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막혀있나봐요.”

왜 들어가지 않고 멀뚱히 서 있나 의아해했지만 나무판자를 박아 아예 못 열게 막아놓은 문을 보게 된 일행들은 그 옆에 멈춰섰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슴다~ 왜 막아놨을까요?”

요기 그림 있당!”

용사가 가리키는 방향에 동그란 원이 세 개 겹쳐져있고 그 가운데에 세모가 그려진 그림과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 낡았거나 망가진데가 있나보군. 공사중이니 이쪽으로 가라는 뜻이네.”

? 어떻게 아셨어요?”

건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업체들은 다양하고 이 표시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업체의 표시일세. 여기서 자기들이 일하고 있다고 나타내는 거지.”

기계 옷을 입은 사람도 들었는지 고개가 패치를 향하고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니 또다른 문이 있었다. 앞전에 봤던 문보다는 살짝 작았지만 책장같이 큰 가구가 드나들만큼 웬만한 문들보단 컸다. 문 자체가 꽤 구석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드나드는 사람들은 적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 못 찾는 게 당연하지.”

저 문도 사실 급하게 뚫어놓은 것 같슴다~”

급하게 뚫어놓는 겸 사람들이 더 들어오려는 걸 제한해두려고 일부러 저렇게 해놓은 것 같다는 감상을 끝으로 일행들은 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아 금방 들어갔지만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지 탑 내부엔 매우 많은 인파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밖보다 더 환한 거 같아요!”

실제로도 환했다. 상당히 밝은 전등을 썼다고 설명하고 사람이 많으니 웬만하면 떨어지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용사였다.

“...여긴 이렇게 사람이 많고 복잡한 만큼 미아를 찾고 맡는 데에 탁월한 곳이네.”

용사님은 미아라고 하기엔 너무 크지 않슴까?”

성격상 가만히 돌아다닐 리가 없을테니 직원들이 알아서 붙잡아놓고 일행을 찾아다니겠지.”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여행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헵토미노 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각자 관광이든 정보 수집이든 볼일을 보고 다시 모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저흰 여기에 대해선 잘 모르는 걸요?”

지루할텐데 상관없나?”

그래도 아예 모르는 데에서 헤메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퍼블리는 제 손을 잡고 있는 헵토미노를 눈짓했다. 하지만 패치에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따로 관광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하며 일행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도착한 데는 온통 책이 가득한 장소였다.

저희 관광하고 올게요.”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리 말한 퍼블리는 헵토미노와 함께 탑의 안내를 하는 직원을 찾아갔다. 정보를 수집한다는 말이 하루종일 책이 가득한 이곳에 계속 박혀있을 거라는 뜻이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이미 떠난 둘이 있던 자리를 힐끗 보던 패치는 치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같이 안 가냐는 뜻이 담긴 눈짓에 치트는 그저 웃음만 지어보이곤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어디서 다시 만날지도 안 정했는데 괜찮슴까?”

내가 계속 여기 있을테니 관광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지.”

패치는 하얀들판과 사막에 관련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열 페이지 정도 넘겼을 때 되어서야 치트 또한 어디론가 갔는지 곁엔 아무도 없었다. 신경쓰지 않고 책을 쭉 읽던 파란 시야가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

하얀 들판에서 요정의 흔적이 발견되어 급히 요정 전담 부대 지원을 요청하고 인근의 마을 주민들에겐 보호용 날붙이를 지니라는 연락을

뒷 내용은 흐려지더니 완전히 관계없는 다른 얘기가 이어져 있었다. 뜬금없이 적혀져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내용 자체가 이상했다. 이 부분 덕분에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패치는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

그리 먼 기억도 아니었다. 맨 처음으로 신관(홀리)을 하나 날린 때였다. 그 때 지나가던 여행자들이 요정에 대해서 얘기했었고 요정을 만나게 된다면 중간탑의 32번 쪽지에다 적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비록 만나지는 않았지만 요정에 대한 정보를 접했고 내용 또한 심상찮으니 적을까하는 고민이었다.

마침 이곳이 중간탑이기도 했고 쪽지 보관소도 멀지 않았지만 굳이? 라는 마음이 고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한 번 신경 쓰이면 그 이후로 계속 신경쓰이니 그냥 짧게 적고 오는 게 나을 거란 걸 깨달은 패치는 쪽지 보관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종이가 언제부터 기계가 되었나?”

기술의 도시가 만들어지고 바로 상용화 됐으니 5년쯤은 됐습니다.”

종이 대신 기계 자판이 마법사를 반겼다. 기계를 못 다루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직업상의 꺼림칙함이었다. 자판을 두드려 32번 쪽지란을 찾았지만 암호가 걸려있어 열 수가 없었고 패치의 눈썹 끝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암호 입력창 바로 위에 힌트가 있었지만

‘FLIP FLOP 3’

미간 사이의 골짜기가 이루어졌다. 신경쓰이는 정보 하나 전달하자고 이 힌트를 붙잡고 암호를 푸느니 그냥 바로 끄고 앞으로 갈 장소들의 정보를 더 얻는 게 가장 좋을 거라는 생각이 망설임을 없앴다. 그대로 쪽지보관소를 덮어놓으려 하던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도와줄까?”

길에서도 봤고 막힌 탑 문 앞에서도 봤던 그 사람이었다.

당신 마법사지? 물론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기계 다루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퀴즈긴 한데.”

도와주려는 이유는?”

탑 문에서의 답례.”

경계심을 가감없이 내보이는 말투에도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은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답례받기엔 굉장히 자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입장에선 이거 푸는 것도 그만큼 자잘해서 말이야.”

패치는 옆으로 비켜 섰다. 조금 의심이 들어도 너무 밀어내면 도리어 자신이 이상해지고 굳이 더 날을 세워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사실 내가 입고 있는 기계 옷 성능이 꽤 좋거든. 그래서 당신들이 기술의 도시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 다 들었어. 요즘 인형 개발이 유행이긴 하지. 그보다 그냥 기계 옷 입은 사람이라고 하다니 이 모습으로 많이 알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직 멀었나봐?”

태도와 말의 내용을 보아하건데 한 발 물러나면 술술 자기 얘기를 하는 타입이었다. 패치는 겉으로 내보이는 경계를 조금 더 낮췄다.

내 이름은 마키나야. 마법사라면 내 이름 정돈 들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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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가 설명한대로 지식의 탑보단 중간탑이라는 이름이 더 대중적이었는지 중간탑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아 거기로 시작해서 제각기의 길을 알려줬다. 워낙 중간에 있다보니 길도 다양했기 때문에 그마나 빨리 도착할 길을 고르는 것만 남았다.

길이 엄청 트여있나봐요.”

아무래도 중간길목에 떡하니 자리잡은 만큼 지나쳐야할 일이 많을 테니 그렇겠죠~”

강이 있는데는 얼마 전에 비가 왔으니 물이 많이 불어났겠군. 그러니 빼게.”

강을 지나는 길이 꽤 되어 선택지는 금방 좁혀졌다. 도착하는 게 빨라도 길이 닦이지 않아 울퉁불퉁한 돌이 많은 길 또한 제외됐다. 혹시나 비가 한 번 더 내린다거나 부득이하게 잠시 멈춰야할 순간이 발생할지도 몰라 쉼터가 포함된 길을 고른 일행들은 바로 출발했다.

다른 마을이 있는데보단 가깝긴 가까운데 참 미묘하군요.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면 정말 가까울텐데 말이죠~”

아까 물어봤는데 거긴 산이 끼어있어서 바위들이 굴러내려온대요.”

한마디로 위험한 길이라는 거였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는 건 모두 동일했다. 헵토미노는 살던 곳에서 못 보던 것들을 볼 때마다 신기해했다. 조금 큰 마을마다 세워둔 동상이나 계속해서 움직이는 허수아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다르게 생겼어요? 그리고 왜 밭 주위만 빙빙 도는 거예요?”

저건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야. 그러니까 음...인형을 사람 크기만큼 크게 만들어서 움직이게 하는 거야. 그러면 새들이나 야생동물들이 사람인 줄 알아서 가까이 오지 않겠지?”

그럼 뭘로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아마 마법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퍼블리는 그렇게 말하며 패치를 힐끔 쳐다봤다. 허수아비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패치는 고개를 저었다.

저 허수아비들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종류는 아니네. 보아하니 기계로 만들어서 별다른 주문 없이 동력만 있으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은데.”

마법으로 움직이는 거랑 기계로 움직이는 거랑 많이 달라요?”

근본적으로는 많이 다르지만 용도와 결과는 똑같으니 밭주인들이 신경쓰는 건 어떤 게 더 값이 싸느냐겠지.”

설명을 듣던 퍼블리는 기계 허수아비들을 힐끔 쳐다봤다. 기계로 이루어진 허수아비들만 있는 건 값 문제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저것도 허수아비에요?”

조그마한 손가락 끝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확실히 행색이 제법 눈에 띄는 모양새였다. 허수아비들처럼 밭을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면 얼굴까지 무언가 딱딱한 것들로 덮여있었다. 그 사람을 본 패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기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일세.”

왜 기계 옷을 입는 거예요?”

물리적인...그러니까 칼이나 굴러떨어지는 돌에 맞는 거에 대한 보호 목적일 수도 있고 몸 어딘가가 불편해서 움직이는데 힘들이지 않기 위해 입는 경우가 있지.”

사람이라는 말에 헵토미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렸다. 다행히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은 제법 먼 거리에 있어 듣지 못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슬쩍 그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헵토미노는 다시 허수아비들을 봤다.

기술의 도시에서는 춤추는 인형들이 있었다고 했죠?”

, 각자 따로따로 춤추기도 했고 한꺼번에 함께 춤추기도 했어.”

나중에 또 여행하게 되면 바둑이랑 꼭 같이 가볼 거예요!”

기대 가득한 그 말에 퍼블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제 도시는 기술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마법도 없고 기계또한 주인들이 기약없는 잠에 빠져 움직일 일이 없었다.

“...지금 도시는 혼란스러워졌어. 나중에 안정이 되면 그 때 한 번 가보는 게 좋아.”

그 때가 되기 전에 모두가 깨어나고 마법사들도 돌아오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해줬다.

중간탑으로 가는 길목 주변이 워낙 넓은 땅이라서 그런지 밭과 논, 허수아비들이 가득했다. 허수아비들을 계속해서 신기하게 보던 헵토미노도 이젠 꽤 눈에 익었는지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날도 맑으니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잔잔해졌다.

?”

누가 먼저 낸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행들의 시선의 끝은 전부 똑같았다. 스무 걸음 앞 쪽에서 아까 본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저 분 목적지도 중간탑이려나요?”

일단 웬만한 길은 거기를 거쳐가니 중간탑까지는 당연히 길이 겹치겠지.”

같이 가자고 할까요?”

패치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딱 잘라냈다. 만약 목적지가 같다한들 목적이 다를 게 뻔하고 이 이상 임시로라도 일행을 늘리기 썩 달갑지 않다는 거였다. 거기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잔소리까지 추가되었다.

잔소리는 그쯤이면 충분함다~ 그래도 낯선 사람과 함께 길을 가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 아님까~?”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게 언제부터 여행의 묘미였나?”

위험이 아닐 수도 있잖슴까?”

뭐라 날카롭게 한 소리 더 하려던 패치는 저 아래 아이의 시선을 느꼈고 꾹 참아 삼켰다. 그런 패치의 반응에 묘한 웃음을 짓던 치트는 이 때다 싶었는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여행의 묘미에 대해 뭐라 더 떠들었다. 문제는 그게 패치의 속을 긁는 효과를 발생시켰고 아이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했을 때 말보다 빠른 주먹과 발차기가 날아갔다. 요란하게 맞고 넘어지는 소리에 모두가 뒤돌아봤고

저 혼자 발을 헛디뎌 넘어지더군.”

쓰러진 치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한 패치는 알아서 일어날테니 어서 가자는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픔다.....”

제대로 맞았는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치트는 다시 패치에게 딱 달라붙어 징징대기 시작했고 패치는 발을 한 번 밟아주는 걸로 마지막 경고를 건넸다. 그 이후로 다시 조용함이 찾아왔고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은 어느새 작은 점이 될 정도로 멀어졌다.

비록 제일 짧은 길이 아니어도 그나마 가까운 길이었으니 일행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도착했다. 기계 옷을 입은 사람도 목적지가 같았는지 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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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 일행들은 무덤 자리를 떠났다. 다만 여기 오기 전과 달라진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일행의 수였다. 한 명이 더 추가되어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물고기요?”

완전한 물고기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진짜 물고기처럼 보였거든.”

나무 막대와 바둑이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는 아이 헵토미노였다. 사실 아이를 일행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 또한 비밀을 알아냈을 때 어찌해야할지 곤혹스러워하기 바빴고 용사는 별 생각이 없었으며 나머지 둘은 표정만 서로 다르지 속은 냉정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같이 떠나게 된 건 아이 아빠 헥소미노의 부탁아닌 부탁 때문이었다.

 

“...떠날 거면 애도 데려가.”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당신 제정신인가?”

제정신 박혀서 하는 소리다 이 망할 것들아...! 애 키우기 귀찮아서 하는 말 같아!? 내가 왜 그 녀석들한테 맡기기까지 했는데!!”

격앙되어 끝은 거의 비명같이 내지르던 헥소미노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묻어버리고 싶은 것들아 부탁이다...데려가!!”

알았어요.”

대답한 건 퍼블리였다. 일행들의 시선은 헥소미노에게서 퍼블리로 돌아갔다. 그걸 느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은 퍼블리가 다시 한 번 이어 대답했다.

저희가 헵토미노를 데려갈게요.”

저 표정을 아이가 못 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도 직후 패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퍼블리가 어떤 심정으로 헵토미노를 데려가겠다고 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불안정해보이는 애 아빠한테 애를 그냥 두고 가기 마음에 걸렸던 거였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유가 있다 한들, 이미 한 번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까지 했다는 걸 봤을 때 자신들이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게 뻔하고 그럴 바엔 잠깐이라도 안면 있고 그 곳의 비밀도 알게 된 자신들이 데려가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 또한 천천히 들어왔을 게 훤했다.

다만 그런 사정과는 별개로 일행들이 하는 여행은 엄연히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심지어 그 목적의 결과가 연달아서 찜찜함을 남기는 중이었으니 애한테 좋은 영향을 끼칠 리가 없다는 점이 부가적인 이유였고 여행 자체가 어른들도 상당한 피로를 느끼게 하는데 애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가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어린아이치곤 체력이 꽤 되는 건지 아니면 꾹 참는 건지 같이 걷는 내내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럼 다른 데는요?”

아직 많이 가본 데가 없어서...”

둘은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데려가겠다고 한 말에 대한 책임감인지 아니면 드디어 정상적인 말동무가 생겨서인지 퍼블리는 헵토미노에게 이것저것 얘기를 건넸고 헵토미노는 굉장히 신기해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주로 일행 내의 대화 담당은 퍼블리와 치트 간혹가다가 궁금해하는 용사였는데 한 명이 더 늘어서 그런지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헵토미노는 열심히 퍼블리와 대화하고 간혹가다가 덧붙여 설명해주는 치트와 대화를 하다가도 무덤에서 떠난 이후로 쭉 아무 말이 없는 패치를 힐끔 쳐다보곤 했다. 아이의 불안함을 눈치 챈 퍼블리가 원래 말이 가장 없는 분이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내 말이 없던 패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음은 하얀 들판인가? 이번은 앞선 두 곳보다 거리가 꽤 되는군.”

꽤 멀긴 하지만 사막보다 더 가까운 곳이죠.”

하지만 이대로 계속 쭉 가기엔 체력 소모가 심하네.”

그렇게 말한 패치는 잠깐 생각에 잠긴 건지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치트는 그나마 마을이 연달아 있는 곳을 안다며 많이 힘들어지면 거기서 쉬자고 했다. 그러다 문득 패치가 툭 한 단어를 꺼냈다.

중간탑.”

?”

들판으로 가는 길목 가운데에 중간탑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맞나?”

맞슴다. 혹시 중간에 중간탑을 들르자는 검까?”

패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치트는 나쁘지 않다고 말하며 다음 목표 장소는 중간탑이라고 저 멀리서 토끼를 쫓아가는 용사에게 외쳤다. 퍼블리는 일행이 된 이후 처음으로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둘을 내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싫은 녀석이라고 해도 애 앞에서 평소처럼 말에 날을 세우는 건 아니라는 걸 패치는 잘 알았고 치트 또한 잘 알아서 자제하고 있었다.

중간탑은 어떤 데예요?”

헵토미노가 퍼블리를 올려다보며 물었고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정확히 어떻게 정의를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땅을 기준으로 땅의 중간에 세워진 탑일세. 사막과 환각의 숲 사이를 기준으로 중간이지.”

그 말을 들으니 퍼블리는 새삼 자신들이 끝에서부터 출발해서 끝까지 여행하는구나 깨달은 표정이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중간탑은 지식의 탑이라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정했다고들 하지만 중간탑이라고 오랫동안 불려왔으니 다들 중간탑이라고 부르니 위치를 물어볼 땐 중간탑이라고 말해야 알아들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게.”

사실 패치에게 있어서 여행하는 장소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학자들이 모이고 지식의 탑이라고 스스로들 붙일 정도로 책들이 가득한 탑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이름은 도서관이었고 땅의 중간에 위치해서 그런지 소식을 전달하는 이들이 거쳐가는 장소이기도 해 네 번째 이름이 거대한 우체통이다.

평소라면 두 번재와 세 번째 이름이 목적이어서 갔겠지만 이번의 목적은 네 번째 이름이었다. 힐끔 뒤돌아보니 마침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지 아님 처음부터 보고 있었는지 패치와 눈이 마주친 치트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지도들도 있을까요?”

마을들에 없는 게 거기 전부 있는 격이니 있을 거라 예상되네만.”

퍼블리의 눈빛에 바로 기대가 서렸다. 이쯤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낼 사람은 없었다. 이름만 들어봤지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기대감이 가득해보였다.

그럼 가지.”

반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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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제 날이 거의 저물어가니 진짜 가야겠다는 생각에 헵토미노를 바래다주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관리를 안 한지 꽤 오래 된 낡은 집처럼 변하자 심상찮음을 느끼고 들어가보니 집 안에 온기는커녕 사람 사는 흔적이 아예 사라졌다.

의자와 탁자가 있던 자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반들도 전부 사라져 휑한 모습이 폐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불안함을 느낀 헵토미노가 덜덜 떨기 시작했고 용사는 다른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그대로 나가려했다.

“...용사님 여기 맞아요.”

우웅? 다른 데?”

장소가 같아요.”

방 안까지 다 살펴봤지만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퍼블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불안을 넘어서 겁에 질린 헵토미노의 표정을 보니 애써 동요를 누르고 물었다.

일단 오늘은 우리랑 같이 갈래?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해가 지려고 하고 있고......여기 있기엔 좀 그러니까...”

애 혼자 여기 둘 순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한 효과가 있는지 헵토미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이가 끙끙 울면서 주위를 빙빙 돌더니 위로하듯이 앞발을 턱! 올렸다.

퍼블리와 용사, 헵토미노가 나무 무덤으로 도착했을 땐 해는 이미 진 상태였지만 먼저 도착한 둘이 불빛을 만들어놨는지 환한 상태였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보였다. 서 있는 사람은 세 명이었고 둘은 당연히 일행인 패치와 치트였지만 다른 하나는 헥소미노였다. 굉장히 분노한 모습을 보아하니 만약 사람이 한 명이거나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걸 들고 있었으면 진즉에 휘둘렀을 기세였다. 치트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패치의 표정은 싸늘했다. 굉장히 흉흉한 기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퍼블리였고 용사는 그 기세를 눈치채진 못했지만 퍼블리가 멈춰서니 덩달아 같이 멈춰섰다.

아빠?”

앞의 둘만 보고 있던 헥소미노가 돌아봤다. 헵토미노와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분노 가득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새로 바뀐 표정은 공포와 혼란, 죄책감이 가득해보이는 게 꼭 죄를 들킨 사람처럼 보였다. 퍼블리는 헵토미노를 잡고 있는 손을 놔줘야하나 아니면 이대로 계속 잡고 있어야하나 고민했다.

아빠?”

, 제 아빠예요.”

우웅~ 그르믄 할무니 어디 갔는지 물어보믄 되겠당!”

이어진 용사의 말에 헥소미노의 표정이 굉장히 창백해졌다. 덜덜 떨면서 천천히 다가오더니 열 걸음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서 묻기를

할머니라니...?”

저 그동안 할머니랑 같이 살았는데요...?”

...디서?”

아이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가락으로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 저기 숲 쪽의 큰 집에서요.”

비록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기색만으로도 시체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겠다고 생각한 패치는 저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퍼블리와 용사에게 눈짓했다. 퍼블리는 알아들었고 용사는 알아듣지 못했다. 헵토미노의 손 대신 용사의 손을 잡은 퍼블리는 천천히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헵토미노는 잡고 있던 손이 힘을 풀며 사라지자 흠칫 놀랐지만 바둑이를 안고 있는 데에 더 보탰고 헥소미노는 바로 눈 앞에서 그러는데도 보이지 않는 건지 신경쓰지 않았다.

...? 왜 할..머니랑 살고 있었던 거야...? , 너를 돌봐주던 사...람들은?!”

다그치듯이 외치는 말에 겁을 먹었는지 아이가 울먹이면서 말하길

..갑자기 사라졌는데...”

결국 헵토미노는 울음을 터뜨렸고 헥소미노는 그런 아들을 채 달랠 정신도 없는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오던 퍼블리는 패치의 옆에 파인 땅을 발견했고 그 속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나?”

“...헵토미노가 말해줬어요.”

용사가 엄마에 대해 묻자 헵토미노는 자기가 아주 어렸던 아기 때, 기어다니지도 못하고 요람 속에 누워있을 때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헵토미노의 집에 들르기 전까지 신시어와 대화했던 퍼블리는 소름이 돋았고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오기 전까지 고민했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설마...”

문득 떠오른 게 있는 퍼블리는 비석처럼 세워진 나무들을 둘러보고 굉장히 조심스러운 얼굴로 뒤돌아봤다. 헵토미노는 울고 있었고 헥소미노는 울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네.”

퍼블리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냉정하게 잘라내는 말이 날아왔다.

이미 지나버린 일들이고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이상현상이었고 저 자는 현실도피를 했을 뿐이네.”

현실도피라는 단어가 걸렸는지 움찔 돌아본 퍼블리의 표정은 울컥 올라온 화가 슬픈 표정에 아주 약간 섞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과한 말을 하냐고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뭐라 말하는 대신 다시 헵토미노를 돌아봤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건 강아지뿐이었다.

결국 헥소미노가 지친 얼굴로 울다 지친 제 아이를 데려가는 걸로 당장의 상황이 마무리 됐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현실이 버거웠던 건지 아니면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건지 무덤이 있는 바로 뒤쪽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끝난 거예요?”

황망한 물음이 빈자리를 채웠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듯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용사는 관 안에 누워있는 신시어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패치는 그런 용사를 비키게 한 후 삽을 들었다. 파헤쳐진 진실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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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어가고 있는데도 둘이 돌아오지 않자 패치의 눈썹 끝은 당연한 수순으로 치켜올라가고 있었다.

대형 정보를 물어오느라 늦는 걸수도 있잖슴까~?”

얻더라도 돌아오지 못하면 빈 손으로 오는 것만도 못하다는 걸 모르나?”

최소한의 추적 기능도 달아놨어야 했다며 표정을 찌푸리던 패치는 나무들을 쭉 훑어봤다. 네모난 나무 막대들을 이어붙인 모양새들은 이질감이 상당했다. 흙을 보니 심었다기보단 막대를 박아 놓은 모양새였다. 패치의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치트를 돌아봤다.

차라리 용사랑 있는 게 더 나은 것 같군.”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씀하면 제 마음이 아파요~?”

왜 끝이 의문형인가? 그리고 자네 마음이 아프던 말던 내 알 바가 아니네.”

그에 치트가 매정하다는 둥 뭐라 더 말했지만 패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단 둘이 남게 되면 늘 저러니 최대한 길게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둘이 약속장소에서 만난지는 꽤 된 상태였다. 패치는 이상하고 기묘한 사람을 만났었고 치트는 땅 주인을 만났었다. 그런데 둘 다 정보를 교환하지 않고 내놓지도 않았다. 지독한 눈치 싸움이었다. 일단 여기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경계심이 한 없이 0에 가까운 용사라도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패치가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때였다.

헵토미노!!”

처음 듣는 이름을 부르며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처음 만났던 신시어였다. 동쪽 방향에서 달려오길래 그 쪽으로 간 퍼블리의 행방을 물어볼 수 있을까 했지만 달려오는 기세와 점점 보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아 패치도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타 달려오던 신시어가 먼저 패치에게 물었다.

혹시 남자 아기 못 보셨나요!? 아직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기인데 혹시 누가 데리고 있는 모습 못 봤나요?!”

아기?”

반문하는 패치에 본 적이 없다는 걸 눈치 챘는지 신시어는 다시 바쁘게 뛰어갔다. 패치는 뛰어가는 신시어를 잡진 않았다. 다만 가라앉아 싸늘한 시선이 그 뒤를 좇았다.

자네 집에 들렀을 때를 기억하나?”

기억 함다~ 아무리 봐도 애가 있을 법한 집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아기 용품 하나 없던 집. 아기를 키우지 않는 이들도 알다시피 아기를 키우는 덴 많은 수고가 든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얼핏 봤을 땐 집 안에 아기용품은 하나도 없었던데 말이죠~”

그런만큼 아기용품이 아주 눈에 잘 띄고 바로 쓸 수 있는 곳에 두는 게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상한 게 훤히 보이는데 정작 뭐 때문인지가 보이지 않는군.”

이상한 걸 다 대면 되지 않겠슴까?”

그걸 다 어디다 대고 말하나?”

그것도 찾아야죠~”

전형적인 말은 쉽다의 표본이었다. 패치의 눈살이 찌푸려진 것도 잠시, 문득 든 생각이 있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니 해결 방법이 같으리란 법은 없잖나?”

, 그렇죠?”

장소만 찾아내면 끝이란 거군.”

짐작 가는 데가 있슴까?”

패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둘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아직도 안 갔냐?”

땅 주인 헥소미노였다. 나타난 방향과 처음에 비해 꽤나 흥분이 가라앉은 태도를 보았을 때 치트를 만났던 게 틀림 없다고 생각한 패치는 잠시 탐색하려는 건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금방 간다더니 언제까지 여기 죽치고 있을 거야?”

죄송함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봄다~”

정확히 얼마나 더 필요한데?”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표정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험악해져가고 있었다. 치트가 난감하게 웃으며 대답하려던 때였다.

그러고보니 방금 전 당신의 아내를 만났었네만.”

헥소미노의 표정이 더욱 험해졌다. 패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더러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기를 보지 못했냐고 묻고 헵토미노라는 이름을 부르며 저쪽으로 뛰어가더군.”

그 말에 헥소미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패치가 가리킨 방향으로 바로 뛰어갔다. 잠시 지켜보던 치트는 패치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순순히 보내주시네요?”
계속 얘기를 나눠봤자 좋을 게 뭐 있나? 보아하니 얼른 떠나지 않으면 아주 감시할 기세던데.”

패치는 그리 말하며 잠깐 여기 기다리라고 한 후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는데 양 손에 삽을 든 채 나타났다.

삽은 어디서 얻었슴까?”

처음부터 챙겨왔네만.”

하지만 삽이라니 보통은 잘 안 챙기는데 말이죠? 준비성이 남다르시네요~”

언젠가 자네를 묻을 때 사용할 건데 당연히 챙겨야하지 않겠나?”

치트는 하하 웃으며 농담이시죠? 물었지만 패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치트의 뒷목에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렸지만 삽을 들고 나무들 가까이 걸어가던 패치는 못 봤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한 둘이 아닐세. 도시에서는 이상한 게 무엇 때문인지 아주 명확했지만 여긴 그렇지 않지, 대놓고 이상하다는 걸 보여줬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고. 여기와 도시의 차이점은 방금 말한 거고 공통점은 이상한 걸 대놓고 보여주는 걸세.”

삽자루를 쥐던 패치는 이어서 설명했다.

또 차이점을 짚자면 도시는 누군가가 해결책을 알려줬고 여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도 차이점이지.”

그렇게 말하며 패치는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멈췄고

이제 겨우 두 번째긴 하지만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니면 다른 무언가든 간에 어떻게든 우리에게 해결책을 전하려고 한다고 가정한다면

패치는 나무가 꽂혀있는 것처럼 심어진 흙부분을 삽으로 쿡 찌르며 말을 끝낸다.

명칭 자체가 의미와 같다고 예상해볼 수 있지.”

패치는 그리 말하며 무덤을 파내기 시작했다.

 

헵토미노! 헵토미노!!”

여보!!”

신시어를 따라잡은 헥소미노가 그대로 붙들어 멈추게 했다.

헵토미노! 내 아기 어디갔어?! 헵토미노!!”

여보, 신시어! 진정해, 헵토미노 무사해!!”

어떻게 진정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안심할 수 없어!”

헵토미노 다른 분들한테 맡겼어! 기억 안 나?!”

우리가 멀쩡히 있고 어디 갈 일도 없는데 왜 맡겨? 맡길 이유가 없잖아! 왜 거짓말을 해?!”

거짓말 아니야!”

그럼 누구한테 맡겼는데?!”

헥소미노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신시어가 붙잡고 자세히 캐묻기 시작했다. 그런 끝에 나온 대답은

“...요정.”

“...?”

완전히 넋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신시어가 툭 말을 뱉었다.

당신 제 정신이야?”

헥소미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신시어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 들어.”

그 말에도 헥소미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결국 목소리처럼 덜덜 떨고 있는 손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헥소미노의 표정은 한껏 구겨져 있었다. 마치 여러 감정을 전부 다 구겨넣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들은 슬픔, 공포, 당황, 혼란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자리를 차지하는 건 후회였다. 신시어 또한 혼란스러운 눈으로 마주하며 입을 벌린 순간

“...여보?”

 

패치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땅을 팠기 때문에 흐른 땀인지, 지금 막 발견한 진실 때문에 흐른 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몰랐지만 그만큼 목격한 진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해가 점점 저물고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흙이 아닌 다른 게 나타났다. 조금 더 넓게 파보니 상자처럼 보였고 완전히 흙들을 걷어내니 상자처럼 보였던 건 관이었다. 누구의 관인지 이름이 적혀있을 부분은 칼자국이 거칠게 난 상태로 지워져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관인지는 열어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였던 건 죽은 이들에게 애도의 표시로 바치는 흰 국화였다. 하지만 이게 진실이 된 이상 이 국화는 마냥 애도의 표시로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가 살아 움직이다니...”

흰 국화에 둘러싸여 있는 신시어는 이제 영원히 눈을 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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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들른 도시보다 더 대놓고 이상현상을 보이는 이 상황에 대해서 퍼블리는 대체 뭐라 반응해야할지 애매한 모습을 보였다. 용사는 애초에 이상하고 멀쩡하고를 구분하지 않는 듯 싶었다. 바둑이와 노는 게 더 중요해보였다.

? 할머니 오셨나봐요!”

아이 그러니까 헵토미노는 할머니가 돌아왔는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 건지 닫혀있는 현관문만 얼핏 보고도 그렇게 말했다. 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할머니! 손님들이랑 같이 들어가도 돼요?”

그러자 안쪽에서 언듯 희미하게 그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작아서 놓칠 뻔 했지만 다행히 헵토미노는 들었는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오세요!”

실례한다는 인사말을 꺼내며 조심스럽게 들어오자 휠체어에 앉아있는 노인이 보였다. 나이가 들면 거동이 불편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코에 꽂혀있는 산소호흡기, 손등에 꽂혀있는 호스가 휠체어 뒤에 수액과 이어져있는 모습을 보니 누워있어야 할 환자였다.

, 안녕하세요...?”

“...아가. 들어가있거라.”

노인의 말에 헵토미노는 의아해했지만 바둑이를 안고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 챈 퍼블리는 미리 용사의 입을 막았다.

외부인이 여기까지 오는 건 처음이군. 전에 왔을 녀석들은 저 무덤을 보러 가다가 그 못난 녀석에게 내쫓겼겠지.”

못난 녀석이 누구인가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일행들을 어서 이곳에서 내쫓으려고 했던 건 바로 헥소미노였으니까.

너희들은 왜 여기까지 온 거냐? 쫓겨난 녀석들은 우드가 없으니 우드가 열렸던 나무라도 뽑아가려고 안달이 났었지만 너흰 우드는 안중에도 없구나.”

아픈 몸상태를 대변하듯 잔뜩 쉬고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내용과 기세만큼은 창보다 더 예리했다. 퍼블리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어디까지 얘기해야하나 고민했고 동시에 용사의 입을 막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지만 용사가 바로 입을 열기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이상한 거 찾으랭~!”

용사에게 시선을 준 노인은 한숨같은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퍼블리가 좀 더 상세히 설명하려던 순간 노인의 입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보다시피 그리 오래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 가장 최근 상황은 몰라도 뭐가 어떻게 이상하고 달라졌는지는 알고 있지. 제대로 된 목적도 모르는 낯선이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들을지 듣지 못할지는 너희들이 하는 말에 달려있다는 걸 알아두거라.”

경고인 듯 싶으면서도 언뜻 들으면 충고같은 말에 퍼블리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지만 곧이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고라는 걸 알아채고 여행 이야기와 신탁의 내용까지 전부 말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노인은 문득 말했다.

넌 사람의 선의를 쉽게 믿거나 아니면 속이는 것 자체가 힘들어하는구나.”

?”

네가 솔직히 모든 걸 말한다고 해도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모든 걸 알려줄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함부로 모든 걸 내보이는 순간 눈 뜬 채로 네 손을 벨 녀석들이 수두룩 한 걸 모르진 않을 테니.”

그렇지만 음...어르신은 제 손을 벨 생각은 없잖아요?”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표정에서 어딘가 익숙함을 읽은 퍼블리는 하하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난 네 손을 벨 생각은 없다. 이용해먹을 생각도 없지. 지금 솔직히 말한 건 옳은 판단이긴 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은 만큼 말하는데 힘이 부쳐보였다. 숨소리가 안정 되었을 때 나온 말은

무덤으로 가봐라.”

거긴 나무 밖에...”

나무만 봐서 뭘 하느냐? 상자도 뭐가 들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선 열어보는 법인데 나무만 멀뚱히 보면 쉽게 찾을 답도 영원히 못 찾는 건 당연하지!”

결국 큰소리가 나오자 찔끔 놀란 퍼블리가 옆이 훤하다는 걸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용사는 어디로 갔는지 옆엔 아무도 없었다.

고 덩치만 큰 어린녀석은 헵토미노 따라 나갔다. 키도 큰 녀석이 잽싸긴 다람쥐만큼 잽싸더구나.”

방 안에 있는 게 심심했던 헵토미노는 나름 몰래 나간다고 몰래 나갔지만 못 본 건 퍼블리뿐이었다. 노인은 봤어도 모르는 척 했고 용사도 심심했는지 바로 따라 나갔다.

어쨌든 내가 할 말은 이게 끝이니 얼른 가봐라. 해질 때 가면 더 찾아보기 힘들 거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처럼 보였다. 퍼블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기 전, 이제야 생각난 표정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잠시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문을 열고 나갈 때 완전히 닫기기 직전, 작은 목소리로 말하길

펜토미노.”

대답은 제대로 들렸지만 다시 문을 열진 않았다. 퍼블리의 머릿속엔 빨리 돌아가서 지금 겪은 일들을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우선 헵토미노와 같이 나간 용사를 찾는 게 먼저였다.

용사님! 어디계세요?”

확실히 어두워지면 돌아가서 다시 뭔가를 살펴보는 건 물론이고 돌아가는 것 자체도 힘들 게 분명했다. 용사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았길 바라며 돌아다니자 곧이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내 칭구들이랑 비슷해!”

정말요? 사실 아빠가 절 맡겼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안 오고 그래서 저 혼자라 너무 무서웠었는데 그 때 할머니가 나타났어요!”

둘은 흙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의 헵토미노가 자기 얘기를 하고 용사는 특유의 웃는 얼굴로 들으면서 호응하는 식이었다. 바둑이는 막대 물어오기로 체력을 다 썼는지 헵토미노의 무릎에 잠들어있었다. 퍼블리는 멀리 가지 않았다는 거에 안도하며 용사를 부르기 위해 다가갔다.

사실 아빠는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절 맡긴 이후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거든요.”

? 엄마는?”

? 엄마요?”

헵토미노의 의아함 가득한 표정과 함께 나온 말에 퍼블리는 그만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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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제 막 성인이신가요?”

? , 얼마 안 있으면 성인이 돼요.”

! 그럼 벌써부터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자신도 한 때는 여행하는 게 꿈이었다면서 어디를 들려봤는지 요즘 길은 여전히 흙길인지 궁금하다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에 퍼블리는 아직 많은 곳을 돌아다닌 게 아니며 제대로 가본 데가 기술의 도시라고만 했다.

기술의 도시요? 처음 듣는 지명이에요. 언제부터 생겼나요?”

...아마 5년 전부터요?”

“5년 전이라...그 땐 여기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으니 한창 바쁘던 때였네요. 혹시 여기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중간에 마을을 거쳐서 와야하지만 엄청 멀진 않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어지네요.”

다시 한 번 기묘한 느낌을 받은 퍼블리는 처음 이상한 반응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며 결혼하기 전, 즉 이 나무 무덤에 나가지도 않고 살기 전엔 주로 어디서 살았는지를 물어봤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여기 근처에서 살았었어요. 우드 덕분에 이 근처가 꽤 유명해져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고 덕분에 살던 곳도 가게가 많이 들어오고 그랬죠.”

그러고보니 선대님이 있다고 하셨죠? 그 선대님이 우드를 유명하게 하신 분이신 거죠?”

, 펜토미노님이 우드의 특성을 알아내신 덕분이에요.”

그리고 그 특성을 이용해서 한 가지 놀이를 만들어내셨고요?”

역시 멀리까지 알려졌군요? 당시에는 굉장하고 파격적인 놀이었으니 엄청나게 소문이 돌고 부풀려지기도 했어요.”

듣고 있던 퍼블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계속 기묘하고 위화감이 느꼈는데 단순히 신시어가 말하는 이야기들이 통상적인 상식이나 정보들과 어긋나있어서 뿐만이 아니었다. 퍼블리는 이 이야기들을 지금 처음 듣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이야기들을 어디서 들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신시어씨? 갑자기 딴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요...”

뭔가요?”

혹시 요즘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 있으세요?”

그 말대로 갑작스러운 질문이라고 느꼈는지 신시어는 눈을 깜빡이며 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게 짚이는 부분이 없잖아 있는 듯 싶었다.

있긴 있지만...물어보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요즘들어 기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거에 대해서도 이상하다고 느끼는 일들이 많아져서요. 잘 알고 있던 걸 까먹고 있거나 하는 일도 생겼어요.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 싶어서 물어봤어요.”

신시어는 기억을 더듬는 건지 조용해졌다. 퍼블리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다가 하늘을 봤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진 않았지만 노란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고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느꼈다.

이상한 점이라면...역시 오던 사람들 발길이 뚝 끊어졌다는 거랑, 요즘 헥소미노가 많이 날카로워진 거? 이 두 가지네요.”

대답을 들은 퍼블리는 조금 더 직접적인 걸 꺼냈다.

지금 아들은 누가 돌보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나와있으니 헥소미노가 돌보고 있을 거예요.”

그럼 아까 저희가 집으로 초대받았을 땐 누가 돌보고 있었나요?”

그 때도 그 이가 오기 전까진 저 혼자 여러분을 만났으니 역시 또...?”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신시어는 꽤 혼란스러워보였다. 신시어가 일행을 초대했을 땐 집 안엔 아무도 없었고 그 이후로 들이닥친 헥소미노도 혼자였다. 아직 기어다닐 시기도 안 됐다는 아기를 혼자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둘 모두 곁엔 아기가 없었다. 한순간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일어난 신시어는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퍼블리는 얼른 일어나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여행 준비를 하기 전엔 운동도 틈틈이 해왔던 퍼블리의 달리기는 결코 느리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신시어가 더 빨랐다.

신시어씨!!”

결국 신시어의 모습은 퍼블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무작정 달리다보니 방향이 지금 어디쯤인지도 까먹은 퍼블리는 난감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신시어씨! 어디 계세요? 신시어씨!”

신시어를 찾던 도중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뭇가지와 풀을 밟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가보니 사람은 없었고 웬 하얀 강아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바둑아!”

곧이어 어린 아이 목소리가 들려와 퍼블리는 흠칫 놀랐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런데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막대기 어디갔징~?”

너무 멀리 던졌어요!”

그른가~?”

북쪽으로 갔던 용사였다. 퍼블리는 그럼 여기가 무덤에서부터 북쪽 쯤 되려나 짐작했지만 아이와 신나게 노는 용사의 모습을 보면 아주 정확하게 북쪽 방향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난감함에 둘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 불리다~!”

퍼블리예요.”

펍리~!”

아이는 퍼블리를 보고 다가오길 머뭇거렸지만 용사랑 아는 사이라는 걸 보고 안심했는지 다가와 물었다.

혹시 용사님 동료예요?”

? 저 분이 용사님인 건 어떻게 알았어?”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자길 용사님이라고 부른대요!”

아무 말 하는 용사에 아이가 눈치껏 알아먹은 거였다. 아이는 용사님이랑 바둑이랑 막대기를 던지고 물어오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덧붙였고 강아지 옆엔 제법 길다란 막대기가 놓여있었다.

혹시 이 근처에서 뛰어가는 사람 한 명 못 봤니? 다홍색 머리의 여자분인데.”

못봤어요. 사실 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직접 얘기하는 거 할머니 제외하면 처음이에요. 저는 그동안 계속 이 숲에서 살았거든요.”

숲에서 살았다는 말이 조금 의아했는지 퍼블리는 근처 마을에 가보지 않았냐 물었다. 그러자 나온 대답은 할머니가 숲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거였다.

할머니가 말하길 제가 요정들한테 끌려갈 뻔 했고 언제 요정들이 또 나타날지 모른대요. 요정은 숲에서 사니 숲에 계속 있으면 데려와놓은 거라고 착각해서 저에 대해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 때까지는 있어야 한대요.”

요정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바가 없는 퍼블리는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라는 분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이 숲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신시어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 또한 있었다.

혹시 할머니가 어디 계신지 안내해줄 수 있을까?”

할머니가 자리 비울 땐 어딨는지 저도 잘 몰라요. 대신 저희 집으로 가실래요?”

퍼블리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는 아직 떠 있었지만 저 하늘 끄트머리가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직전까지 돌아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애매해졌다.

혹시 여기서 머니?”

아뇨! 바로 근처예요!”

그럼 잠깐만 들려도 될까?”

아이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집에 난생 처음으로 사람이 오자 신이 났는지 막대기와 바둑이를 안아 들고 신나게 앞장 서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용사도 덩달아서 같이 뛰어갔고 퍼블리는 아이의 뜀박질에 맞춰 빠르게 걸었다.

아이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집이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엔 나무들의 그림자가 때문에 잘 안 보였지만 아이와 할머니가 단 둘이 산다기엔 상당히 큰 집이었다. 집을 살펴보던 퍼블리는 문득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았단 걸 깨달았고 이름을 묻자 아이가 대답하길

전 헵토미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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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급하네, 일터에서 아주 잘 내치게 될 성격이야 안 그래?”

당신은 그래서 내쳐졌나보군 그래.”

정곡을 찔렸는지 상대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져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적이 더 급했는지 곧이어 진정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그래, 내가 초면에 참 무례했지? 그런데 그거 알아? 너도 곧 내꼴 날 걸?”

그림자가 져 앞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패치는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림자였다.

눈치가 꽤 빨라보이는데 살인마가 누군지는 눈치챘지? 하지만 살인마가 숨긴 비밀이 뭔진 모르고.”

숨길 비밀이야 뻔하지.”

뻔하지 않은 비밀이니까 내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거 아니겠어?”

길게 말하는 사람만큼 속이 빈 사람도 없다는 걸 모르나?”

사람? 사람이라고?”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한 발 뻗어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반응하는군.”

...하하....그래 사람...사람이지? 사람이었지?”

실성한 듯이 웃으며 하는 말에 패치는 애초에 상대하지 말아야했던 걸까 싶어 미묘한 표정으로 더 멀어졌다. 상대는 그 모습에 오히려 더 반응이 묘해졌다.

같은 신세끼린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이제보니...”

잘 보이진 않아도 쭉 훑어보는 시선을 느낀 패치는 한 번 노려봐준 후 바로 뒤돌았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간만의 외부인이라고 생각해서 반가웠는데 같은 처지라니.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빨간머리 애송아, 너도 외부인을 발견하면 살인마를 죽여달라고 애원하거나 나처럼 비비꽈서 말을 듣게 만들어야할 걸? 안 그러면 이렇게 너덜너덜한 상태로 영원히 여길 떠돌테니까!”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얘기를 하는 상대에 패치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을 섞을 생각도 없었으니 계속해서 멀어졌다. 그림자가 져서 애초에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너덜너덜하다고 한 들 감흥조차 들지 않았다. 스무 걸음 더 걸어간 패치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서 있었던 자리에 CGA라고 적힌 이름패만 떨어져 있었다.

패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죽었다느니 살인마를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라느니 같은 무례하고 중구난방인 말 자체가 불쾌하게 다가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지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고 패치는 고민했지만 미리 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무덤으로 돌아갔다.

 

헥소미노는 떨떠름한 얼굴로 사제의 증표와 치트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증표가 위조 증표인지 구분할 능력은 없었지만 둘러싼 로브 아래에 확실히 사제들 그것도 높은 직위의 사제가 입을 법한 옷을 입었고 자수 또한 꽤나 정교하게 놓여있어 모방한 가짜옷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제를 밖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세간의 인식처럼 사제는 신전에 박혀서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나오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지 헥소미노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진 않았지만 적대감은 많이 내리눌렀다.

옷도 보니까 짬도 높은 것 같은데 굳이 봉사를...여기 온 이유가 나무들이 저 꼴 나서 봉사차 온 거야?”

밖으로 나오는 사제는 딱 하나였다. 봉사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제. 특별한 일이 바로 그거였다. 치트는 제 목소리가 돌아온 걸 느끼고 조금 기침을 한 후 편안한 얼굴을 했다.

아이고 드디어 목소리가 나오네요~ 짧은 금언이 걸려있어서 진즉 말하지 못했네요. 맞습니다, 봉사차 왔지요. 비록 해결이 어렵더라도 어려운 곳을 찾아오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여기가 어려워 보여?”

나무들이 무덤이라고 불리고 이제 관광객도 안 오는데 어렵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기엔 외부인이 봐도 좀 그렇잖슴까?”

당사자가 괜찮으니까 부디 신경 꺼달라고 온 세상에 전해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아내분과 여유롭게 지내는데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가 보군요? 걱정마십쇼, 저희도 명분이 필요한 거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명분만 생길 정도로 잠깐 머물다 갈검다. 그리고 돌아가서 부부는 좌절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며 오붓하게 지낸다고 소문을 내면 관심도 완전히 사그라들겠죠?”

헥소미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온 말이 만족스러웠는지 더 이상 뭐라하진 않았다.

들쑤시지 말고 적당히 우리 눈에 안 보이게 박혀 있다가 얼른 가라.”

네네~”

치트는 그리 말하며 왔던 방향 그대로 되돌아갔다. 팔짱끼며 노려보던 헥소미노는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않다가 그림자가 한뼘 더 길어질 때 쯤에서야 움직였다.

 

사실 그 이는 우드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늘 제 앞에서 하기 싫다, 힘들다, 그만두고 싶다 이렇게 외치고 다녔죠.”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나봐요.”

태어나자마자 한 일이 가문의 일을 이어받기 위해 훈련하는 거였어서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가 없었다네요. 그래서 뭘 하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저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거 있죠?”

근처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은 두 사람은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모두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는 게 오랜만이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터놓고 있었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목적에 대한 이야기나 넓게 쳐도 여행에 관련된 얘기만 나눠왔던 퍼블리는 오랜만에 자잘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고 그동안 남편 외의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어 외로웠던 신시어의 심정이 얼마나 편안해졌을지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어보였다.

마을은 멀지, 집안일은 많지, 애도 봐야하지 얼마나 바빴는지 쉬는 날이 드물었어요. 언제 하루는 더 이상 못 참아서 가출을 했었는데 그 이가 얼마나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며 저를 찾아다니던지...”

? 아이도 있으셔요?”

! 헵토미노라고 아주 귀여운 아들이에요.”

사실 거의 자기 혼자서 돌보다시피 했는데 가출한 이후론 남편도 같이 공동육아를 하게 됐다며 덕분에 한 숨 돌릴 시간이 났다고 하는 말에 퍼블리가 이렇게 물었다.

...아들이 몇 살이에요?”

아직 기어다닐 시기도 안 됐어요.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걸 보면 아기는 정말 금방 크는 걸 느껴요.”

그 대답에 퍼블리의 표정이 굳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집 안에 아기가 살고 있다는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주 청소한다하더라도 아기가 있다는 가정하에 너무 깔끔했던 바닥과 얼룩은 물론이고 흠집도 없는 식탁, 의자는 어른이 앉을만한 의자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얼핏 떠오르던 시야 한 귀퉁이의 빨래더미엔 어른 옷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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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 쪽이 아니어도 다른 곳에도 단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네. 이상현상이 말 그대로 현상을 의미하니 그렇게 작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네.”

나무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탐색해보자는 의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외엔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각진나무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의 이상현상이었으니 너무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사제님이 금언 마법 좀 풀어주면 안 되냐는데요?”

“어차피 따로 찾는 동안 말할 필요가 없잖나?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풀리니 우는 척 그만하게.”

역시나 먹히지 않는 가짜울음에 치트도 금방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면서 조사할 방향을 고르는데 동참했다.

“그런데 용사님 혼자 둬도 될까요?”

“우리가 언제까지고 옆에서 잡아줄 순 없네. 그리고 우리가 찾아오기 전에 환각의 숲에서도 멀쩡히 있던 걸 보면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있는 것 같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그리 말한 패치도 사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사의 행동이 훤해 찜찜했지만 본인이 한 말대로 언제까지고 옆에 붙어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북쪽을 선택한 용사에게 패치는 나무 주인들을 찾아가거나 만나게 되더라도 자극하지 말라는 주의를 준 패치는 서쪽을 골랐고 치트는 남쪽, 퍼블리는 동쪽을 골랐다.

“돌아오는 시간은 해가지기 직전, 올 때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이상하다 싶은 건 뭐든 가져올 수 있음 가져오게. 가져올 수 없다면 어디서 봤는지, 특징이 뭐였는지를 이 종이에다 적고.”모두에게 각각 종이 한 장과 펜이 쥐어졌다. 패치는 신나게 종이접기를 하는 용사에게 주의를 한 번 주고 혹여나 위험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방어막과 경보를 울리는 뱃지도 나눠줬다. 치트에게 주려고 할 땐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치트가 방금 받은 종이에다 악연과는 별개로 지금은 함께 여행하는 일행이니 공정해야한다는 항의를 적자 마지못해 줬다.

“선물 아니니 기분 나쁘게 웃지 말게.”

뱃지를 받자 늘 웃는 얼굴에서 더 환하게 웃는 치트를 보던 패치는 입을 막아놓은 게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출발하자는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쪽으로 달려가려는 용사의 방향을 북쪽으로 다시 되짚어주며 뒤를 돌아보던 패치는 그대로 먼저 갔다.

“이따 봐요!”

일행들이 전부 떠나고 나무들만 남은 자리에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 무엇도 달려있지 않아 무덤처럼 바람소리만 내려앉았다.

남쪽으로 쭉 가던 치트는 꽤나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역시 꿍꿍이가 있었구만? 다른 녀석들 어딨는지 당장 말해!”

이곳의 주인 헥소미노와 딱 마주쳐버렸고 저렇게 윽박지르고 있었지만 치트는 앞으로 1시간하고도 몇 십분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헥소미노는 난감하게 웃으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치트가 더더욱 의심스러웠는지 가뜩이나 흉흉하게 뜬 눈빛의 세기가 더 거세졌다. 급한대로 치트가 수화로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뜻을 전했으나

“너 아까 인사하면서 나가지 않았냐?”

치트는 속으로 패치를 불렀다. 당연하게도 패치에겐 전해지지 않았다.


“아직 떠나지 않았군요?”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아까는 남편 때문에 미안하다며 대신 사과하는 신시어와 마주친 건 퍼블리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퍼블리는 당황했지만 주의해야할 건 헥소미노 쪽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오히려 패치가 말한 이상현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저흰 괜찮아요. 그보다 저희를 찾으러 나오신 거예요?”

“네.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멀리 가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서 얼른 나왔어요. 아까 보니 정말로 여행하는 분들처럼 보였는데 이대로 보내면 사과할 기회도 없을 것 같았어요.”

여행하는 건 맞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퍼블리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남편이 저번부터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경계중이에요. 하는 말로는 죄다 우드가 열리는 나무를 훔치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열리지 않자 그 방법을 알기 위해서 온 도둑들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에 오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아 보여요.”

“그런데 왜 나무들을 그냥 놔두는 거예요? 처음에 왔을 땐 울타리도 없었고 사유지처럼 보이지 않아서 엄청 당황스러웠어요.”

그에 신시어는 흐리게 웃으며

“나무들이 전부 말라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상태라 그냥 놔두고 있다네요.”

씁쓸함이 가득한 말을 건넸다.


“확실히 다시 피워내고 싶다고 하는군.”

돌아가면 용사의 언어 선정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패치는 주변을 둘러봤다. 각진나무들이 있는 자리를 제외하면 주변은 그냥 흙밭이었다. 마땅히 눈에 띄는 게 없어 더 가봐야하나 고민했다. 여기서 더 가게 되면 어느순간 각진나무 무덤이라는 장소를 벗어나게 되는 게 아닌가가 고민의 이유였다.

“무덤 보러온 별난 손님이 또 왔나보네?”

그 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돌아보니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데에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자넨 누군가?”

“무덤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아까 주인을 직접 봤으니 안 통할 거짓말은 그만두게.”

“그 주인이라는 녀석은 엄연히 땅 주인이고 난 무덤 주인이라니까? 뭐, 지금 당장 알아먹게 말하자면 무덤 말고도 땅과 나무는 물론이고 우드 전부를 갖고 싶어했던 주인 희망자?”

“쉽게 말하면 도둑이군.”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도둑이었지. 이젠 훔치지도 못하지만.”

햇빛 아래에 있어서 앞모습이 그림자가 져 자세히 보이지 않는 상대의 얼굴에는 언듯 보라색과 하얀색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쪽도 단순히 관광하러 온 손님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나처럼 훔쳐보려고?”

“훔칠 가치나 있는지도 모르겠네.”

“이야 완벽물질을 홀대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아주 인상깊었어.”

비꼬듯이 말하는 어투에 패치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무시하고 가려고 했다.

“성질 급하긴, 아주 재밌는 얘기가 있는데 들어보지 않겠어? 비밀을 아등바등 숨기고 있는 살인마 얘긴데.”

패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걸어갔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말한 살인마 만큼 비밀과 검은 속내가 있는 법이었고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저런 말을 미끼로 흔들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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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뭐야!?”

갑작스런 상황에 퍼블리는 당황했고 패치는 어이없단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뭐라 더 소리치려던 남자를 진정시킨 건 신시어였다.

자기야? 왜 그래?”

괜찮아?”

그건 오히려 내가 물을 말이야, 왜 갑자기 그래?”

남자는 그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굉장히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일행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무들 뽑아가봤자 우드는 열리지도 않을 거고 소용 없을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썩 꺼져.”

헥소미노!”

신시어의 외침에도 남자, 헥소미노는 굳은 표정에 변화 하나 없었다. 난데없는 적의에 당황한 퍼블리가 정말 나무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전혀 들어먹지 않았다. 패치의 눈썹 끝이 한 없이 위로 치솟은 걸로 보아 이 상황은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치트가 사제의 증표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다시 주렁주렁 달고 싶대!”

?”

주렁주렁!”

뜬금없는 용사의 외침에 헥소미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무들 모두 다시 주렁주렁 달고 싶대!”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용사를 노려보던 헥소미노는 재빠르게 용사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는 패치로 인해 앞이 막혔다.

비켜!”

누구 하나 죽일 듯한 얼굴로 다가오는데 비킬 사람이 어딨겠나?”

그 말이 신경을 건들기라도 한 건지 더욱 험악해진 눈빛에 불길이 튀었다. 곧이어 빠악! 크게 맞는 소리가 울렸지만 맞은 사람은 패치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제대로 사과하고 초대할게요! 일단 제가 이 녀석 좀 말릴게요!”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신시어가 결국 나섰다. 헥소미노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동안 치트가 인사하며 용사와 패치의 팔을 잡고 나왔다. 퍼블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다가 일행들을 뒤따라 나왔고 문이 닫히자마자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보지.”

그치만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적어도 한 소리 할까 했지만 다시 들어가봤자 상황만 악화시킬 것 같군. 그리고 용사가 말한 나무들이 다시 달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네.”

주렁주렁!”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봐도 용사는 계속 나무들이 주렁주렁 달고 싶다고만 말했다. 용사 나름의 최대한의 표현인지 설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결국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온 일행들은 나무들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달라진 게 없었다.

가아아아아득!”

나무가 그리 말하기라도 했나?”

!”

치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패치는 표정이 한층 더 좋지 않아졌지만 한순간 바로 펴졌다. 달라진 낌새를 놓치지 않은 치트가 무슨 일이냐 묻자

“...바람소리였군.”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으며 나무들을 살펴보던 패치는 더 볼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 근처에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했다.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쉼터가 있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청소를 하면 제법 머무를만 했다.

“...신탁 내용은 이곳에 와보는 거 외엔 없었나?”

저번의 도시처럼 이상현상도 해결하는 거죠.”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이상현상이야 바로 눈에 보일테니 이상현상이지만 저번의 해결 방법도 들어보니 다른 이의 도움으로 해결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신탁이 괜히 내려온 게 아님다~ 저번은 운이 좋았던 편이죠.”

패치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패치의 말대로 이상현상은 그렇다쳐도 신탁 내용이 해결 방법도 알려주지 않고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현상을 발견하다보면 해결 방법도 나오지 않겠슴까? 마법진이 있었던 그 건물처럼 말임다.”

두드리고 꽃에다 말하는 방식처럼 조건이 있다면?”

찾은 것부터 반 이상은 한 거 아니겠슴까~”

지나치게 낙천적이군. 찾는다한들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자칫하다간 여기서 평생 머무를지도 모르네.”

? 전 좋슴다~ 패치랑 오랜만에 함께...”

그간 잠잠하다 싶었지만 결국 터졌다. 한기와 함께 날아다니는 얼음 가시들과 피하기 바쁜 치트. 얼음가시들에 손을 뻗어보는 용사와 붙잡고 뒤로 물러나는 퍼블리. 치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나머지 모두에게는 다행이게도 쉼터 안이고 밖보다 좁았던지라 금방 구석에 몰렸다. 패치의 성질을 긁은 대가로 2시간의 금언이 내려졌고 쉼터는 평화와 함께 극히 고요해졌다. 치트가 손을 들어 눈물 훔치듯이 우는 시늉을 해봤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저 일단 이상현상을 찾아봐야하지 않을까요? 해결 방법도 이상현상을 발견한 다음에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상한 건 이미 발견했네, 아까 그 사람이잖나.”

“...그 분은 경계가 심하고 예민한 게 아닐까요?”

남자쪽 말고 여자쪽을 말한 걸세. 신시어라고 했던 그 사람.”

헥소미노의 첫인상이 강렬하게 박혀있던 터라 그제야 아. 하고 깨달은 퍼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패치가 신시어에게 의심과 의문이 가득한 질문을 날렸고 신시어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한다면 확실히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고 반응을 보였을 때 헥소미노라는 자가 너무 때맞춰 돌아왔지. 저 둘에게 뭔가 있는 건 확실해 보이네만.”

굳이 구분하자면 이상현상을 지니고 있다고 예상되는 쪽이 신시어, 그걸 인식하고 숨기려고 하는 게 헥소미노처럼 보인다고 정리하는 패치의 말에 용사가 불쑥 말하길

그름~ 물어보러 가장~”

자네 아까 쫓아내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나?”

용사는 용사다운 말을 꺼냈고 말리는 건 패치의 몫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머리를 맞는 건 용사가 될 것이고 날아오는 건 아까처럼 주먹이 아닐 거라는 걸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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