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하고도 반나절만에야 도착했고 패치의 예상과 퍼블리의 불안은 빗나갔다. 그렇다고 치트가 했던 말처럼 주인이 나무를 보게 허락한 상황도 아니었다.

“...여기 정말 사유지 맞아요?”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게 바로 그토록 기대한 나무들이었다. 여기서 도착하자마자 보였다는 건 별다른 방해물이 없었다는 거였다. 집에서 설치하는 담이나 하다못해 낮은 울타리조차 없었다.

나뭇가지만 달려있는 채로 휑하니 널려있는 나무들은 얼핏보면 무덤에 흔히 있는 비석들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이곳 분위기자체가 스산해 무덤이라해도 이상하지 않아보였다.

은유적이 아니라 직접적이었나보네요~”

그래도 기본 관리는 되어있나보군.”

흙 상태를 살펴보니 땅 자체는 고르고 발에 채일만한 돌도 없었다. 흙을 갈거나 물을 준 흔적이 있는 걸 보면 완전히 방치하는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일행들은 그 외에 더 흔적이 있는지 살펴봤다.

더 이상 물질들이 열리지 않는다 해도 나무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텐데 이렇게 놔둔 걸 보면 차라리 누가 훔쳐가길 바라는 듯 싶어보이는군.”

자라나는 조건 자체도 까다로워서 아무데나 심는다 해도 금방 죽어버린다고 하니 그걸 믿고 방치해논 게 아닐까 싶슴다?”

조건이 까다로운 거지 불가능한 게 아니잖나.”

둘이서 왜 이렇게 방치를 해놨을까에 대한 의견과 추측을 하는 동안 용사는 이미 나무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나뭇잎도 네모낳게 각진 모양일까요?”

글쎄요~ 나뭇잎이 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임다.”
네모네모~!”

어이구 용사님 올라가면 위험함다~”

나무도 물질 못지않게 단단하고 튼튼한지 용사가 나무위로 올라타는 걸 넘어서 뛰고 있는데도 부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심 감탄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주인 있는 나무 위에서 그러는 건 굉장한 실례였으니 일행들은 용사를 잡아 내려오게 했다.

나무 멀쩡행!”

멀쩡하다고 해서 거기 올라타도 되는 게 아닐세.”

우웅? 괜찮다는뎅?”

패치가 뭐라 더 말하려던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수습하더니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나무 구경하러 오셨나요?”

나무를 보러오는 구경꾼이 많았는지 그렇게 묻는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부차적인 목적이었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많이 보러왔는데 요즘엔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오랜만에 오신 손님분들이네요.”

, 혹시 여기 주인이세요?”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 남편이 주인이에요.”

오랜만의 손님이니 여기 이렇게 세워두긴 그렇다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하는 말에 거절하려던 패치와 그런 패치의 입을 막고 감사하다며 눈짓하는 치트가 가장 먼저 뒤따라갔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패치에게 작게 들릴 정도로 말하길

여기만 마냥 보고 있기엔 우리는 아는 게 없잖습니까?”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다보니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눈빛이 날아왔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치트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젠 둘의 반응이 익숙해진 퍼블리가 안내자에게 다가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퍼블리예요. 저 분들과 함께 여기저기 여행하기 시작했어요.”

! 저도 예전엔 여행해볼까 고민했었는데, 굉장하시네요. 제 이름은 신시어예요.”

신시어가 안내한 곳은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데에 지어져 있는 오두막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더니

자기야! 오랜만에 손님들 왔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여니 안엔 아무도 없었고 탁자와 난로만 덩그러니 보였다.

아무래도 아들이랑 산책나갔나 봐요. 의자 꺼내올테니 기다려주실래요?”

, 괜찮은...”

오랜만에 사람들이 찾아온 게 그렇게나 반가웠는지 괜찮다고 말하며 창고에서 나무 의자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용사는 웃으면서, 퍼블리는 미안한 얼굴로, 치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패치는 무언가 미심쩍어 보이는 얼굴로 신시어를 보고 있었다.

, 모두 앉으셔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일행들 모두 앉았다. 사람이 많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둘씩 한 줄로 짝지어 앉게 되었고 치트와 같이 앉게 된 패치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이젠 우드에 대한 관심도 완전히 식었는 줄 알았는데 아직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반가워요.”

우드요?”

옛날에 나무에 열렸던 것들의 이름이 우드예요.”

정식 명칭은 처음 들었기에 모두 다음 얘기도 자세히 경청했다. 무엇으로도 자르거나 부술 수 없는 우드는 일렬로 일정한 줄을 맞추면 터지면서 소멸된다는 특성을 발견해 선대이자 남편의 어머니인 분께서 우드를 독점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도 들었을 때 패치가 잠시 말을 막았다.

그런 정보를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가?”

? 이건 잘 알려져 있는 얘기 아닌가요?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들어본 적 없네. 관련 책자도 본 적이 없고.”

그 말에 신시어는 당황과 혼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패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의문을 꺼냈다.

그리고 방금 한 말대로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얘기라면 왜 굳이 설명한 건가?”

스스로의 모순을 깨달은 신시어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대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멍하니 있기만 하는 모습에 패치가 다시 말을 꺼내려던 순간

여보!!”

한 남자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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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가 했던 말대로 자고 일어나니 감기는 깔끔하게 나아있었다. 평소와 같은 안색으로 목을 가다듬던 패치는 계속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무시하며 이번 마을에서 구매해야할 목록들을 쭉 훑어보고 있었다.

“패치.”

“왜.”

“할 말 없슴까?”

“없네.”

항상 짓고 있던 치트의 미소가 진해졌다.

“정말 없슴까?”

“없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패치는 그제야 짜증가득한 눈으로 치트를 돌아봤다. 담긴 감정이 어쨌든 드디어 제대로 봐주니 마냥 좋은지 미소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만 쏙 빼놓고 중요한 얘기를 한 것에 대한 서러움임다~”

표정과 행동을 보면 서러움은커녕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표정과 행동에 서러움을 담았다해도 통하지 않았을 패치는 찬물 가득 삼킨 말을 꺼냈다.

“용사에게 들었을 게 아닌가.”

“무엇을 말임까?”

빨간 눈썹 끝이 다시 한 번 위로 치솟으니 치트는 장난이라며 뒤에 말을 덧붙였다.

“제가 묻기 전까지 말하지 않은 건 꽤나 불공정한 처사라고 생각함다? 여행엔 가장 중요한 게 바로 협동과 공정인데 그게 깨지면 여행길이 상당히 위험해지죠.”

“그렇담 역으로 묻지. 왜 그 때 바로 무언가 더 발견한 건 없냐고 묻지 않았나? 바로가 아니어도 여기까지 오는 나흘간 물어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네.”

짙은 미소가 옅어졌다. 살짝 가라앉듯이 그어진 호선에서 나온 말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살짝 내려간 눈매와 눈썹 덕분에 장난스럽던 표정이 한순간에 처연해졌다. 마침 내려오려다가 둘의 대화에 어정쩡하게 다시 올라가려던 퍼블리의 마음 속에 당황과 미안함이 깃들었고 표정에도 떠올랐다. 반면에 정면으로 보고 있던 패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래, 이번은 불공정했네. 사과하지.”

다만 나온 말이 꽤나 의외였다. 퍼블리는 물론이고 치트 또한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패치는 다음엔 내용 누락을 하지 않고 공정히 말해주겠다고 하며 다시 목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퍼블리는 다시 아래로 내려왔고 치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내를 탐색하려고 훑어보는 시선은 여전히 짜증났는지 패치는 자리를 떴고 치트의 시선은 끈질기게 그 뒤를 따라갔다.

“어제 수프 가져가면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마침 가까이 온 퍼블리에게 질문이 갔지만 짐작가는 게 없는 퍼블리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유하게 넘어간 게 있었지만 이 또한 말하기 애매했으니 꺼내지 않았다.

“저희가 이번에 가는 데가...”

“음? 아, 각진나무 무덤 말입니까?”

“네, 좀 생소한 지명이라서요.”

“그럴만 합니다. 사실 지명 자체가 은유적인 표현이지요.”

잠깐 목을 가다듬으며 고를 말을 나눈 치트는 쉽게 설명했다.

“예전에 그 어떤 걸로도 부숴지지 않는 물질이 열리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물질들은 하나같이 전부 네모지게 각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질들은 어느순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앙상한 나무만 남았지요. 나무 자체도 그 물질처럼 꽤 각이져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곳을 각진나무 무덤이라고 부릅니다. 무덤이라는 단어가 참 은유적이죠?”

사라져버린 물질들이 대상일지 그 자리에 남아버린 나무들이 대상일지는 개개인의 해석에 따라 달랐다. 신기하단 표정으로 듣고 있던 퍼블리는 네모낳게 각져있는 나무의 모습을 상상하는 듯 싶었다.

“그 물질 자체도 매우 귀한 거라 사라진 이유는 누군가가 작정하고 훔쳐갔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지.”

아까 전 자리를 떴던 패치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옆에 눈을 빛내는 용사가 있는 걸 보면 용사를 데리러 간 듯 싶었고 데려오던 도중 얘기를 듣게 된 셈이었다.

“네모네모오~?”

나무가 네모낳게 각졌다는 부분이 용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기세라 모두가 합심해서 용사를 진정시켰다.

“아직 저흰 준비가 덜 됐습니다. 게다가 지금 온 만큼 더 가야 나올 장소라 하루종일 뛰어가도 오늘 안엔 도착 못합니다.”

“날아가자~!”

“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사람이 많아 지속시간이 얼마 안 가니 나는 것도 불가능하네.”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전서구를 떠올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소리치며 소란을 일으킬 전서구가 눈에 훤했다.

“이잉~”

“장소는 움직이지 않으니 지금처럼 가요 용사님, 네?”

여러 가지 힘든 이유와 설득 끝에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신 오늘 바로 출발하게 됐다. 치트는 어제까지만해도 감기로 고생했던 패치가 걱정된다며 끌어안았고 그에 당연하게도 응징이 가해져 옆구리를 붙잡고 일행들 제일 뒤쪽에서 뒤따라가게 됐다.

“사실 가도 나무들은 못 볼 확률이 높네. 왜냐면 거긴 엄연히 사유지니 말일세.”

“네? 그럼...”

“주인이 있다 이 말이지. 다만 희귀한 물질을 개인이 독점하고 있는 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아 찾아오는 누구나 가져가지 않는 대신 물질을 볼 수 있게 했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네.”

“걱정 마십쇼~ 요즘엔 사라진 물질 대신 물질이 열리지 않는 나무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진나무 무덤이라고들 부르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소문이니 직접 가서 봐야 알겠지.”

“출입금지라고 해도 신탁에 관해 얘기하면 들여보내주지 않겠슴까?”

“거기 주인이 종교인이란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네만.”

“여기서도 종교인은 저뿐이잖슴까?”

네모난 나무에 대해 기대하고 있던 퍼블리는 둘의 대화에 점점 불안함과 아쉬움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가장 앞서 걷고 있는 용사는 기대가 매우 가득해 온통 머릿속에 나무 생각만 있어 둘의 대화를 못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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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나서 둘러봤을 때 초록색 인형 친구를 봤다 이 말이군요?”

!”

그 초록 친구는 어떻게 했나요?”

묻어줬어!”

...어줬군요. 누가 묻자고 했습니까?”

빨간 칭구!”

그 대답에 치트의 미소가 진해졌다. 때마침 대답이 끝난 순간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대화는 끊겼다. 중요한 정보를 빼낸 치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고 용사는 배가 꽤 고팠는지 나온 음식을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그른데~ 까만 칭구는 빨간 칭구랑 왜 싸웠어~?”

?”

용사가 이에 대해 물어볼 줄은 생각하지 않았는지 치트는 크게 뜬 눈으로 용사를 보고 있었다.

~ 얘기하긴 꽤 복잡해서 말임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했는데 제가 좀 더 크게 잘못했죠?”

~ 그렇구나아~ 둘이 언제 화해할 거양?”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패치 입장에서는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것 자체가 기회를 주는 거나 다름 없었지만 용사는 완전한 화해를 바라는 듯 싶었다.

패치의 마음이 풀려야 말이죠~”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면 되는뎅!”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우선 패치 마음이 풀려야지요?”

그럼 얼른 풀러가장!”

치트는 용사의 어깨를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지금 들이닥쳤다간 아무리 패치에게 조금 유한 태도를 받는 용사라 해도 서늘한 눈빛을 받을 게 분명했다.

아직은 안 됨다~”

화해는 빠를수록 조아!”

싸우고 감정이 상한 상태라면 누구나 시간이 필요한 법임다. 그리고 이건 저와 패치의 일이니 저희 둘이 잘 해결해볼 테니 용사님은 마음만으로도 괜찮슴다~”

얼마나~?”

글쎄요~”

둘의 대화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빠른 화해를 원하는 용사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치트의 말이 끝도 없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빠른 화해가 좋다,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필요한가, 자신도 잘 모르겠다, 다시 빠른 화해가 좋다 식으로 빠져 나갈 굴레 없이 빙빙 돌고 있었다.

 

사실 지도제작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땅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한 눈에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늘을 나는 도구들을 구매하기엔 작은 마을 동네는 생필품 들어오기도 바빴고 기껏해야 비눗방울을 연속으로 나오게 하는 장난감이 최대였다. 높은 건물이라고 해봐야 2층집이 대부분인 곳엔 그리 대단한 경치를 기대할 순 없었다.

이렇게 보면 신탁과는 별개로 이번 여행에 가장 목적성이 뚜렷하고 가장 의미가 있는 건 퍼블리였다.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패치의 입장에서는 퍼블리가 지금 여행을 그만뒀으면 했다. 하지만 이유가 전해지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건 참 답답하군.”

아예 말도 안 꺼내고 혼자서 삭히는 분도 있었는 걸요.”

패치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에 퍼블리가 신탁 및 여행과 관계가 없었다면 패치는 진즉에 그 때 있었던 일을 속으로만 삭히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누구였더라? 몇 년전에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가물가물하네요. 자주 못 본 분도 많았으니까요.”

가져온 수프는 이미 다 먹은지 오래였다. 퍼블리는 얘기를 들어주는 게 좋은지 아직은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고 패치도 듣는 게 그리 나쁘진 않았는지 적당히 반응하면서 조금씩 말도 꺼냈다. 따뜻한 수프 덕분인지 기침도 꽤 멎은 패치는 얘기를 듣는 한 편 갑작스럽게 면역력이 떨어진 상황에 의문이 들었다.

주량이나 멀미 같은 부가적인 면에서 체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별개로 체력과 면역력은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좋은 편이었고 감기에 걸려도 실제론 하루, 길어봤자 이틀을 넘긴 적이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굉장히 찝찝한 느낌에 패치의 눈매가 자연스럽게 가늘어졌다.

그러고보니 나머지 둘은 뭐하고 있나?”

, 저한테 수프를 가져다주라고 했으니까 두 분이서 밥 먹고 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건만 무의식의 위력은 무서웠다. 마침 패치의 눈매도 가늘어져 있었으니 퍼블리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퍼블리를 보던 패치는 아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다.

자네도 가서 식사하게.”

, 아뇨 괜찮...”

수프 덕분에 목도 안정 됐으니 잠을 자면 완전히 나을 걸세.”

치트가 시켰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온건하게 넘어가려는 패치의 태도에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푹 주무시고 나으라는 말을 남기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계단 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패치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짐가방을 돌아봤다.

“...일부러 함구하고 있었던 걸 알아챘겠고

폭탄 챙긴 것도 눈치챘겠군.

누군가는 적과 머리 싸움하는 게 즐겁다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패치는 그렇지 않았다.

 

마법사님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다행임다~ 역시 따뜻하고 제대로 된 걸 먹이는 게 최고죠.”

한숨 푹 주무시면 완전히 나을 것 같대요.”

저도 함께 아프긴 했지만 오는 내내 아팠던 건 패치가 유일했으니 마음이 아팠는데 한숨 돌렸네요~”

퍼블리가 내려왔을 땐 식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열심히 먹던 용사는 배가 부르자 노곤해졌는지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다.

꽤 오래 있으셨던데 패치도 오랜만에 길게 이어지는 대화가 즐거웠나봄다?”

대화라기 보단...저 혼자 실컷 얘기하고 들어주셨어요. 도시에서의 일은 당황스러웠지만 여기 오는 나흘간 여행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여행 떠나기 전이 떠올랐거든요.”

그랬군요. 어이구 용사님? 그러다 머리 부딪히면 큰일남다?”

용사를 흔들어 깨운 퍼블리는 비몽사몽한 상태의 용사의 팔을 잡아 지탱하며 먼저 올라가겠다고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포크로 빈 그릇을 깡깡 두드리던 치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식사값을 치르고 뒤따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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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 도착했네요~”

콜록! 자네들은 먼저 가서...”

네네~ 몸 멀쩡한 저희가 전서구씨 연락을 받겠슴다. 아직 다 안 나은 우리 패치께선 어서 가서 푹신한 침대에 누워계셔야죠?”

밀지 마핡! 콜록!”

저기...어차피 약속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여기서 모두 기다리고...”

왔다아아아아!!!”

! 크게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숨을 몰아쉬는 커다란 비둘기의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이고 날개 아파라~ 최고 속도로 날아오니 날개가 다 쑤시네~!”

사람들의 시선과 전서구가 쨍쨍 외치는 소리가 골을 울렸는지 안 그래도 창백한 패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콜록! 사람, 들 상태는 어, 떤가?”

움머? 감기걸리셨어요?”

대답.”

걱정해줘도 까칠하다며 궁시렁거리던 전서구는 점점 가늘어지는 패치의 눈매에 잽싸게 대답했다.

사람들 상태는 처음이랑 달라진 게 없어요. 다들 색색 숨만 잘 쉬면서 잘 자던데요?”

수척해지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전혀. 숨만 쉬는 거 빼면 사람모양 인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달라진 게 없던데?”

그렇다면 패치의 말대로 그들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는 게 증명됐다. 걱정을 조금 덜은 퍼블리는 방문해야할 장소가 여럿 남았다는 거에 다시 긴장했다. 또 무슨 이상한 일이 벌어져있을지 몰랐고 기술의 도시처럼 장소가 뒤집어지고 사람들이 잠들어서 시간이 멈춰있을지 몰랐다.

, 콜록! 수고했네.”

, 알면 공짜로 부려먹지 마시고요!”

몸이 콜록! 나으면...벌레라도 잡아 주겠네.”

필요없거든요!?”

왁왁 크게 소리치는 전서구를 무시한 패치는 시간 고정에 대해 신경이 쓰였다. 만약 패치가 거기 계속 있었다면 외부 영향에 고정이 깨지는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깨어날지 실험을 해봤을 테지만 당장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서구에게 또 부탁을 하면 비둘기 날개 혹사시킬거냐며 난리를 피울 게 뻔했기에 패치는 다음 목적지인 각진 나무 무덤에서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면 그 때 가서 해보기로 결정했다.

수고하셨슴다. 일단 패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자세한 얘기는 우선 숙소를 잡고 할까요?”

자세하고 뭐고간에 내가 얘기한 게 끝인뎁쇼?”

그렇담 먼 길을 날아온 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마실 거라도 사 드려야겠네요~”

그 말에 전서구는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이 있어 바쁘다는 거였다.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쓱 둘러보는 게 지금에서야 발견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약간 무안해보이기도 해보였다.

그럼 전 갑니다, 웬만해선 다시 보지 말고요!”

전서구는 그렇게 외치며 날아올랐다. 보고 있던 치트는 전서구가 엄지손톱만큼 작아질 쯤에 얼른 숙소를 찾자며 일행들을 재촉했다. 전서구가 날아갈 때도 올려다보지 않았던 패치는 서늘한 눈으로 치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치트는 눈웃음을 지으며 패치의 팔을 잡아 끌었다. 때마침 터져나온 기침 때문인지 패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패치는 바로 가서 쉬십쇼. 보니까 아직 팔이 뜨겁던데요?”

그러지.”

순순한 패치의 대답에 놀랐는지 검은 눈이 크게 뜨였다. 패치는 그런 반응도 신경쓰지 않고 먼저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흐음...이건 이것대로 신경 쓰이네요~”

, 신경쓰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죠.

치트는 마저 올라가려던 퍼블리를 불러세웠다.

퍼블리님, 따뜻한 수프를 시킬 생각인데 패치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용사를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치트는 용사를 담당할 생각인 듯 싶었다. 퍼블리는 감사하단 말을 붙이며 잠시 기다리자 나온 수프를 들고 올라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던 치트는 용사를 끌고 창가 자리로 데려갔다.

용사님, 드시고 싶은 거 있나요?”

꼬기!”

네네~ 다 될 때까지 좀 걸릴테니 얘기나 해볼까요? 짐과 뒷정리를 하느라 도시를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슴다. 혹시 본 게 있습니까?”

! 인형 칭구!”

다른 건요?”

~ 자고 있는 칭구들!”

그 둘이 얘기하고 있는 동안 퍼블리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기침 섞인 허락이 돌아왔다.
좀 드실래요?”

콜록! 고맙네.”

퍼블리는 대사제님이 시켰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패치가 치트를 싫어하는 건 옆에서 계속 봐왔으니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퍼블리는 갈까 싶었지만 시간이 애매했고 배도 그리 고프지 않아 패치와 대화하기로 했는지 옆에 앉았다.

이렇게 여행을 나온 건 처음이에요. 사실 지내고 있던 마을에서 나온 일도, 기술의 도시에 들렀던 일도 전부 깨어나면 바로 까먹는 꿈이 아닐까 싶어요.”

꿈은 본 적 없는 걸 만들어낼 수 없네. 자네는 기술의 도시를 본 적이 없으니 지금은 꿈이 아닐세.”

따뜻한 게 목을 넘어가니 조금 괜찮아졌는지 기침이 가라앉은 패치는 조금 편안해보였다.

돈은 모아두긴 했지만 어딜 가장 먼저 가는 게 좋을지, 야영은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굉장히 무턱대고 나온 것 같아요. 그리고 신탁이란 걸 들었을 땐 정말 놀랐어요! 전설로만 들었는데 제가 그 당사자라니!”

패치는 수프를 넘기면서 묵묵히 들었다. 아직은 목이 부어있어서 말을 많이 한다면 기침이 터질 게 분명했고 함께 여행하는 일행의 생각과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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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가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오니 모두들 짐을 다 정리하고 챙긴 상태였다. 치트의 짐은 본인이 제일 먼저 정리를 해놔서 들기만 하면 끝이었다. 치트는 묻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일행 가운데 섞여들었다. 전서구는 나흘 후 쯤에 찾아가겠다며 어디에 갈 건지 물어봤다.

다음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나?”

마을 두어개는 들려야함다.”

각 마을간의 거리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틀거리임다.”

그렇담 첫 번째 마을에서 자네를 기다리겠네.”

마을 어디서 만나요? 이래봬도 시선 많이 끄는 몸이라

입구에서 만나지.”

깜빡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걸 끝으로 일행들은 움직였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보던 전서구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 참 기묘한 조합일세...”

혼자여도 소란스러운 비둘기 마저 떠나고 도시에 남은 건 정적뿐이었다.

 

여행길은 꽤 조용했다. 도시 사람들의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소식을 듣기 위해선 다른 길로 빠져선 안 됐고 용사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눈길을 사로잡는 게 없어선지 웃는 얼굴로 얌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패치는 정말 준비성이 대단한 것 같슴다.”

저리가게.”

요즘 날씨가 맑아서 고려도 안 했는데 이렇게 우산과 우비도 준비하다니 정말 대단하심다.”

아니까 좀 떨어지게.”

비가 오니 체온도 떨어지는 것 같네요. 이렇게 붙어가면 문제 없겠죠?”

꺼져.”

그동안 비가 안 온 걸 전부 몰아서 내리는 건지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패치는 우산과 우비를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일행들과 여행하기 전에 마련했던 건지 각자 하나씩만 가지고 있었고 우산은 퍼블리와 용사가, 우비는 패치 본인이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산은 세 명이서 쓰기엔 좁았고 우비는 당연하게도 1인용이었다.

저 비 맞습니다만?”

맞게

감기 걸릴지도 몰라요?”

걸리게.”

열나고 앓아누우면 곤란함다~”

곤란하지 않네.”

떼놓고 가면 된다며 덧붙이는 말에 치트는 매정하다며 우는 소리를 했지만 패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기어이 우비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난리난 둘 말고도 퍼블리와 용사쪽도 그리 얌전하진 않았다.

용사님! 비 다 맞아요!”

오와아아아앙!!!!”

감기 걸린다고요!!”

용사는 오히려 비를 맞는 감각이 좋은지 어느 순간부터 열심히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우산을 든 퍼블리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용사는 순순히 우산 아래로 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비가 겨우 그쳤을 때 가장 덜 젖은 건 퍼블리였고 가장 많이 젖은 게 나머지 셋이었다. 우비 속으로 파고드는 걸 두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우비가 찢어졌고 그 대가로 치트는 비오는 날 하늘을 날아야했다. 결국 비가 그칠 때까지 비를 전부 맞아버린 셋은 저체온증에 시달렸고 예정에 없던 휴식을 갖게 됐다.

모닥불이 따뜻함다~ 이런 게 여행의 낭만이죠.”

낭만이 다 얼어죽었군.”

~ 아직 춥슴까? 이리오십쇼. 옷이 젖었을 땐 벗은 채로 서로를 끌어안아야 함다.”

벗은 채로 하늘 날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게.”

일행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퍼블리가 수건을 돌리고 불을 더 지필 장작을 가져왔다.

수고가 많네.”

우산 덕분에 비를 피했으니까요.”

그보다 불 안에 넣는 종이는 자네가 그리던 지도 아닌가?”

.”

불 아래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종이는 페르스토가 안내하고 마법진이 있었으며 그 자리에 흰 국화가 나타난 건물에서 그린 지도였다. 그리던 시간과는 다르게 순식간에 타들어가서 재만 남아버렸다.

괜찮아요.”

조금 멍한 눈으로 보던 퍼블리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대답한다.

바로 뒤집혀버렸는 걸요.”

급하게 밑그림만 그린 지도는 제대로 완성하기도 전에 하룻밤만에 뒤집혀버린 도시 때문에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뒤집히기 전에 이렇게 생겼다는 정보로 남기기엔 길만 간략하게 그린 밑그림만으론 의미가 없었다.

길이 전혀 달라졌는 걸요.”

대답을 들은 패치는 납득했는지 불로 시선을 돌렸다. 장작과 종이를 연료삼은 불은 당분간 꺼질 기미가 없어보였다. 하늘은 비가 그친 이후론 어둑해지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훨씬 더 다음 마을 가까이로 갔을 텐데 비로 인해 늦어졌다. 얌전히 갔다면 좀 더 갔을 테지만 들러붙는 치트와 신나게 비 맞고 뛰어다니는 용사로 인해 거의 나아가지 못하다시피 했다.

다시 비가 안 내린다는 가정이 없으니 다음엔 빨리 가야하네.”

쉬엄쉬엄 갑시다~ 마을은 어디 안 도망감다~”

마을에 와야할 전서구가 떠나겠지.”

아직 이틀도 안 됐슴다.”

이 정도 속도면 일주일도 부족할걸세.”

다시 말싸움을 벌이는 패치와 치트였고 퍼블리는 이제 익숙하게 둘의 말싸움을 바람소리 삼아 야영준비를 시작했다. 옆에서 담요 한 장만 몸에 두른 용사가 자기도 같이 나무 세우고 싶다며 옆에 따라붙었다.

패치와 치트의 대화를 빙자한 말싸움과 협박, 협상 끝에 내일은 오늘 지체한 만큼 더 가겠다며 패치가 선언했다.

하지만 다음날 감기에 걸렸는지 열로 앓아누운 둘로 인해 더 가긴 커녕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를 많이 맞고 모닥불도 덜 쬔 용사는 일행 중에서 가장 쌩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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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머? 평생 숲 안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줄 알았던 양반들이 웬일로 나와있대?”

자네 나랑 안면이 있었나? 난 자네를 처음 보는 것 같네만.”

? 그럼 아닌가...사람 잘못 봤나봐요. 하지만 이쪽은 확실히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웅~?”

용사는 고개를 기울이며 전서구를 빤히 쳐다봤다. 용사도 전서구를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숲에서 뒹굴뒹굴 잘 구르고 있던 거 날다가 자주 봤는데 말이지.”

용사가 있던 곳이 환각의 숲이었으니 전서구가 본 게 용사가 맞을지도 몰랐다.

환각의 숲은 직접 들어가지 않는 이상 환각에 걸리지 않는가보군.”

..? 환각의 뭐요?”

유용한 정보니 나중에 가게 된다면 그 땐 날아서 가는 게 더욱 안전하겠네.”

아니 잠깐만요. 방금 환각의 숲이라 하지 않았어요? 거 들어가면 다 실종돼서 유품도 안 나오는 위험천만한 숲? 저기요?”

환각의 숲이라는 말에 전서구가 불안 가득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지만 그에 대해 대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당장 피해를 주지 않은 환각의 숲이 아닌 지금의 상황이었다. 결국 전서구도 묻다가 지쳐 포기했다.

어떻게 안 될까? 상태만이라도 알려주면 돼.”

끄흐으으으으음...!!”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 표정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전서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찝찝함의 승리였다.

고마워!”

걍 냅두면 꿈자리 사나울까봐 하는 거야!”

다음엔 불러도 안 올 거라며 외치는 말에도 상황이 해결되어서 기쁜지 퍼블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한숨을 쉬는 전서구를 보던 패치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저 비둘기를 타고 다니면 여행이 금방 끝나지 않을까. 물론 전서구가 들었다면 꿈자리고 뭐고 본인이 사나워질 거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렸을 테지만.

여전히 의문이 가득하지만 도시 여행은 여기까지로 할까요?”

! 아까 발...!”

퍼블리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패치였다. 아까 발견한 뼈 모양의 살상용 기계에 대해 치트에게 얘기하려던 퍼블리였지만 단호한 패치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 무슨 말 했슴까?”

아무것도 아닐세.”

패치는 그리 말하면서 용사를 힐끗 쳐다봤다. 용사는 전서구가 여전히 신기한지 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나머지도 전부 정상화를 해봐야 알겠지.”

, 그건 그렇겠죠?”

그렇담 얼른 짐 챙기게.”

그 전에 잠깐 가보고 싶은 데가 있는데 갔다와도 됩니까?”

그 말에 패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을 받은 치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하길

저기 떠 있는 그 건물 저도 한 번 구경해보고 싶네요.”

패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여겼는지 그럼 갔다오겠다며 전서구의 날개를 잡았다.

? 뭐요?”

저 건물까지 부탁드림다~”

아니 이 양반이 멀쩡한 비둘기를 운송수단으로 삼네!?”

사실 패치도 아까 전까진 같은 생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당연한 수순으로 전서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정으로 준 피리 때문에 공짜 소식통은 물론이고 이동수단으로 써먹힌다며 억울함과 서러움을 쏟아댔고 치트는 눈꼬리 하나 꿈틀거리지 않은 채 여전히 웃는 낯으로 사례는 드릴 테니까 부탁드린다는 말만 건네고 있었다.

이번 한 번만 해주는 줄 알아요!”

~~”

치트르르 태운 전서구는 못마땅함과 한숨 가득한 표정으로 날아올랐다. 옆에서 쿡쿡 배를 찌르는 용사가 없어서 그런지 약간의 해방감도 옅보였다. 날아가버린 전서구를 보고 용사가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돌아오면 자신도 태워달라고 조를 기세였다.

...마법사님? 왜 사제님께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반응을 볼 생각이네. 이후로 자네에게 물을지, 용사에게 물을지.”

여전히 용사를 보고 있던 패치가 그리 대답했다.

정말 궁금하다면 용사에게 먼저 묻고 그 다음에 자네에게 묻겠지, 용사는 말린다해도 그대로 말해주겠지만 용사 본인의 최대 표현상으론 상세한 묘사는 하지 않을테니 그 다음엔 자네에 물을 걸세.”

만약 묻지 않는다면요?”

스스로도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거겠지.”

 

공중에 떠 있는 건물로 날아가던 전서구가 돌연 이렇게 말했다.

언제봐도 마법은 참 신기하단 말이지...”

마법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저기 널린 게 마법인데 못 볼 게 뭐있으요? 아니 널린 건 마법도군가?”

그렇군요~”

밑에 받치는 거 하나 없이 그냥 공중에 둥둥 떠있게 만드는 마법이 참 신기하다는 둥 전서구는 쉴새없이 재잘거렸고 치트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맞춰줬다. 건물 앞에 도달한 치트가 문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빨랑 볼일보셔!”

금방 나옵니다~”

건물 내부는 퍼블리가 나왔을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게 없었다. 퍼블리의 설명대로 한 가운데에 새하얀 국화가 놓여있었다. 아마 그 자리에 커다란 마법진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건물 안도 하얗고 국화도 하얗네요. 녹색 줄기가 없었다면 어딨는지 몰랐겠는데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치트는 아랑곳 않고 국화가 있는데로 다가가며 계속 말을 꺼냈다.

국화의 꽃말에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보통 애도의 표현으로 쓰이지만 꽃말은 이렇더군요.”

등에 메고 있던 검은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연 후 꽃을 꺾어낸 치트가 향기라도 맡듯이 가까이 가져왔다.

감사, 성실 그리고

눈을 한 번 느리게 감았다 뜬 치트는 국화를 떨어뜨리듯이 상자 안에 넣었다.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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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 맞나요?”

작은 칭구들처럼 딱딱행!”

아니 딱딱하다고 해서 무조건 인형은...”

용사와 퍼블리는 큼직한 파편을 모아 얼추 맞춰봤다. 그러자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인 모습은 인형이라고 하기엔 무리였다. 굳이 따지자면 사람의 뼈같이 생겼다.

꽤 크네요...”

요기 얼굴도 있당!”

얼굴은 녹색과 검은색이 섞여있었지만 색만 빼놓고 보면 해골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퍼블리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뼈모양으로 설계된 기계를 살펴봤다. 진짜 뼈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밤에 봤다면 굉장히 놀랐을 것 같다는 감상을 하며.

빨간 칭구다!”

용사의 외침에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왔는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둘을 보고 있는 패치가 있었다.

자네들 거기 앉아서 뭣하나?”

인형 칭구 고치고 있엉!”

골목에 떨어져 있던 기계 파편을 맞춰봤어요.”

비록 기계쪽이 아닌 마법쪽이라 해도 일행 내에서 기술자로 알려진 패치였다. 패치는 뼈모양 기계를 쭉 훑어보더니 표정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살상용 기계로군.”

?”

저 팔에 달린 게 무기일세. 아주 작정하고 만들었군. 일단 떨어지게, 저기 가운데 있는 건 자폭용 폭탄이니.”

그 말에 퍼블리는 군말 않고 용사의 팔을 잡아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둘이 충분히 물러났다 싶을 때 패치가 가까이 다가가 폭탄과 그 주위를 살펴봤다.

자폭하기 전에 전자기펄스가 터져서 제 기능을 못한 것 같군. 하지만 보통 튼튼해보이는 게 아닌데 뭐가 이렇게 망가뜨린 거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던 패치는 나중에 더 조사해봐야겠다며 파편들을 챙겨들었다.

폭탄까지 가져가나요?”

그냥 두면 오히려 더 위험하네. 언제 터질지 모르니 내가 상태를 고정시킨 상태로 들고다니는 게 더 낫네.”

여전히 염려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상태를 어떻게 고정시키는지 그러면 정말 안전한지에 대해 묻기엔 물어봐도 모르는 용어가 나올 거라는 걸 깨달은 퍼블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한 눈으로 폭탄을 만지려는 용사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있는 듯 싶네. 들어가보니 방 안 침대에 누워있더군.”

잠깐만요, 어떻게 들어간 거예요? 전부 문이 잠겼는데...”

창문이 열린 집이 몇 있었네.”

숨을 쉬는 걸 보면 죽지 않은 게 확실했지만 모두 깨어나지 않았다. 큰 소리를 내보고 어깨를 흔들어봐도 색색 숨소리만 들려왔다. 아쉽게도 패치에겐 강제로 깨우는 마법이 없었고 마법을 걸어도 깨어날까 싶어 우선 이 상태를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다가 둘을 만나게 된 거였다.

깨어나지 않는 것만 빼면 큰 외상같은 건 보이지 않았네. 현상이 뒤집히면서 다친 것도 무효가 된 것 같더군.”

그나마 다행이지만...”

깨어나지 않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였다. 패치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었지만 기계파편과 용사를 보고 바로 일어나 짐들이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치트는 침낭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로 다가간 패치가 불쑥 물었다.

정상화가 세계 전부가 아닌 일부만 되면 그 일부 구간은 고정된 상태인가?”

오우! 날카로운 질문입니다만...그건 저도 아직 모름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슴까?”

집 안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잠들어있더군. 다만 깨어나지 않던데.”

덧붙인 말에 뭐가 문제인지 알아챈 치트는 입가로 손을 가져가 생각에 잠겼다. 본인도 이런 경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마법으로는 깨울 수 없습니까?”

강제로 깨우는 마법은 나에겐 없네.”

...이거 난감하네요. 그렇담 방법은 며칠 동안 여기서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밖에 없는데 말임다.”

며칠이 지나도 사람들 상태가 지금과 다를 바가 없으면 패치의 말대로 이곳은 고정된 상태라는 게 증명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식량에는 한계가 있었고 다른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라는 계산 하에 구매하고 준비해논 식량이었다.
난감한 상황이네요~”

뒤따라와 둘의 대화를 들은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 하고 박수를 짝 쳤다.

방법이 있어요!”

퍼블리는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었다. 매우 작은 크기의 피리였는지 삐 소리가 울려퍼졌다. 피리소리가 울려퍼져도 당장 바뀐 건 없었다. 소리에 놀랐는지 지붕에 앉아있거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비둘기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오른 것 외엔.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서 둥근 그림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점점 커졌다.

멀리도 불렀네에에에에에!!!!!!”

! 하는 소리와 함께 일행들 가운데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정확히는 착지했다라는 표현이 옳겠지만 소리가 소리인 만큼 여기 있는 모두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떨어진 무언가의 정체는

웜머? 도시가 웰케 휑해졌어?!”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큰 덩치의 비둘기였다.

그게 사실은...”

어제에 비해 진정된 상태인 퍼블리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마법사가 없다는 대목에서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놀라던 비둘기는 갑작스레 뒤집힌 도시의 풍경과 집 안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그 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여기 죽치고 있기 힘든 상황이고 대신 내가 사람들 안색 좀 살펴달라?”

!”

그에 큰 비둘기는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본인도 바쁜 몸이고 관련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외면하기엔 상당히 마음이 걸려보이는 표정이었다. 고뇌에 찬 신음을 흘리던 전서구는 일행들을 둘러보다가 용사와 패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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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가운데서 노숙을 하게 될줄이야.”

원래라면 바빠서 밤을 샜어야 했을 검다.”

그 말대로 부상자들의 수가 엄청났으니 밤을 샜어야했을 거란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을 두드리면서도 사람들이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하며 퍼블리가 물었지만 둘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함부로 문짝을 뜯거나 창문을 깨기엔 엄연히 주인이 존재할 게 분명한 집에 무단침입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짐들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에요.”

건물도 사라졌으니 방을 잡은 숙소도 사라진 건 당연했다. 거기에 두고 온 짐들이 꽤 많아 그대로 같이 사라진 건가 했지만 숙소가 있었던 걸로 추측되는 자리에 짐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놀라운 건 퍼블리가 구매했던 물건들도 그대로였다.

만약 짐들까지 사라졌다면 여행은 그대로 끝이었네.”

사라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임다~”

침낭을 꺼내던 퍼블리는 까맣게 불이 꺼진 건물들을 둘러봤다. 여전히 사람들이 사라진 게 신경이 많이 쓰였는지 불안한 모습을 계속 보였다. 그런 퍼블리에게 패치가 말했다.

현상이 전부 뒤집힌 만큼 사람들이 다쳤다는 현상도 전부 사라졌으니 오히려 멀쩡한 상태일 걸세.”

그치만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거라면...”

존재가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네. 죽어서도 시체가 남고 시체가 사라져도 기록이 남아. 시간이 많이 흘러 기록 또한 사라졌다해도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니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할 순 없네. 그러니 마법사가 멀쩡히 있는 상태일 때 각자마다 있었던 자리에 있을 걸세.”

침낭을 꺼내면서 페르스토가 건넨 책을 짐들 사이에 넣은 패치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할 건 사람들이 어떻게 됐느냐가 아니라 왜 마법사들이 없어진 건가일세.”

...잠깐 어디 떠나있던 건 아니..겠죠?”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 외에 짐작이 가는 게 없는 퍼블리는 패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자세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조금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던 패치는 치트를 노려봤다.

자네는 이 일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나?”

패치의 기대에 맞추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능청 떠는 모습에 노려보던 눈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심증이 가득했으나 물증이 없었다. 단 둘이라면 진즉에 털어봤겠지만 보는 눈이 둘이나 있었다. 특히 용사가 제일 골치 아팠다.

“...어쨌든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날이 밝으면 도시를 조사하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휑하고 줄어든 게 많지만 다른 마을들과는 차별화된 건물들과 기구, 땅 크기 자체는 달라진 게 없어 여전히 도시라고 불릴 법했다.

용사는 이미 잠들어버린지 오래라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고 퍼블리는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잠이 안 들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몸은 피로했으니 걱정과는 다르게 금방 잠들었다.

패치~ 잡니까?”

그 둘과 다르게 피곤할 일이 없는 치트는 눈만 감은 채로 패치를 불러봤다. 대답은 없었다.

패치랑 같이 눕는 게 얼마만임까. 옛날 생각 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깨어있었다면 화내면서 옛날이 5년 전의 그 빌어먹을 날이나며 뭐라도 던졌겠죠?”

여전히 대답은 없었고 치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잠깐 뜬 눈 사이로 노란 빛이 빨간 뒤통수를 훑어보다가 다시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여기서 유일하게 감지 않은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건 용사였고 그 다음은 패치와 치트였다. 동시에 일어난 게 기분이 나빴는지 패치는 간이세면대에서 빠르게 씻고 도시를 둘러보러 갔다. 가장 마지막에 깬 건 당연하게도 퍼블리였다.

, 몇 시예요!?”

좀 더 주무십쇼~ 어제 엄청 바빴잖슴까?”

다시 잠들기엔 마찬가지로 어제 함께 바빴지만 여전히 밝고 쌩쌩한 얼굴로 뛰어다니는 용사가 있었다. 퍼블리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패치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

일이 있으면 워낙 다 처리하시려는 분이니까 일어나자마자 씻고 바로 도시를 돌아보러 갔습니다.”

부지런하시네요...”

부지런함을 빼면 상상이 안 가는 분이잖슴까~”

저도 이제 잠이 다 깼으니 산책할 겸 돌아다녀볼게요.”

마찬가지로 간이세면대에서 씻은 퍼블리는 겉옷을 챙겨입고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침이라 그런지 밝긴 했지만 낮처럼 환하진 않은 도시는 조금만 더 어둡거나 안개가 깔려있다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을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들이 없어져서 당황했지만 밤에 제대로 봤었다면 유령도시처럼 보였을 법 했다.

문을 두드려봐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창문 너머를 살펴보면 가려져있거나 꽉 닫힌 방문들과 텅 빈 거실만 보였다. 사람들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해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퍼블리의 머릿속엔 아직도 창문 너머로 떨어지면서 눈이 마주쳤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

계속 길을 걷던 중 퍼블리는 발에 뭔가가 밟히자 고개를 숙였다. 딱딱하면서도 둥글 게 생긴 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밟고 그대로 미끄러졌을 법하게 생겼다.

이게 뭐지?”

주워서 보니 손가락 두마디만한 길이에 원통형이고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금속이었다. 신기하게도 다른 금속들처럼 회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되어있었다. 퍼 리가 둥근 금속이 있던 자리의 옆골목을 돌아보니 무언가의 파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용사님?”

?”

뭘 들고 계신 거예요?”

꽤나 큼직한 파편들을 용사가 들고 다니고 있었다. 초록색과 검은색이 섞인 파편들은 부숴지기 전엔 기계였다는 걸 추측할 수 있게 거의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인형 칭구!”

, 인형이요?”

근데 뿌서졌엉!”

그렇게 말하며 용사는 양팔에 가득 끌어안다시피 든 채로 다른 파편들을 주우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이미 들려있던 것들이 팔 사이로 빠져나와 바닥을 뒹굴게 됐다. 왜 잘게 부숴졌는지 알 것 같은 퍼블리는 옆에서 줍는 걸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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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나보군요.”

어떻게 아는 건가?”

제가 마법도구를 줬거든요. 한 쌍을 이루는 도구라 하나가 작동하면 다른 하나도 작동을 합니다.”

마법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존경하는 분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다시 말해두죠.”

페르스토는 그리 말하며 책을 하나 건넸다. 패치는 바로 받지 않았다.

뭔가?”

제가 여기 자리잡기 전부터 있던 책입니다. 저는 펼칠 수도 없어서 말이죠.”

그 말에 패치는 책을 받아 펼쳐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넘겨봐도 전부 백지였다. 다시 돌려주려다가 펼치지도 못해봤다는 페르스토의 말에 책을 받아들였다.

그럼 얘기는 여기서 끝내지.”

패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차도, 따뜻한 풍경도 없는 대화였지만 둘은 만족스럽게 대화를 마쳤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모든 게 정상화된 세계이길 바라야하나요?”

만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겠지.”

패치는 그리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페르스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고요한 2층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인기척이 돌고 있었다. 아무도 없던 방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간 페르스토는 침대로 다가갔다. 창백한 낯을 지닌 사람 하나가 누워있었다.

“5년 만에 돌아온 걸 축하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색색 숨소리만 들려왔지만 페르스토는 굉장히 기뻐보였다.

 

“...언제부터 정상화의 뜻이 황폐화였지?”

땅 위에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패치가 마지막으로 본 도시의 모습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황폐해보였다. 건물들이 있긴 있었지만 높은 건물들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있었고 길목마다 둥둥 떠서 널려있던 전구들마저 사라져 골목만큼 어두운 길거리는 굉장히 조용했다. 패치는 손에 빛을 띄워 주위를 밝혔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모든 건물엔 불빛이 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하나 싶어 애매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 저 멀리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와 패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왔는데도 아무도 없었다. 다른 데로 갈까 하던 중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님!”

공중에 떠있는 건물에 문을 열어놓고 어쩔줄 몰라하는 퍼블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서 안 내려오고 뭐하나?”

, 그게...올라올 때 썼던 비행 장치가 있었는데 지금 작동이 안 돼요!”

퍼블리는 손에 든 걸 흔들어보이며 외쳤다. 얼핏 보면 유리덮개로밖에 안 보이는 게 손에 들려있었다. 패치가 위로 손을 휘젓자 퍼블리의 주위가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몸이 공중으로 뜨더니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나도 둥실둥실!”

언제 왔는지 뒤에서 나타난 용사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는 퍼블리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노는 거 아니네.”

둥실둥실!”

집중해야하니 좀 비키게.”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퍼블리가 땅 위로 완전히 내려왔다.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게 위에서 전부 둘러봤을 테지만 순식간에 모습이 바뀐 도시가 굉장히 낯선 듯 싶었다.

여기들 모여있었슴까?”

용사의 목소리를 듣고 온 건지 치트도 조금 떨어진 데서 모습을 드러냈다. 치트를 본 패치의 눈썹 끝이 조금 올라갔다. 치트가 메고 있는 검은 상자에 시선이 가 있었다.

자네 등에 메고 있는 건 뭔가?”

이것저것 보고 있던 중에 마음에 쏙 들어서 말임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 큰 상자를 마음에 쏙 든다는 이유로 등에 메고 다닌다는 말에 자연스럽게 패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전에 패치는 어디 있었습니까?”

치트의 질문에 말을 돌리려는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눈썹 끝이 올라간 패치는 옆에서 마찬가지로 궁금해하는 퍼블리의 표정을 발견하고 참았다.

잠깐 알아볼 게 있어서 도시 밖으로 나갔다 왔네. 나 없는 새에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 그게 그러니까...우선 이 도시에 마법사가 없었어요!”

퍼블리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라 설명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열심히 얘기했다. 마법과 기계가 합쳤다고 한 이 도시는 알고보니 마법은커녕 마법에 관련 된 도구도 없었고 길거리에 나와있던 건 전부 기계였다는 거였다. 하늘을 날게 하던 장치와 물고기들 전부. 그러던 중 갑자기 하늘 위로 무언가가 쏘아올라가 터졌고 하늘을 날던 사람들과 물고기가 모두 떨어져 순식간에 부상자가 불어났다는 얘기였다.

터진 건 전자기펄스고?”

! 그런 이름이었어요.”

당연한 수순으로 패치는 치트를 돌아봤다. 하필 자신들이 도시에 들어온 날에 터진 것도 이상했고 마법도 없이 기계만 가득한 도시에서 그 누가 전자기펄스 폭탄을 만들거나 들고 다니겠는가. 이 도시를 뒤져서라도 증거를 찾아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퍼블리의 말에 고민을 멈췄다.

그래서 꽃에다 마법사가 없다고 하고 나와보니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어요!”

사람 뿐만 아니라 건물이나 기구들도 전부 없어졌더군.”

눈 깜빡하니까 전부 사라졌엉!”

계기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이해의 범주 밖에 있는 현상이었다. 한순간에 건물도 사람도 사라지는 게 말이 되는가.

그보다 저희 급한 게 있습니다.”

치트의 말에 모두가 돌아봤다.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길

만약 저 건물 안에도 사람들이 없다면 저희 이대로 또 노숙을 해야함다.”

그 말에 용사를 제외한 모두가 급하게 불이 꺼진 건물들의 문을 두드려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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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상황을 수습하던 도중 급하게 만든 치료 도구가 작동이 되자 모두 그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다른 한쪽에서도 됐다며 사람을 불러모았다. 상황은 여전히 난장판이었지만 그나마 임시적으로 돌아가는 도구가 곳곳에서 생기고 아예 망가진 잠금장치를 부숴 창고에서 응급약들을 꺼내는데 성공한 이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상황과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수습됐다기 보단 부상자들이 힘이 빠져 비명을 지를 힘도 없어보였다. 부상자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꽤 지쳐보여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치트는 빨간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자 살짝 눈을 찌푸렸고 골목에서 나와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는 퍼블리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런 사고가 정말 당황스럽네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물병을 건네며 능청스레 말을 건 치트는 용사가 보이지 않는다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물병을 건네받아 마시던 퍼블리는 아까 용사가 열심히 뛰어다니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치트의 말대로 멀리 뛰어갔는지 용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퍼블리가 신경 쓰는 건 용사가 아니었다.

“...이상해요.”

맞아요. 이상합니다. 도심 한가운데서 이런 일이 터지다니.”

전자기펄스라는 게 도구, 그러니까 기계들을 먹통으로 만드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왜

이어지는 퍼블리의 말에 치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아주 잠깐 눈가를 휘어보였다.

그렇군요. 정말 이상하네요~”

동조하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입가로 올린 손은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입매를 교묘하게 가리고 있었다. 기대가 섞인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퍼블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처럼 잠깐 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저기 실례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요.”

으어...? . 물어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퍼블리가 묻는 말에 묵묵히 듣고 있던 상대의 표정이 일순 찡그려졌다가 이 도시가 초행인 듯 싶어보이는 행색에 다시 펴졌다.

어딨는지는 저도 모르죠. ”

지금같은 상황엔 더 도움이 될텐데 왜...”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

도시가 처음인데다가 접할 기회가 없어서 모를 수도 있는 거 알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그런 얘기 안 하는 게 좋아요.”

그치만 지금은!”

상대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반응은 의외였는지 당황한 퍼블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찾아가 물어봤다. 그러자 대답은 달라도 반응은 비슷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모르겠네요.”

오랫동안 못보긴 했는데 관심없어요.”

어딘가 있겠지.”

없어도 상관 없잖아?”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해.”

이런 반응들에 퍼블리의 표정이 더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힐끗 퍼블리의 반응을 보던 치트가 말을 얹었다.

정말 이상하네요. 이런 위급상황에서도 저런 반응이라...”

“...날아다니는 물고기들도 전부 기계였던 거예요?”

그렇습니다. 기술이 꽤 좋아졌어요. 하늘을 헤엄치며 불을 뿜는 물고기도 그렇고 노래하면서 춤추는 인형도 기계였죠.”

전부요?”

. 전부.”

떨어져서 부숴진 물고기들과 급하게 뛰느라 밟혀 부숴진 인형들이 길거리에 깔려 있었다. 하나같이 속은 작은 나사나 톱니바퀴, 전선으로 이루어져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었다. 진짜 물고기나 작아진 사람이었으면 꽤 끔찍하게 보였을 광경이었다.

물고기와 인형들을 뜻모를 눈으로 바라보던 퍼블리는 문득 치트에게 물었다.

마법사님, 그러니까 패치 마법사님은 어디계셔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잠깐 만났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네요.”

사실 이 소란 속에서 치트가 가장 먼저 찾고자 했던 게 바로 패치였다. 패치라면 이런 상황을 절대 그냥 두지 않고 상황을 진정시키고 해결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였을 텐데 지금 패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도시가 아닌 공간에서 페르스토와 함께 있는 패치는 당연히 현재 상황을 알 리가 없었지만 이 둘도 그런 패치의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치트는 퍼블리와 대화하면서도 사람들 사이로 빨간 머리카락을 샅샅이 찾아보고 있었고 퍼블리도 패치에 대한 얘기를 꺼낸 시점부터 패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건 가라앉은 분위기 가운데 유일하게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용사였다.

용사님!”

우웅?”

여기로 오라는 손짓에 용사는 순순히 둘에게로 왔다.

용사님 혹시 패치 마법사님 보셨어요?”

빨간칭구?”

.”

요기 없엉!”

지금 여기 말고 다른 데서는 못 봤어요? 사람들 부축했을 때 못 보셨어요?”

없엉!”

용사는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당연하게도 이 셋 중에선 흩어진 이후로 패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담 여기서 먼 도시 구역에 있겠군요. 치료소가 여기 한 군데 뿐만이 아니니...”

아니야, 없엉!”

용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호하게 없다고 했다. 많이 뛰어다니느라 여러군데 돌아다녔겠거니 싶어 치트가 패치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대답은

몰랑!”

치트는 더 이상 용사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퍼블리가 이렇게 물었다.

다른 모든 구역에도 없어요?”

없엉!”

도시 내에 없어요?”

없엉!”

정말로요?”

정말!”

확인 차 묻는 말에도 단언하는 용사에 퍼블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고민이 사라지고 기묘한 상황을 목격한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일단 저 어디 좀 갔다 올게요!”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어디론가 뛰어갔고 치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 눈을 떼니 용사도 어디론가 가버려 혼자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기대했던 상황은 아니지만 예상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처음은 이걸로 만족해야겠죠?”

대답은 없었지만 치트는 이 침묵이 마음에 들어보였다.

 

열심히 뛰어간 퍼블리가 멈춰선 곳은 바로 공중에 떠있는 건물 아래였다. 달려오는 내내 계속해서 밀려오는 의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일은 이거였다.

페르스토가 건넨 비행장치를 꺼낸 퍼블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치를 자세히 살펴봤다. 딱딱함은 느껴지지만 내부가 반짝이로 이루어져 있는 투명한 물건이었다. 나사나 톱니바퀴 같은 부품은 보이지 않았다. 등을 더듬어 장치를 붙인 퍼블리는 제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걸 느꼈다. 이 장치는 기계가 아니었다.

처음 붙여서 날아올랐던 때보다 안정적이게 날아오른 퍼블리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길거리와 달리 똑같았다. 가운데에 있는 마법진도 멀쩡했다.

페르스토가 말한 걸 떠올리며 마법진에 다가가 문을 두드리듯 똑똑 두 번 두드리자 마법진에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동했을 때만큼 환한 빛이 아니었다. 까만 밤의 반딧불이 빛같은 빛이 은은하게 주위를 감쌌고 동시에 마법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나는 게 끝났을 때 쯤, 들은대로 그 자리엔 꽃이 하나 나타났다.

새하얗게 부풀어오른 국화 한송이.

퍼블리는 바로 앞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엔 마법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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