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썼어.”

?”
저번에 네 얘기로 글 쓴다고 했잖아?”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니카가 퍼블리에게 그동안 퍼블리가 겪었던 일들을 글로 써도 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노렸던 건지 그 때는 마침 아침이었고 퍼블리는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에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며 아니카는 허락을 받자마자 평소처럼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으니 퍼블리가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내용은 완전히 똑같이 하진 않았고 조금 다르게 썼어.”

어쩐지 내 얘기가 글로 써지니 좀 민망하네...”
아니카가 건네는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받아든 퍼블리는 빨개진 목을 가리듯이 고개를 푹 숙여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동화네?”
왠지 그냥 수필이나 소설보다는 동화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동화로 써봤어.”

동화다보니 어린아이들도 읽을 수 있게 간결한 문장과 간단한 단어로 쓰려고 애를 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더 번지지 않게 조심스레 종이를 넘기던 퍼블리는 마지막으로 써져있는 문장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들어 아니카를 마주봤다. 아니카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솔직하게 말해봐.”

별로는 아닌데 예상이랑 달라서 말이야. 보통 동화들은 항상 마지막에 모두 행복해졌다는 식으로 써지는데 이건 그...”
동화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부 해결은 됐지만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다라고 하기 보단 강조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당연하지. 지금까지도 모두가 행복하진 않잖아.”
그 말에 퍼블리는 더 말하지 않고 꺼내놓은 얼음을 집어 입 안에 굴렸다. 얼음에서 맛이 날 리가 없는데 혀뿌리에서 쓴맛이 도는 느낌에 퍼블리는 눈을 찌푸리며 작게 웃었다.

 

가장 이상적이고 상상하기 쉬운 미래라면 셋이서 전서구를 타고 왕국으로 날아가는 거였다. 물론 전서구는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고 극렬하게 날뛰었겠지만. 여기서 아니카와 전서구가 예상치 못한 게 있었으니 바로 저주 때문에 잠들어버려서 그대로 숲에 남아있었던 선발대들이 있다는 거였다.

흑기사단과 아난타처럼 잠드는 저주가 아닌 다른 저주에 걸려 숲이 사라지기 전에 빠져나온 이들도 있었지만 잠드는 저주가 월등히 더 많았다는 거였다. 숲에서 나온 메르시마저도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잠들어있었으니.

뭐야?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
곳곳에서 자다 일어난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와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패치는 주위를 한 번 슥 둘러보다가 옷에 붙은 풀을 털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퍼블리와 아니카, 전서구가 그런 패치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언제부터 이 근처에 누워있었는지 일어나고 있는 마녀들과 마법사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려서 따라갈 때를 놓쳤지만 다행히 패치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패치는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어떤 마법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덕분에 멀리서 그 마법사를 본 퍼블리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일어났나?”
, 너는?”
커다란 덩치에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 콧수염과 팔 근육이 인상 깊은 마법사. 흩어진 기억들을 봤을 때 아난타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말했던 그 마법사였다.

잠꾸러기들을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그 말에 그 마법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전서구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눈에 담아 굴리고 있었다. 이 난데없는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당연한 거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
저주에 걸려서 잠든 선발대들이 깨어나는 상황.”
간결한 질문과 간결한 대답이 오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전서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촉새처럼 빠르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낼 부리가 딱 벌어진 채로 멈춰있었다. 그에 아니카가 끝을 내듯 쐐기를 박았다.

지금 있는 역사책들 전부 태워지겠네?”
아니카가 가벼운 어투로 말하긴 했지만 역사책이 불태워지는 건 당연한 얘기이자 약과였고 왕국 자체가 지금까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돌아온 선발대들과 공적을 가로챈 후발대, 공주가 잠들어있던 걸 비밀로 했던 왕궁 마녀들과 살아 돌아왔지만 저주 때문에 겨우겨우 살아왔지만 저주가 풀린 덕에 다시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된 몇몇 이들과 왜곡된 역사책을 보며 살아왔던 이들. 난리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신성지대도 한창 불타고 있었는데 의외로 신성측을 공격하고 있는 건 흑기사단과 메르시가 아니었다.

아이고! 날개 아프다!”

소식 전하는 비둘기들이 가장 바쁘구나.”
바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요것아! 내 깃털 좀 봐, 튼튼해서 풍차처럼 날개 돌려도 한두 개 떨어질까 하던 깃털이 민들레 홀씨마냥 바람만 불어도 숭숭 빠지고 있는 거 봐!”

전서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퍼블리는 어색하게 하하 웃고 패치는 한숨을 쉬며 얼음을 넣은 물통을 가져왔고 전서구는 물통을 낚아채서 급하게 들이켰던 적이 있었다.

그 벌판, 아 이젠 숲인가? 아무튼 거기로 당신네들 찾으러 가기 전부터 묘한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진짜 홀랑 떠날 줄은 몰랐죠.”

그 뒤로 저주가 제대로 풀렸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둥 아무리 그래도 좀 더 있다가 저주가 확실히 풀렸을 때 떠나야하지 않았겠느냐는 둥 걱정 섞인 말들을 툴툴 내뱉던 전서구는 창문을 툭툭 두드리면서 구구 울어대는 비둘기를 보고 핼쑥한 얼굴로 마저 일하러 나갔다. 퍼블리는 창문에 붙어 전서구가 저 멀리 날아가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한참 용사와 컨티뉴를 찾았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아 찾는 걸 포기하고 전서구를 타고 막 깨어난 선발대들보다 먼저 왕국에 왔을 때 패치가 제일 먼저 한 건 뒷마당의 약새풀밭을 전부 태우는 거였다. 전서구는 그 때 부리를 쩍 벌리며 아까워했고 아니카는 여름에 시원했는데 아쉽다며 호호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건 바로 왕국을 나가는 거였다.

엄청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날 줄 알았는데 GM할아버지네 마을 가는 길은 바로 기억났어요!”

그리고 돌아온 곳은 왕국으로 오기 전에 살았던 숲이었다. 집을 태운 잔해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집이 있던 곳은 풀이 자라지 않아 곧바로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고 난 후 아니카가 종종 놀러오고 있었는데 예전엔 골목만 조금 지나면 됐는데 이젠 놀러오기 굉장히 멀어졌다는 작은 불만 외엔 크게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가다 패치가 자리를 비울 때 나중에 독립하면 같이 살지 않겠냐는 말을 넌지시 꺼내고 퍼블리는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벌써 2년이 흘렀다.

오늘은 왜 용사님과 같이 다니게 됐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이번까지 합치면 열 번째다.”
그래도 또 들을래요.”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퍼블리는 패치의 과거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게 하루 일과가 됐다. 숲에 흩어진 기억들은 퍼블리 덕분에 다시 뭉쳐졌지만 안에 아직 밸러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었는지 아니면 다시 돌아왔지만 너무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패치는 기억하지 못했다. 퍼블리는 이제 패치가 알고 있는 과거뿐만 아니라 특별히 무언가를 계속 먹을 정도로 좋아해본 적 없다는 미지근한 입맛과 포옹보다는 악수가, 연애서적보다는 추리 서적을, 추리서적보다는 마법서적을 더 좋아한다는 책 취향과 그 외 패치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사소한 취향들을 알게 됐다.

잠깐 물 갖고 올게요!”
왕국에서 살았을 때보다 확연히 밝아지고 쉽게 다가오는 퍼블리에 패치는 가장 먼저 미안함을 느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나온 건 사과였고 퍼블리는 사과보단 아빠의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싶다는 말을 했다. 퍼블리가 듣고 싶다고 했던 것들 중에 두 번 이상 듣지 않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둘이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는 게 있었으니 바로 치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얘기할 때 외엔 둘은 치트에 대한 걸 완전히 묻어뒀다.

내일 새로 물을 떠와야할 것 같아요.”
이제 여름이라 그런지 금방 마르나보군.”
그러고 보니 올해 축제는 진행할까요? 작년에는 워낙 정신없어서 축제도 생략됐던데.”
아마 안할 거다. 이제는 축제의 의미가 없어졌을 테니.”
패치는 그렇게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넘기고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패치를 통해 용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퍼블리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 이야기를 자주 듣는 이유는 한순간에 달라진 용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면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제 아빠가 더 이상 거기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느낌이 가장 컸다.

이야기를 다 듣고 생각에 빠져있는 퍼블리를 힐끗 보다가 눈을 감은 패치는 꽤 복잡한 심정이 담겨있는 한숨을 쉬더니 바로 입을 연다.

숲에 나온 이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고 지금에서야 겨우 결심이 든 게 있지.”

한창 생각에 빠져있던 퍼블리는 패치의 말에 다시 눈을 또렷이 떴다.

세상의 끝 너머로 가볼까 한다.”
언젠가 전서구가 전해줬던 소식 때문일까, 아니면 숲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용사와 컨티뉴 때문일까. 퍼블리는 놀라긴 했지만 곧이어 담담해졌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진정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용사님과 현자님을 찾기 위해서요?”

아니.”
단호하게 부정한 패치가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대답한다.

끝을 맺지 않고 잠드는 걸 선택한 불법침입자의 끝을 제대로 매듭 지어주기 위해.”

퍼블리가 그 때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놀란 건 당연했고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자리 잡은 감정은 신기하게도 기쁨이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패치는 안심한 얼굴로 편안하게 힘을 빼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었다. 그리고 퍼블리는

퍼블리?”

?”
우리 근육이, 감상은 안 들고 딴생각이 들었구나~?”

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동화를 보니 옛기억이 떠올랐다고 해도 딴생각을 한 건 맞았으니.

그래서 무슨 생각했어?”

예전에 내가 고생했던 생각.”
패치는 그 말을 꺼낸 날 바로 떠난 건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준비해뒀는지 짐을 고르고 챙기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사는 거창하지 않았다. 마치 평소처럼 식량을 사러 근처 마을에 갔다 올 때 하는 인사처럼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올 것처럼 둘은 큰 걱정 없이 인사했고 큰 동요 없이 몸을 돌렸다. 퍼블리는 예전만큼 슬프지 않았고 예전만큼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감나지 않아서 차분하다고 하기엔 굉장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예전만큼 막막하진 않았다.

아니카.”
?”
매번 드는 생각인데.”
슬프진 않은데 허전해서 그 허전한 만큼 눈물이 채울 뻔한 날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짐까지 챙겨서 온 아니카는 이제 같이 살겠다며 허전함을 조금씩 없애줬고 눈물이 나올 일도 이유도 없었다.

고마워.”

남은 허전함은 가끔가다 가지고 있던 튼튼한 유리병을 굴려 바람처럼 움직이는 파란꽃잎들을 지켜보거나 어렸을 때 가지 못했던 호수를 구경하러 가는 걸로 채워 넣었다. 그래도 가장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허전함을 없애는 건 바로 아니카였다.

그래. 그래서 감상은?”
여전히 힘들었고 글이랑 현실은 다르구나 싶어.”
당연한 얘기야.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고 좀 더 다듬어야할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까 마저 쓰러갈게.”
늦었으니까 나랑 더 얘기하고 자고난 후에 쓰는 건 어때?”
원래 늦은 시간에 더 집중이 잘 되는 법이야.”
아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뭉치를 다시 가져갔고 퍼블리는 시계를 힐끗 보다가 입을 열었다.

“GM할아버지는 어디 갔을까?”


다시 숲이었지만 벌판이었을 때도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바다 너머도, 산 너머도, 발을 딛을 수 있는 들판 너머에도. 넘어갔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는지, 않았는지 갔다 와서 그 너머에 뭐가 있다고 말해준 이들이 없었다.

그래도 가보고 싶으니까 가는 녀석들은 많지.”

높디높은 검은 산, 그 너머를 본 여행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산이 제 위로 올라가는 걸 허락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찌 보면 밸러니의 숲보다 더 까다로운 녀석이지. 컨티뉴는 생각을 단순하게 해서 산에게 직접 물어봤다는 거야. 그랬더니 뭐 놀랍다면 놀랍고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 거지.”

올라타는 건 간지럽고 거슬리고 아프기 때문이다냐!”
민감 피부!”
영감이 하도 처 말해서 외울 지경이야.”
퉁명스럽게 말한 검은 들개가 검은 산을 힐끗 돌아본다.

얼마나 처 대단한 제자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정말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컨티뉴도 제자 녀석도 누가 서로 스승, 제자 아니랄까봐 얼굴 한 번 처 보기 힘들 줄이야.”
그게 매력이지!”

히익히익 웃는 GM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검은 들개는 바람을 타고 오는 냄새에 눈을 떴다.

이미 철이 다 처 지나고 여기엔 없는 건데 웬...”
달콤새콤한 냄새가 난다냐!”

딸기향!”

결국 온 모양이구만?”

그 말에 GM은 무언가 알고 있는지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탁탁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 순간 갑자기 흔적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사라졌나 싶었던 녀석들이 있는데 한 2년 전에 한창 난리 났을 때 겨우 꼬리가 보여서 꼬리 잡고 쪼매 흔들어주니 엄청 골이 났나봐?”

일어나는 GM을 따라 누워있거나 엎드려있던 들개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익살스런 웃음을 지은 GM이 어둠속의 노란 안광과 마주한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

 

퍼블리가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GM의 이야기를 꺼내며 조금 더 떠들려고 했다가 바로 간파당하고 신나게 여행하고 있을 거라는 대답에 하하 웃으며 들어가는 아니카에게 손을 흔들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침대에 누운 거였다. 마땅히 할 게 없고 시간도 애매해 일찍 누운 거였지만 졸리지 않아 조금 뒤척이다가 잠들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퍼블리는 바로 잠에 빠졌었다.

“...일찍 잠들어서 일찍 깼다기엔 너무 이른데?”
이제 막 한밤중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퍼블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유 없이 퍼뜩 잠에서 깼는데 평소 같으면 잠결이라 바로 다시 잠들었겠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잠들기 전보다 훨씬 더 또렷했다. 몇 번 침대에서 뒤척이던 퍼블리는 결국 몸을 일으켰고 아니카가 아직 안자고 계속 글을 쓰고 있지 있을까하는 기대를 가지다가 다시 시계를 보고 생각을 접었다. 그러다가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웬 파란빛이...”
창문 바로 아래에 놓인 탁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혹시 파란 무언가가 창문에 붙었나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살펴본 퍼블리는 하늘에서 평소와 다른 달을 발견했다.

푸른 달이구나.”
달이 푸르게 빛나는 때는 달이 가장 높게 떠 있을 어느 날이었고 그 때쯤에 퍼블리는 항상 자고 있어서 푸른 달을 직접 본 적은 드물었다. 여느 때처럼 노란 빛이 아닌 푸른 달은 굉장히 신비롭게 느껴져서 퍼블리는 다시 침대로 가지 않고 탁자에 걸터앉아 달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순간 퍼블리는 반쯤 충동적으로 서랍을 열어 얇은 천을 꺼내 두르고는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방을 나오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 집을 나왔다. 여름이어도 아직 초여름이라 한밤중은 입고 있는 잠옷으로 돌아다니기엔 조금 서늘했다. 가볍게 어깨를 두른 천을 꼭 쥐고 발을 재촉하듯 빠른 걸음으로 퍼블리가 도착한 곳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호수였다.

...”
용사가 장미씨앗을 심고 퍼블리가 태어난 푸른 장미가 피어났다는 땅과 그 옆의 호수. 밤하늘을 담고 있는 맑은 호수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만약 풀과 나무가 없었다면 하늘만 존재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깨끗한 거울 같았다. 감탄을 흘린 퍼블리는 그대로 서 있던 자리에 앉아 호수를 바라봤다.

내가 태어났던 날도 이렇게 푸른 달이 뜨는 날이라고 말해줬었지. 그래서 오늘 이렇게 깬 건가?”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한 혼잣말이자 물음이었는데 어디선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퍼블리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니카?”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깨서 아니카가 따라 나온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지만 아니카의 노란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아무리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숲이라고 해도 아예 안 온다는 건 안일한 생각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퍼블리는 천천히 패치에게 배운 방어마법과 원거리 공격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퍼블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분명 눈을 떼기 전까지 밤하늘 외엔 아무것도 담지 않은 호수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푸른 달 위에 있는 무언가가 조그맣게 꼬물거리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천천히 퍼블리가 있는 곳으로 물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던 퍼블리는 가까이 오는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두르고 있던 천을 풀어 손에 들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허벅지까지만 잠길 깊이쯤에 건질 수 있게 됐는데 건진 즉시 퍼블리는 천으로 물을 닦으며 감싸 안아들었다.
, 아기?”
퍼블리가 건진 건 다름 아닌 아기였는데 마법사가 호수에서 태어난다는 걸 퍼블리도 알고 있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이 만남이 퍼블리는 마냥 당황스러웠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작은 머리에 맞게 작고 적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호수에 비친 달보다 훨씬 더 짙은 파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얌전히 퍼블리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
아기의 눈을 본 퍼블리의 외마디 감탄이 모든 걸 담고 나타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환하고 맑은 녹색 빛을 퍼블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도 퍼블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리지도, 품에 안길 정도로 작지도 않았지만 퍼블리는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한숨 같은 웃음을 지어본 퍼블리는 까르륵 웃는 아기를 쓰다듬으며

만나서 반가워요, 용사님.”

모든 것은 운명 같은 우연이길 바라.

 

 

 

 

 

 

 

 

 

 

 

end

Posted by 메멤
,

아이는 마지막으로 저주로 가득 찬 숲에 도착했습니다.

안개가 눈을 가리고 안개 뒤로 숨어있던 나무들이 발을 막았습니다.

어찌해야할지 몰라 당황하던 아이의 앞에 한 마법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앞으로 나아가면 네 아빠를 찾을 수 있단다.’

아이는 길을 안내해준 마법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열심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앞에 아빠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아빠는 어린 모습의 마법사였습니다.

두 번째 아빠는 그보다 좀 더 자랐으면서 혼자 지내는 마법사였습니다.

세 번째 아빠는 아이가 아는 만큼 커진 마법사였습니다.

네 번째 아빠는 동료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오는 마법사였습니다.

여러 아빠들을 보며 아이는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 때 아빠와 함께 숲으로 들어온 동료가 아이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아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아이가 되돌아오자 길을 안내해준 마법사가 다시 나타나 물었습니다.

네 아빠는 어디 있니?’

아이는 마법사의 모자를 벗기며 외쳤습니다.

당신이 제 아빠예요!’

대답과 함께 숲을 덮고 있는 저주와 안개가 전부 걷어졌습니다.

저주로 인해 잠든 이들이 깨어나고 저주에 걸려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풀려났습니다.

때마침 아이를 찾아온 친구들이 숲으로 들어왔고 아이는 아빠의 손을 잡으며 친구들을 반겼습니다.

아빠와 친구들, 저주로 인해 숲에 묶여있던 이들 모두 아이와 함께 숲을 나왔습니다.

아이가 숲으로 들어오기 전엔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밖은 봄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습니다.

 

 

-어느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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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있니?”
다시 아까처럼 시야가 어두워지고 마치 공부하는데 모르는 문제 있느냐는 듯이 여상하게 들려오는 말에 퍼블리는 입을 떡 벌렸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넘어서 지금까지 엄청난 일들을 봐왔는데요?!”
나도 처음엔 놀랐지만 몇 십, 몇 백, 몇 천 번을 돌려보다 보니 이젠 감흥도 없단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니, ,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며 외치다가 입을 꾹 다물고 나오는 말들을 막아 굴렸다. 밸러니는 기다려줄 생각인지 다시 물어본 이후론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퍼블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보고 감아도 떠도 다르지 않은 눈앞을 보며 천천히 말을 꺼낸다.

사실...지금 엄청 혼란스러워서 뭐부터 물어봐야할지 모르겠지만...마지막에 잘못 본 거 아니죠? ...물웅덩이요.”

제대로 봤단다.”
...뒤를 마저 보여주시지 않은 이유는요?”
그 순간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정신이 없어서 그랬었지 제대로 내 상태를 알게 된 그 다음부터는 내 기억이 아니라고 판정되더구나.”

판정이라는 말에 미묘한 얼굴로 허공을 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고개를 숙인 퍼블리는 이번엔 직설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아빠인가요?”

아니.”
아빠 몸을 차지한 건가요?”
지금은.”

퍼블리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저를 기억하고 아니카도, 선생님도, 마녀 왕국도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어...그리고...”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아빠가 아닌, 숨기기 바쁘면서도 먼저 말도 걸었던 적이 있고 함께 축제를 즐기고 저랑 계속 같이 살았던 제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었단다.”

맞아요! 그러니까 일일이 묻기엔 어떻게 물어봐야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당신은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밸러니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밸러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밸러니의 입매가 실소를 내뱉듯이 그리고 있는 느낌이 들자 퍼블리는 잠깐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나는 대답만 하는 밸러니가 아니지. 그런데 왜 네 아버지 되는 이 마법사는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기억들과 같은 양만큼 모였어도 왜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반응할까 궁금하단다. 몸이 있는 것과 없는 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나? 아니면 기억이 양이 몸에 남아있는 쪽에 더 많아서?”

웃음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 둘을 전부 포함해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도 녹아들어가 있는지 모를 말을 하며 밸러니는 천천히 이야기들을 꺼낸다.

 

최후의 발악으로 아마 몸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실패하고 빼앗으려고 했던 몸 대신 기억들을 뜯어내어 그 뜯어낸 자리만큼 제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게 쓰러진 용사와 뒤에 있는 컨티뉴가 아닌 바로 앞에 있었던 패치였다는 이야기.

뜯어지고 내팽개쳐진 기억들이 이 숲으로 흩어졌다는 이야기.

주인과 이어져있던 숲은 주인을 잃고 숲에 있던 모든 것들과 함께 그대로 환영처럼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

기억들이 자리 잡을 때 마력도 덩달아 흘러들어와 밸러니였던 기억들이 의식이자 마력이 되어 마력을 전부 잃은 패치가 살아있게 됐단 이야기.

그걸 깨닫고 마력이자 자신을 움직여 패치의 몸을 장악하려고 했다던 이야기.

그러자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 오히려 자신의 마력을 이용하여 약새풀을 만들고 뜯어 먹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패치의 이야기.

잠시만요?! 약새풀을 직접 뜯어 먹었다고요?!”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네 아버지는 어디다 던져놔도 정말 잘 살 거라고. 병에 걸려도 그 병을 죽일 자고 목에 바로 칼이 들어와도 그 칼에 목 한 번 베여주고 칼을 들이민 자를 없앤 후에 태연하게 목을 치료할 마법사라는 걸 내 모든 기억을 걸고 장담한다고 했잖니? 게다가 정말 위험했어, 그냥 내 몸이었다면 그다지 위험할 게 없었지만 네 아버지는 내 몸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약새풀에 바로 영향을 받았거든.”

약새풀을 먹으면 체내의 마력이 빠르게 얼어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선생의 말과 뒷마당의 그 많은 약새풀들이 퍼블리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밸러니는 퍼블리의 머릿속이 어지럽든 말든 계속 이야기들을 꺼낸다.

 

비록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었으니 완전히 얼지 않고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

온전치 않은 기억에 혼란스러워 하던 패치의 이야기.

벌판을 돌아다니며 숲을 찾아내려고 했던 패치의 이야기.

결국 몇 십 년이 지난 후에야 포기하고 어느 호수 근처에 오두막과 약새풀 밭을 만든 패치 이야기.

그 뒤로 꾸준한 몸 장악과 꾸준한 약새풀 섭취 이야기.

어쩌다가 패치를 찾게 된 GM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 날 호수로 갔더니 파란 장미가 호수 바로 옆에 피어있더구나.”

분명 뜯어져서 없는 기억인데 퍼블리 셔룰 기억한 패치.

용사가 말한 새 친구이자 태어나서 패치의 아이가 된 마녀 퍼블리.

패치의 눈으로 그 모든 일을 본 마법사.

너는 참 사랑스러웠단다.”
몸 주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은 삼켰다. 마법사는 직접 말을 건네지 못했지만 마법사는 퍼블리를 안아들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항상 지켜봐왔다.

내가 함께 하고 싶었지만 네가 찾고 바라는 건 확고했지. 그게 참 아쉬우면서도 올곧아서 기뻤단다.”
이렇게 빙빙 돌고 도는 끝에,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어려워하고 다가서지 못한 끝에도 퍼블리는 올곧게 손을 뻗고 발을 움직여 찾아 나섰다. 애초에 선택이라는 건 없었다.

모글리제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도 많았지만 한 가지 모글리제가 틀린 걸 알았지. 나는 비참하지 않았단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퍼블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보이는 건 짙은 녹색 풀이었고 천천히 일어나보니 높고 큰 나무들이 보였다.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고 어떻게 되실 건가요?”
이제 못 잔 잠을 다 잘 거란다.”

언제까지요?”
영원히.”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던 퍼블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고요함만이 남아있기를 심장박동이 다섯 번, 퍼블리는 행여나 무언가 밟을까 싶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기를 스무 걸음. 조심스레 손을 뻗어 챙이 넓은 모자를 들어올린다.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그 날, 집에서 건네지 못했던 인사를 건네고

늦어서 미안하다.”

함께 살아온 지난 날, 다가가지 못한 모든 것에 미안한 사과가 돌아왔다.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아요.”

손을 뻗자 팔찌에 달린 돌조각 장식의 얼음꽃무늬가 예쁘게 흔들렸다. 그 손을 맞잡은 손은 여전히 냉기가 감돌았지만 힘이 있었다. 당기는 힘에 천천히 일어나며 눈을 뜬 패치는 햇빛 아래 하늘처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여름처럼 울창한 숲을 가장 먼저 보았다. 패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설마 지금 여름인가?”
...제가 이 숲 들어올 땐 겨울이었어요!”
“...지금 날씨는 전혀 겨울이 아닌 것 같다만.”
, 그래도 그렇게 덥지 않은 걸 보면 봄 같아요!”

패치는 더 붙이지 않고 딱 하나만 물었다.

학교는?”
여름도 아닌데 잔뜩 땀을 흘리기 시작한 퍼블리는 하하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패치는 놔주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던 순간

저기 있네!!!”
~블리~!!”
하늘에서 요란스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둘은 비어있는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 때문에 그림자처럼 까맣게 보이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햇빛을 가려줬고 동시에 그림자가 내려왔다.

아이고~! 날개 깃털 죄다 빠지도록 날아왔는데 여길 안방처럼 편히 앉아들 있는 양반들 봐!!”

우리 근육이~ 참 대단하네, 이 위험한 숲 올 생각을 다 하고~?”

그래도 뭐 찾긴 찾았구나? 하며 어쩐지 섬뜩하면서도 안도가 가득한 눈빛과 웃음에 퍼블리는 마주 웃었다.

그러는 너희들도 여기 들어왔으면서.”
웜머?!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이 위험 가득한 숲에 특급편지보다 더 빨리 날아와서 여기저기 찾느라 튀어나온 내 눈알들이 안 보고 얄미운 말이나 꺼내고 있네!?”

이야아악 화를 내며 혼자 날아가버리려는 산들바람처럼 잽싸게 일어나 전서구를 말리는 퍼블리와 아무 말 없이 뜻 모를 눈으로 패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니카, 아직 잡고 있는 손에 덩달아 일어나서 이 셋을 모두 지켜보다가 잠시 눈을 감는 패치. 이들이 숲을 빠져나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하나는 얼음

 

하나는 냉기

 

둘이 되는 봄으로

 

손을 맞잡아

 

여름을 부르는 숲 위에

 

모든 걸 지켜보는 햇빛 아래에

 

숲을 밟는 둘의 발은

 

어느새 산들바람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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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쓰러져있던 용사였는데 언제 일어나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못 봤다. 여전히 눈이 아플 만큼 불길이 모든 시야를 다 빼앗고 있었지만 간간히 흔들리는 파란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잉~ 불이 안 꺼져!”
무슨...!!.....!!”
멀리서 패치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보다 가까이 있는 용사의 말이 더 또렷하고 빨리 다가오는 건 당연했다. 그보다 더 빨리 다가온 건 난데없는 물벼락이었다. 용사가 물로 불을 끄려고 한 것 같았지만 당연하게도 단순히 물 뿌린다고 해서 꺼질 불이 아니었다.

마니 뜨거워?”
“...뭐하는 거니?”
불 꺼!”

용사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이 약간 옅어졌다.
?”

뜨겁자낭!”
그걸 물은 게 아니야.”
아까보단 조금 가까이에서 패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직 용사처럼 가깝지 않으니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용사를 말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웅?”
왜 날 구하려고 하는 건지 묻는 거란다.”
용사가 이 상황에 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격했던 밸러니의 감정이 잔잔했다. 아까의 물벼락이 끈 건 불이 아니라 밸러니의 감정이었던 것처럼.

 

그야 칭구니까 구하징!”
친구?”
!”
용사에게 담담하게 묻고 있는 동안 저 멀리서 컨티뉴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밸러니를 찌를 때까지만 해도 지친 기색은 가득해도 평정을 유지하듯 담담했던 목소리가 지금은 꽤나 다급했다.

?”

순간 불길이 옅어지고 해맑게 웃는 용사의 얼굴이 반짝이듯 선명하게 스쳐지나갔다.
꿈에서 봤으니까!”
동시에 퍼블리는 몰려오는 감정에 잠시 숨을 멈췄다. 마치 바다에 빠진 그 때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그래, 꿈에서 봤구나.”
그렇게 말한 밸러니는 용사에게 손을 뻗었고 고개를 기울이던 용사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금 밸러니는 아마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너랑 같은 능력을 가진 친구가 있었어.”
밸러니를 휘감고 있던 불길은 아까보다 훨씬 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타서 사라지는 빛이 아까보다 더 늘어 눈이 부실만큼 반짝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일 법한데 이상하게 용사는 불길보다 또렷이 보였다. 쓰러진 용사는 피를 흘리며 위태롭게 숨을 쉬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복부에 무언가 길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조준을 잘못했네, 많이 아프겠구나. 일단 마저 말하자면 그 애는 꿈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자세히 들을 생각은 없었어. 그러니 너에게도 말해주마.”
다시 한 번 용사에게 손을 뻗은 밸러니가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하게 말을 꺼낸다.

꿈은 꿈일 뿐이야.”
피가 튀고 눈앞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잡은 시야에서 보이는 용사는 처음 새겨진 상처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눈을 가리는 건 분명 새빨간 피였다. 아니 피 말고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계속 말했잖나!”

서 있는 것도 꽤나 힘겨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패치가 누구를 향해 외친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패치의 손엔 늘 용사가 들고 다니던 나무 막대가 있었는데 끝부분에 피가 묻어있었다. 밸러니는 천천히 손을 들에 제 이마를 만져봤다. 눈을 가린 새빨간 피가 손에 묻어 있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도 같이 뒤를 따르겠군.”
뒤에서 들려오는 컨티뉴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크게 뒤틀렸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완전히 쓰러질 뻔했지만 후들거리며 땅을 짚는 손과 팔에 억지로 힘을 주며 버티고 있었다.

안 돼....”
안된다니, 많은 이들이 당신 때문에 잠들었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됐어. 그들로는 부족했나? 나또한 그들처럼, 당신 앞의 두 마법사처럼, 그리고 당신처럼 영원히 눈을 감게 됐지.”

그 말 아래에 담긴 감정들이 무엇일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얼마나 깊고 얼마나 무거울지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닿지 않고 말만 닿았다.

영원히 눈을 감는다고?”
그 어느 때보다 밸러니의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숨을 죽이며 모든 걸 보고 느끼고 있던 퍼블리는 불길한 예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지금까지 충격적인 장면을 꾸준히 봐왔고 놀라면서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달랐다.

아니, 그럴 순 없어...”

감정에 맞지 않게 애절하게 나오는 목소리는 퍼블리의 불안감을 더더욱 키웠고 싸한 느낌이 목소리가 나온 목을 틀어쥐듯 자극하며 긴장을 더 높였다. 땅을 짚고 있던 손이 긁듯이 오므리며 흙과 풀을 쥐다가 천천히 펴지며 쥐고 있던 걸 전부 놓았다.

난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말한 밸러니는 바로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너무 당황하고 놀란 퍼블리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빛나는 종이 같으면서도 빛이 종이 모양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가장자리를 보니 거칠게 찢긴 흔적이 보였다. 이런 빛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니 꽤 많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마치 하나의 큰 종이를 찢어서 여기저기 뿌려놓은 듯 했다. 그렇게 빛들이 서로 멀리 떨어졌을 때 쯤, 다시 시야는 어두워졌고 그 상태가 꽤 오래 이어졌다.

젠장, 뭐가 어떻게...!”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가물가물하다가 점점 선명하게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고 난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분명 마력을 전부 희생했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패치였다. 퍼블리는 안도했고 밸러니는 당황했다. 그리고 퍼블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했는데 패치의 목소리만 들려오고 움직이는 시야에 패치가 없었다. 보이는 건 휑한 벌판뿐이었다.

용사는 어디 있고 여긴 대체 어디지? 그리고...”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패치도 마찬가지였는지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기억나는 상황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비가 왔는지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눈에 들어왔지만 시야의 주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퍼블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버렸지만 똑똑히 봤다.

물웅덩이에서 비친 건 패치뿐이었고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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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깊숙하고 까다로운 녀석들이 많은 데로 던져놨는데.”
그래서 이렇게...후우....오래 걸렸지요.”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은 아래에 있는 모든 걸 짓누르듯이 저주를 뿌리고 있었다. 마법진을 힐끗 올려다본 밸러니는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피를 그대로 말과 함께 내뱉었다.

나를 죽여도 소용없단다.”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이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최악이 남아있었다며 그 생각을 비웃듯이 시야 한 구석에서 커지고 있는 마법진에 퍼블리는 기겁을 했다. 컨티뉴도 마법진이 커지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난감함이 가득담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버티고 서 있던 패치는 결국 손으로 땅을 짚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용사는 어느새 쓰러져있었다.

저주를 뿌려서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설득할 생각이라면 포기해. 거둘 생각 없으니.”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일 뿐, 설득은 이미 당신의 친구부터 실패했으니 이렇게 만나자마자 바로 찔렀지요.”
그 말에 밸러니의 시선이 컨티뉴의 손으로 돌아갔다. 손잡이와 손 사이에 구겨진 종이가 눈에 들어오자 시야가 자연스레 가늘어졌다.

도둑들은 참 뻔뻔하구나.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다시 이 숲에 들어오는 걸 보고 헛웃음이 튀어나왔어. 여기 들어온 녀석들에게 제일 먼저 너희들이 저주라고 부르는 빛을 쏟아부어줬지. 그리고 녀석들을 통해서 저 밖의 도둑들에게도 친히 전해줬고. 그런데 여기 또 도둑이 생기다니 기분이 참 별로네.”

집주인이 안에 없고 밖에서 날뛰고 있어서 달리 선택사항이 없었던 걸 이해해주시길.”

그 말에 코웃음 친 밸러니는 피를 한 차례 더 뱉고는 쓰러져 있는 용사와 주저앉았지만 아직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패치를 돌아보다가 다시 컨티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는 건 없어, 달라지는 것도 없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곳으로 가서 내 소중한 장미와 수첩을 다시 가져와 언제나 그랬듯이 이 숲에서 계속 기다리고만 있겠지.”

이제는 가장자리의 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진 마법진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고 바람에 속삭이듯이 중얼거린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지.”
겨우 그런 말로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꿰뚫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 온 몸을 뒤흔들었다. 이건 직접적으로 받은 충격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유리처럼 깨져 산산이 흩어지고 있는 마법진이었다. 밀려오는 아픔과 당황스러운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내리니 분명 방금 전까지 주저앉아있던 패치가 하늘에 손을 뻗은 채 서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대로 저주에 눌려 죽거나, 모든 마력을 잃어서 죽거나 결과가 매한가지라면 적어도 엿은 주고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나.”
패치가 남아있는 마력을 죄다 위로 쏘아 올려 마법진을 부순 모양이었다. 아직 작동이 멈추지 않은 마법진이 부서질 때 그 충격은 고스란히 마법진을 발동시킨 자에게 돌아오고 거기에 더 해 마법진이 크면 클수록 받는 충격은 그만큼 더 커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바로 몸에 있는 모든 마력이 죄다 나가는 거였다. 거기다가 더 심각한 건 마력이 없는 자는 5분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내에 손쓸 틈도 없이 죽어버린다는 거였다. 상태를 보여주듯 창백한 안색이 시체와 다름없었지만 아까처럼 주저앉지 않지는 않았다. 흉흉하게 불타고 있는 푸른 눈을 보면 곧 죽을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숨죽인 채 보고 있던 퍼블리는 죽지 않고 저를 키우기까지 한 제 아빠를 떠올리며 지금 상황에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죽음을 피했는지는 퍼블리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패치는 살았으니까.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군.”
그렇게 말한 컨티뉴는 손잡이를 잡는 힘을 더 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의 고집을 끝낼 시간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잡이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밸러니를 감싸기 시작했다. 보통의 빨간 불과는 다른 진한 녹색 불은 언뜻 보면 마치 풀이 자라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기에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워보였다. 그리고 그 불은 단순히 보통 불처럼 밸러니를 태우는 게 아니었다.

무슨 짓이야?”
불길이 닿자마자 하얀 빛들이 일어나 불길과 함께 타서 사라지고 있었다.

왜 이걸 태워?”
그 빛이 무엇인지는 여기 있는 모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저주가 아니야, 우리들이...나와 로메루, 밸러니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자 희망이야.”
속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았어도 태도와 어투로 계속 유지했던 평온함이 깨지고 있었다.

너희들이 안 맞을 뿐인데 왜 저주라고 하는 거야?”
점점 격앙되는 어조를 따라 불길이 더 강해지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아까보다 더 높게 타오르는 녹색 불은 밸러니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걸, 그 장미를, 우리의 결과물을, 내 친구들의 흔적들을 훔쳐간 건 네놈들인데 왜!!”
비명 같은 한마디와 함께 빛이 터져 나왔고 온 세상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폭주에 가까이 있던 컨티뉴가 미처 방어막도 준비하지 못한 채 불길에 휩쓸려 저 멀리 밀려났다. 하지만 그 뒤로 뒤늦게라도 막아냈는지 아니면 그래도 계속 밀려나 쓰러졌는지 볼 수 없었다. 온통 하얀 빛과 녹색 불길만이 눈에 들어왔고 밸러니는 목을 긁어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 같은 외침을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게 정신없고 눈과 귀가 아플 정도로 날뛰고 있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돌아가면서 파란 게 눈에 들어왔다.

많이 아팡?”
천진난만함이 가득 담긴 익숙한 목소리에 퍼블리는 깜짝 놀랐고 밸러니도 당황스러웠는지 눈을 깜빡였다.

아프면 내가 호~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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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친구가 찾아왔구나. 어차피 네 소개를 받았으니 나도 내 소개를 할 참이었단다. 두 번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뒤는 아까와 똑같았다. 다른 점을 굳이 꼽자면 시점이 밸러니의 시점이라 구경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하고 아슬아슬했던 전투를 당사자가 되어 직접 체험하게 된 게 아까와 다른 점이었다. 그 와중에 이렇게 목숨이 위험한데도 전혀 위협을 못 느끼는 건지 여전히 해맑은 용사의 웃음이 눈에 들어왔다. 아예 공격을 맞지 않았으면 모를까 패치도 몸은 하나였으니 용사의 방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용사도 마냥 맞고 있지 않고 오히려 패치보다 더 빠른 반응속도로 피하고 방어했지만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공격들은 맞았다. 그런데도 표정이 여전히 해맑았다.

세 번!”
패치의 외침에 따라 용사가 세 가지 마법을 날려댔다. 꽤 위력적인 불기둥 공격마법이 가장 먼저 날아왔다. 그 뒤를 이어 어째서 날리는지 모를 빛가루 마법과 축제용으로 쓰는 잘게 자른 색종이들이 흩뿌려지는 마법이 앞서 날아온 불기둥보다 더 존재감을 내뿜으며 밸러니의 시야를 가렸다.

그 뒤로 패치가 한 번, 두 번 외칠 때마다 용사는 한 가지 마법, 두 가지 마법을 날려댔는데 횟수는 외침에 따라도 날리는 마법은 무작위로 용사가 날리고 싶은 걸 날리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아예 공격마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끄기에는 거슬리는 마법도 있었고 언제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데다가 용사는 패치의 외침이 없을 때에도 마법을 날려댔다.

“...!...저쪽...!!”

...음이 왜...!?”
저 멀리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패치가 떠난 이후로 남은 선발대 일행들이 마냥 한 자리에서 머무를 수만은 없었는지 패치와 얼음이 반짝이는 빛을 따라온 것 같았다. 보통 이렇게 되면 불리할 법 한데 밸러니는 겉은 물론이고 속으로도 전혀 동요가 없었다. 패치도 목소리들을 들었는지 용사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고 밸러니도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춰 그대로 대치상태가 됐다.

저쪽에 누가 있다!”
아까 갔던 마법사잖아?”
일행 쪽에서 패치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다가오다가 밸러니와 그 주변에 있는 그림자 괴물들을 보고 멈췄다. 천천히 공격마법과 방어마법들을 펼치는 걸 보면 누가 적인지 제대로 알아본 것 같았다. 메르시와 흑기사단이 앞으로 나와 방어 마법을 더 강화하는 동안 아난타가 패치와 용사에게 다가왔다.

저 분은?”
이 숲 주인.”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이제까지 우릴 대했던 숲이 대답하고 있지.”
아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그 주위에서 밸러니의 정체를 들은 다른 이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물론 각종 위험을 감수하고 왔을 테지만 저주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숲의 주인인 밸러니를 직접 볼 줄은 그들도 몰랐을 거다.

많아진 적들에 숨겨진 마법진들이 빛나고 각종 소환 생물들이 튀어나와 밸러니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물량에 기겁할 법도 한데 쓰러뜨려할 게 누구인지 명확히 알게 된 다수의 마녀와 마법사들은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누군가가 던진 불덩이 마법을 시작으로 소환 생물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그대로 대치상황이 끝났다.

검은 날개, 오른쪽!”

위로 온다!”
사기가 올라갔다고 해도 지친 몸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리는 없었다. 마법을 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이들이 있었고 소환 생물들은 놓치지 않고 달려들다가 바로 옆에서 공격을 맞고 뒤로 물러났다. 공격이 아닌 방어전이 되어버렸지만 모두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마법을 날려댔다. 그러다가 이 방어전이 꽤 길어졌다고 느껴질 때 쯤, 갑자기 앞장서서 방어막을 펼치고 있던 이들이 옆으로 흩어졌고 그 뒤에 있었던 한 무리의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언제 그렸는지 모를 복잡한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자 엄청난 크기의 불기둥과 번개가 마법진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방어막에 몸을 부딪혀가며 달려들던 소환 생물들은 갑자기 방어막이 사라지자 그대로 그 공격들에 뛰어드는 꼴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이들이 공격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소환 생물들에게 공을 던졌고 맞추자마자 터지며 공 안에 들어있던 가루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가루가 불기둥이 있는 데까지 닿자 곧이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물러났던 이들은 다시 방어막을 펼치며 제 몸과 뒤에 있는 이들을 지켰다.

이 숲으로 오기 전 왕국에서 했던 훈련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 남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승산 있다!”
이 공격으로 반 이상의 소환 생물들이 사라졌다. 기세를 몰아 아까보다 더 거센 공격과 준비된 마법들이 소환 생물들을 덮쳤고 소환 마법진까지 지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환 생물들이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고 모든 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해냈..!!”
누군가가 흥분에 차 소리쳤지만 끝을 다 맺지도 못하고 갑자기 쓰러져버렸다. 바로 옆에 있던 일행이 당황스러워하며 일으켜주기도 전에 평온한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모두 뭉쳐 있어서 수고를 덜었네.”
시간을 벌어 커다란 마법을 준비한 건 선발대뿐만이 아니었다. 소환 생물들이 방패 역할을 하는 동안 밸러니도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울 만큼 복잡한 마법진이 눈 깜빡할 새에 모든 이들의 머리 위를 다 덮을 정도로 커지면서 익숙한 하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쓰러지는 이들이 늘어났고 거기에 더 해, 갑자기 얼굴에 주름이 생기며 급격하게 늙어가는 이들도 나타났고 눈물 대신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재빨리 저주막이를 펼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빛이 더 강력했는지 저주막이를 펼쳤는데도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다. 저 멀리서 흑기사가 쓰러지는 메르시를 감싼 채 빛을 직격으로 맞고 있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더 끔찍했다. 빛이 닿은 부분이 전부 썩어가며 퍼블리가 바다에 빠지고 그들을 처음 만났던 날, 그 때의 모습이 되고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밸러니는 아무런 감흥 없이 모든 걸 눈에 담고 있었고 밸러니의 눈을 통해 이 광경을 보게 된 퍼블리는 충격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이들 중에 패치와 용사가 있었지만 둘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얼마 안 가 피를 토하는 패치의 모습에 퍼블리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기억인 것도 잊고 그만두라고 외치려고 했다.

내가 너무 늦었나...?”

굉장히 지쳐있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밸러니는 제 가슴을 꿰뚫은 날카로운 날붙이를 내려다보고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봤다. 뒤에 있는 마법사는 얼굴을 꽁꽁 싸매다시피 했지만 오히려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퍼블리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컨티뉴.”

퍼블리는 가슴 안쪽이 아릿한 게 제 자신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밸러니가 공격 받았기 때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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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제 말 들리나요?”

아까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던 걸 기억한 퍼블리가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감정을 완전히 느끼는 게 아니어도 지금 밸러니가 진심이라는 건 퍼블리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기억이라 이미 일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그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퍼블리 입장에서 궁금한 건 있었다.

왜 직접 나오지 않았던 거예요?”
숲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기엔 모글리제라고 추정되는 회색머리 마녀의 편지 내용이 걸렸다. 떠날 시간이라고 하는 걸 보면 밸러니는 충분히 숲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퍼블리의 질문을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계속 대답이 없었다.

그 와중에 기억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빛을 뿌리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게, 그리고 단숨에 약새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약새풀이 자라는 지역이 넓어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한발만 내딛으면 바로 숲 밖인 곳에서 그렇게 빛을 뿌리는데 약새풀들이 바깥까지 안자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숲 곳곳을 돌아다니며 빛을 뿌리기 시작했고 손을 한 번 휘젓자 퍼블리가 처음 보는 마법진들이 곳곳에 나타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선 밸러니는 다시 어디론가 발을 움직였는데 약새풀이 어느 곳보다 가득 자라있는 곳에 도착하더니 멈추고는 직접 약새풀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뜯어서 한구석에 던져진 약새풀들은 뭉친 만큼 냉기를 내뿜었는데 뒷마당에서 느낀 것보다 더 한 냉기에 퍼블리는 당연히 깜짝 놀랐다.

손님맞이는 다 끝났네.”
밸러니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약새풀들이 잔뜩 있을 땐 몰랐는데 뽑아낸 약새풀들에 가려진 파낸 흙구덩이를 보고 여기가 숲의 어디인지 퍼블리도 알게 됐다. 하얀 장미가 있었던 곳이다.

밸러니는 아까처럼 손을 한 번 휘저으며 마법진을 나타나게 하고 하얀 장미가 있었을 흙구덩이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언제 생겼는지 모를 커다란 얼음덩어리들과 그림자 괴물과 불나비와 기타 소환 생물들이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 물량을 본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 마법진에도 저렇게 많이 나왔는데 곳곳에 새겨놨을 마법진들을 다 합하면 얼마나 많겠는가. 패치가 험한 말을 했던 건 당연했다.

우리의 마법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마법을 만들어낸 자가 있나?”
이 숲은 밸러니의 숲이라고 불리고 있었고 실제로도 밸러니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숲에 들어온 침입자들이 어디 있고 얼마나 있는지 느낄 수 있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선발대들에게 감탄하던 밸러니는 다시 한 번 빛을 뿌리고 잠시 기다리더니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설마 용사가 발견했던 빛이...”

이렇게 뒤에 숨겨져 있을 진실들을 알게 된 퍼블리는 어쩐지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엄청나고 충격적인 비밀들을 알게 됐다 싶으면 뒤에 더 한 비밀들이 퍼블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이 기억의 끝은 단순히 제 아빠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비록 심각한 저주들을 받았지만 밸러니를 무찌르고 숲을 정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같은 결말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 한 엄청난 비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이런 퍼블리의 불안한 속내와는 달리 기억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안개가 낀 사이 소환 생물들이 안개를 방패삼아 아직 움직이고 있는 선발대들을 기습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패치의 활약으로 안개가 걷혔지만 예상하던 바였는지 아니면 결국엔 다 죽을 거라고 확신을 하는 건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밸러니도 예상치 못한 마법사가 있었으니.

우와아아앙~!!”
여기까지 오는데 소환 생물을 한 번도 안 마주친 건지 멀쩡한 행색의 용사가 햇빛에 반짝이는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밸러니는 당황과 더불어 심각한 상황일텐데도 해맑은 용사의 얼굴에 황당함까지 더해 느끼며 저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
용사는 밸러니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나무 그늘 때문에 잘 안 보였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
마치 아는 마법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는 용사의 모습에 밸러니는 이번엔 아예 말을 잃었다. 밸러니가 어떤 심정인지 알 리가 없는 용사는 얼음이 엄청 크고 하얀 풀들이 많아서 신기하다는 감상을 꺼내고 있었다. 그에 밸러니는 탐색하려는 것도 그만두고 물어봤다.

넌 대체 왜 여기에 온 거니?”
새 친구 기다리러!”
용사는 거침없이 대답했고 밸러니는 용사가 다른 이들처럼 저주라고 불리는 걸 조사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대답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용사는 밸러니의 얼굴을 제대로 봤는지 무언가 아는 기색으로 소리쳤다.

내 칭구의 새 친구구나!”

네 친구의 새 친구?”
! ~ 잤을 때 봤어! 우리 이렇게 만났고 안녕! 했어!!”
용사의 말에 밸러니의 감정이 묘하게 변했다. 용사를 만났어도 당황과 황당을 잠깐 느낀 거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는데 마치 물에 가라앉은 것처럼 답답하고 귀가 먹먹한 느낌이었다.

나두 친해지고 싶어서 빤짝빤짝 따라왔어!”
용사는 뒤를 볼 수 없으니 모르지만 용사를 마주보고 있던 밸러니는 용사 뒤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용사와는 달리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상황도 익숙한 상황이지만 빨간 머리카락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패치였다.

넌 정말 순수하면서도 어리구나.”

다가오는 패치를 힐끗 본 밸러니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그게 여기 있어야할 이유는 될 수 없지. 친구가 되는 건 더더욱 그렇고.”

퍼블리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지금 밸러니의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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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요! 그럼 하얀 장미도 만들어진 거예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기억만 계속 이어졌다. 퍼블리가 다시 한 번 물어봤지만 기억만 보고 있으라는 건지 또 대답은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기억은 두 마녀가 사라진 이후 계속 무기력하게 오두막에서 지내고 간혹 밖으로 나갈 땐 하얀 장미를 보러가거나 숲을 돌아다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퍼블리는 오두막에서 지내는 기억을 보고 있을 때 왜 동화에서든 역사에서든 밸러니를 마녀로 썼는지 알아차렸다. 꼭 마녀가 사는 집 같았다. 마녀들이 자주 쓰는 주문위주 마법책들이 온 집 안에 가득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건 별로 없었고 여느 가정집의 살림살이들만 가득했다.

혼자가 된 이후로 딱히 변화 없는 일상 기억들 다음으로 나온 기억부터 퍼블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뭐야, 어디 갔지?”
여느 때처럼 숲을 돌아다니고 왔는데 분명 늘 탁자 위에다 뒀던 수첩이 사라져있었다. 당황하며 탁자를 더듬던 밸러니는 갑자기 찾는 걸 멈추고 다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방구석에 놓인 서랍장의 두 번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매일 청소를 한 덕에 서랍은 먼지 하나 없었지만 그동안 열어보지 않았는지 잘 열리지 않고 삐걱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결국 좀 더 힘을 줘 세게 잡아당기니 열리긴 했지만 안에 있던 물건들이 전부 쏟아졌다. 가위나 붙이기용 종이 같은 서랍에 넣어놓을 만한 잡다한 물건들 사이에 하얀 봉투가 하나 있었고 찾고 있는 게 그 봉투였는지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봉투에는 내 수첩이 사라졌을 때라고 적혀있었다. 밸러니는 봉투를 뜯어 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내가 남긴 수첩이 사라졌구나.

넌 늘 탁자 위에 올려두고 읽었을 테니 모를 리가 없겠지.

지금 네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 난 또 꿈을 통해 미래를 봤어. 내가 너한테 수첩을 준 걸 보면 로메루는 결국 떠났고 나도 어디론가 갔겠지.

얼마나 미래일진 모르겠지만 수첩이 엄청 낡아있던 걸 보면 굉장히 먼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희들은 고집 세니 어떻게든 살아있을 거고 나는 아마 흙으로 돌아갔을 거야.

두 가지 미래를 봤어.

첫 번째는 내가 수첩에다 시로 써놓긴 했지만 그것만 보면 알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자세히 말하기엔 제한이 걸려, 꿈이 허락하지 않아.

일단 경고하는데 첫 번째 미래로 가게 된다면 넌 어떻게든 비참해지고 죽어갈 거야. 너보다 고집 센 걸 넘어서 질릴 정도로 무서운 마법사를 봐버렸거든.

사실 두 번째 미래는 내 희망사항이라 꾸게 된 바람 같은 거라 두 번째 미래가 됐으면 좋겠어. 네가 지금 숲을 떠나서 로메루를 만나는 거야.

시작은 똑같아.

내 수첩이 사라지고 우리가 만들어낸 게 사라졌어.

정신이 없겠지. 하지만 난 내 친구가 미쳐가는 게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부탁할게.

이제 떠날 시간이야.

 

그 뒤로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언가 뽑힌 흔적만 남은 흙더미 앞이었기 때문에 퍼블리도, 밸러니도 알 수 없었다. 미친 듯이 흙을 파내는 손길이 있었고 거기에 있어야 할 하얀 장미는 없었다.

이성이 전부 날아갔는데도 감정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쓰는 건지 손이 빛나고 있었다. 그 마법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보는 게 처음인 퍼블리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얀 장미씨앗처럼 손이 하얗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걸 보면 그 하얀 장미를 만들어낸 마법이 분명했다. 그런데 손 주변에서 자라난 건 하얀 장미가 아니었다.

, , 이게 나와!!”
빛처럼 은은하게 빛나진 않지만 하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퍼블리는 저게 뭔지 아주 잘 알았고 지겹도록 보아온 거였다. 바로 약새풀이었다. 약새풀들을 보며 뭐라 외치는 밸러니의 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우선 가장 먼저 크게 느껴지는 건 몸 어딘가가 찢어지고 그 사이가 따끔하게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물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 쉴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고 그 다음엔 무언가가 제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비록 간접적으로 느끼고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끼는 퍼블리 마저도 기겁하며 순간적으로 숨을 멈출 만큼 강렬한 감정들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로 기억이 사라지면서 고통 가득한 감정들도 사라져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것처럼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퍼블리가 집중해서 빠르게 넘어가는 기억들 일부를 봤을 때 보이는 건 불안한 감정과는 다르게 예쁘게 빛나는 하얀 빛과 빛이 반짝이는 만큼 계속 자라나 순식간에 눈밭처럼 가득해진 약새풀들이었다.

당신이 이 숲의 주인입니까?”
그러다가 어느 기억에서 넘어가는 빠르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간단하지만 모험을 하는 이들처럼 단단하게 준비를 한 옷차림의 마녀와 마법사가 있었다. 퍼블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메르시와 닮은 둘의 얼굴에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는 지금의 마녀왕국의 왕 에키테입니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저주를 확인하고 제 반려와 함께 이곳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왕은 밸러니에게 격식을 가득 담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물론 밸러니는 상대가 얼마나 격식을 차리고 있는지,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 중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멍했다. 밸러니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둘은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밸러니가 입을 열었다.

도둑들이 내 보물들을 훔쳐갔지.”
목소리는 속처럼 텅 비어있었다.

내 보물들을 찾아와. 그럼 난 내 보물들과 너희들이 저주라고 부르는 내 마법과 함께 깨끗하게 사라질게. 그렇지 않으면 모든 땅 위에 저주를 걸 거란다.”
왕과 왕후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밸러니는 그 둘에게 손을 뻗어 마법을 걸었다. 둘의 이마에 하얀 장미 무늬가 새겨졌다가 사라졌다.

너희들이 임의로 보이게 할 수도 있고 너희들이 죽는다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있을 거야.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지우지 않는 이상 절대 지워지지 않아. 생각이 있는 도둑들이라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하지만 그들은 생각이 있고 없고를 떠나 밸러니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 뒤는 패치의 기억에서도 본 내용이라 어떻게 될지 퍼블리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밸러니는 저주라고 불린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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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보이는 건 마녀 둘이었다. 하나는 연한 녹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짙은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둘이 다가와 함께 무언가를 얘기하고 즐겁게 웃는가 싶더니 진지한 얼굴로 종이를 가리키며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거기에 밸러니도 손을 뻗으며 함께 했지만 무언가 잘 안 됐는지 녹색머리 마녀의 표정이 나빠졌다. 그리고 마법이 다 끝났을 땐 마녀들은 인사를 하며 떠났고 다음날 또 찾아왔다.

인상 깊었던 걸 떠올리는 건지 기억은 금방 흘러갔다. 꽃을 구경하고 풀을 캐고 자주 찾아오는 마녀들을 반기면서 무슨 마법을 쓰는 게 밸러니의 일상이었다. 간혹 마법을 쓰는 도중에 캐온 풀이나 씨앗, 열매를 던져 넣기도 했는데 풀이나 씨앗이 타버리거나 열매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면 공격마법을 발전시키거나 만들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너무 성과가 없는데?”
거기 실패 목록에 녹색양털풀도 추가해. 어젯밤에 한 번 해봤어.”
회색머리 마녀가 바로 수첩을 꺼내 적었다.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하자 밸러니가 한숨을 내쉬었고 동시에 퍼블리는 무언가 가슴 안쪽이 살짝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밸러니가 느꼈을 답답함이었겠지만 완전히 전해지지는 않는 듯 싶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풀은 물론이고 이름도 모를 괴상하게 생긴 열매도 실패 목록을 피해가진 못했다. 갈매기가 물어다 준 씨앗마저 타버리는 모습에 녹색머리 마녀는 머리를 헤집다가 깍지를 끼고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며 진지한 분위기를 내기 시작했다.

이건 웬만하면 안 쓰려고 했건만.”

너 또 귀한 거 발견해서 비싸게 팔아먹을려고 숨겨뒀냐?”
뭔진 모르겠지만 순순히 내놓아라.”
회색머리 마녀와 밸러니의 협박 섞인 재촉에 녹색머리 마녀는 뿌듯함 조금과 아까움 대부분인 얼굴로 씨앗 하나를 꺼냈다. 씨앗만 봐서는 무슨 씨앗인지 모르니 둘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장미씨앗이다.”
둘이 놀라워하고 당황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회색머리 마녀가 말을 더듬으며 진짜냐고 묻자 녹색머리 마녀가 확신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밸러니는 미심쩍은지 눈을 가늘게 뜨고 씨앗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장미씨앗이든 아니든 재료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밸러니도 쓰는 데에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회색머리 마녀는 긴장 가득한 얼굴로 녹색머리 마녀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씨앗을 바라봤다. 장미씨앗 위로 마법이 쏟아졌고 씨앗이 하얗게 변하면서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성공한 건가 싶어 벅차고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곧이어 타버리는 씨앗에 기대도 타버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실패 목록, 장미씨앗.”
그건 그냥 쓰지 말자. 혹시라도 나중에 누가 보게 된다면 우리 저 땅굴에 갇히는 걸로 안 끝나.”
그래도 이거 꽤 버텼으니까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아?”
장미씨앗 찾아다니자고?”
발견되는 건 아직 봉오리가 열리지 않은 장미거나 이미 시들어버린 장미가 대부분이라 장미씨앗을 찾는 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웠다. 그러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녹색머리 마녀의 의견은 기각되었다.

네가 찾아온 건 정말 대단하긴 한데 우리는 그렇게 찾아낼 자신은 없다. 대신 이거라도 더 조사해보자.”
밸러니가 씨앗이 타고 남은 재를 조심스럽게 집으며 말했다.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꽤 버텼으니 재라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 재는 쓸모 있는 걸 넘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일으켰다.

뭐야? 분석 마법이 안 통해!”
하도 마법을 쏟아 부어서 항마력이 높아졌나?”

아니 이건 항마력이 높아진 게 아닌 것 같은데?”
항마력은커녕 오히려 마력이 더 잘 들어가고 있는 현상에 셋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마력이 잘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마력이 그 앞에 방해물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즉 마법을 튕겨내는 게 아니라 마법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엄청난 현상에 셋은 흥분했지만 기록하지 않았고 다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싹도 트지 않았지만 마녀를 탄생시키는 장미씨앗을 실험재료로 쓴 걸 좋게 봐줄 이들이 없는 건 물론이고 이 현상의 파급력이 불러올 미래는 어쩌면 장미들의 소멸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을 나타나게 한 재료가 바로 장미씨앗이었으니.

그로부터 시간은 며칠 정도가 아니라 달단위로 휙휙 넘어가고 있었는데 모두 그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될 정도의 재를 붙들고 마법을 쓰기 바빴다.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마법이 그대로 통과해서 흘러나가니 만드는데 꽤 어려움이 있어보였다. 겨울이 두 번 지나가고 봄이 세 번째로 찾아왔을 때 쯤 밸러니는 완성해낸 무언가를 소중히 쥔 채 두 마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재를 중심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 셋이 함께 있었던 오두막에서 조금 걷다보니 볕을 꽤 잘 밭고 있는 땅이 나타났다. 거기서 멈춰선 밸러니는 조심스럽게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러자 손에서 하얗고 은은한 빛이 나고 있는 씨앗이 있었다. 밸러니는 그대로 무릎을 굽히고 앞에서 녹색머리 마녀가 미리 파낸 땅에 씨앗을 넣었다. 그 위로 흙을 덮으니 빛도 덮어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두 마녀는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흙을 덮은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밸러니도 같은 표정을 지었을 거다. 그러다 갑자기 기억이 바뀌었다.

마녀 둘은 어디로 갔는지 밸러니 혼자만 서 있었다. 기억이 바뀌기 전과 후의 장소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기억이 바뀌기 전 씨앗을 심은 자리에 무언가가 자라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흰색 봉오리가 눈에 띄었고 퍼블리는 그게 무엇인지 눈치 챘다.

하얀 장미?”
아직 피지 않은 하얀 장미 봉오리를 내려다보던 밸러니는 그대로 뒤돌아 걸었다. 그러자 익숙한 오두막이 보였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냥 오두막처럼 보였던 바뀌기 전의 기억과는 달리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빈집처럼 느껴졌다. 밸러니는 문을 열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퍼블리는 힘이 살짝 빠지는 걸 느끼고 지금 밸러니의 상태는 굉장히 무기력하단 걸 알아챘다. 바로 앞의 탁자에 익숙한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머리 마녀의 수첩이었다. 수첩을 눈에 담던 밸러니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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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패치가 용사의 어깨를 잡아 제 뒤로 보내면서 방어마법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괴물들이 나타나 달려들었고 투명한 방어막이 얼음처럼 깨지면서 주위에 파편을 날렸다.

반응과 판단력이 빠르구나.”
그 쪽이 갑작스럽고 급한 거지.”
패치가 그렇게 받아치며 침착하게 아직 완전히 깨지지 않은 방어막을 고치고 있었다. 그림자 괴물들이 방어막 파편에 맞아 물러나긴 했지만 상황이 유리해졌다고 할 순 없었다. 우연히 여기를 발견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이들과 함께 소환생물 무리들에게서 도망치느라 굉장히 지친 패치였다. 뒤에는 용사도 있고 저기 앞에 있는 적은 스스로 말하기를 숲의 주인이자 이야기 속에서만 들었던 마녀 밸러니라고 했다. 불리한 요소를 처음부터 달고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패치당!”
대체 어쩌다가
뭐라 말하려던 패치는 한숨을 쉬며 말을 멈췄다. 뭘 어떻게 물어도 용사는 자기가 발견한 반짝이를 찾아갔다고 대답할 게 뻔했다. 그리고 상대방은 둘이 대화를 나누게 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얼음파편인지 방어막파편인지 모를 투명한 파편들이 흩날리는 게 아름답지만 그 중심에서 전혀 아름답지 않은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나쁜 건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이...밸러니라고요?”
그렇다고 할 수 있단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건 무슨 말...아니 그게 아니라 밸러니는 분명 마녀라고...”
맨 처음 우리에 대해 책을 썼을 녀석들이 잘못 찍은 거란다. 다른 날조 내용들도 많잖니. 내가 마녀인지 마법사인지는 반반 확률인데 그마저도 틀렸구나.”

퍼블리는 지금 상황에서 돌아가면 역사책과 함께 태워야할 건 로메루와 밸러니 동화책이라고 스스로도 현실에서 어긋나고 실없는 생각이 들자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제 상태가 몸이든 정신이든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

제가 아난타 선생님 보려고 신성지대로 찾아갔을 때 그런 마법사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청 놀라고 아빠에 대해 섣불리 말한 거 아닐까 놀라고 불안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때보다 더 놀라야하는 게 정상인데, 아니 놀라긴 놀랐는데 지금 전 너무 담담...하진 않고 차분해요.”
그동안 충격을 많이 받아와서 무뎌진 걸지도 모른단다.”
아뇨. 이건 무뎌진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무뎌진 것도 아니었고 지친 것도 아니었다. 퍼블리는 뭐라 표현할만한 말을 찾지 못해 뒷말을 흐렸다. 그런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가 말했다.

네 아버지도 너도 정말 서툴구나. 그나마 넌 솔직한 편이라 더 낫긴 하지만 표현하는 데에 있어선 둘이 크게 다를 게 없어.”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아직 멈추지 않은 기억을 가리켰고 퍼블리는 고개를 돌렸다. 패치가 온갖 마법들을 날려대는 덕에 화려해질 수밖에 없는 전투를 보고 있던 용사가 눈을 빛내며 함께하겠다는 듯이 발광마법 써서 밸러니의 시야를 가려 의도치 않게 전투에 도움을 주고 있는 걸 끝으로 기억이 사라졌다.

네 아버지의 기억은 여기까지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부 다 본 건 아니지만 여기 있는 네 아버지의 기억은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단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예요?!”
깜짝 놀란 퍼블리가 사라진 기억이 나타나고 있던 데와 마법사를 번갈아보면서 안절부절 못한 채 지금 당장이라도 제 아빠를 찾으러 뛰어다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 기억을 보여줄 차례구나. 나도 온전치 않지만 그래도 네가 궁금해 하고 있던 것들은 전부 담겨있단다.”
마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숲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건 숲이 아니었다. 퍼블리는 제가 쓰러지는 건가 싶어 몸을 다시 세우려고 했지만 그 전에 흔들림이 멈췄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게 바뀌었다. 퍼블리가 이제까지 기억을 영상구에서 나오는 영상처럼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면 지금은 마치 기억을 직접 떠올리는 것처럼 제 삼자가 아닌 완전한 눈앞의 제 시점으로 보게 되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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