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고 패치는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기에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냉막한 기운에 퍼블리는 헵토미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가렸다.

한적하다해도 엄연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니 적당히 사람 안 올 만한데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보지?”

마법사가 사제와 함께 여행할만큼 중요한 얘기죠.”

사제들이 입담으로 먹고 산다는 게 마냥 농담은 아니었나보네.”

그리 말한 마키나는 먼저 움직였다. 무슨 얘기든 간에 이렇게 셋이서 모여있는 것 자체가 상당한 시선을 끄니 사람이 없는 데로 가는 건 당연했다. 탑을 방문한 손님들이 일행들끼리 함께 조용히 쉬기 위한 방이 있었다. 숙소용으로도 쓰이는 방이어서 침대도 있었기에 의자 대신으로 앉으니 바닥에 앉거나 서 있을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앉자마자 치트가 말하길

참고로 제가 5년 전의 그 대사제임다~”

대놓고 터뜨렸다. 마키나는 이게 당황해야할지 황당해야할지 헷갈리며 어처구니 없다는 기색을 거리낌없이 풍겼다. 엄청난 폭탄을 터뜨려놓고도 싱글생글 웃는 얼굴에 질렸는지 마키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패치를 바라봤다. 더 상세한 뒷내용을 원하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당연하게도 패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제대로 설명해.”

이 정도면 제대로 아님까? 보통 같았으면 그냥 사제라고 얼버무렸을 테니 진실된 이의 귀감이라고 칭찬 좀 해주십쇼~”

칭찬대신 날아오는 건 그 어느때보다 날카롭게 깎인 얼음 가시였다. 결국 치트는 신탁에 관해 설명했고 거기에 더불어 패치가 그동안 날려보낸 신관과 성기사의 수도 말했다.

어차피 저도 신탁의 주인공들 중 하나니 제가 나서서 설득해야한다 무릎꿇고 빌어야한다 말이 아주 많았죠.”

들은 말치곤 하나도 실천한 게 없군 그래.”

그야 패치가 결국 절 받아들였...죄송함다! 그러니 그 위험한 거 날리지 말아주십쇼!”

얘기를 다 들은 마키나는 떨떠름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전말이 어떻고 뒷내용이 있고 신탁이 내려졌든 간에 썩 좋게 보이진 않아. 어찌됐든 너흰 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의 당사자들이고 잘 모르는 사람이나 의심 많은 녀석들은 과연 네가 한 말들이 진짜일지 계속 의심할 걸고 심하면 너희가 서로 짜고치고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걸.”

아주 합당한 의견이었다. 오히려 방금 말한 것처럼 둘이 짜고 친 거 아니냐고 캐묻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는 당연히 예상한 의견이었기에 패치는 이렇게 말했다.

신탁 뒤에 뭐가 있을지 직접 뒤집어봐야 알겠지.”

그렇게 말하며 패치의 시선은 퍼블리와 용사를 향했다. 신탁이 가짜면 어째서 저 둘이 말려들어야 했는지, 만약 진짜라도 저 둘의 연관성은 영 알기 힘들었다. 신탁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면 저 둘에 대해서도 파악을 해놔야했다. 그게 과거든, 비밀이든.

일단 더더욱 당신네들을 지켜봐야겠어. 요정에 관련된 건 둘째치고 이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종교쪽의 신탁을 존중한다해도 이런 구성원은 지금도 솔직히 납득이 힘들어.”

그럼에도 마키나가 둘이 짜고 친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하는 이유는 대화하면서 보였던 패치의 성격이 한 몫했다. 저게 연기라면 저 마법사는 삶을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인형이리라.

패치의 시선을 본 건지 안 본 건지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상 시선마저 가려서 알 수 없었다. 마키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 뒤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벽에 기대 앉아있는 걸 보면 저대로 잠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코야해~?”

거기에 대놓고 묻는 용사가 있었다. 마키나는 조금 황당한 어투로 안 잔다고 말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아예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 듯 했다. 패치는 놀러가냐며 같이 놀러가자는 용사를 붙잡아 앉혔다.

그나저나 의외임다? 전 패치가 처음부터 같이 하얀 들판에 가자는 제안을 거절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임다.”

지금이라도 거절할 명분을 자네가 만들어보게.”

그 말에 치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울상지으며 이미 여기 상황 다 알려진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만드냐 너무한다 징징대거나 역시 냉정하고 가차없다며 히죽 웃었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굳이 명분을 만들어야할까요?”

언제나처럼 짓는 미소였지만 어딘가 담백했다. 아니 담백하다는 표현은 너무 순화된 표현이었다. 과장이 없는 미소와 달리 눈빛을 본 패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마주봤다. 무슨 생각으로 껍데기를 살짝 벗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게 된 패치는 당연하게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귀퉁이만 아주 살짝 뗀 주제에 아주 극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에 패치는 손가락을 두 개만 펼치고 저를 보는 노란 눈과 번갈아가며 봤다. 의도를 이해한 치트는 얌전히 눈을 가렸다.

일단 우리는 여기 휴식차 들린 거니 며칠은 머무를 거고 저 쪽도 일주일 여유는 있다고 했으니 이 부분은 문제가 없네. 본격적으로 같이 가게 되면 그동안 서로 돌아다닌 방식이 다를테니 조율이 필요하겠지. 그러니 좀 더 탑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 구경하고 오게.”

왠지 중요한 일들은 패치와 치트에게 전부 맡기는 것 같아 퍼블리는 거절했다. 용사를 막느라 쌓인 피로도 한 몫 했다. 헵토미노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앉은 이후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조오오오기까지 올라가볼 거야!”

혼자만 쌩쌩한 용사는 혼자서라도 갈 의지가 가득했다. 이미 혼자 다닐 때 여러번 난리가 났었으니 또 난리가 난다면 그 땐 쫓겨나겠다 싶어 패치는 용사를 따라가서 통제하기로 했다.

수고가 많았네.”

아하하...”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하기엔 꽤나 진땀 빼는 뒷수습이었다. 퍼블리는 대신에 힘내시라며 앞으로 겪을 고생에 대한 위로 섞인 응원을 건넸다. 치트는 조금 고민하는 듯 싶더니

나중에 저희 둘이 오붓한 데이...잘 갔다오십쇼~”

얼음 가시를 소환해 던질 자세를 취한 패치에게 인사말만 전했다. 또 한 번 되도않는 헛소리를 한다면 다음엔 위협으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패치의 으름장에 그저 웃기만 했다. 문 밖으로 나가니 다섯 걸음 떨어진 데서 벽에 기대 팔짱 끼고 있는 마키나가 있었다.

잠시 산책이나 하고 오겠네.”

마키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운 넘치는 용사는 어느샌가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뒷수습에 패치는 여기 온 김에 각 잡고 상식을 꽉꽉 담은 잔소리를 날릴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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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나온 말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마키나 입장에선 요정과 연관이 많아보이는 이들을 떠나보내야해서 찝찝함이 남을 테니. 그런데 목적지가 같다면

그럼 같이 가도 되겠네?”

다른 여행자들이었다면 그리 곤란한 제안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곤란했다. 문제가 많아도 굉장히 많았다. 구성원부터가 말하는데 엄청난 문제가 있었다. 5년 전 사건의 마법사와 대사제가 일행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신탁부터 시작해서 납득할 때까지 구구절절히 설명을 해야할 상황이니 곤란하기 그지 없었다.

치트가 그 대사제인 걸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옷이 가리는 로브를 제외하면 사제복 밖에 없으니 이에 대한 설명도 필요했다. 어찌되었건 패치는 표면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대처가 물렁했던 종교 자체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들의 의견도 필요하네.”

말하기가 곤란한 이유만 잔뜩이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만약 지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가는 도중이나 들판에서 만날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닥칠지도 모를 상황이라면 패치는 이 상황을 이용해볼까 했다.

마법과 기계의 사이가 어떻든 간에 공공의 적은 종교였다.

...저기...마법사님?”

잠시 아무 말이 없던 퍼블리가 불안한 얼굴로 패치를 불렀다.

용사님이 또 사라졌어요.”

어쩐지 대화하는 내내 너무 조용했었다.

 

요정이라~ 실제로 존재할 줄은 몰랐는데 말임다~”

어디서 볼 수 있엉~?”

글쎄요? 안타깝게도 전 요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남은 둘의 우려와는 달리 용사는 치트와 헵토미노가 자리를 뜰 때 같이 따라왔다.

요정 어디서 봐~?”

글쎄요, 이따가 얘기가 다 끝나면 물어볼까요?”

불안해보이던 헵토미노는 조금 안정되었는지 남은 일행들이 있는 곳을 힐끗 돌아봤다.

혹시 아버님이 요정들의 친구였나요?”

그건...모르겠어요. 그 때 처음 봤었거든요.”

치트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묻기 시작했고 그에 마음이 놓였는지 헵토미노는 천천히 알고 있는 걸 얘기하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아 열심히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오셨었고 그 다음엔 처음보는 형이랑 누나들이 찾아왔어요. 사실 그 사람들보단 할머니랑 더 오래 있어서 그런지 막상 기억하라고 하면 같이 놀던 거랑 제가 뭘 하면 하나같이 신기해하던 것만 기억해요.”

바둑이와 함께 놀거나 막대기로 그림을 그릴 때, 심지어 뭔가를 먹을 때마저도 굉장히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었다고 했다.

신기해하는데 그걸로 끝이었어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다가 가끔 궁금한 걸 물어보곤 했는데 할아버지 있을 땐 아예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같이 노래하거나 춤추고 놀고...”

흥미롭네요. 할아버지 요정이라니.”

그 할아버지는 요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 사람들 전부 그냥 사람처럼 생겼어요. 요정인 거 지금 알았어요.”

사실 치트도 요정이라고 하면 검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사람에다 잠자리 날개 달린 걸 떠올렸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막연한 상상이었고 요정 자체엔 관심이 없었다.

내 칭구들도 막막 노래부르고 춤추고 해썽~!!”

그렇슴까? 아까 들어보니 패치도 요정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얘기 들은 거 없습니까?”

없엉!”

아쉽네요~ 요정이 실존한다는 게 꽤 신기했는데 말이죠.”

그리 말하고 있지만 눈빛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 패치가 설명하고 있는대로 같이 지냈다기보단 근처에 요정이 있었다고 예상 중인 듯 싶었다. 치트는 얘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천천히 못했던 관광이나 하자며 둘을 이끌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사를 붙잡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지만.

얘기는 잘 끝났습니까? 굳이 자세히 묻지 않아도 아주 완벽하게 끝냈을 거라 생각함다.”

가야하는 곳이 우리와 같은 하얀 들판이라더군. 어떻게 생각하나?”

죄송함다~ 중간과정 좀 자세히 설명해주십쇼~”

설명을 듣는 순간 치트는 패치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런...설명하기 난감해지는 건 패치 아닙니까?”

걱정하듯이 하지만 표정엔 전혀 걱정 따위 없이 작게 말하는 모습에 큰 동요 없이 말했다.

자네 또한 난감해지겠지. 어찌되었건 간에 이 여행의 시작은 신탁 때문이니.”

신탁이야 알려져도 상관없습니다만? 소문이 일어나고 와전되어서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 싶어 말을 안 하고 다닌 것 뿐이죠.”

소문이 일어났을 때 숨겨진 부분도 일어나겠지.”

그 말에 치트가 한 층 더 짙은 웃음을 지었다. 똑똑히 그 웃음을 본 패치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기대할게요.”

하지만 기다리진 못할 것 같네요.

 

그래서 너희끼리 얘기는 다 끝났어?”

같이 가도 상관 없다는군.”

마키나는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헵토미노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며 갑자기 소리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마 완전히 안정을 찾은 후에 같이 지냈던 요정들에 대해서 물어볼 듯 싶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난 요정사냥꾼이야. 하얀 들판에 요정이 나타났고 지원을 요청해서 가게 됐지. 그리고 너흰 요정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셋이나 되니까 정보도 얻을 겸 같이 가려고 한 거야. 그리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기계로 가려져 있는 얼굴이 치트에게 향했다.

왜 사제랑 마법사가 같이 다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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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요정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해주게. 특히 왜 요정들이 경계대상인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마키나는 다시 생각해도 화가나는지 꾹 누른듯한 신음을 흘리며 숨을 골랐다.

요정들은 상당히 동떨어진 존재야. 우리가 현실에서 사는 동안 동화속에서 사는 녀석들이지. 그러니까 엄청 순수하고 상식이라는 걸 몰라. 악의 또한 없고.”

그러면 괜찮은 존재 아닌가요?”

마키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상대가 요정이라는 존재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있는 듯 했다.

요정들은 상식이 없는 만큼 기본적인 법, 그러니까 규칙? 예의? 아무튼 그런 걸 전혀 몰라. 그래서 요정이 마을 한 가운데에 뚝 떨어졌을 때 흔히 생기는 일이 바로 기물파손과 절도야.”

요정이 인간에게 신비한 존재인 것처럼 인간 또한 요정 입장에선 신비한 존재였다. 그 신비함은 사는 주거지, 사용하는 물건, 생활 양식 전부가 포함되었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요정은 그 모든 것들을 거침없고 악의없이 들쑤셨다. 표지판이 신기하다면서 뽑는 건 기본이었고 가판대의 물건과 문, 간판을 예쁜 돌 줍듯이 가져가는 게 그들이 저지르는 일들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말해도 왜 안 되냐고들 묻고.”

요정들의 도덕이나 생활양식은 어떻게 되는지 참 궁금하게도 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이해조차 못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기한 물건들은 예쁘게 생긴 꽃과 돌처럼 아무 생각없이 주워다가 구경하는 용도였기에. 그것에 주인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애초에 개인이라던지 소유한다는 개념이 있는지도 의문이라는 게 마키나의 의견이었다.

그런데 그런 요정 중에도 아주 드물게 인간의 상식을 배우고 이해하는 요정이 있어.”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었다. 이해라는 게 인간의 이해와 요정의 이해는 많이 달랐다. 인간의 이해가 상대의 상황, 상태, 감정을 알고 깨닫는 거라면 요정의 이해는 이러면 싫어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였다. 그래서 배우지 않은 상식과 접하지 않은 상황에선 앞선 예시들처럼 그냥 자기 하고픈대로 하는 게 요정이었다.

그 일례로 어느 집 부부와 친해진 요정이 그 집 아기를 귀엽고 이쁘다면서 창문 타고 넘어와 데려가려고 했던 일이 있었지. 다행히 데려가기 전에 그 꼴을 발견해서 막았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어.”

, 그럼 아기가 있는 집은 말하고 걸어다닐 때까지 창문을 열지 않는 게 그 일 때문이었나요?”

맞아.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요정을 한 번도 못 본 마을에서도 아기 있는 집은 더운 여름날이어도 창문을 꼭꼭 닫아놓더라.”

이런 요정들의 만행을 말리는 과정에서 얌전히 제압된다면 좋으련만 요정들은 요술이라는 미지의 힘을 쓰는 존재들이었다.

일단 자기들도 붙잡히는 게 좋지 않은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지. 자기들이 뭘 했든 간에 억압이니까 제압하려고 들면 요술을 써대. 그래서 나타나면 여간 머리아픈 게 아니야. 그리고 그만큼 요정에 관한 정보는 우리 사냥꾼에게 매우 중요해, 녀석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거든.”

거기에다 요정은 이상하리만치 마법저항이 면역수준으로 강해서 마법사들은 요정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대신 금속에 대해 유독 취약함이 확인되어 사냥꾼들은 전부 금속 기계 관련 업종 종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덧붙여진 설명을 듣고 있던 패치는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마법의 근본이 요정이라는 얘기가 나왔군.”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람마다 마법저항이 높은 사람도 있지만 계속 마법을 쏟아부으면 효과는 돌기 마련이네. 그런데 면역수준이라면 역으로 말해서 마법이 근본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파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지.”

요정들 만행보단 그쪽에 관심이 있는 걸 보면 천생 마법사 맞구만?”

그리 말한다면 금속에 취약하다는 걸 알아낸 그쪽 또한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두게.”

그렇게 쏘아붙인 패치는 생각에 잠겼다. 퍼블리와 치트에겐 특별한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적어도 헵토미노처럼 얼마간 같이 지내야 반응이 나온다는 거였다. 행동과 사고방식이 어린 인간같은 요정과 그리 오래 지낸 기억은 없었다. 애초에 요정 뿐만이 아니라도 패치는 사람들과 그리 오래 지낸 적이 없었고 꽤 거리를 둔 편이었다.

진짜로 어린 인간인 한 사람만 빼고.

일단 아무리 생각해도 요정과 연관된 적이 없네. 어느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에 인간의 상식을 배운 요정이 주변에 있었다는 추측 외엔 예상가는 게 없네만.”

마키나는 그 얘기에 나름대로 납득했다. 몇 번이고 모른다고 강조한데다 마키나는 혹시나의 위험요소를 발견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던 거지 원래 목표는 하얀 들판의 요정관련 의뢰였다.

갑작스러웠겠지만 이쪽은 꽤 급했거든. 협조 고마워. 그리고 아까 그 꼬마애의 얘기는 그냥 넘기긴 힘들어, 다른 사냥꾼들 뿐만이 아니라 요정 사건을 조사하는 이들에게도 이 얘기를 할 수밖에 없어.”

퍼블리는 이해하지만 헵토미노가 걱정됐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패치는 이에 관련해선 아이가 납득하게 얘기를 해주는 게 좋을 거라며 사실상 요정에 관련된 얘기를 끝내려는 태도를 보였다.

저 혹시 그럼 가본 데가 많은가요? 여기서 꽤 멀리 있는 곳이라던지 아니면 멀어서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요!”

사냥꾼 특성상 요정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밖에 없어서 많은 땅을 밟아보곤 해. 하지만 네 생각만큼 그리 여유로운 여행이 아니야, 본분은 사냥꾼이니까.”

그냥 막 떠오르는 곳들도 좋아요! 제가 지도제작자 지망생이라서 알려지지 않은 다른 곳들에 대해서 많이 알아두고 싶거든요.”

요정에 관한 얘기가 끝나니 둘은 여행과 새로운 지역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굳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 패치는 마저 정보를 찾기 위해 책들을 살펴봤다. 아까까진 하얀 들판에 관련된 책이었다면 이번엔 신탁에 관련된 책이었다.

사실 여행도 자본이 뒷받침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거거든. 그래서 한동안 고생한 적도 있어.”

그래서 돈을 열심히 모았어요. 마법사님과 사...치트씨가 여행에 관해 잘 알고 계셔서 마음 놓고 여행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난 잠깐 휴식차 이 탑에 들른 거라서 얼마 안 있음 하얀 들판으로 가야해.”

?”

책에 집중하던 패치는 둘의 대화를 자세히 듣지 못했다. 설령 자세히 들었더라도 말릴 새가 없었을 게, 퍼블리가 그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희도 이 다음에 하얀 들판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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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님 이제 돌아가요.”

이잉~ 아직 구경 다 못해썽~!”

그건 퍼블리와 헵토미노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용사를 내버려두면 그 때부턴 관광이 아닌 사고수습으로 뒤따라다닐 걸 예상했기에 한마음 한 뜻으로 용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형은 왜 용사님이에요?”

우웅? 몰라!”

헵토미노는 곧바로 퍼블리에게로 눈을 돌렸지만 퍼블리도 몰랐다. 신탁이 그렇다고 그러고 모두들 자연스럽게 용사님이라 불러서 의식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신탁 얘기를 함부로 해도 되나 싶어 퍼블리는 하하 웃으며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일단 돌아가요!”

그렇게 말하며 패치가 있을 도서실로 용사를 잡아끌었다. 용사는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왔다. 가는 도중에 꽤 많은 직원들이 용사를 보자마자 불안해하다가 퍼블리와 헵토미노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는 걸로 보아 용사가 돌아다니면서 꽤나 많은 사고를 치고 다닌 걸 알 수 있었다.

용사님 돌아다니면서 뭐하셨어요?”

빤짝빤짝 쫓아가고! 흔들흔들 타보고!”

퍼블리는 더 묻지 않았다. 뒷수습 하고 있을 어딘가의 직원들에게 속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고 묵묵히 데려갔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마키나를 보게 되었다.

!”

안녕? 잠깐 실례할게~”

마키나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막 도착한 그들에게 작은 원형 판을 가까이 댔다. 퍼블리에게 가까이 댔을 땐 미미한 진동만 일었지만 용사와 헵토미노에게 가까이 대니 진동과 함께 가운데 구슬이 빨갛게 잠깐 깜빡였다.

오옹~?”

용사는 바로 관심을 보였고 헵토미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너희 모두 인간이야.”

이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용사와 마키나를 제외한 모두는 정말 새삼스러운 사실을 듣는 표정이 됐다.

하지만 요정과 깊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여기 둘과 너. 틀림없이 요정과 잠깐이라도 함께 살았던 적이 있을 거야.”

마키나가 가리킨 건 용사와 헵토미노, 패치였다. 패치는 용사에 납득했으며 헵토미노에 의아했지만 자신에는 깊은 불신을 보였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요정과 함께 있었던 일은 없었다.

요오오오오저엉~???”

얼굴에 빛이 가득한 용사를 보아하니 당장이라도 요정이 있는 곳을 듣는다면 뛰어갈 기세였다. 지금 여기엔 없다며 말리자 행동은 얌전해졌지만 표정은 여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정과 엮인 적이 없네. 요정이 근처에 함께 있었다면 단번에 알아챘을 텐데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없네만.”

아주 어렸을 때라면 기억 못할만 하지만 반응이 이런 걸 보면 상당히 최근이야. 그리고 요정이 근처에 있었을 때 가만히 있거나 노련한 요정이라면 못 알아볼만 해. 요정은 인간들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패치의 눈썹이 또 한 번 치켜올라갔다.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고?”

너 진짜 마법사치곤 이상해, 그래서 내가 이 탐지기로 요정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있잖아?”

그 여행자들은 분명 날개가 있고 작은 존재라고 했었다. 패치는 제 기억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만큼 확실한 게 어디있겠는가.

아무튼 너희 셋 잘 생각해봐,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아. 노련한 요정이라도 결국 자기 하고픈 걸 하는 녀석들이니까 금방 티 날 거야.”

저기...혹시 요정들의 특징에 대해 더 설명해주실 수 없나요? 요정에 대해선 있다는 것만 들어봤지 자세한 건 몰라서요.”

퍼블리의 질문에 마키나는 좀 고심했다. 요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만 만났었는지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게 훤히 보였다.

어린애 같다고 해야하나? 몸은 그냥 성인인데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어린애 같아.”

모두의 시선이 용사에게로 갔다.

혹시 어린 요정들도 있나요?”

그건 모르겠네. 어린 모습을 한 요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덩치는 크면서 세상 처음 겪는 어린애들처럼 호기심이 많아.”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용사에게로 갔다.

“...그래 쟤처럼 그런 애들이 요정이야. 근데 쟤는 인간 맞아. 이 탐지기가 얼마나 정확한데.”

일단 용사님이 가장 요정과 연관이 많겠군요? 요정에게 영향을 받아 저런 성격이 된 게 아닐까 싶슴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본격적으로 용사에게 정보를 뽑아낼 요량인지 한 발 다가가던 그 순간.

인간과 닮고 용사님과 비슷한 사람들?”

그리 말한 퍼블리가 헵토미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헵토미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퍼블리와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둘의 반응에 모두들 의아해했고 퍼블리는 이 얘기에 대해 조금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당사자인 헵토미노는 개의치 않았다.

저 그런 사람들 본 적 있어요!”

? 하나도 아니고 다수야?!”

마키나는 기겁하며 캐물었고 헵토미노는 퍼블리에게 해준 말 그대로 모두에게 말했다. 패치와 치트는 얘기를 듣고 헵토미노를 데려오기 전, 헥소미노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 녀석들이란 게 요정들이었나.”

그 사람 제정신이야?!!”

발작적인 외침에 헵토미노와 품의 바둑이가 깜짝 놀랐다. 그 모습에 마키나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격앙된 감정은 쉽게 가라앉히지 못해보였다. 그 모습을 본 퍼블리가 헵토미노를 데리고 잠깐 다른 데 있다 오겠다고 했으나 치트가 나섰다.

퍼블리님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얘기잖아요.”

중요한 얘기면 퍼블리님도 들어야죠. 그리고 너무 퍼블리님에게만 맡긴 것 같아 죄송해서 그럼다~”

치트는 그렇게 말하며 헵토미노와 함께 자리를 떴다. 퍼블리는 뺨을 긁으며 패치를 돌아봤고 패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동등한 일행이고 중요한 얘기를 듣는 자와 듣지 않아도 될 자를 나눌 이유가 없네.”

사실 패치의 입장에선 뭐든 간에 치트가 패를 쥐지 않는 게 더 이득이었다. 비슷한 상황이 와도 패치는 퍼블리를 남게 하고 치트를 보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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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신탁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절대 믿을 수 없을 녀석의 말을 신탁이라고 해서 믿을 수 있었을까? 신탁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신관이 아닌 마법사 마저 알고 있고 마법사도 아닌 일반인 마저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게 신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신탁이 아니었다. 신탁을 말한 주체를 경계했으면 더 경계했어야했는데 신탁이랍시고 덥석 믿다니.

녀석에게 신탁이 중요할지 납치했다가 놓친 마법사가 더 중요할지 누가 알겠는가? 녀석만이 알 것이다.

신탁의 뒷면, 혹은 신탁 그 자체를 의심하고 파헤치기로 한 패치는 가장 먼저 용사에 관해서 짚어보기로 했다. 마키나 또한 전적으로 믿을만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지원 요청서는 진짜였다. 일단 뭐든간에 기회가 왔으니 써봐야 알 수 있는 거였다.

각자 탑을 구경하러 갔으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하네. 넉넉잡아 6시간 이상은 걸릴텐데 상관 없나?”

그보다 더 여유 있으니까 상관 없어.”

요정에 대해서 그리 상세히 아는 바가 없는 패치는 마키나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굳이 알아야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종교가 공동의 적이 되기 전엔 서로 사이가 나빴고 지금도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다. 대화가 끊긴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넌 요정에 관심 없나봐?”

마법사치곤 의외라는 어투에 패치는 무슨 의민가 싶어 눈썹만 끝을 올려세웠다.

듣자하니 마법의 근본이 요정이라는 얘기가 자자하던데?”

도시쪽에선 그런 이론이 유행인가?”

넌 부정측이구나?”

부정이고 뭐고 패치는 그런 얘기 자체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굉장히 해괴한 얘기로 다가왔다. 상식 밖의 존재가 요정인데 상식 내에 존재하는 마법의 근본이라는 건 패치 입장에선 납득하기 힘든 얘기였다.

그러다 문득 패치는 한 가지 불리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은 얼굴을 아주 잘 드러냈고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리 표정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해도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건 인식하지 못했다. 어투와 행동만으로 상대의 기분을 파악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패치는 최대한 말을 삼가기로 했다. 상대방의 반응을 끌어내는데 최적화 된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니.

아직 계셨슴까? 잠깐 바람이라도 쐬십쇼~”

생각하기 무섭게 그 둘 중 하나가 돌아왔다. 패치는 아주 조금의 고민 끝에 책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상대에게 웬만하면 감정같은 정보를 내보이지 않으려 한다더라도 제 사감을 완전히 배제할 생각은 없었다.

옆에 분은 들어오기 전에 잠깐 본 분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치트는 마키나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몸을 전부 둘러싸는 로브를 입은 터라 사제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무난하게 말을 받았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유형의 마법사를 상대하려다가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그 일행이 반응을 끌어내기엔 더 쉬워보이고 또 반가웠는지 나오는 어투가 조금 편안해보였다.

 

몇 시쯤 됐으려나?”

신나게 관광을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둘은 시계를 찾기 위해 주위를 돌아봤다. 탑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른들이었지만 나잇대는 잘 찾아보면 다양하게 있었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아이들과 창가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노인들. 여기에서 퍼블리와 헵토미노 일행은 이제 막 성인이 될 법한 사람이 동생을 데리고 탑을 방문한 것처럼 보였다.

더 구경하고 돌아갈까?”

퍼블리의 물음에 헵토미노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못 본 데가 더 남았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고 잘 따라오는 헵토미노를 보던 퍼블리는 아까부터 든 생각에 조심스럽게 또다른 질문을 꺼냈다.

혹시 사람 많은 게 익숙하니?”

?”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게 익숙해보여서.”

그러다 문득 나무들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을 테니 당연한 건가 싶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 아빠가 다른 사람들한테 저를 맡겼었거든요.”

? 사람들?”

헵토미노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퍼블리는 약간의 혼란이 왔다. 보통 아이를 맡길 때는 대부분 한 명에서 부부일 경우 두 명 아닌가? 두 명이니 다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던가? 아니 두 명이 아닌 건 확실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게 익숙하다고 했으니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맡긴 셈이었다.

할머니랑 살기 전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절 돌봐줬어요. 매일 함께 놀았고요. 할아버지도 한 분 계셨어요. 그 할아버지가 저를 데려갔었거든요.”

다른 한 손으로 안고 있던 바둑이가 꿈질대자 헵토미노는 고쳐안으며 바둑이도 그 때 만나 키웠다고 했다.

바둑이 키워도 되냐고 물었을 때 허락받을 게 뭐 있냐며 했었어요. 진짜 많이 웃는 할아버지였어요. 다른 사람들도 엄청 많이 웃고 늘 춤추고 노래하고...되게 특이했어요.”

헵토미노의 얘기를 들으며 그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고 있던 퍼블리는 안 그래도 사람이 많아 소란스러운데 그보다 더 한 소란이 들려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문자님!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우웅~? 왜 곤란해~?”

책장 위엔 대체 어떻게 올라간 거예요!?”

소란의 정체는 용사였다. 퍼블리는 얼른 달려가 용사를 끌어내려 직원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치만 올라가는 게 있었는 걸~?”

그건 책을 윗칸에도 꽂아넣으려고 있었던 거예요! 책장 위로 올라가면 안 돼요!”

옆에서 바둑이를 끌어안으며 보고 있던 헵토미노가 문득 말했다.

그 사람들 이 형이랑 되게 비슷했어요.”

물론 이 형이 더 한 것 같다며 뒤에 덧붙여지는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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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패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패치일세. 떠돌아다니는 마법사라 들어보지 못했네.”

엄청난 유명인이었잖아? 유명인 앞에서 이름 자랑한 셈이네.”

그렇게 말하며 마키나는 더 이상 그에 관해선 말하지 않았다. 패치가 마법사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고 기계 옷을 입은 입장인데 마법사들이 자기 이름을 잘 알 거라고 확신하는 걸 보면 경쟁 쪽으로 유명한 기계공인 듯 싶었다.

이건 1비트 정보를 저장하는 회로 이름이야. 세 가지의 뜻이 있는데 뒤에 3이 붙은 걸 보면 세 번째 뜻을 의미하는 거지.”

FLIP FLOP이라는 단어의 뜻 중 첫 번째는 이미 설명했고 두 번째는 어떤 종류의 샌들, 이 힌트가 의미하는 세 번째는 태도같은 게 표변하다는 의미였다.

바이트가 하나의 문자를 표현하는 단위고 이건 비트로 환산했을 때 8비트야. 암호는 네 자리니까 숫자 네 자리 아님 문자 네 자리일 거고 단어는 두 개, 뒤는 3. 그러니 23이고 이걸 뒤집으면 32. 물론 여기서 나타내는 건 태도를 표변하다지만 뒤집다도 비슷하니 그렇다 치고.”

풀이만 설명하고 자세한 이유는 생략하는 모습에 패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계공들의 심심풀이 문제 중 하나였지만 심심풀이치곤 너무 꼬고 중구난방인 문제였다. 속에서부터 상당히 논리적인 불만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패치는 굳이 이 상황에 상세히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럼 답은 바로 이거지.”

‘OVER’

답이 맞았는지 삐링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울렸다. 마키나가 옆으로 비켜섰고 패치는 쪽지에다 하얀 들판의 요정에 관련된 내용을 적던 도중 귀퉁이 부분에 무언가 입력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진실, 애도, 그림자

짧막한 세 단어 옆엔 새하얀 국화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파란 눈이 살짝 가라앉았고 손은 열심히 움직여 정보를 입력했다.

혹시 요정 탐색자야?”

그리 묻는 이유는?”

요정에 대한 정보를 적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지나가다가 부탁을 받았지.”

마키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에도 쓴 기계판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아 요정과 관련된 일에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패치는 부러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를 취했다. 사실 반쯤은 시큰둥했다.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와줘서 고맙네. 자잘한 일에 대한 자잘한 보답이라해도 도운 건 도운 거니 감사인사를 해야지.”

그에 상대의 어깨가 뻣뻣해진다. 그런 논리라면 마키나 또한 감사인사를 건네야했다. 더듬거리며 그렇게 따지면 나도 고맙다고 인사해야하는 거 아니냐며 감사인사 아닌 감사인사가 나왔다. 이런 부분에 꼬집혔다고 느껴서 뜨끔한 건지 아니면 마법사가 싫은 편이어서 말대신 보답으로 빚을 지운 건데 결국엔 감사인사를 꺼내야해서 뻣뻣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 당신 사실 요정이랑 연관이 많지?”

패치 입장에선 처음 듣는 소리였다. 요정이 쓰는 요술이 마법이랑 유사해서 학문적인 비교로는 연관이 있지만 요정 자체와는 그리 연관이 없었다. 패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상대는 확신하는 어투였다.

그럴 리가 없어, 기계가 얼마나 정확한데! 사실 이정도면 당신 자체가 요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행동과 성격을 보면 요정이랑 완전히 딴판이라 당신이 요정이 아닌 건 알겠어.”

만약 여기에 퍼블리가 있었다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게 분명했다. 일단 접근한 목적을 본격적으로 꺼내려는 것 같아 패치는 뭐라 더 말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애초에 자잘한, 그리 보답이라는 걸 받기에도 뭐한 일에 이렇게까지 따라와 보답했다면 그건 처음부터 뒤를 따라밟았다는 얘기였다.

난 요정 사냥꾼이야.”

처음듣는 직업이었다. 애초에 요정이 사냥 대상이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패치는 잠깐 들었던 묘사를 생각해봤을 때 세상은 넓고 그만큼 여러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진 이들 또한 존재한다는 걸 떠올렸다. 멀리 볼 것 없이 지금 같이 다니는 일행 중에 마법사 하나를 납치해 신전 개인침실에다가 눕혀둔 대사제가 있지 않은가.

요정이 한 번 붙으면 얼마나 곤란한 줄 알아? 악령들은 악의가 가득해서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지만 요정은 악의가 없어서 더 힘들어.”

마키나는 패치 근처에 요정이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접근한 목적을 알게 된 패치는 완전히 관심을 껐다. 그리고 마키나는 직감했다. 이 마법사는 보통이 아니라고. 자기가 최강이라고 외치던 불망아지 마법사를 본 적이 있지만 그보다 더 한 마법사는 처음 봤다.

요정에 관해선 이번에 부탁받은 일과 정보를 얻게 된 일을 제외하면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네. 자네가 요정 사냥꾼이고 요정 탐지기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내 뒤를 밟는 기계공을 섣불리 믿을만큼 순진한 마법사로 보였나? 정식으로 입증할만한 걸 가져온다면 나 또한 정식으로 대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앞서 말했듯이 그게 다니 서로 의미없는 시간낭비하지 않길 바라네.”

짜증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가득한데 틀린 건 하나 없는 말이었다. 논리 없이 날뛰던 불망아지는 마주 날뛰어서 패면 되는데 논리와 합리 없인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이 마법사는 실력행사를 하면 오히려 경계만 더 심해질 유형이었다.

“...지원 요청서가 있어.”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한 채로 내미는 건 하얀 들판 인근 마을의 지원을 요청하는 요청서였다. 패치가 방금 정보를 입력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다른 건 좀 더 상세하다는 거였고 그 외엔 현재 마을의 상황만 적혀있었다.

당신이 적어놓은 내용과 같아. 원래는 사냥꾼 외엔 보여줘선 안 되지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겠지?”

알겠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내용처럼 하얀 들판에 요정이 나타났다는 정보와 그걸 적어달라고 했던 여행자들 뿐일세. 그 여행자들도 지나가다가 마주친 거였고 그 이후론...”

말 끝을 흐린 패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5년 전, 자신을 납치한 치트가 찾아왔고 퍼블리를 만났으며 환각의 숲에서 용사를 찾았었다.

평범한 인간이 환각의 숲에서 멀쩡히 살 수 있었을까?

짐작가는 게 있나봐?”

“...요정 사냥꾼은 어떤 요정이든 마주치는 즉시 사냥하나?”

그런 녀석들도 있지만 적어도 난 아니야.”

내 일행들 중에 짐작가는 사람이 한 명 있네. 사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같이 기다려도 상관 없네.”

많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어째서 자신들을 짚어 신탁이 내려졌을까. 신탁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낀 패치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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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막혀있나봐요.”

왜 들어가지 않고 멀뚱히 서 있나 의아해했지만 나무판자를 박아 아예 못 열게 막아놓은 문을 보게 된 일행들은 그 옆에 멈춰섰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슴다~ 왜 막아놨을까요?”

요기 그림 있당!”

용사가 가리키는 방향에 동그란 원이 세 개 겹쳐져있고 그 가운데에 세모가 그려진 그림과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 낡았거나 망가진데가 있나보군. 공사중이니 이쪽으로 가라는 뜻이네.”

? 어떻게 아셨어요?”

건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업체들은 다양하고 이 표시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업체의 표시일세. 여기서 자기들이 일하고 있다고 나타내는 거지.”

기계 옷을 입은 사람도 들었는지 고개가 패치를 향하고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니 또다른 문이 있었다. 앞전에 봤던 문보다는 살짝 작았지만 책장같이 큰 가구가 드나들만큼 웬만한 문들보단 컸다. 문 자체가 꽤 구석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드나드는 사람들은 적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 못 찾는 게 당연하지.”

저 문도 사실 급하게 뚫어놓은 것 같슴다~”

급하게 뚫어놓는 겸 사람들이 더 들어오려는 걸 제한해두려고 일부러 저렇게 해놓은 것 같다는 감상을 끝으로 일행들은 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아 금방 들어갔지만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지 탑 내부엔 매우 많은 인파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밖보다 더 환한 거 같아요!”

실제로도 환했다. 상당히 밝은 전등을 썼다고 설명하고 사람이 많으니 웬만하면 떨어지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용사였다.

“...여긴 이렇게 사람이 많고 복잡한 만큼 미아를 찾고 맡는 데에 탁월한 곳이네.”

용사님은 미아라고 하기엔 너무 크지 않슴까?”

성격상 가만히 돌아다닐 리가 없을테니 직원들이 알아서 붙잡아놓고 일행을 찾아다니겠지.”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여행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헵토미노 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각자 관광이든 정보 수집이든 볼일을 보고 다시 모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저흰 여기에 대해선 잘 모르는 걸요?”

지루할텐데 상관없나?”

그래도 아예 모르는 데에서 헤메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퍼블리는 제 손을 잡고 있는 헵토미노를 눈짓했다. 하지만 패치에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따로 관광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하며 일행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도착한 데는 온통 책이 가득한 장소였다.

저희 관광하고 올게요.”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리 말한 퍼블리는 헵토미노와 함께 탑의 안내를 하는 직원을 찾아갔다. 정보를 수집한다는 말이 하루종일 책이 가득한 이곳에 계속 박혀있을 거라는 뜻이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이미 떠난 둘이 있던 자리를 힐끗 보던 패치는 치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같이 안 가냐는 뜻이 담긴 눈짓에 치트는 그저 웃음만 지어보이곤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어디서 다시 만날지도 안 정했는데 괜찮슴까?”

내가 계속 여기 있을테니 관광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지.”

패치는 하얀들판과 사막에 관련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열 페이지 정도 넘겼을 때 되어서야 치트 또한 어디론가 갔는지 곁엔 아무도 없었다. 신경쓰지 않고 책을 쭉 읽던 파란 시야가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

하얀 들판에서 요정의 흔적이 발견되어 급히 요정 전담 부대 지원을 요청하고 인근의 마을 주민들에겐 보호용 날붙이를 지니라는 연락을

뒷 내용은 흐려지더니 완전히 관계없는 다른 얘기가 이어져 있었다. 뜬금없이 적혀져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내용 자체가 이상했다. 이 부분 덕분에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패치는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

그리 먼 기억도 아니었다. 맨 처음으로 신관(홀리)을 하나 날린 때였다. 그 때 지나가던 여행자들이 요정에 대해서 얘기했었고 요정을 만나게 된다면 중간탑의 32번 쪽지에다 적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비록 만나지는 않았지만 요정에 대한 정보를 접했고 내용 또한 심상찮으니 적을까하는 고민이었다.

마침 이곳이 중간탑이기도 했고 쪽지 보관소도 멀지 않았지만 굳이? 라는 마음이 고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한 번 신경 쓰이면 그 이후로 계속 신경쓰이니 그냥 짧게 적고 오는 게 나을 거란 걸 깨달은 패치는 쪽지 보관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종이가 언제부터 기계가 되었나?”

기술의 도시가 만들어지고 바로 상용화 됐으니 5년쯤은 됐습니다.”

종이 대신 기계 자판이 마법사를 반겼다. 기계를 못 다루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직업상의 꺼림칙함이었다. 자판을 두드려 32번 쪽지란을 찾았지만 암호가 걸려있어 열 수가 없었고 패치의 눈썹 끝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암호 입력창 바로 위에 힌트가 있었지만

‘FLIP FLOP 3’

미간 사이의 골짜기가 이루어졌다. 신경쓰이는 정보 하나 전달하자고 이 힌트를 붙잡고 암호를 푸느니 그냥 바로 끄고 앞으로 갈 장소들의 정보를 더 얻는 게 가장 좋을 거라는 생각이 망설임을 없앴다. 그대로 쪽지보관소를 덮어놓으려 하던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도와줄까?”

길에서도 봤고 막힌 탑 문 앞에서도 봤던 그 사람이었다.

당신 마법사지? 물론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기계 다루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퀴즈긴 한데.”

도와주려는 이유는?”

탑 문에서의 답례.”

경계심을 가감없이 내보이는 말투에도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은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답례받기엔 굉장히 자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입장에선 이거 푸는 것도 그만큼 자잘해서 말이야.”

패치는 옆으로 비켜 섰다. 조금 의심이 들어도 너무 밀어내면 도리어 자신이 이상해지고 굳이 더 날을 세워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사실 내가 입고 있는 기계 옷 성능이 꽤 좋거든. 그래서 당신들이 기술의 도시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 다 들었어. 요즘 인형 개발이 유행이긴 하지. 그보다 그냥 기계 옷 입은 사람이라고 하다니 이 모습으로 많이 알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직 멀었나봐?”

태도와 말의 내용을 보아하건데 한 발 물러나면 술술 자기 얘기를 하는 타입이었다. 패치는 겉으로 내보이는 경계를 조금 더 낮췄다.

내 이름은 마키나야. 마법사라면 내 이름 정돈 들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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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가 설명한대로 지식의 탑보단 중간탑이라는 이름이 더 대중적이었는지 중간탑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아 거기로 시작해서 제각기의 길을 알려줬다. 워낙 중간에 있다보니 길도 다양했기 때문에 그마나 빨리 도착할 길을 고르는 것만 남았다.

길이 엄청 트여있나봐요.”

아무래도 중간길목에 떡하니 자리잡은 만큼 지나쳐야할 일이 많을 테니 그렇겠죠~”

강이 있는데는 얼마 전에 비가 왔으니 물이 많이 불어났겠군. 그러니 빼게.”

강을 지나는 길이 꽤 되어 선택지는 금방 좁혀졌다. 도착하는 게 빨라도 길이 닦이지 않아 울퉁불퉁한 돌이 많은 길 또한 제외됐다. 혹시나 비가 한 번 더 내린다거나 부득이하게 잠시 멈춰야할 순간이 발생할지도 몰라 쉼터가 포함된 길을 고른 일행들은 바로 출발했다.

다른 마을이 있는데보단 가깝긴 가까운데 참 미묘하군요.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면 정말 가까울텐데 말이죠~”

아까 물어봤는데 거긴 산이 끼어있어서 바위들이 굴러내려온대요.”

한마디로 위험한 길이라는 거였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는 건 모두 동일했다. 헵토미노는 살던 곳에서 못 보던 것들을 볼 때마다 신기해했다. 조금 큰 마을마다 세워둔 동상이나 계속해서 움직이는 허수아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다르게 생겼어요? 그리고 왜 밭 주위만 빙빙 도는 거예요?”

저건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야. 그러니까 음...인형을 사람 크기만큼 크게 만들어서 움직이게 하는 거야. 그러면 새들이나 야생동물들이 사람인 줄 알아서 가까이 오지 않겠지?”

그럼 뭘로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아마 마법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퍼블리는 그렇게 말하며 패치를 힐끔 쳐다봤다. 허수아비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패치는 고개를 저었다.

저 허수아비들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종류는 아니네. 보아하니 기계로 만들어서 별다른 주문 없이 동력만 있으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은데.”

마법으로 움직이는 거랑 기계로 움직이는 거랑 많이 달라요?”

근본적으로는 많이 다르지만 용도와 결과는 똑같으니 밭주인들이 신경쓰는 건 어떤 게 더 값이 싸느냐겠지.”

설명을 듣던 퍼블리는 기계 허수아비들을 힐끔 쳐다봤다. 기계로 이루어진 허수아비들만 있는 건 값 문제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저것도 허수아비에요?”

조그마한 손가락 끝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확실히 행색이 제법 눈에 띄는 모양새였다. 허수아비들처럼 밭을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면 얼굴까지 무언가 딱딱한 것들로 덮여있었다. 그 사람을 본 패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기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일세.”

왜 기계 옷을 입는 거예요?”

물리적인...그러니까 칼이나 굴러떨어지는 돌에 맞는 거에 대한 보호 목적일 수도 있고 몸 어딘가가 불편해서 움직이는데 힘들이지 않기 위해 입는 경우가 있지.”

사람이라는 말에 헵토미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렸다. 다행히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은 제법 먼 거리에 있어 듣지 못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슬쩍 그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헵토미노는 다시 허수아비들을 봤다.

기술의 도시에서는 춤추는 인형들이 있었다고 했죠?”

, 각자 따로따로 춤추기도 했고 한꺼번에 함께 춤추기도 했어.”

나중에 또 여행하게 되면 바둑이랑 꼭 같이 가볼 거예요!”

기대 가득한 그 말에 퍼블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제 도시는 기술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마법도 없고 기계또한 주인들이 기약없는 잠에 빠져 움직일 일이 없었다.

“...지금 도시는 혼란스러워졌어. 나중에 안정이 되면 그 때 한 번 가보는 게 좋아.”

그 때가 되기 전에 모두가 깨어나고 마법사들도 돌아오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해줬다.

중간탑으로 가는 길목 주변이 워낙 넓은 땅이라서 그런지 밭과 논, 허수아비들이 가득했다. 허수아비들을 계속해서 신기하게 보던 헵토미노도 이젠 꽤 눈에 익었는지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날도 맑으니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잔잔해졌다.

?”

누가 먼저 낸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행들의 시선의 끝은 전부 똑같았다. 스무 걸음 앞 쪽에서 아까 본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저 분 목적지도 중간탑이려나요?”

일단 웬만한 길은 거기를 거쳐가니 중간탑까지는 당연히 길이 겹치겠지.”

같이 가자고 할까요?”

패치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딱 잘라냈다. 만약 목적지가 같다한들 목적이 다를 게 뻔하고 이 이상 임시로라도 일행을 늘리기 썩 달갑지 않다는 거였다. 거기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잔소리까지 추가되었다.

잔소리는 그쯤이면 충분함다~ 그래도 낯선 사람과 함께 길을 가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 아님까~?”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게 언제부터 여행의 묘미였나?”

위험이 아닐 수도 있잖슴까?”

뭐라 날카롭게 한 소리 더 하려던 패치는 저 아래 아이의 시선을 느꼈고 꾹 참아 삼켰다. 그런 패치의 반응에 묘한 웃음을 짓던 치트는 이 때다 싶었는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여행의 묘미에 대해 뭐라 더 떠들었다. 문제는 그게 패치의 속을 긁는 효과를 발생시켰고 아이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했을 때 말보다 빠른 주먹과 발차기가 날아갔다. 요란하게 맞고 넘어지는 소리에 모두가 뒤돌아봤고

저 혼자 발을 헛디뎌 넘어지더군.”

쓰러진 치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한 패치는 알아서 일어날테니 어서 가자는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픔다.....”

제대로 맞았는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치트는 다시 패치에게 딱 달라붙어 징징대기 시작했고 패치는 발을 한 번 밟아주는 걸로 마지막 경고를 건넸다. 그 이후로 다시 조용함이 찾아왔고 기계 옷을 입은 사람은 어느새 작은 점이 될 정도로 멀어졌다.

비록 제일 짧은 길이 아니어도 그나마 가까운 길이었으니 일행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도착했다. 기계 옷을 입은 사람도 목적지가 같았는지 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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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 일행들은 무덤 자리를 떠났다. 다만 여기 오기 전과 달라진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일행의 수였다. 한 명이 더 추가되어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물고기요?”

완전한 물고기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진짜 물고기처럼 보였거든.”

나무 막대와 바둑이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는 아이 헵토미노였다. 사실 아이를 일행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 또한 비밀을 알아냈을 때 어찌해야할지 곤혹스러워하기 바빴고 용사는 별 생각이 없었으며 나머지 둘은 표정만 서로 다르지 속은 냉정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같이 떠나게 된 건 아이 아빠 헥소미노의 부탁아닌 부탁 때문이었다.

 

“...떠날 거면 애도 데려가.”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당신 제정신인가?”

제정신 박혀서 하는 소리다 이 망할 것들아...! 애 키우기 귀찮아서 하는 말 같아!? 내가 왜 그 녀석들한테 맡기기까지 했는데!!”

격앙되어 끝은 거의 비명같이 내지르던 헥소미노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묻어버리고 싶은 것들아 부탁이다...데려가!!”

알았어요.”

대답한 건 퍼블리였다. 일행들의 시선은 헥소미노에게서 퍼블리로 돌아갔다. 그걸 느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은 퍼블리가 다시 한 번 이어 대답했다.

저희가 헵토미노를 데려갈게요.”

저 표정을 아이가 못 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도 직후 패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퍼블리가 어떤 심정으로 헵토미노를 데려가겠다고 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불안정해보이는 애 아빠한테 애를 그냥 두고 가기 마음에 걸렸던 거였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유가 있다 한들, 이미 한 번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까지 했다는 걸 봤을 때 자신들이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게 뻔하고 그럴 바엔 잠깐이라도 안면 있고 그 곳의 비밀도 알게 된 자신들이 데려가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 또한 천천히 들어왔을 게 훤했다.

다만 그런 사정과는 별개로 일행들이 하는 여행은 엄연히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심지어 그 목적의 결과가 연달아서 찜찜함을 남기는 중이었으니 애한테 좋은 영향을 끼칠 리가 없다는 점이 부가적인 이유였고 여행 자체가 어른들도 상당한 피로를 느끼게 하는데 애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가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어린아이치곤 체력이 꽤 되는 건지 아니면 꾹 참는 건지 같이 걷는 내내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럼 다른 데는요?”

아직 많이 가본 데가 없어서...”

둘은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가 먼저 데려가겠다고 한 말에 대한 책임감인지 아니면 드디어 정상적인 말동무가 생겨서인지 퍼블리는 헵토미노에게 이것저것 얘기를 건넸고 헵토미노는 굉장히 신기해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주로 일행 내의 대화 담당은 퍼블리와 치트 간혹가다가 궁금해하는 용사였는데 한 명이 더 늘어서 그런지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헵토미노는 열심히 퍼블리와 대화하고 간혹가다가 덧붙여 설명해주는 치트와 대화를 하다가도 무덤에서 떠난 이후로 쭉 아무 말이 없는 패치를 힐끔 쳐다보곤 했다. 아이의 불안함을 눈치 챈 퍼블리가 원래 말이 가장 없는 분이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내 말이 없던 패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음은 하얀 들판인가? 이번은 앞선 두 곳보다 거리가 꽤 되는군.”

꽤 멀긴 하지만 사막보다 더 가까운 곳이죠.”

하지만 이대로 계속 쭉 가기엔 체력 소모가 심하네.”

그렇게 말한 패치는 잠깐 생각에 잠긴 건지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치트는 그나마 마을이 연달아 있는 곳을 안다며 많이 힘들어지면 거기서 쉬자고 했다. 그러다 문득 패치가 툭 한 단어를 꺼냈다.

중간탑.”

?”

들판으로 가는 길목 가운데에 중간탑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맞나?”

맞슴다. 혹시 중간에 중간탑을 들르자는 검까?”

패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치트는 나쁘지 않다고 말하며 다음 목표 장소는 중간탑이라고 저 멀리서 토끼를 쫓아가는 용사에게 외쳤다. 퍼블리는 일행이 된 이후 처음으로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둘을 내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싫은 녀석이라고 해도 애 앞에서 평소처럼 말에 날을 세우는 건 아니라는 걸 패치는 잘 알았고 치트 또한 잘 알아서 자제하고 있었다.

중간탑은 어떤 데예요?”

헵토미노가 퍼블리를 올려다보며 물었고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정확히 어떻게 정의를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땅을 기준으로 땅의 중간에 세워진 탑일세. 사막과 환각의 숲 사이를 기준으로 중간이지.”

그 말을 들으니 퍼블리는 새삼 자신들이 끝에서부터 출발해서 끝까지 여행하는구나 깨달은 표정이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중간탑은 지식의 탑이라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정했다고들 하지만 중간탑이라고 오랫동안 불려왔으니 다들 중간탑이라고 부르니 위치를 물어볼 땐 중간탑이라고 말해야 알아들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게.”

사실 패치에게 있어서 여행하는 장소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학자들이 모이고 지식의 탑이라고 스스로들 붙일 정도로 책들이 가득한 탑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이름은 도서관이었고 땅의 중간에 위치해서 그런지 소식을 전달하는 이들이 거쳐가는 장소이기도 해 네 번째 이름이 거대한 우체통이다.

평소라면 두 번재와 세 번째 이름이 목적이어서 갔겠지만 이번의 목적은 네 번째 이름이었다. 힐끔 뒤돌아보니 마침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지 아님 처음부터 보고 있었는지 패치와 눈이 마주친 치트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지도들도 있을까요?”

마을들에 없는 게 거기 전부 있는 격이니 있을 거라 예상되네만.”

퍼블리의 눈빛에 바로 기대가 서렸다. 이쯤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낼 사람은 없었다. 이름만 들어봤지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기대감이 가득해보였다.

그럼 가지.”

반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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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제 날이 거의 저물어가니 진짜 가야겠다는 생각에 헵토미노를 바래다주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관리를 안 한지 꽤 오래 된 낡은 집처럼 변하자 심상찮음을 느끼고 들어가보니 집 안에 온기는커녕 사람 사는 흔적이 아예 사라졌다.

의자와 탁자가 있던 자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반들도 전부 사라져 휑한 모습이 폐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불안함을 느낀 헵토미노가 덜덜 떨기 시작했고 용사는 다른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그대로 나가려했다.

“...용사님 여기 맞아요.”

우웅? 다른 데?”

장소가 같아요.”

방 안까지 다 살펴봤지만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퍼블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불안을 넘어서 겁에 질린 헵토미노의 표정을 보니 애써 동요를 누르고 물었다.

일단 오늘은 우리랑 같이 갈래?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해가 지려고 하고 있고......여기 있기엔 좀 그러니까...”

애 혼자 여기 둘 순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한 효과가 있는지 헵토미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이가 끙끙 울면서 주위를 빙빙 돌더니 위로하듯이 앞발을 턱! 올렸다.

퍼블리와 용사, 헵토미노가 나무 무덤으로 도착했을 땐 해는 이미 진 상태였지만 먼저 도착한 둘이 불빛을 만들어놨는지 환한 상태였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보였다. 서 있는 사람은 세 명이었고 둘은 당연히 일행인 패치와 치트였지만 다른 하나는 헥소미노였다. 굉장히 분노한 모습을 보아하니 만약 사람이 한 명이거나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걸 들고 있었으면 진즉에 휘둘렀을 기세였다. 치트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패치의 표정은 싸늘했다. 굉장히 흉흉한 기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퍼블리였고 용사는 그 기세를 눈치채진 못했지만 퍼블리가 멈춰서니 덩달아 같이 멈춰섰다.

아빠?”

앞의 둘만 보고 있던 헥소미노가 돌아봤다. 헵토미노와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분노 가득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새로 바뀐 표정은 공포와 혼란, 죄책감이 가득해보이는 게 꼭 죄를 들킨 사람처럼 보였다. 퍼블리는 헵토미노를 잡고 있는 손을 놔줘야하나 아니면 이대로 계속 잡고 있어야하나 고민했다.

아빠?”

, 제 아빠예요.”

우웅~ 그르믄 할무니 어디 갔는지 물어보믄 되겠당!”

이어진 용사의 말에 헥소미노의 표정이 굉장히 창백해졌다. 덜덜 떨면서 천천히 다가오더니 열 걸음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서 묻기를

할머니라니...?”

저 그동안 할머니랑 같이 살았는데요...?”

...디서?”

아이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가락으로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 저기 숲 쪽의 큰 집에서요.”

비록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기색만으로도 시체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겠다고 생각한 패치는 저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퍼블리와 용사에게 눈짓했다. 퍼블리는 알아들었고 용사는 알아듣지 못했다. 헵토미노의 손 대신 용사의 손을 잡은 퍼블리는 천천히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헵토미노는 잡고 있던 손이 힘을 풀며 사라지자 흠칫 놀랐지만 바둑이를 안고 있는 데에 더 보탰고 헥소미노는 바로 눈 앞에서 그러는데도 보이지 않는 건지 신경쓰지 않았다.

...? 왜 할..머니랑 살고 있었던 거야...? , 너를 돌봐주던 사...람들은?!”

다그치듯이 외치는 말에 겁을 먹었는지 아이가 울먹이면서 말하길

..갑자기 사라졌는데...”

결국 헵토미노는 울음을 터뜨렸고 헥소미노는 그런 아들을 채 달랠 정신도 없는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오던 퍼블리는 패치의 옆에 파인 땅을 발견했고 그 속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나?”

“...헵토미노가 말해줬어요.”

용사가 엄마에 대해 묻자 헵토미노는 자기가 아주 어렸던 아기 때, 기어다니지도 못하고 요람 속에 누워있을 때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헵토미노의 집에 들르기 전까지 신시어와 대화했던 퍼블리는 소름이 돋았고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오기 전까지 고민했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설마...”

문득 떠오른 게 있는 퍼블리는 비석처럼 세워진 나무들을 둘러보고 굉장히 조심스러운 얼굴로 뒤돌아봤다. 헵토미노는 울고 있었고 헥소미노는 울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네.”

퍼블리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냉정하게 잘라내는 말이 날아왔다.

이미 지나버린 일들이고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이상현상이었고 저 자는 현실도피를 했을 뿐이네.”

현실도피라는 단어가 걸렸는지 움찔 돌아본 퍼블리의 표정은 울컥 올라온 화가 슬픈 표정에 아주 약간 섞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과한 말을 하냐고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뭐라 말하는 대신 다시 헵토미노를 돌아봤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건 강아지뿐이었다.

결국 헥소미노가 지친 얼굴로 울다 지친 제 아이를 데려가는 걸로 당장의 상황이 마무리 됐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현실이 버거웠던 건지 아니면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건지 무덤이 있는 바로 뒤쪽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끝난 거예요?”

황망한 물음이 빈자리를 채웠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듯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용사는 관 안에 누워있는 신시어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패치는 그런 용사를 비키게 한 후 삽을 들었다. 파헤쳐진 진실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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