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발을 뗀 여행에서 걱정되는 건 치트와 패치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로 용사 때문이었다.

오와아아아앙!! 나무들이 없어!!”

여기는 숲 밖이라서 나무들이 없다기 보단 적은...저기 용사님? 잠깐만요!”

숲 밖으로 나온 용사는 갖은 기행을 벌였다. 하늘을 보면서 뛰다가 넘어지고 그 김에 풀밭을 구르다가 일어나면 손에 뱀이나 달팽이가 쥐여져있는 건 기본이었다. 잠시 눈을 떼면 머리가 하늘과 겹쳐 보일 정도로 멀리 가 빨간 망토 색으로 용사를 찾아야했다. 숲에서 나온 이후로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역할들이 주어졌다.

용사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 지켜보는 담당이 패치, 잠깐 놓친 순간에 용사를 찾아내는 담당이 치트, 바로 달려가서 용사를 데려오는 담당이 퍼블리였다. 치트는 관찰력이 좋아 대상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고 용사의 힘과 체력은 만만치 않아 용사를 따라잡고 데려올 수 있는 게 일행 중에선 퍼블리밖에 없었다.

아예 빛을 뿌려놔야겠군. 이러다간 하루만 노숙할 거리가 사흘로 연장될 걸세.”

얼마 전까진 지망생이었던 퍼블리는 지도 제작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지도제작자는 아니지만 꼼꼼하고 실용주의를 선호하는 패치에게 어떻게 표시하면 더 직관적이고 알아보기 쉬울까 의견을 나누면서 조언을 받고 있었다. 몸이 두 개는 아닌 패치는 퍼블리에게 조언하는 동안엔 자연스럽게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게 됐고 용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치트를 불러 용사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반짝반짝!”

빛가루를 뿌리며 이동하니 용사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혹시 질려서 다른 데로 눈 돌릴까 싶어 중간에 변칙적으로 흩날리거나 폭죽처럼 터지도록 뿌리며 순순히 뒤를 따라오게 했다.

편하네요~”

언제 또 한 눈 팔지 모르니 아예 자네가 보고 있게.”

주변을 둘러 볼 사람은 필요하잖슴까?”

이 넓은 풀밭에 위험한 건 용사가 잡아왔던 뱀 외에 더 있나?”

제대로 가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긴 봐야죠.”

가면서 지도 만드는 중인데 무슨.”

패치가 바빠서 그런지 말투에 날이 서 있진 않았다. 비록 정신없긴 하지만 한결 풀린 분위기에 퍼블리 또한 안심했는지 표정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 또한 얼마 가지 않았다.

가까이 붙지 말고 떨어지게.”

여행 동료인데 사이가 돈독해져야죠~”

돈독이고 뭐고 간에 자네와 내 사이가 좋아질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노력은 해야지 않겠슴까?”

다시 시작되는 살얼음판에 퍼블리는 종이를 들고 슬며시 멀어져 용사 곁으로 갔다. 용사는 정신없이 뛰어다녀도 불편하진 않았으니 숨 쉬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도 마음 편히 용사 옆에서 흩날리는 빛가루들을 구경했다. 뒤돌아볼 때 더 이상 숲이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질 때 쯤, 앞선 둘의 살벌한 대화도 멈춰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행이지만 목적지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급하다보니 여행에 대해서만 말했군요? 목적지라기 보단 거쳐야할 곳들이 있습니다.”

거쳐야할 곳들은 총 네 군데였다. 기술의 도시, 각진 나무의 무덤, 하얀 들판, 사막. 가장 가까운 곳이 기술의 도시였고 먼 곳이 사막이었다. 이 둘 간의 거리는 꽤 멀었지만 거쳐야할 곳들 사이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사막 너머를 제외하면 상세지도까진 아니었지만 가는 길이 간략하게나마 있어 여행하기 적절한 곳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목표는 기술의 도시지요. 가장 가까우니까요.”

기술의 도시는 처음 가 봐요!”

기대 가득한 퍼블리의 말에 패치는 용사를 흘끗 돌아보고는 말했다.

기술의 도시까진 지금 여기에서 작은 마을을 두 번 정도 거쳐 가야하네. 빠르게 가면 나흘은 걸리겠지만.”

퍼블리도 용사를 돌아봤다. 패치가 빛가루를 뿌리는 걸 멈추니 용사는 바로 주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주 잘 아는 퍼블리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빛가루로 따라오도록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퍼블리는 결심한 눈으로 용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용사님 저희는 기술의 도시까지 가야해요.”

기수르 도시?”

기술의 도시오. 그런데 용사님이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면 저희가 용사님을 찾느라 도착하는 게 늦어질 거예요.”

그르면 가기 전에 다 둘러보장~!”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려요.”

그 말에 용사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여행은 천~천히 다 둘러보면서 해도 되는 거 아니양?”

맞는 말에 퍼블리는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거쳐 가야하는 곳이 있다곤 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행 자체가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고 둘러보는 것이니 용사의 말이 여행에 가장 부합하는 말이었다. 용사의 말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퍼블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패치가 나섰다.

갑작스럽게 모인 감이 없잖아 있어서 마땅한 준비를 못 했네. 평소에 돌아다니는 편이라 식량과 침낭을 챙겨뒀지만 지금은 네 명이고 여행하면서 굶거나 맨 바닥에서 잘 순 없는 노릇이잖나.”

그럼 푹신푹신한 풀들 찾고 오께!”

그렇게 말하며 달려가려는 용사를 붙잡아 말리는 퍼블리와 기절시켜서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는 패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치트가 결국 나섰다.

기술의 도시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렇슴다. 꽤 기대하던 곳이거든요.”

퍼블리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니 본인이 기대하다기 보단 퍼블리의 기대를 읽어서 하는 말이었다. 퍼블리는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 민망해하며 과연 그게 용사가 납득할 수 있는 말일까 의아해했다. 퍼블리에게 잡힌 채로 달려가려던 용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멈춰서더니

우웅 그렇구나~ 그릏담 빨리 가장!”

바로 납득하는 모습에 진작 그렇게 말할 걸 그랬다는 속을 누르고 용사의 팔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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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어법에 잠시 동안 해석 과부하가 걸린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

, 호로록? 갔다고요? 잠들었다고...”

잠들었는데 호로록 갔엉!”

어디로요?”

위로!”

용사의 말에 혼란이 온 퍼블리는 나머지 둘을 향해 돌아봤다. 나머지 둘도 용사의 말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는지 퍼블리와 눈이 마주쳤다. 이들의 속도 모르고 용사는 이들 주위를 신나게 빙빙 돌기 바빴다. 우선 신탁을 전해야할 의무가 있는 치트는 용사를 멈춰 세우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우웅? 내 이름 용사야?”

이름이 아니라 역할을

용사!!”

치트는 더 말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났다. 저를 향해 돌아보는 그린 듯한 미소에 패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패치의 차례였다. 신탁을 따라 용사가 되는 이에게 치트에 대한 경고를 하려고 했는데 경고고 뭐고 말이 통할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자네 말대로 자넨 용사일세.”

빨간 칭구!”

신탁에 따르면 나를 포함한 이 셋과 함께 여행을 떠나야한다네.”

여행 조아!!”

다만 저 검은 머리는 이 여행을 정말 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지.”

칭구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여기까지 말한 패치는 더 말하기를 그만뒀다. 이 일행은 망했다. 가장 믿음이 가득해야할 대사제는 납치범에 속내를 모를 위험인물이고 가장 믿을 수 있어야할 용사는 요정이 키우기라도 했는지 순수하다 못해 텅 빈 종이를 보는 듯했다. 다만 패치가 예상치 못했던 게 있었다.

그럼 난 이제 돌아가겠...놓게.”

사이좋게 지내야징!”

사이좋게 지내긴 글렀네.”

싸웠으면 화해하는 거양!”

아니, 애초에 싸운 게 아니라

용사의 힘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패치는 팔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고 하거나 뿌리칠려고 애를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랑이라고 하기엔 용사의 힘이 너무 강해 일방적으로 잡혀있다고 할 수 있는 패치는 이대로라면 절대 안 놔줄 거라는 걸 깨달았는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저었다. 환각에 영향 받지 않게 하는 건 물론이고 환각도 걸 수 있었다. 빛이 아른거리며 용사의 눈을 훑다가 터지면서 반짝였다

반짝반짝!”

용사가 눈을 빛내며 즐거워했지만 팔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패치는 손을 뻗어 용사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러자 용사가 새로 인사하는 거냐며 자유로운 팔을 들어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 반응에 패치는 질린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용사를 바라봤다.

내성도 아니고 저항이라니.”

이를 통해 용사가 왜 환각의 숲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사물을 분간하며 돌아다니는지 알 수 있었다. 환각 자체가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환각의 숲이란 그냥 평범한 숲이나 다름없었다.

화해 축포야?”

축포 아니니 얼른 놓...”

내 칭구들도 자주 쓰던 거야!”

그 말을 들은 패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특유의 건조한 눈으로 용사를 바라본 후 한숨을 쉬며 용사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말했다.

애초에 저 녀석은 용서도 빌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으니 화해 자체는 불가하네.”

사과하면 화해할끄야?”

화해를 강요하는 것 또한 좋은 일은 아니란 걸 알아두게. 다만 기회를 원한다면 이 여행이 그 기회가 될 거고 나와 저 녀석의 화해를 바라는 자네라면 이 기회를 그냥 떠나보내게 둘 생각은 없겠지, 그러니 조건이 있네.”

건조함으로 제 감정을 덮은 패치는 용사에게 마지막으로 무언가의 말을 속삭였고 용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대해선 비밀로 하는 것 또한 조건이라며 덧붙인 패치는 그대로 뒤돌아 멀뚱히 서 있는 둘에게 향했다.

여행을 하기로 했네.”

정말요?!”

기대감이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었는지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기쁨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치트는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용사가 패치를 설득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용사에게 달려가 감사인사와 어떻게 설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자연스럽게 둘만 남은 터라 패치는 슬핏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거래를 했습니까?”

그 질문에 패치는 여전히 눈썹을 찌푸린 채로 노려봤다.

이 세상 그 누가 당신을 설득하겠습니까? 의무도 일도 없는 당신을 흔들 말은 없죠.”

능청스레 덧붙이는 말들은 꽤나 확신에 가득 찼고 패치에 대해 잘 파악한 내용들이었다. 패치의 입장에선 꽤 거슬렸는지 건조했던 눈에 다시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렇담 용사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걸 갖고 있단 건데 그게 뭔지 참 궁금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군. 그렇담 이것도 알겠지, 내가 그걸 말할 것 같나?”

물론 아니죠, 그러니 패치에게 직접 물을 생각은 없슴다~”

그렇담 용사에게 묻겠다는 말이었다. 패치는 혀를 차며 뒤돌아 용사와 퍼블리에게 걸어갔고 치트는 그 뒤를 따랐다. 용사에게 궁금한 걸 묻다가 오히려 용사의 이야기에 말려든 퍼블리는 다가오는 그 둘을 반갑게 돌아봤다.

자네 여기서 챙길 게 있나?”

없엉!”

그럼 이제 이 숲에서 나가지.”

와앙!”

용사는 앞장 서는 패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원래부터 따라오던 치트도 그 옆에 나란히 걸었다. 그들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땅에 떨어져있는 물건들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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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용사 있는데로 제대로 안내하는 게 맞나?”

맞습니다만?”

왜 길이 신전으로 가는 길인가? 설마 용사는 진즉에 신전으로 데려갔나?”

아뇨 그건 아님다. 마침 용사가 신전 근처에 있기도 해서 이렇게 나중에 보러 간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큽니다.”

신전방향으로 가는 건 맞았지만 가기 직전에 길을 꺾었다. 신전 가까이에 있는 숲이 목적지였다. 그 숲이 어떤 숲인지 아는 패치는 이유가 뭔지 깨달았다.

환각의 숲이군. 나를 먼저 데려오지 못하면 여기도 못 들어가지.”

환각마법에 관해선 가장 뛰어난 게 패치죠.”

대체 왜 환각의 숲 근처에다 신전을 지은 건가? 실수로 깊숙이 들어가서 실종되는 신관들이 매년 있다고 들었는데.”

글쎄요. 왜 여기에 지었는지는 맨 처음 설계한 사람만이 알겠죠?”

패치는 혀를 차면서 손을 휘저었다. 손끝을 따라 빛이 흩뿌려지며 치트와 퍼블리를 감쌌다. 퍼블리는 신기함에 빛을 잡아보려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고 빙글빙글 주위를 돌다가 사라졌다.

! 이런 마법들은 처음 봐요! 역시 마법 도구와 마법사가 직접 쓰는 마법은 다르구나.”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도시로 떠났다고 들었죠. 도구만 나오는 상황이라 어찌된 거냐며 사람들이 궁금해 하던데 같은 마법사로서 아시는 바 있슴까?”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아서 모르네만.”

, 어차피 이유는 얼마 안 있어 알게 되겠죠.”

패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치트를 돌아봤지만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환각의 숲에 한 발짝 내딛은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숲의 초입 부분은 환각이 약한 편이라 사람들이 열매나 풀을 캐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아 길이 나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이제는 흙보단 빽빽하게 자란 풀들이 자주 밟히기 시작했다. 발에 무언가 단단히 채일 때마다 내려다보면 짐 가방이나 휴대전등 같은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올 때 가져오는 물건들이 있었다.

겉보기엔 다른 숲들이랑 다를 게 없는데 대규모 환각마법 말고도 다른 뭔가가 있나?”

다른 뭔가요?”

여기 들어와서 실종된 사람들은 가득한데 사람은 없고 물건만 남아있군.”

시체가 없다 이 말이군요?”

심상치 않은 말에 퍼블리의 안색이 좋지 않아졌다. 환각의 숲에서 실종되고 못 찾은 이들은 전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한다는 얘기가 한창 돌았었다. 땅을 짚으면서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둘을 보던 퍼블리는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대체 용사는 무슨 생각으로...자네 뭐하나?”

환각의 숲의 지도를 만들면 사람들이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전에 환각대비부터 해야 지도도 볼 수 있네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흔적을 찾던 패치는 몸을 일으켰다. 물건들은 새 것같이 멀쩡했는데 사람의 발자국이 전혀 없었다.

용사가 이 숲에 있는 게 맞나? 아주 예전이라면 모를까 최근에 들어왔다면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이네. 근래 들어서 비도 내리지 않았으니 지워질 일이 없을 텐데.”

글쎄요, 최근에 들어왔는지 좀 더 오래 전에 들어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거울에 비춰진 건 이 숲이었으니까요.”

혀를 찬 패치는 이러다 환각의 숲을 전부 돌아다니게 되겠구나 싶어 한숨을 쉬었다. 들어와도 초입에 있어서 잠깐 들어왔다가 나갈 줄 알고 아무 말 없이 따랐는데 준비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숲을 돌아다니기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냥 따라온 내 책임도 있으니 이에 대해선 나중에 말하겠

우오와아아아아앙!!!!!”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흠칫 놀란 패치는 일행들을 돌아봤다. 그 둘도 마찬가지로 놀란 걸 보니 여기서 큰 소리를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였다.

죠오오오기 서 있는 애들 있다아아앙!!!!”

저 멀리서 달려오는 형체가 있었다. 목소리가 매우 커서 사람인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얼굴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패치와 퍼블리는 물론 치트도 마찬가지였다. 용사의 얼굴은 알아도 용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칭구들!!!”

달려와서 부딪히기 직전에 멈춘 용사는 고개를 숙여 패치와 눈을 마주했다. 바로 코앞에서 바짝 붙는 얼굴에 당황한 패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오랜만에 보는 칭구들이다!!”

친구라니 처음 보는...”

새 칭구!!”

패치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정체도 모르는데 막무가내로 친구라 외치는 상대에 호감이 갈 리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치트는 언짢은 패치의 기색을 느꼈는지 항상 짓는 미소를 지으며 패치에게 말했다.

그 분이 용사님입니다.”

“...?”

특정하진 않았지만 예상했던 용사의 이미지가 전부 무너져 내렸다. 퍼블리 또한 크게 뜬 눈으로 용사를 바라봤다. 파랗게 뻗친 머리를 지닌 용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이들을 둘러보기 바빴다.

나보다 큰 칭구도 있다!”

용사는 환각에 자체적으로 저항이 있는지 기본 말투를 제외하면 멀쩡해보였다. 다만 어떻게 대화를 끌어가야하는지 감을 못 잡아 패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때 퍼블리가 앞으로 나섰다.

혹시 여기 다른 사람, 그러니까 친구들도 있나요?”

우웅~? 칭구들 다 코~ !”

그 중에서 노란머리를 반쯤 묶어 올린 분이 있나요?”

노랑 칭구는 못 봐써!”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인 퍼블리는 잠들었다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용사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른데 칭구들이 호로록! 가버렸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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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으며 노력해보겠다고 했고 패치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짐을 챙겨들었고 패치의 빠른 걸음을 선두로 마을을 나섰다. 밖으로 가는 내내 패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치트는 그저 웃고만 있었으며 퍼블리는 기쁨을 잠시 깊숙이 넣어두고 둘을 살펴봤다.

퍼블리의 입장에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먼저 서로의 태도를 보는 걸로 둘의 선, 정확히는 패치의 선을 체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퍼블리는 넣어둔 기대감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걸 느꼈고 패치는 후회가 안쪽부터 서서히 쌓이는 걸 느꼈다.

예전에 볼 때보다 더 살이 쪽 빠지셨네요. 그러니까 그 때 가만히 있었으면 이렇게 살도 빠질 일 없었을 텐데 정말 슬프네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꺼내는 걸 봐줄 패치가 아니었다. 마을에 나오자마자 온갖 마법들이 눈 아프게 쏟아졌다. 사제들이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방어막이 위태롭게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패치는 마법만 쓰는 게 아니었다. 그대로 뛰어가 방어막을 뚫으며 물리 공격까지 감행했다. 이 난장판에 낄 수 없고 끼어들 이유가 없는 퍼블리는 엉거주춤 선 채로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긴 다리를 열심히 움직인 덕분에 공격을 피한 치트는 그대로 날아오는 패치의 주먹을 가볍게 감싸 잡아 오히려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진 패치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고 쿨럭 기침을 터뜨린 치트는 그대로 나머지 손도 잡아채고 체중을 실어 패치 위로 쓰러지면서 쓰러뜨렸다.

패치가 이렇게 작으니 쉽게 쓰러지는군요.”

안 비켜?!”

비키면 공격할 거잖슴까~”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치트에 패치의 눈에 불이 더 크게 튀었다. 그대로 머리를 들어 박치기를 시도하려 했지만 치트의 입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기억을 잘 더듬어보세요.”

?”

전해지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에 있는 걸 묘사해봐야 의미가 없잖습니까?”

뜻 모를 눈빛과 미소가 패치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치트가 꺼낸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했지만 우선 자신을 깔고 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패치는 다리를 휘둘러 치트를 제 위에서 치웠다.

쓸데없는 입 그만 놀리고 안내나 제대로 하게.”

차인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우는 시늉을 해봤자 날아오는 건 반대쪽 다리였다. 다시 일어난 치트는 패치의 말을 충실히 들으며 옆에 바짝 섰다. 말만 충실히 들었다.

사람어깨 팔걸이로 쓰지 말고 얼른 꺼지게.”

“....”

팔이 거추장스러우니 잘라달라는 의미였나?”

“....”

침묵은 긍정으로 알겠네.”

말만 안 했지 행동으로 패치의 속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보는 퍼블리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걷고 있었다. 분명 온 사방이 멀쩡한 흙바닥인데 옆에 절벽을 둔 기분이었다. 입을 다문채로 패치의 어깨에 팔을 두르던 치트는 명치를 맞고서야 물러났다. 패치는 마음 같아선 자신이 말한 대로 하고 싶었지만 퍼블리의 눈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번에 명치를 때린 게 효과가 좋았는지 그 이후로 치트는 얌전히 있었다. 입도 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패치 또한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었다. 침묵이 무겁게 깔리자 이런 분위기에 익숙치 않은 퍼블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퍼블리는 이제 이 둘에 대한 기대보단 앞으로 만날 용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용사라는 역할을 부여받을 정도면 이 분위기를 꽤 환기시키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아직 겪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퍼블리의 기대는 과하게 충족되었다.

저기! 두 분은 어쩌다가 만나게 되셨어요?”

아까 전해지지 않았던 내용이 그 내용일세.”

, 그럼 어쩌다가 사이가 안 좋아지신 거예요?”

그 내용도 마찬가지지.”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이야기라도 하려고 했지만 꺼낸 주제마다 막히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묵묵히 따라가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패치가 돌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도제작자 지망생이라고 했나?”

? !”

마법과 기계가 충돌이 멈추지 않은 상태고 종교까지 나선 시기엔 힘겨운 직업이군. 굳이 지망하는 이유가 있나?”

예전에 지도를 보고 땅 위에 있는 모든 길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갈 수 있는 모든 땅의 지도를 만들어서 합치면 멋질 것 같아서 직접 지도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둘은 순조롭게 이야기를 하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없앴다. 지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지냈던 마을의 이야기와 식당 딸린 여관에서의 일화까지 나왔다. 패치만큼 술버릇이 장난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는 대목에서 패치는 침묵했고 퍼블리는 침묵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신나게 얘기했다. 한결 편안하고 웃는 얼굴로 열심히 말하던 퍼블리는 앞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잠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치트와 눈이 마주쳤고 너무 둘끼리만 대화했나 싶어 민망함을 담아 마주 웃었다.

퍼블리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임다. 만약 둘만 있었다면 난리도 아니었을 겁니다.”

이미 난리가 났지 않았나 싶었지만 퍼블리는 애써 그 말을 담아두었다. 이 순간을 시작으로 대화의 흐름이 패치와 퍼블리에서 퍼블리와 치트로 넘어갔다. 소소하게 신전에선 무슨 일을 하는지와 성수로 만든 거울의 기능과 효과의 이야기에 퍼블리는 신기했는지 집중에서 들으며 궁금한 걸 물었고 치트는 성실히 대답했다. 패치는 그런 둘을 보고 있다가 그다지 끼어들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는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신탁이 여행을 할 생각이 없는 것과 별개로 어찌됐든 여행을 시작하면 아무리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다른 자리에 서로의 관계가 잘 굴러가게 만들 사람들을 뽑아놓아 여행이 이어지게 한 걸까 생각하며 신탁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패치는 반발 가득했던 처음과 달리 나머지 용사에 대해서 꽤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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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는 한 번 더 확인 차 종이에다 써서 보여줬지만 퍼블리는 무슨 내용이 써져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 그럼 퍼블리님께도 신탁 내용을 알아야하니 다시 한 번 말해드리겠습니다.”

패치는 예언을 들으면서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었고 예언을 처음 듣는 퍼블리는 가장 먼저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꼈고 그 다음엔 상상을 기반 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정말 제가 신탁에서 말하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성수로 만든 거울로 모습이 떠올랐으니 확실하죠.”

...”

누구라도 당신은 특별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 평생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은 사람이나 동화책을 읽는 어린아이도 신탁에 대한 낭만이 있었다. 그러한 낭만은 퍼블리에게도 있었다. 다만 얼떨떨함이 가장 크게 자리를 잡았으니 가만히 감탄을 흘리기 바빴다.

그런데 패치께선 같이 여행할 생각이 없다고 하시네요.”

? 왜요?”

제가 예전에 한 일 때문에 미운털이 콕콕 박혔거든요~”

능청스레 말하는 모습에 패치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퍼블리는 그 미운털 박힌 일이 아까부터 패치가 전하려고 했지만 전혀 전해지지 않은 그 이야기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챘다. 대놓고 대사제를 못마땅해 하는 패치에게 그래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물을 게 못 된다는 건 퍼블리도 알고 있었다. 그런 퍼블리의 기색을 눈치 챈 패치 또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대로 저 능구렁이 같은 녀석에게 간다면 말려드는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내버려두기엔 퍼블리가 위험해질 게 훤했다.

“...자네에겐 빚이 있었지.”

빚이요?”

예전에 자네에게 실례를 한 이후에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퍼블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술로 인한 테러 사건 이후로 시간이 지나서 술 취한 상태가 아닌 멀쩡한 패치의 말투와 행동이 익숙해졌을 무렵에 패치가 나중에 다시 만날 때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한 후 떠난 일이 있었다.

, 혹시 제가 부탁하면 같이 가실 건가요?”

그래.”

하지만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부탁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단호한 퍼블리의 말에 패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대사제 또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탁을 들은 퍼블리는 사실 패치와 대사제, 이름도 얼굴도 나중에 알게 될 사람 한 명과 여행하는 상상을 떠올렸지만 한 사람이라도 그 여행 자체가 불편하다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은 모두가 즐거워야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전 신탁이라도 이 여행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이런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치 못한 반응입니다. 지도제작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입장에선 이만큼 좋은 기회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 제가 지도제작자 지망생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사제, 패치는 마법사니 나머지 두 개 중에 하나일 게 분명하고 가지고 계신 짐들을 보면 종이가 가득이니 지도제작자일 것 같았거든요.”

나머지 하나는 용사라는 걸 눈치 챈 패치는 의문이 들었다.

용사는 어디에 있나?”

여행에 관심이 생기셨슴까?”

틈만 나면 끌어들이려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게. 이 마을에 두 명이나 올 줄 아는 것처럼 보였고 나한테 끈질기게 사제는 물론이고 성기사들까지 보낸 걸 보면 용사 위치는 진즉에 파악해둔 모양이던데 보통 용사를 가장 먼저 영입하려 하지 않나.”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저희 입장에선 갈등의 골이 깊이 박힌 분부터 어떻게 설득해야한다고 생각하더군요.”

설득의 방식이 영 글러먹었지만 따지는 걸 포기한 패치는 고민했다. 퍼블리는 누구 한 명이라도 원치 않는 여행이라면 자신도 함께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어떨지 몰랐다. 보통 동화에서도, 여태까지의 역사에서도 여행이나 모험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에 위치한 게 용사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용사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받아들일 게 훤했다. 누가 용사가 된다는 데 마다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한 패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용사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진 동행하겠네.”

대사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퍼블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패치는 우선 용사를 만나고 판단하겠다는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용사에게 설명할 수 있는 대로 설명하고 충고할 생각이었다. 충고를 듣고도 여행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 이후부턴 패치가 더 이상 관여할 영역이 아니었다. 상대가 납치범에 죗값도 제대로 안 치른 종교인이지만 충고를 듣고도 굳이 그러겠다는 사람의 뒷목잡고 끌고 나오는 것만큼 기력낭비가 없었다.

자네는 어쩔 텐가. 사실 이대로 떠나는 게 제일 좋을 거네만.”

저도 갈래요!”

옳은 말과는 별개로 사실 퍼블리는 여행 자체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니 비록 임시여도 이런 패치의 말이 굉장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퍼블리의 기쁨을 느낀 패치는 씁쓸한 감정을 내리눌렀다. 패치가 보기에는 이 여행 자체가 껍질만 예쁘고 속은 썩어문드러진 열매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사람의 진심과 수많은 말은 통한다며 놀릴 법한 대사제는 뜻 모를 눈으로 패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관찰하는 것 같은 눈빛에 패치의 표정이 당연한 수순으로 좋지 않아졌다. 기쁜 마음이 가득한 퍼블리는 이런 둘 사이의 어두운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 짐을 챙겨들며 대사제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대사제님의 이름은 뭐예요?”

대사제는 그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집요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눈을 곱게 접어보이더니

제 이름은 치트입니다. 역할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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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 동료?”

헛소리일세. 귀담아 듣지 않는 게 좋네.”

신탁을 헛소리로 치부하다니 역시 대단하심다.”

자네 입에 나오는 모든 말은 헛소리지.”

매정하다며 징징대는 대사제에 패치는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옆에서 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있던 사람은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 이런. 그러고 보니 새 동료님의 성함을 모르네요.”

, 퍼블리 셔예요.”

그럼 퍼블리님, 자세한 얘기가 필요하실 테니 우선 앉을 자리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패치 또한 마을에 묶이게 되었다. 저보다 나이 더 많은 성인 마법사를 납치하는 대사제 앞에다 아직 성인도 안 되거나 이제 막 성인 됐을 법한 사람을 두고 떠날 순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대상인 퍼블리는 앞서 회상했듯이 본인이 큰 실례를 저질렀으니 더더욱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아까의 식당으로 들어오게 된 패치는 퍼블리의 옆에 앉았다. 마주보는 게 짜증나고 혹시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싶어 바로 옆에 앉아 이상한 낌새가 보이는 즉시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멀쩡한 사람 앞에서 피 튀기는 상황을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위급 상황일 때 바로 퍼블리만 데리고 도망갈 경우도 생각해 놨다.

우선 자네가 얘기하기 전에 자넨 그렇다쳐도 우리 둘이 신탁에서 가리키는 사람인 게 확실한가? 마을 입구에서 우연히 만난데다가 이름도 듣기 전엔 몰랐잖나.”

신탁이 내려올 때 모습 또한 성수로 만든 거울을 통해 나타났슴다. 패치가 나올 때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묘하게 상상이 가는 당시 신관들의 상황과 성수가 따로 남아있었다는 거에 대한 언짢음에 눈을 좁힌 패치는 툭 쏘아붙였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네. 증거를 대게.”

성수로 만든 거울임다? 엄청 대단한 거라고요?”

그건 종교계에서나 통할 물건이지, 난 마법사고 옆은 민간인일세.”

이 의심 많은 마법사님을 어떻게 만족시켜야 할까~”

이런 의심을 예상했는지 대사제는 그리 난감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를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패치를 보고 있던 노랗고 검은 눈이 그대로 구슬처럼 굴러 퍼블리를 향했다. 멀뚱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퍼블리는 시선이 제게 오자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퍼블리님, 혹시 5년 전의 사건에 대해 아십니까?”

? 5년 전에요?”

종교와 마법에서 꽤나 떠들썩했고 워낙 큰 사건이라 두 분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소수민족들에게도 유명했던 사건인데 모르십니까?”

그 땐 워낙 바쁜 일이 있어서...죄송해요.”

아뇨, 아뇨 죄송할 거 없슴다, 바쁘셨다면 당연히 모를 수도 있죠~”

둘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노란 눈이 다시 굴러 패치에게로 향했다. 패치는 왜 대사제가 그 때의 얘기를 꺼냈는지 반응을 더 살펴보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하셔도 됩니다.”

?”

뭐긴요? 방금 제가 말한 사건 말임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단 스스로 말하시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요?”

자신에게 전혀 좋을 것 없는 얘기를 꺼내는 의중이 의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론 퍼블리가 그에 대해 모른다는 거에 난감함을 느끼던 패치는 일단 말해두는 게 퍼블리의 입장에서도 눈앞의 대사제와 신탁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퍼블리는 불안함에 눈을 깜빡였다.

“...5년 전 나는 저 녀석에게 마력구속구가 채워진 채로 납치당했었네.”

?”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전 날 자네를 만났을 때처럼 술을

, 잠깐만요, 마법사님! 다시 한 번 얘기해주세요!”

패치는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니 이런 반응을 보일 법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말해줬지만 퍼블리는 여전히 당황스러워하며 연신 네? ? 하면서 반문하기 바빴다. 왜 이러나 싶었던 패치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네 제대로 듣고 있나?”

입만 뻐끔거리셔서 모르겠는데요...”

?”

이게 무슨 소린가. 입만 뻐끔거렸다니 패치 본인은 그런 적이 없었다. 뭐라 더 말하려던 순간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대사제가 눈에 들어온 패치는 눈가를 찌푸렸다.

자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따라 해보게. 혹시 소리가 안 들리면 입 모양을 따라하게.”

당황스러워하던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패치의 입을 쳐다봤다.

나는

나는!”

저 대사제에게

저 대사제에게!”

납치당했다.”

도아? , 돌아?”

입모양을 보면서 따라 해도 납치 부분에서 전혀 다른 단어가 나왔다. 뭐가 이상한지 제대로 눈치 챈 패치는 대사제를 노려보며 이 현상에 대해 당장 털어놓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말한 신탁 기억납니까?”

사람 넷을 말하는 대목 말인가, 아니면 여행에 관한 내용 말인가.”

여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정확히는 세계의 정상화와 함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무엇인지 깨닫기 위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부분이죠.”

그게 이 현상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묻기 전에 먼저 말이 이어졌다.

특정한 과거는 당사자들끼리가 아니면 다른 동료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저와 패치가 관련된 그 과거는 우리 둘이 당사자이니 당사자끼리는 알지만 그 때의 당사자가 아닌 퍼블리님께 아무리 말해도 방금처럼 전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특정함의 기준은 신탁의 여행과 관련되어있죠.”

대사제는 여전히 뜻 모를 묘한 미소를 지으며 즐겁다는 어투로 말을 꺼낸다.

, 그 과거는 세계의 정상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자신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중 하나 혹은 둘 아니면 전부와 연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패치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전해지지 않는다면 퍼블리는 저 대사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적의를 보이는 마법사와 능글맞게 웃으면서 다가가는 대사제만 눈에 남는다. 저 녀석을 믿으면 안 된다고 백 번 말해봤자 이유를 모른다. 아무리 말해봤자 이유가 없으면 납득하지 못하는 게 사람의 당연한 심리였다.

패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대로 떠나 아무것도 모르는 퍼블리를 포함한 다른 한 명도 저 녀석과 다니게 하느냐, 신탁대로 같이 다니면서 끝없이 경계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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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답잖게 말을 빙빙 돌릴 속셈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걸세.”

천천히 고개를 든 대사제는 이번엔 웃고 있지 않았다. 크게 뜬 눈 가운데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질 법했지만 패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번엔 얼음 가시 두 개가 찻잔을 들고 있지 않은 손 위로 떠올랐다. 그에 대사제는 크게 뜬 두 눈을 다시 곱게 휘어접었다.

그런 위험한 거 날리면 못 씁니다.”

내 앞에 있는 납치범만 할까.”

까칠한 반응에도 웃음을 짓는 대사제는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훑었다. 옆 탁자는 비어있고 계산대를 보고 있던 사람도 돈 계산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부정할 자격이 있는 하늘.”

굴리던 눈을 감은 대사제는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이어간다.

요정처럼 순수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은 인간.”

천천히 나오는 신탁에 패치도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는다.

모든 것을 뒤집고 기다리는 그림자.”

노란빛과 파란빛이 마주쳤을 때 패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믿음과 확신으로 본질을 덮은 숲.”

순간 패치는 이 세상에 대사제와 단 둘만 남은 느낌이 들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 넷에서 비롯된 이들은 각자 용사, 사제, 마법사, 지도제작자의 역할을 부여받고 세계의 정상화와 함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무엇인지 깨닫기 위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신전에서 내려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발표되지 않았을 신탁이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작은 식당, 창가 자리의 작은 탁자 자리에 앉은, 키가 큰 대사제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신탁을 전부 듣고 눈을 반쯤 감으며 내용을 곱씹던 패치는 곧이어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래서 거기 신탁에 있는 마법사가 난가?”

역시 눈치가 빠르심다~”

사제는 너고?”

오우! 그것까지 바로 맞추시다니, 놀라워요~”

패치는 그 자리에서 비속어만 안 꺼냈지 듣는 사람이 울고 나갈 법한 350자의 험한 말들을 뱉었다. 물론 듣는 상대가 상대다보니 우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그렇게 질색하면 저 정말 상처받슴다!”

왜 자네가 대사제가 됐는지 이제야 알겠네. 거기는 이미 자네만큼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 천지였어!”

험한 말들을 뱉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패치는 남은 차를 단숨에 넘겼다. 식은 차로 속을 진정시키기엔 들끓는 짜증과 분노는 너무 거대했다. 빈 찻잔을 내려놓은 패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가 돈 계산을 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벌써 여행할 생각이 가득하심까? 역시 행동력은 빨라요~”

안 꺼져!?”

독실한 신자는 신의 말씀을 따라야함다~”

난 신 따위 안 믿는 마법사니 따를 생각 없네!!”

졸졸 따라오는 대사제는 웃는 낯으로 패치의 속을 긁어댔다. 예전처럼 신전 안이었다면 모를까 차마 마을 안에서 마법을 난사해대며 깽판을 칠 순 없는 패치는 빠른 걸음으로 마을 출입구에 다다랐다.

그럼 다른 동료들을 찾으러 갈까요?”

마을을 나서면서 대사제가 그리 물었지만 날아오는 건 얼음 가시 수십 개였다. 이럴 줄 알았는지 대사제는 뒤로 한 발 물러나 마을 안으로 들어갔고 마을 안에다 마법을 냅다 난사하는 꼴이 될 걸 아는 패치는 바로 멈췄다.

한 발짝이라도 나오면 바로 자네 머리로 날아갈 줄 알게.”

에이~ 그런 말을 들으면 누가 나갑니까~”

패치는 대사제를 노려보면서 행동을 살폈다. 저대로 마을에 묶어두고 최대한 멀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신의 말씀을 따른다 해도 실제로는 저처럼, 아니면 저보다 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도 신탁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아십니까?”

대사제의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이 패치와 함께 여행한다는 내용이기에 별 말이 없는 경우였지만 그 말대로 높은 자리를 원했기에 본심을 숨긴 이들도 신탁에 목을 매고 있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맨 처음 찾아왔던 홀리가 그랬다.

신탁이란 건 반드시 이루어질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믿음 없는 확신이라며 따지기 전에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패치가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마을로 들어오려던 사람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길을 막은 셈이 된 건가 싶어 비키려던 패치는 어딘가 낯이 익는 얼굴에 상대를 빤히 쳐다봤다.

! 역시 옛날에 술집에서 봤던 마법사님이네요!”

그러자 패치의 머릿속에서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꽤 오래전, 술에 취해 신전에 납치당했던 때보다 더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당시에 무언가 속상한 일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고 주량이 약한 패치는 당연히 만취상태가 됐다. 취한 상태의 기억은 없었지만 다음 날 다른 이의 입을 통해 그 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다.

늦은 밤, 잠들기 위해선 미리 잡아놓은 방으로 가야했지만 앞에 손가락이 몇 개 있는지 구분 못할 정도로 취한 사람이 제 발로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뒷정리를 해야 하는 주인 대신 만취한 취객을 선뜻 업어서 방까지 데려다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밑천을 마련하려고 식당 딸린 이 여관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마을 내에서 사람들이 착하고 순박하다며 입을 모아 말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랬구나 내지 다행이다로 끝났을 얘기였다.

우부욻!”

안 그래도 취한 상태인데 업혀서 흔들렸기 때문이었을까, 술 많이 마신 손님이 있을 때 화장실에서 들릴 법한 소리가 업히자마자 패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시 내려놓기엔 이미 늦었으며 뒤집힌 속이 더 빨랐다.

뿌웨에에에엙!!”

그 날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적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패치 대신에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말해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 안녕하세요.”

얼굴 낯익고 패치를 기억하는 이 사람이었다.

잠깐 당황한 패치는 숨을 조금 가다듬고 인사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둘 사이로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이렇게 딱 만나네요, 기다리고 있었슴다~”

, ?”

갑자기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대사제에 상대는 당연히 당황했고 패치 또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는 사인가?”

아뇨, 처음 보는 사이임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에 대사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과장되게 움직여 정중한 손짓으로 당황하는 상대를 가리켰다.

이 분 또한 신탁의 주인공이자 우리의 동료입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패치의 표정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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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사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이번 신전에서 내세운 상금이 굉장히 꺼림칙하게 느껴졌고 진상을 그나마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놓고 표정을 구겼다. 얼굴에 철판을 깔은 사람들은 상금에 욕심을 부렸지만 그 중에서도 조금 양심의 가책이라는 걸 느낀 이들도 있었고 방금 나무에 매달아놓은 사람처럼 이름만 알고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마을 안에는 저런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최소 한 명쯤은 납치 시도를 하거나 대놓고 끌고 가려고 하는 사람이 마을에 있다는 얘기였다. 그 쯤 되면 패치에겐 차라리 야영이 더 편했다.

홀로 밤을 보내고 불편한 곳 없이 일어난 패치는 마저 길을 걸었다. 당장의 목적지는 없었지만 움직이지 않고 한 군데 머무르면 아예 성기사단들이 몰려올 테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마법서점을 발견하게 되면 변신마법이 있는 마법서를 살 거라는 목표를 세우고 야영흔적들을 지웠다. 가급적 낮에만 잠깐 마을을 들르고 해질녘에는 밖으로 나와 야영할 자리를 찾는 식으로 흔적을 최소한으로만 남기거나 아예 지우니 쉽게 못 찾아내는지 근 며칠간은 성기사를 포함한 신관들이 패치를 찾지 못했다. 신을 믿는 이들이 신탁이 내려온 이상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언젠가 지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신전으로 데려가면 상금을 준다고만 발표했으니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군.”

변신 마법서와 더불어 꼼꼼히 흔적을 지우며 종교 측에 내려온 신탁이 무엇인지 파고들기가 추가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패치는 변신 마법서를 살 이유가 없어졌다. 거기에다 신탁 내용에 대한 뒷조사를 하지 않아도 정확한 내용을 알게 됐다.

 

오랜만임다?”

알고 있는 공격 마법을 난사하지 않음으로써 패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자넨 왜 여기있나?”

~ 그렇게 거리 두는 말투 너무 싫어요~? 예전처럼 친근하게 말해줘요.”

패치는 다시는 술에 입도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신전엔 전부 눈도 없고 판단력도 없는 이들만 모였나? 마법사 하나 잡아 가둔 대사제를 최소한의 처벌도 없이 놔두다니.”

오우! 눈치가 빨라요~”

눈치 빠르다고 감탄하기 이전에 여전히 대사제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 보게.”

패치의 행적을 뒤쫓기 힘들어졌다는 걸 눈치 챈 종교 측은 이대로 추적이 완전히 끊기기 전에 강수를 뒀다.

패치가 신전으로 안 오니 저를 보내지 뭡니까.”

부족함을 고쳐나간다고 외치는 종교 측은 자잘한 엿을 꾸준히 보내다가 결국 이렇게 큰 엿을 보냈다. 패치는 주위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여긴 마을 안의 사람 많은 가게 안이었다.

패치는 짜증과 분노를 비롯한 기타 감정들이 들끓어도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말이 이렇게 차분하게 나갈 수 있구나 싶은 생각으로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하지만 패치의 생각에 틀린 부분이 있었다. 차분한 게 아니라 싸늘한 거였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둘 사이에 흐르는 기세가 만만치 않은 걸 눈치 채고 얼른 자리를 피해 가게 내에서 끝과 끝인 자리로 간지 오래였다.

단 둘이 얘기할만한 자리로 옮길까요?”

패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무언가를 준비해둔 사람이나 그 자리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허락한 걸로 알겠다며 팔을 잡아 끌 테지만 상대도 패치처럼 그렇게 물은 이후론 아무 말도 안 하고 빙긋 웃고 있기만 했다. 반응을 보려던 패치는 답을 내놓지 않으면 정말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고민에 빠졌다.

단 둘이 얘기할만한 자리가 어디지?”

허락임까?”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게.”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웃는 대사제는 창문 너머 맞은편의 식당을 가리켰다. 얼핏 보니 사람이 별로 없고 각각의 탁자들이 제법 띄엄띄엄 떨어져있어 조금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옆에 들리지 않을 법 해 보였다.

그럼 가실까요?”

덤덤하게 속으로 평가하고 있는 패치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보였는지 바로 그렇게 물어보자 패치는 아무 대답도 없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런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건지 대사제 또한 아무 말 없이 뒤따라 나갔다.

~ 전망 좋은 창가자리군요.”

창가자리를 고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옆이 창문이니 옆자리에 탁자가 하나 없는 셈이었고 문보다 더 확실한 도주로였기 때문이었다.

신탁 내용이 뭐지?”

여전히 돌직구를 쏘시네요.”

신전에서 그토록 싸고도는 자네까지 왔다면 그만큼 신탁이 중요하단 거겠지.”

신을 믿는 이들에게 신탁만큼 중요한 건 없잖슴까?”

자네한텐 아니지.”

패치는 어느새 제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자네가 대체 뭘 가지고 있기에 날 감금시켜도 신전에서 싸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자네는 신전에 비해 우위에 있는 입장이라는 거지. 그런 자네가 신전에서 중요시 여기는 신탁 때문에 나왔다는 건 자네에게도 그 신탁이 중요하다는 거고.”

흔들리는 차를 한 모금 넘긴 패치는 눈을 동그랗게 뜬 대사제를 지켜봤다. 분노와 짜증은 식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가라앉았고 신탁에 대한 궁금함이 떠오른 덕분에 싸늘함도 가셨다. 패치는 이렇게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신탁 내용을 굳이 뒷조사하지 않고 대놓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찻물처럼 흘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역시 패치는 눈치가 빨라요. 안 그래도 빨리 알려드리고 싶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볼이 살짝 눌리게 손 위로 얼굴을 괴어본 대사제는 예쁜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제 이름 불러주실래요?”

그리고 곧바로 날아오는 얼음 가시를 피하기 위해 바로 고개를 숙여야했다.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신탁 내용이나 말해.”

가라앉았던 짜증이 바로 올라와 다시 싸늘함도 돌아왔다. 패치는 눈가를 찌푸리며 대사제를 째려봤지만 까만색만 보이는 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아래에 있는 표정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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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그렇게 시큰둥해? 원래 마법사들은 이런 얘기 좋아하지 않아? 전에 만났던 마법사는 눈에 불을 켜고 어떻게 요정을 찾는지 막 물어보던데.”

그래서 요정 찾는 방법을 알고들 있나?”

아니! 모르니까 우리도 이렇게 여행하고 있는 거지!”

마법사의 눈이 즉시 가늘어졌다. 여행자들은 그 눈초리를 못 본 척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혹시라도 요정을 만나게 되면 정중하게 부탁해야해. 요정들은 예의를 차리면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니까. 특히! 절대 날붙이 같은 걸 요정에게 들이대면 안 돼!”

그건 요정뿐만 아니라 사람한테도 들이대면 안 되는 거네만.”

물론 사람한테도 위험하지만 요정들은 날붙이가 매우 치명적이야. 닿기만 해도 큰일 나지!”

그들은 그 외의 요정을 만났을 때를 대비한 주의사항과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중간탑의 32번 쪽지에다 적어달라는 말을 끝으로 길을 떠났다. 여행자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마법사는 그들이 말해준 요정 이야기를 되짚어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흥미는 조금 생겼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무작정 요정을 찾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진짜로 만나게 되면 중간탑이나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마법사 또한 제 갈 길을 갔다.

그렇게 그 날로부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법사는 그 여행자들처럼 요정이라도 찾아야하나 고민했다.

숲의 마법사 패치는 들으시오! 신께서는 우리를 보살피고자 말씀을 내렸고 모든 인간들은 신의 말씀을 따라야하오! 그러니 신탁이 가리키는 마법사 패치는 지금 당장 우리와 함께 신전으로

큰소리로 외치던 8번째 성기사는 말도 다 끝나기 전에 앞선 성기사들과 처음 찾아온 대사제 홀리처럼 날개 없이 하늘을 날았다. 종교측은 본격적으로 붉은 머리 마법사 패치를 추적했는지 대사제 이후론 성기사들을 보내고 있었다. 순순히 따라갈 패치가 아니었지만 종교측이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제대로 느낀 터라 급격한 귀찮음이 몰려와 요정을 찾아서 가루를 받아야하나 고민이 들 정도였다.

대사제도 집요한 놈으로 뽑더니 녀석만 집요한 게 아니라 전부 집요한 녀석들 모임이군 그래.”

여기서 말한 대사제는 홀리가 아니었다. 패치에게 마력구속구를 채워 모든 일의 시작을 터뜨린 그 젊은 대사제였다. 잠깐 그 때를 떠올린 패치는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근처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눈을 떠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구조와 장식들이 가득한 방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급하게 일어났더니 발에 뭐가 걸려 불편했다. 뭔가 싶어서 내려다봤더니 마력구속구가 발목에 채워져 있었고 그걸 보고 또 한 번 당황한 패치는 사태파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어나셨습니까?”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패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꽤나 높은 신관들이 입을 법한 하얀 옷을 입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옷과는 정 반대로 머리는 까맣고 눈 한쪽도 흰 자대신 검은색이 가득했다. 신관 옷이 저렇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말을 간신히 삼킨 패치는 그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어딘가?”

여긴 제 방임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제가 데려왔으니까요.”

그 남자는 샐쭉 웃으며 패치에게 손을 뻗었다. 해를 끼치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아 패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고 뻗은 손은 구속구가 채워진 발을 조심스럽게 살피듯 쓰다듬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패치의 눈이 가늘어진 순간

선물은 마음에 드십니까?”

마치 결혼반지라도 끼워준 것 같은 말투에 패치는 순간 굳었고 남자는 조심스럽게 패치의 발을 들어 올려 구속구를 쓰다듬었다. 이 상황을 벌인 게 누구인지 깨달은 패치는 즉시 그 발로 남자의 얼굴을 찼다. 어쩌다가 구속구가 채워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잠들기 전에 술을 마셨던 게 분명했다. 자신이 무방비해지는 때는 술을 마셨을 때뿐이라는 걸 패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왜 술을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하룻밤만에 하얀 들판에서 신전까지 갈 수 있는 거지?”

술 마시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하얀 들판에서 검은 돌을 찾는 거였다.

 

거기 빨간머리 마법사! 이름이 패치 맞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패치는 기억을 더듬던 걸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이름까지 아는 사람이 부른다면 이유는 이제 두 개였다. 하나는 대사제 때문에 신전에 끌려간 게 진짜냐고 물어보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추가됐다.

중무장한 성기사가 인상착의 말하면서 찾아다니던데 당신 맞지?”

마법, 기계, 종교. 대표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활을 이어나가게 받쳐주는 역할이었다. 누구나 마법도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가볍게 들어도 그 안에 들어간 마법식을 누구나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고 누구나 말 없이 기계로만 움직이는 기계차를 이용해 빨리 갈 수 있다 해도 그 안에 들어간 회로를 전부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을 신전으로 데려가면 엄청난 상금을 준다고 들었거든? 그러니까 반항할 생각 않고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아.”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사건이 터져도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거기다 시간이 지나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외엔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자기 살기 바쁜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생각보다 꽤 많았다.

자네 5년 전에 일어난 대사제 사건 알고 있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신이랑 관련된 사건인 건 워낙 유명해서 드문드문 들려오더라. 그보다 딴소리 말고 얼른 따라오기나 해. 이거 호신용을 개조한 거라 맞으면 보기보다 아플 걸?”

호신용 전기충격기를 들이대며 협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패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머리가 아팠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다음엔 겉모습이라도 좀 그럴 듯하게 개조해서 오게.”

말을 걸기 전에 뒤에서 기습하면 될 걸 저렇게 협박하는 걸 보면 분명 허세였다. 하늘을 나는 건 민간인이라 다칠 우려가 있어 나무에 매달아놓는 걸로 봐준 패치는 마을에 들리려던 걸 포기하고 야영하는 걸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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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없다는 눈으로 쏘아보는 상대에 전달역할을 맡게 된 홀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왜 자신이 이 역할을 맡아야하는지와 더불어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인간들의 사회를 이루는 데 대표적인 세 가지는 마법, 기계, 종교였다. 마법과 기계는 생활에 밀접한 데다 각각의 능력 원리에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아 갈등의 골이 꽤 깊은 편이었다. 하지만 두 세력 간의 갈등의 골도 잠시 덮어둘 일이 생겼다.

종교 내부에서 지도자가 바뀌었는지 신의 은총 아래서 모든 이들을 포용한다는 뜻을 세운 채 갈등에 관여를 하지 않고 관조적인 입장을 취하던 종교계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세력 외엔 전부 배척하는 성향을 띠기 시작한 걸 계기로 종교계는 나머지 두 세력의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내세우는 뜻은 표면적으로는 같았지만신의 은총 아래서이 부분을 해석하는 게 바뀌었다.

, 신의 은총 아래는 자신들 종교계를 뜻한다는 거였고 종교계 내부에선 모든 이들을 포용하지만 종교에 속하지 않은 외부 세력들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물론 대놓고 이런 주장을 외친 게 아니었다. 다만 눈에 띌 정도로 그 태도가 보였을 뿐이었다.

여기까지였으면 누구나 다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쉬쉬하는 행동을 취했을 분위기였다. 종교계가 공공의 적, 특히 마법 세력과 대놓고 서로 경계할 정도의 사이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최근에 들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면서도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신관이 대사제의 직위에 오른 것으로 이는 종교계 내부에서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꽤 많은 덕을 쌓고 오랜 수행을 거쳐야 앉을 수 있는 게 대사제의 자리였는데 수습기간도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되자마자 그 자리에 앉으니 내부에서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이 젊은 대사제가 벌인 일로 인해 종교계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사람, 특히 마법 세력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바로 어떤 마법사에게 마력구속구를 채워놓고 소유하려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법 세력은 즉시 항의를 넣어 이 대사제를 비난하고 이런 사람을 대사제로 뽑은 종교계를 비판했다. 그 대사제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목소리들도 많았지만 종교계는 오히려 이 대사제의 정체를 숨기는 건 물론, 사건 자체를 덮으려고 들었다. 이에 마법 세력뿐만 아니라 기계 세력과 더불어 자급자족 하는 소수민족들 또한 크게 분노하며 종교계에 등을 돌렸다.

그 마법사는 어떻게든 탈출했는지 신전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드러냈고 동시에 신원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이번 사건을 일으킨 대사제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그 마법사가 바로 홀리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상대였다. 같은 대사제지만 홀리는 그 사건의 대사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관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종교계 전부가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이 지난 일이라 해도 사과조차 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찾아와 신탁이 내려왔으니 신전으로 와달라고 요청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제 목이 잘려 돌아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처한 홀리는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굴색이 창백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 신탁은 절대적입니다!”

그건 자네들에게 절대적이지 나에겐 해당사항이 아니네만.”

저희와 신은 별개입니다! 신께선 저희의 부족함을 일깨워주시고 저흰 그것을 고쳐나가는 사람입니다!”

안 고치고 덮어두려는 사건의 산증인이 바로 나일세.”

부디 저희가 아닌 신의 말씀을 들어주시길 간청합니다!”

다시 한 번 어이없는 눈빛이 쏘아져왔지만 홀리는 차마 눈도 못 마주치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홀리는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만 알지 그 안의 자세한 상황은 물론이고 뒷이야기도 잘 모르는 축에 속했다. 마력구속구에 당한 채 신전으로 끌려온 마법사는 절대 얌전히 있지 않았다. 마법을 못 쓰게 하려고 채운 마력구속구이건만 대체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던 건지 마법으로 신전에 제대로 된 깽판을 쳤다. 건물 벽체를 무너뜨리는 건 기본이요 중요 예물 또한 한 줌의 파편으로 만들어 놓는 걸 시작으로 신전 내부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단순히 부수는 것만으로 그만두지 않고 어디서 찾아냈는지 성배에다 성수를 담아 선반처럼 층이 나눠져 있는 투명상자를 허공에다 만들어내 그 안에 애매하게 걸쳐 넣어 놨다.

상자를 완전히 열면 안의 투명한 층들이 무작위로 움직여 성배가 튕겨나가게 설계해놓아 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반만 열거나 아주 조금 열면 성배가 기울어져 성수가 그대로 쏟아지게 걸쳐놔 성배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그릇에 담으면 즉시 사라지는 성수의 특성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만들기 까다로운 데다 귀한 성수고 예배에 반드시 필요해 신관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물론 이런 일을 벌인 마법사는 알 바가 아니었다.

신탁 또한 내 알 바가 아니지.”

이런 무례한 녀석을 봤나! 그래봤자 한낱 인간, 그것도 마법사 주제에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그 누구도 신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다!”

속을 긁는 말을 일부러 꺼내자마자 존대도 때려 치고 고함치는 홀리는 곧이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하늘을 날았다. 신관들이 모두 입는 하얀 옷이 날아가면서 펄럭이자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본 여행자들이 우스갯소리로 천사 날개는 천으로 되어있다며 더 멀어져 안 보일 때까지 농을 주고받았다.

거기 청년! 자네가 방금 천사 만든 마법사 맞지?”

천사는 모르겠고 사람 하나 날려 보낸 마법사라면 날세.”

젊은 청년에 왜 늙은이 말투를 쓰고 있어? 아무튼 재밌는 광경 보여준 답례로 좋은 정보 하나 주지. 우리 여행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어.”

대사제 하나를 날려 보낸 붉은 머리 마법사는 흥미 없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혹시 요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요술을 부리는 난쟁이들을 말하는 건가.”

난쟁이는 모르겠고 적당히 사람처럼 생겨서 잠자리 날개나 투명한 나비 날개 달린 게 바로 요정이지. 우린 요정을 찾고 있어.”

요정들은 가루를 뿌려서 자기네들 사는 데랑 모습도 감춰서 살고 있다고들 하지. 우리의 목적은 바로 그 가루고. 어때, 흥미 돌지 않나?”

마법사는 전혀 흥미 돌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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