾹 감고 문지르다가 두 번 깜빡였을 때 쯤 눈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태는 매우 익숙했다. 멍하니 바라보던 퍼블리는 순간 스쳐지나가는 기억에 잠시 숨을 멈췄다. 소란스러웠다가 앞문으로 들어오는 마녀에 조용해진 교실, 칠판 앞에 서고 나서 뭐라 말하다가 손을 들어 한 번 쓸어가듯 움직이자 반짝이던 금빛 가루, 그리고 반짝임이 끝나자 나타났던 새하얀

 

이게 바로 약새풀이다. 진짜는 너무 귀해서 가져올 순 없고 이렇게나마 환영영상 마법으로 담아 와서 보는 게 최선이다. 나중에 재료 쪽으로 가는 애들은 진절머리 나게 듣고 보게 될 풀이지만. 이 풀은 밸러니의 숲에서만 자라고 채집할 수 있는 풀이고 재배가 불가능한 풀이지.”

 

수업하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귀하다는 게 지금 제 발아래 땅을 전부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재배가 불가능하다던 그 풀이 지금 제 발아래, 제가 살고 있던 집 뒷마당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게 지금 제 눈앞에서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뭐라 할 말을 잃은 퍼블리가 그대로 주저앉아 새하얀 풀에 손을 뻗어 꺾어보고 바로 앞으로 가져온다. 분명 환영영상 마법으로 봤던 그 풀이다. 그대로 얼어버린 사고 앞으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아빠가 그렇게 집 밖으로 안 나가는데도 딱히 돈 걱정이 없었구나...”

이런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저도 웃긴지 어이없다는 듯 허허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리던 퍼블리는 그대로 손을 들어 머리를 헤집었다. 재배가 불가능하고 정화 이후로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풀. 태우면 냉기를 내뿜는 특이한 특성을 가진 풀. 그런 풀이 지금 이렇게 널려있었다. 저 베일 너머에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는 듯 했던 마법사의 과거가 새하얗게 뒤덮여졌다. 무언가 진실을 알게 되는 듯 싶었는데 또 다른 알 수 없는 게 튀어나왔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게!
“...아빠. 대체 뭐예요...”

마법사가 숨기는 건 굉장히 많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바로 사는 곳 뒤조차도 몰랐다. 그만큼 마법사는 철저하게 숨기고 철저하게 비밀을 가뒀다. 살랑 흔들리며 태우지도 않았는데 한꺼번에 모여 있으니 냉기를 가득 뿜어대는 약새풀이 다시 한 번 시선을 어지럽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궁금했지만 자세히 물어보고 파고들면 버려질지도 모른다며, 두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며 내심 불안하고 호기심만 가득했던 그 때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던 손이 멈췄다.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는 눈꺼풀이 내려와 한 번 꾹 감고 살살 올라가니 안정을 되찾고 멈췄다. 지금은 분명 떠났는데도 잔잔한 파도소리가 제 귓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새하얀 것들 사이에 떨어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책을 들어 올린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할 자는 없었다. 바람이 불자 살랑 흔들리는 새하얀 밭이 냉기를 다시 한 번 뿜으며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다시 눈을 감으며 앉아있던 퍼블리가 그대로 일어나며 눈을 떴다. 무언가의 결심이 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반쯤은 충동 또한 자리 잡고 있었을 터였다. 그대로 주머니에서 꺼낸 판 위에 그림같이 생긴 글을 지우고 그 때 봤었던 걸 그려 넣었다.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자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수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이는 반은 진심, 반은 충동을 담아 호수에다가 쥐고 있던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러자 첨벙 돌멩이가 저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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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어 올린 노란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늘 자리 잡은 웃는 얼굴. 속내를 알기 전에 막아버리다 못해 찔러 들어오는 검은 눈동자. 그 익숙함에 퍼블리는 한 발짝 물러나니 더 잘 보이는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분명 편지에는 여기 도착하자마자 나 보러오겠다고 마중부터 나오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마중부터 나오라고 하진 않았...”
다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퍼블리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됐건 간에 얘기는 했어도 거의 통보하고 떠난 거나 다름없었으니 한동안 못 본다는 데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준비를 위한 배려도 없었고 퍼블리가 없는 동안 학교 측에서 퍼블리의 행방을 물어볼 자는 아니카 밖에 없었으니 그동안의 부담도 있었을 게 분명했다. 다만 아니카는 놀라긴 했지만 한동안 떠난다는 데에 크게 충격을 먹고 있지도 않았고 당연히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퍼블리는 그런 아니카의 속을 모르고 있었다. 의외로 학교 측에서 퍼블리의 행방을 묻지 않았는데 이는 위에서 손을 쓴 보라색 머리 마녀 덕분이었지만 둘은 당연하게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행 갔다 온 보람은 있었어?”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는 이쯤에서 장난을 접어두기로 했는지 물러났다. 그리고 나온 말에 퍼블리는 다른 의미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아 들키지 않은 표정이지만 뭐라 얘기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난타가 추천해줘서 사고 갖고 간 책이 금서취급을 받고 있었고 감옥에 갇히고 탈옥한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얘기를 목표에 대한 소득은 둘째 치고 어떻게 여행담처럼 얘기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들지 않는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퍼블리를 빤히 쳐다본다.

거짓말해도 너는 다 티가 나요 퍼블리 어린이~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니 잠깐! 그렇게만 말하면 내가 꼭 지기도 전에 집게벌레 불러오는 꽃봉오리 같잖아!!”
거의 그렇더만 뭘!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잔소리도 부족하다 요 집게벌레도 필요 없이 바다로 뛰어들 꽃봉오리 녀석아!!”
둘이 서로를 향해 왁왁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날아 나가던 비둘기들도 다시 돌아와 주변을 둘러싸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니카도 그 옆에서 비둘기들과 함께 둘이 뭐라 소리치는 걸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소리치다가 숨이 차 멈추고 있을 때 다가온 아니카는 언제나의 웃는 얼굴로 퍼블리의 얼굴을 붙잡아 마주했다.

그래서 갔는데 감옥에 갇히고~ 바다에서 죽을 뻔하고~ 정작 아난타 선생님은 거기 마법사 아니었고~?”
그제야 아니카가 얌전히 기다려 전말들을 다 토해낼 때까지 듣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려 마주 오는 시선을 피했다. 그에 늘 웃던 아니카는 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고 그에 움찔 어깨를 떤 퍼블리가 힐끔 눈을 돌리며 눈치를 봤다.

안 혼내~ 애초에 어떻게 혼내야할지도 모르겠네. 혼낸다고 해서 네가 죽을 뻔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다시 돌아온 웃음엔 어딘가 한기가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그에 퍼블리는 차라리 혼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저 호호 웃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할 게 뭐가 있니~ 다짜고짜 금서라고 외쳐대고는 감옥으로 끌고 간 거기 마법사들 잘못이지~ 아니 금서 추천한 마법사도 잘못이 있으려나?”

한 번 서리기 시작한 한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부드러운 어투 속에서도 느껴지는 날카로움에 소름이 돋은 퍼블리가 팔을 쓸어내렸다.

일단 가서 꽤나 깊고 찝찝한 걸 보고 느끼게 됐는데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뭐라도 하고 싶긴 한데 상대가 너무 큰 느낌이야.”

너무 큰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큰 것 같은데?”
그래서 너무 막연해. 그리고 어쩌면...”
뒷말을 흐리며 조금 위를 바라보자 품속에 브레이니가 건넸던 책과 작년의 축제가 겹치면서 흘러갔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잘라낸 퍼블리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툭툭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이렇게 온 거야?”

나도 몰랐지~ 난 늘 그랬듯이 편지 전하러 온 거야. 그런데 우리 큰비둘기씨는 엄청 바쁜지 매일매일 찾아가도 어쩌다 한 번 만날 수 있을 정도라서 열심히 여기 왔는데 어머나 오늘 이후로 더 이상 편지 보낼 일이 없어졌네?”
내가 엄청나게 고급 배달부라고! 아주 중요한 거 아닌 이상 직접 움직일 일이 없는데 너희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편지 배달부로 쓰고 있던 거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배달하는 중간에서야 깨닫고 아이고 이미 불길을 건넜구나 싶은 지경이다 요 무서운 녀석들아!”
이번에 가만히 있던 전서구가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소리쳤다. 물론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익숙한 상황과 빠르게 다가오는 체념에 전서구는 아주 그냥 작정하고 대를 잇는다면서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아니카에게 그동안의 일을 듣는 퍼블리를 보며 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거지만 퍼블리는 확실히 특이했다. 마녀인 아니카가 바로 옆에 있으니 더 세세하게 느낄 정도였다. 여느 마녀와 다르다는 건 아빠가 누구인지 보면 마법사를 잘 알고 있고 몰라도 대화를 나눠보면 누구나 그럴 만 하네라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식으로 단정 지을 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마녀인데 마법사같은 아이. 하지만 그렇다고 마녀처럼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 점 또한 아빠가 마법사니 당연히 마법사 같은 행동이나 말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그랬다면 마녀라는 장미꽃 위에 호숫물이 묻어있다고 표현했겠지만 지금 보는 퍼블리를 뭐라 쉽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굳이 말하자면 퍼블리라는 틀에다가 마법사와 마녀를 모두 집어넣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전서구의 눈빛을 느꼈는지 퍼블리가 돌아봤고 아니카도 전서구를 바라봤다.

그렇게 열렬하게 안 봐도 금방 갈 거예요~”

아니 뭐...그런 의미로 본 건 아니지만...”

편지 보낼 일 있으면 보러 올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나 말고 저기 비둘기들 써!!”
호호 웃으며 전서구의 속을 뒤집어 논 아니카가 퍼블리의 손을 잡고 바로 뒤에 구경하기 위해 앉아있던 비둘기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딛으며 유유히 빠져나왔다. 손이 잡힌 채 뒤따라가던 퍼블리도 비둘기들에게서 빠져나오자 아니카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긴? 너희 집 뒷마당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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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날개야...삭신이야...전서구야...죽어나가는구나...”

고생했다며 날개로 제 스스로를 토닥거리는 전서구 등에서 얌전히 내려온 퍼블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비둘기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열린 천장 밖으로 나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만큼의 다른 비둘기들이 동시에 들어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들어와서 날개를 고르던 비둘기들이 숨을 몰아쉬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자신을 보듬는 전서구를 보고 구루룩 울기 시작했다. 그에 전서구가 아이고 이놈들이 와서 많이 힘들었냐며 위로의 말은 건네주지 못할망정 놀리고나 있냐고 하는 걸 보면 아마 퍼블리를 태우고 온 거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등에 누군가를 태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태운 당사자들 말고도 비둘기들 앞에서 한 적이 있는지 비둘기들이 계속해서 구루룩 울어댔고 그럴 때마다 서러워서 못 살겠다며 벌러덩 드러누우며 날개를 퍼덕이는 전서구의 모습에 퍼블리는 그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옆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보다 넌 이제 어쩔 거냐?”
? ?”
뭐긴? 누구 찾으러 거기 신성지대로 간 것 같은데 보아하니 만나지도 못하고 바다에서 자연 일체화 직전까지 갔다가 어쩌다가 걔네한테 구해진 것 같던데. 그럼 목적 달성은 못한 거잖아?”

물론 그렇다고 다시 신성지대로 간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저도 가만있지 않고 날 뛸 거라는 기세가 눈에서 눈으로 보일 정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 퍼블리는 다시 한 번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다른 데로 굴리기만 할 뿐 제대로 답하진 않았다.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전서구는 지금까지 열심히 토닥이던 날개를 늘어뜨리며 벌렁 드러누웠다.

일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피곤해서야 원...”
날개 주물러 줄까?”
됐다 임마!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말고!”
쉬이 넘어가지 않고 대답을 재촉하는 말에 퍼블리는 그대로 전서구 옆에 쭈그려 앉아 팔꿈치를 다른 손으로 받치며 턱을 괴고 구룩구룩 울면서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너머를 멍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따지자면 퍼블리는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아난타를 만나지도 못했고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빠의 행방을 알아낸 게 아니라 그저 있었으면 물어보고 싶었을 과거에 대한 이야기, 어떤 마법사였다는 다른 눈으로 본 모습이었다. 아빠가 어딨는지 아니면 어디로 갈만한 데가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왕국으로 돌아왔다. 왕국에서 퍼블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봄의 초반을 날려 보낸 학교를 다니면서 지나가버린, 축제가 끝난 후의 여름 끝 무렵과 가을, 새해가 오기 전의 겨울 때처럼 얌전히 집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마법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무언가 꽉 잡아 누르는 답답한 느낌이 목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만약 감옥에 갇혀있을 때 왕궁 마녀의 도움으로 탈출했었다면 이 답답함은 계속 됐을 터였다.

일단...모르겠어. 그냥 막막해 근데 뭐라고 해야하나...”

생각만큼 답답하진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답답함을 밀어내는 힘이 생긴 것 같았다. 다만 깨달았음에도 너무나 갑작스럽고 막연해서 현실감이 들지 않는 상태였다.

있지...내가 뭔가 할 수 있을까?”
잔잔한 호수 앞에서 돌멩이를 하나 들고 멈춰있는 어린아이. 이것만큼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잔잔한 호수는 멀리서 보면 그저 푸르면서 깨끗하고 조용할 뿐인데 직접 가까이서 보니 그 속은 까맣고 아득하며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 거기에 물벼락을 맞았는데도 무엇일지 몰랐다. 그저 막연했다. 알고는 있는데 너무나 깊고 크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런 호수 앞에서 돌멩이를 들고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어린아이. 던진 돌멩이가 그대로 저 호수 아래에서 가라앉을지 아니면 그 아래에서 얌전히 움직이고 있던 막연한 것들이 돌멩이를 맞고 호수 밖으로 뛰쳐나올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건 던져봐야 알 수 있는데 결과가 어떻든 아이는 받아들이기 힘들 게 뻔했다. 그저 가라앉을 뿐이라면 그나마 확실히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마저도 사라지게 되는 거였고 뛰쳐나온다면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제가 그것들이나 혹은 뛰쳐나올 때 튀는 물벼락에 전보다 더 세게 휩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이 마주하고 있을 뿐인 아이가 그런 결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넌 참 묘하다고 해야 하나...정말...뭐라 해야 하나? 마녀? 마법사? 이 둘을 통틀어서 말하는 단어는 왜 아직 없는 거야? 아무튼 지금 널 볼 때 넌 정말 마녀와 마법사 같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어.”

퍼블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마법사로 알아보는 왕국 밖의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덧붙여진 말을 보면 전서구의 의견은 다른 걸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뭐냐...어쨌든 둘 다 단순히 냉정하다 단순무식하다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순 없고 복잡하잖냐? 알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단순하게 보는 게 편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게 누구나의 심리거든. 어쨌든 처음 봤을 때 너는...완전 뒷일 생각 안 하고 돌진하는? 그런 꼬맹인 줄 알았어.”
물론 실제로도 그러는 덕에 덕분에 전용 편지 배달 역할을 맡게 됐다는 불평도 꺼내며 툴툴거렸다.

따지자면...그래! 용사양반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패치 그 양반보다는 무턱대고 가는 부분이 용사양반을 닮았으니 자식이어도 용사양반 자식이 아닌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전혀 딴판이고 닮았다는 생각 자체가 날아가버렸어...그 양반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말 자체도 안 꺼내고 그런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양반이었거든.”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만 같은 마법사였다. 물론 마법사나 마녀나 한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순 없지만 가장 크게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용사는 변한다기 보단 옆에서 가르치면 그저 행동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느낌이었지 이미지 자체가 변하진 않았다. 물론 퍼블리도 이미지 자체가 변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용사를 닮았다라고 길게 뿌리 내린 걸 한순간에, 단숨에 뽑아낸 기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마법사와 마녀는 당연하게도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없고 성격 자체도 매우 복잡했다. 하지만 어른이 됐을 때 그 다양한 것들까지 통틀어 하나로 굳어지기 마련이었다. 더 이상 자랄 게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전서구가 봐왔던 마법사와 마녀는 다양했지만 자세히 알기도 전에 제 일을 하러 갔었고 자세히 알게 된 자들은 이미 굳어있었다. 굳어진 면이 깨져서 의외로 몰랐던 부분이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다른 입을 통해 들은 거니 아, 그래? 수준으로 넘어갈 정도였다. 사실 그 자는 꽃보다 나무를 더 좋아한다 이런 수준의 변화였다. 전서구는 고개를 조금 들어 열심히 날아다니는 비둘기들을 바라봤다.

“...그래. 뭔지 알겠네! 정확히 말하자면 넌 지금 성장하고 있는 거야.”

성장?”
맨 처음 나를 만났을 때의 너를 떠올려봐. 내가 이렇게 똑같이 앞으로 어쩔 거냐고 묻는다면 무턱대고 신성지대 가자면서 날 올라타려고 했던 너는 무슨 말을 했을까?”
그 말에 퍼블리는 전서구를 처음 찾아가고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 그 때의 자신이었다면

“...다시 올라타서 모든 곳을 둘러보고 오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흐응~ 그래?”
포기할 수 없다면서 무턱대고 찾으러 다니자고 떼를 썼을지도 몰라요.”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대답하던 퍼블리는 옆에서 말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대로 멈추고는 전서구를 바라봤다. 전서구는 퍼블리를 보지 않고 퍼블리 옆을 보고 있었는데 퍼블리도 그에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래서 우리 근육이는 여기 도착하자마자 나 보러 안 오고 여기서 키 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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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하면 바다에 빠질 생각을 한 거야? 심지어 모래사장 있는 바닷가도 아니고 항구 역할 하는 덴데 장난 아니게 깊을 거 눈으로 봐도 알 거 아냐?!”
바로 앞에서 에워싸는 건 물론이고 철퇴를 들고 위협을 하는데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제대로 볼 새도 없었단 말야...”
그래서 바로 뒤에 바다로 뛰어들고? 아이고~ 아무리 책으로만 접했다고 하지만 바다가 을매나 위험한데 바로 뛰어들어!! 이제 바다 보러오는 마녀들 마다 다 뛰어들겠네!!”
그 뒤로 전서구는 장미부터 그러더니 왕국에 죄다 묶어놓으려는 집착이 무섭다며 풀어줘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바람과 잔소리에 고개를 깃털 사이로 묻어두던 퍼블리가 묶어놓으려는 집착이라는 말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

묶어놓으려는 집착이라니?”
아기들은 전부 장미에서 태어나자마자 성인이 되기 전까진 보호자의 동반이나 허락이 없으면 왕국 밖으로 못 나가는 마법을 받게 되니까! 그러고 보니 너 그 마법 어떻게 됐어?! 너 아직 성인 안 됐잖아!!”
난 그 마법도 오늘 처음 알았어! 일단 그건 아빠가 알고 있을 테니 아빠를 찾아서 물어보면 될 일이니까 왕국에서 묶어놓으려는 집착에 대해서 말해줘!”
전서구의 화려한 입담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흥미진진한 얘기처럼 화려하게 들려왔지만 내용은 화려하다기 보단 익살스러운 말투로 들어도 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실 마녀왕국은 지금처럼 굉장히 큰 영역을 차지하지도 않았고 도시들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었다는 건 예상범위였다. 뭐든 간에 시작부터 크게 자리 잡을 순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점점 시간과 그 안에서의 행동과 흐름이 크기를 불려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의 왕국은 꽤나 기묘한 형태였다.

물론 새로 들어오는 건 기존에 있던 것과 완전히 딴판이지만 그런 것들이 찰흙처럼 뭉치고 뭉쳐서 다양한 색으로 섞여야하는데 지금 왕국은 완전 따로따로 논다 이거지.”
따로따로 논다면...?”

제각각의 조각 케이크를 한데 나란히 모아놓는다고 생각해봐. 그게 지금 왕국의 모습이야. 일단 네가 실감 못하는 이유는...너 왕국 내의 다른 도시로 가본 적 없지?”
전서구의 말대로 퍼블리는 제가 살고 있던 데를 제외한 다른 도시로 가본 적이 없었다. 마법사는 다른 도시는 물론 제가 살고 있던 데에서도 돌아다니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다른 데로 가자고 했어도 퍼블리 본인 스스로가 거부했을 테였다. 왕국 내에서 살고 있던 곳에서 아니카를 다시 만난 이후로 퍼블리는 다른 도시를 방문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 양반 장난 아니게 빡빡하고 철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은둔생활 한 번 참 대단하네! 설마 마녀왕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다른 데 가볼 생각도 안 하다니! 어쨌든 말야...지금 왕국은 그렇게 제각각인 조각 케이크들을 모아놓고 학교와 왕궁 마녀를 통해 장미정원으로 가서 아이를 받거나 왕궁의 도움이 필요한 기타등등의 일로 실처럼 꿰어놓은 후에 마녀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천을 덮어놓은 상태야.”
마녀라고 해도 그들이 사는 방식은 꽤나 차이가 있었다. 비슷한 자들을 한 데 모아 도시라는 구역을 만들고 그 도시를 또 모아 기존의 왕국보다 훨씬 더 큰 왕국을 만들었다.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욕구 혹은 편리함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누구보다 먼저 전부 차지한 후 꼭 쥔 채 왕궁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주면서 그들이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떠나지 못한 이들 위로 느끼지 못할 얇고 거대한 천을 씌웠다. 그 천의 이름은 전서구가 말했듯이 마녀왕국이다.

그게 먹이 있을 밭처럼 누르스름한 거나 녹색 나무 사이의 빨간 것들이나 비가 오나 안 오나 하늘이 시커멓게 회색인지 아니면 파란지에나 관심 있을 우리 비둘기들 눈에도 보일 정도면 꽤나 집요하고 심각하다 이거지.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마녀들은 모를 정도면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이 말 만큼 적당한 게 없어. 시대 흐름을 잘 타다 못해 제 집의 물주전자처럼 쓰고 있다 이거야.”

시대 흐름이라면...”
정화 때 말이야.”
정말이지 마법인데 더 마법 같은 단어다. 정치, 정화. 이 둘은 지금 뗄 레야 도저히 뗄 수가 없었다. 정화 이후부터 지금의 정치가 시작되었으니 당연하지만 아무리 커다란 사건이자 위대한 일이라 해도 그저 책에 적힌 글과 가르쳐주는 말로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제대로 느낀다면 그건 바로 당사자들일 텐데 그들의 모든 삶을 일일이 적어놓을 순 없으니 그마저도 간결하게 줄여져 책과 목소리에 담겼다. 물론 그 중에 아, 그렇구나 싶은 정도로 받아들인 사람은 정화 이후로 지금의 정치로 인해 이루어진 상황 또한 아, 그렇구나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퍼블리는 아니었다. 아빠는 정화 때 참여한 마법사라는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 아빠를 찾기 위해 신성지대를 방문한 퍼블리는 단순히 책으로 인해, 그 정치라는 것 때문에 다짜고짜 감옥에 갇히게 됐고 포위하는 마법사와 철퇴로 위협을 받았으며 처음 보는 바다에서 거의 죽을 뻔 하다가 겨우 목숨을 구하고 썩은 몸으로 땅도 밟지 못한 채 바다에 고립된 아빠처럼 마찬가지로 정화 때 참가했던 마법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받게 됐다. 그런데 이것들을, 갇히고 위협당하고 죽을 뻔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듣게 된 걸 어떻게 정치 그 한 단어로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건 절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왜 정치라는 말로 다 통하는 걸까?”
왜긴? 정치를 다루는 자들의 등을 받쳐주는 머릿수가 많으니까지. 그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저렇게 마녀들을 집착적으로 묶어놓고 있잖아? 정치 때문에 피해 받은 마녀나 마법사들은 그들을 무너뜨리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도움 때문에 피해 받은 자들 보다 더 많은 자들이 난리법석 피우면서 일어나는 거지.”

전서구의 말에 퍼블리는 다시 고개를 깃털로 파묻었다. 전서구가 꽤나 중요한 걸 가르쳐줬지만 거기에 담긴 현실이 워낙 더러우니 기분도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득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이란 말은 마법은 늘 곁에 존재하고 현실에도 당연히 존재하니 현실보다 더 현실이란 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무엇보다 이 현실을 책상 뒤집는 것처럼 바꾸려면 마녀왕국에 사는 모든 마녀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그 위에서 정치를 다루는 왕궁 마녀를 설득하거나 바꾸는 게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일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가 조용히 눈을 떴다.

어후! 드디어 다 왔네!”
새해가 시작된 겨울에서 떠나고 한창 꽃잎이 날리는 봄에 돌아오게 된 곳.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넓은 땅. 고개를 든 퍼블리가 왕국을 한 눈에 담았고 처음으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왕국은 무척 낯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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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들은 퍼블리가 아무런 말없이 털썩 주저앉자 전서구를 콕콕 찌르고 있던 기사들은 밥을 안 먹어서 기운이 없는 거라 생각했는지 손질하고 구운 생선과 음료수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에 거절하려던 퍼블리는 배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에 얌전히 받아들었다. 슬쩍 둘러보니 전서구에게 신경이 쏠린 기사들 외에 다른 기사들은 모두 난간으로 가 물고기를 낚아 올리거나 전서구처럼 갑판 위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거나 서로 작은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톡톡 두드리거나 던지면서 놀고 있었다. 제각기 따로 노는 그들의 모습은 꽤나 자유로워보였다. 마지막 생선 한 조각을 음료수와 함께 넘긴 퍼블리는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건 무슨 놀이에요?”
홀짝 맞추기!”
떨어지는 돌멩이 잡아채서 성공한 게 홀인지 짝인지 맞추기!”
손에서 놓쳐서 떨어지는 돌멩이 수로 손 안에 든 게 홀인지 짝인지는 훤히 보였다. 그럼에도 놀이를 즐기는 자들은 돌멩이를 쥐는 손에만 집중하고 홀과 짝을 외쳐대며 맞히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걸 계속 반복했다. 그 때마다 즐거운지 공터로 뛰어나온 아이들처럼 까르륵 웃는 모습들이 어쩌면 썩어가는 모습을 누를 정도로 순수하고 보기 좋아서 이렇게 서슴없이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 퍼블리는 곧이어 저도 끼기 시작했다.

...어으..뭐여...?”

일어났다!”

일어났다 일어났어!”
해가 가장 높이 올라갔다가 조금 아래로 다시 내려왔을 때 쯤 전서구가 일어났는지 날개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날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익숙해졌을 때 쯤 날개를 거둔 전서구가 저를 내려다보는 흑기사단들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여?! 여기 어디...내가 찾아왔었지 참...”
열심히 부리로 머리를 쪼아대더니!”

홀랑 까먹었네!”
까먹었대, 까먹었대!”
아이고 정신 사나워, 요 문드러진 놈들아!!”
곁에 있던 자들뿐만 아니라 놀고 있거나 낚시를 하고 있던 자들도 우르르 몰려와 한마디씩 말을 꺼내니 금방 시끄러워졌고 방금 막 자고 일어난 와중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니 전서구는 졸린 눈을 부릅뜨며 정신없다고 소리치기 시작했지만 특유의 입담은 어디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고 그에 더 신이 났는지 한마디가 두세마디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째 올 때 마다 조용해지는 법이 없어!”

그게 우리들의 매력이지!”
매력이 시끄러워서 다 도망갔다 요놈들아!!”
홀짝 맞추기 놀이에 집중하던 퍼블리가 멀리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전서구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기사단들에게 시달려있는 전서구에게 다가가려다가 뒤에서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돌아보니

으고...”

...브레이니씨?”
밤에 비해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던 브레이니가 얌전히 서있었다. 손에는 상당히 손때가 많이 묻은 낡은 책이 하나 들려있었는데 모습이 꽤나 익숙했다. 퍼블리가 책에 대해 뭐라 묻기도 전에 브레이니가 책을 건넸다.

이건...”
우리 이름...내가 직접...쓴 거...”
이걸 왜 저에게...”
얼떨결에 받아든 퍼블리가 의아함을 담아 올려다보자 느릿한 대답이 들려온다.

우리...지금...갈 수 없다...”

저 말은 마녀왕국은 물론 땅을 밟을 수도 없는 본인들의 처지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그러니...축제 때...메르시...보게 된다면...전해달라...”
그 말에 퍼블리는 작년의 축제를 떠올렸다. 잔뜩 빵을 얻어온 첫째 날, 마법사와 함께 축제를 즐겼던 둘째 날, 그리고...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제 손목에 걸린 팔찌를 쓰다듬었다. 장식으로 달린 돌조각의 얼음꽃무늬가 차갑게 정신을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축제 때 메르시를 보게 된다면 전해달라는 그 말에 퍼블리는 입을 달싹이다가 길게 미소를 지었다.

. 꼭 전해줄게요!”
늘 손에 소중히 쥐어왔을 텐데 자그마한 희망을 걸며 넘겨주는 자에게 차마 축제 때 공주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었다.

 

어여 뛰어와라 요 행동파 사고뭉치야!!”

재촉하는 전서구의 외침에 천천히 걸어오던 퍼블리가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퍼뜩 뛰어오라는 재촉이 덧붙여진 후에야 뛰어오는 모습이 얄미웠는지 자기 전에도 많이 두드렸던 머리를 또다시 부리로 툭툭 두드린 전서구가 한숨을 쉬며 몸을 낮췄다.

“...그 아빠에 그 애로구만.”

아하하...”

웃지마! 내가 다시는 등에 마녀고 마법사고 안 태운다고 날 타고 다니던 녀석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는데!!”
원통해하던 말던 퍼블리를 태우기로 결정한 건 전서구 본인이었다. 퍼블리의 주머니 속에 있는 이동 마법 물품의 존재는 끝까지 전서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고녀석 안전성은 보장하니까 떨어질 걱정 마라!”

쌰랍!!!”

그 외침과 동시에 전서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보다 큰 흑기사와 어느 순간 눈높이가 같아지더니 이제는 내려다볼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잘 가라!”

나중에 또 놀러와!”
홀짝 말고 다른 놀이도 많으니 나중에 놀러 올 때 같이 해!”
이제는 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흑기사단들이 전부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 퍼블리는 그들의 인사에 맞춰 손을 흔들었고 품에 안은 책을 꼭 쥐었다. 전서구는 큰 몸집에 비해 상당히 빠르게 날았고 그들의 얼굴은 물론 배까지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배가 완전히 점으로 보일 때 쯤 퍼블리는 많은 걸 받게 된 배를 뒤로하고 날아오는 바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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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조용해진 주위에 퍼블리는 당황한 채로 굳어있었다. 그리움과 슬픔이 가득 찬 눈빛들이 퍼블리에게, 정확히는 퍼블리가 들고 있는 판에 쏠리자 얼음꽃밭 위에 선 다람쥐가 된 기분을 느낀 퍼블리는 화제를 돌리고자 입을 열었는데

..그럼...”
아이고 이 화상아!!!”
! 무언가 무거운 게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배가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먼지들이 뿌옇게 솟아오르다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퍼블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들어오는 먼지에 콜록거리며 연신 기침을 하다가 갑자기 머리 위로 들이닥친 충격에 휘청거리지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네가 잘 들어갔나 싶어 한 번 근처 빙 둘러 날아댕기다가 바다 위에서 날아댕기는 갈매기들이 웬 어린 녀석이 겁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여기서 끼룩! 저기서 끼룩! 온 동네서 끼룩끼룩 울어대질 않나! 사과 씹으면서 아이고 어린 녀석이 으른들 말 안 듣고 빠졌구나 했는데 소식 비둘기가 와서 웬 하늘담은 흰머리 마녀가 흑기사단 배에 타고 있단 얘기 듣고 사과가 흩날리고 아이고가 곡소리로 변했다 이 녀석아!!”

목소리는 퍼블리에게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머리를 아프게 연신 두드리는 것도 손을 말아 쥔 주먹도 아니었다. 밀어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손에 닿는 건 말랑한 살이 아닌 부드럽고 간지러운 깃털이었다. 퍼블리는 머리를 숙인 채 계속해서 밀어내며 소리쳤다.

알았어! 진정해!”
알았어는 뭘 알았어고! 진정하긴 뭘 진정해! 머리를 열심히 두드려놔야 다음부턴 아~ 이러면 머리 아픈 수준으로 안 끝나고 그냥 깩하니 죽겠구나~ 깨닫겠지!!”
사실 전서구는 사과를 씹으며 갈매기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을 때 쎄한 느낌이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내리 눌렀었다. 호기심 많은 어린 애들은 널리고 널렸고 밖에서 온 여행자는 신성지대에서 꽤 멀리 떨어져서 그대로 쭉 가보지 않는 이상 바다가 있는 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신성 측은 신성지대 뿐만 아니라 그 근처 땅에서 바다로 갈 수 있는 길목을 모두 막아놨기 때문이다. 그 부분이 나름대로 안심을 준다는 게 참 묘했지만 어찌됐든 퍼블리가 바다에 대해 알 수 있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전서구님! 전서구님!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은 마녀가 흑기사단의 배에 있었어요!”

.....?”
머리카락 색이 굉장히 예뻤어요! 하얀 눈이 하늘을 담은 것처럼 정말 예뻤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전서구는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나도 생각이...!”
생각 있긴 개뿔이!! 생각 있는 녀석은 바다에 안 뛰어들지 인마!!! 그리고 지금 당장은 이렇게 살았으니 망정이지 그 다음은 어쩌고?! 어떻게 바다에서 빠져나올려고?! 또 바다에 뛰어들려고?!!”
방법 있...아야야야야!!!”
깊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 말고 행동도 하지 마!!!”
그렇게 분노의 부리 찍기 공격은 열 번 정도 더 이어지다가 전서구가 지쳐 떨어져 헉헉 댈 때 끝이 났다. 퍼블리는 욱씬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전서구를 올려다봤다.

돌아갈 방법 있어.”
...안 돼. 안 헉...믿어. 그냥 내가 큰맘 먹고 태워...하이고 힘들어라...안 되겠다. 나 잠깐 쉰다...”

그렇게 말하고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향하던 배는 급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도릉도릉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안정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멀뚱히 구경하던 흑기사단들은 전서구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대거나 깃털을 잡고 흔들어보지만 꽤나 피곤했는지 몇 번 뒤척거리는 거 외엔 일어날 기미는 안 보였다.

전서구랑도 아는 사이였어?”
신성지대 가는 길을 가르쳐준 게 전서구였어요.”
이렇게 넓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며 찾아다닌 걸 보면 전서구가 퍼블리 걱정을 많이 했다는 얘기였다. 미안한 마음에 전서구의 배를 툭툭 두드리자 꿈속에서도 부리 공격을 하며 잔소리를 하고 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브레이니가 자리를 뜨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흑기사는 전서구와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전서구 저 친구 덕분에 우리가 대충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고 있지. 소식 비둘기가 이 먼 바다까지 오는 것도 전서구가 보내는 거야. 갈매기들도 전서구한테 부탁받아서 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여러분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신성 기사한테 들었는데 본인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요.”
묵묵히 퍼블리의 말을 듣고 있던 흑기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젠가 전서구에게 들었던 말.

왜긴. 그놈의 정치 때문이지!”

정치.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단어였다. 그들이 이렇게 바다로 내몰린 것도 메르시와 연락할 수 없게 된 것도 전부 상황 때문이었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는 저 단어밖에 없었다. 하지만

글쎄. 우리도 모르겠다.”

그게 이유가 될 순 없었다. 흑기사는 퍼블리에게 정치 때문이라는 단어 대신 모른다는 대답을 했고 어떤 대답을 듣던 간에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퍼블리의 몫이었다. 대답을 들은 퍼블리는 어쩐지 멍한 얼굴로 흑기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흑기사는 팔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은 채 뒤로 몸을 기대며 말을 덧붙였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지! 세상엔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크게 보고 싶어도 모르는 어른들 천지야! 우리가 아는 거라곤 눈 떠보니 이런 모습이었고 일에 휘말려서 어찌어찌 해서 바다로 오게 됐다는 거야!”

퍼블리는 흑기사의 말을 듣고 연신 모른다 모른다라며 중얼거렸다. 그런 퍼블리를 보고 손을 들었던 흑기사는 어쩐지 깊이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에 도로 손을 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퍼블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흑기사와 눈을 마주했다.

“...어른들이라고 해도 모르는 게 있어요?”
그럼! 오히려 애들보다 모르는 게 많을 걸? 그건 까먹은 거려나? 어쨌든 모든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까 모른다고 대답하는 거지.”
그러면...”

한순간 멈춘 퍼블리가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고는 힘겹게 입을 뗀다.

물어보는 거, 그 자체는...뭐든 간에 물어보는 건 상관없는 거죠...?”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머뭇거리며 묻는 퍼블리의 말에 흑기사는 한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며 유일하게 접지 않은 엄지손가락을 옆으로 튕겼다.

마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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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는 멍한 머리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평소에 자던 시간보다 훨씬 더 늦게 누웠지만 가슴속에 가득 찬 심란함은 잠을 방해하기까지 이르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눈만 감은 채로 밤을 지새운 퍼블리는 눈꺼풀 위로 들어오는 햇빛에 한숨을 쉬었고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들에 결국 일어났다. 문을 여니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던 흑기사단들이 기운 좋게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몇몇은 이리저리 갑판을 밟아대는 발들 사이에서 여전히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뛰어다니던 자들은 난간 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저마다 무언가의 기대감이 눈에 가득 담겼다. 퍼블리가 그들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서 뭘하는지 물어볼까 싶은 순간 요란하게 떠드는 말소리들 사이로 푸드득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다아아아!!”
어서와, 어서와!”

, ! 나 먼저 볼래!!”
작은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그들 머리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와 손들이 비둘기를 향했고 불쑥불쑥 올라오는 손들에 비둘기는 한동안 빙글빙글 돌고 있다가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난간으로 날아갔지만 그대로 우르르 따라오는 바람에 의미가 없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비둘기의 머리가 퍼블리를 향한 다음에 멈추고는 그대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에 퍼블리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비둘기가 앉기 좋게 검지를 조금 위로 올렸고 비둘기는 사뿐히 퍼블리의 손가락을 그러쥐며 올라섰다. 비둘기 다리에는 회색 종이가 묶여있었다.

소식 비둘기?”
소식! 소식!”
오늘은 비둘기다 비둘기!”
우르르 퍼블리 쪽으로 몰려든 그들은 이번엔 섣불리 손을 뻗진 않았다. 어쩐지 제가 종이를 풀어야할 것 같은 상황에 조심스럽게 종이를 잡아당기자 스르륵 부드럽게 풀리자마자 비둘기가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떠나는 비둘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던 그들은 다시 퍼블리의 손에 들린 회색 종이로 시선을 집중했다.

오늘은 비둘기야?”

언제 왔는지 흑기사가 걸어오며 회색 종이를 보고 말했다. 이 회색 종이는 소식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그 날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며 보게 된 큰일이나 다른 소소한 일들이 담겨있는 종이였다. 어딘가의 숲에 불이 붙었다던지 아니면 어떤 마녀나 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냈다는 게 가장 큰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다는 갈매기들이 주로 편지를 나르지만 가끔가다가 비둘기들도 오곤 하지. 덕분에 우리도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거야.”

, 그럼 책도...”

이렇게 소식을 전달하는 비둘기가 있다면 물건을 전달하는 비둘기도 있었다. 브레이니는 물건을 전달하는 비둘기를 통해 제가 쓴 책의 사본을 비둘기에게 맡기고 마녀왕국에서 책으로 낼 수 있게 됐다. 어찌됐든 복사를 할 수 있으면 책들을 만들 수 있었으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여기 소식 받아라!”
계속 배에서만 생활하는 그들에겐 땅 위의 얘기들은 큰 즐거움이었다. 회색 종이가 펼쳐지자 비둘기들이 눈에 담은 풍경들이 두둥실 떠올라 그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함께 그 풍경들을 보고 있는 퍼블리를 보고 있던 흑기사가 물었다.

그보다 넌 어떻게 돌아갈 거야?”
“...?”
한 박자 늦게 반응한 퍼블리가 눈을 깜빡이며 흑기사를 바라본다.

이 배엔 따로 조각배가 없어.”
저번에 타고 땅 밟으려다가 망가졌지!”
걔네가 싹 다 부숴버렸어!”

우리야 데려다주고 싶긴 하지만 제대로 배를 댈 만한 데는 홀리 녀석이 세운 도시밖에 없는데 우리가 가까이만 가도 마법을 날려대니 원...”

사실 퍼블리는 다시 땅으로 가야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퍼블리는 갑자기 닥쳐온 막막한 현실에 한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애초에 저가 타고 갈만한 작은 배가 있다 해도 애초에 배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도 몰랐다. 바다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헤엄쳐서 간다는 건 제 목숨으로 배운 바가 있으니 방법으로 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보라색의 물결이 흐리게 반짝이고 사라졌다. 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 퍼블리는 혹시나 바다에 빠졌을 때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저 넓은 바다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온전히 제 손에 잡히는 느낌에 안도했다.

! 이동판이잖아?”
그거 막막 슝슝! 이동하는 그거!”
감옥에 있을 때 만난 왕궁 마녀가 주고 간 이동 마법 물품. 비록 탈출은 유리병의 몫이었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제 모습을 뽐내니 안도를 넘어서 매우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르는 왕궁 마녀가 정말 고마웠다.

이건 바뀐 게 없네.”

우리 이거 써서 메르시네 놀러갔었지!”
빵파티도 하고 말이야!”

공주의 집이라면 왕궁 밖에 더 있겠는가. 왕궁으로 놀러가고 왕궁에서 빵파티도 했다는 말들에 퍼블리는 아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물론이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거도 왕궁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걸 다 아셔요?”
이 판 자체가 이동 마법이 걸린 거고 도착할 장소는 그 위에 쓰는 거라서 다른 데 가고 싶으면 지우고 새로 쓰는 방식이야. 물론 이 판이 이동 가능한 목록에 있는 곳이어야 하지만.”
판 위에 적힌 그림처럼 보이는 글들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흑기사의 말에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던 퍼블리가 물어본다.

그럼 여러분은 그 도착할 장소를 뭐라고 썼어요?”
.”

이동판을 쓸어보던 흑기사가 짧게 한 단어를 툭 내놓았다. 순간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집이라고 썼지.”
판 위를 쓸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짧게 그려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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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짧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에 아난타가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가 뒤에 나온 대답에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녀석이 꽤나 비싼 값에 당신 손을 빌렸나보군. 아니면...”

창문에 기대면서 컵을 툭툭 두드리던 마법사가 한마디 덧붙인다.

값진 것을 넘겨줬거나.”
마법사의 말이 끝난 뒤에도 아난타는 그저 미소만 머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한 모금 물을 넘기고는 다시 질문을 꺼낸다.

퍼블리가 당신에게 무엇을 물어봤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알고 계셨나요?”
그 애가 왕국을 나와서 신성지대로 갈만한 이유가 당신을 찾아가는 거 외엔 없으니까.”
마법사의 말들을 듣고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늘을 조금 머금은 구름 같은 학생이 떠오른다. 실수로 사고를 일으킬 뻔한 점심시간 때부터 보게 됐고 한 번 눈에 들어온 이후로도 굉장히 눈에 많이 들어오고 기억에 깊이 박힌 학생이었다. 굉장히 밝고 적극적인데다 상당한 호감을 주는 유형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는 게 주로 몸으로 많이 움직일 때인지 신체를 단련하는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들마다 칭찬 일색이었다. 여기까지 봤을 땐 확실히 다른 학생들보다 눈에 많이 들어올 학생이구나라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널리 있는 학생들에 비해 적을 뿐이지 반마다 한두 명씩 있는 유형이었기에 학교에 있을 때만 익숙하지 기억에 깊이 박힐 정도는 아니었다. 퍼블리가 아난타의 기억에 깊이 박히게 된 이유는 그런 모습들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무언가에 대해 물어볼 때 굉장히 머뭇거리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 무언가는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그 마법사가 누군지 잘 알게 되었을 때 퍼블리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상반된 모습과 마법사에 관한 질문, 친구와 하던 대화를 듣고 도서번호를 건네주게 된 이후로 아난타는 퍼블리를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됐다. 퍼블리는 다른 학생들과 여느 반에 있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곁에 있는 건 아니카 뿐이었다. 다른 학생들과의 교류가 많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고립되는 거냐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누구를 더 친하게 여기고 누구에게 더 기대고 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둘이 다른 학생들보다 서로가 더 친한 이유는 그저 둘만의 이야기니 거기까지만 알 수 있었고 그 이상으로 더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다만 퍼블리가 물어봤던 마법사가 정화 때의 마법사였으니 아니카도 알아도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퍼블리와 아니카가 떨어지는 때가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마주칠 때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고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마무리됐던 축제날...

퍼블리 학생이 무엇을 물어봤는지 말할 순 있지만...직접 듣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법사에 대해 물어보던 퍼블리와 퍼블리가 물어보던 걸 묻는 마법사. 이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당사자인 둘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예전에 직접 만났을 때가 숲으로 들어가기 일주일 전쯤이었죠? 용사군은 우리를 보자마자 처음 보는 마법사들이라면서 달려왔었고 우리 어깨에 뭉친 힘을 좀 빼줬지요. 용사군을 데리러온 당신과도 몇 번 얼굴을 마주치긴 했었지만 바로 앞에 커다란 전쟁터를 두고 있었으니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죠. 그래서 이름도 몰랐었지요.”
머뭇거리면서도 패치라는 마법사를 아느냐고 물어봤던 굉장히 절박한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은 모를 수가 없었던 마법사들이었다. 많은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그들만큼 잊기 힘든 얼굴도 없을 터였다. 아난타는 미안함이 담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참에 제대로 통성명을 하죠. 전 아난타예요.”

패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여유는 가지는 게 좋아요.”
이미 당신을 알고 있고 당신도 나를 알고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게다가 지금은 여유를 가질 상황은 아니니 말일세.”

그에 아난타는 창문에 기대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그 때 가지지 못했던 여유가 미래에서 엄청나게 꼬여올 줄은 몰랐지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아난타는 다시 창문에서 몸을 떼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에 대해 좀 더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제가 한 가지 부탁을 할 생각이거든요. 저에 대해 잘 아는 자만 할 수 있는 부탁이에요.”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아난타는 개의치 않고 손가락으로 창문을 여러 번 툭툭 두드리며 잔잔하게 부탁을 꺼낸다.

잠꾸러기들을 깨워달라는 부탁이에요.”
그에 마법사가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날카로운 웃음을 지었다.

나쁘지 않은 부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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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지...누가 보호자를 넘어서 아빠 엄마 사이 아니랄까봐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점을 닮아버리면 어떡합니까.”
속으로도 많이 앓는 듯한 말과 그 뒤를 잇는 한숨이 땅을 꺼뜨릴 만큼 매우 무겁게 내려앉는다. 늘 짓던 웃음까지 내려놓으며 눈썹을 찌푸리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눈썹 바로 밑에서부터 얼굴을 쓸어내린다. 바로 방금 전 들어온 보고에 치트는 듣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모드양? 다시 말해주겠어요?”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그 때 상황을 자세히...”
철퇴의 프라이드한테 짐을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상세한 설명치곤 지나치게 간결했지만 솔직히 이 말 외에는 딱히 나올 말도 없었기 때문에 모드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보고를 듣는 치트가 직접 봤어도,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봐도 기사단장에게 짐을 던지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퍼블리를 봤을 터였다. 퍼블리는 바다가 얼마나 깊고 위험한지 모르고 치트와 모드는 그걸 모를 테니 둘의 눈엔 그저 자살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상황이었고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대로 바다에 맨 몸으로 뛰어들었는지 당사자에게 묻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문제였다. 사실 치트는 딱히 퍼블리를 건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에 왕국에서 나가는 걸 보고 모드를 시켜 왕국으로 보낸 후 미성년자 보호 마법을 걸고 어느 정도 자신의 상황이 정리가 되고 여유가 생기는 때가 마침 퍼블리가 성인이 되는 때랑 맞게 됐으니 왕국에서 얌전히 살게 한 후 데려올 생각이었다. 처음에 감옥에 갇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도 당황했었고 상황을 듣고 과연 신성지대라며 넘길 수 있었지만 바다에 스스로 빠진 건 과연이라고 감탄하고 넘길만한 게 못 됐다. 무엇보다

“...우리 패치한테 뭐라 말해야 함까...”
마법사가 듣는다면 단순히 당황이나 어이없다는 반응에서 그칠 리가 없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더 심각해질 미래가 바로 코앞에 와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본인의 죽음까지 불사하며 난리를 피울 게 뻔했다. 한숨이 끊임없이 나올 기세라 입을 꾹 다문 치트는 모드에게 바다 주위를 계속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죽었다고 단정하고 싶진 않았으니 그저 퍼블리가 운 좋게 뭍으로 밀려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쪽의 깊은 바다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퍼블리는 지금 흑기사단의 배에 안전하게 있었지만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아아...지금 당장 보고 싶지만 지금 보게 되면 저는 표정관리도 못할 검다...당신은 분명히 퍼블리에 대해 물어볼 테고, 아니면 그 때 못 던졌던 의자 먼저 던질 수도 있겠네요.”

감시하는 영상구를 달고 싶었지만 지금 마법사를 가둬두고 있는 집은 함부로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만큼 정교하게 만든 집이자 감옥이었고 다시는 할 게 못 될 거였다. 그 집 외엔 마법사를 가둘 수 있는 건 없고 마법사가 아니고선 누구도 그 집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치트가 그 집에 마법사를 두고선 오래 머물지 않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대신 자주 찾아가는 편이었지만 오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그 집을 나오게 하는 즉시 모드가 곁에 없는 치트는 죽은 목숨이 될 게 눈에 훤했다.

왜 또 한숨을 찍찍 뱉냐?”
한숨을 찍찍 뱉는 건 또 뭡니까? 일은 제대로 하고 온 검까? 아니 선생님 일은 제대로 하고 왔겠죠. 퍼블리가 신성지대로 갔던 건 당신을 찾으러 간 게 확실할 테니까. 참 수업을 잘 가르쳤나 봄다?”
그에 아난타가 와락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본다.

거 시X 내가 기억 못하는 거 잡고 시비터냐? 애초에 네놈 새끼가 날 재우고 보낸 거잖냐? 그렇게 따질 거면 마침 왕국에서 살고 있던 네 충실한 부하새끼한테 선생질 시켰어야지. 난 처음부터 싫다고 했는데 다짜고짜 그 XX같던 안경 씌운 새끼가...”
이대로 앞에 뒀다간 계속해서 욕을 뱉을 게 뻔한 아난타를 밖으로 내쫓은 치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주가 괜히 저주가 아니라고 증명하는지 원래의 인격과는 전혀 딴판인 저 인격은 내놓는 말 전부 천박한 욕들뿐이니 대화를 나누는 게 손해였다. 하지만 일은 정말 손색없을 정도로 잘하는 편이니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치트는 원래의 아난타와 대화했던 때를 떠올렸다. 쨍하게 붉었던 머리카락이 검게 변하고 누구 하나 심심해서 물어뜯을 것 같던 눈이 상대를 깊이 꿰뚫고 배려하는 눈으로 변했을 땐 완전히 다른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을 때 성격은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원래 모습으로 두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난타가 지닌 힘과 경험은 물론이고 통찰력의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저주인 쪽은 파악하고 파고들어 공격하려고 하지만 단순해서 알기 쉬웠다. 거래를 했을 때 고맙다고 하며 저를 꿰뚫어 보던 눈을 떠올리며 치트는 웃음을 머금은 채 턱을 괴고 수정구를 툭툭 치며 모드의 연락을 기다렸다.

 

X같은 새끼는 아주 나를 지 봉으로 알아!!”
다채롭게 쏟아지는 욕들에 지나가던 자들은 안 봐도 누군지 안다는 얼굴로 욕이 들려오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지금 곁에 얼쩡거렸다가 걸리면 욕을 집중적으로 받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걸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여하간 저 얼굴 미끈한 새끼는 영 마음에 안 들어!!!”

왜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는 거의 대부분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하던 일이 꼬였을 때고 다른 하나는 수장인 치트를 봤을 때였다. 후자는 쌍방으로 싫어하는 상황이지만 치트는 금방 감정을 끊어내고 제 일에 집중했고 아난타는 계속 욕하면서 일을 하는 게 차이였다. 그렇게 제 주위를 피해 주변에 있는 자가 점점 없어졌을 때 쯤 아난타의 욕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쯤 그는 걷던 발걸음에 속도를 더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뛰기 시작했다. 꽤나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에 지나가던 마법사 중 하나가 붙잡아서 어디 그렇게 급하게 가냐고 물을 법도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마음껏 뛸 수 있었다. 그가 가고 있는 곳 자체가 숨겨진 데다보니 가는 길목에도 당연하게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아난타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연다.

미안합니다. 늦었죠?”
어느새 쨍했던 머리카락도 검게 변해 있었다. 도착한 이곳엔 늘 둘만 있었다. 창문 너머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주를 누르다니 대단하군.”
그동안은 잠들어 있었지만 저주로부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저는 저보다 어리고 경험도 적으니까요 그리고...”
말하면서 웃는 지금의 아난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했다.

저는 비싼 몸이니까요.”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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